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5 가을. 1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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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주의와 권위독재정의 공포에 맞서는 길

『자유주의의 역사: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

정성진 | 정책교육국장

『자유주의의 역사: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

지은이: 박상현, 유주형 외

출판사: 공감

출간일: 2024.12.27.

 

 

1. 왜 자유주의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가?

 

오늘날 세계 정치의 화두는 단연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민주주의적 질서를 이끌었던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조차 자유민주주의적 제도가 공격받고 권위주의적 지도자가 부상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북·중·러·이란 권위독재정 블록의 강화가 전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민주정의 퇴락’(democratic backsliding)이라는 표현은 언론이나 학계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 됐고, 프리덤하우스와 같은 국제연구기관들도 최근 몇 년간 세계 각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지표가 악화되고 있다고 보고한다. 한국도 이런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계엄-탄핵 사태를 거치며 정치위기가 극에 달했으며, 이는 만성화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민주정의 퇴보가 우려되는 세계와 한국의 현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할 것인가다. 한국에서는 주로 혐오·차별·배제를 조장하는 ‘극우’ 내지는 파시즘이 문제라고 지적하며, 신자유주의를 그 원인으로 지목하는 논의가 많다. 그러나 이들이 어떻게 자유민주주의적 이념과 제도를 무너뜨리고 있는가를, 즉 전 세계적 정치위기 가운데서 그 행태의 성격을 해명하려는 경우는 드물다.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제도를 인식하는 데서 한국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시장만능주의’나 형식적 의미의 ‘법치주의’로 주로 이해된다. 심지어 계엄 지지 세력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실정이다. 반면, 좌파에게 자유주의는 경계하거나 거부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주로 18~19세기 프랑스 정치사를 배경으로 설명되는데, 인권과 민주주의를 확장했으나 결국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는 서술이 지배적이다. 필자 역시 학생 시절 그렇게 배웠는데, 돌이켜보면 자유주의가 옹호하는 ‘소유권’을 비판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뿐, 그것이 실제로 어떤 역사적 현실과 문제의식 속에서 형성되고 변모한 것인지 구체적 내용을 따지진 않았었다.

 

『자유주의의 역사: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는 자유주의의 역사를 정리한 여러 저작을 통해 자유주의의 표준이 어떻게 형성되어 무슨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밝힌다. 서문에서 저자들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가 자유주의의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지 정세적, 이론적 이유를 제시한다. 저자들은 2007~09년 금융위기 이후 2차 대불황의 위기 가운데 미국 내 자유주의적 합의가 흔들리고 전후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공격받는 정세가 과거 영국 헤게모니가 흔들리고 대불황과 파시즘이 동시에 대두했던 1930년대 상황을 연상시킨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권위주의와 인민주의에 대항하려면 자유주의의 표준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인식하며 이로부터 인민주의에 맞설 정치이념의 조건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또한, 마르크스주의가 인민주의를 비판할 이론적 자원을 결여해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를 거치며 타락했던 역사를 성찰하려면, 자유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전형으로 간주하며 이를 급진화시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도출할 수 있다는 혁명론과 폭력적 정치문화와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영국 명예혁명 이후 확립된 ‘신체와 정신의 자유’라는 기본권에 주목하자고 말한다. 저자들은 이 자유가 소유권에 기초한 자유주의와 노동권에 기초한 사회주의가 공유하는 ‘인류 보편의 가치’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제기한다.

 

 

『자유주의의 역사』는 케이헌(Alan Kahan)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울로크(Nathaniel Wolloch)의 『자유주의의 온건파와 급진파』와 『매콜리와 계몽주의』, 아블라스터(Anthony Arblaster)의 『서구 자유주의의 융성과 쇠퇴』, 포셋(Edmund Fawcett)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기본 문헌으로 삼아 자유주의의 역사를 설명한다. 여기서 『자유주의의 역사』의 저자들은 케이헌의 관점을 토대로 하며, 울로크로 이를 보완하는 한편, 케이헌-울로크의 시각에서 아블라스터와 포셋을 비판한다. 한국에서 케이헌과 울로크의 책은 번역되지 않았지만, 아블라스터와 포셋의 책은 번역되어 있다.

 

 

2. 자유주의의 표준이란 무엇인가

: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세 가지 지주’의 결합

 

『자유주의의 역사』의 저자들은 자유주의 이념사를 정리한 최신 저작인 케이헌의 『공포로부터의 자유』의 논지를 기초로 삼는다. 자유주의에 대한 통념을 깨며 그 표준이 무엇인지 밝히고 인민주의에 대응할 자원을 찾는 데 이 책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1) 공포로부터의 자유

이 책은 제목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주의관을 흔든다. 케이헌은 자유주의가 어떤 권리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공포’에 저항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포를 일으키는가? 대다수의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케이헌은 자유주의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여러 요인 중 ‘다른 사람을 해할 힘을 가진 자’에 항상 초점을 맞춰 왔다고 설명한다. 이 점에서 자유주의는 타인을 향해 권력을 행사하는 ‘주권자’(sovereign)를 공포의 원천으로 지적했다.

 

“자유주의의 요람 위에는 항상 폭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어떤 사회에서든, 자유의 가장 큰 잠재적 적은 주권자다. 주권이 신의 이름으로 행사되든, 군주의 이름으로 행사되든, 민중의 이름으로 행사되든, 주권자는 전제정치를 할 가장 큰 기회를 가진다.”

 

케이헌은 ‘공포’가 자유를 규정하는 토대이며, “자유주의란 아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회를 찾는 과정”이라 정의한다. 즉 자유란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신체와 정신이 해를 당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공포로부터의 자유”다. 그는 시대에 따라 자유주의자들이 대응했던 현실의 공포가 변해 왔다고 보며, 이에 따라 자유주의의 세대를 아래와 같이 구분한다.

 

- 프로토자유주의:

17~18세기 종교적 광신과 전제정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 1세대 자유주의:

‘단기19세기’(1815~73년) 혁명과 반혁명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 2세대 자유주의:

‘세기말’(1873~1914년) 빈곤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 3세대 자유주의:

20세기 전체주의(히틀러/스탈린주의)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 4세대 자유주의:

21세기 인민주의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의 강점은, 각각의 공포에 어떻게 맞섰는가를 중심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하며, 그들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구체적으로 어떤 이념과 제도를 제시했는가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케이헌은 특히 프로토-1세대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도덕으로 구성되는 ‘세 가지 지주(pillar, 기둥)’라는 공통된 해법을 발견한다. 여기서 정치적 자유란 사상적·정치적 표현의 자유, 참여의 기회 보장, 이를 침해할 수 있는 자의적 권력 행사에 대한 제한을 뜻한다. 경제적 자유란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그 결과인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케이헌이 가장 강조한 도덕은 이런 자유에 적합한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개인의 향상심과 그 결과로 이뤄진 향상을 의미한다. 아울러 케이헌은 이 세 가지 지주가 모두 국가가 아닌,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케이헌은 프로토-1세대 자유주의가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부정적 자유’로부터 나아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한 세 가지 지주의 결합이라는 ‘긍정적 자유’를 제시했다고 설명한다. 이로써 특히 ‘단기 19세기’(1815~73년)에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세 지주가 다면적으로 빛나는 ‘눈부신’ 자유주의가 출현할 수 있었다. 『자유주의의 역사』의 저자들은 바로 이것을 자유주의의 이념적 표준으로 본다.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한 세 지주의 결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케이헌을 따라 몇몇 사상가들을 살펴보겠다.

 

2) 프로토자유주의에서 세 지주의 결합: 스미스를 중심으로

애덤 스미스(1723~1790)는 ‘시장만능주의자’로 흔히 오해되나, 실제로는 전제정과 종교적 광신의 공포에 맞서 경제적 자유, 정치적 자유, 도덕적 향상이라는 세 지주를 결합하며 ‘시민사회’와 ‘시민성’의 발전을 생각한 사상가였다는 것이 케이헌을 따라 저자들이 강조하는 바다.

 

스미스 사상의 출발점은 『도덕감정론』에서 제시된 ‘공감’(sympathy)과 ‘적절성’(propriety) 개념이다. 그는 도덕에 대한 선험적 규정을 제시하기보다는,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고려하려는 자연스러운 감정인 공감을 통해 개인들이 상호 관계에서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 아닌지에 대한 감각을 익힌다고 봤다. 스미스는 인간이 동물로서 가진 물질적 욕구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적 관계 속에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 따라서 더욱 적절하게 행동해 존경받는 사람이 되려는 ‘도덕적 향상’의 욕구가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로써 개인은 절제, 정의, 인애와 같은 덕목을 발전시키고, 나아가 사회가 공유하는 규범과 제도가 만들어진다.

 

(특히 뒤에서 볼 공화주의와 구분되는) 스미스 사상의 중요한 특징은 물질적 진보와 도덕적 진보가 함께 이뤄진다는 관점이다. 그는 『법학 강의』에서 ‘생존양식 4단계론’을 통해 역사적으로 경제적, 도덕적, 정치적 진보가 어떻게 함께 이뤄졌는지를 설명한다. 수렵·목축·농경사회에서 상업사회로 이어지는 생존양식의 발전 과정을 물질적 진보로만 파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상업사회의 발전을 기독교나 공화주의가 도덕적·정치적 ‘타락’으로 인식한 것과 달리, 스미스는 그것이 오히려 인간의 도덕적 향상을 촉진한다고 봤다.

 

스미스는 로크(1632~1704), 몽테스키외(1689~1755)의 사상을 계승하고 종합해, 전제정과 종교적 광신에 맞서는 ‘세 가지 지주’의 결합을 제시한다. 그는 로크의 ‘자기소유’, 즉 자신의 노동에 따른 결과가 침해되어선 안 된다는 주장에 따라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민간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옹호했다. 스미스는 『민부론』에서 상업사회가 발전하며 노동자들이 영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정치적, 도덕적으로 독립하며, 이것이 진보의 가능성을 연다고 봤다. 다만 상업사회의 분업 탓에 노동자가 파편화·불구화한다는 점도 인식했다. 따라서 상업사회가 함의하는 자유를 실질화하려면 경제적 자유만이 아니라 시민의 정치적 자유와 도덕적 향상을 촉진하는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미스는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선 시민의 정치적 자유가 확보되어야 한다고 보며 몽테스키외의 제한정부론을 수용했다. 이는 전제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권력분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몽테스키외와 스미스는 당시 영국의 헌정을 그런 사례로 인식했다. 한편, 스미스는 경제적 측면에서는 제한정부를 옹호하면서도 시민의 자유를 지키고 도덕적 향상을 돕는 데서는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시민의 자기보존을 위한 국방, 사적·공적 자의적 권력 제한과 ‘법의 지배’를 통한 시민의 권리 보호라는 의미에서의 사법(justice), 종교와 교육을 포함한 공공사업·공공기관 세 가지를 정부의 임무로 제시했다.

 

경제적, 정치적 자유에 기초한 물질적 성장과 법의 보호는 시민이 도덕적 향상을 이룰 조건이 되며, 시민의 도덕적 향상은 다시 경제활동에서 신중함·자제·근면을 강화하고 정치참여 확대를 뒷받침한다. 스미스는 도덕적 향상에서 종교와 교육의 역할을 논했는데, 종교의 도덕적 역할은 인정하면서도 광신과 미신이 자유를 파괴할 수 있으므로 종교개혁과 더불어 종교 간 자유경쟁 및 관용을 지지했다. 나아가 미신에 대한 해독제로서 정부가 철학, 과학, 예술 교육을 장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스미스의 사상은 ‘신체와 정신의 자유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세 지주가 결합해 있다. 경제적 자유, 정치적 자유와 도덕적 향상이 모두 주로 국가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발전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세 지주가 뒷받침하는 개인의 시민성 발달이 전제정과 종교적 광신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3) 프로토자유주의에서 1세대 자유주의로: 프랑스혁명, 공화주의와의 쟁점

케이헌은 스미스와 같은 프로토자유주의가 1세대 자유주의로 계승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프랑스혁명과 같은 대사건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한다. ‘단기 19세기’(1815~73년)의 1세대 자유주의자들은 혁명과 반혁명의 악순환이라는 공포에 대응하며, 프로토자유주의가 제시했던 세 지주의 결합을 더욱 구체화한다. 여기서 케이헌은 자유주의가 공화주의와 쟁점을 형성하며 대립했던 것에 주목한다.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울로크의 『자유주의의 온건파와 급진파』를 통해 그 쟁점을 역사적으로 더 깊이 살펴보며 케이헌의 논의를 보완한다.

 

(1) 계몽주의-자유주의 전통에서 온건파와 급진파

 

울로크는 케이헌의 프로토자유주의보다 앞선 시기인 17세기 계몽주의를 다룬다. 그는 이때 계몽주의가 종교·정치혁명·민주정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온건파와 급진파로 구분됐다고 파악한다. 계몽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종교적 미신과 성직자의 권력 남용을 비판했지만, 온건파는 도덕적 안전장치로서 종교가 하는 역할은 일정 부분 유지하려 했던 반면 급진파는 무신론에 따라 정치에서 종교를 철저히 제거하려 했다. 종교개혁은 정치혁명과도 결부되어 있었는데, 영국은 국교회를 통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종교와 정치의 개혁을 이뤘으나, 프랑스는 카톨릭과의 전면 대립으로 내전과 혼란을 겪었다.

 

울로크는 계몽주의, 특히 온건파가 반드시 혁명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고, 혁명을 사회 변화를 위한 여러 수단 중 하나로 보았다고 지적한다. 케이헌의 해석을 빌리자면, 국가권력 장악보다 시민사회와 시민성의 발전을 핵심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급진파가 민주주의 자체를 이상화한 반면, 온건파는 현실에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조건 마련을 중시했다. 특히 이런 점에 주목하며,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급진파와 온건파를 각각 ‘철학적 계몽주의’와 ‘경제학적 계몽주의’로 명명한다. 이에 관해, 울로크는 흥미롭게도 계몽주의 온건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계몽주의 급진파가 추구했지만 실패했던 민주주의 실현에 성공했다고 설명한다.

 

(2) 자유주의 대 공화주의

 

케이헌은 프랑스혁명을 둘러싼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대립을 설명한다. 공화주의란 로마 공화정의 몰락을 17~18세기 유럽 지식인이 특정하게 해석한 전통을 가리킨다. 공화주의자들은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시민들이 함께 전쟁과 정치에 참여하며 ‘공동선’(공동이익, common good)을 증진했으나, 점차 귀족 집단이 사익을 추구하며 불평등이 심해졌고 사회갈등 속에서 공화정이 붕괴했다고 본다.

 

따라서 공화주의에서 ‘자유’란 국가의 공동이익에 기여함으로써 자유를 보장받고 그 이익을 배분받는다는 의미에서 정치 참여의 권리에 국한됐으며, 개인이 국가로부터 자유롭게 활동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공화주의는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도덕’을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지만, 이는 앞서 살펴본 개인적 향상이나 시민의 덕성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희생’을 뜻했다.

 

17~18세기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대립은 특히 상업사회의 발전을 둘러싼 것이었다. 프로토자유주의자들은 상술한 세 지주를 바탕으로, 상업사회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도덕이 발전한다고 봤다. 반면 공화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상업이 시민을 경제적, 정치적 불평등과 도덕적 타락에 빠뜨린다고 봤다.

 

『자유주의의 역사』의 저자들은 프랑스에서 루소(1712~1778)의 공화주의가 국가권력에 참여할 권리만을 이상화하고 시민사회의 발전이라는 조건을 무시한 결과, 로베스피에르(1758~1794)의 공포정치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프랑스혁명에 관한 설명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여름호의 임지섭,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으로서 프랑스혁명」을 보라.) 또한, 마르크스가 비극이 희극으로 반복됐다고 언급했듯 프랑스의 1848년 혁명에서 무조건적 보통선거권의 급진적 도입은 오히려 민주정 붕괴로 귀결됐다. 혁명가의 기대와 달리 인민의 지지와 선거에 의해 전제정이 복원된 것이다. 반면 1세대 자유주의자들은 특히 프랑스의 1848년 혁명을 반면교사로 삼으며, ‘혁명과 반혁명’의 공포에 맞서 시민사회 발전을 심화하고 그 기반 위에서 선거권을 안정적으로 확대하며 민주정을 정착시켰다.

 

(3) 아블라스터의 프랑스혁명관과 자유주의관에 대한 비판

 

이런 이유에서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아블라스터의 『서구 자유주의의 융성과 쇠퇴』를 비판한다. 아블라스터는 영국 새처 정부(1979~1990)의 신보수주의를 비판하고자 자유주의의 역사를 17~18세기로 소급해 재구성한다.

 

여기서도 영국과 프랑스의 대비가 핵심 주제였다. 아블라스터가 보기에 영국은 명예혁명 이후 급진적 평등파를 배제하면서 자유주의가 타락했던 반면, 프랑스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좌절되자 오히려 아래로부터 혁명이 폭발해 자유주의가 정점에 이르렀다. 그는 로베스피에르가 선거권을 소유자에 한정하는 것에 반대한 점에 주목하며, 프랑스혁명을 자유주의의 정점이자 동시에 위기였다고 해석했다. 무조건적 보통선거권의 도입으로 인민의 정치참여가 실현됨과 동시에 자유주의가 사유재산을 옹호하는 반동적 경향으로 퇴보했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이 등장하자 자유주의는 줄곧 보수화했다는 것이 그의 논지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아블라스터가 자유주의의 이념적 표준이 무엇인지를 추적하지 못한 결과 ‘시장만능주의’만을 자유주의로 단정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민주정적 요소의 수용 여부만으로 자유주의의 역사를 재단하며 루소·로베스피에르식 공화주의를 자유주의의 정점으로 오인했다고 본다. 아블라스터는 영국의 점진적인 민주정 확대를 퇴보라 평가했으나, 저자들은 영국이 민주정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고 확대한 반면, 프랑스는 무조건적 보통선거권이 오히려 민주정을 무너뜨린 사례였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아블라스터가 영국 자유주의의 소유자계급 옹호와 영국 노동자계급의 참상을 지적하며 프랑스를 상찬하나, 실은 영국 노동자들이 프랑스 노동자보다 더 풍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다고 지적하며, 영국에서 노동조합 합법화·곡물법 개혁·자유무역 도입이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 향상과 민주정 확대의 토대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4) 1세대 ‘눈부신’ 자유주의: 매콜리와 밀

프랑스혁명 이래 19세기 유럽에서 혁명과 반혁명이 악순환하며 개인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자유가 침해되고 많은 시민이 살해당하는 가운데, 그 공포에 맞서 ‘단기 19세기’(1815~73년)의 1세대 자유주의는 프로토자유주의가 제시했던 세 가지 지주를 더욱 발전시켰고, 영국에서 그 이념을 실현시키며 자유민주정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케이헌은 1세대 자유주의자 중 매콜리(1800~1859), 토크빌(1805~1859), 밀(1806~1873)을 이 흐름을 대표했던 사상가로 꼽으며, 이들의 사상을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세 지주가 다면적으로 빛나는 ‘눈부신’(many-splendored) 자유주의라 평한다.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이 ‘눈부신’ 자유주의를 자유주의 이념의 표준으로 인식한다.

 

(1) 매콜리

 

토머스 매콜리는 ‘눈부신’ 자유주의의 핵심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상가이자 정치가다. 그는 제임스 밀의 공리주의와 철학적 급진주의를 비판하며 “인간 본성의 원리로부터 경세학을 연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대신 진정한 경세학은 사실에 기초하여 이론을 구축하고 이론을 사실에 부합하게 끊임없이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논리와 역사를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매콜리는 스미스를 계승해, 인류 역사에서 진보가 이뤄졌음을 인식하며 그 원동력을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사람들의 욕구에서 발견했다. 다만 혁명과 반혁명의 악순환을 목도한 매콜리는, 그런 개선과 진보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려면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봤다. 이 점에서 ‘나쁜 정부’는 진보를 감속하거나 심지어 정지, 퇴보시킬 수도 있다. 그는 주저인 『영국사』에서 영국이 오랜 세월 동안 전제정의 억압이나 혁명적 격변을 상대적으로 덜 겪었고, 관습과 실천 속에서 자유와 재산권이 점차 보장되며 시민사회가 발전해 진보를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요컨대 ‘국왕의 폭정’(regal tyranny)과 ‘하층민의 분노와 복수’(popular fury)가 없었고, 시민적·종교적 자유가 충만하며, 모두가 근면으로 획득하고 절제로 저축한 재산을 국가가 보호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에 진보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매콜리에게 진보란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진보가 서로 얽혀 있는 과정이었다. 특히 그는 “민족은 전진하는데 헌정은 멈춰 있는”, 즉 사회·경제적 발전에 정치적 발전이 상응하지 못한다면 혁명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선제적 정치개혁을 주문했다. 영국 휘그당 하원의원이었던 그는 1832년 대개혁법(선거법 개정)을 강력히 지지했는데, 이 법은 중산층에 참정권을 부여하고 귀족의 정치적 독점을 약화시켰다. 다만 그는 곧바로 보통선거권을 허용하지 않았고, 하층민이 경제적·교육적으로 성숙한 이후에야 선거권 확대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선거권 확대 자체보다, 선거권에 합당하게 대중의 물질적·교육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을 핵심으로 여겼다. 그는 두터운 중산층(부르주아)이 혁명과 반혁명을 막는 사회의 자연스러운 방벽이라 봤다.

 

이런 이유에서 매콜리는 경제적 측면에서 중도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자유로운 상업과 산업의 발전을 옹호하면서도, 정부의 ‘악의적 개입’과 ‘악의적 비개입’을 모두 비판하며 정부의 유연한 역할을 강조했다. 또한, 산업혁명과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부르주아를 진보의 동력으로 신뢰하면서도, 경제성장이 노동자와 빈민의 생활수준 향상으로 이어지게끔 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빈민을 정부가 직접 구제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아동노동 규제, 10시간 노동제, 곡물법 폐지 같은 개혁을 지지했고, 이로써 영국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은 엥겔스가 묘사했던 정체 상태에서 벗어나 개선됐다.

 

그는 사회적·도덕적 목적을 위해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도 인정했다. 특히 아동노동 규제, 최소한의 교육 보장, 공중보건 개선, 주거 위생 확보, 심지어 도덕적 질서 같은 영역에서는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지지했다. 특히 그는 교육을 중시했다. 매콜리는 무지한 대중이 사회 불안을 초래한다고 봤고, 따라서 공교육을 통해 도덕성과 시민성을 함양하는 것이 곧 자유를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되 교사 선발은 지역 사회가 담당해야 한다고 하여 국가권력의 통제를 경계하기도 했다. 종교에 관해서도 관용, 즉 종교적 자유의 지속적 확대를 옹호했다. 이렇듯 그는 시민성의 향상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도덕과 종교, 자유로운 토론에 대한 정부의 후견적 간섭을 배제하고자 했다.

 

요컨대 매콜리의 자유주의는 단순한 ‘시장만능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그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자유(점진적 선거권 확대와 제도 개혁), 경제적 자유(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재산의 보호에 기초한 경제성장과 이를 통한 하층민의 물질적 향상), 도덕적 향상(교육과 종교적 관용에 기초한 도덕적 기반 강화)을 긴밀히 결합시켜야만, 혁명과 반혁명의 격변을 피하면서도 진보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봤다. 자유롭고 도덕적인 중산층 사회를 건설하며 ‘국왕의 폭정과 하층민의 분노와 복수’ 사이의 협로를 통과하는 것을 진보의 모델로 제시한 셈이다.

 

(2) 밀

 

부르주아를 경제성장과 민주정의 주도 세력으로 신뢰했던 매콜리와 달리, 존 스튜어트 밀은 부르주아의 지배력 증대가 민주정의 확대와 결합해 ‘연성 전제정’(soft despotism)을 낳을 위험을 우려했다. (19세기 초중반의 매콜리에게 ‘부르주아’는 귀족과 대비되는 소수였지만, 19세기 중후반의 밀에게는 선거권 확대와 하층민 향상으로 확장된 중산층을 의미했다.) 그는 부르주아, 나아가 미래에는 프롤레타리아도 포함할 ‘범속한 중산층’이 여론을 지배해 획일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봤다. 대의민주정과 선거권 확대를 옹호하면서도, 매콜리가 말한 ‘국왕의 폭정과 하층민의 분노’가 새로운 형태로 재현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것은 중산층·하층의 지배로 인한 ‘다수의 폭정’과, 전문관료제의 필연적 필요가 낳는 ‘관료주의’였다.

 

밀은 이에 맞서 개인성의 함양과 경쟁의 지속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갈등과 경쟁이 인간 품성의 개선을 이끄는 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유경쟁을 단순히 경제적 효율의 수단이 아닌 도덕적 훈련으로 보았다. 경쟁은 나태를 극복하게 하고 근면, 절약, 자조를 길러 인간을 단련한다. 또한 성장이 멈춘 ‘정지상태’를 긍정하며, 인구 안정과 분배 개선, 물질적 축적의 종말 속에서 인간이 더 나은 삶의 기술과 교양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경제적 자유의 목적은 인간의 질적 향상이며, 경쟁은 이를 위한 긴장 장치였다. 밀은 자유방임을 원칙으로 하되, 교육·보건 등 시민 향상을 위한 영역에서는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경쟁을 유지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국가는 모든 아동이 좋은 교육을 받도록 법적·재정적으로 보장해야 하지만, 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도덕·지적 영역에서도 밀은 개인성 발전을 중시했다. 밀은 여론의 평균화가 개인성을 질식시키는 ‘연성 전제정’을 우려하며, 다수에 순응하는 태도가 자기 향상을 저해할 수 있다고 봤다. 따라서 소수의 탁월한 견해를 인정하고 끊임없는 논쟁과 갈등을 허용해야 도덕적 향상과 지적 진보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참된 의견은 자유로운 논쟁 속에서만 살아 있는 진리가 되며, 논쟁이 없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정체와 타락을 맞는다고 경고했다.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특히 밀의 정치제도 구상에 주목한다. 밀은 중산층·하층 다수의 계급지배, 그리고 전문가 관료주의가 비자유주의적 전제정으로 변질될 위험을 서로 견제하게 하려 했다. 그는 입법부에서는 대중과 전문가의 균형을 제안했다. 민의를 반영하는 하원은 고충처리위원회로 작동하므로, 상원은 전문가와 지식인으로 구성해 상하원이 상호 견제하게끔 한 것이다. 또한 다수 지배 속에서 소수 의견이 살아남도록 단기이양식 투표제와 교육과 품성이 우수한 자의 표에 제한적 가중치를 주는 차등투표제를 도입하자고 했다. 이는 선거에서 기존의 재산 기준을 지적, 도덕적 능력으로 대체하는 기획이었다. 밀은 이런 조치를 통해 보통선거를 수용하면서도 (그는 성인 남성의 보통선거권뿐만 아니라 여성참정권도 옹호했다) 경쟁 원리를 제도화해, 다수의 뜻에 따라 국가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을 방지하려 했다.

 

이렇듯 밀의 자유주의는 경제, 정치, 도덕 영역에서 개인성과 경쟁의 원리를 심어 개인의 자율성과 시민사회의 성숙을 추구하는 향상론적 자유주의였다.

 

5) 보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포셋의 『보수주의』를 보완하며 자유민주정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보수주의의 역할을 강조한다. 자유보수주의가 자유주의와 협력할 때 자유민주정은 안정되지만, 비자유보수주의가 우세하면 자유민주정이 위협받는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특히 보수주의의 이념적 표준을 제시한 버크(1729~1797)와 그 정치 실천을 제시한 영국 보수당에 주목한다. 보수주의는 전통적 제도·관습·가치의 보존을 추구하는데, 그 전통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지가 중요하다. 버크는 프랑스혁명을 보며 입법을 만능의 도구로 여기는 ‘법 물신숭배’를 비판했다. 그가 생각하는 전통은 현실에서 형성된 관습적 권리였고, 따라서 이를 보존한다는 것은 현실의 변화에 맞춰 제도를 신중히 개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기의 헌법 실험을 “수백 년의 질서를 며칠 만에 창조하려는 시도”라 비판했다. 버크가 보기에 프랑스에서 절대군주정이 존속한 것은 프랑스가 영국과 비교했을 때 현실에서 제도·관습·가치의 변화가 미약한 탓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자코뱅의 폭력적 입법은 사회계약도 일반의지도 없는 ‘다수의 폭정’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이에 상응해 프랑스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반동과 독재의 길로 치달았다.

 

반면 19세기 영국 보수당은 자유보수주의의 전형으로, 자유당과 경쟁하면서도 필요할 때에는 타협과 협력에 나섰고 때로는 개혁을 선도했다. 집권 보수당은 정치인의 책임과 헌정 운용 능력을 강조하며, 새로운 권리 창안보다는 경제적·정치적 자유의 ‘지속적 증진’을 지향했다. 또한 상대 세력의 절멸이 아닌 세력균형의 조정을 중시하는 정치문화를 확립했다. 이로써 휘그와 토리의 ‘런던 컨센서스’가 영국의 자유민주정 발전을 떠받칠 수 있었다.

 

6) 소결: 시민사회를 떠받치는 세 가지 지주의 결합

『자유주의의 역사』의 저자들은 케이헌을 따라, 전제정과 종교적 광신, 혁명과 반혁명의 공포에 대응하며 자유주의의 이념적 표준이 형성되었음을 확인한다. 이에 따르면, 진보는 단순히 물질적 성장이나 법제도의 변화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경제적 자유, 정치적 자유, 도덕적 향상’이라는 세 지주가 서로 연결되고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뤄진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국가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발전을 진보의 동력으로 본다.

 

먼저 경제적 자유에 관해, 자유주의는 물질적 개선이 자유의 확대와 도덕적 향상의 토대가 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물질적 공리 추구 그 자체가 인간 본성의 전부가 아님을 강조했다. 경제적 자유의 핵심은 개인이 봉건지주나 특정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노동과 교환을 통해 재산을 형성하고 생활을 개선함으로써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경제적 자유만으로는 불평등의 확대나 분업으로 인한 파편화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경제적 자유에 기초한 경제성장이 하층민의 물질적 도덕적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정치적 자유란 법의 지배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권력분립, 참정권 확대 등을 통해 시민이 주권자의 자의적 권력 행사로부터 보호받고 공적 결정 과정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 자유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제도적 토대가 된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은 시민의 도덕적 향상 측면에서는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고, 특히 교육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선거권의 확대를 지지했으나, 그 자체보다 우선 선거권에 적합하게 시민의 능력과 도덕을 향상시키는 것이 근본적이라고 봤다.

 

경제적·정치적 자유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민 개개인의 도덕적·능력적 향상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공감, 자제, 정의, 근면 같은 덕목을 교육과 토론, 관용을 통해 길러야 하며, 이는 경제활동에서 책임성과 신뢰를 강화하고 정치 참여에서도 성숙한 시민성을 가능케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도덕적 향상이 없을 때 경제적 자유가 단순한 물질적 쾌락 추구로, 정치적 자유가 오히려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다수의 폭정’으로 타락할 위험성을 경계했다.

 

세 지주의 결합을 통해 개인이 자율성을 지닌 시민으로 성장하고 시민사회가 단단히 형성되고 발전하면서 전제정과 종교적 광신, 혁명과 반혁명의 공포를 극복하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프로토·1세대 자유주의가 제시한 자유주의의 이념적 표준이다.

 

 

3. 1세대 이후 자유주의는 인민주의에 대응할 역량을 어떻게 상실했는가

 

케이헌은 프로토·1세대 자유주의를 통해 자유주의의 이념적 표준이 무엇인지 규정함과 동시에, 이를 가지고 이후의 2~3세대 자유주의가 결함이 있었으며, 이 결함 탓에 자유주의가 최근에 출현한 인민주의의 위협에 대응하기 어려워졌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그는 인민주의의 위협에 맞서 이전 세대의 결함을 극복하는 ‘4세대 자유주의’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1) 2세대 자유주의 내지는 진보주의의 결함

케이헌은 ‘세기말’(1873~1914년)의 2세대 자유주의는 이전 세대와 달리 ‘빈곤의 공포’에 대응하며 형성됐다고 설명한다. 그는 실제 빈곤층이 급격하게 증가하진 않았지만, 경제위기가 반복되는 가운데 도시 슬럼의 확산, 빈민의 ‘도덕적 타락’, 격렬해지는 노사갈등에 대한 경계심이 2세대 자유주의를 규정했다고 설명한다.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케이헌이 설정한 ‘세기말’을 영국 헤게모니가 위기에 처한 시대로 이해한다. 이는 영국 자본주의의 성장이 둔화하며,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정치적 불안이 점증한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대였다.

 

케이헌은 빈곤 문제를 두고 고전적 자유주의로부터 ‘현대적’ 자유주의가 분화했다고 설명한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빈민이 스스로 물질적, 도덕적 향상을 이룰 수 있게 하는 조건을 중시하며 2세대 자유주의가 제시한 해법인 ‘국가에 대한 의존’을 경계했다. 빈곤을 제거하고자 국가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은 ‘관료적 괴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양자의 또 다른 점은 ‘권리’ 담론이었다. 1세대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신체와 정신이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여러 방식을 논의했지만, 자연권 사상처럼 인간이 천부적으로 가진 권리의 목록을 논의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반면 2세대 자유주의는 ‘권리 담론’을 적극 활용하며, 가령 ‘품위 있는 주거의 권리’, ‘중등교육까지 교육을 받을 권리’, ‘고용될 권리’, ‘생계·임금에 대한 권리’, ‘소비할 권리’를 제시했다.

 

케이헌은 2세대 자유주의의 사례로 미국 진보주의, 프랑스 연대주의, 영국 새자유주의를 든다. 그리고 이들이 프로토-1세대 자유주의와 비교해 자유주의의 이념적 기반을 축소했다고 지적한다. 2세대 자유주의는 민간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지지하며 경제적 자유를 거부했고, 정치적 자유도 빈곤 제거를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 한정했다. 그 결과 도덕만이 빈곤에 맞서는 투쟁의 전부를 떠맡게 됐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도덕은 개인의 도덕적, 지적 향상이라기보다는, 하층민의 물질적·도덕적 개선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권리’ 담론의 차원에서 논의됐다. 케이헌은 이런 이유에서 2세대 자유주의가 1세대 ‘눈부신 자유주의’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나아가 2세대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용인하는 ‘비자유주의적 사회주의’(illiberal socialism)나, 개인 자신의 향상보다 국가의 구제를 중시하는 ‘사회적 양심을 지닌 보수주의’(conservatism with a social conscience)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고도 평가했다.

 

다만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2세대 자유주의’를 케이헌처럼 자유주의라 부를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보다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현대적 자유주의 사이의 과도기적 조류로서 ‘진보주의’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진정한 현대적 자유주의는 케이헌이 말한 2세대 자유주의가 아니라 마셜(1842~1924)에서 케인즈(1883~1946)로 이어지는 케임브리지 학파의 경제학적 전통이라 본다. 이 전통은 ‘빈곤 일반’이 아닌 대불황기 ‘대량실업의 공포’에 대응했고, 집단주의나 국가주의가 아니라 자유기업 원리에 기초한 거시경제학을 통해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를 새롭게 정초했다.

 

2) 3세대 자유주의의 결함: 도덕적 지주의 상실

케이헌은 3세대 자유주의가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의 공포’에 맞서 형성됐다고 본다. 물론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전체주의에 대응하는 데서도 케이헌이 꼽은 ‘3세대 자유주의’보다는 케인즈주의가 더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3세대 자유주의가 도덕적 지주를 상실했다는 케이헌의 평가에는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케이헌이 거론한 3세대 자유주의 사상가를 벌린(1909~1997)과 프리드먼(1912~2006), 롤즈(1921~2002)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벌린은 전체주의의 핵심을 ‘일원론적인 도덕적 정당화’로 파악했고, 따라서 도덕적 다원주의와 누군가의 정신의 자유를 침해해선 안 된다는 의미의 ‘부정적 자유’를 대안으로 내세웠다. 케이헌은 벌린의 사상이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세 지주의 결합을 통해 ‘긍정적 자유’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 특히 도덕적 향상론을 다원주의의 이름으로 약화시켰다고 평가한다. 벌린의 사상을 극단화한 것이 대니얼 벨(1919~2011)의 이데올로기 종언론인데, 이는 ‘이념을 버리고 기술관료적 해결에 집중하자’는 태도를 낳았다.

 

롤즈와 프리드먼도 비슷한 한계를 드러냈다. 케이헌은 초기 롤즈가 『정의론』에서 이상주의적 향상론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후기 롤즈는 벌린의 도덕적 다원주의를 수용하며 도덕적 지주를 극도로 축소했고 ‘정치적 자유’에만 의존했다고 평한다.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란 평등주의적 다원주의이며, 이는 개인의 후천적 향상이 아니라 ‘선천적 특성’에 따른 약소자의 정치적 권리만을 강조하여 인민주의에 대응하기에 취약하거나 심지어 인민주의와 친화적인 결함이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프리드먼은 자유주의에서 정치와 도덕적 지주를 배제하며 자유주의를 축소시켰다고 평가된다. 그의 ‘경제적 자유주의’는 협소한 의미의 경제적 자유, 그리고 ‘법의 지배’라기보다는 그저 정해진 법질서에 순응하자는 의미의 법치를 주장했다. 이는 모든 개인의 향상을 위한 포용을 자유주의에서 제거했다.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형벌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고 인정(仁政)과 덕치(德治)가 필요하다고 유가(儒家)가 법가(法家)를 비판했던 것을 들며, ‘법과 그 원칙’만 되뇌어서는 인민주의에 맞설 수 없다고 지적한다.

 

3) 2~3세대 자유주의의 결함에 대한 해석상 쟁점: 아블라스터

상술했듯 아블라스터의 『서구 자유주의의 융성과 쇠퇴』는 영국 새처 정부의 신보수주의를 이념적으로 비판하고자 17~18세기부터 자유주의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그는 프랑스혁명에서 자유주의가 정점에 이르렀으나 동시에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하며, 이후 자유주의의 역사는 지속적 퇴보와 보수화였을 뿐이라 설명한다. 그리고 영국 새처와 미국 레이건 정부의 신보수주의가 그 정점이라고 지적한다.

 

다만 아블라스터는 프랑스혁명에서 나타났던 ‘진정한’ 자유주의(실은 공화주의)가 이후 영국 새자유주의와 같은 경향, 즉 케이헌의 ‘2세대 자유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발전했다는 논지를 더하며, 자유주의를 올바르게 계승한 길은 사회주의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과연 ‘2세대 자유주의’가 자유주의냐 아니면 자유주의의 표준에 미달하는 진보주의냐는 논점을 던진다. 또한 과연 사회주의가 프랑스혁명기의 공화주의 내지는 ‘2세대 자유주의’를 계승하는 것인가,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계승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를 묻는다. 후자의 논점에 대해서는 4장에서 다루겠다.

 

3세대의 ‘경제적 자유주의’를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도 쟁점이다. 케이헌처럼 시민사회의 발전을 지탱하는 세 가지 지주의 결합이라는 자유주의 이념의 표준을 인식하며, 프리드먼의 ‘경제적 자유주의’가 이에 미달했기에 인민주의에 대응할 역량을 잃었다고 평가할 것인지, 아니면 아블라스터처럼 ‘시장만능주의’가 자유주의 역사 전체를 관통한다고 보며, 대안으로 공화주의나 2세대 자유주의(진보주의)를 ‘진정한 자유주의’로 옹호하며 계승하자고 할 것인지다.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아블라스터처럼 자유주의를 비판할 경우, 1세대 자유주의의 핵심 질문 즉 ‘민주정이 인민정으로 타락하지 않으려면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가’를 놓침으로써, 자유주의 비판 역시 인민주의에 대응할 역량을 상실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4) 2~3세대 자유주의의 결함에 대한 해석상 쟁점: 포셋

포셋의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역사를 자유주의의 ‘이념적 표준’이 아닌 ‘민주주의와의 정치적 타협’을 기준으로 정리한다. 아블라스터가 프랑스혁명에 주목하며 1세대 자유주의를 보수적 경향으로 본 것과 달리, 포셋은 19세기 중반 이후 민주화 과정만을 강조하며 프로토-1세대 자유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소홀히 했다고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지적한다.

 

다만 케이헌의 2~3세대 자유주의 평가와 대비하여 포셋의 자유주의 역사 서술에서 짚어야 할 논점이 있다. 포셋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를 자유주의의 ‘성숙기’로 평가한다. 이유는 이때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타협을 이뤘기 때문인데, 포셋은 그 타협을 정치, 경제, 도덕 각각의 측면에서 설명했다. 정치적으로는 보통선거권 수용, 경제적으로는 노동자계급과의 타협과 복지국가 건설, 도덕적으로는 ‘선택의 자유’ 확립과 도덕적 위계의 약화, 국가가 맡은 교육적 역할의 후퇴가 있었다. 포셋은 민주주의 수용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상황에서 자유주의가 사회주의와 비자유보수주의의 위협에 대응해, 민주주의와 타협함으로써 자신의 이념적 지배력을 회복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포셋은 그러나 타협 과정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양보해야 했고, 이 탓에 자유주의가 변화했다고 지적한다. 정치적 측면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무조건적 민주정의 결함을 알면서도 정치적 압력에 밀려 보통선거권과 대중정치를 수용하고 이에 적응했다. 그 결과 자유주의는 엘리트의 지도 이념에서 대중정치와 이익집단 갈등을 관리하는 중립적·기술적 장치로 변했다. 그는 영국 자유당의 쇠퇴를 노조와 대립한 것뿐 아니라 대중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데에서 찾았다. 대중정치 속 신진 정치인들의 정치는 통치보다 마케팅이 되었고, 새로 부상한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사회적 대의보다 오락을 추구했다. 결국 휘그의 이념적 정치인은 ‘전문 정치인’들의 전문가주의에 밀려났다.

 

도덕적 차원에서도 민주주의와의 타협으로 이뤄진 ‘윤리적 민주주의’는 중요한 변화였다. 포셋은 정치적 변화에 상응하여 자유주의자들이 윤리적 선택에서 국가와 사회의 개입이 사라진 것을 긍정하며, 현대사회에서는 윤리적 목표의 궁극적 동의가 불가능하다는 ‘다목적주의’를 수용했다고 설명한다.

 

포셋은 ‘윤리적 민주주의’ 문제를 콩스탕(1767~1830)과 훔볼트(1769~1859) 사이의 논점으로 소급한다. 이는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침해하는 견해의 자유도 보장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쟁점이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정신적 독립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데서 다음의 두 가지 사상을 조화시켰다. 첫째, 권력을 가진 자를 포함해 누구도 타인의 신념과 목표를 침해하거나 강제로 다른 이상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는 비침해 원칙이다. 둘째, 인간은 내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며 타인의 도움과 지도를 통해 진보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 원칙이 있다. 콩스탕은 전자를 강조한 반면 훔볼트는 후자를 강조했다.

 

이론적으로 조화된 두 사상은 현실에서 앞선 질문을 둘러싸고 분열할 수 있었다. 케이헌은 ‘비침해’라는 부정적 자유가 ‘도덕적 향상’이라는 긍정적 자유로 발전한 것을 자유주의의 표준으로 이해했다. 예컨대 스미스는 공감에 기초한 도덕적 향상을 말했다. 밀의 다원주의는 사상의 자유경쟁을 통한 지적 도덕적 위계와 향상을 옹호하는 것이었지, 모든 견해의 존중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포셋이 설명한 ‘윤리적 민주주의’ 내지는 ‘다목적주의’란 콩스탕식 전망이 훔볼트식 전망을 대체한 것으로, 즉 도덕적 지주의 상실로 해석할 수 있다.

 

경제적 차원에서 포셋은 케인즈주의를 민주주의와의 타협으로 본다. 하이에크가 노동자에게 위기의 책임을 돌린 반면, 케인즈는 정부와 납세자의 책임을 강조하고 소비자를 부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셋은 이후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주의(복지국가에 대한 공격), 문화적으로는 공동체주의(반외국인주의)가 부상하며 ‘강경우파’의 기반을 형성했다고 봤다. 강경우파는 경제적 민주주의(노동자계급과의 타협과 복지국가)와 윤리적 민주주의(다원주의)를 함께 공격했다. 따라서 포셋은 자유주의가 경제적·정치적·윤리적 민주주의를 강력히 고수하고 확대하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 강경우파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케이헌을 따라, 프로토-1세대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타협’ 이후의 자유주의는 결함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특히 정치적 지주와 도덕적 지주의 연계가 깨진 것이 문제였다. 포셋이 말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밀이 전망했듯, 한편으로는 책임이나 능력과 무관한 무조건적 보통선거권으로 인해 민주정이 인민정으로 타락할 위험성을 증가시켰다. (저자들은 최근 저서인 『영국헌정사』에서 무조건적 보통선거권의 도입이 실은 제국주의 전쟁 동원을 위한 국민개병제와 결부되어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에 정치인과 기술관료가 결합하는 전문가주의가 민주정의 영향력을 제한했는데, 이는 이전 자유주의의 능력주의와 달리 도덕적 향상을 포기하고 기술적 해법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포셋이 말한 ‘윤리적 민주주의’는 이 문제를 심화시켰는데, 케이헌은 도덕적, 지적 위계의 해체가 엘리트와 대중 모두에게서 도덕성 상실과 윤리적 갈등을 심화시켰다고 지적한다.

 

2~3세대 자유주의에 대한 평가의 쟁점은 21세기 초의 강경우파 내지는 인민주의의 위협에 대한 대응에서의 쟁점으로 이어진다. 4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으나, 케이헌이 보기에 인민주의의 부상은 자유주의가 도덕적 지주를 상실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즉 현재의 쟁점은 더 많은 대중이 개인의 신체와 정신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지지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이므로, 포셋이 보편성을 부정하고 특수한 집단적 경계를 강화하는 정체성 정치나 반외국인주의를 비판하더라도 그가 다원주의의 틀 안에 머무는 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인민주의에 대한 대응에서 시민사회의 도덕적 지적 향상과 시민성 형성이라는 도덕적 지주의 부활, 즉 부정적 자유를 넘어 ‘긍정적 자유’의 추구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케이헌과 포셋의 쟁점에 주목한다.

 

 

4. 인민주의의 공포에 대응하기 위하여

 

1) 21세기 초 비자유보수주의 내지는 인민주의의 부상

먼저 포셋과 케이헌이 21세기 초 비자유보수주의 내지는 인민주의의 발흥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포셋은 상술한 20세기 초 타협의 결과인 복지자본주의로 인한 비용 증가와 ‘윤리적 민주주의’가 야기한 도덕적 약화와 혼란이라는 폐해를 둘러싸고 보수주의자들의 불만이 점증했다고 본다. 이에 더 강한 경제적 자유와 개인의 책임을 결합하는 신보수주의 정치가 1980년대에 주류화됐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와 타협하며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에 협력했다. 그러나 2007~09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그런 보수주의 경향은 방향을 상실하고 표류했으며, 대신 인민주의적 강경우파(비자유보수주의)가 자유주의뿐 아니라 자유보수주의도 옹호해온 자유민주정 전반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반면 케이헌은 인민주의를 전통적 좌우파의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나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같은 좌파 인민주의자와 프랑스의 르펜, 미국의 트럼프 같은 우파 인민주의자가 공유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케이헌이 보기에 이들의 공통점은 ‘진정한 인민은 누구인가’에 관한 독점적 정의가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규정한 인민은 분할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의 의지와 비전만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주의자는 성소수자, 외국인, 이민자, 특정 인종, 종교적 소수자, 그리고 특히 ‘엘리트’를 배신자·이방인으로 낙인찍고 배제하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은 일종의 일원론(monism)이며, 프랑스혁명기 자코뱅의 공포정치나 파시즘을 연상시킨다고 케이헌은 설명한다. 케이헌은 이를 “비자유주의적 민주정이 자유민주주의에 도전하는 현상”, 새로운 공포로서 “인민주의의 공포”라 규정한다. ‘비자유주의적 민주정’(illiberal democracy)이란 특정 개인의 신체와 정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에서 ‘비자유주의적’이지만 이를 인민 다수의 의지로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인 셈이다.

 

케이헌은 인민주의가 부상하는 원인을 경제적 박탈보다는 문화적·도덕적 소외에서 찾는다. (이는 포셋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많은 좌파가 복지국가의 약화를 강경우파 부상의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케이헌은 오히려 복지국가가 가장 강력했던 유럽에서 인민주의가 부상한 현실을 볼 때 복지의 확대가 인민주의를 강화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즉 복지가 대중의 기대를 높였고, 엘리트가 이에 부응하지 못할 때 ‘엘리트의 무능과 부패’라는 인민주의적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케이헌은 많은 시민이 자신이 상대적으로 배제되고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감각’이 인민주의 부상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문화적 소외는 단순한 소득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인민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와 관용이 자신을 이등 시민 취급한다고 느낀다는 점에서, 사회 통합과 존중이라는 더 큰 과제와 관련된 것이다. 케이헌은 문화적·도덕적 소외의 핵심에 다원주의와 엘리트주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인민주의자와 이를 지지하는 다수 대중은 도덕적·지적 우열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수자 운동이나 엘리트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열등하지 않다고 믿는다. 하지만 상대적 박탈감은 서구 사회에서 교육 격차와 결합해 증폭됐다.

 

능력주의는 본래 모든 개인의 향상을 추구하는 것이었으나, 관료주의와 (학위 소유 여부로 우열을 가르는) 학력주의를 통해 협소한 엘리트주의로 변질되었다. 그런데 엘리트는 오히려 도덕적 우열을 부정하며, 다원주의와 관용을 내세워 다수를 비판한다. 결과적으로 엘리트가 소수자와 연대하는 방식은 도덕적으로 다수를 소외시키는 경험으로 작용했고, 능력주의는 공정이 아니라 비민주적 불공정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런 문제는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 프리드먼의 ‘경제적 자유주의’ 같은 3세대 자유주의가 도덕적 지주를 상실한 것과 결부되어 있다는 게 케이헌의 분석이다.

 

2) 인민주의의 공포에 대응하는 ‘4세대 자유주의’

케이헌은 인민주의가 자유주의를 도덕적으로 타락한 체제, 엘리트주의적 이념으로 규정하며 도덕적으로 거부하는 상태에서, 경제적 재분배나 정치제도 개혁 같은 대응은 제한적 효과만 낼 것이라 본다. 그는 인민주의의 원인을 시장이나 정치제도의 결함이 아닌 도덕적 결함에서 찾는다. 자유주의가 지나치게 기술적·중립적 이념으로 축소된 과정을 반성하고, 프로토·1세대 자유주의처럼 도덕적 비전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4세대 자유주의’ 기획이라 부른다. 이는 다음의 서술로 이해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는 좋은 삶의 도덕적 전제조건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런 전제조건은 대학 학위가 없는 사람도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주의자는 엘리트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추구 가능한 도덕적 향상의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 다원주의에도 한계가 필요하다. 자유주의자는 단지 타인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도록 허용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 자신부터 자율성, 도덕적 향상, 인간적 위대함에 대한 ‘좋은 삶’의 비전을 주장해야 한다. … 자유주의자들이 전통적 혹은 근본주의적인 도덕적·종교적 주장과 대등하게 논쟁하기를 회피하고 ‘중립적 우월성’의 태도를 취할수록 인민주의자의 소외는 더 깊어질 뿐이다.”

 

케이헌은 이를 위해 라즈(1939~2022)에 주목한다. 라즈는 밀의 자유주의를 계승해 자유를 ‘자율성’(autonomy)으로 정의했다. 이는 무엇이든 허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가치 있는 이상과 관계를 추구하는 향상론적 자율성이다. 그는 자유주의가 가치 있는 문화를 식별·지지해야 하며, 정부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으며 정부가 자유주의적 가치와 실천을 촉진하고 비자유주의적 가치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련하여 라즈는 ‘자유주의적 불관용’(liberal intolerance) 원칙을 제시하며, 밀의 ‘위해 원칙’(Harm Principle)을 수정해 타인의 자율성뿐 아니라 자기 자율성에 대한 해악도 개입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다만 라즈는 정부가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직접 결정할 수는 없으며, 자율성은 개인과 집단 속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케이헌은 이를 “비자유주의적 가치에 발언권과 투표권은 주되, 거부권은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자율성을 침해하는 특정 종교나 공동체를 정부가 강제로 해산할 수는 없다. 이 역시 개인의 선택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소수자 행진 취소를 요구하면 정부는 이를 수용해선 안 된다. 대신 정부는 교육과 같은 여건을 제공해 개인이 그런 공동체를 떠날 대안을 실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보장해야 한다.

 

라즈는 자율성이 국가가 아닌 시민사회에서 형성된다고 보기에, 자유주의자와 인민주의자가 동일한 도덕적 장에서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다원주의 혹은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처럼 선천적 약소자의 권리를 근거로 경쟁을 회피하거나, 프리드먼의 경제적 자유주의 혹은 엘리트주의처럼 인민을 기술적 조작 대상으로 보지 않는 길이다. 라즈는 자유주의가 인민주의와 동등한 장에서 도덕적으로 경쟁해야, 인민주의자가 자유주의를 상대주의나 쾌락주의로 경멸하지 않고, 오늘날 자유주의자도 인민의 도덕적 향상 추구를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또한 케이헌은 능력주의도 재구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관료주의와 학력주의를 완화해 능력주의의 엘리트주의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인민주의자가 최소한 자유주의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존중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시급한 목표라 제시한다. 물론 이 향상론적 해법이 실제로 유효한지는 입증된 사례가 없기에 아직 그 효과가 명확하지 않다고 언급하지만 말이다.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케이헌의 ‘4세대 자유주의’ 구상이 현 정세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전망은 장기적으로는 미국 자본주의의 흥망과 관련되나, 중기적으로는 미국의 트럼프 인민주의와의 대결, 그리고 푸틴의 러시아·시진핑의 중국·김정은의 북한 등 자유주의에 미달하는 체제와의 대결 속에서 드러날 것이라고 본다.

 

3)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서두에서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가 왜 자유주의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 저자들이 제시한 정세적, 이론적 이유를 언급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자유주의의 역사를 토대로 이를 재론하겠다.

 

가장 이론적인 수준에서는 소유권 쟁점이 핵심이다.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한국 좌파에게 친숙한 아블라스터식 자유주의 해석을 비판하며, 로크에서 스미스로 이어지는 자기소유론은 자유주의의 근간이자 공산주의에도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해 ‘개인적 소유의 재건’을 공산주의의 핵심으로 제시했다. 개인의 신체와 정신의 자유의 연장으로서 스스로 노동한 결과에 대한 권리는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공유하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소유자와 노동자를 분리하므로 ‘노동력에 대한 개인적 소유’로서 노동권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소유권과 노동권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자유로운 노동자 연합의 지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지향은 방법론과도 연결된다. 저자들은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혁명과 정치의 표준을 프랑스로 삼은 탓에, 마르크스주의가 내전적 정치관과 폭력적 정치문화에 취약해졌다고 본다. 정치권력 참여를 둘러싼 투쟁이 국가권력의 획득을 위한 대중운동의 동원을 낳았고, 이는 프랑스혁명에서든 러시아혁명에서든 권력을 잡은 인민 대표자의 무제한적 권력 행사를 옹호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반면 자유주의는 공화주의와 달리 국가가 아닌 개인과 시민사회의 발전을 중시했으며, 그 발전은 정치권력 쟁취가 아니라 경제적 자유, 정치적 자유, 도덕적 향상의 결합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이유에서 매콜리는 혁명가가 아니라 경세가가 진보를 실제로 이룰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취약성을 극복하고 인민주의와 대결하며, 나아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과정에서도 숙고해야 할 지점이다.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은 이 논점이 레닌(1870~1924) 말년의 러시아혁명 평가와 문화혁명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으며, 일본 시민사회파 마르크스주의가 공유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히라타 키요아키(1920~1995)는 사회주의 실현에서 시민사회의 필수적 역할을 강조하며, 마르크스주의가 단순히 사회주의로의 체제 전환만을 쫓아선 안 되고 시민사회의 발전과 성숙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가 이해해 보자면, 노동자연합을 건설하려면 노동자의 자율적이며 연합적인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것뿐 아니라, 지식인과 노동자계급이 모두 소유권과 노동권의 결합에 걸맞은 능력과 태도를 갖춰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를 함양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밝혀야 한다.

 

시민사회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세 지주 중 특히 ‘도덕적 향상’은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낯선 주제다. 저자들은 케이헌이 강조한 ‘향상심의 복원’을 시빌리티(civility)의 추구로 이해한다. “현대사회에서의 교환과 상호의존을 고려한 시민의 자율적 조정, 타협과 합의를 중시하는 덕성 내지는 풍속”으로서 시빌리티의 추구는 인민주의와의 대결, 현실사회주의 반성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본주의로의 이행과 성장을 배경으로 했던 프로토-1세대 자유주의는 상업사회 내지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도덕적 향상에 기여한다고 인식했다. 그러한 진보가 한계에 처한 현재 시점에서, 개인의 신체와 정신의 자유라는 보편적 권리를 보장하려면 소유권과 노동권을 결합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다시금 세 지주의 복원, 특히 도덕적 향상의 길을 여는 것이 21세기 마르크스주의자의 과제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앞서 본 『자유주의의 역사』 저자들의 ‘4세대 자유주의’ 전망처럼, 마르크스주의의 중기적 전망 역시 인민주의와 권위주의의 위협 속에서 시민사회가 국가에 의존하는 것을 막고, 시민사회를 재건·발전시키는 과제에 달려있다. 이런 관점에서 특히 포셋이 말한 ‘윤리적 민주주의’나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가 오히려 도덕적 향상을 위한 경쟁을 제거함으로써 시민사회를 약화시키고, 엘리트의 특권과 인민의 ‘분노와 복수’의 악순환을 일으키며, 인민주의의 문화적 토양이 됐다는 케이헌의 지적을 고려해야 한다. 현 시기 인민주의와 권위독재정의 공포에 맞서 경제적 자유, 정치적 자유, 도덕적 향상의 결합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 이 책을 통해 생각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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