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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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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책과나_김원정97.hwp

"용감한 여성들,늑대를 타고 달리는"

김원정 |

1. 얼마 전 국회에서 회의를 하던 중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정책위원회 선배였다. "내일 두시에 집창촌 여성들이랑 정책위 의장 면담이 있으니 오전에 브리핑 해주세요."
"네? 그 약속이 어떻게 잡힌 건가요?" 나는 엄청 당황해서 되물었다.
민원실을 통해 접수된 민원이고, 하월곡동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온다고 했다.
전화를 끊은 후 다시 회의에 집중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어서 저녁 식사, 술자리, 숙취에 전전긍긍했던 다음날 오전까지, 브리핑을 하고 2시를 조금 넘겨 면담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내내 부담스럽고 두려운 심정이 가시질 않았다.
여섯 명의 언니들은 우리 당의 성명에 문제가 있다,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라 성노동자다, 다방이나 룸이랑 다르게 우리는 편하게 일하고 있다 등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의장과 나는 '우리 당은 기본적으로 성매매방지법의 취지에 동의하기 때문에 당신들과 입장이 다를 수는 있지만 당신들이 바라는 생계대책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싸울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언니들은 그런 우리 입장을 수긍했다. 자신들도 그것을 바라고 애초에 요구했지만 여성부에서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직업인으로 인정하라, 일터를 돌려달라.'는 요구로 선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생계대책이 제대로 마련될 가능성이 별로 없으니 그런 요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금의 입장으로 싸울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 자리에서 의장은 국회 앞 농성장을 함께 방문하자고 나에게 제안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함께 고민하고 싸우자며 언니들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분노스런 표정으로 가득했던 첫 만남은 그나마 조금 자연스러운 웃음을 나누는 사이에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데모라는 게 참 쉽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충고(?)를 했고 언니들은 열린우리당은 면담요구를 거절하는데 우리 당이 자신들을 만나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했다. 하지만 그녀들이 나와 의장, 아니 우리 당과의 약속을 과연 신뢰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시간 반 동안의 대화가 끝난 후 나는 기진맥진 상태가 되었다. 지구당 게시판 - 요즘 한창 성매매 논쟁으로 뜨거웠던 - 에 간략하게 감회를 적고 '내가 무엇이라도 더 그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해야 할 텐데 너무 힘들다.'는 말을 남겼다. 내가 '힘들다'고 표현한 것에 대해 당원들은 많이 격려를 해주었다. 몇 시간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나를 묶어 두었던 그 날의 면담을 무사히? 마쳤다는 생각에 일면 후련함도 있었지만 나는 너무 힘들어졌다. 내 안과 밖 모든 상황이 너무 버거워서 뭔가 결단을 내리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2. 테헤란로 뒷골목에 있는 친정집 주변으로 하나 둘 룸살롱과 모텔이 고층 빌딩에 가려진 채 남몰래 늘어나던 때쯤, 늘 밤늦어서야 그 앞을 지나가던 나에게 하나 둘 낯선 풍경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룸살롱과 모텔이야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외관이었지만 밤늦도록 주변에 세워진 고급 승용차들은 집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의 룸살롱이 보통 룸살롱(?)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 손님의 승용차 뿐 아니라 마치 방범을 서 듯 그 주변을 관리하고 있는 이른바 '깍두기'스러운 남자들의 출현은 나의 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그런데 그렇게 몇 개월, 몇 년이 흐르다 보니 나는 가로수를 볼 때처럼 그들의 옷차림과 천막, 난로 같은 소품에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되었고, 나는 그들의 주목도 관심의 대상도 아니라는 일종의 안도감까지 느끼며 그 골목을 자연스럽게 지나치곤 했다.
가끔 술집 문 앞을 지날 때 손님을 배웅하러 나오는 여성들을 보기도 했지만 나는 말 그대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단지 티비에서 묘사하는 소위 '술집 여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그녀들과 나의 관계를 탐색하는 데 상당히 많은 나의 에너지를 투여하고 있다. 직접 그녀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고 그녀들이 적어준 전화번호를 들여다보며, 마구 뛰는 심장을 부여잡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밤잠을 설치며 성매매를 둘러싼 폭발적인 논란의 한복판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매춘'이라는 내가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 아니 관계없는 세상을 그저 하나의 풍경으로 인식했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런 나에게 그녀들은 아주 강하게 말했다.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우리가 일하는 곳에 와서 조사를 해라. 우리의 실태를 알아야 한다." 그녀들은 나의 지금 심정과 상태를 정말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3. "공식처럼 따라다니던 '매춘여성=억압=피해'라는 이해가 그 동안 성매매 공간 안에 있는 여성들의 삶을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 영역으로 꺼내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언급되고 있는 여성들의 피해 상황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매매를 둘러싼 논의에서 우리가 더 깊은 눈길로 돌아보아야 할 것들이 있지 않을까. … 쉽게 드러나지 않는 좀 더 세세한 불이익들. 또한 열악한 상황 이면에 존재하는 그들 내부의 생명력, 스스로가 진단하는 삶의 문제, 미처 다 드러내지 못했던 목소리, 성매매 체제의 변화 이전에 그들이 꿈꾸는, 하루하루 겪는 일상의 변화와 같은 여성들의 다양한 삶에 귀 기울이고 이를 인정하는 것은 더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내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 [책을 엮으며] 중에서

누군가 성매매 여성들이 일하는 공간에서 보장받을 수 있는 '인권'을 열거할 때, 나는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애써 되물었다. 성매매 여성을 '성노동자'로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며 역시 미친 것 아니냐며 분노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그러한 주장에 담긴 '말'들이 - 성매매 합법화나 공창제를 주장하는 '입만 산 붕어'들의 말이 아니라 성매매 일을 하는 여성들에 의해 어떻게 구성되고 '붕어'들의 말과 전혀 다른 의미로 전유되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연구자면서 또한 이웃으로 성매매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삶을 공유해온 또 다른 여성들의 고민과 갈등은 나를 더욱 힘든 상황으로 밀어 넣는다. 학자도 관찰자도 지원활동가도 아닌 나의 위치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성매매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그렇지 않아도 헤매고 있는 나를 빠져나올 길을 찾지 못할 공간에 밀어 넣는다.

4. 이건 며칠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때 그 언니들은 성매매방지법에 대한 당의 성명을 비판하기 위해 작성된 '성노동자 전국연합(준)'의 성명서를 의장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 자리에 왔던 것이었다. 나는 그 성명서를 성매매특별법폐지 까페 회원인 한 이름도 얼굴 모르는 사람의 블로그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그(혹은 그녀)는 성매매 여성들에게 단결해서 성매매방지법에 맞서 싸우라는 격려의 편지 또한 여러 차례 자신의 까페와 블로그에 올렸다. 그(혹은 그녀)의 격려가 성매매 여성들이 '성노동자'로 스스로를 조직하는데 격려가 될지 아님 미친 소리로 들릴지는 나도, 그(혹은 그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글에 담긴 한 '당돌한 여성'의 말처럼 "아가씨들이 일어나면 주인들도 어쩔 수 없어. 힘은 없어도 일단 모이면,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해결될 수 있어." 그래. 누군가 말했다, 그녀들이 입을 여는 순간 세상은 뒤집어 질꺼라고. 그 순간 성매매를 둘러싼 입만 산 붕어들 간의 논쟁은 순식간에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럴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나와 우리 사회 누군가가 무엇을 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선 여전히 깊이 생각해 볼 많은 것이 남아있다. 성매매방지법이 그런 조건을 만드는데 기여할지 오히려 그르칠지 역시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문제다. 그런 만큼 제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말자.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 부분만 건드려보고 결론을 '누구'에 대한 비판, '무슨무슨 주의'에 껴 맞추려고 억지 부리지도 말자.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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