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1 가을. 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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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과 체제이행, 격동기 노동자민중의 삶

소설과 함께 보는 노동운동사: 식민지 시대 ①

김성균 | 정책교육국장
소설과 함께 보는 노동운동사, 이번 호에서는 시간을 되돌려 식민지 시대로 가본다. 19세기 후반의 급변하는 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조선은 결국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으로 멸망한다. 조선은 멸망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밟아나가게 된다. 체제가 전환되는 이 시기는 그만큼 격동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소설과 함께 보는 노동운동사: 식민지 시대」는 격동의 시기를 살아갔던 노동자 민중의 삶과 노동자운동을 살펴본다. 이때 노동자의 현실과 노동자운동을 구분하여 다루려 한다. 노동자의 현실은 다시 1910년~1920년대 중반, 1920년대 중반~해방까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다루고, 그런 후에 식민지 시대 노동자 운동에 대해서 다루도록 한다. 본 글은 그 첫 번째, 1920년대 중반까지 노동자들의 삶이다.
 

식민지 시대 자본주의 발전과정 개관

 
19세기 후반 개항으로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다. 동시에 점점 더 일본에 종속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완전한 주도권을 가지게 되고, 결국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조선은 멸망한다. 한일병합 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조선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도 자본주의가 이식되기 시작된다. 즉 제국주의의 수탈체계를 만드는 과정인 동시에 자본주의가 발전해가는 과정이었다.
일본은 우선 원료를 조달하는 것을 목표로 조선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서 토지를 정비하고 농업 및 광업(천연자원 수탈)에 집중한다. 이 시기는 대체로 원료 그대로를 수탈해 본국으로 가져갔는데, 이를 위해 철도와 도로, 항만 등을 건설한다. 식민지시대 초기의 노동자 중에는 주요 기간산업 근처에서 잡업을 하는 노동자가 대다수였다.

기간시설도 정비되고 조선에서도 자본이 점차 성장하면서, 원료를 중심으로 하긴 하지만 정미업, 제면업 등 1차 가공업이 점차 발전하기 시작한다. 1차 세계전쟁의 호황에 힘입어 시멘트, 제철업 등도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한다. 1920년대에도 일본 자본에 원료를 공급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이나 면화 재배의 확대 등이 여전히 이뤄졌지만, 회사령의 철폐로 일본의 중소자본도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조선에도 고무공업, 제사(製絲)업 등 경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렇듯 제조업이 발전하면서 제조업 노동자층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1920년대 확산하기 시작한 사회주의 이념과 결합해 노동자로서의 자각과 초기적인 노동자 운동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1920년대 말 세계 대공황으로 일본자본주의는 점차 파시즘 체계로 이행한다. 일본은 대외팽창을 위한 군수산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고, 대륙 침략을 위해서 조선에서도 군수공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한다. 1930년대 초반부터 전력 개발이 집중적으로 이뤄졌고, 이를 기반으로 기계제 대공업이 이식된다. 이 시기쯤부터 일본 대자본의 조선 진출이 많이 증가한다. 우선 기존에 중소자본이 장악하던 부문(메리야스 등 경공업과 광업 등)에, 이들을 매수하는 형태로 대자본이 진출했다. 이에 더해서 화학공업, 기계기구 공업 등의 부문에 일본 대자본이 활발하게 진출한다. 진출한 공장의 3/4 이상이 100명 이상을 고용하는 대규모 공장이었다. 이런 대규모 공장에서는 원동기의 사용을 늘리는 대신 수공업적인 작업을 줄였다. 이와 같은 일본 자본의 변화는 한국 자본주의 발전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나마 기계제 대공업으로 전환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파시즘화는 더욱 강화되고 군수 공업화가 본격화된다. 공업생산액은 더욱 늘어 1938년에는 공업생산액이 농업생산액을 능가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군수공업에 연관된 한에서만 기업 활동을 허가했다. 이에 따라 식민지권력(총독부)에 경제 부문이 더욱 종속되는 형태가 된다. 이 시기에 이르면 조선 노동자의 구성은 중공업 부문 노동자가 우세한 상태로 변화한다. 이렇게 조선 경제에서 독점이 강화되고 공업이 확장했지만,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노동력의 충원과 물자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1941년 이후로는 부분적으로 생산력 감퇴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일본자본주의는 이를 조선 노동자와 농민을 더욱더 강하게 수탈해서 해결하고자 하지만, 위기는 해결될 수 없었다. 결국 일본은 2차 세계전쟁에서 패전하게 되고 조선은 해방을 맞이한다.

식민지 시대 조선의 경제발전을 개관했다. 이제부터 이어질 내용에서는 해당 시기의 좀 더 세부적인 경제 상황이나 공업발전 상황을 추가하면서 소설과 함께 노동자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날품팔이 노동자와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

 
혼란하던 조선 봉건사회는 동학농민전쟁을 기점으로 복원력을 잃고 침몰하기 시작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획득한 일본은 우선 1905년부터 1909년까지 실시된 화폐정리사업으로 조선의 경제 제도를 정비한다. 화폐정리사업은 조선의 화폐 대신 일본 제일은행의 화폐를 통용시킴으로써 금융체계를 정비했던 사업이다. 금융체계 정비에서 나아가, 지세 제도를 확립하고 조선 정부 재정에 대한 통제와 감독을 강화하기도 했다. 

또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일본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토지 수탈, 광산, 철도, 운수 등 모든 산업부문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했다. 그중에서도 핵심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토지조사사업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은 조선 봉건제를 거치며 점차 발전해오던 토지사유화를 확인하고 근대법적인 토지 소유제도를 확립한 것이었다.  지세 제도의 확립은 토지사유권이 확립되면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근대법적 토지 소유제도가 확립되면서 농민의 토지로부터의 분리가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토지 대부분을 소유한 주체는 지주였고, 근대법적 토지 소유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곧 농민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의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토지를 확보하지 못한 농민들은 잠재적인 프롤레타리아로 전화했는데, 이들은 다시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기회가 되면 농촌을 떠나기도 했다.
 

날품팔이 노동자의 삶,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독자 대부분이 알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1924년 6월에 《개벽》에 실렸다. 《개벽》은 천도교 청년회의 기관지였는데, 1923년 즈음부터 계급주의적 경향문학의 대표인 박영희, 김기진 등이 문예 면을 담당하면서 한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이하, 프로문학)의 요람으로 평가받았다. 

「운수 좋은 날」은 보통 사실주의 소설로 분류된다. 인력거꾼 김 첨지의 어느 하루를 보여줌으로써 식민지 시대 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노동소설전집』의 작가 안승현은 ‘노동소설’이라는 범주화를 시도하는데, 이는 기존 범주인 프로문학, 공장문학으로 분류되지 않은 수많은 소설을 발굴하려는 시도다. 안승현은 『한국노동소설전집』에서 카프와의 직접적인 연계가 없는 작가의 작품들, 공장의 노동자뿐만 아니라 산업예비군, 자유노동자, 여성노동자의 삶까지 확장한다. 이런 범주화에 따라서 그는 「운수 좋은 날」을 노동소설로서 그의 전집에 포함한다.

지금부터는 소설의 본문을 살펴보면서 당시 자유노동자의 삶을 살펴보도록 하자.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마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으로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결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쟁이를 동광학교(東光學校)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첫 번에 삼십 전, 둘째 번에 오십 전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치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 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 첨지는 십 전짜리 백동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깍 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팔십 전이라는 돈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모주 한 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 줄 수 있음이다.

며칠 동안 돈 구경도 못 했던 인력거꾼 김 첨지는 어느 날 갑자기 운수가 좋아 큰돈을 벌게 된다. 이어지는 소설 본문에서 그는 그날 하루 동안 30원을 벌었다고 말하는데, 당시 인력거꾼의 한 달 수입이 30원이었음을 고려하면 엄청난 돈임을 알 수 있다. (1925년 총독부 통계 기준. 그리고 한 달 수입 30원은 총독부가 빈민을 나누는 기준으로 활용했다.)

그의 아내가 기침으로 쿨룩거리기는 벌써 달포가 넘었다. 조밥도 굶기를 먹다시피 하는 형편이니 물론 약 한 첩 써본 일이 없다. 구태여 쓰려면 못쓸 바도 아니로되 그는 병이란 놈에게 약을 주어 보내면 재미를 붙여서 자꾸 온다는 자기의 신조(信條)에 어디까지 충실하였다. 따라서 의사에게 보인 적이 없으니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으되 반듯이 누워 가지고 일어나기는 새로 모로도 못 눕는 걸 보면 중증은 중증인 듯. 

그런데 김 첨지에게는 병든 아내가 있다. 평소 생계가 가난했기 때문에 약은커녕 밥도 제대로 먹이지 못했는데, 김 첨지는 그런 아내에게 ‘젠장맞을 년’이라고 욕을 하지만 내심 챙겨주지 못하는 것에 마음 쓴다. 앞서 언급했듯 인력거꾼은 도시 빈민층의 삶을 살고 있었다. 소설 속 김 첨지는 그나마 집의 행랑방 한 칸을 빌려서 살고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렇지만 대체로 인력거꾼과 같이 강도 높은 육체노동과 저렴한 노임, 불숙련에 기반한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토막민 중 60~80%(1920년대 후반 기준)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토막민이란 농촌과 도시의 하층민이 경성을 비롯한 각 도시, 혹은 그 외곽의 하천이나 제방, 산림, 다리 밑 등의 국유지 혹은 사유지의 노는 땅을 무단 점거하여 거기에 움막을 지어 살다가 점차 고착하여 이른바 토막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년아, 말을 해, 말을! 입이 붙었어, 이 오라질 년!”
“……”
“으응, 이것 봐, 아무 말이 없네.”
“……”
“이년아, 죽었단 말이냐, 왜 말이 없어.”
“……”
“으응, 또 대답이 없네. 정말 죽었나 버이.”
이러다가 누운 이의 흰 창을 덮은 위로 치뜬 눈을 알아보자마자,
“이 눈깔! 이 눈깔! 왜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천장만 보느냐, 응.”
하는 말 끝엔 목이 메였다. 그러자 산 사람의 눈에서 떨어진 닭의 똥 같은 눈물이 죽은 이의 뻣뻣한 얼굴을 어룽어룽 적시었다. 문득 김첨지는 미친 듯이 제 얼굴을 죽은 이의 얼굴에 한데 비비대며 중얼거렸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개벽》 1924.6.)

김 첨지가 ‘괴상하게도’ 운이 좋아 큰돈을 번 아침, 아내는 자신이 아프니 나가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김 첨지는 가만히 있으면 누가 돈을 주냐며 밖으로 나간다. 그렇지만 괴상하게 좋은 그 날의 운 앞에서 김 첨지는 불안함을 느낀다. 불안감을 잠시라도 유예하고 싶었던 김 첨지는 친구인 치삼과 술을 한잔 걸치고, 취중에도 아내가 먹고 싶다던 설렁탕을 사 들고 집에 돌아온다. 그러나 김 첨지가 돌아온 집 안에는 아내가 싸늘하게 죽어있고 어린 애만이 빈 젖꼭지를 빨고 있다.

「운수 좋은 날」을 통해서 1910년대 자유노동자의 삶에 대해서 살펴봤다. 그런데 토지에서 분리된 농민의 삶에는 자유노동자라는 선택지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토지에서 분리된 농민의 존재는 이들을 수용할만한 산업의 발달이 충분치 못했기에, ‘잠재적인’ 프롤레타리아 층을 형성했을 따름이었다.
 

도시노동자의 출현


1910년대까지 일본은 자본 이식의 기반 정비에 치중했다. 이 시기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철도, 도로, 항만 등을 건설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노동자들은 대체로 인프라가 건설된 거점도시에서 부두노동자, 건설노동자, 잡업노동자, 자유노동자 등의 형태로 노무에 종사했다. 

한편 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회사령을 발표하여 토착자본은 중소규모의 성장에 묶어두는 한편 일본인 자본은 정미업, 양조업, 조면업, 방적업 등에 진출한다. 각각의 품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원료산업에 진출한 것이었다. 191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원료산업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한 활황에 힘입어 시멘트제조업, 제철업, 펄프업, 연초, 피혁, 통조림업, 유리, 성냥제조업, 제당업 등에 적극적으로 투자해나갔다. 이에 따라서 공장 수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1910년대 중반부터 공장 수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공장 수에서 조선인 자본과 일본인 자본의 숫자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본 규모에서는 꽤 큰 차이를 보여, 조선인 자본규모에 비교해 일본인 자본규모는 15배 정도의 차이가 존재했다.) 이렇게 자본의 성장이 계속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기반 정비와 원료 생산 부문에 집중하고 있고, 제철, 광산업 등을 제외하고는 경공업에 집중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부분적으로 이식되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아직 지배적이지는 않았다. 1917년 농업생산액에 대한 공업생산액 비율은 15.6%, 1919년에는 18.2%에 불과했다. 노동자의 수 역시 아직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1917년 기준으로 조선 내 농업종사자의 비율은 84.83%로 여전히 지배적이었다. (사실 식민지 시대 내내 인구 구성에서 농민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노동자 내에서도 상업•교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1917년 기준, 전체 인구의 5.87%)가 광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1917년 기준, 전체 인구의 2.15%)에 비해 2배 이상 많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발전이 미약함을 알 수 있다.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의 궁핍한 삶, 최서해의 「홍염」


토지에서 분리된 농민 중에는 이렇듯 도시에서 최하층 노동자로 살아가는 부류가 있었던 반면 농촌에 남아 더 높아진 소작료를 감당하며 농사를 짓기도 하고 간도 등으로 이주해 새 삶의 터전을 찾기도 했다. 특히 이주를 선택한 농민들은 조선의 산업이 미발달한 조건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만약 농촌의 과잉인구를 도시가 수용할 수 있었다면 노동자로 전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만 조선인의 생활은 일반적으로 궁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주자였기에 당연히 그 대부분은 소작농이었고 중국인 지주들의 횡포에 시달렸다. 이렇듯 궁핍했던 이들의 삶을 날카롭게 그려낸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최서해다.

최서해는 극빈 계층의 고통스러운 삶과 저항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연구자들은 그의 작품들이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 고난을 겪고 부정적 현실에 저항하는 개인의 운명을 통해 민족의 운명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상동 관계에 놓인 간도의 현실을 박진감 있게 그렸다는 점,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성을 통해서 가난의 참상과 절망적 심리를 극적으로 표현하였다는 점, 가족의 해체와 이산의 고통을 통해 당대 현실의 단면을 효과적으로 그렸다는 점 등을 지적하며 신경향파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해왔다.

여기서 신경향파 문학은 3·1운동 이전에 형성되었던 민족주의 운동을 배경으로 한 문예사조와 구분되어 신흥한 사회운동, 즉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한 노동운동, 여성운동, 청년운동 등을 배경으로 한 문예사조를 일컫는다. 종래의 퇴폐적 예술지상주의 문학에 반기를 든 신경향파 문학이 제창된 것이다.

최서해는 이러한 신경향파 내에서 최서해적 경향이라 표현될 정도로 한 축을 담당했다. 최서해 소설의 특징은 우선 가난한 민중의 삶을 그 제재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의 저항을 그리는데, 그 저항의 형태가 방화, 살인 등 다분히 파괴적이다. 다만 작품 속의 이런 행위들은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취해진 자기방어적인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은 최서해의 소설 전반에 드러나는데, 그의 강점이기도 했지만, 취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즉 모든 소설이 너무나 정형화되어 있다는 평가와, 제재에 대한 객관묘사는 매우 충실하지만, 결말에서 사회적 관계를 형상화하는 점에서 부족하다는 평가다. 당대의 비평가들은 발단은 ‘사회적이나’, 배경은 ‘비사회적’이라고 평가하곤 했다고 한다.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가 최서해에 대해 간단히 알아봤다. 이제 최서해를 대표하는 여러 작품 중 1927년 1월, 《조선문단》에 실린 「홍염」이라는 작품을 살펴보도록 하자.

겨울은 이 가난한---백두산 서북편 서간도 한귀퉁이에 있는 이 가난한 촌락 빠이허(白河)에도 찾아들었다. 겨울이 찾아들면 조그만 강을 앞에 끼고 큰 산을 등진 빠이허는 쓸쓸히 눈 속에 묻히어서 차디찬 좁은 하늘을 치어다보게 된다.
(…)
등진 산과 앞으로 낀 강 사이에 게딱지처럼 끼어 있는 것이 이 빠이허의 촌락이다. 통틀어서 다섯 호밖에 되지 않는 집이나마 밭을 따라서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모두 커단 나무를 찍어다가 우물정(井)자로 틀을 짜 지은 집인데 여기 사람들은 이것을 '귀틀집'이라 한다. 지붕은 대개 조짚이요, 혹은 나무 껍질로도 이었다. 그 꼴은 마치 우리 내지(간도서는 조선을 내지라 한다)의 거름집(堆肥舍)과 같다. 심하게 말하는 이는 도야지굴과 같다고 한다.
이것이 남부여대로 서간도 산골을 찾아들어서 사는 조선 사람의 집들이다. 빠이허의 집들은 그러한 좋은 표본이다.

서간도의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라는 계절 묘사를 통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된 환경 속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조선 사람들의 집을 묘사하면서 조선인들의 빈궁한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들이 사는 집은 돼지 굴로 묘사되기도 한다. ‘남부여대’는 남자는 짐을 등에 지고 여자는 짐을 머리에 인다는 뜻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1910년대에는 농민 상당수가 삶의 터전을 찾아 조선을 떠나, 간도를 비롯한 만주 등지로 이주한다. 1910년에 만주 거주 조선인은 약 20만 명이었는데, 1920년에 이르면 45만 명으로 증가한다.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주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치적 불만과 경제적 압박이었다. 우선 정치적 불만은 한일병합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런 이들이 상당하다 보니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1914년, 간도를 ‘배일 조선인의 소굴’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두 번째로 경제적 압박은 앞서 언급했던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인한 것이었다. 

이런 묘사에서 최서해가 자신을 스스로 이주노동자 계급으로 인식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언제나 이놈의 소작인 노릇을 면하여 볼까? 경기도에서도 소작인 생활 십 년에 겨죽만 먹다가 그것도 자유롭지 못하여 남부여대로 딸 하나 앞세우고 이 서간도로 찾아들었더니 여기서도 그네를 맞아 주는 것은 지팡살이[小作人]였다. 이름만 달랐지 역시 소작인이다. 들어오던 해는 풍년이었으나 늦게 들어와서 얼마 심지 못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흉년으로 말미암아 일 년내 꾸어먹은 것도 있거니와 소작료도 못 갚아서 인가에게 매까지 맞고 금년으로 미뤘더니 금년에도 흉년이 졌다. 다른 사람들도 빚을 지지 않은 바가 아니로되 유독이 문 서방을 조르는 것은 음흉한 인 서방의 가슴 속에 문 서방의 용례(금년 열 일곱)가 걸린 까닭이었다.

주인공 문 서방은 아내와 딸 용례와 함께 살길을 찾아 먼 이곳까지 왔지만 결국 다시 소작농이다. 조선의 빈농은 특히 간도에 대해 ‘영생처’, ‘요지정토’, ‘낙토 이상향’ 등으로 생각하며 이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이들을 더욱 괴롭힌 것은 1915년 이후 《매일신보》를 통해 대두된 ‘만주식민지론’이다. 당시 일본에 대한 정치적 불만으로 만주로 이주한 이들은 고토회복의 정신에 기반해 있던 측면이 있었는데, 일본은 자국 식민지의 국민이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식민지 확보로 인식한 것이다. 이미 러일전쟁 이후 남만주에 대한 배타적 경제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적극적으로 만주정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식민지 국민에 불과한 조선인은 일본 만주정책의 앞잡이에 불과했다. 이렇듯 경제적 어려움과 민족적 어려움이 겹쳐 조선인들의 삶은 더욱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 중국인 지주 인가에게 수모를 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결국 빚을 갚지 못한 문 서방은 인가에게 실컷 얻어맞고 결국 딸까지 빼앗기고 만다. 그 뒤로 인가는 용례를 숨기고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딸을 빼앗긴 아내는 결국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게 되고 문 서방은 아내가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딸을 보고 싶다는 말에 인가를 찾아가 용례의 얼굴만이라도 보여 달라고 사정한다. 그러나 인가는 용례의 면회를 끝까지 거절하고, 아내는 딸을 그리워하다 죽고 만다.

그러는 사이에 그림자는 인가의 울타리 뒤에 산같이 쌓아놓은 보릿짚더미에 가서 성냥을 쭉 긋더니 뒷산으로 올리닫는다.
처음에는 바람 속에서 판득판득하던 불이 삽시간에 그 산같은 보릿짚더미에 붙었다.
“훠쓰(불이야)!”
하는 고함과 함께 사람의 소리는 요란하였다. 모진 바람에 하늘하늘 일어서는 불길은 어느새 보릿짚더미를 살라 버리고 울타리를 살라 버리고 울타리 안에 있는 집에 옮았다.
(…)
그러는 사이에 울타리는 물론 울타리 속에 엉큼히 서 있던 큰 집 두 채도 반이나 타서 쓰러졌다.
이런 불 속으로부터 여러 사람이 오고 가는 밭 가운데로 튀어나가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 하나는 커단 장정이요, 하나는 작은 여자이다. 
(…)
문 서방이 여러 사람을 헤치고 두 그림자 앞에 가 섰을 때 앞에 섰던 장정의 그림자는 땅에 거꾸러졌다. 그때는 벌써 문 서방의 손에 쥐었던 도끼가 장정 인가의 머리에 박혔다. 도끼를 놓은 문 서방의 품에는 어린 여자의 그림자가 안겼다. 용례가……
그 바람에 모여섰던 사람들은 혹은 허둥지둥 뛰어버리고 혹은 뒤로 자빠져서 부르르 떨었다. 용례도 거꾸러지는 것을 안았다.
“용례야! 놀라지 마라! 나다! 아버지다! 용례야!”
문 서방은 딸을 품에 안으니 이때까지 악만 찼던 가슴이 스르르 풀리면서 독살이 올랐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이렇게 슬픈 중에도 그의 마음은 기쁘고 시원하였다. 하늘과 땅을 주어도 그 기쁨을 바꿀 것 같지 않았다.
(《조선문단》 1927.1.)

아내를 잃은 문 서방은 더는 눈에 뵈는 것도, 잃을 것도 없다. 그는 도끼 한 자루를 손에 들고 인가로 간다. 가서 불을 지르고 도끼로 인가를 죽인 후 용례를 구출한다. 이런 결말은 언급했듯 최서해의 소설에서 전형적으로 그려지는 결말이다. 마지막에 기쁨과 시원함을 느꼈다는 표현에 대해서 작가가 주체적으로 일어서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의도에서 넣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갈등이 살인과 방화로 해결된다는 것은 사실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소작농인데다 방화범이자 살인범이다. 그의 앞으로의 삶도 고달플 가능성이 높다. 긍정적 전망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최서해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조선공업의 발전, 노동자가 마주하게 된 현실

 
지금까지 1910년대 조선의 상황을 소설과 함께 살펴봤다. 이 절에서는 1920년대 전반기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1910년대 중반부터 공장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여 1919년 3·1운동 이후로 회사령이 폐지되면서 상대적으로 공업 발전이 조금 더 진전되었고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공업이 발전하고 있었다. 그 비중이 절대적으로 많지는 않았지만,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공업화를 그린 한설야의 「과도기」


「과도기」의 작가 한설야는 이전 신경향파 문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프로문학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다. 1929년 4월, 《조선지광》에 실린 「과도기」는 그의 대표작으로, 1920년대로 들어오면서 발전하기 시작하는 조선의 공업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은 실제로 함흥에 지어진 질소비료공장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 속에서 공장을 짓는 회사는 현실에서는 일본질소라는 회사다. 일본질소는 1925년, 수력발전소와 공장을 지을 것이라고 발표한다. 이 과정에서 함흥번영회는 공장을 지역 내에 유치하기 위해서 회사와 협상을 하기도 하고, 지역 내 긍정적 여론을 만들기 위한 선전 활동을 하는 등 매우 적극적으로 공장 유치를 추진했다. 1926년에 함흥에 짓는 것이 확정되자 함흥번영회와 관청은 부지매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들은 시세에 비해 낮은 가격의 토지보상금을 부지에 사는 1000여 호의 주민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주민들은 낮은 가격과 어업을 이유로 반대하지만 함흥군수, 면장, 이장 등이 총동원되어 주민들에 회유 및 협박을 가한다. 강경반대파 주민은 경찰서로 끌고 가 폭행을 자행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부지 거주 주민을 몰아내고 공장 유치에 성공한다. 이후 함흥번영회 회원들은 유치 활동을 바탕으로 공직에 진출하거나, 접대업, 부동산 등으로 부수입을 얻기도 했다. 이렇듯 지역의 행정권력과 일제의 자본이 결합해 설립된 흥남공장은 1929년에 첫 조업을 시작한다.

「과도기」는 주인공 창선이 간도에서 4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것에서부터 공장에 취업하는 장면까지를 그리고 있다.

“여보, 이거 영 딴판이 됐구려!”
창선이는 흘낏 아낙을 보며 눈이 둥그레졌다.
고향은 알아볼 수 없게 변하였다. 변하였다기보다 홀랑 없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대신 오 리만큼씩 되어 보이는 긴 벽돌집, 얼기설기한 쇠사슬집, 쇠고깔을 뒤집어쓴 둥그런 검은 무쇠통집, 그리고 겹으로 된 긴 철길이며 아슬아슬한 굴뚝들이 잠뿍 들어서 있었다.

고향의 옛 풍경은 사라지고 새것이 생겨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공업화되어가고 있는 고향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제목인 ‘과도기’는 바로 어촌에서 공업으로 바뀌어가는 고향의 모습을 표현한 단어다. 창선은 이런 고향의 모습에 혼란을 느끼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묻는다. 지나가던 사람은 창선의 고향인 창리는 고개 너머의 구룡리로 옮겨갔다고 말한다. 비로소 창선은 안심을 하면서 구룡리로 넘어가 어머니와 재회한다. 창선은 어머니와 회포를 푼 뒤, 그의 형 창룡 내외에게 창리가 구룡리로 넘어오게 된 그간의 사정을 듣게 된다.

창선이의 형 창룡이 내외가 집에 돌아온 것은 밤이 좋이 이슥한 때였다. 
(…)
그리고 창룡이는 처음 창리에 화학 비료 공장이 설 때 형편을 대강 이야기하였다. 이 근방 토지를 매수하며 동네 사람을 내쫓던 전말과 그 사이에 저놈들의 앞잡이인 소위 읍내 유력자들이 나서서 춤을 추던 야바위에 대하여도 말하였다.
“이리로 옮기기만 하문 여게다 인천만한 항구를 만들어 주고, 시장, 학교, 무슨 우편소니, 큰길이니 다 해준다고 떠벌리고……또 야단스러운 지도를 들고 와서는 구룡리를 가리키며 제2의 인천을 보라구……산 눈깔 빼먹을 놈들이야…….” 
(…)
“집값은 다 받았겠지요?”
“그야 받았지만, 그걸 가지고 뭘 하나. 고기가 잡혀야 말이지…… 워낙 금년은 어산이 말 아니네.”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창리에 살던 주민들을 이주시킬 필요가 있었다. 회사는 관청의 협조에 힘입어 인천과 같은 항구를 만들어 준다는 감언이설과 함께 마을 주민들을 이주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곧 속임수였음이 밝혀진다. 보상금도 얼마 되지 않았고 지어준다는 항구는 관청과 회사가 서로 책임을 넘기면서 모르쇠로 일관한다. 더욱이 구룡리는 어업에도 부적합한데, 배를 대기에는 수심이 너무 얕고 주변은 도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수레도 제대로 다닐 수 없다. 이전과 같이 어업으로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고장 주민들은 뒤를 이어 상투를 자르고 비료회사 공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공장은 아무나 함부로 써 주는 것은 아니었다. 힘꼴 세고 뼈대 굵고 젊고 억대우 같고 미욱스럽게 생긴 사람만이 뽑혔다. (…)창선이도 마침내 공장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감발을 치고 직공 시험 치러 갔다. 직공시험이라야 별것이 아니고 가만히 보려니까 순전히 근력 다루기였다. 체대와 손발을 훑어보고 커다란 모래섬을 들려보고 하더니 나중은 손바닥을 벌리라 하고 거기에 털솔 같은 데 잉크를 묻혀 가지고 탁 치니까 손바닥에 푸른 글자가 찍혀졌다.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그것은 분명 소 우(牛) 자였다. 사람에게 소 우 자가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벙벙해 있으려니까 감독인지 십장인지 한 우둥퉁한 사나이가 헤벌쭉이 이빨을 드러내 놓으며,
“좋다, 일등이다. 내일부터 오너라.”
라고 턱질을 하였다.
그리하여 다음날부터 창선이는 상투를 자르고, 감발 치고, 부삽 들고 콘크리트 반죽하는 생소한 사람이 되었다.
(《조선지광》, 1929.4.)

전통적으로 벌어먹던 어업이 더는 불가능해진 창리 주민들은 결국 공장에 취직하는 일 말고는 답이 없었다. 그마저도 늙은 사람과 약한 사람은 할 수 없었고, 화전이나 일궈 먹을까 하며 다른 곳으로 떠나가기도 했다. 창선 역시 귀향하면서 가졌던 안락한 삶에 대한 꿈은 버리고 공장노동자가 되어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 소설은 신경향파 문학의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과도기」는 한설야의 고향인 함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로 인해 관념 속의 어촌이나 공장의 실상이 아니라, 공업화 과정에서 어촌이 어떻게 해체되는지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한편으로 「과도기」의 결말은 최서해의 부정적 결말과는 다르게 상황에 패배하여 좌절하거나 하지 않고 그 상황에 대처하고 마주섬으로써 또 다른 전망이 가능하게끔 하고 있다. (실제로 「과도기」의 세계관은 후속작 「씨름」으로 이어지는데, 이 작품에서는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긍정적 인물이 등장한다.)
 

1920년대 조선의 공업화


1920년대 들어서면서 조선의 공업 발전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런 과정을 수치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0년에서 1928년의 시기, 공장 수는 2.6배, 자본금은 3.4배, 종업원 수는 1.8배, 생산액은 2.2배 증가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전히 1920년대가 완전히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전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1920년 농업생산액에 대한 공업생산액의 비중은 13.5%로 농업생산이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또 부문별 공업생산액의 70.6%를 차지한 부문이 식료품공업이었는데, 이 부문은 정미업이 주요 내용으로, 수공업적 기술에 기초한 매뉴팩처에 가까웠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표지라 할 수 있는 기계제대공업의 발전이 본격화하는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조선 노동자가 직면한 노동문제 - 「출근정지」, 「오전3시」, 「여직공」


공장노동자는 자본주의 발달 초기과정에서 대체로 그러하듯 가혹한 노동통제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조선은 식민지였기 때문에 민족 차별도 존재했다. 조선 노동자는 장시간·저임금 노동, 산재, 해고 등의 문제를 겪었다. 특히 여성노동자는 성폭력에도 노출되어 있었다.
 
사진은 식민지 시대 군산의 한 정미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작업하는 모습이다. 보다시피 기계가 위주가 아니라 사람들이 쭉 늘어앉아 쌀을 고르는 노동집약적 매뉴팩처 양식이었다. (사진출처: 《전북일보》, 2020.1.7.)
 

감원과 산업재해, 이북명의 「출근정지」


이북명은 1910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특이한 점은 함흥고보를 졸업하고도 공장노동자로 살았다는 점이다. 지식인으로서 살 수도 있었던 그는 1927년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취직하여 3년간 일했다. 그러던 중 공장친목회 조직사건으로 붙잡힌 뒤에는 창작활동에 매진한다. 그의 데뷔작 「질소비료공장」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생생하고 객관적인 묘사로 당시에도 문제작으로 평가받았다. 이후 「암모니아 탕크」, 「출근 정지」 등의 소설을 발표한다. 여기서는 1932년 12월, 《문학건설》에 연재된 「출근정지」를 살펴본다.

두께가 일 촌이 넘는 강철판으로 꾸민 변성탱크 ……. 직경이 열 자나 되고 높이가 이십 자 가량 되는 무거운 탱크는 이십 자나 되는 쇠기둥 위에 올라앉았다. (…) 이 탱크 안에서 암모니아, 유산, 탄산이 몇백 기압으로 화합하여 지독한 약품을 만들어낸다. 이 약품을 린광석(燐鑛石)과 화합시키면 유인산비료(硫燐酸肥料)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기압이 항상 높고 있는 탱크이니만큼 항상 폭발이 될 위험성이 많다. 직공들은 이 탱크 곁으로 다니기를 싫어한다. 탱크는 직공들에게 마(魔)같이 보였다.
비료공장의 생산은 여러 화학물질을 고압으로 변성시켜 고압 탱크에 보관하는 공정을 거치는데, 탱크의 강철판이 아무리 두껍다 하더라도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면서 일할 수밖에 없다. 그러던 와중에 비료공장에서는 800명을 감원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직장의 모범 직공으로 일하던 창수는 공장일로 인해 폐결핵을 앓고 있음에도, 쫓겨나면 생계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쉴 새 없이 기침하면서도 일을 계속한다. 그러나 회사는 병든 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창수는 출근정지 통고를 받게 된다. 
잊으랴! ‘소화六년 십일월 x일 오후 세시 십오분 ……’ H읍 삼 만 시민을 거리로 뛰어나오게 하고 간담을 써늘케 하던 그 폭음(爆音)!
「이게 어데서 큰일났군.」
「또 회사야.」
「변성탱크가 폭발이 되었다네.」
(…)
H공장 삼천 명 직공이 이런 소리를 지르면서 십분도 못되어 변성기계로 모였다. 독한 냄새가 전 공장에 퍼졌다. 그러나 그 냄새는 직공들의 목전의 광경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사람은 어찌됐나.」
「일곱이 간 종적이 없다네.」

안 그래도 터질까 불안해하던 탱크였는데, 안전장치마저 제대로 달아 두지 않았다. 결국 폭발사고가 일어나 7명의 직공이 희생된다. 회사의 감원 통보에도 별달리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던 직공들이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히 죽은 동무의 가족을 살려주라며 함께 행동한다.

「죽은 동무의 가족을 살려주어라!」
이 소리가 어느 직공의 입에서 떠오르자 직공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그렇다!」
하고 고함을 친다. 그들의 시선은 보기 무섭게도 날카로웠다.
「우리는 출근정지에 ××하자!」
이 소리를 듣자 모아선 직공은 일제히 ××××허공에 치여들면서 ×성을 질렀다.
「×타!」
「×러라!」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던 공장장 사원××들과 갓소에 걸린 주인 잃은 찢어진 작업복을 바라보면서 삼천 명의 직공은 꾹 버티고 언제까지 서 있다.
북국의 찬바람이 대지를 호령하면서 지나간다. 그때마다 갓소에 걸린 찢어진 의복의 펄럭이는 소리가 그들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였다.
(《문학건설》, 1932.12.)

「출근정지」 역시도 작가의 현장 체험을 바탕으로 노동자의 일상생활과 산업재해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 자연발생적 계급투쟁을 그려내고 있는데, 이로써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환기하고 있다. 한편 현실의 노동자들이 상황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각성하고 함께 단결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이로써 긍정적 전망의 형상화에 성공한 소설이라 평가받는다.

덧붙여 소설 본문의 ×표시는 ‘복자’라 불리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소설을 읽다 보면 ××, ○○, “이하 ○행 생략” 등과 같은 표시가 자주 보인다. 이는 실제 검열로 인해 삭제된 내용이 있어서 표시된 경우도 있었지만, 검열에 걸릴 것을 예상해 편집자나 작가가 미리 넣는 경우, 일단 냈지만 내용을 바꾸라는 지시에 그냥 복자로 넣은 경우도 있다. 복자가 많을수록 저항 의지가 강한 것으로 인식되는 시대 풍조가 있었다고 하는데, 심지어는 이에 따른 과시적 복자표기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장시간-야간노동, 이북명의 「오전3시」


1935년 6월, 《조선문단》에 실린 이북명의 「오전3시」는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전(前)야근자와 교대해 일하는 후(後)야근자들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고막을 깨뜨리는 소음을 육신에 감수하며 악취를 호흡하며 강한 전광을 안구에 받으면서 일하는 그들은 한시간을 하루같이 길게 생각한다. 하품이 입을 다물새 없이 터져나오고 온 육신이 소음같이 피곤하여져서 그들은 도무지 맥을 차리지 못하였다.
「에미네(아내)는 혼자서 자겠구나, 제-기.」
이런 생각을 어렴풋이 하면서 ‘쎈트르’모터의 ‘스위치’를 쥔 명수의 눈에는 기계, 사람, 모터 할 것 없이 모두가 한군데 범벅이 되어서 주마등 모양으로 빙빙 돈다.
(…)
명수는 눈두덕에 모아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모터’에 기댄 채 끄덕끄덕 졸기 시작한다.

회사는 후야근자에게 하루 일급에 십오 전을 더 붙여주기는 하지만, 일주일간 교대로 후야근을 강제했다. 겨우 십오 전을 더 벌자고 잠도 못자면서 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강제로 시키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새벽 3시와 4시 사이는 가장 괴로운 시간이다. 더는 참을 수 없을 때, 그들은 공장 한쪽에 있는 기초콘크리트 구멍으로 기어들어가 잠시간 눈을 붙인다. 너무나 피곤했던 명수는 동료들에 양해를 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 누워있는데, 감독에게 들키고 만다.

명수가 징계를 받거나 해고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료들은 다만 한 시간만이라도 작업 중에 돌아가면서 잘 수 있게 요구해보자는 제안을 한다. 동료들은 모두 동의하고 다음 날 오전조와도 만나서 이 일을 함께 의논한다. 비단 이 문제가 명수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으므로 모두가 찬성했고, 자체적으로 진정위원을 선출한다.

계장이 출근하기를 기다려서 그들 다섯 명 진정위원은 계장을 방문하였다. 명수와 감독은 사무실에는 보이지 않았다. 준식은 후야근의 괴로움을 하소연하고 한 명씩 번갈아 한 시간씩 자도 생산능률에 아무 지장이 없겠다는 것을 책임있게 말하였다. 그리고 명수에게 절대로 처벌해서는 안되겠다는 것과 명수가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된 사정 이야기와 그것은 비단 명수뿐만 아니라 직장 이백칠십 명 종업원들도 그렇게 하여가지고 후야근 때를 지나보내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말하였다.
(…)
다섯 명의 진정위원은 연방 머리를 끄덕끄덕한다. 삼십 분 후에나 진정위원하고 명수가 식당으로 나오자 모여섰던 군중이 여섯명을 둘러쌋다.
준식이가 진정결과를 보고하니 군중의 얼굴에는 확실히 만족과 환희의 빛이 떠올랐다. 춤을 추는 친구도 있다. 손뼉을 치는 친구도 있다.
(…)
준식 자신도 각오하고 든 일이 의외에도 아주 쉽게 허락을 받고 보니 도리어 무서운 생각이 났다. ‘앞으로 늦춰주고 뒤로 결박하자는 수작이 아닐까?’ 준식은 이런 머리생각을 하면서 수도의 ‘발프’를 틀었다.
‘그렇다면 그 때는 또 그 때에 취할 태도가 있을거지.’ 준식은 두 팔을 훨씬 거두고 기름 묻은 팔을 비누로 기운 좋게 닦는다.
(《조선문단》 1935.6.)

「오전3시」는 조직적 노동운동을 일상적 수준에서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성공하여 소설적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또 노동자들이 단체 행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낙관적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시대 노동소설선』을 엮은 하정일은 이 소설에 담긴 노동자들의 공장 생활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노동소설 중에서도 압권이라고 평가하면서, 한설야의 「과도기」, 「씨름」과 함께 식민지 시대 최고의 소설 중 하나로 꼽힐만한 작품이라 평가한다.
 

여성노동자의 고난과 각성, 유진오의 「여직공」


유진오는 제헌헌법의 초안을 기초한 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는 식민지 시대에 보성전문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도 병행했다. 유진오는 실천하지는 않았지만 이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 카프조직에 참여하여 맹원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카프의 지도이념과 창작노선을 지지하고 거기에 걸맞은 작품을 썼다.

「여직공」은 그런 가운데 쓰인 작품이며, 몇 안 되는 동반자 작가의 노동소설 중 하나다. 이 작품은 노동자의 의식화, 조직화 과정과 이에 대한 회사의 탄압, 여성노동자에 대한 성폭력, 그 여성노동자의 각성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사공장에 다니는 옥순은 어느 날 공장 감독이 불러 그의 응접실로 간다. 그곳에서 감독은 다짜고짜 옥순에게 금일봉 봉투를 건네고, 받지 않으려는 옥순에게 화를 내면서 거의 강제로 봉투를 준다. 그리고는 옥순의 친구 근주에 대해 물어보면서 그녀의 집에도 가고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에게 보고하라고 한다. 

옥순은 감독의 말대로 근주네 집에 놀러 가는데, 그 곳에는 근주의 남편, 동료인 순례와 모르는 여자가 앉아있었고, 뒤늦게 회사 기숙사에 사는 동료 보배도 합류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우리는 왜 가난한가』라는 책을 함께 읽으며 토론하는 한편 공장 내에서 그들의 활동을 각자 보고한다.

모든 것이 옳은 말이었다. 사실 비단실을 만드는 것은 자기네들이다. 또 그 비단실을 켜는 고치를 맨든 것도 시골 여인네들이 농삿바라지 틈을 타서 봄부터 공을 들인 것이다. 그렇건만 자기네들은 그 비단실 값의 몇십 분지 일 밖에는 손에 쥐지 못하고 나머지는 회사에서 몽땅 먹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회사는 그 삯전을 몇 번이나 깍았고 지금 또 깍으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결하여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옥순이었지만 감독이 무서워 결국 함께 있던 동료들을 고발하고 만다. 감독은 고발을 다 듣고 난 뒤 옥순을 겁탈하기까지 한다. 그날 이후에도 감독은 옥순에게 돈을 주면서 그들의 동태를 살필 것을 제안하지만 옥순은 단칼에 거절하고 근주 부부, 순례, 보배 등과 함께 활동한다. 결국 옥순과 보배는 해고 통보를 받는다.

감독은 옆에 앉고 사무실 양복쟁이가 누런 봉투를 주며
「녀자들이 밤에 모여단기며 쓸데없는 공론을 하는 것은 재미없는 일이야. 보배는 철망까지 넘다가 들켰기에 그대로 내보냈지만 옥순이는 아즉 이렇다할 짓을 한 것이 없으니까 특별히 보름치 삯전을 주어 내보내는 것이니 그리알고 이담부터는 아모쪼록 착한 사람이 되란말이야. 알어듣지?」
옥순이는 입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고 봉투를 받았따. 쫓겨나는 것이 도리어 마음을 가볍게 하기도 하였다.
양복쟁이는 또 말을 이어,
「그런데 옥순이는 감독한테 돈 취해 쓴 일 있지? 십원.」
너무나 의외의 소리에 옥순이는 어리둥절 하였다.
「보름치 일곱이면 오륙 삼십, 일륙은 육, 합이 구원인데 거기서 취해 쓴 돈 십 원을 제하면 도리어 일 원이 부족이지만 감독의 말도 있고 해서 특별히 일 원 오십 전을 주는 게야.」
무엇이 어째! 옥순은 활동사진의 프렛쉬 모양으로 돈 십 원 또 참회 또 오 원, 감독의 꼬임, 폭력, 만행 ……을 생각하였다.
친구 근주를 고발하고 자신을 겁탈하고 준 십 원을 퇴직금에서 떼어가는 것을 본 옥순은 분노한다.
분하다. 원통하다. 그러나 자기는 누구를 미워해야 할 것이냐?
- 감독이냐? 공장이냐?
아니다. 그것보다도 생각하면 자기는 가난한 사람의 딸로 태어날 때에 벌써 오늘 이렇게 될 운명을 가지고 난 것이다. (…) 자기가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은 물론, 자기와의 몇십만, 몇백만의 딸들이 같은 길을 밟을 것이다.
옥순이는 다시 동무들을 생각해 보았다. 근주, 강훈이, 경옥이, 보배, 정숙이 …… 모두들 믿음직한 사람이다. 그들은 일신을 마치고 온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 날 밤 모임에서 옥순이는 전에없이 열렬하게 의견을 토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이번 사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공장 속의 조직을 진행하기를 결의하였다.
일변 회사에서는 이리해 불량분자를 대대 떨어낸 후에(그 통에 감독은 난데없는 꿀떡까지 하나 얻어먹고) 다시 제사차의 정리계획을 진행하였다.
날이 갈수록 위기는 가까워져갔다. 회사 편에는 임의 정리 계획이 대강 서고 직공 편에는 눈에 안보이는 버섯뿌리 같이 조짐이 뻗어나갔다.
(《조선일보》 1931.3.1 ~ 24.)

「여직공」은 옥순이라는 중도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녀의 계급적 각성을 그림으로써, 양측의 본질을 선명하게 부각한다. 이러한 인물 설정에 대해서 소설의 객관성을 확보해주는 동시에, 이 당시 소위 ‘전위’를 그릴 것을 지침으로 했던 볼셰비키화 소설에서 초래될 수 있었던 인물의 추상화, 전망의 주관화, 도식적 낙관주의라는 문제를 피해 갈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1910년대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의 노동자의 삶에 대해서 소설과 함께 살펴봤다. 아직 공업이 발전하지 않아 도시 하층민으로 살아가던 1910년대의 노동자의 삶과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제조업 노동자의 삶을 살펴봤다. 특히 1920년대 노동자의 삶에서는 산재, 장시간 노동, 여성노동자에 대한 성폭력 등 현재에도 발견할 수 있는 노동문제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볼 수 있었다. 다음 호에서는 1920년대 후반부터 해방 전까지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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