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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가을.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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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노동자운동

2013 노동운동포럼 사례발표 지상중계

이유미 |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노동자운동은 ‘교섭권 없는 산별노조, 연대의 힘없는 기업별 노조’라는 험로에 놓여있다. 진보정당 역시 분당 이후 분열을 거듭하면서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산별노조와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운동의 전망이 좌초된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경험한 주체들이 현장에서 은퇴를 준비하는 시기가 되었지만, 아직 과거의 경험을 승계하고 새롭게 노동운동을 개척해 나갈 주체의 등장은 불투명하다. 이제 과거의 활동을 돌이켜보고 평가하면서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이 된 것이다. 노동운동포럼 사례발표도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마련되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밝힐 단초를 마련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동지들의 경험을 공유하고 교훈을 도출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이태의 공공운수 학교비정규직 본부장, 홍종인 유성아산지회 지회장, 정진홍 금속경주지부 정책기획실장, 이길우 대경건설지부장이 자리해 주었다.

사례발표 1: 이태의 공공운수노조 학교비정규직본부장

첫 번째로 학교비정규직 조직화 과정과 시사점에 대한 이태의 공공운수노조 학교비정규직본부 본부장의 발표가 있었다. 개별 학교장이 아니라 교육청교육부를 대상으로 투쟁하게 된 문제의식과, 투쟁이 조직화로 확대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학비본부가 교육청과 교육부를 교섭대상으로 설정한 이유는 그들이 학교비정규직의 진짜 사용자이기 때문이다. 학교장이 표면적으로 학교비정규직의 임금과 고용을 결정하지만 독자적인 예산 확보와 고용유지 능력은 없다. 한편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차별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용불안에 대한 두려움과 패배의식이 큰 상황이었다. 학교장 계약관계로 매년 눈치를 봐야하고, 전국 1만2천개 학교에 소규모로 산재해있는 실정이라 아예 시작부터 전국적 조직화 계획을 수립하였다. 노동자들이 학교장과 직접 부딪치기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개별 학교에서 투쟁이 치열하기는 하지만 진짜 사용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과를 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대규모로 조직하기도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즉 조직화와 투쟁의 초기부터 초기업적인 교섭과 투쟁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개별학교와의 투쟁이 초래할 수 있는 역량분산과 개별학교 투쟁의 승패로 인한 활동가의 유실 문제를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비정규 영세사업장 투쟁에 시사점을 준다. 비정규직이 대거 분포한 영세한 사업장들의 특성상 개별 기업조직이 붕괴할 수도 있지만, 초기업적 조직화와 조직건설을 통해 경험과 활동가 층을 유실하지 않고 지속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진보교육감 당선은 조직이 확대되는 주요한 계기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합원 스스로가 권리를 위해 나서도록 만드는 것이 동반되었기에 가능했다. 진보교육감 당선 초반에는 학교비정규직 노동 현실이 너무 열악해서 누군가가 대신 목소리를 내주면 조합원들이 벌떼같이 모여들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교육감이 당선되자 학교비정규직도 교육의 주체라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토론회를 기획했다. 하지만 참여는 저조했다. 아무리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신의 처지를 억울하게 여겨도, 자기 목소리를 대신 내준다고 해도 조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스스로 나서고 성과를 쟁취하지 않으면 조직화와 투쟁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계기였다. 그래서 곧바로 맞춤형 복지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복지가 전무한 실정이었다. 사실 진보교육감에게 들어달라고 하고 조직 성과로 선전해서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었지만, 모든 학교에 팩스를 보내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가 스스로 나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투쟁과 조직화를 지속하는 가운데 2011년에 조직 확대의 중요한 계기점이 생긴다. 학교비정규직의 임금체계가 일방적으로 바뀌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교육감을 대상으로 체불임금 소송을 걸었는데, 노동자들의 분노가 큰 상황에서 조합원이 아닌 노동자들에게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면서 단기간에 7천명이 소송에 동참하게 되었다. 비록 결과적으로 소송은 패소했지만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첫 번째로 대규모 저항의지를 보인 사건이었고, 조직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이 ‘물방울 소송단’ 사례는 비조합원들에게도 적용되는 요구안을 전면에 제기하며 투쟁이 곧 조직화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고, 그 과정에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조합이 대표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학교비정규직 노조의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학교비정규직의 직종이 다양하여 발생하는 내부적인 갈등조절 문제와 경합조직 가운데 대표성을 획득해야하는 과제가 있음을 짚었다. 또한 2012년 총파업이 대선 시기라는 정세적 효과를 노린 측면이 크나 준비가 부족했고 실질적인 성과가 없었으므로, 올해 하반기 총파업은 철저한 준비를 통해 요구를 쟁취해야 한다고 말하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사례발표 2: 홍종인 금속노조 유성아산지회장

다음으로는 홍종인 금속노조 유성아산지회 지회장의 발표가 있었다. 2011년 직장폐쇄와 어용노조 설립을 통한 사측의 민주노조 파괴 시도에 맞서 노동조합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발표했다.
우선 최근 잇달아 발생하는 민주노조 파괴공세에 있어 노동조합의 다소 안일한 대응과 조합원들 간의 단결력 저하가 자본에게 호기를 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유성 역시 그러한데, 민주노조 건설 이후 노조가 현장 장악력을 확보하고 나서 그대로 안주하기 시작했다. 능동적 투쟁을 하지 못하면서 노동조합에서 모든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하다보니 현장투쟁은 사라지고 지회가 자판기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지도부는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기보다는 자체적인 판단으로 사업을 집행했고 조합원들의 단결을 강화하지 못했다. 이러한 와중에 자본은 노조의 분열과 갈등을 파악했을 것이고, 결국 2011년에 교섭해태를 벌이던 사측은 공격적 직장폐쇄를 단행하며 노조파괴에 돌입했다.
사측이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복수노조를 설립하며 노조를 밀어붙이는 상황이었지만, 유성지회는 버틸 수 있었다. 다들 어용노조 설립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날 때, 유성지회가 조직을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후배세대들의 성장이 컸다. 사실 후배세대들은 노조민주화 투쟁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어쩌면 선배들의 앞선 투쟁으로 쟁취한 성과를 후배들은 당연시하면서 민주노조의 절실함을 느끼지 못한 채 적극적으로 노조사수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측이 단체협약을 무시하고, 어용노조와 차별을 하는 등 노조의 현장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면서 민주노조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하지만 분노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조합원들이 민주노조 사수에 대한 열망은 있었지만 그것이 조직적인 힘으로 모이지는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측이 조합원 강제교육을 보내고 징계와 해고를 남발하는 상황에서 7기 지도부를 구성해야 했다. 어느 때보다도 단결력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담감은 컸지만 젊은 층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지도부를 구성했다. 거세지는 노조탈퇴와 어용노조 가입 압박 속에서 7기 임원들은 탈퇴자를 막기 위해 아침 출근투쟁을 시작했다. 임원들이 시작했지만 조합원으로까지 확대되었고 인사를 꺼리던 용역들과 관리자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고개를 숙였다. 2012년 중반부터 더 이상의 탈퇴자가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어용노조는 생산직 조합원만으로는 과반을 획득하지 못했다. 그러자 사측과 어용노조는 관리직을 어용노조에 가입시키는 방법으로 과반을 넘겨 대표교섭노조 지위를 획득했다. 이에 더해 용역폭력 청문회와 국정감사에서 창조컨설팅 노조파괴 시나리오가 사실로 폭로되었지만 대선기간이었기 때문에 여론화 되지는 못했다.
이에 홍종인 지회장은 현장투쟁을 유지·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굴다리 농성에 돌입했다. 이를 통해 유성투쟁 여론화와 조합원들의 자발적 투쟁이 전개될 수 있었다. 어용노조와의 차별에 대해 생산1과가 항의하면서 투쟁을 전개했고 전 조합원이 동참하면서 결국 사측의 사과를 받아내고 투쟁에서 승리하는 성과를 만들었다. 현장투쟁으로 조합원들은 관리자들과 맞서면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어용과 관리자들의 현장탄압이 한풀 꺾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세를 이어가며 유성지회는 선배세대의 헌신적 투쟁과 후배세대의 열정으로 지치지 않고 투쟁하고 있다.
이처럼 유성지회가 사측의 노조파괴 시도에 맞서 조직을 유지할 수 있던 것은, 선배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젊은 세대가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87년 민주노조 건설 투쟁의 경험을 가진 세대들의 은퇴를 앞두고 있는 노동운동에 유성지회의 사례는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사례발표 3: 정진홍 금속노조 경주지부 정책기획실장

세 번째로 정진홍 금속노조 경주지부 정책기획실장이 발표를 이어갔다. 탄압으로 인한 위축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시금 조직화에 나서는 것이며, 신규조직화가 있어야만 자신감을 회복하고 노조가 관성에 빠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경주지부는 2010~2011년 이명박 정권의 탄압으로 6개 사업장 1200명의 조합원이 탈퇴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2006년부터 2009년까지는 조직화가 꾸준히 확대되는 추세였다. 조직화 대상은 주로 자동차 1차 하청업체였고, 현대차의 단기 납기시스템으로 인해 대부분 재고를 많이 보유하지 못한 사업장들이었다. 이럴 경우 파업의 여파는 현대차에 바로 미치기 때문에 적절한 순간에 승부를 걸 경우 조직화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공단 내에서 한 사업장이 조직화되면 주변 사업장으로 번지는 효과가 있었다. 노동조합이 설립된 주변 사업장이 변화하고 다른 미조직 사업장들도 노조설립에 나서는 것이다. 이 같은 파급효과 때문에 한 곳의 승패여부가 주변 공단지역의 사업장 조직화 분위기를 좌우하게 되어 아무리 작은 사업장의 투쟁이라도 철저한 대응으로 승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경주지부는 싸움에 대응하는 조직적 태세를 갖추었다. 금속노조 창립 이후 지부파견자들에 대한 원칙을 세워 지회별로 상근자의 1/3을 지부로 파견해 10~12명의 상근자를 확보하고 지부집단교섭으로 두 명을 더 확보했다. 상근자 확보를 통해 지부 사업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미조직 비정규 담당자 상집 1인과 부지부장 1인이 독자 사업을 진행하도록 했다. 또한 미조직 담당자는 기본으로 노동관계법 등의 실무적 준비, 초동 주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선동력, 조직화 이후 초기 조합원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교육과 선전의 역량, 교섭과 투쟁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현장투쟁 경험 등의 자질을 갖추고자 했다. 이러한 미조직 조직화의 기풍을 지켜왔기 때문에 경주지부는 잇따른 금속노조탈퇴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금 조직화에 주력하여 2011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6개 사업장 800명을 새롭게 조직할 수 있었다.
한편 조직화 과정에서 복수노조 문제는 다수파 전략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물론 복수노조 이전에도 신규조직화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초기 조합원 조직화 수였다. 그러나 기존에는 소수가 조직되더라도 지부차원의 대응과 현장파업으로 자본이 감수할 타격을 크게 만들면 사측을 교섭으로 끌어내 합의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복수노조가 시행되면서 창구단일화라는 1차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기존의 소수조직력으로 얻을 수 있던 수준의 합의도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노조 설립을 공표하기 전에 조직의 상황과 조건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특히 공장이 여러 개 있는 경우, 지역이 다르고 그 동안 교류가 없더라도 자본이 복수노조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를 점검하고 함께 조직화하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창구단일화 기간 동안 자본이 사무직과 현장의 미가입 조합원, 그리고 탈퇴할 조합원들을 이용할 가능성에 대비해 가능한 7일 동안은 조합원의 이탈을 막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렇게 신규로 조직된 조합의 특징은 사측으로부터 받은 인격적 모독과 저임금고강도 노동을 강요받은 것에 대한 분노가 크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조합 없는 곳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느 사업장이든 인간이길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한 명의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어 노동조합을 세운다. 그래서 순수하고 노동조합에 대한 충성도가 높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이익에 대해 민감하고 노동운동의 다른 부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측면도 있다. 투쟁과 연대의 경험을 통해서 신규 조합원들이 점차 의식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기존의 조직들은 신규사업장의 조직화를 통해 관성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노조활동이 오래될수록 관성에 빠져 상태가 나빠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신규조직화를 통해서 꾸준히 활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칫 침체국면에 빠질 수도 있었던 지역지부 운동을 신규조직화라는 방식으로 주체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위기를 극복해 나간 경주지부의 사례는 노조탄압으로 위축된 많은 단위에 귀감이 된다.

사례발표 4: 이길우 건설노조 대구경북건설지부장

마지막으로 이길우 건설노조 대구경북건설지부 지부장이 발표했다. 협약임금을 비조합원들에게까지 적용하면서 조직화를 확대하고, 신규조합원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며 강화된 현장의 힘을 바탕으로 현장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한 최근 파업투쟁의 과정과 고민을 이야기했다.
건설노조 대경지부는 2006년에 2천 명의 노동자를 조직해서 32일간 총파업을 전개하였으나, 큰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다수의 부상자와 구속자가 발생하는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파업을 통해 현장에서 당당해졌다는 자부심으로 남은 500여 명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투쟁이 이어졌다. 2008년에 시공참여사 제도가 폐지되면서 건설현장에 만연한 도급이 불법화되었다. 이에 대경지부는 도급으로 일하던 노동자들을 건설업체가 직고용하라는 투쟁을 시작했다. 아직 2006년 투쟁의 여파가 남아 불안감이 있었으나 끈질기게 투쟁하면서 직고용팀 200명을 만들어냈다. 직고용팀은 8시간 노동과 휴게시간을 정확히 준수했고, 비조합원에 비해 일당도 만원 정도 더 받았다. 임금을 두 달에 한 번 받는 일이 다반사였던 건설현장에서 조합원들은 매달 임금을 제때 받았다. 조합가입하면 직고용팀처럼 조건이 개선될 것이란 선전을 통해 조직을 확대하려 했으나 생각처럼 늘지 않았다. 오히려 핵심 조합원과 현장 비조합원과의 괴리감이 생겨났다. 조합원들은 철의 대오가 되면서 비조합원들을 자기 권리도 못 찾는 바보 취급하고, 비조합원들은 노조가 조합원들의 이익만 챙겨먹는다고 생각했다. 노조가 조합원들만 먹여살리는 조직이라는 비조합원들의 비판에 반성을 많이 했다. 이에 2010년 말 집행부를 새롭게 꾸리면서 비조합원과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자는 목표를 세우게 된다.
2012년에 총파업을 준비하면서 임금이 인상되면 파업 이후에 조합에 가입하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적용하자는 것을 조합원들과 합의했다. 2012년 파업은 조합원들이 열흘 동안 자기 일당을 포기하고 다른 현장을 돌면서 비조합원들을 조직하여 이뤄진 것이었다. 파업 결과 일당을 14만 8천원에 합의했다. 기존 조합원들의 입장에서는 1만 3천원 인상이지만, 비조합원의 경우 조합원들보다 임금이 1만 5천원 정도 낮았기 때문에 2만 8천원 인상 효과가 있었다. 기존 조합원들은 열심히 투쟁하여 오른 자신의 일당보다 투쟁 후 가입한 조합원의 임금 인상 폭이 더 크다는 것에 거부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조합원들과의 격차는 노조의 고립을 자초한다는 점을 근거로 설득했으며, 조합원들이 조직 확대에 동의한 결과 1,100명 규모로 조합원이 늘었다. 이후 현장이 급속하게 바뀌어 갔다. 현장의 자발적 투쟁으로 팀장이나 현장 소장들을 몰아붙이면서 노동조건을 개선해 나간 것이다.
이러한 기세를 이어 2013년 총파업은 근로기준법 적용과 신규조합원의 교육 훈련을 목표로 삼았다. 신규로 조직된 조합원들이 교육받고 집회 따라가는 정도로만 활동하면 성장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사업장을 선정해 투쟁을 만들고, 신규조합원들을 하루에 한 팀씩 그 현장에 배치해 스스로 하루 종일 집회나 선동을 진행하도록 하면서 성장시키고자 했다. 총파업 이후에도 조직화 사업을 지속해 조합원이 2천 명을 넘으면서 현장위원회를 설립했다. 현장위원회 활동을 통해 조합원들은 교육도 하고 모의 교섭도 하면서 성장해 갔고, 현장민주주의가 강화되었다. 간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조합원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반영하는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스스로 고민하고 실천하게 되었다. 자발적으로 현장 문제를 해결하다보니,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여성조합원 복지문제를 먼저 제기하거나, 어렵게 투쟁하는 단위를 지원하는 모금활동을 앞 다투어 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 조직화는 여전히 많은 고민을 하게 한다. 2009년 대구지역의 건설경기가 악화되었을 때 조합원들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교육하고 설득해도 조합원들이 이주노동자들을 받아들이지 못하자, 정 그렇다면 건설현장에서 이주노동자를 모두 나가게 할 수 있는지 한번 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두세 달을 했더니 조합원들이 이주노동자를 쫓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먼저 그만두자고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대경지부는 2011년부터 이주노동자 조직화 사업에 힘을 쏟았다. 노조로 가입한 이주노동자들에게도 8시간 노동과 협약임금을 적용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 공급체계가 워낙 복잡하다보니 어려움이 크다. 가장 큰 난관은 이주노동자를 조직해 놓으면 중간 브로커들이 노조에 가입한 이주노동자들을 다른 지역으로 빼돌리는 것이었다. 모든 사례에서 마찬가지듯이,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주노동자 주체가 형성되는 것인데, 이 부분은 여전히 대경지부의 고민으로 남아있다.
발표 말미에 이길우 지부장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목수 임금을 받고 노동조건도 좋지만 대경지부만 홀로 잘 나가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길어야 2~3년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자본가들의 집중적 탄압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국적 조직화와 건설노조의 강화가 필요하며 이를 지원하고 연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며 발표를 마쳤다. 조합원들이 쟁취한 성과를 비조합원들에게도 적용하며 조직력을 확대하려던 문제의식이 전국적 차원에서도 추진되어야 고립되지 않고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사례발표자들은 개별단위를 넘어선 집단적인 교섭과 투쟁으로 쟁취한 조직 확대, 새로운 세대의 성장을 통한 조직 강화, 공세적인 조직화를 통한 위기 극복, 비조합원까지 포괄하는 투쟁 속에 강화되는 대표성 등의 경험을 발표하면서 참석자를 포함하여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참석자들은 각자의 단위에서 고민을 심화시키고 과제를 구체화하겠다는 다짐과 이러한 논의가 보다 본격화되어 확대되길 바라면서 토론을 마무리 지었다.
주제어
노동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