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0.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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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중동, 21세기의 중동(5) 이슬람 '원리주의'의 형성과 역사

김용현 | 한반도위원회
얼마전 미국에 대한 테러 이후 다시금 이슬람이, 정확하게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이며, 그들의 이념과 사상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 질문이 제기되는 과정에는 이슬람에 대한,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한 무지라는 심연한 강이 흐르고 있다. 즉, 테러와 '이슬람 원리주의'는 항등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슬람 부흥운동의 역사와 성격에 대해 다소 길지만 정확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즉 종교적 부흥운동이었던 이 운동이 어떻게 정치적 운동이자 투쟁으로 특화하게 되는지를 보고자 한다.


이슬람 부흥운동의 등장


이슬람 부흥/개혁운동은 오랜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의 적절한 대응으로 생성, 발전해 왔다.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탈에 대항한 운동으로 반외세, 반세속을 공통분모로 이슬람의 정통성과 이슬람권을 보호, 발전시키자는 근본 취지를 담고 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에 본격적으로 태동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이 서구 유럽의 식민통치하에서 경제적 수탈과 민족적 차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는 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개혁성향의 교육받은 부흥운동가들은 서구문물의 적대적 배척으로부터 앞선 과학과 제도를 발전적으로 수용하는 이슬람식 사고의 과감한 발상전환을 시도하였다. 이슬람 세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엘리트였던 이들 개혁론자들은 이슬람 율법에 대한 맹목적 추종보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재해석을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유럽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이슬람을 보호하고, 나아가 이슬람 본래의 힘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연과학과 군사기술, 그리고 유럽의 정치, 경제 제도 및 복지 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구적 요소를 이슬람 체제에 도입하고자 하였다. 한마디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식 전통과 현대화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합리적이고 조화롭게 극복하려는 지적고뇌의 표현이고,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이슬람 부흥론자들의 노력은 화려한 옛 이슬람 부흥이라는 궁극적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각 지역별로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잠재된 욕구로 무슬림들의 가슴속에 내재해 있다.
이러한 개혁성향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근년에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이슬람권 지배력 강화와 세속주의와 서구화에 따른 도덕적 가치관의 혼란, 이슬람권 국가들의 민주주의 부진, 부정부패나 경제 정책 실패로 인한 빈부격차의 심화, 이스라엘에 대한 서방의 일방적인 지지/옹호, 보스니아와 같은 분쟁 지역에서의 무슬림 대량박해에 대한 서방의 방관자적 태도 등에 의해 젊은층과 소외계층의 공감을 얻으면서 북아프리카, 중동 아랍국가, 이란, 터키, 파키스탄, 동남아시아 등 이슬람권 전역에서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그 양상은 지역에 따라 상이한 형태로 진행, 발전되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

우선 이슬람세계에서 "Islamic Fundamentalism"의 우리말 번역인 이슬람 원리주의 혹은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원리주의/근본주의'라는 용어는 1920년 미국에서 과격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세속화 반대운동에 처음 붙여졌던 말이다. 이런 같은 맥락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라는 표현은 1940년대 서구식 정치질서와 세속주의(정교분리, 혹은 인간의 법에 의한 통치)에 반대하는 일체의 이슬람 운동에 서방세계가 갖다 붙인 용어이다. 그러나 서구세계가 사용하는 '이슬람 원리주의'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반서구 노선을 표방하거나 세속정부에 저항하는 일련의 모든 이슬람 운동을 악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용어는 최근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이슬람 부흥운동에 적용시되어 '이슬람은 반문명적이고 비인도적이며 위험하다'는 논리의 비약으로 발전되고 있다. 결국 무슬림들의 절대다수가 이슬람 원리주의자이고 그들의 대부분이 응징되어야 할 위험한 존재임을 부각시켜 이슬람 세계에 대한 부당한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이슬람권에서는 단지 서구의 가치체계에 대항해서 이슬람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에 이슬람 부흥운동, 이슬람 개혁운동, 이슬람화운동 등의 표현을 쓴다.1)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채 정신적 가치의 존중, 꾸란과 하디스(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에 철저히 근거한 이슬람식 삶의 확립이라는 대전제하에서 줄기차게 지속되어 왔다. 그러다가 아랍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면서, 종교적 민족주의의 형태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까지 본격적으로 발아되었다. 그것도 중세의 찬연했던 이슬람문화를 회상하며, 이슬람 세계가 서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앞선 과학과 기술의 습득을 받아들이되. 이슬람 정신의 강화와 이슬람식 사회체제의 구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절충적인 개혁운동이었다.

이슬람에서 정치와 국가

이슬람 부흥운동을 통해 실현해야 하는 이슬람 국가의 개념을 잘 정리한 대표적인 학자는 마울라나 마우두디였다. 이슬람 정치체제에 대한 서구의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마우두디는 아주 명확하게 이슬람 국가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적 의미의 이슬람 국가형태는 이슬람 성법에 기초한 완전한 신정주의(神政主義) 국가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과 개념이 확립되어야 한다.
첫째로 이슬람 정치 이론의 기본 원칙은 유일신(tawhid)과 신의 절대권력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건설되었던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신(알라)만이 절대적 주권의 주인이고 행사자이다. 동시에 신만이 진정한 입법자이며 절대적 사법권을 갖는다. 따라서 국민은 신의 종복에 불과하고, 국가는 그 운용이 신법인 이슬람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때, 통치의 정당성을 상실한다.
둘째, 이슬람 국가의 본질과 성격은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세속적인 서구 민주주의 원칙과 부합되지 않는다. 서구 민주주의의 철학적 기조는 주권재민에 있다. 이슬람 국가체제는 대주권의 원칙에 절대성을 주지 않고, 신의 주권 원칙에 입각한다. 국가를 운용, 통치하는 자는 칼리파(신의 대리인)로 존재한다. 국가 원수는 스스로의 권위로 법을 제정할 수도, 함부로 폐기할 수도 없다.
셋째, 이슬람 국가의 목적인 대중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설정한 이상적인 조건에서 금기된 사항을 멀리하고 권장된 사항을 적극적으로 이행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의무는 따라서 외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는 표피적인 업무 이외에 대중을 도덕적으로 함양시키는 교육과, 신의 뜻에 걸맞는 사회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
넷째, 이슬람 국가의 통치목표는 보다 공동체적이다. 모든 행위는 개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지며, 사회 도덕률이라는 전체적인 가치관을 항상 염두에 둔다는 의미이다.
다섯째, 이슬람 국가는 통치자나 국민 모두가 이슬람이라는 공통의 이데올로기에 기초를 두고 이슬람 국가내에서의 이질적인 이데올로기의 소유자는 전체 공동체로서 이슬람의 가치를 파괴하거나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 나름의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존중되고 보호된다.
이슬람 국가에서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등한 사회적, 법적 지위와 권리를 향유하고, 민족, 종족, 신분, 직업, 출신성분 심지어 종교 등의 차이에 의한 어떠한 불이익도 당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사상은 일인의 권력 독점에 의한 전제주의나 독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이슬람 국가의 근본체제이고, 이슬람식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이슬람 부흥운동의 전개와 그 양상2)

이슬람 부흥운동은 몇 가지 전제에서 오랜 역사적 배경과 시대상황의 적절한 대응으로 생성, 발전해 왔다. 첫째, 종교적으로 이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최종의 종교였기 때문에, 변질된 이슬람으로부터 순수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다. 즉, 꾸란에 기초를 두면서, 예언자 무함마드가 실현한 초기 이슬람 공동체(Ummah)를 재건하자는 것이다. 둘째.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것이 아닌 정교일치의 단일유기체이기 때문에 이슬람 부흥운동이 정치성을 강하게 띠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대항한 문화적 총체운동으로 반외세, 반세속[반정교분리]을 공통분모로 이슬람의 정통성과 이슬람권을 보호,, 발전시키자는 근본 취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의 전통을 토대로 하면서 앞선 서구의 과학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즉 '전통과 근대화'의 이상적인 조화를 목표로 삼고 있지만, 그 양상은 국가나 시대, 투쟁의 대상이나 목적, 방법론 등에서 매우 다양하며 이를 획일화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슬람권에서 최초로 개혁을 통한 이슬람 정통주의의 강화를 시도한 움직임은 9세기 중엽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었다. 그는 꾸란의 창조설과 같은 당시의 비생산적인 교리논쟁을 종식시키고 이슬람의 신학체계를 바로잡았다. 이로 인해 이븐 한발은 후일 완고한 이슬람 율법주의와 이슬람 부흥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14세기에도 이븐 타이미야라는 신학자가 '살라피(salafi)'운동을 주도하여 신비주의, 범신론, 사변적 신학, 미신적인 요소로부터 이슬람의 정화를 주장하였다. 위의 두 학자의 맥을 잇고 등장한 것이 18세기 중엽 '와하비(wahabi)'운동이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 와하비운동을 이슬람부흥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중동연구자들의 일반적이 견해이다. 이 운동은 이슬람이 성립된 후, 1200년 동안 누적되어 온 신학적 변질과 사회적 악습에 대한 반발로 출발하였다. 특히 당시 이슬람 사회에 만연하던 이슬람 신비주의가 공동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위주의 기복신앙으로 흘러가자 압둘 와합은 이를 배척하고 순수한 이슬람을 회복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그는 이슬람 사회가 쇠퇴하게 된 이유는 이슬람 차체의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정신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슬람 본연의 정신과 고유한 전통을 부흥함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와하비 운동은 이슬람의 요람지인 아라비아 반도에서 태동하여 사우디 아라비아를 건국하는 사상적 기둥이 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서구열강이 중동. 아랍세계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이전 이슬람 사회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와하비 운동은 큰 의미를 갖는다. 동시에 이 부흥운동은 19세기 중엽까지 이슬람세계의 개혁 움직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리비아에서는 사누시아 운동이 일어나 정권을 잡았고, 인도에서는 무슬림 각성운동이, 수단에서는 무하마드 아흐마드가 마흐디운동이 각각 변질된 이슬람의 타파와 참된 이슬람의 부흥을 주창하였다.
18세기 말엽부터 시작된 유럽열강의 동진은 와하비 운동에 고무되어 있던 이슬람 세계의 부흥 움직임을 더욱 촉진하였다. 더욱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유럽의 근대문화가 중동에 소개되는 전환점이었고, 이로 인해 중동의 근대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서구의 혁명전통은 아랍 지식인들에게 외세의 통치에서 아랍을 해방시키자는 의지을 고무시켰으며 서구의 발전 사이에서 번민하던 사상가는 알 타흐타위였다. 그는 이슬람권 밖에서도 행복과 풍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슬람 체제의 합리적이고 현대적인 해석을 강조했다. 알 타흐타위의 온건한 개혁사상은 후일 세속적 근대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지만 전통적인 이슬람 부흥론자들의 견해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 시기의 이슬람 부흥운동의 주류는 오히려 이슬람 개혁운동으로 불릴 정도로 진취적이었고 부패하고 무능한 기존질서를 무너뜨리고 이슬람의 가치를 통하여 유럽침탈에 대비하고자 했다. 따라서 종교적 동기에서 출발한 이 운동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서 기성세력과 그 후원 세력인 유럽열강의 탄압을 받아 실패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처음부터 정치 사회적 동기에서 범세계적인 흐름을 이해하면서 시작된 근대적 부흥운동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이 시기의 운동은 종교적 순수성 강조는 물론, 사회전반에 걸친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변혁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이슬람 개혁운동이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에 본격적으로 태동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이 서구 유럽의 식민통치하에서 경제적 수탈과 민족적 차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는 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개혁적 성향을 띤 이 시기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추구하는 목표와 방법론에서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서구의 도전에 대한 무슬림들의 보다 직감적인 반응으로 당시 서구의 급격한 발전 양상을 애써 외면하면서 영광스러웠던 이슬람의 과거를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집약된다. 두 번째 단계는 서구식 방법으로 이슬람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시도였다. 그들은 서구과학의 우수성에 크게 감명받았음에 틀림없지만,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며 서구식 교육으로 새롭게 습득한 방법론으로 이슬람의 서구 기독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위를 증명하려 하였다. 그들은 서구가 이슬람을 공격하는 주된 내용인 여성의 지위, 노예제도, 비무슬림들에 대한 태도, 계시와 이성간의 상충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 꾸란에 근거한 현대적 해석을 통해 반박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국식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들에게 무슬림으로서의 자긍심과 이슬람문화의 위대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강력하게 심어 주었다. 세 번째 단계는 반식민지 분위기가 고조되자 그 동안 잠재되어 있던 사회운동이 행동화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행동철학은 서구의 도전에 대한 대응은 그것을 회피하여 과거 전통이나 영광속으로 숨어드는 것도, 상대의 문물을 받아들여 소화하는 것도 아닌 강력하고도 공격적인 자기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해 나간 부류는 ;흔히 원리주의자라 불리는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슬람의 정치적 영광과 원래의 순수성을 재건하는데 확신에 찬 모습으로 논의를 단순화시켰다. 물론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의 전통과 순수성을 고집한다는 면에서 앞선 율법학자와 비슷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구의 발전 상황과 문물의 우수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낡은 이슬람의 과거에 연연해하지도 않았다. 나아가 그들은 스스로 서구의 지적,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수호자로 자부하였다. 자마티 이슬라미의 창시자인 파키스탄의 마울라나 마우두디가 바로 이 부류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였다.
20세기 이슬람 개혁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후대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이는 이란 출신의 자람루딘 아프가니였다. 그는 이슬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유럽의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이론적 당위성을 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권의 대동단결을 위해 범이슬람주의를 설파하기도 했다. 탁월한 선동가였던 아프가니는 외교와 설득으로 각 국가 권력층을 계몽하고, 일반 서민과의 대중적 접촉을 통해 오스만제국의 술탄을 정점으로 한 이슬람세계의 단결을 호소했다. 그의 실천적 정치전략은 영국치하의 인도대륙과 프랑스치하의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무슬림들의 부분적 자주투쟁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이론을 계승하여 더욱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킨 이가 무하마드 압두였다. 그러나, 압두는 아프가니와는 달리 정치적이고 개별국가 중심의 애국주의와 아랍민족주의를 배척했다. 그는 이슬람을 총체적으로 부흥시켜 유럽의 비평과 공격에 대항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는 이슬람 원리와 가치체계의 적절한 재해석을 시도했다. 더욱이 그는 이슬람의 정통교리가 확립된 후 1000년만에 처음으로 이슬람 신학의 영역에 이성을 끌어 들였다. 이슬람과 과학을 자유롭게 접목한 것이다. 그의 사상적 토대 위에 방법론을 달리하는 수많은 이슬람 개혁론자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개혁에 앞장섰다.
1차대전 이후 이슬람 부흥운동가들의 노력과 이상과는 반대로 이슬람세계의 세속화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서구의 침탈과 정치, 경제적인 예속상태도 갈수록 심화되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개혁론자들의 입지는 좁아졌고, 분노한 급진주의가 점차 세력을 얻어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이 태동하였다. 1928년 이집트의 청년교사 하산 알 반나는 이슬람식 생활양식에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감지하였다. 그 대안으로 그는 도덕과 윤리의 틀로 이집트인을 이슬람 정신으로 교화시키기 위해 무슬림형제단 운동을 시작했다.
무슬림형제단 운동의 핵심은 1930에 작성된 하산 알 반나의 서한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서한에는 서구문명의 기만성을 규탄하고 이슬람의 우월성을 온화한 문체로 설득력 있게 논술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 국가와 서구열강과의 외교관계 수립이나 이슬람권내의 소수 기독교도 및 유대교에 대한 처우와 문화적 자주성에 대해 관용을 보이고 있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연과학은 이슬람의 존귀함을 증명해 주는 필요한 정치, 사법 및 행정체제의 개혁, 모든 세속정당의 해체, 세속법령의 개정, 관료의 이슬람화, 부패의 청산, 삶의 질 향상, 윤리교육, 기술연마, 군사력의 강화 등과 같은 전략적인 방책도 제시하였다. 예배와 단식과 같은 전통적인 이슬람 관습은 당시 사회적 여건 아래서는 구사력 강화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대체로 이 운동은 제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무슬림들의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상황에 관심을 두면서 계몽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1947년 유엔이 아랍인의 영토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하고 이듬해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형제단은 당시 폭발직전의 아랍대중들의 분노를 대변하면서, 극단적인 노선으로 돌아섰다. 반제국주의와 반이스라엘타도를 외치며 그들과 결탁한 기존 정치세력들에 대한 극렬한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결국 1948년말 형제단은 이집트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그들의 지도자인 하산 알 반나 마적 암살되었다. 이제 형제단은 지하로 숨어들면서 극단주의의 상징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들을 급진적 원리주의자라고 부른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근대화를 주창했던 이슬람 부흥론자들이 한결같이 이슬람의 수호를 외쳤지만 방법론은 서로 달랐다. 종래 개방적 근대주의자들이 학문적인 접근을 통해 주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식자층을 대상으로 서구화에 치중했던 반면, 원리주의자들은 대중을 상대로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방법을 택했다. 교육기회의 확대, 대중매체의 보급, 새로운 고용창출, 새로운 사회계층의 성장 등에 힘입어 20세기 중반까지는 개방적 근대주의자들의 역할과 입지가 강화되었다. 한편 세속적인 근대주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이슬람 개혁사상의 대중성은 2차대전 이후 독립시기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즉,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시도되었던 제3세계의 근대화가 모순 덩어리로 가시화되고 난 후였다. 즉, 이슬람의 정통성이 회복되기는커녕, 세속적 민족주의자들이 소위 타락한 서구주의를 지향하면서 승리를 거두는 시기였다. 터키의 케말 아타투르크, 이란의 레자 샤 팔레비,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이집트의 가말 압둘 낫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에 의해 추구되었던 세속화와 서구식 근대화 정책은 오히려 원리주의 개혁론자들의 대응과 활동반경의 확대의 계기가 되었다.
개혁성향의 이슬람 부흥주의자들은 이제 서구식 조직개념을 도입하고, 출판과 매체의 첨단 매커니즘을 극대화하여 서구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과 젊은 세대들에게 그들의 사상을 전파하고 홍보하였다. 그들의 전략은 서구제도의 모방이 아니라 서구로부터의 독립과 최소한 대등한 관계를 이룩하기 위해 서구의 앞선 기술을 활용하는데 있었다. 그들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원했고 권력의 쟁취를 위해서는 급진주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이슬람의 가치가 상처받고, 무슬림들의 자존심이 유린당하는 시기에 이슬람 개혁론자들은 조직적이고 분명한 태도로 이슬람의 정통성 부흥을 부르짖으며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석유가 자원화된 이후 중동의 근대사는 한마디로 서구가 엮어내는 배신과 아랍 저항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특히 1948년 아랍의 독립을 보장해 준다던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심장부에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원하자 서구와 아랍의 씻을 수 없는 반목과 불신의 씨앗은 갈수록 나쁜 열매를 맺어갔다. 2천년간 살아온 고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저항운동 조직을 결성하여 영토회복과 독립이라는 당면 목표를 위해 처절한 생존의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서방세계는 아무도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의 고통에 동정적이지도 않았다. 1967년 UN은 4차례의 전쟁을 통해 점령한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이스라엘의 즉각 철수를 결의했지만, 이것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지 낳고 있다. 무장되지 못하고 서방의 지지를 받지 못한 아랍인들은 저항하였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납치와 인질 테러의 배후에는 항상 이슬람원리주의라는 이름이 도사리고 있었다. 1970년 대 이후 이슬람 부흥운동은 사상적인 투쟁에서 급진적인 이념과 정치투쟁으로 선회하면서, 과격과 테러라는 이미지를 자신에게 부여하였다.
한편, 일군의 부흥운동가들은 이슬람 이전 자힐리야(無知시대)의 상황을 오늘날의 세속화 현상으로 확대 해석하면서 절대신에게 속한 고유한 권한들이 적대적인 비이슬람적 세속정부의 수중으로 넘어 갔음을 개탄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빼앗긴 이슬람의 고유한 가치를 도로 찾는 것은 무슬림들의 신성한 의무로 규정했다. 서구의 비호를 받는 세속정권이 장악하고 있는 이집트, 이란, 알제리, 튀니지, 터키 등 이슬람세계 도처에서 급진주의는 반정운동으로 변모되었다. 1979년 중동의 가장 서구화된 석유부국 이란에서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이슬람 혁명이 성공했을 때, 서구는 경악하였다. 서민과 중산층을 껴안은 아래로부터의 이슬람 혁명은 50년에 걸친 근대화의 과정에서 빼앗긴 대중의 울분을 한꺼번에 풀어주었다. 그들은 조금 덜 고유한 전통과 문화의 바탕 위에 꽃피는 첨단과학의 낙원을 그들은 꿈꾸었다. 이란의 이슬람 정권이 지난 18년간 서구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무역제재에도 그 기반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것은 빠른 템포의 서구화보다는 이슬람의 전통과 가치가 변질되지 않는 사회를 선호하는 이러한 민중의 뜻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리주의 성향이 이슬람부흥운동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것은 90년대였다. 동유럽과 소련이 붕괴되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함께 서구 강대국들의 중동각국에 대한 침탈이 더욱 가속화되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무너진 사회주의의 축을 이슬람이 대신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노골화된 서구의 침략에 대한 이슬람세계의 단결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이슬람 부흥운동은 양차대전중 이슬람 세계의 지적 그리고 사회정치적인 분야에서 태동된 근대적인 현상이며 2차대전 후 더욱 중요성을 띠며 발전해 왔다. 이 운동은 이슬람이 완전한 삶의 방식으로서 만연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비종교적 이념에 대해 생명력 있는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오늘날의 왜곡된 세계질서를 재편하고 수정하는 중요한 역할이 이슬람이 담당할 수 있다는 믿음과 오늘날의 왜곡된 세계질서를 재편하고 수정하는 중요한 역할이 이슬람이 담당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슬람 개혁운동은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두 개의 상이한 측면, 정치이념적인 그리고 문화 종교적인 성격을 띤다. 우선 정치이념적인 면에서는 외국의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착취 나아가 서구의 자유주의와 구소련의 마르크스주의의 문화적 영향과 이념적 간섭에 대항하는 투쟁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문화적이 면에서는 독특한 이슬람 문화의 동질성 주창과 본래적인 이슬람의 믿음, 규범, 의례에 기초한 신앙심 회복을 표현하고 있다.
이슬람 부흥론자들은 이슬람의 신학적 질곡에 머무르지 않고, 뚜렷한 정치 이념을 가지고 단계적으로 정치투쟁에도 참여했다. 그리하여 지난 50년 동안 이슬람 헌법의 제정과 샤리아의 실시, 민주주의와 이슬람 세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중대한 정치쟁점이 있을 때마다 이슬람을 근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정책적인 수정과 반대집단과의 정치적 제휴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개혁론자들은 활발하고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이슬람국가의 수립에 매진해 왔다. 동시에 대중을 선도하고 정신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여 교육의 이슬람적 개혁, 성적으로 천박하고 외설적인 공공매체의 정화, 무신론적인 이념서적의 금지, 남녀공학교육의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이슬람 부흥운동의 대두는 흔히 탈식민지시대의 무슬림 사회에서 세속적 정치 엘리트에 의해 주도되었던 이슬람의 근대화 움직임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많은 개혁적 부흥그룹은 서구화와 근대화를 명확히 구분하면서 근대화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근대화를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기술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제도적 혁신과 그 과정이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근대적 발전들이 종교의 소외화 세속화 전통적 가족개념의 몰락, 성도덕의 문란과 같은 현상을 동반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특히 신의 섭리보다 인간의 이성이 우위에 서는 이념적 혼란에 대해서는 단호한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흔히 현대화란 이름으로 통용되는 근대화의 사회문화적 요소를 무슬림 사회의 기술적, 경제적 발전은 이룩하는 필수 가결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슬람 복고주의 지도층은 무슬림 사회가 그들 자체의 방식으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도모해야 된다는 원론적인 입장 외에 근대화에 대한 뚜렷한 견해를 갖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부흥주의 이론가들은 다른 이슬람국가의 엘리트 집단과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외적 발전과정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다. 즉, 근대화의 논쟁이 과학, 기술, 발전이라는 외적측면을 벗어나 다원주의, 민족주의,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한 관용, 사고와 양심의 자유 등의 문제로 확대되면 그들은 매우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어진 사회경제적 여건에서 개혁성향 그룹의 절대다수는 종래와 같은 판에 박힌 듯한 이념적 해석과 사회적 저항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그리하여 근대화 과정의 다양한 변화의 요소들을 능동적이고 생산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풍요와 복지를 이룩하려는 목표에 동참하려 했다. 새로운 사회질서의 재편과 급격한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입지를 확보하려는 노력과 요구가 어느때보다도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이 이슬람의 화려한 과거를 복구하고 이슬람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강화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사회에서 무슬림으로서의 삶을 확보하려는 다수 대중의 민의의 수렴으로 앞으로도 강도 높게 지속될 것이다.
다만 일부 이슬람 세력들은 급진주의적 양상을 띄면서 서구가 빚어낸 배신과 약탈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렬한 대응을 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흔히 이슬람 원리주의자로 지칭되는 이들 부류는 전체 이슬람 세계에서 본다면 극히 일부이고 이런 방식의 투쟁을 바라보는 이슬람 대중의 반응도 냉담한 편이다. 그러나 이런 이슬람 원리주의세력의 발호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은 서구와 결탁하여 지배층의 이익보전에만 급급하는 부패한 세속정권과 복리민복이라는 기본적인 정책의 실패,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는 이슬람 가치관의 타락에 대한 반발이고, 힘으로 지배하는 서양의 제국주의자들의 논리에 순응하지 못하는 자의식 강한 무슬림들의 응어리의 표출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종교적 충돌이 아니라 정치적 충돌이자 투쟁이라는 것이다.

1) 이슬람권에서는 서구에 대한 태도에 따라 이슬람 부흥/개혁운동을 '신앙부흥주의'(Revitalism), 세칭 '이슬람 원리주의'라는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은 '종교분리주의'(Secularism)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2) 이하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손주영·김상태 편, [중동의 새로운 이해], 오름, 2000을 참고.
주제어
평화 국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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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세습 김정일 김정은 대표자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