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1 가을. 176호
첨부파일
03_특집_임필수2.pdf

2010~20년 10년의 야권연대, 역사와 교훈

전략적 야권연대의 최종 붕괴, 대안전략은 존재하는가 

임필수 | 정책교육실장

요약

이 글은 진보정당이 상당한 위기에 빠져있다는 진단으로부터 출발한다. 필자는 그 위기의 핵심적 원인이 ‘전략적 야권연대’의 최종적 붕괴에 있다고 본다. 2010년대 야권연대라는 전략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진보정당뿐만 아니라 민주당에 무엇이었는지, 그 과실은 누가 갖게 되었는지, 이 역사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결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직접적으로 선거연합을 추구했던 계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이후, 민주당이 권력을 빼앗겼던 이명박 정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2009년 경기교육감 선거에서 김상곤 후보의 당선을 야권연대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이때부터 야권단일화, 반MB(MB 심판), ‘무상’ 시리즈라는 선거 승리 공식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2008년 광우병촛불집회에 이어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정치적 시민운동’을 자처하는 시민운동 그룹이 출현하고 친노세력이 재집결하면서 야권연대를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은 야권연대 협상에서 이탈했지만, 노회찬, 심상정 그룹은 선거 실패를 계기로 야권연대를 통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확대’라는 선거법 개정을 달성한다는 ‘전략적 야권연대’ 구상을 세웠다. 이는 2010~2020년, 10년에 걸친 야권연대를 관통하는 핵심적 목표가 되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야권연대를 압박하는 ‘원탁회의’와 ‘혁신과통합’이 등장했다. 이는 곧, 잠재적 대선후보라 칭해지던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정치적 등장을 의미했다. 그는 ‘민주진보 연합정당 건설’을 내걸었는데, 그 결과는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으로의 정당개편과 양당의 야권연대였다. 2012년 총선에서 두 당은 사상 최초로 전국 선거에서 ‘당 대 당’, 즉 중앙 수준에서의 단일화 협상을 타결했다. 양당과 원탁회의가 서명한 정책합의문에는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등을 포함한 선거제도의 혁신을 추진한다”는 내용과 ‘공수처 등 검찰개혁’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이는 문재인 정부 시기에 나타날 공수처법-선거법 패스트트랙 공조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야권연대 합의 후 위기가 곧바로 찾아왔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의 지역구인 관악을 사례처럼, 야권연대 경선 과정에서 부정 의혹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 후 통합진보당 내부의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도 폭발하면서 대규모 탈당 사태가 발생하고 진보정의당이 창당했다. 이때부터 야권연대는 ‘무조건 선’이라는 인식이 민주당 내에서도 깨졌고, 정치인 안철수가 등장하면서 야권연대의 초점은 대선에서 민주당(문재인)과 안철수의 연대로 이동했다. 이때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고 사퇴하면서 ‘새 정치 실현을 위한 문재인-심상정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여기서 새 정치는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제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확대를 의미했다. 즉 문재인 후보 지지와 선거법 개정을 맞바꾸는 야권연대를 실행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과 정의당이 지역별로 당선 가능성에 대한 판세 계산에 따라, 선택적으로 야권연대를 합의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중앙 수준의 당 대 당 합의는 없었는데, 2012년 총선 야권연대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배경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하는 가운데, 2014년 지방선거나 재보궐선거에서 단일화된 후보가 떨어지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나눠먹기식 야권연대가 거부감을 일으킨다’, ‘야권연대 약발이 떨어졌다’는 비판과 자조가 나왔다. 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 김종인 체제는 야권연대에 무심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정의당은 매번 당 대 당 야권연대 협상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가치연대, 대안연대, 호혜연대’라는 표현을 쓰며 야권연대를 ‘전략적’ 수준에서 개념화하고자 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지지율 독주를 하게 되자, 2012년 대선에서 있었던 ‘문재인-심상정 새정치선언’과 같은 일이 다시 재연될 수 없었다. 심상정 후보는 ‘대선 후에 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이 연정하는 것이 국민 요구에 부합한다’면서, 정의당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면, 그 힘을 바탕으로 ‘개혁연립정부’ 구성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막판에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무섭게 추격한다는 말이 떠돌며, 다시 표가 문재인 후보 쪽으로 쏠렸다. “문재인 후보가 당선될 테니 정의당의 정신도 지켜달라”는 정의당의 논리를 충실히 따른다면, 표가 다시 문재인 후보 쪽으로 몰리는 게 오히려 올바른 일이었다. 

그렇지만 정의당은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전략적 야권연대’를 실현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것이 선거법-공수처법(검찰개혁 관련 법안) 패스트트랙 공조였다. 패스트트랙 국회 충돌로 정국이 어지러운 가운데 2019년 9월 조국 사태가 터져 나왔다. 정의당은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찬성했는데, 이는 선거법 개정을 최종 달성하기 위해 민주당과 공조를 원활히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심상정 대표는 조국 장관 임명 찬성이 ‘개혁전선’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자신을 변호했지만, 그 후 정의당은 대국민 사과 발언을 거듭해야 했다. 게다가 선거법과 공수처법이 통과하자마자 ‘개혁전선’은 붕괴했다. 2020년 2월경부터 민주당 내외곽에서 비례위성정당을 창당하려는 흐름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 창당과 함께, 2010~2012년부터 10년에 걸쳐 선거법 개정을 목표로 했던 진보정당의 ‘전략적 야권연대’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전략적 야권연대’, 그다음 단계는 무엇이 있나? 선거제도 재개혁을 위한 2라운드 연대를 추구하는 길은 불가능해 보인다. 정의당이 선거법 개정을 통해 선출 공직자를 크게 늘려보겠다는 전략에 몰두하는 동안 민주당은 야권연대를 통해 진보정당, 시민운동, 노동조합의 이슈, 정책을 자기 소유권 밑으로 옮기는 ‘적응 전략’에 성공했다. 야권연대를 통해 민주당, 특히 문재인-친노세력은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신자유주의 정책 반대’라는 진보정당의 이슈를 무마하고, 공수처 설치와 같이 시민운동이 제기한 개혁 이슈로 화제를 전환하며 이러한 전환에 진보정당이 동의하게 했다. 민주당은 나아가 양대 노총과 통합, 연대를 실현함으로써 노동 이슈에 대한 소유권을 빼앗아 왔다. 이제 민주당은 자신이 보수-진보 대립 축에서 ‘진보정당’이라고 아주 당당하게 주장한다. 야권연대의 최대 수혜자는 2011~12년 원탁회의, 혁신과통합(시민통합당)을 이끌고 민주통합당의 주축이 되었던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따라서 진보정당의 장기 비전은 현상태에 대한 총괄적 평가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특히 문재인 정부에서 진보정당의 행보에 대한 냉정한 자기 평가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그런데 진보정당은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이재명 후보와의 포퓰리즘 정책 경쟁에 뛰어든 것처럼 보인다. 이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 쪽과의 연대가 아니라 경쟁이기 때문에,  지난 10년의 야권연대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라면 진보정당이 민주당 집권세력 내 ‘좌파’ 그룹 정도로 인식될 수밖에 없고, 양당 포퓰리즘 정책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연대’ 시도로 급전환될 수도 있다. 이는 지난 10년에 걸친 ‘전략적 야권연대’의 과오를 반복하는 길을 열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남은 길은 문재인-이재명의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반(反)민주당 진보로 가는 길을 출발하는 것뿐이다. 
 
✽ ✽ ✽
 
이 글은 진보정당이 현재 상당한 위기에 빠져있다는 진단으로부터 출발한다. 2010~20년, 10년에 걸쳐 진보정당의 핵심 전략은 선거법 개정을 위한 ‘전략적 야권연대’였다. 하지만 그러한 전략은 2020년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을 거치며 최종적으로 붕괴했다. 필자는 새로운 장기 비전을 모색하려면, 먼저 지난 10년에 대한 철저한 평가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걸었던 길에 대한 평가가 없는데, 어떻게 새로운 출발점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이 글은 새로운 출발점을 찾기 위한 토론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난 10년간의 야권연대 흐름을 추적한다. 그로부터 그 흐름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특히 진보정당뿐만 아니라 민주당에게는 무엇이었는지, 그 과실은 누가 갖게 되었는지, 이 역사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결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글이 상당히 긴 편인데, 역사적 흐름을 가능한 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 결과다.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의 야권연대와 문재인 정부 시기의 ‘패스트트랙 공조’를 시기별로 살펴보면서, 어떻게 진보정당에서 야권연대가 전략적 지위로 점차 격상되었는지 검토한 후, 결론을 맺도록 하겠다.  
 

1. 노무현 정부 시기(2003-2007): ‘열린우리당 2중대’ 개념의 등장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직후부터 ‘신자유주의 개혁세력’, 즉 노무현 정부, 민주당과의 공조를 둘러싼 갈등이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표출되기 시작했다. 2004년 11월 1일,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는 ‘자주파’(범민족해방파)가 주도해 작성한 문건 「최근 정국 현안에 대한 대응」을 회람했는데, 이 문건이 유출되면서 논란이 폭발했다. 문건은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이 추진하는 개혁입법 통과에 대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특히 국가보안법)”, “열린우리당 2중대라는 소리를 들어도 대승적으로 행보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이것이 민주당과의 공조, 연대를 비판할 때마다 사용되는 ‘2중대’라는 표현의 시발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에 ‘자주파’가 대거 입당하여 지도부를 장악하기 전, 당을 주도했던 ‘평등파’(범좌파) 계열은 개혁세력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인해 진보정당 운동의 발전이 지체되어 왔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 노무현 정부는 비정규관계법 입법을 추진 중이었다. 따라서 평등파 성향의 고참 당직자들이 주도하여 당 지도부를 비판했다. 즉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에 올인함으로써 민생문제를 소홀히 하는 가운데 자유주의 개혁 세력과 차별성이 약화되었고, 이로 인해 당 지지율 하락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부 때까지도 민주노동당이 민주당(당시 대통합민주신당)과 선거연합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물론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당 외부에서 후보단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예를 들어 2007년 10월 17일, 진보개혁 성향의 소장학자 27명이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민주당 이인제, 창조한국당 문국현,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향해 ‘진보개혁세력의 후보단일화’를 촉구했다. 또한 10월 31일 ‘나라의 희망과 미래를 준비하는 시민사회단체협의회’(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상임대표 홍근수 목사, 불교평화연대 진관 상임대표, 새진보연대 이수호 대표 등)도 범여권의 단계적 단일화를 촉구했다. 

그렇지만 민주노동당은 독자 출마 의지가 강했다. 권영길 캠프 측은 “우리의 대선 전략은 ‘계급투표’와 ‘진보대연합’이라는 두 가지 명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권 후보 본인은 물론, 경선에서 그를 지지한 당내 ‘자주파’ 계열 역시 후보 단일화 의사가 없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는 2007년 17대 대선에서 71만여 표, 3.0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렇지만, 이는 2002년 16대 대선에서 권 후보가 받은 95만여 표, 3.9%보다 떨어진 수치였다. 대선 후 당내 갈등이 폭발하면서 분당사태가 벌어져 민주노동당-진보신당이라는 ‘진보 양당’ 구도가 형성되었다. 
 

2. 이명박 정부 전반부(2008-2010): 반MB연대를 표방한 야권연대의 시발점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직접적으로 선거연합을 추구했던 계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이후, 민주당이 권력을 빼앗겼던 이명박 정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대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가 각각 48.7%, 26.1%를 기록하며 민주당 후보가 압도적 표 차로 패배했다. 2008년 4·9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이 153석을 얻고 손학규, 박상천 공동대표 체제의 통합민주당은 81석을 얻어 의석수가 55석이나 감소했다. 이회창 총재의 자유선진당 18석, 친박연대 14석까지 포함하면 민주당의 처참한 대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민주당은 연전연패 끝에 역사상 최약체 야당으로 전락했으므로,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한미협상이 타결되고 광우병 촛불집회가 개시되면서, 점차 분위기의 반전이 일기 시작했다.
 

1) 2009년 교육감 선거와 재보궐선거: 야권연대 가동의 예비단계 


2009년 4월 경기교육감 선거에서 김상곤 후보의 당선을 야권연대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교육감 선거는 정당공천을 배제하기 때문에 야권연대가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범민주’ 후보단일화는 경기도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2009 경기희망교육연대’가 추진하여, 김상곤, 권오일 양 후보 측이 구성한 ‘범민주후보 단일화 수임위원회’가 절차와 방안을 합의했다. ‘범민주’는 김상곤 후보로 단일화된 반면, 보수는 4명이 출마했다. 김상곤 후보는 ‘전면 무상급식’과 ‘MB교육 심판’을 내세웠다. 보수 4명은 도합 59%를 얻었지만, 김 후보는 40.8%로 당선되었다. 이로부터 야권단일화, 반MB(MB 심판), ‘무상’ 시리즈라는 선거 승리 공식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2009년 10·28 재보궐선거도 야권연대가 화두에 올랐다. 열린우리당 출신 무소속 임종인 후보가 안산 상록을에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의 지지를 받아 야3당 단일후보가 되고, 민주당에도 단일화를 요구했다. 10월 22일,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는 단일화를 여론조사가 아니라 정치협상으로 해결한다면, “전국적 반MB연대를 위해 민주노동당 후보가 과감하게 결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즉 임종인 후보로 단일화하는 데 민주당이 동의한다면, 민주노동당이 경남 양산, 수원 장안, 충북 증평·진천·괴산·음성에서 낸 후보를 사퇴시키겠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안산에서의 단일화는 구체적 방식을 명시한 합의문까지 나왔다가 결국 무산되었고, 임종인 후보와 민주노동당 후보는 세 지역에서 완주했다. 

단일화 파기로 민주당 후보 당선이 불투명하다는 전망도 있었으나, 선거 결과 안산에서는 민주당 후보가 41%로 낙승을 거두었고, 임 후보는 15%로 3위를 기록했다. 수원과 충북에서도 민주당이 큰 표 차이로 낙승을 거두었다. 2009년에도 ‘반MB’라는 분위기가 워낙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로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해 극초반 레임덕을 겪고, 그 후 점차 회복되다가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 서거로 다시금 지지율이 크게 하락했다.) 다만 경남 양산에서 민주당 후보가 근소한 표 차이로 떨어져서 야권단일화를 주장했던 세력은 여기서 야권연대의 불가피성을 찾고자 했다. 


2) 2009~2010년 ‘정치적 시민운동’과 5+4회의


그런데 2009년 10월 21일, 김영환-임종인의 단일화 합의문에는 ‘희망과대안’ 백승헌, ‘민주통합시민행동’ 이형남이라는 이름이 동시에 올라왔다. 즉 두 단체가 합의를 중재했다. 이 중에서 ‘희망과대안’은 2009년 10월에 출범한 단체로,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과 같은 시민운동 단체의 1세대 원로, 중견급 인사를 조직하는 데 주력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백승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이 대표적 인물이다. 민주통합시민행동은 2009년 8월에 출범한 단체로, 주로 김대중 정부와 인연이 닿은 인물이 많고, 친노 인사 일부도 포진했다. 이창복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전 의장, 이재학 목사, 함세웅 신부, 조성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전 의장,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이다. 결국 1970~80년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했던 1세대 재야인사와, 그와 맥을 함께 하면서도 김대중 정부에서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된 시민운동 1세대 인사들이 주축이 된 단체들이 야권단일화를 중재했던 셈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중재는 실패로 끝났다. 2009년 10월 재보궐 선거 후, 박원순 희망제작소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압도적 승리를 했다고 희희낙락하는 민주당을 보면 뺨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 (경남) 양산에서도 이겨야 했다… 그런 측면에서 정치권은 분명히 반성해야 한다. 그걸 반성하게 하는 건 시민의 힘이다.” 

이들은 보궐선거 후 진보개혁 진영의 선거연합을 주도할 수 있는 책임 있는 논의기구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고, 그 결과 5+4회의가 성립되게 되었다. 여기서 5는 5개 정당, 즉 민주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을 의미하며, 4는 4개 단체, 즉 희망과대안과 민주통합시민행동, 그리고 ‘시민주권모임’, ‘2010연대’를 뜻했다. 
 

시민주권모임도 2009년 10월에 정치시민운동을 표방하며 출범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뜻을 계승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고, 참여정부 인사나 노사모 회원이 많이 참여했다. 대표는 이해찬 전 총리였다. 2010연대는 2009년 11월 출범한 단체로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유덕상 민주노총 전 수석부위원장처럼 한국진보연대와 민주노총의 전현직 간부들이 많이 참여했다. 결국 시민운동 1세대, 친DJ계, 친노계, 한국진보연대-민주노총 상층인사 일부가 결집한 조직이 야권연대를 주도적으로 끌고 나가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단체들은 대부분 2009년 8월부터 11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결성되었다는 점에서, 사전에 서로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민운동이 2009년 후반부부터 ‘정치적 시민운동’을 표방했다는 사실이다. 이 당시 하승창 희망과대안 상임운영위원은 시민운동이 ‘정치적 중립성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강박을 이미 벗어던졌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 논리는 “정당과 정파로부터 독립적인 시민운동 고유의 정체성을 지킨다, 그러나 정치적 사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정치적 불개입은 정치적 중립성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정치적으로 개입하면서도 정치적 중립성을 지킬 수 있다는 기묘한 논리였다. 

사실 그 이전에도 시민운동 단체가 ‘정치적 불개입’ 노선을 줄곧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2000년 총선을 앞두고 460개 단체가 결집한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은 정치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상자 중 102명, 72.3%가 낙선했다. (당시 460개 단체가 모두 공동대표자를 내기로 했으나, 상임공동대표를 낸 단체는 문화연대, 언론개혁시민연대, 참여연대, 민주언론시민연합, 한국YMCA연맹, 한국여성단체연합, 환경연합이었다.)

그렇지만 총선시민연대가 각 당 후보의 자질과 정책에 대한 ‘객관적’ 검증을 표방했다면, 이제 시민운동은 야권연대를 직접적으로 촉구, 중재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나아가 시민운동 1세대의 대표격인 박원순 씨는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박영선, 민주노동당 최규엽과의 후보단일화 경선을 거쳐 단일후보가 되어 당선되었다. 박원순 후보는 2011년 보궐선거에서는 민주당 입당을 고사했으나, 2012년 2월 23일 민주당에 전격 입당했다. 2009~10년부터 박원순 이사장이 걸은 길은 ‘정치적 시민운동’이 앞으로 걷게 될 정치적 행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3) 5+4회의: 가치연대인가, 선거공학인가


대선과 총선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민주당은 2008년 광우병촛불집회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부활을 모색했다. 2010년 1월에는 친노 세력의 일부가 결집한 ‘친노신당’, 즉 국민참여당도 창당을 선언했다. 2010년 1월부터는 5+4가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했다. 

이때 가장 곤욕스러운 위치에 있던 측은 진보신당이었다. 진보신당이 민주노동당과 분당할 때의 근거 중 하나가 ‘자주파’ 세력이 민주당에 대해 선명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종속적 태도로 임한다는 것이었다. 진보신당으로서는 창당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단일화 협상을 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2009년 12월 15일 노회찬 대표는 야권연대 선거연합의 전제조건으로서 △노동시장 유연화 반대, △한미FTA 저지, △고교 및 대학 평준화, △무상의료 확대, △대선 결선투표제,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제 전면도입을 내걸었다. (조건 중에 대선 결선투표제와 비례대표제가 뒷부분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문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룬다.) 사실 이러한 조건은 민주당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협상에 응하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상황에 따라 협상을 깰 수 있는 복선을 깔아두자는 의도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민주노동당도 선거연합이 △노동자·농민의 삶 개선, △민주주의 회복, △남북관계 발전이라는 세 가지 과제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제는 사실 매우 추상적이었다. (예컨대, ‘노동자·농민의 삶 개선’이라는 항목에는,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FTA 문제가 포함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전략과제가 연합의 전제조건이라고 못을 박은 것은 아니었고, “향후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즉 민주노동당은 선거연합에 대해 진보신당에 비해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3월 3일에 5+4의 잠정합의가 나왔는데, 여전히 불확실성이 많았다. 진보신당의 입장에서 볼 때, 비정규직, 사회복지세 신설, 한미FTA 문제 등등에 대해서는 이견이 확인되었고 의견 접근도 이뤄지지 않았다. 정책적 쟁점이 해소되지 않았을뿐더러 광역단체장 후보 조정 문제도 난항을 거듭했다. 진보신당을 제외한 나머지 4당은 후보 조정이 가능한 곳은 합의로 풀되, 합의가 안 되면 경쟁방식을 취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진보신당은 이것이 수도권, 즉 각각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에 출마한 노회찬과 심상정 후보를 주저앉히려는 의도라고 반발했다. 이러한 진보신당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3월 3일 합의문은 수도권 1곳, 호남 1곳에서 민주당이 아닌 다른 당의 후보도 단일후보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로 나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진보신당 내에서는 이런 합의에 대해서도 반발이 나왔다. 선거연대의 기준이 “가치에서 선거공학으로 바뀌었다”는 비판이었다.

5+4 협상은 그 후 두 차례의 심각한 고비가 있었다. 먼저 3월 16일 진보신당이 5+4 탈퇴를 선언했다. 나머지 정당이 수도권에서 경쟁을 통한 단일화를 합의하는 분위기에서,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출마를 강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후 진보신당이 빠진 채로 4+4 협상이 이어졌으나, 4월 20일, 경기도지사 경선 규칙을 두고 민주당(김진표)과 국민참여당(유시민 후보)이 합의에 실패하면서 4개 단체는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한 언론은 “예측 가능한 결말 맞은 야권연대 참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진보신당이나 국민참여당으로서는 민주당이 양보하지 않는다면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갈 수밖에 없는 반면, 민주당으로서는 국민참여당과 진보신당을 배려해서 수도권 두 곳을 모두 다른 당 후보에게 내주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객관적 상황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4월 29일 김진표, 유시민 후보가 단일화에 다시 전격 합의하고 유시민 후보가 미세한 차이로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이변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결국 본선에서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4개 단체는 5+4 협상의 최종결렬을 선언했지만, 지역별 협상은 계속되어서 성사되기도 하고, 결렬되기도 했다. 특히 인천, 경남, 울산에서 지역별 협상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훗날 정세균 민주당 전 대표는 이렇게 회고했다. “협상대표단이 훌륭한 협상안을 만들었고, 전국적으로 특정 지역을 빼놓고는 거의 다 선거연합에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경기와 서울에서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에서 연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연대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면 대승을 했겠지만, 하늘의 뜻은 한꺼번에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즉 민주당이 전 대표의 입으로 6·10 지방선거는 기본적으로 민주당이 참여한 야권연대 선거였고, (수도권 서울, 인천, 경기 중에서 인천만 이기긴 했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상당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평한 셈이었다. 


4) 2010 지방선거 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엇갈린 명암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야권연대에 적극적이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은 5+4회의에 참여한 정당 중에서 가장 ‘돈독한’ 관계를 끝까지 유지했다. 민주노동당은 자력확보가 쉽지 않은 기초단체장과 지방의원 몇 곳의 승리에 만족할 태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당 협상대표였던 김민석 최고의원은 5+4 협상 결렬 선언 이후에도 “이번 협상에 성의 있게 임했던 민노당 등과 가능한 협조를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실제로도 민주노동당은 이전 선거에 비해 당선자가 늘어났다. 기초단체장이 0석에서 3석으로, 광역의원이 15석에서 24석으로, 기초의원이 66석에서 115석으로 늘었다. 특히 경남에서는 독자적인 교섭단체 구성이 가능해졌다. 우위영 대변인은 결과를 두고 “야권의 승리를 넘어, 우리 국민의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 반면 진보신당은 광역의원 3석, 기초의원 22석을 얻는 데 그쳐 명확한 대조를 보였다. 선거 결과만 두고 보면, 야권단일화를 밀고 나가는 길이 “꿩도 먹고 알도 먹는” 훨씬 더 성공적인 길로 보였다. 

그러나 야권단일화로 인해 민주노동당은 서울, 경기에서 민주당에 표를 몰아주는 결과를 낳았고, 정당 득표율이 각각 3.8%와 4.6%에 머물렀다. 서울과 경기의 광역의원이 전멸하고 기초의원도 소수에 불과해 민주노동당의 존재감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다른 한편, 진보신당은 5+4회의에서는 이탈했지만, 야권연대를 두고 내홍이 이어졌다. ‘지역별 야권연대’가 문제가 된 것이었다. 부산시당과 고양시에서 민주당 후보를 단일후보로 합의하는가 하면, 이용길 충북도지사 후보가 이에 항의하며 후보직과 당 부대표직을 사퇴했다. 여기에 심상정 경기도지사 후보가 투표를 3일 앞두고 유시민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전격사퇴했다. 선거가 끝난 후 진보신당 전국위원회에서 심상정 후보를 징계하기 위한 ‘지방선거에서의 해당행위에 대한 특별결의안 채택의 건’이 발의되었으나 59명 중 23명의 찬성으로 과반을 획득하지 못해 부결됐다. 반면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는 독자완주를 했는데, 한명숙 민주당 후보가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에게 불과 0.6%p 차이로 패하자 사퇴 또는 단일화를 하지 않은 노회찬 후보(3.3% 득표)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어났으며, 일부 당원이 탈당하기도 했다. 선거를 앞두고 지역별로 야권단일화 압력이 가해지자 매우 큰 동요,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5) 소결: 5+4 탈퇴 후 노회찬, 심상정 그룹의 방향 전환 


위에서 언급했던 6·2 지방선거 평가토론회 자리에서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는 앞으로 그의 행보를 시사하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먼저 선거 결과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처음 출마를 준비할 때는 지지율 15%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4%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머지 11%는 어디로 간 것인가 황당했습니다. 단일후보로 이겨야 한다는 절박감이 한쪽으로 표가 몰린 것이라고 봅니다. 야권연대 논의나 결과가 유권자의 열망에 비춰 그 기대에 못 미친 점이 있다는 점을 반성 차원에서 말씀드립니다.” 그다음 발언이 더 시사적인데, “5+4 협상은 실리 조정으로 나타났던 것이고, 저희가 가진 독특한 처지가 조정할 실리가 없는 처지라는 것도 협상에 임하는 자세에 반영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왜 꼭 실리는 실리로 조정되어야 하는가, 실리를 잃더라도 정책을 얻는다거나 하는 일이 적극검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야권연대의 불가피성은 유권자의 선택으로 검증되었다, △그런데 진보신당은 야권연대를 통해 얻을 실리가 없었기 때문에, 즉 누구도 진보신당에 중요한 자리를 양보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야권연대를 손쉽게 박차고 나간 측면이 있다, △야권연대를 통해 광역단체장과 같은 큰 자리가 아니더라도, 진보신당이 추구하는 정책이라는 대가를 추구하는 길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정책적 대가’는 무엇일까. 그것은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확대’라는 선거법 개정이 될 것이다. 이는 진보신당, 더 정확히 말하면 곧 진보신당에서 이탈해서 통합진보당으로 합류할 노회찬, 심상정 그룹의 핵심적 아이디어가 될 것이다.   

사실 민주노동당의 ‘자주파’ 그룹에 야권연대는 이미 1980년대부터 ‘민주대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항상 실행 중인 노선이었다. 1987년 직선제 도입 이후, 이는 1987년 대선,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분명히 표현되었다. 1997년 대선에서는 전국연합이 ‘민주적 정권교체와 민족민주운동의 정치세력화를 동시에 달성한다’는 이중적 목표를 제시했다. 하지만 전국연합은 김대중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점쳐질 때는 국민승리21 권영길 선본으로 들어왔다가, DJP 연합으로 김대중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다시 빠져나가 정권교체를 위한 활동에 돌입했다. 그 이후로는 ‘민족민주운동의 정치세력화’에 방점을 찍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여러 상황, 여건에 따라 태세를 돌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즉 자주파에게는 과거의 역사적 경험과 그에 따른 인적 네트워크, 정서적 공유감이라는 측면에서나, 남북관계를 중시하는 정치적 관점이라는 측면에서나 야권연대는 새삼스러울 게 없는 익숙한 일이었다. 반면 자주파와 대척점에 있던 ‘평등파’에게 야권연대란 매우 낯선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노회찬, 심상정 그룹은 ‘자주파’와는 다른 맥락에서, 즉 선거법 개정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다는 명분으로 ‘전략적 야권연대’를 지속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3. 이명박 정부 후반부(2011~2012): 야권연대의 최전성기에 곧바로 찾아온 위기 

 

1) 2011년 4.27 재보궐선거: 야권연대 최초의 ‘중앙타결’ 


2011년 2월 22일 ‘재보선 승리를 위한 야권연합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이번에는 4+5의 형식을 취했는데,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초청으로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4개 정당과 민주통합시민행동, 시민주권, 희망과대안, 한국진보연대, 6·15공동선언실현 남측본부 5개 단체가 참여했다. (정당에서는 창조한국당이 사라지고, 단체에서는 2010연대 대신에 한국진보연대와 6·15남측본부가 참여했다.) 

야4당이 중앙 차원의 협상 대상으로 정한 곳은 국회의원 선거구 3곳과 강원도지사였다. 4월 13일 야4당 대표는 협상 완전타결을 공식 선언했는데, 강원도지사, 성남 분당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가, 전남 순천은 민노당 후보, 경남 김해 후보는 국민참여당 후보가 야권 단일 후보로 나서기로 했다. 선거 결과, 이중에서 경남 김해를 제외하고는 단일화된 후보가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전남 순천에서 민주노동당 김선동 후보가 6명의 무소속을 누르고 당선되어 “야권연대의 힘이 증명되었다”는 평가가 힘을 얻었다. 게다가 이번 협상은 ‘중앙협상의 최초 타결’이라는 타이틀도 붙었다. 


3) 2011년 원탁회의와 ‘혁신과통합’: 문재인 이사장의 등장과 정계개편    

 
2011년 재보궐선거가 끝난 후, 이제는 2012년 총선을 겨냥한 야권연대 흐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2011년 7월 26일 출범한 ‘희망2013 승리2012 원탁회의’는 시민사회, 종교계 원로와 시민정치운동단체 대표 21명으로 구성되었다. 서울대 백낙청 명예교수와 함세웅 신부, 이해찬 전 국무총리,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문성근 국민의명령 대표와 함께, 잠재적 대권주자로 꼽히는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이해찬 민주당 고문도 참석했다.
 
 

이들 중에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이해찬 전 총리는 2011년 9월 6일, 야권대통합 추진 모임인 ‘혁신과통합’ 발족을 주도하기도 했다. 상임대표는 문재인 이사장이었다. 여기에는 한명숙 전 총리, 김두관 경남지사, 문성근 ‘국민의명령’ 대표, 김기식·남윤인순 ‘내가꿈꾸는나라’ 공동준비위원장, 조국 서울대 교수가 참여했다. 
 

이때부터 문재인 이사장의 정치적 행보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노무현재단 상임이사와 이사장을 연달아 맡았고, 2011년 6월 『문재인의 운명』이란 책을 출판하고, 탁현민 씨의 도움을 받아 전국 순회 북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혁신과통합 상임대표를 맡으며 문재인 이사장은 민주당과 진보정당에 ‘민주진보 연합정당 건설’ 동참을 촉구했다. 그는 11월에 차기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다음 해 민주통합당 후보로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민주진보’의 정계 개편은 민주통합당(2011년 12월 16일 창당)과 통합진보당(2011년 12월 3일 창당)으로 양분되었다. (통합진보당에 합류하지 않은 그룹이 진보신당으로 남아있기는 했다.) 혁신과통합은 문재인, 이해찬 외에도 문성근, 김기식, 창조한국당·국민참여당 탈당파,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박용진 그룹을 주축으로 시민통합당을 꾸려서 민주통합당에 합류했고, 여기에 한국노총도 참여하여 결국 민주당, 혁신과통합(시민통합당), 한국노총 3자가 하나의 당을 세웠다. 

반면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이탈파(노회찬, 심상정, 조승수)는 ‘진보통합’을 명분으로 삼자통합을 성사시키고 민주통합당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이때 민주노동당은 한편으로는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통해 높은 지지율을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통합당과의 반MB 야권연대를 통해 원내 교섭단체 수준의 국회의원을 배출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물론 진보정당이 ‘친노’ 세력인 국민참여당과 통합한 게 적절한 처사인가를 두고 상당한 논란도 있었다.
 

3) 2012년 총선: 전국선거에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당 대 당’ 합의 성사 


사실 ‘원탁회의’와 ‘혁신과통합’은 그 구성원이 상당수 겹칠 정도로 지향이 같았다. 다만 혁신과통합이 정당으로 갔다면, 원탁회의는 ‘민주진보정부’의 가치와 비전을 제시한다는 명분으로 정책을 생산하고 야권연대를 중재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들은 2012년 1월, 야당과 시민단체의 의견을 모아 스무 가지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이들은 야권의 정치협상을 촉구하는 거간을 자임했는데, 2월 20일 민주당 한명숙 대표와 통합진보당 이정희, 심상정, 유시민 공동대표를 만나 야권연대를 촉구했고, 2월 28일, 3월 3일 두 차례나 연이어서 ‘야권연대 실현을 위한 비상시국회의’를 열어 양당 대표의 야권연대 협상을 요구했다.   

그 결과 3월 10일, 진통 끝에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 합의문이 나왔다. “새누리당과 일대일 구도를 실현하기 위해 상호합의된 예외 지역을 제외한 모든 선거구를 야권연대 지역으로 선정한다. 합의에 따라 각 당은 후보용퇴 지역을 선정하고, 그 외 지역은 단일화 경선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민주당이 16개 지역구를, 진보당이 69개 지역구를 양보하는 한편, 76개 지역에서는 경선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3월 10일 시점에서 공천이 확정된 후보가 용퇴하는 지역으로만 보면 민주당은 9곳, 진보당은 58곳이었다.) 즉 민주당이 일부 지역구에서 후보를 내지 않음으로써 통합진보당에 의석을 양보하되, 나머지 지역 대부분에서는 민주당 후보를 야권단일후보로 한다는 말이었다. 재보궐선거가 아닌 전국선거에서 중앙 차원에서 ‘당 대 당’ 합의를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신기원을 연 셈이었다.  

또한 양당과 원탁회의가 서명한 ‘범야권 공동정책합의문’도 나왔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20개의 약속’이라는 정책문서가 담겼다. 이는 원탁회의가 생산한 스무 가지 정책방향을 기본골조로 삼았다. 즉 야권연대의 정치적 의제는 원탁회의가 생산한 셈인데, 원탁회의와 혁신과통합은 그 인적 구성이나 지향을 볼 때 쌍둥이 조직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이들이 야권연대의 기본적 내용을 구성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별도 항목으로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등을 포함한 선거제도의 혁신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야권연대에 바라는 통합진보당 측의 염원이 담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수처 등 검찰개혁’이라는 항목도 있는데, 이는 문재인 정부 시기에 나타날 공수처법-선거법 패스트트랙 공조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2012년 총선 야권연대는 그 내막을 보면 민주당, 통합진보당 양당 협상에서 정책적 합의보다는 어떻게 의석을 나눌 것이냐는 문제가 훨씬 어려운 문제였다. 1월 17일, 심상정 공동대표는 ‘정당 지지율만큼 의석수를 배분하자’고 제안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얻은 13%의 정당 지지도를 의석수로 환산하면 40석 가까이 되었다. 반면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는 전략공천을 최소화하면서 완전국민경선을 통해 단일후보를 선출하자고 맞받아쳤다. 
협상 과정에서 통합진보당에서는 강남 제외 수도권 10곳, 호남 6곳, 기타 4곳까지 20곳의 공천을 요구했다. 당시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 10명 당선을 예상하며 지역구까지 합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목표로 했다. 반면 민주통합당에서는 심상정(고양 덕양갑), 노회찬(노원병), 천호선(은평을), 이정희(관악을), 김미희(성남 중원), 오병윤(광주 서구을), 김성진(인천 남구갑)까지 6+1을 주장했다. 당시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중 당선권인 10위 내에 있는 인사들이 대체로 NL계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국참당 계열을 비롯해 나머지 계파는 민주당과 협상에서 지역구를 더 따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협상이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양당 협상이 난항에 이르자 통합진보당 고위 관계자는 “민주당을 수도권 60곳에서 떨어뜨릴 수 있다”고 말하며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 전체를 두고 보면,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이끄는 새누리당이 152석으로 과반을 유지했고, 민주당은 127석을 얻어서 여소야대 창출에 실패했다. 통합진보당은 지역구에서 노회찬, 심상정, 이상규(이상 서울), 김미희(성남 중원), 오병윤(광주 서구을), 김선동(전남 순천·곡성), 강동원(전북 남원·순창) 7명과 비례대표 6명, 총 13명이 당선되었다.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통합진보당의 조촐한 성과’라고 평가했다. “야권연대를 하지 않았던 2004년 민주노동당과 비교해보아도, 이번 총선 결과는 (구 민주노동당 당권파와 심상정, 노회찬 후보에게는 승리일 수는 있어도) 통합진보당에게 승리적인 결과가 아니다. 총 의석은 3석 증가하는 데 그쳤고 정당 지지율은 2.7% 감소했다. 특히, 국민참여당과의 무리한 합당과 민주통합당과의 선거연합으로 인한 민중운동의 분열과 정체성 상실이라는 비용을 고려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4) 2012년 총선과 민주노총: 야권단일후보 지지와 민주당-민주노총 정책협약


노동조합 쪽을 살펴보면, 민주노총은 정당명부 비례대표의 경우 통합진보당에 집중투표를 하자고 하면서도, 지역구에서 야권단일후보를 지지하고 민주당과 정책협약을 체결하는 이중적 경로를 채택했다. 특히 민주통합당과 정책협약은 민주노조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을 뿐더러, 정책협약의 형식과 내용도 놀라웠다. 통합진보당, 진보신당과 체결한 정책협약과는 달리 협약은 민주통합당이 민주노총의 요구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민주노총이 민주통합당의 노동정책을 지지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민주통합당-민주노총 협약은 “제19대 국회에서 민주진보 진영의 원내 제1당 의석 확보 및 교섭단체 구성 등 안정적인 의회 내 절대다수 의석 확보를 담보하는 총선 승리를 위해 적극 협력”한다며, 민주노총이 민주통합당의 당선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도 명시했다. 그에 따라 민주노총 위원장이 민주당 유세에 참여하는 초유의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리하여 2012년 총선 야권연대는 ‘정치적 욕망’의 분출구가 되었다. 《참세상》의 한 기사는 이렇게 묘사했다. “진보대통합에 이은 야권연대 상승효과는 잘만하면 비례후보 당선권에 안착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높였다. 비정규직은 5천 원만 내면 당권을 얻을 수 있었고, 노동조합 집단가입을 통한 조직관리가 횡행했다. 진보정당의 자랑거리였던 진성당원제는 정파의 피라미드식 조직관리 모델로 전락했고… 야권연대 수렁엔 민주노총 출신 노동자 후보들도 빠져들었다. 비례 후보자들이 속한 산별노조(연맹)는 당원 배가라는 이름으로 수천 명 집단가입 기자회견과 정책 협약식을 이어갔고, 결국 조직적 표 동원으로 민주노총 산하 조직마저 비례경선 부정 수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통합진보당에선 수도권과 부산, 울산, 경남 등에서 야권연대 후보만 되면 당선은 보장됐다는 말이 떠다녔다.”
 

5) 야권연대 경선 파행: 야권연대 합의 후 곧바로 찾아온 위기


어렵사리 야권연대 협상이 타결되었으나, 선거가 치러지기 전까지 진통은 지속되었다. 야권연대 경선 과정에서 부정 의혹이 튀어나왔기 때문인데, 대표적인 사례가 이정희 대표의 관악을이었다. ARS 응답에서 나이를 조작하라고 지시하는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나중에 검찰조사에서는 일반전화 190여 대를 설치해서 제3자의 휴대전화에 착신 연결하도록 한 혐의가 드러났다. 이정희 대표는 강한 반발로 사퇴하나, 통합진보당 이상규 후보가 단일후보로 또 공천되었다.  

그렇지만 2012년 총선의 후폭풍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선거 직후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이 폭발하고, 5월 12일 중앙위원회에서 참관인이 난입해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석기, 김재연 제명처리안이 부결되면서 당의 붕괴 과정이 발생했다. 민주노총은 8월 13일, 중집위 결정을 통해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했다. 9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4인의 ‘셀프제명’을 통한 탈당을 비롯해, 대규모 탈당 사태가 이어졌다. 대규모 탈당 이후 남은 통합진보당이 앞으로도 야권연대의 주체에 포함될 수 있을지는 극히 불확실해졌다. 
 

6) 2012년 대선과 문재인-안철수 야권연대, 문재인-심상정 새정치선언


통합진보당이 붕괴하던 때, 9월 19일 안철수 씨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이미 2011년부터 여론조사는 안철수 씨를 대선후보로 포함했고, 2011년 9월 여론조사는 안철수 대 박근혜 양자대결이 59.0% 대 32.6%로 안철수 씨가 대승을 거두는 것으로 나와서 매우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때 원탁회의가 다시 나서서 후보단일화를 촉구하기 시작했다. 이제 ‘야권연대’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문제로 초점이 완전히 이동했다. 10월 25일 성명에서는 “민주진보진영의 양대 후보”, 즉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여전히 분립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많은 국민이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하다면서 양 후보가 힘을 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나아가 11월 19일에는 안철수 후보의 민주당 입당을 촉구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안철수 후보는 2012년 11월 23일 후보직 사퇴를 선언했고, 12월 6일에는 문재인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발표한 후, 전국 40여 곳에서 지원 유세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12월 19일 선거 결과, 박근혜 후보 51.6%, 문재인 후보 48.0%로 민주통합당 후보가 패배했다. 

그렇다면 통합진보당에 함께 했던 세력은 어떻게 되었나? 먼저 탈당파 그룹은 2012년 10월 21일 진보정의당 창당대회를 열었고, 단일후보로 당원 ARS 찬반투표 결과 찬성 89.4%를 얻은 심상정 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이 자리에서 심 후보는 문재인, 안철수 두 후보에게 “대한민국 정치의 대전환을 위해 권력구조 개편, 선거제도 개혁, 정당개혁 과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과 실천의지를 밝혀달라”고 요구하면서 범야권을 대상으로 ‘정치대전환을 위한 국민회의’(가칭)를 제안했다. 즉 후보단일화를 추구하면서 그 명분으로 ‘정치개혁’을 제시한 셈이었다.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은 국회 2/3, 선거제도 개혁은 국회 과반 의석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미 새누리당이 국회 절반을 훨씬 넘게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서 당장 실현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지만, 야권연대를 통해 정치개혁, 특히 소수정당의 의회 진출에 유리하도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도와 같은 선거제도 개혁을 이룬다는 약속만으로도 야권연대의 명분이 성립한다고 본 셈이었다. (이때 심상정 후보는 권력구조 개편 방안으로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시했다.) 

결국 11월 26일 심상정 후보는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사퇴했고, 12월 2일 ‘정권교체와 새 정치 실현을 위한 문재인-심상정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에서는 “새 시대를 여는 정치혁신을 확고히 추진”하겠다면서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고, 정당에 대한 지지가 의석수에 비례하여 반영되는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명시했다. 
 

한편 통합진보당도 10월 21일 당 대선 후보로 이정희 전 대표를 공식 선출했다. 통합진보당은 당권자 3만여 명을 대상으로 투표를 진행해, 이정희 후보가 투표자 13,522명 중 8,622표(64.92%)를 얻어 후보로 확정됐다. 당시 통합진보당은 5석의 국회의원을 보유하고 있어 TV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다. 12월 4일 박근혜-문재인-이정희 3자토론에서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려고 나왔다. 박 후보를 떨어뜨려서 반드시 진보개혁정권을 창출하겠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12월 17일, “정권교체를 실현하라는 국민의 열망을 이루기 위해 사퇴를 결정하였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는데, 다만 김미희 대변인이 “국민들께서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문재인-심상정 공동선언과 같은 형식으로 문재인-이정희 연대가 공식적으로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정희 후보는 사퇴 후 “향후 유세나 투표 독려 활동은 계획되어 있지 않다”고 밝히기도 했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측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여론이 극히 좋지 않기 때문에 직접적인 연대를 피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해 2013년 통합진보당에서는 이른바 ‘이석기 사건’, 또는 ‘알오(RO) 사건’이 발생했고,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사건에 대해 8대1의 해산 판결을 내림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7) 소결


2011년 보궐선거에서 야권연대 중앙협상이 성사된 후, 2012년 총선에서 다시금 중앙협상이 타결되어, 그 이전까지 중앙협상 결렬 후 지역별 협상이라는 공식이 깨지고 야권연대가 최고조에 이른다. 하지만, 야권 후보단일화 경선 과정에서 나타난 파행이나, 그 후 밝혀진 진보정당 내부의 비례대표 경선 파행은 진보정당이 기존 정당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깨뜨렸다. 나아가 이러한 행태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 듯 보이는 일부의 집단적 행태는 더 큰 충격을 주었다. 그에 따라 통합진보당 내에 탈당 러시가 일어났지만, 국회의원 5석을 보유한 신당권파의 통합진보당은 그대로 남았다. 그에 따라 ‘야권연대’라는 개념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다. 

한편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은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심상정 후보단일화의 핵심적 약속이었다. 또한 둘의 합의사항에는 ‘대검 중수부 폐지 및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도 있었다. 공수처 설치, 선거법 개정을 묶은 법안 통과가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실현되었으나,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우리가 곧 살펴볼 것이다. 
 

4. 박근혜 정부 시기(2013-2017): ‘전략적 야권연대’를 요구하는 정의당 

 

1) 2013년 4·24 재보궐선거: 야권연대에 무관심한 안철수의 등장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후, 야권연대의 첫 번째 시험대는 2013년 4월 24일의 재보궐선거였다.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는 서울 노원병, 부산 영도, 충남 부여·청양에서 있었는데, 특히 노원병은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삼성 엑스파일 때문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해 열리는 선거였다. 

그런데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했던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노원병 출마를 선언했다. 안 후보를 만류하는 쪽은 노원병이 2012년 총선에서 노회찬 후보로 야권단일화를 했던 지역이므로 그 정신을 유지해야 하고, 안 후보는 부산 영도로 가서 험지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면, 안 후보 측은 “기계적인 야권단일화는 국민에게 호응을 얻지 못한다”며 출마를 강행했고, 결국 민주당은 지난 대선에서 안 후보의 양보를 고려해 공천을 하지 않았다. 

정의당은 야권연대의 문을 일방적으로 닫은 쪽이 안 후보 측이라고 강력히 비난했고, 노회찬 전 의원의 부인 김지선 씨가 출마했다. 그 결과 안 후보가 60.4%로 당선되고, 정의당 김지선 후보는 5.6%을 얻었다. (통합진보당 정태흥 후보는 0.78%을 얻었다.) 안철수 후보는 1970~80년대의 재야운동이나 1990년대의 시민운동과 연관이 없는 인물로, 야권연대에 대해 어떤 도덕적 채무감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안철수 의원은 2013년 11월 새정치 추진위원회를 결성했고, 2014년 2월 새정치연합이라는 당명을 확정했다. 그 후 2014년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3월 26일 새정치연합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이 탄생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2015년 12월 28일 문재인 대표 주도로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변경했다.) 즉, 2011년 정치인 안철수의 등장으로 야권연대의 초점은 민주당-안철수 연대로 완전히 이동했다. 이제 정의당과의 연대는 선거 때마다 제한적으로, 선택적으로 이뤄지게 되었다. 
 

2) 2014년 지방선거: 새정치민주연합-정의당의 지역별, 선택적 야권연대


2014년 지방선거 결과를 광역단체장/기초단체장/광역의원/기초의원으로 나눠보면, 새누리 8/117/416/1413, 새정치민주연합 9/80/349/1157이었다. 4월 16일 세월호 침몰의 여파로 정권심판론이 힘을 얻을 여지가 컸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야당이 큰 성과를 얻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진보정당의 경우, 통합진보당 0/0/3/34, (2012년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통합한 후, 2013년 재창당한) 노동당 0/0/1/6, 정의당 0/0/0/11이었고, 다 합쳐도 0/0/4/51로, 당선자 총합인 3,893명 중 1.4%였다.   

새정치연합과 정의당의 야권연대는 지역별로 선택적으로 이뤄졌다. 즉 정의당이 이미 단체장을 하거나 상당한 득표력을 지닌 것으로 확인되는 지역, 예를 들어 인천이나 울산에서만 가능했다. 인천 지역의 경우, “인천시장 후보는 단일화한다. 동구, 남동구, 연수구 구청장 후보는 경선으로 확정한다, 나머지 군수, 구청장 후보는 새정치연합으로 단일화한다”는 합의가 있었다. 하지만 단일후보로 나간 정의당 구청장 후보 두 명이 모두 낙선했다. 또한 울산 지역의 경우, 양당이 단일화한 시장 후보(조승수), 중구, 남구청장 후보도 낙선했다. 

통합진보당은 2013년 3월 이정희 씨가 당 대표로 다시 선출될 때나, 6월의 정책당대회에서도 “2017년 진보적 정권교체를 위해 진보대통합과 야권연대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2014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에 참여할 수 없었다. 심지어 통합진보당 경기도지사 후보가 6월 1일 “[세월호] 아이들을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한 새누리당에 단 한 표도 줘서는 안 된다”며 후보직을 조건 없이 사퇴한다고 밝혔으나, 새정치연합 김진표 후보는 “사전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며 야권연대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즉 통합진보당과 공식적으로 연대를 한다면 새누리당이 정치적 공격을 펼치기 좋은 소재가 되는 상황이 도래했다. 

선거 결과가 가한 충격이 매우 컸기 때문에, 정의당 내에서 성찰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의당 부설 연구소가 주최한 한 토론회에서 정의당 박원석 의원은 새정치연합과 진보정당의 야권연대에 대해 “공학적인 주고받기의 연대는 크게 득이 되지 않는다. 진보정당은 너무 찌그러져 있어서 야권연대도 잘 안 될 것이다”, “앞으로 총선과 대선에서 정권교체 명분으로 다시 야권연대가 등장하겠지만,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 선거 전략의 핵심이 되는 종속정치는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노회찬 전 의원도 “야권연대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힘이 약해진 진보정당으로서는 더 간절할 수도 있다고 보지만, 과거와 달리 야권연대의 위력은 떨어졌다”, “진보정당의 힘이 약해져서 합해봤자 시너지 효과도 적다”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쟤들은 나쁜 놈이에요. 찍지 마세요’라는 전략으로 에너지를 소비해왔다. 그러나 ‘그래서 너희는 무얼 해줄 건데’라는 유권자들의 물음에 힘 있게 답을 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즉 두 사람 모두 야권연대라는 틀이 당선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야권연대 그 자체가 진보정당의 힘을 키워주었던 것도 더더구나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던 셈이다.


3) 2014년 7·30 재보궐선거: 당 대 당 야권연대를 요구한 정의당 


그렇지만 정의당이 야권연대라는 틀을 완전히 박차고, 중대한 전략수정을 가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지방선거 직후 벌어진 7·30 재보궐선거에서는 오히려 당 대 당 야권연대를 강하게 촉구했다. 이 선거는 국회의원 15석을 두고 벌어져 ‘미니 총선’이라는 말을 들었다. 새정치연합은 정의당이 제안한 ‘당 대 당’ 야권연대는 없다고 선을 그은 반면, 정의당은 ‘후보별 단일화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새정치연합 측은 “선거 때마다 나눠먹기식의 연대로 비판을 받아 왔다”며 “이제는 더 이상 나눠먹기식의 연대는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투표를 엿새 앞두고 수도권 지역에서 전격적으로 새정치연합-정의당의 연대가 이뤄졌다. 동작을에서 새정치연합 기동민 후보가 사퇴하여 정의당 노회찬 후보로 단일화되고, 수원정에서 정의당 천호선 후보가 사퇴하고 새정치연합 박광온 후보로, 수원병에서 정의당 이정미 후보가 사퇴하고 새정치연합 손학규 후보로 단일화되었다. 

그렇지만 선거 결과, 다시금 노회찬, 손학규 후보가 패배하면서 “야권연대의 약발이 떨어졌다”, “나눠먹기식 야권연대가 국민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차라리 두 당이 그냥 합당을 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역풍이 커졌다. 양당이 선거 때가 되면 단일화가 될 듯, 안 될 듯 기싸움을 계속 벌이다가 새누리당과 표 차이가 근소하면 선거 막판에 막후 협상을 통해 자리 나누기로 협상을 타결하는 패턴이 유권자에게 피로감을 주거나 심지어 거부감을 준다는 말이었다. 

한편 동작을에서는 노동당에 화살이 돌아가기도 했다. 김종철 후보의 1, 076표(1.4%)가 나경원, 노회찬의 표 차이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 때문에 민주당 한명숙 후보가 떨어졌다는 비난과 매우 유사했다. 이런 비난이란 새누리당을 떨어뜨리는 게 최우선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결국 야권연대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야권연대의 약발이 떨어졌다는 강한 역풍이 불어도 여전히 반새누리당 야권연대를 실현해야 한다는 경향이 여전히 엄존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 2016년 총선: 야권연대에 무심한 민주당 김종인 체제


2014년 지방선거 후, 2016년 총선 전까지 각 당은 개편을 겪었다. 새누리당은 지지율이 높은 박근혜 대통령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2015년 2월 8일 문재인 씨가 대표로 당선되었으나, 4·29 재보궐선거에서 다시금 참패함에 따라 지도력에 위기가 발생했다. 이 선거는 통합진보당 해산에 따른 세 곳의 지역구(관악, 광주 서구, 성남 중원)에다가 인천까지 더해서 총 네 곳의 국회 의석이 걸려 있었으나, 새누리당 3석, 무소속(천정배) 1석의 결과가 나왔다. 그에 따라 5월 27일 김상곤 혁신위원회가 구성되었으나, 12월 13일 안철수 의원이 당 안에서의 혁신은 불가능하다며 탈당했다. 이제 안철수 의원의 구호는 ‘낡은 진보 청산’이 되었다. 2016년 2월 2일, 안철수, 천정배 의원(국민회의)이 공동대표를 맡은 국민의당이 탄생했다. 한편 2016년 10월 3일 정의당과 노동정치연대, 진보결집플러스(노동당 탈당파), 국민모임이 통합을 공식으로 선언했고, 10월 22일 통합당대회를 열기로 했다. 

그에 따라, 2016년 총선은 일여다야 구도에서 치러질 상황에 직면했다. 문재인 대표는 1월 19일, 국민회의(천정배), 정의당과 통합·연대 협상을 공식적 논의로 전환하자고 제안했다. 다만 정의당의 경우, 현실적 통합은 어렵다고 보고 선거연합을 논의해왔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1월 20일 범야권전략협의체 구성을 제안했고, 25일 문재인, 심상정 양 대표는 함께 모여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1월 28일 문재인 대표는 대표직과 공천권을 포함한 당의 전권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위임하고 물러나기로 한 상태였다. 문 대표는 김종인 선대위원장에게 그동안 논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후속 논의가 잘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종인 비대위 체제에서는 야권연대가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과는 통합 논의는 물론, 당 대 당 선거 연대도 실현되지 않았다. 안철수 대표는 ‘야권연대는 불가하다’, ‘본인이 총선 결과에 책임을 지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국민의당과 논의가 풀리지 않으므로, 자연스럽게 정의당과 당 대 당 연대도 실현될 수 없었다. 

2016년 총선에서 야권연대에 가장 적극적인 쪽은 정의당 심상정 대표였다. 3월 9일 심상정 대표는 국민의당에 “호남에서 경쟁하되 나머지 지역에서 연대하는 협상”을 제안했고, 만약 국민의당이 끝내 거부하더라도 민주당과 일대일로 협상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심 대표는 △공동의 비전에 입각한 가치연대, △일시적 연대가 아닌 정권교체를 위한 대안연대, △패권적 단일화가 아니라 모두 승리할 수 있는 호혜연대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김종인 대표는 “지금 연대하자는 건 결국 ‘선거구 나눠달라’는 말밖에 더 되느냐”며, “선거를 시작하고 일주일만 지나면 우열이 나온다. 그럼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심 대표를 향해 “내가 17대부터 심 대표에게 ‘민주당(더민주 전신)으로 가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들었다”며 “지금 정의당이 될 수 있는 지역은 심 대표 하나 빼곤 없는 것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심 대표의 제안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모욕감을 느낄 만한 말을 덧붙인 셈이었다. 그리하여 공개적이고 포괄적인 야권연대 협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따라서 2016년 총선은 대체로 일여다야 구도의 선거가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더불어민주당이 123석으로 1위를 차지했고, 새누리당 122석, 국민의당 38석, 정의당 6석을 얻어, 새누리당의 참패로 끝났다. 새누리당은 선거를 앞두고 180석 이상을 목표로 잡았고, 민주당이 100석도 얻지 못한다는 예측도 있었지만, 예상을 뒤엎는 결과였다. (이때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그 유명한 ‘옥새파동’이 있었다.) 정의당은 지역구에서 심상정, 노회찬 의원이 당선되었고, 비례대표 4석(득표율 7.23%)을 얻었다. 심 후보는 야권연대 없는 다야구도에서 당선되었고, 노 후보는 문재인 대표의 중재로 야권연대가 성사되었다.  
 

그렇지만, 정의당이 2016년 총선에서 야권연대에 가장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가치연대, 대안연대, 호혜연대라는 방향성을 제시하며, 야권연대를 ‘전략적 연대’로 계속 격상시키려 했다는 사실 말이다. 또한 문재인 대표도 야권연대의 중재자 역할을 계속하고자 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6) 2017년 대선: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대선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 벌어진 2017년 5월 9일, ‘조기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당 후보가 41.1%를 얻어 당선되었다. 다른 후보를 보면, 자유한국당 홍준표 24.0%, 국민의당 안철수 21.4%, 바른정당 유승민 6.8%, 정의당 심상정 6.2%였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의 야권연대 문제가 최대의 관심사로 떠올랐던 상황에 비견하면, 각 당이 모두 후보를 내고 선거를 완주했다. 2016년 10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가 시작되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탄핵 소추안을 인용한 기간 동안, 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얼마간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지지율이 급상승하고 고공행진을 지속했기 때문일 것이다.  

2016년 총선도 치러지기 전인 2015년 12월 정의당 부설 연구소의 한 토론회에서는 정의당이 2017년 대선에서 연립정부를 전제로 한 야권연대를 주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국민참여당계 천호선 전 대표는 “대선후보 통합경선을 전제로 2016년 총선에서 연대방안을 찾자”고 말했고, 조성주 미래정치센터 소장은 “대선 연립정부 구성을 전제로 야권이 총선에서 연대연합을 하자”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문재인 후보의 독주 속에서 야권연대의 필요성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그에 따라 정의당은 선거에 임하는 논리를 바꾸었다. 심상정 대표는 2월 14일 인터뷰에서 2017년 대선의 의미가 “정권교체냐 정권연장이냐가 아니라 어떤 정권교체냐를 두고 야당들끼리 진검승부를 펼치는 것”이며 따라서 “대선에서 완주를 안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촛불 시민이 과감한 개혁연합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대선 후에 “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이 연정을 하는 것은 국민 요구에 부합하는 길이다. 야3당이 개혁연립정부를 구성하고 바른정당과는 적극적인 연대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선 후 4+1 공조를 통해 실현된다.) 그래서 “차기 정부가 어느 정도 개혁적인 정부가 될 것인지는 심상정이 이번 대선에서 받을 지지율에 달렸다”고 덧붙였다. 즉 정의당이 지지율이 높게 나오면, 그 힘을 바탕으로 ‘개혁연립정부’ 구성을 요구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대선 후 민주당이 실제로 연립정부를 수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사실을 정의당 측에서도 알고 있었겠지만, 어쨌든 심 후보의 득표율이 높게 나오면 더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는 목소리의 발언권이 더 커질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셈이었다. 

심상정 후보는 네 차례의 TV토론을 거치며 지지율이 상승해, 4월 말에는 8%가 넘는 결과가 나왔다. 진보정당 대선후보로는 처음으로 두 자릿수가 넘는 득표율을 얻나 관심을 끌기도 했으나, 막판에 홍준표 후보가 무섭게 추격한다는 말이 세간에 떠돌며, 다시 표가 문재인 후보 쪽으로 쏠려 6.2%로 마감했다. 우상호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은 정의당이 “문재인이 당선될 테니 정의당의 정신도 지켜주십시오, 이렇게 선거운동을 하고 계신 거 아니겠나”라면서 “보수가 총결집하면 정의당 지지층도 일단은 정권교체에 집중해 주실 필요가 있다”, “심상정 후보 지지층도 심상정 후보로 정권교체한다는 생각은 안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막판에 표가 다시 문재인 측으로 쏠린 것은 정의당의 논리를 따를 때, 오히려 불가피한 결과였다. 
 

7) 소결 


2017년 대선을 거치며 정치 신인 안철수 씨가 대선 후보급으로 올라오면서, 이제 ‘야권연대’의 초점은 안철수 쪽으로 이동한다. 2012년 총선에서 야권단일화 경선 파동은 민주당 지지자 쪽에도 ‘무조건적 야권연대’에 소극적, 부정적 인상을 남겼다. 이제 야권연대는 민주당과 정의당의 지역별, 선택적 야권연대로 축소되었다. 그렇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하는 가운데, 2014년 지방선거나 재보궐선거에서 단일화된 후보가 떨어지는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 나눠먹기식 야권연대가 거부감을 일으킨다, 야권연대 약발이 떨어졌다는 비판과 자조가 나왔다. 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 김종인 체제는 야권연대에 무심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정의당은 매번 당 대 당 야권연대 협상을 요구했다. 가치연대, 대안연대, 호혜연대라는 표현을 쓰며 야권연대를 전략적 수준에서 개념화하고자 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지지율 독주를 하게 되자, 2012년 대선에서 있었던 ‘문재인-심상정 새정치선언’과 같은 일이 다시 재연될 수 없었다. 2017년 지방선거도 야권연대 없는 선거가 되었다. 그렇지만, 정의당은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전략적 야권연대’를 실현할 기회를 엿보게 된다. 그것이 패스트트랙 공조였다. 
 

5. 문재인 정부 시기(2017-2020): 패스트트랙 공조, ‘야권연대’의 그랜드 파이널  

 

1) 정개특위와 패스트트랙 충돌 


2018년 4월 2일, 6석의 정의당과 14석의 민주평화당은 ‘평화와 정의의 의원 모임’이라는 공동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8대 정책 공조 과제’도 발표했는데, 첫 번째가 한반도 평화실현이었고 두 번째가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이었다. 이는 정의당이 20대 국회에서 가장 주안점을 둔 사안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공동교섭단체는 2018년 7월 23일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사망하여 정족수 부족으로 113일 만에 해산했다.)

2018년 7월 26일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2010년대 ‘야권연대’의 그랜드 파이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제 문재인 대통령 시대가 되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여야연대’, 또는 ‘범여권연대’라 불러야 할 때가 되었다.) 

10월 24일 정개특위 첫 번째 회의가 열렸는데 위원장으로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선출되었다. 진보정당이 원내 진출 후 처음으로 ‘위원장’을 맡는 사례가 되었다. 정의당이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희찬 의원의 사망으로 공동교섭단체가 해산하자 자유한국당은 정의당을 정개특위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특위 활동이 지연되었다.) 심 의원은 “비례성과 대표성을 높이는 선거제도 개혁은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됐다”며 선거제도 개혁을 속도 높게 진행할 의사를 피력했다. 한편 정개특위와 함께 사법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도 설치되었다. 정개특위와 사개특위, 선거법과 검찰개혁법안(검경수사권 조정, 공수처 설치)은 처음부터 짝을 이루었다. 

정개특위와 사개특위에서의 논의과정은 복잡다단했는데, 2019년 4월, 민주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바른미래당은 ‘여야 4당 합의안’을 마련하는 논의에 돌입했다. 그 결과, 2019년 4월 30일, 자유한국당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는 가운데, 정개특위를 통과한 심상정 의원의 선거법 개정안과 검찰개혁 관련 법안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법안)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민주당은 선거법 개정에 따라 의석수가 줄어들 수도 있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공수처 설치와 검경수사권 조정을 위해 야당의 조정안을 수용했다. 이때 정의당이 선거법 개정을 최우선시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4월 9일, 심상정 의원은 “공수처법 이견 때문에 다 합의된 선거제도 개혁까지 물거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패스트트랙 일정을 빨리 가시화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6~7월 정의당 당 대표 선거에서 심상정 의원은 “미션 임파서블이라고 한 선거제 개혁을 저와 당원들이 부여잡고 패스트트랙에 올려놨다”, “제가 대표가 되면 마지막 고비를 넘겨 선거제 개혁을 기필코 완성하고 양당체제를 끝내겠다”고 주장했다. 심 의원은 84%의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되었는데, 정의당이 염원하는 선거제 개혁 완성에 힘을 싣겠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2) 조국 사태와 정의당: 선거법 개정을 위한 조국 장관 임명 찬성 


한편 이 와중에서 조국 사태가 터져 나왔다. 2019년 8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민정수석을 법무부장관 후보로 지명하면서 자녀입시 문제, 사모펀드 문제, 웅동학원 문제 등등 온갖 의혹이 봇물 터진 듯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9월 7일 심상정 대표는 “대통령의 임명권을 존중하겠다”고 사실상 찬성 의견을 밝혔다. 8월 22일에는 조국 사태를 두고 “20~30대는 상실감과 분노를, 40~50대는 상태적 박탈감을, 60~70대는 진보진영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고 있다”고 말했으나, 입장을 완전히 바꾸었다. 

왜 그랬나? 여기에는 선거법 개정 문제가 직접 얽혀 있었다. 패스트트랙 지정 후 여야합의에 따라 정개특위 활동이 두 달간 재연장되었는데, 활동 시한인 8월 31일을 앞두고 자유한국당을 뺀 여야4당이 합의해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을 표결에 부쳐 재석 19명 중 찬성 11명으로 의결했다. 그렇더라도 선거법 개정이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2020년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각 당, 각 후보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야당뿐만 아니라 민주당 내에서 이견이 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당은 선거법 개정이 여전히 살얼음판 위에 있으므로, 앞으로도 민주당과 공조를 원활히 유지하는 게 매우 중요해 보였을 것이다. 

한편 2019년 10월 14일, 진중권 씨는 한 강연에서 정의당에 탈당계를 냈을 당시를 회고했다. “정의당에서는 조국 임명에 반대했을 경우, 최소 8,000명이 탈당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후원금이 끊어지고 비례대표를 받지 못하게 돼 작은 정당에서는 엄청난 수”라고도 했다. 그의 회고는 선거법 개정을 위한 민주당과의 공조라는 절대적 우선권에다가, 민주당 지지층과 겹치는 정의당 지지층에 대한 고려도 작용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에 못지않은 강력한 반발도 있었기 때문에, 9월 22일 심 대표는 “좌절하고 상처받은 청년들과 일관성 결여를 지적하는 국민들께는 매우 송구스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심 대표는 “조국 후보자 한 사람의 자격평가를 넘어서 개혁과 반개혁 대결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정의당은 최종적으로 개혁전선을 선택하게 되었다”며 당시 결정을 분명히 변호했다. 즉 어떤 사람들에게는 송구스럽지만, 개혁전선을 지키기 위해, 곧 선거법 개정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자기방어였다. 

10월 31일 비교섭단체 연설에서는 ‘사과’의 강도가 조금 더 올라갔는데 “특권정치 교체를 위해 불가피하게 제도개혁을 선택한 것이었으나 생각이 짧았다”, “절실한 제도개혁이라도 정의당이 지켜온 원칙과 가치가 우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심 대표는 국민의 신뢰 회복을 위한 국회개혁안을 제시했는데, 국회의원 세비나 의원 보좌진 축소, 공직자윤리법 강화, 국회의원 국민소환제도가 그 내용이었다. 심 대표로서는 ‘정의당이 비례대표 의석수를 더 늘리려고 대의를 팔아먹었다’는 식의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인지, 앞으로 국회의원이 누리는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 호소하려 했던 듯하다. 그러나 이런 제스처만으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고, 그 후로도 거듭 사과를 표명하는 국면이 도래하게 된다. 민주당에 대한 정의당의 논조는 2020년 민주당이 비례위성정당을 추진한 후에야 바뀌게 된다.
 

3) 선거법 개정의 대단원: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 


11월 25일 패스트트랙 법안 통과를 위한 ‘4+1’(민주당, 바른미래당, 정의당, 민주평화당+대안신당) 공조가 본격화되고 우여곡절 끝에 12월 27일 선거법 개정안이, 12월 30일 공수처법이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최종적으로 통과된 선거법 개정안은 애초 정의당의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의당 논평은 “백 보를 가고자 했으나, 오십 보만 가게 됐다. 아쉽지만 오늘만큼은 전진한 것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며 본회의 통과를 축하했다. 그러면서 “선거제 개혁의 대의를 거부하고, 부정한 꼼수로 정치개혁의 좌초를 도모하는 자유한국당 등의 적폐세력을 반드시 심판해주시기를 당부드린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2020년 2월경부터 민주당 내외곽에서 비례위성정당을 창당하려는 흐름이 본격화되었다. 정의당의 총선 전망은 암울해졌고, 현실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2020년 4월 15일 치러진 선거 결과, 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이 180석(지역구 163/비례 17),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이 103석(84/19), 정의당이 6석(1/5), 국민의당이 3석, 열린민주당이 3석을 차지하였다. 선거 결과를 두고 보면, 민주당이 위성정당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되었는데, 지역구를 내지 않은 위성정당 없이 민주당이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모두 냈다면 얻을 비례의석은 6석에 그치므로, 비례의석 11석을 더 얻게 된 셈이다. 정의당은 약 270만 표, 9.67%를 얻었는데, 비례위성정당이 없었다면 7석을 더 얻었을 것이라는 계산도 나왔다. 

비례위성정당 창당이 가시화될 때, 사회진보연대는 민주당의 속내를 이렇게 보았다. “사후적으로 해석해본다면, 민주당은 처음에는 공수처 도입을 목표로 파격적인 선거법 개정안을 제안함으로써 제1 야당을 배제하고 소수정당을 패스트트랙 공조라는 틀로 끌어들였다. 그런 다음에는 선거법 개정안의 파격적인 내용을 조금씩 깎아내고 덜어내면서, 다른 소수정당이 ‘그 정도도 어디냐’라는 식으로, 또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선거법 수정에 동의하도록 유도하면서 결국 공수처를 통과시켰다. 그러다가, 막상 선거가 다가오자 소수정당으로 돌아갈 표가 아까워 비례정당을 창당하는 길로 나간 것이다.”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 창당과 함께, 2010~2012년, 10년에 걸쳐 선거법 개정을 목표로 했던 진보정당의 ‘전략적 야권연대’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4) 소결: 선거법 개정 파행, 누가 책임지나


정개특위가 구성된 후, 2019년 1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당 원내지도부와 만남에서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선거법 개정이 되어야 한다”며 지난 대선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을 상기시켰다. 그 후로도 문재인 대통령이 선거법 개정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는 보도가 종종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1월 17일 민주당 원내지도부와 만남에서는 “민주당이 손해를 기꺼이 감수했지만 대표성과 비례성을 높인다는 대의를 얻었다”고 자찬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야권연대의 약속, 특히 심상정 후보의 사퇴와 함께 발표된 ‘새정치 공동선언’의 약속을 지키려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이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한 적이 없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정의당 측에서는 민주당이 그렇게 허를 찌를 것이라는 예상을 못했고, 그래서 아무런 대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기존 거대 정당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자기 의석을 내놓으리라 순진하게 기대했던 것이 잘못이 아니었을까. 심상정 대표는 선거가 끝나고 더 많은 의석을 얻지 못하게 되어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렸을 뿐, 패스트트랙 공조에 대한 발본적 평가는 없었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었고, 심상정 의원은 다시금 네 번째 대선 출마 선언을 발표했다. 
 

6. 결론: 10년의 전략적 야권연대,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2010년대 진보정당의 첫 번째 화두는 야권연대였다. 길게 보면 2010년부터 2020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노회찬, 심상정 의원이 주도했던 야권연대는 비례위성정당이라는 허망한 결론으로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그들이 구상했던 ‘전략적 야권연대’, 그다음 단계는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첫 번째, 2010년대의 야권연대가 여러 한계가 있었지만, 선거제도 개혁이라는 중차대한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불가피성도 있었다고 보면서, 선거제도를 다시 개혁하기 위한 2라운드 연대를 추구하는 길이 있을 수 있다. 두 번째, 지난 야권연대는 목표와 의의가 있었지만, 최근 선거인 2017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야권연대에 무심한 태도를 드러냈고, 총선에서 비례정당을 창당하는 행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볼 때, 야권연대가 더는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새로운 장기비전을 세우려고 하는 길이 있다. 세 번째, 선거법 개정을 최우선시하는 게 과연 신생 진보정당의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적절했는가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역시 새로운 비전을 찾는 길이 있다. 두 번째, 세 번째는 ‘전략적 야권연대’를 벗어나려 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지난 발걸음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면 새로운 출발점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럼 각각의 길에 대해 생각해보자. 필자는 당연히 세 번째 길을 지지한다.  
 

1) 선거법 재개정에 다시 몰입해야 하나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따지기 전에, 무엇이 불가능한가를 먼저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의 길을 살펴보면, 얼마 전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뉴스가 있었다. 올해 7월 13일, 민주당 송영길 대표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회동을 한 데 대해, “송영길-이준석 물꼬 튼 정치개혁... ‘위성정당’ 사라질까”라는 기사가 나왔다. 기사에 따르면 “양당 대표가 공유한 선거법 개정 방향은 크게 연동형 비례제 폐지와 지구당 부활 논의가 골자다.” 위성정당만 도려내는 게 아니라 아예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없앨 수 있다는 양당 대표의 공감대가 확인되었다는 말이었다. 물론 다음 번, 2024년 총선까지 많은 시간이 남았고, 선거법을 다시 개정하는 문제가 여야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바 없기 때문에 미래를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거대 양당 대표의 ‘공감’을 무시할 수 없다. 
 

만약 선거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지금처럼 선거가 다시 치러진다면 또다시 비례위성정당이 재연될 수 있다. 지난 총선에서도 민주당 지지자들은 민주당이 정의당에 연합비례정당을 제안했을 때 정의당이 뿌리친 게 전략적 실책이라고 주장했다. 그때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정의당 비례의석이 더 늘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의당이 잘못했다는 식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많다면, 또한 정의당 내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질 것이다. 이런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선거법 재개정을 위한 ‘야권연대’ 2라운드란 ‘잃어버린 10년’이 다시 반복되는 결과를 낳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2) 야권연대와 민주당의 ‘적응 전략’: 진보정당을 자임하는 민주당  


두 번째, 그래도 선거법 개정을 위한 야권연대는 불가피하거나 정당했다는 인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보통 신생 소수정당이 선거연합이나 연립정부를 추진할 때는 그 목표가 ‘지위 추구’, 즉 정치인이 공직을 거머쥐려는 욕구의 실현이거나 ‘정책 추구’, 즉 그 정당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정책의 현실화일 것이다. 통합진보당이나 정의당은 야권연대를 실행할 때는 ‘지위 추구’와 함께 ‘정책 추구’도 병행하는 듯한 외양을 갖추고자 했다. 

2010년 5+4 협상에서 진보신당은 민주당이 추진했던 노동 관련 법이나 한미FTA 문제를 거론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성과 입장 변화’를 야권연대의 조건으로 내걸기도 했다. 그러나 진보신당에서 노회찬, 심상정 그룹이 이탈하여 통합진보당에 합류한 후 나온 2012년 원탁회의 정책합의문이나 문재인-심상정 새정치공동선언을 볼 때, ‘신자유주의 반대’에 비해 선거법 개정에 훨씬 더 정책적 우선성을 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통합진보당-정의당의 정책추구란 ‘신자유주의 반대’라기보다는 오히려 선거법 개정이었다. 그런데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확대를 위한 선거법 개정이란 곧 자기 당의 의석 늘리기를 뜻했다. 따라서 통합진보당-정의당의 정책 추구란 ‘선거가 국민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대표성과 비례성을 높인다’는 고상한 명분을 내세웠으나, 사실 지위 추구와 같은 일이었다. 

물론 선거라는 냉엄한 현실을 경험해본다면, 그 높은 벽을 넘기 위한 선거제도 개혁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것이라는 항변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통합진보당-정의당이 ‘지위 추구’에 몰두하는 동안 잃은 것은 무엇이었나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보통 신생정당이 새로운 이유와 정책을 제기하며 도전자로서 등장할 때 기존 정당은 세 가지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무시 전략’으로, 신생정당이 제기하는 이슈와 정책이 지닌 중요도가 상승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적대 전략’으로 신생정당의 이슈와 정책에 적극 반대하는 방식인데, 이는 그러한 이슈와 정책의 중요도를 높이는 효과를 발휘한다. 세 번째는 ‘적응 전략’으로 신생정당이 제기한 이슈와 정책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경우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이다. 이럴 때 기존 정당은 그러한 이슈와 정책의 중요성은 높이되 이슈와 정책에 대한 소유권을 자기 것으로 가져올 수 있다. 기존 정당은 의회 내에 의석이 많고 집권 경험도 있으므로, 새로운 이슈와 정책을 실현시킬 진정한 힘이 있다면서 유권자에게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생정당은 기존 정당이 자기의 정책을 빼앗아 갔다며 억울해하면서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20세기 초반 미국 민주당과 인민당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때 민주당이 남부 기반 보수정당에서 진보주의적 색채로 전환하면서 인민당의 정책을 “은화 주조 정책을 빼고 모두 가져갔다”는 평이 나왔다. 그 후 인민당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2010~12년에 실행된 야권연대는 민주당이 ‘적응 전략’을 실행하여 새로운 이슈, 정책에 대한 소유권을 자기 것으로 확립하는 데 성공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주축은 원탁회의-혁신과통합-시민통합당-민주통합당, 즉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이뤄지기 직전인 2016년 총선까지도 창원에서 노회찬 후보로 단일화가 이뤄지도록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2012년 원탁회의와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이 서명한 정책합의문은 노무현 정부 정책에 대한 평가, 즉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쟁점은 모호하게 넘어가면서 시민운동이 세팅한 의제, 즉 4대강 국정조사, 공수처, 언론중재법, 재벌규제와 같은 정책과제가 전면에 배치되게 했다. 통합진보당은 정당명부제 비례대표제 확대가 포함된 것에 만족했다. 게다가 2012년 민주통합당에는 한국노총이 합류했고, 총선을 앞두고는 민주노총과 민주당의 정책합의문이 발표되고,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이 민주당 선거유세에 합류했다. 즉, 민주당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양대 노총의 ‘노동 의제’에 대한 소유권을 자기 것으로 확립했다. 다시 말해 2010~12년 야권연대를 통해 민주당, 특히 문재인-친노세력은 △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신자유주의 정책 반대’라는 진보정당의 이슈를 무마하고, △ 시민운동이 제기한 이러저러한 개혁 이슈로 화제를 전환했으며, 이러한 전환에 진보정당이 동의하게 했고, △ 양대 노총과 통합, 연대를 실현함으로써 노동 이슈에 대한 소유권을 빼앗아 왔다. 

여기서 하나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진보정당의 위기란 동시에 민주노총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위기를 뜻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도 2010~2012년 야권연대가 실현될 때 중추적 역할을 자임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민주노총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전략에 대한 총괄적 평가도 꼭 필요하다. 필자는 당시 민주노총이 각종 현안을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단기적 시야에 갇혀, 야권연대를 추동했던 활동이 정치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활동은 스스로 목표로 제시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는 진보정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민주당과 정책협약을 추진할 때 스스로 모순적인 행동을 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역량, 자원을 한 곳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민주노총 조합원이 민주당 후보를 찍을 때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양상은 2010~12년 이후에 총연맹 수준에서 명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가맹·산하 조직에 영향을 미쳐서 가맹·산하 조직 수준에서 민주당과 정책협약을 체결하는 일이 시시때때로 나타났다. 나아가 야권연대의 기억, 분위기는 조합원의 투표행태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민주노총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별도의 글에서 다뤄보겠다.) 

지금도 2010~12년의 야권연대가 민주당에 대한 ‘정책적 견인’이라고 주장하는 논자가 많을 수 있겠다. 필자는 그게 아니라 민주당의 ‘적응 전략’의 성공, 통합진보당-정의당과 민주노총-한국노총에 대한 포섭이라고 평가한다. 어떤 평가가 더 적절한지는 정의당과 민주노총이 처한 지금 상황을 통해 판가름 날 것이다. 지난 10년을 거쳐 누가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고 정세적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는가. 현실로 눈을 돌린다면 너무나 명확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이제 민주당은 자신이 보수-진보 대립축에서 ‘진보정당’이라고 아주 당당하게 주장하곤 한다. 
 

3) 새로운 장기 비전: 이재명 후보와의 포퓰리즘 경쟁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장기 비전 문제를 생각해보자. 그런데 과거 야권연대가 불가피하고 정당했나, 아니면 거듭된 자충수였나를 두고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덧없고, 어차피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다. 얼핏 보면 타당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새로운 출발점을 잘못 설정할 위험이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장기 비전이란 미래의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유토피아란 사회운동의 궁극적 지향점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우리가 현실의 실천과정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방향타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유토피아를 향한 길도 지금 당장 우리가 처한 현실의 ‘지양’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진보정당 장기 비전은 현재의 문재인 정부에 대한 총괄적 평가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특히 문재인 정부에서 진보정당 자신의 행보에 대한 냉철한 자기 평가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과거 야권연대에 대한 평가를 없는 일처럼 넘어갈 수 없다. 

그런데 대선을 앞둔 최근 상황을 보면 진보정당이 이재명 후보의 포퓰리즘 정책과의 본격적인 경쟁에 뛰어든 것처럼 보인다. 즉 이재명 후보의 포퓰리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결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은’ 포퓰리즘 공약을 제시할 수 있냐를 두고 경쟁하는 듯 보인다는 말이다. 이는 ‘민주당과 연대’가 아니라 ‘민주당과 경쟁’이므로, 과거 ‘야권연대’ 전략과의 단절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포퓰리즘 정책이 지닌 파괴적 효과라는 위험성 문제는 따로 놓더라도,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이재명 후보와 진보정당의 포퓰리즘 정책이 지닌 위험성에 대해서는 특집의 다른 글에서 다루므로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접근방식은 근본적으로 야권연대의 함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심각한 상황을 일으킬 수 있다. 이번에는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정당의 ‘적응 전략’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수정당의 적응 전략이란 어불성설이다. 첫 번째로, 이재명 후보 측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유사한 정책을 두고 경쟁을 하면 의회 내 다수 의석, 집권 경험을 내세우는 민주당의 호소력을 당할 수가 없다. 

두 번째로 만약 이재명 후보 측이 집권하게 되면, 결국 다시금 이재명 후보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간혹 ‘애초 약속을 충실히 지키지 않았다’, ‘부족한 점이 많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낼 기회가 있을 수도 있으나, 정책적 골조를 공유하는 한 그 정책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될 수 없고, 집권세력의 이러저러한 ‘현실론’이라는 벽에 막힌다. 이는 문재인 정부에서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 ‘최저임금 인상 약속을 충분히 지키지 않았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부족한 점이 많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러한 비판이 문재인 정부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이재명 후보가 낙선한다면, 또다시 이 후보 측 공약과 진보정당의 공약에서 공통점을 찾아 의회 내에서 이를 실현하자고 민주당에 요구하는 흐름이 진보정당 내외에서 나타날 수 있다. 어쨌든 ‘범여권’이 현재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포퓰리즘 공약을 매개로 하여 야권연대 2라운드를 개시하자는 주장이 될 것이다. 이러한 구도라면 진보정당이 여전히 민주당 또는 집권세력 내 ‘좌파’ 그룹 정도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대선이나, 대선 이후 상황을 조금만 생각해보더라도 민주당과 포퓰리즘 경쟁은 필연코 지난 10년의 과오를 반복하는 길을 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남은 길은 반(反)문재인 진보, 반(反)이재명 진보의 핵심 의제를 포퓰리즘 정책 경쟁이 아닌 곳에 찾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포퓰리즘 정치 비판으로부터 반(反)민주당 진보로 가는 길을 시작해야 한다.●
 
 
 
주제어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