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타리아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본 10월혁명
베틀렘,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①
사회진보연대는 최근 몇 년 각국의 혁명사를 반추하는 가운데 러시아혁명과 소련사를 다각도로 살펴본 바 있다. (2022년 가을호·겨울호, 「스탈린 시대, 속삭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2023년 봄호, 「『러시아혁명 1917-1938』을 통해 본 러시아혁명사」, 「한 세기가 지난 1917년 10월」, 2024년 가을호·겨울호, 「‘스탈린 신화’를 파헤치다」) 이번 호부터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샤를 베틀렘(Charles Bettelheim)의 『소련에서의 계급투쟁』(총 3권)을 통해 같은 역사를 다룰 것인데, ‘소련을 왜 또 보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법하다.
첫 번째 답변은, 이전 글들에서 살펴본 역사를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으로 분석한 글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베틀렘의 『소련에서의 계급투쟁』은 자본주의적 경제관계(생산관계·생산력)와 이에 조응하는 정치·이데올로기관계에서의 계급적 실천, 즉 사회관계와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소련사를 설명한다. 나아가, 소련에서의 계급투쟁이 과연 자본주의적 경제관계를 변혁하는 효과를 낳았는가, 즉 노동자연합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는가를 기준 삼아 각각의 계급적 실천을 평가한다.
베틀렘은 소련에서 계급투쟁이 사회관계의 변혁에 실패하기에 이른 과정을 상세히 분석했고, 그 주요 원인을 ‘경제주의’로 짚음으로써 동시대의 노동자운동에 교훈을 주려 했다. 이 교훈은 훗날 ‘평의회마르크스주의’와 ‘사회운동노조’의 제기로 계승됐다. 따라서, 소련사를 반성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지향점을 이해하려면 베틀렘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겠다.
현재 시점에서의 의의도 있을 것이다. 1917년 당시 세계대전이라는 전례 없던 사태와 경제·사회의 붕괴에 대해, 정치혁명을 넘어 사회주의를 건설함으로써 문명을 재건하려 했던 시도, 그리고 그 실패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현재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구조적 위기와 인민주의·권위주의의 발호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성찰케 한다. 베틀렘은 특히 레닌이 ‘경제주의’에 맞서 발전시켰던 ‘문화혁명’의 문제의식을 강조했는데, 이를 계승하여 지금 시점에서 인민주의·권위주의에 맞서는 토양을 조성하는 사회운동이란 무엇일지, 『소련에서의 계급투쟁』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계간 사회진보연대》의 이번 호부터 네 차례에 걸쳐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세 권 중 1-2권을 소개할 것이다. 책 1-2권의 목차와 연재 계획은 다음과 같다.
1권.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첫 번째 시기, 1917-1923』 (1974)
전체 서문
1권 서론
1부. 10월혁명과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
2부. 소비에트 권력과 1917년부터 1921년 사이의 계급관계 변화
3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주요 제도 변화
4부. 볼셰비키 당내 이데올로기투쟁과 정치투쟁
5부. 혁명 5년의 대차대조표와 레닌 사후의 전망
2권.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두 번째 시기, 1923-1930』 (1977)
2권 서문 및 서론
1부. 신경제정책 시기 상품화폐관계와 계획의 발전
2부. 신경제정책 시기의 농촌: 계급분화, 계급투쟁, 농업정책 및 농업의 사회관계 변화
3부. 산업 및 도시 부문의 모순과 계급투쟁
4부. 볼셰비키 당내 이데올로기관계와 정치관계의 변화
5부. “대전환”과 새로운 모순의 출현

연재의 서론 격인 이번 글은 저자가 소련사를 설명하는 관점과 역사 서술의 도구가 되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을 해설할 것이다. 또한, 1917년 10월혁명에 대한 베틀렘의 설명을 소개할 것이다. 10월혁명은 이후에 전개될 계급투쟁의 조건이 됐던 사회관계를 형성했다.
1. 『소련에서의 계급투쟁』의 사관(史觀)
1) 저자 소개
샤를 베틀렘(1913~2006)은 프랑스 출생으로, 20대였던 1930년대 파시즘이 부상하자 이에 맞서 공산주의를 수용하고 1933년에 프랑스공산당에 가입했다. 1936년에 ‘사회주의 조국’ 소련에 방문했으나 당시 대숙청을 목격했고, 공산주의 이념을 포기하진 않았으나 소련에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경제학, 소련사, 경제계획을 연구했던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정부 노동부 관료로 잠시 일했고, 1948년에 고등연구실습원 사회과학부(이후 고등사회과학학교로 독립)에 들어갔다. 1950년대에 그는 이집트 나세르 정부, 인도 네루 정부, 알제리 벨라 정부에 정책자문으로 참여했고, 1958년 산업화양식연구센터를 창립하며 경제계획의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고, 1963년에 쿠바 정부의 초청을 받아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주의 경제학 논쟁에 참여했다. 한편, 1960년대 중반 중국에 여러 번 방문해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간접적으로 관여했는데, 이 경험은 그가 기존의 입장을 정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1970년대에 베틀렘은 저술에 몰두해, 대표작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1권(1974), 2권(1977), 3권(1982)을 발표했다.

베틀렘은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전체 서문에서 1960년대 초 라틴아메리카 사회주의 경제학 논쟁에 참여했던 때와 『소련에서의 계급투쟁』을 저술할 때의 입장이 달라졌다고 언급한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경제계획 역시 사회관계에 기초한 계급투쟁의 일종으로 인식하며 중립적이지 않다고 보게 된 것이다. 이런 입장 변화는, 그 사이 중국과의 교류뿐만 아니라 베틀렘이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알튀세르가 주도하는 세미나에 참여했던 덕이었다.
『소련에서의 계급투쟁』이 소련사를 분석하는 주요 틀, 즉 ‘사회관계라는 조건 위에서 일어나는 계급적 실천(계급투쟁)’과 ‘사회관계를 재생산하거나 변혁하는 효과를 가하는 계급적 실천(계급투쟁)’의 연쇄는, 베틀렘이 알튀세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보여준다. 『소련에서의 계급투쟁』은 알튀세르의 이론적 개념을 실제 역사에 적용했던 시도이며, 역으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소련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론적 비판이 무엇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핵심 개념: 사회관계(계급관계)와 계급투쟁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전체 서문에서 베틀렘은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으로 대표되는 소련의 제국주의적 정책, 폴란드 노동자 투쟁 탄압 등 내부 모순을 지적하며, 진정한 문제는 이런 현실을 만들어 낸 사회관계에 대한 분석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방기한 것이라 비판했다.
소비에트 역사와 소비에트 사회의 모순적인 현실 상황은 최소한의 분석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단죄되고 전화되어야 할 현실의 측면들은 소련의 내부모순과의 관련 속에서 해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측면들은 특정한 인격[즉 스탈린]의 행동에 의한 ‘일탈’로서 제시되었다. 이러한 사이비 설명이 소련공산당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분석의 도구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당이 방기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로써 당은, 단죄되어야 할 것으로 표현된 것들을 산출한 사회관계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이 나라가 현재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단지 몇 명의 지도자들의 ‘개인적 책임’에 결정되어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지도자들이 권력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도, 그들이 지금까지 지적한 정책들을 실행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필연적으로 현재 소련의 지배적인 사회관계의 성격 - 선행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관계 - 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 (전체 서문)
원인을 정확히 설명해야만 소련이 다시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베틀렘은 소련의 ‘사회관계’ 변화와 그 ‘모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다. 이런 베틀렘의 관점은 그 자체로 쟁점적인데, 소련에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나 ‘계급모순’, ‘계급투쟁’이 존재했다고 보는 셈이기 때문이다. (소련마르크스주의자 대다수는 이를 부정한다.)
나의 과제는 이 시기에 계급관계와 경제관계, 정치관계, 이데올로기관계에서 발생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 책의 분석은 소비에트 혁명사를 볼셰비키 당이 내린 결정과 “선택”의 “결과”로 제시하는 특정한 개념을 깨고자 한다. 역사의 실제 운동에 비추어 보면, 그리고 이 실제 운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를 이해하는 그런 방식은 완전히 거짓이다. 이로써 역사의 운동의 진정한 본질, 즉 모순의 (무엇보다도 계급모순의) 발전과 이동이 사라졌다. 이 책은 바로 이 모순의 발전과 이동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1권 서론)
베틀렘이 제시하는 여러 개념을 정리하겠다. 먼저 사회관계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베틀렘이 말하는 사회관계는 ‘계급관계’, 정확히는 ‘자본주의적’ 내지는 ‘부르주아적’ 계급관계를 지칭한다. 이 부르주아적 사회관계 내지는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에는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차원이 있는데 이를 베틀렘은 ‘경제관계’, ‘정치관계’, ‘이데올로기관계’로 지칭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 관계가 고정된 게 아니라 ‘변화’한다는 점인데, 관계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모순’ 개념이 중요한 것은, 단지 관계 그 자체의 객관적·논리적 불완전성에 따른 변화의 필연성 차원을 넘어, 관계에 속한 현실 사람들의 ‘실천’에 주목하게 하기 때문이다. 관계는 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실천을 관계에 부합하도록 ‘제약’하며, 이 실천은 다시 관계에 작용한다.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되는데, 이 계급관계의 모순은 ‘부르주아적 실천’과 ‘프롤레타리아적 실천’이라는 두 가지 ‘계급적 실천’을 낳는다. 베틀렘은 앞의 실천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를 재생산 즉 유지·강화하는 식으로 작용하며, 뒤의 실천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를 약화·소멸시키는 식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어떤 실천이 ‘부르주아적’인가 ‘프롤레타리아적’인가의 성격 판단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객관적 규정에 근거한다.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를 약화·소멸시킨다는 말의 뜻을 간략히 짚겠다.
계급들은 그 구성원이 생산수단과 맺는 관계(따라서 그 구성원이 점유한 위치)와 그들이 “노동의 사회적 조직화”에서 수행하는 “역할” 양자에 의해 구분된다. … 만약 [프롤레타리아적] 계급투쟁이 올바르게 행해진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사회관계를 변혁함으로써 경제 전체와 각 생산단위를 경영하고, 생산력 체계의 변혁을 지도하며, 교육기구의 방향성을 지시하는 등의 역할을 점차 [부르주아로부터] 인수해 나갈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프롤레타리아가 점점 덜 프롤레타리아가 되도록 만드는 혁명적 투쟁,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자신과 분리했던 모든 사회적 힘을 전용(全用)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로서 자기 자신을 폐지하는 혁명적 투쟁의 결과이다. 이러한 혁명적 변화의 과정에서 본래 부르주아에 대응했던 모든 “지위”와 역할이 변화하며, 그러한 지위를 점유하고 역할을 행하는 생산 및 재생산의 주체들도 점점 덜 부르주아가 되어간다. (1권 2부 1장 서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의 사회적 조직화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다르다는 점에서 관계(분업)를 구성한다. 따라서 계급관계의 소멸이란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의 역할을 ‘인수’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로서 자기 자신을 폐지’함으로써 이뤄진다. 역할 구분이 사라지므로 관계가 소멸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를 약화·소멸시키는 ‘프롤레타리아적’ 내지는 ‘변혁적·혁명적’ 계급투쟁이, 그 계급관계를 구성하는 프롤레타리아에 부합하는 실천에 반(反)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변혁적·혁명적’이라 표현하는 이유다.
베틀렘은 소련에서 계급투쟁을 분석하며, 계급관계에서의 프롤레타리아가 꼭 ‘프롤레타리아적’ 실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누차 강조한다. 즉 베틀렘이 자주 쓰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에 ① 계급관계를 구성하는 프롤레타리아와 ② 실천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에 유의하자. 2023년 봄호의 글에서 관련된 발리바르의 문장을 확인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은 ‘노동계급’이나 ‘임금노동자 계급’과 동의어가 아니며, 오히려 프롤레타리아는 그와 다른 역사적 기능을 가진 집단을 형성한다. 이러한 집단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은 대립물들의 통일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즉 한편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어떤 ‘본원적 축적’이라는 형태에 의해 ‘소유를 박탈당하고’ 불안정한 삶에 내던져진 궁핍화된 대중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부르주아의 지배(사실은 모든 계급적 지배)에 도전하는 근본적으로 착취 받는 계급이며, 다양한 (넓은 의미의) 정치적 조직을 형성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한다.
3) 사회관계·계급투쟁의 첫 번째 차원: 경제
『소련에서의 계급투쟁』의 특징은, 소련의 ‘계급관계’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모든 논의를 전개하려 하며, 그 세 가지 차원을 경제-정치-이데올로기의 순서로 설명하려 한다는 점이다. 1권의 대상 시기에 대한 설명은, 2부의 경제관계·계급관계 분석, 3부의 정치관계 분석, 4부의 이데올로기관계 분석의 순서로 진행된다. 2권의 신경제정책 시기에 대한 설명 역시, 1-3부의 경제관계·계급관계 분석으로부터 4부의 정치·이데올로기관계 분석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경제관계·계급관계 분석이란, 자본주의적 경제관계 위의 ① 공장 내 관계, ② 농장 내 관계, ③ 공장과 농장 간 관계의 양상과 변화를 설명함을 뜻한다. 베틀렘은 이 세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소련에서 이들 관계가 자본주의적 경제관계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었다는 점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경제관계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즉 ‘자본주의적 상품·화폐관계’와 ‘임노동관계’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력’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생산력도 관계이며, 따라서 중립적이지 않다는 베틀렘의 테제는 그의 경제주의 비판에서 중요하다.
이 분석에서 나는 상품-화폐관계, 그리고 임금관계가 사람들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따라서 그것이 소멸하기 위해서는 ‘폐절되었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현실적인 사회관계로서 존재함을 설명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러한 분석 내에서 상품-화폐관계는 내재적인 사회관계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즉 그것은 사회관계의 효과이며 또한 사회관계를 재생산하기 위한 객관적 필요조건인 것이다.
경제주의는 생산의 물적 수단 자체를 생산력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는 생산력이 주요하게는 생산자들 자신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게 된다. (전체 서문)
이는 경제관계가 ‘① 현실적인 즉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관계다 ② ‘사회관계를 재생산하는 필요조건’이자 동시에 ‘사회관계의 표현 내지는 효과’다 ③ 생산력이 주요하게는 생산자들 자신으로 구성된다’는 명제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명제는 특히 1917년 10월혁명 이후 ‘노동자 통제’의 시도와 실패, ‘국가자본주의’ 형성, 내전기와 신경제정책 시기 공장과 농촌의 관계 변화, 경제계획이나 신경제정책의 성격을 논할 때 계속 쓰일 것인데, 다음 글에서부터 다룰 주제다.
4) 사회관계·계급투쟁의 두 번째 차원: 정치
1권 3부와 2권 4부에서 주로 분석되는 정치관계는, 일차적으로는 소련의 정치제도와 정당(주로는 볼셰비키 당)을 대상으로 하나, 베틀렘은 이러한 현실의 제도와 구분되는 ‘권력’ 자체를 계급관계와 결부시켜 탐구한다. 정치를 권력관계, 더 근본적으로는 계급관계로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계급관계이지 “사물”이 아니므로 “넘겨받을” 수 없다. (1권 1부 2장 3절 서론)
볼셰비키 당이 이끈, 대도시 노동자의 혁명적 투쟁은 (…)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적 권력, 이후에는 정치권력을 성립시켰다. 이 권력은 무엇보다도 계급관계였다.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특정한 정치제도와 같지 않다. 동일한 계급권력이 “현실에서는”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양한 “정치제도”로 “실현”될 수 있다. (1권 1부 2장 2절 서론)
관련하여, ‘사회세력 간 갈등의 객관적 과정’ 속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대표자’라는 개념과 볼셰비키 당 역시 그런 대표자 중 하나로 인식하는 베틀렘의 시각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분석 대상이 볼셰비키 당이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의지나 의도가 낳은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는 러시아혁명과 이에 따른 소비에트 사회의 변화가 사회세력 간 갈등의 객관적 과정(사회세력은 이 과정에서 스스로 변화한다), 그리고 이 사회세력들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대표자의 개입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 이는 당을 “역사의 주체”로 상상할 때와는 다르게, 당의 활동의 지위를 지정해야 함을 뜻한다. 이는 볼셰비키 당이, 대중과 연결된 다른 프롤레타리아적 혁명적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운동에 참여하지만 이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게 한다. … 역사의 운동에 대한 혁명적 당의 참여는, 운동이 잠재적으로 잉태한 변화가 어떤 특정한 조건 하에서 실제로 일어나도록 보장함으로써, 이 운동의 진로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혁명적 당이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역사적 과정에 개입한다는 것의 의미다. (1권 서론)
대표자는 갈등하는 사회세력 사이에서 어떤 경향들을 ‘대표’하는 것이기에, 역사의 운동을 결정하는 것은 대표자가 아니라 사회세력, 더 정확히는 사회세력이 변화하는 ‘객관적 과정’으로서 ‘사회관계’다. 다만, 베틀렘이 정당과 같은 대표자를 순수하고 기계적인 ‘반영자’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사회세력들이 변화하는 가운데 대표자 역시 변화하며, 그 가운데서 대표자는 상대적 독립성을 가질 수 있다. 즉 사회세력 간 갈등의 객관적 과정의 변화를 인식함으로써, 역사의 운동을 구성하는 사회세력들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베틀렘은 이를 ‘지도적 역할’이라 표현하는데, 사회관계 안에서 이런 역할이 ‘부여’되려면 상당한 조건과 역량이 갖춰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볼셰비키 당의 지도적 역할은 역사의 운동에 당이 삽입된 방식, 당이 사회세력(이들의 행동이 역사의 운동을 결정한다)과 맺었던 관계, 그리고 모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 기초하여 사회세력을 인도할 수 있는 당의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 당이 모순을 정확히 분석하지 않았거나, 충분히 올바른 노선을 세우지 않았거나, 비권위적 지도방식을 지키지 않아 대중과의 관계가 악화했을 때, 역사의 객관적 과정은 당이 그 진로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로 발전했다. 그 결과 당이 내린 결정은 의도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의 분석 대상이 무엇보다 정확히 계급투쟁의 객관적 과정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당의 정치노선, 당이 채택했던 조치, 당내에서 수행된 투쟁에 대한 검토는 이것이 바로 그 객관적 과정의 발전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파악하려는 한에서만 이뤄져야 한다. (1권 서론)
당 역시 ‘사회세력 간 갈등의 객관적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베틀렘은 ‘지도적 역할’이 부여되려면 사회관계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올바른 노선’, 즉 이론·이념과 강령·정책에 의한 지도가 이뤄져야 함을 강조했다. 사회관계의 변화, 그 가운데서 ‘대표자’의 지위, 지도적 역할과 그 한계라는 문제를, 이번 글에서는 1917년 2월혁명에서 10월혁명까지 시기 볼세비키 당의 역할에 대한 베틀렘의 분석에서 확인할 것이다.
4) 사회관계·계급투쟁의 세 번째 차원: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관계에 대한 분석은 주로 1권 4부와 2권 4부에서 이루어진다. 정치관계와 마찬가지로, 베틀렘은 이데올로기 역시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에 결부된 하나의 ‘관계’로 파악한다. 앞서 자본주의적 계급관계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실천을 그 자체에 부합하도록 제약한다고 설명했는데, 이데올로기도 그런 제약의 한 형태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베틀렘은 소련의 특수한 경제관계를 구성하는 공장 내·농장 내·공장과 농장 간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농민과 노동자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 예를 들어 제국 시절부터 마을공동체 농민에게서 나타난 정치적 무관심과 고립주의 성향,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서 나타난 ‘혁명적 방위론’의 확산과 쇠퇴, 혁명과 내전 시기에 드러난 농민·노동자의 영웅주의와 동시에 만연한 ‘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는, 사회관계의 변화 속에서 농민과 노동자들이 따랐던 지배적 행동규범을 보여준다.
정치관계와 이데올로기관계의 연결도 중요한데, 앞서 언급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대표자’ 개념을 상기하자. 베틀렘은 농민과 노동자의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정치세력, 즉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영향력이 소련에서 이들 정당이 해산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고 본다. 그는 이를 ‘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며, 이 이데올로기가 사회관계의 일부인 볼셰비키당 내부에도 영향을 미쳤고, 여러 형태의 ‘경제주의’로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베틀렘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1902)를 따라 경제주의를 정의한다. 경제주의란, 자본주의적 경제관계 하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는 실천이 자생적으로 자본주의를 변혁해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혁명적 실천’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베틀렘은 경제주의가 19세기 중후반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는데, 독일사민당은 러시아 멘셰비키가 모델로 삼았던 정당이기도 하다.
그 본래적인 형태에서 경제주의는 제2 인터내셔날 시기의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발생했다. 그 우익적 변종들은 독일국가기구와 결합된 독일 사민당의 강력한 정치적 기구 및 노동조합의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 이처럼 강력한 기구를 갖춘 지도부로서는 그들의 조직적인 활동의 점진적인 전개와 노동자들의 요구에 의한 압력이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 망상에 빠지는 것이 가능했다. (전체 서문)
베틀렘은 러시아에서 1917년 혁명을 통해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경제주의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며 점차 영향력을 강화했다고 분석한다. 이는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경제관계가 여전히 잔존했기 때문이다. 그 아래에서 농민과 노동자 같은 직접생산자들은 자본주의적 분업 구조 속에서 경쟁하며 이익을 추구했고, 그 결과 ‘집단적 이해’ 내지는 ‘연합’을 형성하지 못했다.
(과거의) 글에서는 (나는) 사회적으로 통일되어진 정책(계획경제는 그러한 정책의 수단에 불과하다)의 주요한 장애물이 (…) 지배적인 사회관계라는 점을, 즉 그러한 장애물이 자본주의적 분업의 재생산과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제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점을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적 분업의 효과이며 또한 그러한 분업의 재생산의 사회적 조건을 구성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없었다.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제관계는 개인과 기업을 집단적 이해보다 그들의 개별적인 이해에 우위성을 부여하는 ‘주체’로서 ‘기능’하게 함으로서 자본주의적 분업을 재생산하는 사회적 조건이 된다. (전체 서문)
이 서술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아래에서 변혁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 관계 속에서는 부르주아뿐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역시 그 관계를 재생산하는, 다시 말해 ‘부르주아적’ 성격을 띤 실천에 머무르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앞서 설명했듯,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는 내재적 모순을 지니며, 이를 변혁하는 실천이 발생 가능하고, 이 실천은 이를 위한 이론·이념과 강령·정책을 통해 정치적으로 대표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의 즉자적 요구가 자본주의적 경쟁의 표현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적’ 계급투쟁에서 중요하다.
경제주의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취하는 형태이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계급들 그 자체가 소멸할 때만이 소멸할 수 있는 부르주아적 사회관계 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 경제주의에 대한 투쟁은 따라서 필연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역사의 일부(…)이다.
사회주의를 위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핵심적인 측면의 하나는 항상 경제주의(그것의 우익적 형태든 좌익적 형태든)에 대하여 투쟁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왜 소련이 현재의 형태 - 특정한 유형의 자본주의 국가(국가자본주의) - 로 되어왔는가를 분석할 때, 우리는 경제주의가 부르주아적 사회세력으로 하여금 이러한 진화과정을 조장하도록 허용했다는 점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전체 서문)
베틀렘은 10월혁명 이후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볼셰비키 당이 점차 경제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상실하고, 각 계급의 요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방향, 구체적으로는 특정 분파(가령 중공업 대공장 노동자)의 요구만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를 경제주의의 ‘좌익적 형태’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특정 생산자 집단의 자생적 이익 추구를 마치 자본주의적 경쟁을 극복하고 전체 생산자의 단결을 실현하는 실천인 것으로 오인하는 경향이었다.
나아가, 이러한 경향은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해’나 ‘사회주의 혁명의 이해’라는 이름으로 그에 부합하지 않는 다른 요구들을 ‘반노동적·반혁명적’으로 규정하고 억압하는 ‘우익적 형태’로 반전됐다. 경제주의의 두 형태에 대한 베틀렘의 설명은 최근 사회진보연대의 정세 분석에서 지적되는 인민주의와 권위주의 경향과도 맞닿는 지점이 있다.
경제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모순적인 형태로조차 나타날 수 있다. 계급투쟁의 국면에 따라 이는 좌익적 혹은 우익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사실 그것은 늘 양자의 성격을 모두 갖는다) … 이것의 우익적 경향은 노동자들을 억압적 장치에 종속시키려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정반대 입장에 선 좌익적 경향은 … 노동자계급의 통일과 다른 억압받는 계급과의 단결이 (경제적 과정 속에서) 모든 노동자의 이해의 집중을 통해 자발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사실상 이 두 개념은 모두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계급투쟁의 결정적 역할과 (이러한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올바른 정치노선에 의해 지도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의 필수불가결함을 거부한다. (전체 서문)
앞서 ‘프롤레타리아적’ 계급투쟁이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자기 자신을 폐지’하는 실천이라고 했듯, 베틀렘은 이런 실천을 지향하는 변혁적 마르크스주의자는 “시류를 거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1권 4부 4장 3절) 물론 그저 시류에 역행한다고 해서 사회관계와 실천의 거대한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올바른 이론·이념과 강령·정책을 바탕으로 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만 말이다.
베틀렘은 1917년 2월혁명이 10월혁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볼셰비키 당이 바로 이러한 지도적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하며, 특히 노동조합운동을 대표하던 멘셰비키의 ‘영토와 공장(일자리)을 포기할 수 없다’는 ‘혁명적 방위론’에 맞선 이데올로기 투쟁이 중요했다고 본다. 이는 이번 글에서 다룰 내용이다.
5) 소결: 두 가지 요인에 의한 설명
베틀렘은 소련사를 분석하며 복잡한 개념을 동원하지만, 실제 본문에서는 크게 두 축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객관적 관계·실천·과정·모순이고 다른 하나는 이에 대한 대표자, 주로 볼셰비키 당의 대응 방식이다. 서문만 보면 개념이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본문에서는 실제 역사와 함께 개념을 반복적으로 설명하므로, 앞서 살펴본 사회관계(계급관계), 계급적 실천(계급투쟁), 부르주아적/프롤레타리아적 성격, 경제·정치·이데올로기관계 등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1917년 2월혁명 이전의 사회관계 변화
이번 글의 범위인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1권 1부는 1917년 2월혁명부터 10월혁명까지의 사회관계 변화를 설명한다. 다만 서두에서 베틀렘은 그 배경이 되는 러시아제국의 사회관계를 소략히 언급한다. 이는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 시기뿐만 아니라, 이후 내전기의 계급투쟁에도 조건이 되기에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베틀렘은 레닌의 러시아 사회성격 분석인 군사적·봉건적 제국주의론을 요약해 제시하는데, 필자가 영국의 경제사학자 로버트 앨런의 『농장에서 공장으로: 소련 산업혁명의 재해석』을 참고해 좀 더 풀어서 설명하겠다.
1) 1914년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의 사회관계 변화
먼저 경제·계급관계 변화를 살펴보겠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제국은 서구 열강에 맞서 자본주의를 제한적으로 도입했다. 핵심 조치는 1861년 농노해방령과 철도 건설이었다. 해방령은 농민을 인신적 구속에서 풀어내 노동시장으로 유도했고, 철도는 농촌을 세계시장과 연결하며 상업적 농업을 촉진했다.
러시아의 봉건제는 개인농 단위가 아닌, 집단적 책임 구조를 가진 마을공동체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후진적이었다. 마을회의는 공동체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걷고 이를 위해 토지를 주기적으로 재배분해 경작케 하는 강력한 권한을 가졌고, 이는 공동체 내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인민주의자들(나로드니키)은 마을공동체를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주의의 원형으로 보며, 이를 통해 전제정 타도를 꾀했으나 농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들이 평등주의의 증거로 여겼던 경작지 재배분은 사실 마을회의가 농민들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마을회의에 맞서는 농민은 안 좋은 토지를 배정받는 등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농노해방령은 지주계급의 이익 보호를 위해 마을공동체의 구조를 지속시켰다. 국가는 봉건지주의 토지를 마을 단위로 구입하게 하고, 대금을 먼저 지불한 뒤 마을로부터 장기간에 걸쳐 토지상환금을 징수했다. 그러나 이 상환금이 기존 지대보다 더 부담돼, 마을공동체의 경제적 압박은 오히려 커졌다. (가령 임대료를 내던 사람이 집을 강제로 사게 됐다고 생각해 보라.) 마을공동체가 토지상환금을 부담하며 그 권한이 더 세지고 불평등이 더 심해졌다. 게다가 소유권은 개인이 아닌 마을로 이전됐다.
이 가운데 세계시장에서의 곡가 상승으로 지가도 오르며 마을회의를 장악한 부농은 수혜를 입었다. 상환금을 토대로 토지를 재구입한 과거 지주계급의 일부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인신적 구속에서 벗어난 빈농은 상환금을 내고자 도시에서 소득을 벌충하거나, 농업을 포기하고 도시 노동자로 변모했다. 한편, 젊고 모험적인 농민은 마을이 보장하는 경작권을 포기하고 융자를 통해 자영농으로 변모했다. 농민의 소득은 전반적으로 상승했으나, 내부 불평등이 갈수록 심해졌고, 특히 토지 소유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했다.
상업적 농업 발전과 도시 산업노동자 증가로 국내 소비시장이 확대됐다. 이와 함께 경공업도 발전했는데, 자생적인 성장이었지만 제국 정부는 관세 부과 등 보호무역 조치와 중앙아시아 식민화를 통해 그 발전 방향성을 통제했다. 이는 국내 소비자에게 높은 비용을 전가했고, 국가 주도의 경제통제가 지속됐다.
1890년대에 제국 정부가 외자와 기술을 도입해 중공업을 성장시켰다. 그러나 이는 시장 수요가 아닌 정부 수요 즉 제국의 군사적 팽창에 의존했고, 자생력이 없었다. 이는 의도된바, 정부는 군수물자·시설을 국내 생산에만 의존하려 했고, 이를 강력히 통제했다. 자체 기반이 없었던 중공업은 외자·기술 수입을 위해 주로는 농업 수출에 의존했고, 한편으로는 국내자본에도 의존했다. 그러나 경공업 발전이 제약된 상황에서 국내자본은 주로 금융가로 변모한 과거 지주계급이 공급했다.
농업 수출에서 시작하여 비효율적인 중공업 투자를 매개로 외자·기술 수입으로 이어지는 경제 흐름 속에서, 외국자본 주로는 동맹국 프랑스·영국의 자본과 과거 지주계급에 의존하며 국가가 경제를 강력히 통제해야 하는가, 상업적 자영농과 경공업에 더 자유를 주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정책적 대립이 있었다. 가장 큰 쟁점은 토지상환금의 장기 분할 징수로 마을공동체가 유지된 것이었다. 1905년 혁명은 도시 노동자의 파업과 마을공동체 빈농의 반란이 주축이었는데, 이를 무력 충돌 없이 진압한 스톨리핀은 1906년 내무장관에 올라 1907년부터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농업개혁에서 정부가 토지상환금을 면제하자 마을공동체의 구속력이 약해졌고, 부농은 양질의 토지를 사유화해 자영농으로서 성장한 반면, 빈농은 토지에서 밀려나 도시 노동자가 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도시 노동자에 대해서는, 독일의 비스마르크를 따라 복지를 제공하면서도 노동조합은 다시 금지시켰다.
베틀렘은 러시아제국 부르주아의 두 분파를 구분한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산업 부르주아가 두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 한 분파는 국가에 깊이 종속되어 있었고, 프랑스 및 영국 제국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제국의 팽창을 직접적으로 지원했다. 이 분파의 중심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다른 분파는 자체적인 금전적 기반이 더 강했기에, 전제정에서 좀 더 자유로웠다. 이 분파의 중심지는 모스크바였다.
부르주아가 전제정에 대해 정치적 주도권을 갖지 못했으며, 전제정이 이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거의 부여하지 않은 데에는, 부르주아가 전제정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다는 이유도 있다. 19세기가 끝날 때쯤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단기간에 급속도로 이루어진 러시아제국의 산업화는, 그 일부만 산업이윤의 축적과 내수시장의 확대에 기초하였고, 대부분은 외국의 투자와 정부의 돈 – 국립은행의 대출, 정부의 발주 등 - 에 기초했다. 러시아 산업의 성장은 많은 부분 여전히 “본원적 축적” 즉 농민에 대한 착취 증가[토지상환금 징수]에 기초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수단이 바로 전제정이었다. (1권 1부 1장 서론)
다만, 러시아 농업의 확장과 산업의 비효율성 유지를 위한, 보호무역 및 토지, 공업 원료 산지 확보, 식민지 확대는 일관되게 추구됐다. 양 진영이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제국주의가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에 의존한 것은 약점이기도 했고, 산업자본의 기반이 극히 약했던 러시아 제국주의가 발전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기도 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적이면서도 전(前)자본주의적이라는 이중성이 있었다. 앞의 성격은 산업의 높은 자본집중도, 산업자본과 긴밀히 연결된 은행자본의 존재, 그리하여 영국-프랑스 제국주의와 연합해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동했던 금융자본의 형성과 상응했다. 뒤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군사적”이었던 러시아제국의 팽창에 상응했다. … 자본주의가 형성되자, 오랜 러시아 [봉건] 사회와 막 태어난 자본주의 사회 간의 모순이 발생했다. 이 모순은 전제정이 군사적 팽창을 가속하며, 러시아의 자본주의적 산업 발전을 지원하도록 만들었다. … 그 팽창과 식민화는 본래는 상업적이고 중상주의적인 성격을 가졌으나, 이후에는 점차 산업적이며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권 1부 1장 서론)
도시 노동자에 대한 정책에서도 이해가 일치했다. 러시아 전제정과 자본은 공업의 비효율성 탓에 노동자 임금을 낮게 유지하려 했다. 20세기 초까지 명목임금이 소폭 상승했지만, 보호무역으로 인한 물가 상승 탓에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나아지지 않았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산업화의 시기별로 두 세대로 나뉜다. 1861년 농노해방령 이후 형성된 1세대는 노동법이 없던 상태에서 자생적으로 노동조합운동으로 나아갔고, 1905년 혁명과 노조 합법화를 거치며 그 운동은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1907년 스톨리핀의 개혁으로 노조가 다시 금지됐고, 한편 마을공동체가 약화하고 빈농이 도시로 대규모 이주하며 중공업 중심으로 고용된 2세대가 등장했다. 이들은 몇몇 대공장에 집중되었고, 공장 규율에 익숙하지 않아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선호했다.
이제 20세기 초 러시아제국의 정치·이데올로기관계를 주요 정치세력만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먼저 부르주아는 상술했듯 두 분파가 있었다. 과거 지주계급과 귀족은 농노해방령 이후 금융가로 변모해 중공업·토지를 소유하고 정부 관료로 활동하며 제국의 군사정책에 관여했다. 한편, 경공업을 중심으로 성장한 자생적 민간 자본가와 자유민들은 사법제도 발전을 배경으로 전제정을 비판하며 입헌군주정을 추구했고, 입헌민주당으로 정치세력화했으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입헌민주당은 1917년 2월혁명 이후 임시정부의 주축이 된다.
농촌 기반 정당은 사회혁명당이 있었다. 과거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테러 노선으로 전환했으나, 황제 암살 이후 탄압을 받아 세력이 축소됐다. 이후 이들의 일부가 소수에 의한 테러를 비판하고 대중정당 노선을 채택해 사회혁명당을 창당했다. 1905년 혁명에서 마을공동체 빈농의 대규모 반란이 있었으나, 1907년 스톨리핀 개혁으로 마을공동체가 약해지고 상업적 자영농이 늘어나는 흐름 속에서, 사회혁명당은 농촌 지식인과 상층 농민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물론 테러를 추구하는 자들도 소수파로 남았지만 말이다.) 이들의 정치적 지향은 이러했다. “[사회혁명당은] 주로 토지를 두고 지주와의 투쟁, 봉건국가와의 투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집중한다. … 그들의 투쟁은 모든 착취에 맞선 투쟁이 아니라, 사실상 지주와 거대 금융가의 착취에만 저항한다.”(1권 1부 서론)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은 지방의 중심지에 한정되었고, 마을공동체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상태로 남았다.
노동자계급 기반 정당으로는 1세대 숙련노동자의 노동조합운동에 기반한 멘셰비키가 있었다. 이들은 독일 사민당을 모델로 삼아, 러시아도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노동조합과 이에 기반한 사민당의 성장, 의회 설립과 선거권 확대, 나아가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개혁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1910년대 들어 멘셰비키는 예상치 못한 변화에 직면했다. 스톨리핀 개혁으로 이주한 빈농들이 미숙련노동자로 도시 노동자계급에 대거 편입됐으나 이들은 기존 노동조합운동에 관심이 없었다. 1912년 이후 정부와 노동자 간 대규모 충돌이 자주 발생했지만, 노조나 멘셰비키는 개입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은 상황을 급변시켰다.
볼셰비키는 자생적 경제투쟁이나 노동조합운동보다는 전제정을 혁명정부로 대체하는 정치혁명을 중시했다. 1912-14년 노동자 투쟁이 격화되며 2세대 노동자들 사이에서 볼셰비키 지지가 확산됐지만, 볼셰비키와 이들의 관계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볼셰비키가 불법화되고 노동자들도 애국적 분위기에 휩싸이며 두 집단의 연결이 약해졌지만, 1917년 2월혁명 이후 다시 부상한다. 특히 공장위원회 운동에 참여한 급진적 노동자들과 볼셰비키의 결합은 2월혁명의 10월혁명으로의 전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세계대전 발발 이후 사회관계의 급변
제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보스니아계 테러조직에 암살당하며 시작되었고 제국주의 경쟁이 근본 원인으로 지적되나, 그 사이에 있었던 러시아의 역할이 중요하다. 1903년 러시아는 세르비아에서 친오스트리아 왕정을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친러 왕조를 수립했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는 보스니아의 슬라브인을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민족자치운동과 테러조직을 지원했다. (이는 2010년대 러시아 푸틴 정권이 크름반도나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썼던 전략과 유사했다.) 이들이 결국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했고,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자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독일이 다시 러시아에 선전포고하면서 전쟁이 확산됐다. 즉 러시아제국에 전쟁 발발의 주요 책임이 있었다.
문제는 러시아군이 독일을 침공했으나 섬멸당하고, 역으로 1915년 독일-오스트리아의 공세로 러시아 서부 지역이 독일군에 점령당했다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에게 중대한 문제였는데, 중공업의 대규모 공장들이 제국 서부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부가 점령당하며 대량 실업이 발생했고, 엄청난 수의 노동자들이 수도 페트로그라드로 피난했다.

한편, 제국 정부는 개전 이래 곡물의 자유거래를 금지하고 독점해, 낮은 가격으로 곡물을 수매해 도시와 군대에 공급했다. 곡물 수출 격감과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붕괴로 산업설비 수입이 급감하고 외자 도입도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정부는 채권과 통화 발행을 통해 군수산업을 유지했다. 이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수반했고, 대중의 실질소득 하락과 내수시장 축소로 소비재 생산이 격감했다. 정부가 산업의 원료 거래를 통제하고 군수산업에 집중시킨 것도 경공업 붕괴에 기여했다. 이 탓에, 제국 중부의 경공업 중심지들(대표적으로 모스크바)에서도 대량 실업이 발생한다.
통화가치의 급격한 하락과 소비재 부족은 곡물 수매위기로 이어졌다. 농민들이 가치가 나날이 떨어지며 심지어 소비재로 교환조차 불가능한 화폐자산의 소유를 기피하고 농산물을 은닉하며, 농업생산을 감소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군대와 도시의 식량난을 일으켰다. 제국은 이에 강압적으로 대처했으나 반발이 심해졌고, 농촌은 점차 제국 행정에서 독립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정부에 맞서는 데서 마을공동체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수도 페트로그라드는 서쪽과 동쪽 양쪽에서 피난민과 노동자들이 밀려오면서 식량 수급이 불안정해지는 상황에 처했다. 당시 경제가 붕괴하는 와중에 유일하게 수도의 군수산업만은 정부의 통화 발행에 근거해 생산을 늘리고 있었고,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여기에 몰렸다. 연이은 패전, 수도의 인구 폭증,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 격화, 농촌의 독립 심지어는 반란으로 1916년 말 페트로그라드의 식량난이 한계에 도달하고, 시위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수도방위대가 총구를 정부로 돌리며 결국 전제정이 붕괴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2월혁명이다.
당시 최대의 쟁점은 전쟁으로 인한 초유의 경제난을 과연 어떻게 풀 것인가였다. 2월혁명 이후, 금지됐었던 정치활동의 자유가 회복된다. 볼셰비키보다 상대적으로 탄압을 덜 받았던 멘셰비키가 먼저 활동을 개시했고, 이어서 볼셰비키도 하나둘씩 수도로 돌아오며 활동을 시작했다.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1권 1부의 서술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3. 1917년 2월혁명에서 10월혁명까지의 사회관계 변화
베틀렘은 1권 1부 ‘10월혁명과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개괄한다.
나는 1부에서 1916-17년 사이 겨울에서부터 발전하여 1917년 10월에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을 낳았던 혁명적 대중운동의 주요 특징을 검토할 것이다. 이 혁명적 대중운동의 이중성, 즉 도시에서는 프롤레타리아적 운동이었으며 농촌에서는 민주주의적 운동이었던 이중성을 분석하며, 이 이중성을 10월 이후 수립된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의 특징과 연결시킬 것이다. 여기서 [10월혁명으로 이어진] 혁명운동과 10월 이후 형성된 정치관계 안에서 볼셰비키 당이 수행했던 특수한 역할에 특히 주목할 것이다. (1권 서론)
10월 25일과 26일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당인 볼셰비키의 지도적 역할이, 러시아혁명이 이제 진입하게 된 새로운 단계의 성격, 새로운 통치권력의 계급적 성격을 홀로 결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 성격을 결정한 것은 또한 1917년 2월에서부터 10월까지 일어난 계급투쟁이었다. 이 계급투쟁은 특수한 유형의 것이었고, 민주주의적 과정과 혁명적 과정의 결합과 결부되어 있었다. 이 두 과정의 결합이 러시아혁명의 바탕에 있었다. 양자의 결합은 나아가 소비에트 권력의 정치기구 간의 관계 확립에, 그리고 이후 혁명의 진로에 큰 영향을 주었다. (1권 1부 서론)
베틀렘은 1917년 2월에서 10월 사이 도시와 농촌에서 각각 다른 성격의 대중운동이 전개되었다고 본다. 도시는 ‘혁명적 방위론’이라는 경제주의 영향 아래 있던 운동이 점차 ‘프롤레타리아적 운동’으로 전환되었고, 농촌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운동’이 진행되었다. 그는 10월혁명을 이 두 운동을 결합하려는 시도로 해석하지만, 혁명 시점에서 실제 결합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로 인해 10월 이후 특히 정치관계 차원에서 계급투쟁의 중대한 과제가 남았다고 분석한다. 도시 운동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 형성에는 볼셰비키 당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도시·농촌 운동의 ‘이중성’ 속에서 10월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와 당의 관계가 결정된다. 1권 1부가 설명하는 1917년 혁명의 이중성과 정치구조는, 이후 내전기의 조건을 형성한다.
본 3장에서는 2월에서 10월혁명 사이 도시의 정치·이데올로기 변화와 농촌의 토지 점유 운동을 중심으로 사회관계의 변화를 다룬다. 10월혁명 이후 정치관계 측면에서의 과제, 그리고 내전기 사회관계 변화와 계급투쟁의 조건에 대해서는 다음 4장에서 다룰 것이다.
1) 1917년 ‘6월 대공세’까지 도시와 서부전선의 상태와 쟁점
도시 측면을 보자. 여기서 ‘도시’는 주로 독일에 점령되지 않은 대규모 공업도시, 사실상 수도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일대를 의미한다. 먼저 주목할 것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임시정부의 동시 수립으로 생긴 ‘이중권력’ 문제다.
① 정치: 이중권력
1917년 2월 말 시점에서, 이제 막 일어난 혁명을 대변해 발언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페트로그라드시 소비에트뿐이었으며, … 반란군이 지지하는 소비에트 권력에 맞설 수 있는 권력은 없어 보였다. 러시아 제국의회가 구성한 위원회가 그럴 가능성이 있었던 유일한 기관이었지만, 이들은 혁명을 일으킨 대중에게 어떤 권위도 얻지 못했다. … 그러나 주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소속 대의원들로 구성된 페트로그라드시 소비에트는 3월 1일에 제국의회의 위원회와 협의를 했다. 협의의 결과 부르주아 정치인으로 구성된 임시정부가 형성되었고, 소비에트는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한에서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바로 이러한 연유로, 레닌이 ‘이중권력’이라 묘사했던 상태가 시작된 것이다. (1권 1부 1장 서론)
1917년 4월 시점에서 “이중권력”의 의미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민주적 독재가 한편으로는 실현(“실제로는” 페트로그라드에서만, 여기서는 권력이 노동자와 병사의 수중에 있었다)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사회혁명당의 견해 탓에)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민 대다수는 계급 협조의 노선을 지지했고 그리하여 부르주아가 권력을 얻었다. (1권 1부 1장 3절 서론)
2월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주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인사들로 구성됐다. 이는 멘셰비키 활동가들의 명성, 수도에 볼셰비키 지도자가 없었던 점, 농민 출신 병사들이 아는 정당이 사회혁명당뿐이었던 점 등 여러 이유에서 비롯되었지만, 베틀렘에 따르면 근본적으로는 수도 대중 다수가 ‘계급 협조 노선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멘셰비키는 임시정부를 ‘조건을 만족하는 한에서’ 지지한다는 ‘비판적 지지’ 노선을 취했으며, 사회혁명당도 이를 따랐다. 이들은 국정을 책임지는 주체는 임시정부이고, 소비에트는 노동자·병사의 요구를 모아 시위를 통해 이를 압박하는 ‘투쟁 지도부’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고 보았다. 즉 우리는 전쟁과 경제난 문제를 당신들이 해결하라고 요구하고, 당신들이 하는 게 마음에 안 들면 투쟁하겠다는 것이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소비에트를 권력기구로 보지 않았고, 혁명적 투쟁과 선전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여겼다. (1권 1부 1장 1절 서론)
베틀렘이 4월을 기점으로 언급한 것은 이때 수도에서 ‘4월 사태’와 레닌의 귀환, 공장위원회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4월 사태란, 임시정부 외무장관 밀류코프(입헌민주당)와 전쟁부 장관 구추코프(과거 지주계급 출신)이 2월혁명에도 러시아는 변함없이 독일-오스트리아에 대한 공세적 태세를 유지하겠다는 전보를 보낸 것이 드러나자, 페트로그라드 인민이 대대적으로 반발하며 일어난 사건이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들은 (‘혁명적 방위론’의 구호였던) ‘합병도 배상도 없는 평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와 임시정부 각료 사퇴를 압박했고, 이 과정에서 ‘비판적 지지’만으로는 소비에트가 대중을 통제할 수 없다는 한계가 드러났다. 사태는 실제 권력이 임시정부보다 소비에트에 있음을 각인시켰고, 멘셰비키·사회혁명당 지도부는 이중권력 유지 방침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압력과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연정을 수용했다. 정부에 입각한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장관으로서 책임과 소비에트 지도부의 입장은 구분된다고 선을 그었으나, 조율이 쉽지 않았다. 난국을 타개하고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5월에 임시정부와 독립적으로 각국 사민당 대표단을 초청해 평화협상을 추진했다.
② 전쟁: 이른바 ‘혁명적 방위’
1917년 2월에서 4월까지, 노동자와 병사 대중은 여전히 레닌의 말처럼 “혁명적 방위론의 광기에 굴복한” 상태였다. (1권 1부 1장 2절 (a))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지도부를 구성한 멘셰비키는 세계대전이 각국 노동자정당이 부르주아를 견제하지 못한 결과라고 보았고, 2월혁명 이후 러시아가 공세를 멈추고 군사 행위를 ‘방어’에만 국한했듯, 다른 나라들도 국제주의 정신에 따라 ‘1914년 이전 상태’로 복귀하는 평화협상으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혁명적 방위’와 ‘합병도 배상도 없는 평화’ 노선이다.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협상을 해야 하나, 서부 영토는 회복해야 한다는 이 주장은, 개전 이후 독일군의 위협이 노동자의 생계를 위협한다는 노동자들의 여론에 기반했다. 전쟁으로 공장이 점령되고 대량 실업이 발생하자 노동자들은 무능한 제국 정부 대신 영토 회복과 노동자 이익을 대변할 유능한 정부를 원했다.
더 근본적으로, 멘셰비키는 ‘동부로의 퇴각’이 러시아를 농업국가로 되돌릴 것이라 우려했다. 이는 봉건적 전제정을 복권시키고 노동조합운동을 수십 년 후퇴시킬 것이라 봤다. 사업장 없는 노동조합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자연스럽게 산업노동자가 인구의 다수가 되고, 노동조합운동과 사민당이 성장해 정권을 잡는다는 구상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5월, 각국 사민당 대표가 모여 종전을 협상하는 ‘스톡홀름 강화회의’를 추진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사전 협상에서, 프랑스와 벨기에 사민당 대표는 독일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고, 독일 사민당 대표는 자국 노동자의 여론 상 1914년 이전 상태로의 ‘무조건 복귀’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결국 독일-오스트리아를 향한 ‘공세’가 아니라 ‘국제주의 정신에 입각한 평화협상’으로써 서부 영토를 탈환하려 했던 소비에트의 시도는 실패했다.
이후 임시정부 외무장관 밀류코프는 독일의 승리가 혁명과 평화를 위협할 것이라며 ‘적극적 방어’를 소비에트 지도부에 요구했고, 멘셰비키 당대회는 독일의 침략에 대한 방어를 결의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도 이에 따라 ‘6월 대공세’를 승인했다. 이 무렵 소비에트 조직이 각지로 확대되며 제1차 전러시아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총회가 열렸는데, 총회에서는 볼셰비키 안건이 대부분 부결되었고, 임시정부 지지와 ‘혁명적 전쟁’ 지속이 결의되었다.
소비에트 … 대의원은 노동자, 농민, 병사 사이에서 선출되었다. 이러한 선거방식이 선출된 대의원 중 일부가 부르주아, 특히 소부르주아를 대변하는 것을 당연히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소부르주아적인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경향은 대중의 일부에 영향력이 있었다. 이는 특히 2월혁명 이후에 그랬는데, 그래서 소비에트 대의원 다수가 사회혁명당원이었고, 이후 6월에 선출된 [전러시아 소비에트의 지도부인] 중앙집행위원회에서도 사회혁명당이 다수를 점하게 된 것이다. (1권 1부 1장 1절 서론)
③ 공장: 임금 인상 요구와 ‘사보타주’ 대응을 둘러싼 노조와 공장위원회의 갈등
도시의 경제난에 대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지도부는 임시정부에 책임을 돌렸고, 멘셰비키는 주로 사업장에서의 노동조합 복원과 임금 인상 요구에 집중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임금 투쟁이 겹치면서 자본가·기술자들이 대거 이탈하는, 레닌의 표현으로 ‘사보타주’가 발생했다. 이에 대응해 4월부터 공장위원회 운동이 등장했는데, 이는 개별 임금 인상 요구의 한계를 넘어서 보다 정치적 차원의 근본적 대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공장위원회는 경영자·기술자에 대한 ‘노동자 통제’에서 시작되었으며, 여기서 ‘통제’란 경영이 아닌 감시를 뜻했다. 노동자들은 기술과 경영 능력이 없었기에, 사보타주로 도피한 이들을 붙잡고 출근시켜 일을 시키는 방식으로 공장을 유지하려 했다. 사보타주가 만연한 현실은, 노동자들 사이에 노동조합을 통한 임금 협상이 아닌 경영진에 대한 ‘정치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낳았다. 이에 기초한 공장위원회 운동은 점차 정치권력과 전쟁 문제로까지 시야를 넓혀갔다.
1917년 2월혁명 이후 노동자운동에서 특기할 점은 공장위원회 조직과 노동조합의 분열이었다. … 1917년 2월혁명 이후 노조는 부활하였으나 과거와 달리 노동자들로부터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 노동조합은 단체협상의 방법만을 고수하려 하였다. 또 노조 내에서는 멘셰비키나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1917년에 사회적 분열이 심화하거나 노동자들의 행동이 급진적으로 변할 때마다 영향력이 약해져 갔다. … 그 이유는 공장노동자들이 1917년의 경제 파국이 심화하자 ‘빵과 버터’를 위한 노조의 경제투쟁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겼고, 파업에 가담했을 경우 징집으로 위협받았기 때문에, 점차 지엽적인 문제에 골몰하기보다는 러시아 전체 사회질서와 권력구조의 재편성에 더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공장노동자들은 이제 더 이상 노동조합을 통해 당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 이정희, 『러시아 혁명과 노동자』, 느티나무, 2003, 53-54쪽.
베틀렘은 멘셰비키가 “공장위원회에 주로 노동조합의 업무를 부여하려 했다”(1권 1부 1장 1절 서론)고 짧게만 언급하는데, 이정희의 책에서 공장위원회 운동을 노동조합으로 포섭하려 했던 멘셰비키의 시도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이 시도는 실패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지지가 약해지고 공장위원회 운동이 강력해졌다. 이는 2월에서 10월 사이 사회관계 변화의 한 축을 이룬다.
④ 도농 관계: 식량난과 농민 소비에트 문제
2월혁명의 도화선이었던 식량난, 곡물 수급 문제에 대해 소비에트 지도부의 한 축인 멘셰비키는 임시정부가 책임지라는 입장 외에는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반면 사회혁명당은 농민들의 토지 점유 운동이 벌어지면서 내부 갈등을 겪게 된다.
임시정부는 기존 제국 정부의 곡물 수매 정책, 즉 사실상 강제 수매를 지속했으나, 행정력과 군사력 부족으로 시행할 수 없었고 도시의 식량난은 계속되었다. 이에 4월 말 토지위원회를 설립해 농촌 행정을 복원하려 했으며, 사회혁명당 소속 전문가들도 이 조직에 참여했다.
농촌에서도 도시의 ‘이중권력’에 대응하듯, 1917년 중반부터 사회혁명당 주도로 농민 소비에트가 형성됐다. 하지만 이는 마을의 농민이 선출한 대표자 조직이 아니라, 주·군과 같은 상위 행정단위에서 사회혁명당원으로 구성됐다. 이는 농민과의 연결이나 식량난 해결에 기여하는 것보다 정치적 목적이 컸다.
농민 소비에트가 점차 조직되어 토지위원회에 맞섰다. 소비에트를 형성한 주도자들은 농촌 내의 인물보다는, 주로 군복을 입은 농민이나 병사였다. 사실상, 농민 소비에트를 조직하는 운동은 근본적으로는 위로부터의 운동이었다. 이를 추동한 것은 사회혁명당, 그리고 사회혁명당의 영향력 아래 있는 중상층 농민을 규합한 조직인 협동조합연맹(Cooperative Union, 농협)이었다. 이들이 농민 소비에트 조직에 흥미가 있었던 이유는 도시 소비에트들의 급진화를 상쇄하려는 목적이었다.
1917년 2월에서 10월 사이에, 농촌에서 ‘민주공화국’ 수립, 보통선거, 제헌의회 수립 등의 ‘급진적’ 정치요구를 내건 많은 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요구는 농촌의 지식인들이 구성한 것이었고, … 공동체 소유에 깊이 결부된 농민 대중의 열망보다는, 마을공동체를 떠난 중상농, 부농, 토지소유자의 생각을 더 반영했다. (1권 1부 1장 1절 (b))
실제로 마을의 농민 수준에서는 농민 소비에트와 무관한, 전혀 다른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곡물 수출이 중단된 후 제국 정부의 징발에 맞서며 마을공동체가 복권되고 있었는데, 2월혁명 이후 도시와 군대의 ‘이중권력’으로 인한 행정력·군사력 공백을 틈타 중농·빈농이 지주의 토지를 점유하기 시작했다. 이는 도시의 식량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농민운동도 2월에서 10월 사이 사회관계 변화의 한 축이므로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당시 사회혁명당과 농민 소비에트는 전제정 반대와 임시정부 ‘비판적 지지’라는 넓은 입장을 유지했지만, 점차 농민 토지 점유 운동을 둘러싼 갈등이 분출되며 이를 지지한 좌파 사회혁명당이 분열하게 된다.
2) 도시의 정치·이데올로기관계 변화와 볼셰비키의 이데올로기 투쟁
베틀렘은 1917년 2월에서 10월 사이 도시의 사회관계, 주로는 정치·이데올로기관계 변화의 핵심으로 공장위원회 운동 확산, 6월 대공세 실패 이후 페트로그라드 인민이 볼셰비키의 ‘패전’과 ‘소비에트 권력’ 구호를 수용한 것을 꼽는다.
시간이 지나며 노동자 소비에트들이 점차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부르주아와의 연정과 제국주의 전쟁의 지속을 지지했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점차 신뢰를 잃었고, 노동자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상승했다. 노동자 소비에트의 급진화는 처음에는 더뎠으나, 나중에는 놀랄 정도로 급속히 진행됐다. … 도시 소비에트들의 “볼셰비키화”를 일으킨 주요한 사회적, 조직적 기반은 2월혁명 이후 급격히 증가한 공장위원회였다.
8월과 10월 사이에 볼셰비키 당의 구호가 노동자계급 대중 사이에 급격히 확산한 것이 주요한 계기였다. … 4월에 프롤레타리아는 “미치광이 레닌”에 대해 수군댔으나, 이들은 점차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눈먼 정책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지 깨닫게 되었다. (1권 1부 1장 1절 (a))
당시 레닌은 1914년 이전으로 복귀하자는 ‘합병도 배상도 없는 평화’가 아니라, 독일에 서부 영토를 내주는 조건으로 전쟁에서 즉시 이탈할 것을 주장하며 ‘미치광이’로 불렸다. 게다가 그는 이를 실현하려면 소비에트가 거리투쟁의 지도부가 아니라 스스로를 ‘정부’로 선포해 국정을 직접 책임져야 하며, 전쟁을 종식한 후 경제난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도시 노동자와 병사들은 임시정부에 ‘빵과 평화’를 요구하는 투쟁을 할 게 아니라, 자신들이 선출한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으로 이를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자본가의 사보타주가 만연한 상황과 세계대전 이탈로 인한 국제금융과의 단절을 전제로,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인 소비에트가 국가 경제를 정치적으로 강력히 통제해야 경제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공장위원회 운동이 제기한 경영진에 대한 ‘정치적’ 통제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공장위원회가 아닌 소비에트에 의한 ‘전국적 회계와 통제’의 확립을 강조했다. 또한, 소비에트가 토지를 국유화하고(즉 마을공동체의 점유를 부정하고) 경작권을 농민에게 배분함으로써, 농민을 국민경제와 다시 연결하고 도시 식량난을 해결하겠다는 구상도 제시했다. 다만 제국의 군사적 확장과 관련된 군수산업 중심의 중공업의 비효율성 문제는 충분히 다루지 못했고, 이는 후일 신경제정책 시기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레닌의 주장은 공장위원회 운동 속에서 점차 받아들여졌지만, 대중과 심지어 당내에서도 저항이 컸다. 베틀렘은 당시 그런 ‘시류에 거스른’ 레닌의 입장을 높이 평가했다.
레닌은 이 [혁명적 방위론의] “광기”와 싸우며, 소수파인 당이 “대중과 함께해야” 한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다수의 전염병에 굴복”하면 안 된다고 요구했다. (1권 1부 1장 2절 (a))
조금 뒤의 일이지만, 소비에트 정부 수립 이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체결에 반대한 볼셰비키 내 경향을, 베틀렘은 ‘좌익공산주의’(경제주의의 좌익적 형태)라고 평가한다. 이들은 조약이 제국주의 세력과의 타협이라며, 노동자 일각의 이익과 요구를 무시하고 부르주아에 양보했다고 비판했다.
1918년 3월 3일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공식적으로 조인되었다. 하지만 협상이 시작된 이후의 몇 주는 당이 얼마나 깊이 분열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줬다. 이 분열은 기본적으로는, 세계혁명운동의 미래를 위해서는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유지가 사활적이라는 레닌의 입장에 동의한 이들과, 받아들일 수 없는 양보를 하고 생존하느니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사라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이들 간의 대립이었다. … 이 경향은 무엇보다도 “좌익공산주의자”들의 경향이었다. (1권 4부 2장 3절, 4절)
1917년으로 돌아오면, 레닌은 ‘혁명적 방위’를 주장하며 임시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전러시아 소비에트를 계속 비판했고, 특히 ‘6월 대공세’를 제국주의 전쟁에 병사를 희생시키는 행위이자 군부의 부활 계기로 규정하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대공세 실패 이후 수도 대중의 여론은 급속히 바뀌었다.
6월과 7월 이후에 상황이 급변했다. 경험이 대중에게 새로운 교훈을 알려주었다. 노동자와 병사의 눈에, 전쟁 지속은 인민의 이익이 아니라 러시아 부르주아와 영국-프랑스 제국주의의 이익에 상응한다는 점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 이들은 임시정부,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이 부르주아의 이익을 지탱하며 오직 볼셰비키만이 이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를 제거하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하며,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대중에게 긴요해졌다. (1권 1부 1장 2절 (a))
여론의 급반전은 ‘7월 사태’로 드러났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들이 봉기해 소비에트 지도부를 공격하고 볼셰비키에게 소비에트 장악을 요구했지만, 레닌은 이를 거부했다. 이는 ‘소비에트 권력’ 구호에 맞지 않고, 도시 인민의 미성숙한 봉기가 전체 혁명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소비에트 지도부는 위기를 느껴 볼셰비키 체포를 명령하고, 임시정부에 군사력 복원을 요청한다. 임시정부는 군 재조직을 지시하며 코르닐로프 장군에게 페트로그라드 진입을 명령한다. 이에 레닌은 일시적으로 ‘소비에트 권력’ 구호를 철회하기에 이른다.
소부르주아적 국수주의 정당들의 소비에트 지배가 강화될 위험이 짙어지자,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철회하며, 소비에트가 “반혁명의 무화과 나뭇잎[조각·회화에서 치부를 가리는 데 쓰임]”으로 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는 4월부터 7월 초까지 가능했던, 소비에트의 평화로운 발전을 바라는 구호였다. … 이 구호는 더 이상 옳지 않다. 소비에트 권력의 주인이 [사회혁명당·멘셰비키를 통해 부르주아로] 바뀌고,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혁명을 완전히 배반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9월에 코르닐로프의 쿠데타가 패배하고 소비에트 내에 볼셰비키 대의원이 많아지면서, 레닌은 다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지지했다. (1권 1부 2장 3절 서론)
9월부터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서부전선 등 소비에트 선거에서 볼셰비키가 압승을 거두며 정치 지형이 재편됐다. 하지만 동부와 남부의 농촌에서는 장군들이 군대를 재편해 농민운동을 탄압할 위험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틀렘은 이러한 조건 속에서 도시와 농촌의 결합을 위해 임시정부를 타도하는 10월혁명이 필요했다고 본다.
3)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로서 농민운동
베틀렘은 1917년 여름 시작된 농민의 토지 점유 운동을, 레닌을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로 규정한다. 이전 단계는 사회혁명당 다수파나 농민 소비에트처럼 전제정 타도와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에 머물렀다. 그러나 마을 수준의 농민운동은 이와 다르게 전개됐다. 도심과 전선의 혼란으로 생긴 권력 공백 속에서 빈농들이 지주의 토지를 점유했고, 이어서 부농도 이에 가담하며 토지를 늘렸다.
이 운동을 ‘새로운 단계’라 규정한 이유는 과거 지주계급의 토지를 몰수했고, 임시정부의 전쟁 수행 능력을 타격했으며, 사회혁명당의 자제 요청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몰수한 토지를 사유화하고, 이를 방어하고자 마을공동체를 재건했다는 점에서 이는 ‘부르주아적’인 실천이었다. 또한, 이 운동은 마을 내에 고립되어 전쟁, 정치권력, 도시 식량난 같은 국가적 문제에는 무관심했다는 점에서 ‘소부르주아적’ 실천이기도 했다.
1917년 2월에서 10월 사이 … 농민의 활동은 근본적으로 토지개혁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지주, 국가, 성직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분배하는 것으로, 과거의 농민 투쟁들 – 국지적 봉기와 토지 점유 - 과 동일한 성격의 운동이었다. 하지만 5월에서 10월 사이에 이와 같은 농민 대중의 혁명적 활동의 규모가 거대해졌다. 이는 사회혁명당의 통제를 벗어났고, 10월혁명으로 향하는 길을 닦았다.
1917년 2월에서 10월 사이 농민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권력 문제에 대한 무관심, 지역의 권력기구 수립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지원이나 지도가 없는, 이런 고립된 운동은 과거의 농민반란과 똑같이 패배할 운명이었다. … 농민 대중의 행동이 왜 토지와 관련된 직접 행동에만 국한되었으며,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조직적인 연대를 지향하지 않았는가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 농촌의 오래된 구조, 전통적인 마을공동체 회의(일반적으로 중상층 농민이 이를 지배했다)의 존재는 마을 수준에서 소비에트 형성과 농민운동의 완전한 급진화를 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토지의 “공유”와 개별경작을 결합한) 농촌의 오랜 구조를 침식했음에도, 이 구조는 여전히 마을을 하나의 자족적이며 완결된 소세계로 만들었다. (1권 1부 1장 1절 (b))
문제는 8월을 거치며 농촌에서 반혁명 군대가 조직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정치의식이 높아진 페트로그라드 인민은 코르닐로프의 진격을 저지했지만, 마을 단위로 고립된 농촌은 취약했다. 레닌은 경제난을 해결하려면 소비에트 정부 수립을 통한 도농 간 재연결이 필요하고, 농민운동이 공격당하면 도시 혁명도 위협받는다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도시에서의 ‘소비에트 권력’ 지지 여론과 볼셰비키의 선거 승리, 그리고 반혁명 위협과 도농 연대 문제는 레닌과 볼셰비키가 10월혁명을 결심하게 한 배경이 된다. 레닌은 혁명 직전, 기존의 토지 국유화 정책을 철회하고, 농민의 토지 점유를 법적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하며 농민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농민이 토지를 위한 투쟁에 뛰어든 것은 러시아혁명을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했다. 이는 농민과 부르주아 간의 연대가 사실상 무너졌음을 의미했다. 양자의 연대는 임시정부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고 부르주아에게 권력을 주었다. 이 연대가 무너지면서 부르주아와 혁명적 대중 간의 충돌이 불가피해졌고, 프롤레타리아와 볼셰비키가 빠르게 행동하는 것이 긴요해졌다. 다가올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가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거나, 도시에서 대중운동이 더 발전하길 기다릴 여지는 없었다. 기다리는 것은 … 임시정부가 농민을 탄압하는 것을 허용하고, 나아가 여전히 임시정부에 충성하는 군인들이 페트로그라드에 집결해 공격을 가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의미였다. … 볼셰비키는 망설여서는 안 되었다. (1권 1부 1장 2절 (b))
10월 25일 직전에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에서 레닌이 했던 연설[에서] … 그는 농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존의 토지소유 관계를 끝내는 법령으로 농민의 신뢰를 얻을 것이며, 농민은 자신을 구하는 방법이 노동자와의 연대에 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1권 1부 1장 3절 (a))
도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농촌의 민주주의적 혁명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는 10월혁명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고, 제헌의회 해산과 이후 내전, 신경제정책까지 이어지는 핵심 쟁점이었다. 베틀렘은 이 두 흐름의 결합을 위해 10월혁명이 필요했다고 보며, 이러한 평가는 곧 내전에 정치적 대의가 있었다는 그의 해석으로 이어진다. 이는 다음 글에서 확인할 것이다.
4) 소결: 10월혁명의 성격 평가
베틀렘은 2월혁명과 10월혁명은 성격이 달랐다고 평가한다.
모든 혁명은 대중의 결의 있는 행동과 영웅주의(heroism)에 기인한다. 1917년 2월혁명도 그런 사례였다.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및 다른 도시들의 노동자계급은 결정적인 역할을 행하였다. 하지만 이 혁명은 프롤레타리아의 통치를 수립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10월혁명은 이전의 모든 혁명과 달랐다. 10월혁명은 프롤레타리아적 이념의 인도에 따라서 수행되었다. (1권 1부 2장 서론)
도시와 군대의 여론이 변화하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볼셰비키 노선을 수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 핵심이었다. 이로써 페트로그라드에서의 10월혁명은 무혈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2월부터 10월 사이, 레닌의 주장대로 소비에트를 단순한 투쟁 지도부가 아닌 ‘정부’로 세우고, 패전을 통해 전쟁을 즉각 끝내는 데 동의하는 ‘프롤레타리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변화가 10월에 정치적 전환으로 이어진 것이다.
10월 25일의 일은 [이후의 내전과 같은] 인민전쟁(people’s war)의 정점도, [이전의 2월혁명과 같은] 반역(rebellion)도 아니었다. 이는 대중이 지지하는 봉기였으며, 사전에 구상된 계획에 따라 무장한 군대가 이를 수행했다. 이 무장한 군대는 노동자계급과 병단에서 차출되었으며, 볼셰비키 당이 지시한 특정 목표만을 정확하게 달성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1권 1부 1장 2절 (b))
당연히도, 관공서의 점령이나 장관의 체포로 부르주아의 통치를 프롤레타리아의 통치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사적 변화인 그런 대체를 가능하게 한 것은, 10월혁명이 드러내어 보여준, 새로운 계급 간 세력관계였다. 또한, 이로써 10월혁명은 그러한 세력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1권 1부 2장 서론)

베틀렘은 이런 이데올로기·정치관계의 변화에서 레닌과 볼셰비키 당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짚는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볼셰비키 당이 행했던 지도적 역할이 단지 ‘역사의 운’의 [세계대전이 유발한 극단적 상황의] 결과였던 것은 아니었다. … 볼세비키 당의 강세와 제도적 역할은 세력의 사용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론적 분석을 수행하고, 이 분석을 정치노선, 조치, 구호로 옮겨, 대중의 가장 전투적인 부분과 밀접한 관계를 확립했던 능력에서 비롯했다. (1권 1부 2장 4절 서론)
앞서 살펴본 1917년 2월에서 10월 사이 볼셰비키의 정책은, 러시아제국의 경제구조와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레닌의 이론적 분석에 기반한 것이었다. 레닌은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함께, 러시아 자본주의의 특수한 결함인 군사적·봉건적 제국주의 탓에 러시아제국이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는 평화협상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며, 자본주의적 경제관계 자체의 변혁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당장은 상술한 우선 과제가 제시된 것이다.
정치혁명으로서 10월혁명의 즉각적 의의는, 도시에서 군사력이 이미 소비에트로 넘어간 상황에서 임시정부가 농촌의 반혁명 군대와 연계하려는 시도를 차단함으로써 도시와 농촌의 이중혁명을 방어한 데 있었다. 나아가 세계대전에서 이탈함으로써 경제난 수습과 이후 경제관계의 근본적 변혁 가능성도 열었다. 베틀렘은 이러한 점에서 10월혁명의 의의와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을 지속하고,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를 수행하며,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을 떼기 위해,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형성할 가능성을 열었다. (1권 1부 2장 서론)
4. 10월혁명으로 만들어진 사회관계, 특히 정치관계의 특징
베틀렘은 10월혁명을 통해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고 전쟁에서도 이탈했음에도,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을 지속하며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결합이 10월 이후 ‘새로운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썼다.
러시아혁명의 특수성은 두 가지 혁명 과정 즉 프롤레타리아적 혁명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혁명의 ‘결합’에서 기인했다. 10월 이후에도 이 ‘결합’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대신 전혀 새로운 성격을 갖게 되었다. (1권 1부 1장 3절 서론)
[10월혁명으로] 혁명이 새로운 단계 즉 프롤레타리아적 단계로 넘어갔다는 것이 혁명의 민주주의적 과제들이 모두 달성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당시의 계급관계에서는 민주주의적 과제는 오직 프롤레타리아적 혁명의 고조와 승리로 연결되어야만 달성될 수 있었다. (1권 1부 1장 3절 (a))
1권 1부에 제시된 이 문장은 상당한 의미를 함축하며, 앞으로 연재에서 계속 그 의미를 확인해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10월혁명 시점에서 이와 관련된 문제로 베틀렘이 꼽은 것을 살펴보겠다. 이 문제들은 10월 이후 사회관계 변화와 계급투쟁의 조건을 이룬다.
1) 정치관계: ‘소비에트 기구의 불완전한 작동’ 문제
베틀렘은 10월혁명 이후 핵심 문제가 ”소비에트 기구의 생명력“, ”소비에트의 불충분한 작동“이었다고 지적한다(1권 1부 2장 2절 (b)). 10월혁명을 가능케 한 이중적 운동 속에서, 농민 소비에트와 도시 노동자 소비에트는 각각 한계를 안고 있었다. 농민 소비에트는 실제 농민과 유리된 사회혁명당 중심의 조직으로,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에서 볼셰비키가 다수인 도시 소비에트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혁명 이후 볼셰비키와 소비에트 정부는 농민을 선거나 행정에 참여시키려 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마을, 읍, 군 등의) 소비에트 기구(…)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의 필수 부분이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독립적인 정치활동을 발전시키기 쉬운 수많은 농민이 이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 소비에트 기구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약화하는 행동 노선을 취할 위험성이 존재했다. (1권 1부 2장 2절 (b))
10월혁명으로 농민이 점유한 토지가 법적으로 인정되며 마을공동체의 권력이 강화됐지만, 이는 여전히 고립되었고, 소비에트 정부의 통제력은 대도시·서부·지방 중심지에 제한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농촌과의 연결에서 임시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이런 도시와 농촌의 이중성은 의회 격인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와 그 상설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의 정당성과 권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규정지었다.
10월 직후에 [전러시아 소비에트에 속한] 소비에트 기구, 우선은 [10월혁명 직후의] 제2차 소비에트 총회가 선출한 중앙기구들이 점하게 된 지위는, 혁명운동과 봉기에서 볼셰비키 당이 수행했던 지도적 역할의 결과였다. … [그러나] 많은 소비에트 기구를 여전히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 기구들은 볼셰비키 당이 이끈 노동자 대중이 임시정부를 전복한 사실을 승인했던 제2차 총회에 참석하길 거부했다. 10월혁명의 몇 년 뒤 스탈린이 말했던 것처럼, “소비에트 총회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로부터 권력을 그저 넘겨받았다.” 즉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결정을 주도했던 볼셰비키 당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았다.
혁명의 동학, 그리고 노동자계급 대중을 이끌었던 혁명적 진취성은, 소비에트가 아니라 볼셰비키 당에 유효한 권력을 부여했다. 만약 제2차 총회를 비롯한 소비에트 총회들로부터 나온 기구들이 실제로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면, 이는 볼셰비키 당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1권 1부 2장 3절 서론)
1917년 10월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를 중심으로 한 도시 소비에트는 가장 활발한 정치 주체였다. 급진화된 도시와 전선의 노동자·병사들은 소비에트 선거에 적극 참여했고, 소비에트 권력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며 볼셰비키를 지지했으며, 많은 이들이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9월 이래 볼셰비키가 다수인 도시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고, 베틀렘은 이들이 사회혁명당 중심의 다른 소비에트 기구들과 타협함으로써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고 본다. 즉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와 이로부터 나온 소비에트 기구들의 권위는 도시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에 사실상 의존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첫 번째 쟁점은 제헌의회 해산이었다. 제헌의회 선거는 본래 임시정부가 계획했으나, 10월혁명 이후 소비에트의 승인 아래 진행됐다. 이는 과거 제국의회 선거와 달리, 급진적으로 전국의 20세 이상 남녀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를 채택했다. 도시와 서부에서는 볼셰비키가 우세했지만, 인구가 많은 농촌에서 사회혁명당이 승리하며 다수당이 됐다. 그러나 제헌의회가 소비에트 정부를 부정하고 전쟁 지속을 선언하자, 페트로그라드 대중의 반발로 해산됐다. 연구자들은 농민의 사회혁명당 지지가 적극적이었다기보다 ‘인지도’에 따른 것이었고, 소비에트 정부가 토지 점유를 법적으로 승인한 탓에 제헌의회 해산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농촌의 정치적 무관심과 고립은 소비에트 정부에게도 장애물로 작동했다.
프롤레타리아적 정치권력과 이것의 지도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농민 인구의 우세 사이의 모순이 낳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효과는, 선거 결과가 아니라 바로 소비에트의 불충분한 작동이었다. (1권 1부 2장 2절 (b))

두 번째 쟁점은 소비에트의 선거제도였다.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를 표방하며 지주와 부르주아를 배제했지만, 고대 그리스의 추첨제와 같은 ‘직접민주주의’가 아닌 대의제를 채택했으며, 심지어 평등선거가 아닌 차등선거를 채택했다.
권력기구의 작동 수준에서 살펴보면, (프롤레타리아의 지도활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수많은 농민의 존재로 인해 10월혁명 직후 특정한 조치와 결의들이 나왔다. 이 중 형식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의] 농민 대의원 비율을 125,000명의 주민당 1명, 도시민(townsfolk) 대의원 비율을 25,000명의 유권자당 1명으로 정한 것이었다. 레닌의 인식처럼, 프롤레타리아의 조직이 농민의 조직보다 더 빠르게 진보하였다는 사실, 따라서 노동자에게 이점(advantage)을 부여해야 한다는 생각이 두 비율의 차이를 정당화했다. (1권 1부 2장 2절 (b))
세 번째 쟁점은 ‘전러시아 소비에트 총회’에서 파생된 기구 간의 권력분립 문제였다. 의회 격인 총회는 상설기구인 ‘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출했고, 그 산하에 행정부 역할을 하는 ‘인민위원회’가 설치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위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보다, 대다수 볼셰비키로 구성된 인민위원회가 더 강한 실질적 권력을 행사했다.
정부권력은 인민위원회에 집중되었다. 인민위원회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이 없어진 뒤로, 이는 곧 정부권력이 볼셰비키 당에 (나아가 당 중앙위원회, 궁극적으로는 당 정치국에) 집중되었음을 의미했다. 당은 인민위원회와 비슷하게, 혹은 더 자주, 중요한 결정들을 구상했다. 인민위원회보다 앞서서 말이다.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의 유효한 통치력이 박탈당하고 인민위원회와 볼셰비키 당 중앙위원회가 우위에 서게 된 과정이 상당히 중요하다. 이 과정은 최고 정치권력이 어디에 위치할 것인지를 결정하여, 이것이 소비에트 기구들에서 나온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가 아니라, 당의 편에 있게 하였다. (1권 1부 2장 3절 (c))
한편, 베틀렘은 소비에트 기구의 ‘관료제적 왜곡’에 대해서도 1권 1부에서 간략히 언급한다. 이는 10월혁명 이후 특히 내전기를 거치며 본격화되는 문제로, 다음 글에서 다루겠다.
2) 사회관계: 광범위한 ‘비프롤레타리아적 인민세력’의 존재
소비에트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정치적 문제는 사회관계로부터 설명된다. 베틀렘은 10월혁명 이후 계급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로, 광범위한 ‘비프롤레타리아적 인민세력’의 존재를 지목한다.
소비에트 국가의 구체적 실재는 필연적으로, 농민 인구와 프롤레타리아 사이 관계의 성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전자는 농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결정적 사회세력(determining social force)이었으며, 후자는 당을 통해 작동하는, 지도적 사회세력(leading social force)이었다. 이 문제는 이중적이었다. 하나는 (주로 농민인) 비프롤레타리아적 인민세력(non-proletarian popular force)의 광범위한 존재와 프롤레타리아적 세력 사이의 모순이며, 다른 하나는 통치권력의 민주주의적 성격 즉 그 [첫 번째] 모순을 올바르게 다루는 문제이다. 당시 주어진 상황에서는 다음이 필요조건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는 프롤레타리아와 이들의 당이 이끌어야 했지만, 광범위한 인민대중에 기초해야 했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었지만,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기구 – 무엇보다 우선,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자치기구인 소비에트 -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그것도 중요한 위치를 점해야 했다. (1권 1부 2장 2절 (b))
베틀렘은 1917년 도시와 전선에서처럼, 이론과 정책으로 농민을 설득해 나가는 것이 해법이라 봤다.
농민과의 관계에서 당의 지도활동이 취약했던 것은 농민의 혁명적 활동[토지점유 운동]이 취했던 독립적 형태와 이 활동이 이룬 성공과 결부되어 있었다. 실제로는, 그 활동이 성공하고 강화된 것은 노동자계급과 볼셰비키 당이 도시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달성하여 농민의 혁명적 운동을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농민의 눈에는 도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농촌의 민주주의 혁명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 명확하지 않았다. … 그렇기에, 계속 반복하여 강조하지만, 농민 대중에게 자신들의 근본 이익이 프롤레타리아의 이익과 일치한다는 점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1권 1부 2장 2절 (b))
다만 ‘비프롤레타리아적 인민세력’ 문제는 농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도시 노동자 나아가 2월에서 10월 사이 형성된 프롤레타리아조차 한계가 있었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볼셰비키의 지도적 역할이 가졌던 두 번째 한계는, 심지어 노동자들 사이에서조차 당의 이데올로기적 지도 역할이 주로는 정치적 측면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노동자계급 대중의 핵심 부분에 널리 수용되었던 것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이데올로기 – 이는 사회주의로의 길을 밝히고,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보여준다 – 이 아니라, 레닌의 표현에 따르면, “당면 과제”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한계와 당면한 혁명의 과제들 탓에, 볼셰비키 당은 소비에트 권력이 확립되었음에도 곧바로 사회주의적 변혁을 시도할 수 없었다. 1917년과 1918년 초까지, 당은 (몇 가지를 제외하면) 사회주의적 목표들을 급격히 달성하려 하는 것은 유토피아적이며 극히 위험하다고, 올바르게 생각하였다. (1권 1부 2장 1절)
3) 소결: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결합’의 ‘새로운 성격’
베틀렘은 10월혁명을 도시와 농촌의 두 혁명을 결합하려는 시도로 규정하고, 그 결합이 이후 ‘새로운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본다. 그는 1권 1부에서 10월 이후 혁명이 수행해야 할 과제를 추상적으로 제시하는데, 이 글의 4장 서두에서 인용된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 글부터 본격적으로 다뤄질 핵심 주제다.
1권 1부에서는 특히 10월혁명 직후, ‘비프롤레타리아적 인민세력’의 광범위한 존재와 연관된 ‘소비에트의 불완전한 작동’ 문제를 지적한 점이 중요하다. 이 문제는 이후 사회관계 변화에서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했고, 레닌은 이를 고찰하며 신경제정책과 문화혁명의 노선을 발전시키게 된다.
5. 결론
지금까지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1권 1부를 따라 1917년 10월혁명까지의 사회관계 변화를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살펴봤다. 제국 시절의 경제구조는 여전히 잔존했으며, 농촌에서는 마을공동체 내 불평등과 토지 갈등이 격화되다 세계대전 이후 빈농 중심의 토지 점유와 공동체 부활로 이어졌고, 이는 도시-농촌 간 단절과 식량난을 초래했다. 경공업은 통화가치 하락으로, 중공업은 독일군 점령으로 위기에 처했다. 전시에 정부가 국채와 화폐발행으로 군수부문은 유지했지만, 2월혁명과 6월 대공세 실패 이후 산업 전반이 침체됐다.
2월혁명 이후 최대의 문제는 어떻게 경제난과 전쟁을 풀 것인가였다. 소비에트 지도부를 구성했던 멘셰비키는 노동운동의 기반 유지를 위해 ‘혁명적 방위론’을 내세워 사실상 전쟁을 지지했고, 소비에트를 투쟁 지도부로 제한했다. 반면 볼셰비키는 즉각적 전쟁 이탈과 소비에트 ‘정부’ 수립을 통해 경제난을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제금융과의 단절을 감수하고 소비에트 정부가 노동자·농민과 연결되며 산업에서의 ‘노동자 통제’ 및 도농 관계 복원을 이루자고 했다.
이러한 볼셰비키 노선은 도시의 공장위원회 운동에서 점차 수용되었고, 6월 대공세 실패 이후 여론이 급속히 전환되며 9월부터 대도시 소비에트 선거에서 볼셰비키가 승리했다. 반면 농촌에서는 반혁명 군대가 조직됐다. 볼셰비키는 이를 차단하고 농민의 토지 점유를 인정하기 위해 10월혁명을 감행했다.
베틀렘은 2월혁명은 자생적이었지만, 10월혁명은 프롤레타리아적 이념에 기반한 정치혁명이었다고 평가했다. 볼셰비키 정책을 받아들인 도시 노동자들 가운데 (혁명적 실천을 수행한다는 의미의) ‘프롤레타리아’가 형성되어 당의 핵심 지지 기반이 되었으나, 여전히 러시아 전역에서는 비프롤레타리아 인민세력이 다수를 이뤘다. 물론 도시 프롤레타리아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이런 사회관계 상의 특징은 정치관계에서 신생 소비에트 권력의 특징을 규정했다.
10월혁명은 시작일 뿐이었다. 베틀렘은 이를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으로 형성되는 ‘가능성’을 연 사건으로 보며, 이 가능성을 현실화하지 않으면 기존 자본주의적 경제관계에 의해 소비에트 권력이 무력화되거나 혹은 부르주아적 성격의 것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10월혁명의 지도를 넘어, 프롤레타리아적 계급투쟁의 전진을 위해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과제를 결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상을 제시해야 했다.
다음 글부터 이 주제를 다룰 것이다. 다음 글의 대상 시기는 1917년 10월부터 1923년 신경제정책의 본격 개시까지다. 이때 소련은 세계대전에서 이탈해 경제를 재건하려는 도중에 농촌의 반혁명 위협이 실체화되며 내전이 벌어진다. 이에 극히 복잡한 사회관계 변화가 일어나며, 그 결과는 1917년 혁명 때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이 시기 계급관계에서는 공장 내부, 농촌 내부, 그리고 공장과 농촌 간의 관계 모두에서 ‘비프롤레타리아적 사회세력’ 문제가 드러나는 동시에, 1917년에 형성된 프롤레타리아의 ‘부르주아화’ 문제도 함께 나타난다. 베틀렘은 이를 자본주의적 경제관계와 밀접히 연관지어 분석한다. 이러한 경제·계급관계의 문제는 정치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며, 앞서 언급한 ‘소비에트의 불완전한 작동’ 위에 ‘관료제적 왜곡’이 더해진다. 그러나 베틀렘은 당시 ‘관료제’라 지칭된 현상이 사실상 자본주의적 경제구조와 계급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런 변화 속에서 이데올로기 관계에서도, 볼셰비키 당이 ‘부르주아적 노동당’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볼셰비키 당은 프롤레타리아적 이념을 조직적으로 전파한 집단이었으며, 따라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형성할 수 있게 하였다. 볼셰비키 당과 프롤레타리아 중 가장 전투적인 인자들 사이에 확립된 연결로 인해, 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제도로서 봉사할 수 있었다. 이 역할은 당이 프롤레타리아와의 연결을 지속하며, 프롤레티리아적 이념과 실천의 전달자이길 계속하는 한 유지될 것이다. 둘 중 후자의 조건이 항상 더 중요하다. 당이 노동자계급 내에서 외연을 더 넓히더라도, 프롤레타리아적 이념과 실천의 고수를 포기하고 “부르주아적 노동당”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1권 1부 2장 서론)
이런 사회관계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했는가에 천착하며, 베틀렘이 제기한 것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결합’이 ‘새로운 성격’을 띠게 됐다는 주장이다. 베틀렘은 특히 레닌이 말년에 발전시킨 신경제정책과 문화혁명의 노선을 정리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혁명의 결합이 지닌 새로운 성격이 무엇인지 밝힌다.
그전까지 레닌과 볼셰비키는 두 혁명의 결합을, 주로는 10월혁명의 연장선에서 내전 수행을 통해 ‘비프롤레타리아적 인민세력’을 보호하고 소비에트를 전국적으로 확립함으로써, 소비에트 주도의 경제통제를 발전시키고 이에 ‘비프롤레타리아적 인민세력’을 끌어들인다는 구상 속에서 이해했다. 베틀렘은 이것이 신경제정책을 주로는 ‘경제적’ 필요에서 제기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내전기의 복잡한 사회관계 변화와 상술한 문제들, 경제주의의 ‘좌익적’ 경향에 이어 ‘우익적’ 경향과 논쟁을 거치며, 레닌은 1922~23년에 신경제정책의 ‘정치적’ 의미를 강조하는 구상을 제기한다. 즉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가 아닌 민간의 소유권에 기초하여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경로가 존재할 수 있다는 뜻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이해하려면, 다음 글에서 다룰 1권 2-4부의 내전기 사회관계 분석을 거쳐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