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4.11.50호
첨부파일
_문문주.hwp

노동자 계급을 잊지 않기 위하여

문문주 |
어떤 ‘연설’, 어떤 ‘고백’
“17, 18년 동안 민주노조 투쟁하면서 노동운동이 정규직들의 임금인상만 한 거에요, 이주, 여성, 비정규 노동자 다 내버려두고 그냥 간 거에요. 이제 정규직 노동운동은 ‘양치기 소년’이 됐어요. 시민의 안전 얘기하죠. 그러면서 임금 올리고 성과급 등 다 얻어가요.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인정하지만 도의는 있어야 되요.”
얼마 전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주최로 열린 특강에서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 말이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서 식상해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래도 너무 심한 거 아니냐며 내심 불쾌해 할 사람도 있을 성싶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났다. 이미 한참 오래 전에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와 ‘한국 노동자들의 저급한 수준’에 실망하여 공개석상에서 전향을 고백했던, 그래서 지금은 수구보수 신문들이 가끔씩 현 정부를 비판할 때 등장하는 “한때 운동권 골수였으나 지금은 전향한 한 인사”의 글이었는데 그의 ‘고백’ 중 일부가 이렇다.

“결국 87년 이래 진행된 치열한 파업투쟁은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지만 그들을 철저한 경제적 이익 추구집단으로 만들었을 뿐 정치적으로 성숙시킨 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 노동자계급의 현 상태가 이러할진대, 또 지난 5년간 노동운동이 자신의 임금 올리는 데만 열중했을 뿐 타 계급계층을 위해 한 일이 하나도 없는데,”

자칭 골수 10년간 사회주의자로 활동했다던 이 심약한 전향자는 실제 자신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고백만 한 셈일지모르지만, 여하튼 노동운동은 심하게 말한다면 그로부터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 셈이다. IMF 경제 위기 이후 비정규 노동자 비율이 50%가 넘는다고 난리였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40%를 훌쩍 넘을 정도로 노동계급 내부의 분할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었다.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모욕당하기 전에 반드시 스스로를 모욕하는 법’이라고 했던가? 단순히 부르주아 언론의 공격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현실이 분명 우리에게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노동계급
어쨌든 노동운동의 이러한 한계는 부르주아 언론들의 공격이 아니더라도, 현재 노동운동이 정규직 중심이라는 비판은 이미 우리 내부에서 많이 이루어져 왔고, 노동운동 또한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여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러한 노력의 결과가 어디까지 왔는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것 같지는 않다. 몇몇 우려할만한 사례들에서 과연 지금의 노동운동에 희망이 있는 가라는 개탄할만한 사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문제였을 뿐이다. 아직도 혁신하려고 하는 몸부림은 계속 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어진 시간이 그리 오래 남아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굳이 ‘양치기 소년’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노동운동의 상황은 임계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고, 부르주아들의 공세가 이러한 노동운동을 더욱 거세게 몰아세우고 있다.

현재 정부는 비정규노동자들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전체 노동자들의 전면적인 비정규직화를 야기할 노동법안을 상정해놓고 있고,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 진영은 나름의 결의를 가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통한 총파업 결의에 앞서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이 열린우리당 당사 농성을 진행한 바 있었는데, 이즈음에 있었던 노동계 대표와의 간담회에서 노동부 장관은 이들 법안이 ‘구국의 결단’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노동부 장관이 구하고자 했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부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어떤 면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현재 단지 한 번의 큰 전투가 아닌, 노동계급의 향후 운명을 가늠할 결정적인 싸움을 앞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운동의 일차적 목표가 스스로의 계급적 단결이라 했을 때, 정부의 이번 비정규직 관련 노동법 개악을 막아내는 투쟁은 이제까지의 과오를 넘어서는 것이자 향후 더욱 가속화 될 노동계급의 분할을 저지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작가가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노동자 계급을 가리켜 “그들은 비소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었고, 세상은 너무도 오래 잊고 있었던 노동자 계급의 존재를 기억해냈다”고 표현했다. 2004년 한국의 노동자에게 다시 필요한 말이다. 노동계급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PSSP
주제어
태그
연금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