사회진보연대


2020 겨울. 173호
첨부파일
09_기획연재_조유리.pdf

서울의 봄, 거리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보았나 1

김인숙 장편소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조유리 | 정책교육국장
1980년대 대학생들은 대체 왜 노동현장에 투신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학생운동이 스스로 변화를 준비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1979~1980년의 사건은 학생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학생운동가의 노동현장 투신은 1979~1980년을 거치며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번 연재는 김인숙의 장편소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를 통해 ‘서울의 봄’ 시기 학생운동의 변화를 살펴본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전3권)
지은이: 김인숙
출판사: 세계
발행일: 1987년 10월 1일

『`79~`80 겨울에서 봄 사이』(도서출판 세계, 1987)는 1980년대 전반기 학생운동을 경험하고 노동자 문예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문학인들의 집단적인 토론 끝에 만들어진 창작물이다. 후기에 따르면 내용은 토론을 통해 마련되었다고 해도, 글을 쓰는 작업은 한 명이 할 수밖에 없었기에, 당시 노동문학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김인숙 작가가 집필을 전담했다. 작가 김인숙은 1963년생으로, 1980년대 초반에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경험했다. 대학교 2학년이던 21세에 『상실의 계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개인적인 갈등과 번민을 다루는 작품을 쓰다가 학생운동의 경험을 통해 사회문제로 관심을 확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관심사는 조금씩 달라졌지만, 2020년 현재까지도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의 이야기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행동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시장의 상인들에서 시작하여 노동야학에 참여하는 노동자 영이와 그의 가족들, 운동권을 포함한 대학 내 다양한 학생들, 군인과 기업가 등 다양한 시각에서 1979년 겨울에서 1980년 봄 사이 한국사회 전반을 조망한다.

 이 글은 서울의 봄 시기 학생운동 내부의 논쟁에 초점을 맞춘다. 주요한 등장인물로는 대학생인 윤익, 종훈, 대현, 혜신과 그들보다는 연배가 조금 더 높은 민혁, 학준이 있다. 가장 비중이 큰 윤익은 1970년대 말 정치투쟁론과 서울의 봄 시기 학생운동의 전면적 투쟁론을 대표하는 전형적 인물이다. 이제 막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정치 서클에서 정치사업을 담당하고 학생운동이 더 정치적인 투쟁에 앞장서야 함을 강조한다. 한때 윤익과 함께 서클활동을 하기도 했던 종훈은 1970년대의 현장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학원 내의 시위보다는 민중의 힘을 고양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노동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교육했다. 

민혁과 학준은 윤익에 앞서 학원 내에서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동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민혁은 현재 (민주청년협의회로 추정되는) 청년사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작품 속에서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학준도 청년단체 활동을 하다가, 서울의 봄을 계기로 복학하여 학원민주화 투쟁에 힘을 보탠다. 학준은 서울의 봄 시기 학생운동의 단계적 투쟁론의 입장을 대표한다. 민혁, 학준 외에도 유신시기에 학교에서 제적된 학생들은 노동현장에 투신하거나 노동조합 외곽의 지원 단체에서 노동자운동을 지원하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나가지만, 주요한 시기마다 만나서 의견을 교류한다. 

 한편 대현과 혜신은 10·26 사건 이전까지는 직접적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학원민주화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한다. 4학년인 대현은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이후 총학생회장이 된다. 혜신은 운동권을 싫어하는 문학도였으나, 학준과의 교류 속에서 자신의 소시민성을 반성하고 학생민주화추진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혜신의 변화 과정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나중에는 윤익의 입장에 동의하며 전면적 투쟁론의 입장으로 발전한다.
 

1. 반유신운동

 
소설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한다.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어떤 선생님들은 학생들 앞에서 비통함을 표현하고 교실은 침울함에 빠진다. 또 어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10월 26일, 事必歸正(사필귀정)…… 이 말을 백 번씩만 외라’는 숙제를 낸다. 시장 상인들도 삼삼오오 모여 김재규가 반역자니, 대통령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노동야학에 모인 노동자에게도, 대학생 교사에게도, 정치서클에서 활동하던 윤익에게도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은 특히 대학생들의 반응에 주목한다. 윤익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다.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기뻐하는 것은 윤익의 동료들도, 또 윤익의 여자 친구인 은미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 내내 반유신운동을 집단적으로 표출한 것은 단연 학생운동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의 핵심이었다. 유신체제를 끝내기 위한 학생들의 처절한 투쟁을 살펴보면 학생들이 10·26 사건에 느꼈을 흥분을 이해할 수 있다.
 

1) 1970년대 반유신운동

1970년대 반유신운동은 누가 주도했는가? 먼저 정치권을 살펴보면, 상당수 유력 야당 정치인들은 이미 유신 이전에도 군사정부의 공작정치에 매수되어 있었다. 신민당의 당수로서 한국 사상 첫 영수회담을 주도하기도 했던 박순천 의원은 10월 유신 후 국토통일원 고문, 육영수여사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친정부 인사로 전향했다. 또 다른 신민당 주류였던 유진산은 ‘사쿠라’(야당 내에서 정권을 위해 일하는 정치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유명했다. 10월 유신 선포 직후, 정권은 신민당 국회의원들의 자택에 감시 목적의 병력을 배치하고, 반정부적 성향을 가진 일부를 연행해 고문했다. 그런데 유진산의 집만 경비를 보내지 않아 유진산이 오히려 경비를 보내 달라 했다고 한다. 이 정도로 신민당은 박정희 정권에 매수되어 있었다.

제도권 정치 내에서 야당이 비판적인 견제세력의 역할을 할 수 없자, 제도적인 영역 밖에서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정치인들과 종교인, 지식인들이 결합하여 재야세력이 형성되었다. 1971년 대선에서 신민당 후보였던 김대중 씨도 유신체제의 제약 속에서 재야 정치인이 되었다. 1973년에 유신정권은 재야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김대중 씨를 납치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 기념 미사와 기도회에서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등 각계 인사들이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은 정부 전복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씌워 재야 인사들을 대량 구속하였다. 김대중 씨는 이 사건으로 1980년 2월 29일까지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재야 정치인들은 반유신의 목소리를 높이고자 했지만, 지속적인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대표적으로 1976년 3·1절에는 명동성당에서 400여 명의 신자와 인사가 저녁 미사 후 ‘민주구국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를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으로 규정하고 김대중, 문익환, 함세웅 등 10명을 구속하고 윤보선 등 17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는 재야운동에 상당한 타격을 주어, 이후 반유신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2년이 지난 1978년 7월에야 다시금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이 발족했다. 그러나 이 역시 일부 지식인들이 참여한 것으로, 대중적 동원력을 확보할 수는 없었다.

1970년대 내내 노동자・사회운동의 역량은 미약했다. 노동3권을 제약하는 노동법과 어용노총의 방해로 인해 민주노조운동은 조직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 등 종교계의 노력으로 민주노조가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아직 정치적인 투쟁을 조직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농민조직 역시 유신에 반대하는 투쟁을 조직할 정도는 아니었고, 도시 빈민은 자신들의 조직을 형성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2) 1970년대 학생운동의 변화

따라서 1970년대 동안 반유신운동에서 동원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력은 학생운동밖에 없었다. 유신독재기 학생운동은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을 전개했던 전반기(1972~1974년)와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던 후반기(1975~1979년)로 구분할 수 있다.

유신전반기의 학생운동은 공개적이고, 대중적이었으며 조직적이었다. 유신 선포 직후인 1972년에는 학생운동이 약간 주춤했다면, 1973년은 학생들의 반유신투쟁이 가장 활발했던 해였다.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가장 먼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일어섰다. 박정희 정권은 즉각적인 탄압에 들어갔지만, 학생들은 더 거세게 저항했다. 180명이 연행되어 20명 구속, 23명 제명, 18명 자퇴, 56명 무기정학 선고로 이어지자, 서울대 법과대, 상과대뿐만 아니라 전국의 각 대학에서 학생들의 반유신투쟁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유신체제를 비판하며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과 처벌 백지화를 요구했다. 이를 위한 동맹휴학이 시도되는 과정에서 학교들 사이의 조직적 연계가 만들어진다. 1974년 초까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서강대, 동국대 등 주요 대학을 연결하고, 경북대, 전남대, 부산대, 강원대 등 지방의 핵심대학을 연결하고, 사회의 주요한 지식인, 재야세력과 연결하면서 학생운동은 2중 3중의 조직관계를 형성했다. 이처럼 1974년으로 넘어가면서 학생운동은 체계적인 반유신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신헌법이 공포된 다음해, 1973년 10월의 서울대 시위를 계기로 본격적인 반유신운동이 전개됐다.
 
그런데 이 계획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완벽하게 해체된다. 박정희 정권은 반유신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기 위해 학생시위에서 배포된 유인물의 배후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지목하고 관련자를 대대적으로 구속, 기소한다. 조사대상자만 1,024명에 달했고, 180명이 구속되었으며,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는다. 학교 간, 지역 간, 학생과 재야 간 조직적 연계가 정부의 탄압에 역이용되자 1970년대 후반기에는 지역 사이의, 학교 사이의 연대를 기피하게 되었다. 학생운동과 재야 사이의 연계가 끊어진 것도 이 시점이다.

대중적인 조직이 없는 상황에서도 학생들의 반유신투쟁은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나 한 번의 정치투쟁과 그에 후속하는 정권의 강경탄압은 학생운동 전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1975년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 씨가 유신체제를 비판하며 할복자살하자, 고 김상진씨를 추모하며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섰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9호로 맞섰다. 이 조치 직후 다수 학생이 구속, 유죄선고를 받으면서 학생운동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후 2년 정도는 학생들이 대규모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다. 

유신정권의 강경한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1977년을 전후로 비공개·비합법 정치서클 연합회가 형성되었다. 그 이전까지 이른바 ‘이념서클’도 학교에 공식적으로 등록한 학생서클이었다 별개의 비밀조직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이념 서클이 지하조직화되면서 학생운동의 대중적 접촉면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점차 운동권/비운동권 학생의 구분이 뚜렷해졌다. ‘언더’라는 이름으로 불린 정치서클 연합회 형태는 서울대 문리대에서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반유신 시위와 이후 정부의 강경진압으로 학생운동이 초토화되었다면, 서울대 문리대는 철저한 보안구조 속에서 정치선동과 학회 재생산을 분리했던 정치서클 연합회를 바탕으로 1970년대 후반 학생운동의 중심축이 될 수 있었다.

한편 이 시기 정치서클 내부에서 학생운동의 방향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바로 ‘정치투쟁론’과 ‘현장론’의 대립이다. 정치투쟁론은 반유신투쟁을, 현장론은 학생활동가의 노동현장 투신을 강조하는 입장인데, 당연히 두 입장 모두 어느 하나만 배타적으로 강조하고 다른 하나를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정치투쟁은 소수의 투사들의, 구속을 결의한 희생적인 정치선동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대학은 이미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일상적으로 감시했고, 형사기동대와 전투경찰대가 학내에 상주했으며 행정직원, 학도호국단, 교수협의회 역시 학생들의 활동을 제한했다. 학생운동가들은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정치 선동을 통해 단 몇 분간이라도 학생들을 모아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붙잡혀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거나, 붙잡히면서도 소리를 질러 그 시간에 학생들이 모이게 했고, 나아가 도서관이나 대강당의 위험한 유리창 난간에 매달려 유인물을 뿌리고, 주동자가 선언문을 읽는 동안 학생대중 앞에서 주동자를 엄호하는 방법도 강구했다. 

현장론을 옹호하는 입장도 큰 힘을 얻으며 학생의 야학참여가 확대되었다. 야학활동은 학생이 노동자와 직접 만나는 장을 제공했기 때문에 현장투신을 목표로 하는 학생운동 인자의 주요 활동토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초기 검정고시 준비를 위한 야학이 ‘생활야학’, 나아가 ‘노동야학’으로 성격이 변화했다.  
 

3) 반유신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소설 속 인물들

소설 속에서 재학생 윤익, 종훈의 차이, 또 제적된 민혁, 학준의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윤익과 종훈은 유신 후반기의 활동가로 비합법적이고 소수의 희생적인 투쟁에 익숙한 인물들이다. 이 중 윤익은 정치투쟁론을 대표하며, 종훈은 현장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윤익은 긴급조치 9호 시대에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정치 선동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서울의 봄 시기에도 더 강경한 정치 선동과 정치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노동자민중의 세력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던 종훈은 일회적인 정치투쟁으로 학생조직이나 노동자조직의 역량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한다. 종훈은 노동야학을 중심으로 노동자조직을 만들고 노동자들을 의식화하는 게 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정치투쟁론과 현장론 논쟁은 어느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설적 형상화를 위해 윤익과 종훈의 입장이 보다 극단적으로 묘사된 듯하다.)

소설 속에서 명확하게 설명되지는 않지만 가장 나이가 많은 학준은 민청학련 사건을 전후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른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긴급조치 9호 이후 지하화한 학생운동의 형태를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민주화 일정이 논의되는 변화한 정세에서 학생운동의 형태도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10·26 이후 대중조직의 발전, 학교들 사이의 연계와 대중운동으로의 전환의 필요성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다. 

학준보다는 어린 민혁은 긴급조치 9호 시기에 정치선동을 하다가 연행된 것으로 보인다. 민혁은 학준보다는 정치투쟁을 강조하며, 이후 서클 후배인 윤익과 종훈을 만나면서 꾸준히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학생운동을 직접 지도하기보다는 청년단체(민주청년협의회)을 중심으로 운동을 이어나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2. 10·26 사건


정치서클의 학생활동가들에게 10·26 사건은 충격 그 자체였다. 부산대 학생들의 정치선동에 분노한 민중들이 동참하면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부마항쟁이 직접적으로 유신정권을 끌어내리지는 못했지만, 결국 박정희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들이 그토록 바래왔던 민중항쟁으로 유신독재의 종식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점에서 학생들이 느낀 승리감은 대단했다.


1)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1970년대 후반 들어 박정희 대통령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노출되었다. 경제위기가 심화하고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저항이 발생했다. 재야의 유신헌법 개정 운동에 힘입어 국회에서는 신민당이 개헌운동을 주도했다. 군부의 장기집권에 대한 대중적 불만도 증가해, 1978년 총선에서는 신민당이 공화당보다 더 많은 표를 획득하기까지 했다. 선거개입을 위해 불법적인 정치자금까지 동원했던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다시 한 번 정치구도를 재편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는 더 나빠졌다.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이 여권, 즉 유정회와 공화당의 인사권을 쥐고 흔들면서 오히려 내분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에게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는 야당을 더욱 탄압하는 길이었다. 박정희는 신민당 의원 일부를 포섭하여 총재단의 활동을 방해했다. 1979년 8월부터 회사의 폐업조치에 항의하는 YH무역 노동자들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는데, 박정희 정권은 이를 빌미로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을 제명했다.

결국 박정희 유신 독재체제에 대한 불만이 김영삼 의원의 지역구인 부산에서 먼저 폭발했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부산 시내로 진출하자 고신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들이 동참했고, 퇴근한 회사원, 노동자, 상인들이 합류하여 민중항쟁이 되었다. 이 영향으로 10월 18일 경남대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언론 자유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고 마산항쟁으로 발전했다.

박정희 정권은 부마항쟁을 강경하게 진압했다. 그러나 집권층 내부에는 이미 균열이 생겨 있었다. 군부 세력 내부에서 시위의 진압방식에 대한 입장 차이가 발단이 되어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과 대통령 박정희를 총으로 쏘았다. 이른바 10·26 사건이다.

박정희의 죽음이 알려지자, 10월 26일 밤 11시 긴급 임시국무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는 유신헌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대통령 권한대행의 역할을 부여한다. 최규하 권한대행은 국가의 안전과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한다. 학생운동가, 일부 노동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는 죽었지만 유신체제는 유지된 것이다.

여야 막론하고 정치권은 모두 앞으로의 상황 전개를 예상하지 못하고 극도로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박정희라는 대통령 1인에 종속적이었던 유정회와 공화당은 구심을 잃었고, 당 조직 내 상황을 정비할 리더십이 없었다. 유신 시기 내내 각종 정보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신민당 역시 10·26 사태의 원인이나 해결과정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신민당은 10·26 사태로 군사독재의 정당성이 완전히 소멸했다고 보고, 신민당이 다음에 집권할 것을 낙관했다. (작품 중 민혁과 후배들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판단이 드러난다.) 

최규하 권한대행은 11월 10일 특별담화에서 유신헌법(대통령 궐위 시 3개월 이내 후임자를 선출한다)에 따라 대통령을 우선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이에 따라 다시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유정회나 공화당은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3개월 안에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국회의 논의에 따라 차근차근 민주화가 가능하리라는 것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2) 소설 속 학생운동의 반응

10·26 사건 직후, 민혁은 학교 후배들을 만난다. 민혁은 유신체제에서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이며,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이 구조를 바꾸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아직 군부세력은 건재하며, 그에 맞설 민주화세력은 미약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후 학생운동은 잔존한 유신세력과의 투쟁을 위해 어떻게 민주화세력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한영) 오히려 그렇게 좋았던 건 잠시였죠. 그가 죽었다는 것만으로는 완벽한 승리감에 도취될 수는 없었으니까요. 도대체 어떻게 죽은 것인지에 대해서조차도 잘 알 수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마냥 신나 있을 수만 있었겠어요. 조금 더 명확한 것을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우리의 긴장이 풀려서는 안된다고들 이야기했어요. 어쨌든 그가 죽었다는 것은 엄청난 사태임에는 틀림 없는 거고 그렇다면 그에 따른 변화도 엄청나게 이루어질 것이란 생각을 했죠. 그 변화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우리에겐 너무나 적었어요. 
(민혁) 그래. 그랬겠지. 그 날은 누구나 그랬을 거다. 그날 너희들이 겪었을 경험은 쉽게 상상이 간다. 그동안 십이륙에 대한 진상보고서가 보도되기도 했지만 매스콤 보도라는 것을 가지고서야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는 없지. 더욱이 그가 죽은 이후 지금까지 정국변화는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저들 내부의 갈등관계를 알아 낼 수 있을 만한 근거들은 아직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들은 앞으로의 변화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공화국의 권력구조가 대통령이라는 일인에게 집중되어 있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게다.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죽었든지 간에 삼공화국의 중심이 뽑혀져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이 엄청난 공백을 누가 메꿀 것인가, 이것이 바로 중요한 문제이고 앞으로 우리의 힘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할 새로운 국면의 성질인 것이다. 그럼 이제 이러한 새로운 국면을 전망해 보기 위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조건들을 생각해보자.
(기태) 얼마 전 신문에, 군부는 신속히 군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것이라는 발표가 나왔더군요. 그 말을 믿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 자체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상황으로 바라보았을 때 오일륙 당시와는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요. 군부가 다시 정치의 전면으로 나선다는 것은 삼공화국의 오랜 세월을 겪은 국민들에게 어떠한 명분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민혁) 그렇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신민당 쪽의 판단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군부의 전면 진출이냐, 아니면 신민당의 생각대로 민간정부의 실현이냐 하는 것이 과연 국민적인 명분에 의거해서만 판단될까는 의구스럽다. 
(기태)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떠한 기만적인 정권이더라도 국민들에게서 명분을 따내는 것은 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군부는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설득도 해낼 수 없습니다. 만일 군부가 다시 등장하려고 한다면 국민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더욱이 그의 죽음은 설혹 중앙정보부장 일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배경에는 와이 에이치 때부터 부마사태까지의 엄청난 민중들의 싸움이 있지 않았습니까. (1권 58~60쪽.)

이후 민혁은 ‘YWCA 위장결혼식’사건에 관여한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소설은 이 사건을 거의 있는 그대로 그린다.) 정보가 철저하게 통제되었기 때문에 민주화를 주장하는 청년 단체나 재야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분명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민혁이 보기에 유신체제의 정당성이 소멸했고, 유신체제는 즉각 사라져야 했다. 때는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관혼상제를 제외한 모든 옥내외 집회가 금지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해직교수, 재야 양심인사, 민주청년협의회 회원들은 민청협 회원인 홍성엽 군과 가상의 인물인 윤정민 양의 결혼식을 가장하여 YWCA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한다. 이에 따라 1979년 11월 24일 YWCA 회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가 열린다. 이날 모인 이들은 ‘독재 타도!’ ‘통대선출 반대!’라는 구호를 외쳤다. 

한편 민혁은 윤익과 함께 노동야학의 종훈을 찾아간다. 독재자가 사라진 만큼, 민주화를 위해 힘을 모아보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런데 종훈은 생각보다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윤익) “이번 사건에 우리 선배들도 많이 달려갔든데……니 알고 있나?”
(종훈) “와이 떠블유 씨 에이?”
(윤익) “그래. 알만한 이름들이 눈에 띄드라.”
(종훈) “그 사람들은 너무 조급했어.”
종훈은 무심결에 그렇게 말하곤 윤익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윤익은 역시 찡그린 얼굴이었다. 
(윤익) “그렇게만 말할 수 있겠나. 니는 그 사람들이 대책 없이 일을 벌인 기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만도 반성을 해야 할 기는 그 사람들이 조급했다는 기 아이고 나머지 우리들이 너무 느긋했다는 기 아이겠나. 아무도 나서 싸울라꼬 안 하는데 그런 싸움이 일어났다는 기는 억수로 대단한 일인기라. 더군다나 명망을 가진 사람들이 한 일인께네 시민들한테 미친 영향도 안 있겠나. 그기는 소시민들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결단의 모습이었든기라. 내는 박수를 쳐 주고 싶구만서도…….”
녀석, 여전하구나……종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더 이상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 또 의견다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가 한 말의 매듭은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훈) “지금은 지식인들끼리 모여서 그렇게 우루루 감옥으로 행진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어쨌든 네 말이 일면 옳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 충격효과…… 그건 있었겠지.” (…)
(민혁)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민혁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종훈은 그 말뜻의 진의를 몰라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시선을 보냈다. 민혁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민혁) “네가 너 자신을 지식인이라는 입장으로부터 부정해 내지 못한다면 말이다, 너는 끝내 관조적일 수밖에 없을 게다. 지식인으로서 노동자를 이해하려고 드는 게 과연 무슨 소용이 있지? 끝내 지식인인 채 노동자를 바라보려고만 든다면 노동자들이 지식인을 자기 편이라고 여길 수가 있겠니. 그건 다만 한 권의 서적이 필요하듯 지식인을 필요로 하는 관계에 지나지 않아. 너는 민중의 편에 서서 민중의 힘을 고양시키는 일을 한다고 한다만 그건 너 자신이 민중의 피와 살로 녹아들어가기 전엔 가능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은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의 힘을 부끄러워하라는 것은 아니다.” (1권 121~125쪽.)

노동야학 교사인 종훈은 대통령의 죽음으로 흥분한 노동자들을 진정시키며, 노동자민중운동의 역량이 아직 미약하여 당장 민주화로의 진전이 어려울 수 있음을 우려한다. 여기서 작가는 정치투쟁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있고, 종훈의 태도에 거리를 둔다. 작품은 암시적으로 종훈이 민중의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며, 민중들의 해방감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런 회의감 때문에 결국 현실에 대해 관조적인 태도를 보이며 끊임없이 그런 자신을 합리화한다고 지적한다. 

종훈과 마찬가지로 10·26 사건 직후 학생운동의 비공개지도부는 아직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학생운동은 1970년대 내내 반유신운동을 주도해왔지만, 10·26 이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마항쟁이 유신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을지언정, 민주주의 세력이 유신정권을 대체할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학생운동은 성급한 대중 집회로 조직력에 손상을 입을 것을 우려하여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학생운동은 재야의 움직임에 거리를 두고 정국을 살펴보기로 한다. 

민주화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는 일단 유지되었다. 정부, 공화당, 신민당 모두 각자의 필요에 의해 유신헌법을 일단 따르기로 결정했다. 12월 6일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를 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신민당은 최규하 대통령이 밝힌 그대로, 최규하 ‘과도정부’의 역할은 민주화를 위한 개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다음 정권에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당선된 바로 다음날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해제했고, 김대중 씨의 가택연금도 해제했다. 이러한 조치는 신민당과 재야의 낙관을 확신시켜주기에 충분했다.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의 비판세력이었던 신민당과 재야의 영향력은 확대하는 듯 보였다. 김영삼 씨는 신민당을 중심으로 국회활동을 전개한 반면, 김대중 씨는 재야세력을 중심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김영삼 씨는 10·26 사건 이후의 상황이 유신체제가 청산되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신민당의 집권이 역사의 순리라고 믿었다. 따라서 국회에서 개헌 논의를 주도하면서 민주역량이 신민당을 중심으로 뭉쳐야 함을 역설했다. 김대중 씨는 신민당 조직을 김영삼 씨가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민당에 부분적인 영향력밖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김대중 씨는 국민연합을 중심으로 재야세력을 규합하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3. 12·12 쿠데타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학생운동 대다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이제 학생운동 내부에는 민주화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고, 학생들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된다. 
 

1) 12·12 쿠데타의 발생

민주화를 바라는 일각의 기대와는 달리, 최규하 정권 내에서는 권력 쟁탈을 둘러싼 내분이 일고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하나회에 속한 군 장성들은 최규하 정권이 내각 개편을 완료하기 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들을 5·16 군사정변 당시의 군부와 구별하여 신군부라 한다.

10·26 사건 이후 비상계엄령이 유지되고 있었는데, 계엄령 하에서는 군부가 합법적으로 권력을 통제할 수 있었다. 계엄법 제11조는 “비상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내의 모든 행정사무와 사법 사무를 관장”함을, 13조는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 내에서 군사상 필요할 때 체포, 구금, 수색, 거주이전, 언론, 출판, 집회 또는 단체행동에 대하여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유신체제가 개편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군부가 더 이상 정권의 시녀노릇을 해서는 안된다’고 본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군지휘 체계를 차례로 개편해나갔다. 중앙정보부의 요원들을 대거 숙청했고, 대통령 경호실의 기구와 권한을 대폭 축소했다. 육군의 지휘부도 대폭 개편하여 유신정권 당시의 정치장교들을 배제했다. 
 
전두환은 12·12 쿠데타로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했다.

그런데 대통령 살인사건의 수사업무를 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를 활용하여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하고자 했다. 10·26사건의 수사를 맡은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관 직속기구로, 제도적으로 헌병, 군검찰, 정보부를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합수본부의 권한을 활용하여 10·26 사건 이후 자연스럽게 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군부와 정치의 분리를 위한 마지막 작업으로 전두환 합수부장을 포함한 정치장교들을 견제하고 통제하고자 했다. 그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주요 정치장교들을 보직 이동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정보를 사전에 파악한 전두환 합수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이 조각을 마치기 직전에 반역을 일으킬 것을 계획한다.  

(전두환 합수부장의 발표)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군은 그동안 박정희 대통령 각하 시해사건의 주범 김재규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김재규가 숨기고 있던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어 그 진부를 확인하기 위해 12월 12일 저녁 7시경 군수사관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출동했던 바 공관경비병과 경미한 충돌이 있었으나 정 총장의 신상에는 아무 이상 없이 현재 연행조사중에 있으며 이에 관련된 일부 장성도 구속조사 중에 있습니다. 
본인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시해 사건에 정승화 총장을 포함한 일부 군 장성이 관련돼 조사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안정과 질서를 유지해야 할 이 중대시기에 이와 같은 불상사가 있었던 것을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점진적인 정치발전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여 정부와 군은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니 일말의 의심이나 동요 없이 국민 여러분은 정부와 군을 믿고 각자 맡은 직분에 전념하여 주시기를 당부하는 바입니다. (1권 194~195쪽.)

최규하 대통령이 선출된 지 일주일만인 1979년 12월 12일 밤,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살인자 김재규의 심복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일부 장성을 체포했다. 이 조치는 대통령의 재가가 없는 상태에서 정승화 총장과 육군 지휘부를 연행한 후, 최규하 대통령을 감금・협박하여 사후적으로 재가를 받았고, 무력으로 육군본부와 중앙청을 점령했다는 점에서 쿠데타에 해당했다. 

일단 신군부는 바로 권력을 장악하기보다는 최규하 정권을 인정하고, 향후의 정치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 권력을 향한 의지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유지하여 정부 활동에서 군부의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했고, 동시에 합동수사본부의 권한과 활동영역을 확대해나갔다.

합수부가 언론을 완벽하게 통제했기 때문에, 합수부와 정부의 공식발표 외에는 어떤 정보도 알려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12월 12일은 신민당 총재단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이 취하되어 김영삼 총재를 비롯한 4명의 부총재가 법적 지위를 다시 회복한 날이기도 했다. 물론 그동안 김영삼 씨는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 불복하여 사실상 총재직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국회와 재야는 12·12사태의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정부 내부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국회에서는 개헌일정을 둘러싼 공방이 이어졌다. 최규하 대통령은 국민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헌법을 만드는 데 1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보고, 이에 따라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공화당은 정부의 입장에 동의한 반면, 신민당은 정치 일정을 빠르게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씨는 아직 정치활동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고, 재야도 침묵했다.


2) 학생운동의 판단

10·26 이후의 상황을 낙관했던 신민당이나 재야세력과는 달리, 학생운동은 12·12 군사쿠데타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들은 자연스러운 민주주의 이행이 어려울 수 있고, 언제든지 남아있는 군인 세력이 정권을 찬탈할 수 있다고 봤다. 학생들은 군부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서 민주세력의 역량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보기에 신민당도, 국민연합을 비롯한 재야도 뚜렷한 대안이 되지는 못했다.

소설 속에서 윤익은 신군부의 동태를 살피며 전면적 투쟁론의 입장으로 나아간다. 유신잔당세력과 민주화세력의 전면적 투쟁을 통해 유신잔당세력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윤익과 같은 전면적 투쟁론의 입장은 주로 복학생이 제기했다는 주장도 있다. 전면적 투쟁론에 서 있던 복학생들은 학생대중조직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미미했다. 전면적 투쟁론은 1980년 4월 이후 유신잔재세력의 재집권음모가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사북사태, 동국제강파업농성 등 노동운동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한다. 반면 소설 속의 윤익은 1970년대 후반 정치투쟁론을 강조하던 연장선상에서, 10·26 직후부터 일관되게 정치투쟁을 강조한다. 작가 김인숙 등이 학생운동의 단계적 투쟁론을 비판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윤익이라는 인물을 앞세워 전면적 투쟁론의 목소리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12월 말, 윤익은 서클 대표로서 다른 서클 대표들을 만나 신학기 활동방향을 논의한다. 그런데 다른 서클 대표들의 판단은 윤익과 달랐다. 

(12·12 군사쿠데타 직후, 신학기의 활동방향을 토론하기 위해 마련된 각 서클 대표들의 엠티 자리에서 사흘째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이 사태(12·12 군사쿠데타)에 대해서 심각하게 평가를 내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국의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고 봐야겠죠. 이 사태를 통해 세력 개편이 완결되었다고 한다면 문제는 복잡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막연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저들은 한 수 먼저 정국 주도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는 것이라고 봐야겠죠.”
“새로운 세력들에 대해선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아직은 미지수죠. 하지만 그들이 강경파쪽이라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어떻든 군 내부가 정리돼 간다는 건 심각한 이야깁니다.”
“만일 정국이 다시 경색된다면 우리쪽 대응은 어때야 할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요이. 이번 사태가 단순한 일이 아니란 것에는 동의하요만 그렇다고 혀서 쉽사리 정국이 경색된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은디요. 당분간은 좀 더 풀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야 쓰지 않겠습니까.”
“다음 학기의 활동방향은 이제까지의 극한 탄압의 상황 하에서와 같은 것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요. 이제는 좀 더 적극적인 대중활동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일반학생들과 유리된 상태에서의 싸움일방주의가 아니라 학생들과 밀착된 활동들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일반학생들의 정치적 의식을 고양시키고 그것을 민주화 열기로 승화시킬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그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학원 내의 민주화를 일차 목표로 두면서 학생들과 가까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학생회 부활이 그 하나일 수가 있겠죠. 학생회 부활의 가능성은 여러 가지 기미로 보아 크다고 생각됩니다. 제삼공화국 하에서 실시되었던 학도호국단제가 아니었습니까? 그것은 여러 차례 문제화된 바도 있고 해서 저쪽에서 지나치게 고수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싸움방향을 정하느냐에 따라 학생회 부활은 가능할 것이고 또한 반드시 따내야 할 문제입니다. 학생회 문제는 학원민주화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기만성을 폭로할 수도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학생회 부활을 목표로 해서 그 준비단계 활동을 벌여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시기와 앞으로의 시기를 연결시키는 활동이 필요합니다. 앞으로의 활동방향이 대중활동방향으로 잡힌다면 그것을 신학기에 갑작스레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방학 중에부터 신중한 준비를 해 나가야 합니다. 일반학생들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단체 형성 같은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라든가 하는 것을 만드는 것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 기존의 활동과 앞으로의 학생회 활동과의 매끄러운 연결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1권 195~197쪽.)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9호의 영향으로 1970년대 후반에 들어 정치서클은 지하화하고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구분이 뚜렷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은 있었을지라도,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두려워했다. 비공개 정치서클 대표들은 아직까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적인 운동의 발전을 확신하지 못했다. 먼저 학생운동의 형태가 대중적으로 변화해야 했다. 다수의 서클 대표는 단계적 투쟁론의 입장에서 학원 민주화를 일차적 목표로, 학생회를 부활시키고 대중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다수의 판단에 따라 80년 상반기에 학생회를 부활시킨다는 계획이 세워진다. 윤익은 여전히 학생들의 투쟁이 학원민주화에만 갇혀서는 안 되며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윤익은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어 답답함을 느낀다. (다음 호에 계속)
 
 
주제어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