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5 가을. 192호
첨부파일
07_회원칼럼_이혜인.pdf

원폭의 경험을 일본과 한국이 함께 기억하는 법

2025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

이혜인 | 서울지부 회원

일본행 비행기를 타며

 

“8월에 일본에 갈까 해”라고 하자, 미국인 친구가 “일본 어디에 가?”라고 물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간다고 하니, 그는 “미국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러 가는 거야?”라며 웃었다. 내가 “응, 맞아. 바로 그거야.”라고 하자, 농담인 줄 알았던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어··· 잘 다녀와. 미국인 입장에선 정말 미안한 사건이지. 내 사과를 전해 줘.”

 

그러고는 잠시 뒤 뭔가 떠오른 듯 헐레벌떡 다가오더니, “일본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아직 한국에 사과하지 않았지?”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게 아닌가. (그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그건 맞는데, 미국인인 네가 그렇게 심각할 일이니?” 하고 웃었지만,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훌륭한 일본 시민이라면 한국인에게 식민통치를 사과해야 하고, 훌륭한 미국 시민이라면 일본인에게 원폭 투하를 사과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부정의에 대해 피해국의 국민은 사과를 요구하고, 가해국의 국민은 죄책감을 갖는 것만이 최선일까? 한국은 식민지배와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일 뿐이고, 가해국의 국민들만 반성하면 앞으로의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착취하고 착취당하며 죽고 죽이는 전쟁의 굴레 자체를 함께 없애기 위해서는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공동으로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지 않을까?

 

과거사에 대한 평가는 입장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식민지배의 피해자라는 기억은 군사적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의 이유가 되곤 한다. 많은 사람은 자국의 방어나 이익을 위해 군사력 증강에 찬성한다. 단적으로, 최근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상황이 트럼프의 동맹 약화 정책과 맞물려 한국에서는 핵무장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핵무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겨우 “핵은 절멸의 무기인 만큼 쉽게 핵무장을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생각보다 핵무기에 대해 잘 모른다고 느꼈다.

 

꽃다지는 “그 모든 전쟁에서 승전국의 병사들과 패전국의 병사들은 무엇을 얻었나”라고 노래한다. 전쟁은 승전국과 패전국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중에게 고통일 뿐이라는 의미다. 또한 내가 배운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은 “국가의 행위는 한계가 있지만, 민중의 연대는 국경을 뛰어넘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겪은 적 없는 국제연대는 늘 막연했다.

 

첫째, 핵무기를 왜 반대해야 할까?

둘째, 전쟁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시민이, 특히 한국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셋째, 국경을 넘어선 국제연대는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할까?

 

이 질문들을 가지고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핵무기의 무서움을 나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원폭 투하로 인해 생긴 총 사망자는 1945년 말까지 히로시마에서 9만 명에서 16만 6천 명, 나가사키의 경우 약 8만 명에 달한다. 와닿지 않는 숫자이지만 당시 히로시마 인구가 약 35만 명, 나가사키 인구가 약 24만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진 셈이다. 이후 후유증으로 사망하거나 장애를 얻은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다.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피단협)의 다나카 테루미 대표위원은 13살이던 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의 경험을 증언했다. “폭심지 근처에 살던 이모를 찾으러 가는 길에 거두어지지 못한 시체와 살아 있는 채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즐비한 광경을 보았다. 이모는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시신이 되어 있었다.” 9월 1일 등교가 재개되고 학생들끼리 피해 상황을 공유할 때, “가족이 모두 죽고 나만 살아남았다”라고 말하는 급우도 있었다고 한다. 80년 전의 일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무뎌지지 않은 듯 눈물을 글썽였다. 피폭은 끝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핵무기가 피아를,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파괴하는 절멸의 무기라는 사실은 한국인(조선인) 피폭자의 존재에서도 드러났다. 한국에는 원폭 투하가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어 해방으로 이어졌다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 이주·징용으로 살고 있던 조선인 약 10만 명이 피폭되었고, 그중 5만 명이 사망했다. 한국은 일본 다음으로 원폭 피해자가 많은 나라지만,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의 원폭 투하는 일본 군대나 지도부가 아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살고 있던 민간인 수십만 명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몰살했다. 이는 식민지배 하의 조선인이라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일이 당연히 아니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겪은 한국인으로서 세계대회에 참여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부산지부 회원 박정순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92세이고, 부모와 형제를 원폭으로 인해 잃었을 때 느꼈던 슬픔, 고통, 후회, 분노를 분명히 기억한다. 80년간 말 못하고 숨어 지냈지만 피폭 2세, 3세를 위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나 역시 일본에 와서야 한국인 피폭자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박정순 씨는 오히려 우리에게 “한국 젊은이들이 관심 갖고 세계대회에 와 주어 기특하고 고맙다.”라는 말씀을 연신 하셨다.

 

세계의 활동가들이 참여해 평화운동의 전망을 모색하는 히로시마 국제회의에서는 ‘핵 억지력’이라는 개념이 허구이며 극복해야 한다는 발언도 이어졌다. 미국 평화군축공동안보캠페인 의장 조셉 거슨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핵 억지력은 단지 핵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를 적이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미국의 군 관계자들도 인정한 바다.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핵 위협을 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영국 핵군축캠페인(CND) 부의장 캐롤라인 루카스도 발언했다. “핵공격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핵 억지력 때문에 전쟁이 없었다고 믿는 것은 거짓 양성(false positive) 판단이다. 핵무기는 그 존재 자체가 사용 가능성을 높이고, 세계에 핵 물질이 돌아다니게 만들어 우리를 오히려 덜 안전하게 만든다.”

 

그 외에도 세계대회에서 여러 차례 강조된 이 말이 와닿았다. “핵전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핵 억지력’은 핵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검증할 수 없고, 핵전쟁이 일어난 뒤라야 반박할 수 있는 개념이다. 하지만 핵전쟁이 벌어져 한 지역이 몰살되거나 세계가 초토화된 뒤라면 억지력을 검증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 필요한 것은 모든 방면에서 핵전쟁의 가능성을 낮추는 노력뿐이다. 국가들이 핵을 포기하고, 핵군축을 위한 세계적인 합의를 유지할 때 전쟁의 가능성이 낮아질 것이다.

 

 

일본 평화운동은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나

 

핵 억지력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자국의 안보를 위해 핵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극복하고 개별 국가가 핵을 포기하게 만드는 일이 가능할까? 그 가능성은 피폭자 운동의 역사가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피폭자 운동을 포함한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은 아래로부터 시민운동이 정부와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사례였다.

 

미국의 비키니섬 수소폭탄 실험과 일본 전역에서 벌어진 원수폭금지 서명운동을 계기로 1956년 출범한 피단협은, 세계에 핵무기의 참상을 알리고 폐기를 요구한 공로로 202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67년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는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비핵 3원칙을 선언했다. 국가 간 협약이 아닌 일본 정부의 독자적 선언으로 핵무기 포기가 가능했던 것은 피단협의 존재와 활동,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일본 시민들의 원칙적인 핵 반대 여론 덕분이었다. 현재 피단협은 일본 정부가 핵무기금지조약(TPNW)에 가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나가사키에서 우리는 피폭자 미조우라 마사루 씨와 피폭 2세 사토 스미토 씨의 집에 머물렀다. 미조우라 씨는 “지금까지 우리가 있었기에 지난 80년간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기쁘다”라고 하셨다. 사토 씨는 “2017년 UN 총회에서 채택된 핵무기금지조약은 피폭자들이 시작한 운동과 각국 평화운동의 힘을 모아 아래로부터 만들어낸 결과였다. 우리가 평화를 추구한다면 이런 것까지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게 아닐까?”라고 하셨다. 세계대회 무대 밖, 그들의 집에서 저녁을 함께하며 들은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지난 수십 년간 평범한 나가사키 사람들이야말로 반핵평화운동의 주인공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일본 피폭자들의 활동은 피해자로서 과거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지에 대한 모범적인 대답이기도 했다.

 

피단협은 창립 선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하는 동시에 우리의 경험을 통해 인류의 미래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1982년 피폭자 야마구치 센지는 UN 군축특별총회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세상의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 아이들이, 우리처럼, 이런 피폭자들처럼, 핵무기에 의한 죽음과 고통을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겪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핵무기에 의한 죽음과 고통을 겪는 것은 우리가 마지막이 되도록 UN이 엄숙하게 서약해 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극단적인 참상을 겪은 피폭자들은 단순히 “우리의 고통을 알고 보상해 달라”는 주장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험이 어떤 곳에서도 반복되지 않게 해 달라”라고 호소했다. 사과와 용서의 구도를 넘어, 나와 이웃의 죽음이 낳은 슬픔을 평화에 대한 열망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이 있었다.

 

 

현 시점 고조되는 전쟁 위기를 누가 막아낼 수 있을까

 

세계대회 국제회의 선언문은 현재 세계가 핵무기 사용에 따른 다양한 위협, 즉 우크라이나를 침공 중인 러시아의 핵 위협, 이란 핵시설에 대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 미국과 나토 국가들의 핵무기 현대화,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위험한 대치, 동아시아의 긴장 고조와 핵 군비 증강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세계 시민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전 세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핵무기 폐기를 위한 공동 목표를 추구하자. 각국에서 핵무기금지조약(TPNW) 가입을 요구하는 여론과 운동을 확대하자.”

 

미국 핵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과학자 오펜하이머를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다 보면, 그의 고뇌를 따라가며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를 실감하고 함께 궁지에 몰린 기분을 느끼게 된다. ‘나치 독일보다 우리가 먼저 핵무기를 갖는 게 낫다’는 논리를, 그 당시 미국에서 누가 논박할 수 있었겠는가? 오펜하이머는 핵무기를 통해 일본을 항복시킬 수 있다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고, “우리가 만들 이 작품은 인류에게 지금까지 없던 평화를 선물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가 핵무기의 비인도성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극한의 대립 속에서, 과학자들에게는 프로젝트에 참여할지 말지를 선택하는 개인적인 결정만이 남아 있었다. 몇몇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는 결국 개발되었다. 그러나 2025년의 과학자들은, 늦기 전에 오펜하이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카지타 타카아키 씨는 세계대회에 보낸 축사를 통해, 물리학 및 화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 30명이 발표한 ‘핵무기에 관한 2024년 마이나우 선언’을 소개했다.

 

선언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핵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지만, 현재 상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다양한 국가, 다양한 신조, 다양한 정치적 입장에 속한 과학자로서, 저희는 전 세계 사람들과 지도자들에게 우리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이 재앙을 막기 위해 행동할 것을 촉구합니다.”

 

과학자들이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함으로써 책임을 다하려 한다면, 시민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2차 세계대전이라는 극한 대립은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을 부추겼고, 그 존재는 다시 적국에 대한 사용 가능성을 높였다. 그중에서도 핵무기를 선택하지 않은 이들은 과학자 중에도, 정치인 중에도 분명히 있었을 테지만, 그들에게 실질적인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전쟁이 터지고 나서 핵무기 사용이냐, 나의 죽음이냐 사이의 좁은 선택지에 내몰리기 전에, 전쟁 위기를 억제하는 것은 시민 모두의 몫이다.

 

 

운동이 지역에서 세대를 넘어 이어진다는 것

 

운동이 쇠락하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며, 무서움을 느낀 때가 있었다. 예컨대 내 경험과 결의는 선배들의 그것보다 얕을 수밖에 없다는 걸 느꼈을 때, 노동조합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합의가 조금씩 무너지는 걸 볼 때 그랬다.

 

옅어지는 경험과 흔들리는 합의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계속될 수 있을까? 일본에서는 피폭을 기억하는 이들이 사라지고, ‘핵은 안 된다’는 합의가 이전보다 옅어지며, 재무장 여론도 고개를 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전쟁을 기억하고 평화운동을 이어가는 방식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직접 마주한 히로시마는 놀랄 정도로 깨끗하고 현대적인 대도시였다. 피폭으로 초토화되었을 도시를 이 정도로 재건하기까지 얼마만큼의 수고가 들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동시에 히로시마 곳곳에는 피폭을 기억하고 평화를 지향하고자 하는 노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시내 중심에 위치한 히로시마 평화공원에는, “핵무기가 사라지는 날까지 꺼뜨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유지되고 있는 평화의 불이 있었고, 깨끗한 도시 전경을 배경으로 짙게 그을리고 파괴된 원폭 돔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관광지로는 히로시마 평화의 상징인 종이학을 모티브로 한 오리즈루(종이학) 타워가 있었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탔던 택시 회사의 이름은 ‘평화제일택시’였다.

 

히로시마 피폭일인 8월 6일,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열린 평화기념식에는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히로시마의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피폭자의 증언을 듣고 평화교육을 받아온 덕분에 자연스럽게 기념식에 참석한다고 했다.

 

나가사키 세계대회에서는 히로시마·나가사키를 비롯해 일본 전역의 고등학생 평화동아리들이 무대에 올라 자신들의 활동을 소개했다. 고등학교 동아리의 추억을 ‘평화’로 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부럽기도 했다. 나가사키 피폭일인 8월 9일, 나가사키 시내에서 세계대회 참가자들은 핵무기금지조약 선전전을 진행했다. 나가사키 시민들은 다양한 인종과 모습의 왁자지껄한 참가자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그것이 핵무기 폐기에 관한 서명운동임을 알고는 먼저 다가와 서명하기도 했다. 특히 고령의 시민들이 흔쾌히 서명에 응했는데, 아마도 그들은 생생한 피폭 경험을 듣고 자라온 세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피폭의 경험이 나가사키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의 공식 일정이 마무리된 뒤, 8월 9일 오후 나가사키 시내에서 일본 및 세계 각국의 참가자가 일본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을 요구하는 서명운동 선전전을 벌였다. 필자(왼쪽)가 든 서명 용지에 일본 시민이 서명하고 있다.

 

나가사키 시내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혼자 들어간 ‘피폭자 커뮤니티 센터’는 두 칸짜리 작은 공간이었지만, 한쪽에서는 음료를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종이학을 접는 등 활기가 넘쳤다. 초등학생 즈음으로 보이는 어린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종이학을 함께 접었고, 한 대학생과 서툰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나가사키에서 자란 그녀는 고등학생 때 원수폭 반대 서명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으며, 커뮤니티 센터에서는 피폭일을 전후해 증언회, 낭독회, 등불 띄우기와 같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2025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는, 이제 고령이 된 피폭자의 증언을 마지막으로 집중 전달하자는 취지로 개최되었다. 다나카 사토시 피단협 대표이사는 피폭자로서 증언하는 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피폭자는 10년 후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하면 학생들이 놀라는데,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지만 핵과학자들이 만든 지구종말시계에 따르면 종말까지 89초밖에 남지 않았다. 내게 남은 시간보다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더 짧을지도 모르니 그쪽에 신경을 쓰자. 나는 아직 10년은 더 이야기하고 다닐 수 있다’.”

 

피폭 80년을 맞아 활력이 도는 일본의 피폭자 운동, 핵무기 반대 운동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피폭자가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이들의 증언을 듣고 자란 사람들을 통해, 일본의 평화운동은 형태는 달라지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점, 각자의 방식으로 운동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항상 있을 것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한국 시민과 사회운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만난 일본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 “일본이 여러분의 조상에게 저지른 일을 일본인으로서 마음 깊이 사과한다”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히로시마에서 도보 투어를 맡았던 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의 오시오카 타에코 씨, 나가사키 도보 투어 가이드였던 고등학교 교사 오카야마 히데오 씨, 나가사키에서 홈스테이를 제공해준 미조우라 씨 모두 그랬다.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80주년 집회를 마치고 함께 사진을 찍은 미즈베 히카루 씨(왼쪽), 오카야마 히데오 씨(가운데), 필자(오른쪽).

 

미조우라 씨는 자신의 집 주변에 강제징용당한 한국인의 주거 구역이 있었고, 피폭 전까지는 오며 가며 그들의 얼굴을 봤다는 사실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일본이 침략전쟁을 저질러서 이런 일을 겪은 걸까?”라는 질문이 피폭자 운동을 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원폭 공격을 받아 마땅한 국민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을 바로 꺼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가사키에서 만난 20대 청년 미즈베 히카루 씨는 먼저 다가와 함께 점심을 먹자고 권했다. 일본코리아협회에서 활동 중인 그녀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 식민지배의 잔혹함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세계대회 워크숍에서는 이렇게 발언했다. “원폭 피해를 밝히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했다는 사실 역시 명확히 알리는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

 

이처럼 진심으로 가해국으로서의 위치를 반성하는 사람들에게, 그 진심의 무게에 걸맞은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 것 같았지만, 정작 한국인인 나는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반일 민족주의는 고루하고 비생산적이지’ 정도로 생각하면서, 식민지배와 한일 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막막한 마음속에서 유일하게 떠오른 생각은, “일본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한국인의 식민지배 상처도 어느 정도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히로시마 일본코리아협회가 주최한 한일 교류회에서는, 일본공산당 소속 전 중의원과 히로시마 시의원을 비롯한 일본의 활동가들을 만났다. 수십 년을 반핵평화운동에 바친 베테랑 활동가들 앞에서, 학생 시절 사드 배치 반대 운동이 가장 큰 평화운동 경력인 나는 사회진보연대 회원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온 활동가’ 대접을 받는 것이 어색했다. 이들 앞에서 “한국에 돌아가 어떤 활동을 하겠다”고 말하자니 궁색한 느낌이 들어, 솔직하게 말했다. “노동조합 상근자였지만 이제는 학생입니다. 평화를 위해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지 찾아보려 합니다.”

 

그럼에도 일본의 활동가들은 젊은이가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해주었고, 앞날을 응원해주었다. 일본 사회운동이 고령화된 현실을 걱정하면서도, 한일 청년들에게 희망을 걸고 싶다고 했다. 보육교사로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해 지금은 평화운동까지 함께하게 되었다는 이시카와 씨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 한일 청년들이 서로의 문화를 즐기는 분위기가 좋아 보입니다. 대중문화를 통해 가까워지는 데서 나아가, 서로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히로시마에서 8월 6일 원폭 투하일을 보내고, 나가사키에서 8월 9일 원폭 투하일을 보낸 뒤, 서울로 돌아와 맞이한 8월 15일은 광복절이었다. 새삼스럽게 느껴졌던 것은,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 직후에 조선이 해방되었고, 일본의 피폭 80년은 곧 한국의 광복 80년이라는 사실이었다. 광복 80년을 기념하는 말과 글이 쏟아지는 와중에, 나는 식민지배를 사과한 일본인들에게 미처 하지 못한 대답을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식민지배는 분명한 비극이었고, 이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인 피폭자의 존재 역시, 식민지배의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식민지배를 극복하는 일은, 비난과 배척이 아니라 역사를 공통의 문제의식으로 바라보려는 한일 양국의 공동 노력으로만 가능하다. 우리가 함께 견지해야 할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핵무기와 전쟁 가능성을 높이는 시도에 반대하는 것일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려는 한국 시민들에게 시야를 조금만 넓혀 세계를 보자고 말하고 싶다. 원폭 투하는 조만간 항복할 것이 확실했던 일본의 항복을 몇 달 앞당기는 대가로, 일본과 한국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씻기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핵무기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동시에, 인류를 절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3차 세계대전의 위협을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 수년간, 강대국은 노골적인 핵위협을 단행하고, 약소국은 핵무기 보유를 시도하며, 세계 곳곳에서 핵전쟁의 위협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또한 한국 시민의 평화운동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다. 침략을 당한 약소국으로서의 경험이 있는 한국 시민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무력 침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할 자격이 있다. 가장 예측 불가능한 북한의 핵 위협을 이웃에 두고 있는 나라에서 모든 핵무기에 반대하는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세계에 강력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또한 한국 시민과 일본 시민의 연대는 불가능해 보이는 국가 간 협력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다음에 일본행 비행기를 탈 때는,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간 뒤, 많은 한국 시민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치열하게 토론하고, 핵무기 폐기와 평화에 대한 염원을 나눴습니다.” ●

 
주제어
평화 국제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