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2 가을. 1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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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시대, 속삭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올랜도 파이지스, 『속삭이는 사회』 (전편)

장명호 | 조직국장
 

1. 들어가며

 
 
올랜도 파이지스의 『속삭이는 사회』는 소련, 특히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개인과 가족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면을 살펴봄으로써 스탈린 체제를 탐구하는 책이다. 파이지스의 저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해볼만 하다. 우선 구술사 연구 방식을 통해 평범한 소련 사람들을 책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파이지스는 천 명이 넘는 사람과 인터뷰를 진행하여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발한 후, 사회주의 건설이 이루어지던 시기 민중의 삶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책에 담아냈다. 동시에 러시아 현대사 전공자로서 스탈린 통치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비판을 녹여냈다. 파이지스의 『속삭이는 사회』는 구술 연구를 통한 생생한 정보 전달과 소련 사회에 대한 통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성공적으로 잡아낸 역작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닌 『속삭이는 사회』가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시사하는 바는 심대하다.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이라는 실험을 수행했던 소련의 경험을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자유로운 생산자의 연합’이라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었던 공산주의 운동은 왜 이상과 달리 반인권적이고 반민주적인 억압적 체제로 치달았는가. 

『속삭이는 사회』의 주인공은 1920-20년대 강제집단화와 대숙청이란 거대한 충격, 참혹한 비극을 겪은 인물들이다. 예를 들어, 대숙청으로 1937년과 1938년 단 두 해 동안 체포된 사람의 절반 이상이 총살을 당했는데, 그 수가 68만여 명에 이른다. 어떻게 공산주의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소련에서 이런 비극이 발생할 수 있었는가. 비극의 당사자와 그 가족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사람, 방관한 사람, 체념한 사람은 왜 그런 태도를 보였는가. 이 모든 과정은 소련 사회에 어떤 상흔을 남겼는가. 우리는 『속삭이는 사회』를 통해서 이러한 질문을 해명하는 길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소개는 두 편으로 나뉘어 연재될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저자가 구술과 자료를 정리해 생생하게 살려낸 대표적인 인물과 가족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사적인 개인,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당대를 살아가던 소련 시민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음 글에서는 스탈린 시대를 탐구하는 역사학자들 간에 광범위한 토론이 벌어졌던 주요 쟁점에 관한 저자의 종합적인 입장과 설명을 다룰 것이다. 
 
 

2. 속삭이는 사람들: 스탈린 통치 시기 소련 시민의 삶

 
 
『속삭이는 사회』는 1917~1956년 시기의 소련과 그 이후 시민들의 기억을 다루는 만큼, 그 내용이 방대하다. 다만 저자 스스로도 얘기하듯, 해당 시기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등장인물이 몇몇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이 책의 주인공이자 비극적 인물이기도 한 콘스탄틴 시모노프, 반(反)쿨라크(고용 노동을 사용하는 자본주의 농민) 투쟁의 실상과 수용소의 삶을 보여주는 골로빈 가족, 그리고 대숙청의 비극을 보여주는 퍄트니츠키 가족을 중심으로 책 내용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1) 콘스탄틴 시모노프: 망가진 이력 출신의 스탈린주의자

소련의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콘스탄틴 시모노프(1915~1979년)는 스탈린 상과 레닌 상을 수차례 받았으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은 소련 주류 문단의 거장이었다. 소련 사회의 최고 엘리트로서 체제의 적극적인 협력자였던 것이다. 동시에 시모노프 역시 스탈린 통치 시기를 살아가며 체제에 순응했던 수많은 시민 중 하나로서 도덕적 갈등과 딜레마를 경험하기도 했다. 시모노프의 삶을 보여주는 몇 가지 장면을 통해 스탈린 통치 시기 소련 시민들의 삶을 확인해보자.
 

장면#1. 망가진 이력: 귀족 어머니, 군인 아버지

콘스탄틴 시모노프는 소비에트 체제에서 환영받을 수 없는 출신 성분을 갖고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몰락한 귀족인 오볼렌스키 가문의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차르의 장군이었던 미하일 시모노프였는데, 가족을 버리고 폴란드로 홀로 망명했다. 알렉산드라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친아버지 일을 아들에게 숨겼다. 어머니는 귀족이고 아버지는 차르의 장군이라는 시모노프의 출신 배경은, 혁명 이후 소련 사회에서 성공을 기대할 수 있기는커녕 수많은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는 ‘망가진 이력’이었다. 시모노프의 망가진 이력은 시모노프의 삶 내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혁명 이후 1918년 가을, 알렉산드라는 페트로그라드의 자기 아파트에서 쫓겨났다. 알렉산드라와 시모노프는 랴잔으로 이주했는데, 거기서 알렉산드라는 적군(赤軍)인 알렉산드르 이바니셰프와 결혼한다. 이바니셰프는 가족을 병영처럼 경영했는데, 가족 내 규율은 엄격했고 군사적이었다. 시모노프는 자연스럽게 군사적 가치관을 학습했으며, 이는 그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소비에트 정치 명령 체제를 받아들이는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어머니(와 그 귀족적 배경)로부터 물려받은 공익 정신과 계부로부터 물려받은 군사적 원칙(의무와 복종)의 영향을 받은 시모노프는 명령의 위계를 수용했다. 시모노프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가치관이라는 면에서 보면 소비에트적이지 않았지만, 지식인으로서 러시아를 위해 이곳에 남아 일하고 아들을 소비에트 아이로 키우는 것을 자신들의 책무로 여겼다고 한다.
 

장면#2.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스탈린주의자로 거듭나기

1929년, 14세의 콘스탄틴 시모노프는 공장학교에 다니기 위해 중등학교를 그만뒀다. 이는 소비에트 사회에서 자신의 발목을 잡는 망가진 이력을 끊어내고 프롤레타리아 정체성을 만들고자 했던 어린 시모노프의 발버둥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소련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는 프롤레타리아 자격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구지식인 가정 출신 아이들이 공장학교와 고등기술학교에 다녔다. 이들은 엔지니어나 기능공과 같은 전문직 정체성을 발전시켜, 망가진 이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공장학교의 분위기는 프롤레타리아적이었다. 학생들은 노동자 가족 출신이나 고아원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시모노프는 귀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프롤레타리아로 자신을 등록했다. 기존에 입던 반바지와 샌들은 버리고, 노동자 상의를 입고 앞챙이 있는 모자를 쓰면서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고자 노력했다.

공장학교에 입학한 시모노프는 선반공이 되는 기술을 배웠지만, 제조업 일에 재능이 없었다. 대신 꾸준히 공부하며 소비에트 대의를 위한 사회적 행동주의와 열정을 드러냈다. 그는 수많은 클럽 활동(젊은 연구자들의 모임, 독서 그룹, 학교 편집부 등)을 했는데, 이는 시모노프가 스탈린주의자로 거듭나는 첫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31년, 시모노프의 계부가 체포됐다. 그는 또다시 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던 아파트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당시의 시모노프는 계부가 오해와 실수로 체포됐다고 추정했다.(“나는 다른 사람들은 뭔가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고 또 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을 아버지와 연결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구분은 시모노프뿐만 아니라 당대 수많은 사람들이 소련의 사법 체계를 신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시모노프는 소비에트 체제를 의심하지 않았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 저자는 시모노프가 계부의 체포를 겪으며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는 확신을 굳혔을 것이라 추측한다.
 

장면#3. 소비에트 권력에 헌신하는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의 개조

콘스탄틴 시모노프는 백해 운하와 관련한 작품 활동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백해 운하의 선전에 고무된 시모노프는 형벌 노동자 개조에 관한 시들을 썼고, 그중 하나에서 발췌한 구절이 1933년 젊은 소련 작가들의 시 모음집에 실렸다. 1934년 그는 노동수용소를 찬양하는 시 모음집을 위해 백해 운하를 방문했다. 여기서 시모노프는 ‘나쁜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상습범을 5개년 계획의 건설자로 개조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학교’로 백해 운하 사업을 인식했다.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자신을 개조하는 중이던 시모노프에게 백해 운하 사업이 보여준 페레코프카(소비에트 인간의 틀에 맞지 않는 인간들을 개조하는 일)는 영감을 주었다. 개조가 “과거를 묻고 새로운 길로 매진할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시모노프는 자신과 같은 망가진 이력을 가진 사람들도 과거 전력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위안을 얻었다. 

실제로 백해 운하에서 돌아온 뒤 시모노프는 두 번째로 콤소몰(공산주의 청년 정치조직) 가입(1934년)을 ‘권고 받아’ 신청했다. 계부가 체포된  사실로 인해 신청을 철회하라는 권고를 받았던 첫 번째 가입 신청(1931년)으로부터 3년 만에 대우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또 그는 고리키 문학대학에도 지원할 수 있었다. 시모노프는 문학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귀족 출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문학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고, 오로지 정치와 역사에만 관심을 가졌을 것”), 망가진 이력 때문에 문학의 길을 걸었다. 그는 대학에서 정치계의 윗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는 법을 배우게 된다. 소비에트 권력에 헌신하는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의 개조가 본격 시작된 것이다.
 

장면#4. 대숙청 시기: 도덕적 기준의 재조정

비록 정치적 견해 차이가 있었지만, 콘스탄틴 시모노프가 가장 좋아했던 이모 소냐가 1937년 대숙청 기간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당시의 시모노프는 이모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지만, 동시에 이모의 운명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했다.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라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낡은 사회의 해체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당시 유행했듯, 시모노프 역시 그러한 경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시모노프는 점점 믿지 않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신념 체계를 굳건히 하는 방식으로 모든 다양한 징후를 해석했다.

시모노프 역시 대숙청 시기에 도덕적 곤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재조정했다. 1939년 영향력 있는 작가였던 미하일 콜초프가 체포됐을 때, 시모노프는 콜초프가 첩자라는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의심을 억눌렀다. 그는 스탈린 체제에 부응하기 위해 내면에서 타협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시모노프는 정보원은 아니었지만, 당국으로부터 정보원 활동을 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1937년, 시모노프는 작가동맹 서기인 블라디미르 스타프스키로부터 ‘반혁명적 시’를 유포하고 있다고 추궁받기도 했는데, 한 젊은 교사와 대화에서 니콜라이 구밀료프(1921년에 반혁명분자로 총살당한 시인)의 시를 몇 편 좋아한다고 대답했던 것이 문제였다. 교사는 시모노프의 귀족 출신과 반혁명적 시 유포를 연결지어 고발한 것으로 보였다. 시모노프는 이때 큰 공포를 느꼈다.
공포를 느낀 시모노프 역시 당시의 여느 소련 시민들처럼 대학의 숙청 모임에서 ‘적’들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돌마토프스키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제 시모노프는 고발을 넘어 좀 더 적극적으로 체제에 복무하는 행보를 보이기까지 했다. 대숙청 시절에 시모노프는 스탈린 숭배에 기여하는 시를 여러 편 발표했고, 스탈린 체제가 총애하는 시인으로 출세 가도를 달렸다. 「빙상 전투」(1938)라는 시로 명성과 인기를 얻은 시모노프는 작가동맹의 가장 젊은 회원이 됐다.
 

장면#5. 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스탈린주의자로 완성되다

콘스탄틴 시모노프는 전쟁 기간 군 신문 통신원으로 복무하며 시를 썼는데, 당시 연인 발렌티나를 그리며 쓴 연시 「나를 기다려줘요」로 스타덤에 오른다. 「나를 기다려줘요」는 전쟁 이전이라면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에 필수적인 ‘시민적 내용’이 없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을 작품이었다. 하지만 시모노프의 시는 전쟁터에 나온 병사들의 심금을 울렸다. 생존,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 등 수많은 병사와 민간인들의 보편적 희망과 감정을 개인의 목소리로 표현해냈기 때문에 시는 성공할 수 있었다.

시는 소련의 사기 유지 캠페인에서 강력한 무기로 사용됐다. 시가 표현하는 가족, 동지애, 사랑 등은 애국주의를 배양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이는 좀 더 광범위한 소련 민중의 연대 관념에 토대를 제공했다. 이후 시모노프는 1942년과 1943년에 스탈린상을 받는 등 스탈린의 총애를 받으며 정권에 복무하는 활동을 해나갔다. 시모노프는 모스크바의 신축 건물 내 고급 아파트를 부상으로 받았으며, 기사와 시를 쓰고 높은 보수를 받아 부자가 됐다.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자 크렘린에서 실질적 영향력이 있는 인물로 떠올랐음에도, 시모노프는 항상 자기 위치가 불확실하다고 느꼈다. 그런 시모노프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 그리고 의무 수행에 따라 사람이 평가되는 전쟁 시기는 행복한 때였다. 전쟁은 시모노프의 세계관 전체를 재형성했고, 그의 가치관은 군사적 기준에 바탕을 두게 됐다. 시모노프는 어떠한 전선도 마다하지 않았고, 1942년의 모든 주요 전선에서 기사를 송고했다. 또 체제가 자신에게 부여한 선전 역할도 충실히 수행했는데, 시모노프의 전쟁 기사는 스탈린에 대한 사랑을 촉진하고 적에 대한 증오를 드높이면서 사기와 규율을 강화하는 목적에 충실했다.

전쟁을 겪으며 그는 명실상부한 스탈린주의자가 되었다. 이제 시모노프는 스탈린을 삶의 중심에 두었고, 체제의 정치적, 군사적 위계 제도 안에 위치하면서 체제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당 지도부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시모노프는 스탈린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스탈린의 겉모습을 따라 하기도 했다. 

1945년 이후 시모노프는 스탈린이 총애하는 측근 지식인 그룹의 신뢰받는 당원이 되어 있었다. 1946년에는 작가동맹의 서기에 임명됐으며, 소련에서 가장 오래되고 명성 있는 문예 잡지 《노비 미르》의 편집인이 되기도 했다. 1950년에는 소련의 주요 문예 신문인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의 주필이 되어 스탈린의 지시를 개인적으로 받아 글을 쓰기도 했다.

정권에 충실히 복무하던 시모노프는, 스탈린의 이데올로기 담당 수장인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주도하여 예술계와 과학계의 반(反)소비에트 경향을 공식적으로 탄압한 ‘즈다노프시나’에 연루되며 억압 캠페인에 동참하게 된다. 또 유대인을 탄압했던 ‘반(反)코즈모폴리턴’ 운동에도 연루됐다. 시모노프는 처음에는 온건한 노선을 견지하고자 했지만, 강경파들로부터 코즈모폴리턴들을 보호하려 한다는 의심과 비난을 받자 결국 굴복한다. 시모노프는 자신이 신뢰하여 《노비 미르》로 불러들였던 보르샤고프스키를 포함해 유대인 평론가들과 거리를 두고, 1949년 작가동맹 총회에서 반애국적 그룹을 고발하는 연설을 했다.

시모노프는 반코즈모폴리턴 운동에 괴로워했지만, 스탈린 체제에서 길을 잃은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스탈린에 홀려 있던 시모노프는 스탈린에게 조금만 비판을 받아도 절망했다. 1948년 시모노프의 중편소설 『조국의 연기』가 스탈린이 후원하던 잡지 《문화와 생활》에서 공격을 받았다. 시모노프는 스탈린이 이 책을 싫어한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좋아했음에도) 책을 다시 출간하지 않기로 결심하기도 한다.

시모노프는 스탈린 체제의 억압 조치에 동참했지만, 종종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했고, 이는 서서히 시모노프를 망가뜨렸다. 38살의 시모노프는 중년의 남성처럼 늙어버렸으며, 손은 신경성 피부병으로 고통을 받았고, 폭음을 일삼았다.
 

장면#6. 스탈린 사후: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나기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었다. 시모노프는 스탈린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을 당시 “내 인생의 일부분이 끝났다. 새로운 미지의 어떤 것이 시작되었다”라고 회고했다. 시모노프는 스탈린의 업적을 기리는 시를 썼다.

시모노프는 개혁 정신을 포용하기 시작한 1956년까지는 여전히 스탈린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1953년에 시모노프를 지배한 감정은 “위대한 인물을 잃은 깊은 슬픔”이었고, 1954년에는 스탈린의 초상을 책상 위에 두는 등 자신의 스탈린주의 배경에 충실했다. 1955년에 출간한 시집에는 「스탈린에게 바치는 송시」를 넣었는데, 이 시에서 스탈린을 전체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 칭송하기도 했다. 시모노프는 자유주의적 해빙의 선두에 있던 작가들을 공격했다. 대표적으로 그는 《노비 미르》가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출간하지 않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빙이 확대되면서, 시모노프는 점차 모스크바 문단에서 고립됐다. 

시모노프는 1956년 제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고발한 후 천천히 자기 안에서 스탈린을 지우기 시작했다. 시모노프는 해빙의 개혁주의 분위기에 조심스럽게 반응했다. 시모노프의 탈스탈린화는 매우 더디게 진행됐다. 시모노프는 전쟁 소설 『산 자와 죽은 자』(1959)를 집필하며 전쟁이 제기한 도덕적 문제(체제의 끔찍한 인명 낭비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시모노프는 여기서 군 지도부 숙청이 불러온 대재앙, 개전 첫 몇 주 동안 나라를 압도한 무질서와 혼란, 불신의 분위기와 장교들의 무능력 등 그간 공적 담론에서 배제되었던 많은 전쟁 관련 문제를 다루었다. 스탈린의 지도력을 승리의 결정적 요인으로 꼽던 시모노프는 이 소설에서 스탈린을 재평가한다. 즉 스탈린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인민들이 승리를 이끌었다는 인민주의적 관념을 채택한다.

흐루쇼프 시기에 시모노프는 온건한 보수주의자였는데, 자유주의 개혁가들 눈에는 스탈린주의자로, 스탈린주의자들에게는 자유주의자로 보였다. 시모노프는 스탈린의 잘못을 인정했고 제한된 범위에서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나, 스탈린이 창출한 소비에트 체제를 인류 진보를 위한 기반으로 보고 계속 옹호했다. 1964년 브레즈네프가 권력을 잡으면서 시모노프의 입장은 공적으로 지지를 받게 됐고, 1960년대 중반부터 시모노프는 소련 기성 문단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당시 브레즈네프 지도부는 정권의 정당화 수단으로 전승을 이용하고자 했으나, 시모노프는 이에 완전히 부합하는 작품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시모노프의 작품들은 출간이 금지되거나 검열을 거쳐 출간됐다. 특히 병사들의 회고와 증언을 중심으로 만든 영화-시 「병사는 떠났다」(1975)는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생생히 보여주는 리얼리즘과 인민주의적 시각으로 인해 군부와 마찰을 빚었다. 검열과 싸우면서, 시모노프는 전쟁과 스탈린 체제의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말년에 시모노프는 스탈린 체제에서 수행한 역할에 점점 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는 속죄하듯이 스탈린 시기 검열당했거나 억압받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후원했다. 시모노프의 변화는 1966년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출판한 것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이 작품은 모스크바에 나타난 악마가 장난을 쳐서 모든 사람이 스스로 최악의 모습을 드러내게 만든다는 사회 풍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스탈린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출간이 불가능했고, 1940년 작가가 사망하며 빛을 보지 못했던 원고가 시모노프의 도움으로 출판될 수 있었다. 문학계에 해빙이 막을 내리고 억압적 분위기가 다시 강화되었던 브레즈네프 시기에 불가코프의 소설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작품은 대성공을 거뒀다.

시모노프는 탄압받은 예술과 문학을 구조하는 데 나섬으로써 소비에트 권력 기구의 자유주의 일파와 동맹을 맺었다. 시모노프는 친서방적이고 반소비에트적인 반체제 인사라는 의미에서 자유주의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브레즈네프 시대의 많은 공산주의 개혁가들처럼 소비에트 체제의 정치와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자는 구상에는 귀를 기울였다. 소련이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진압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것 역시 시모노프의 급진화에 중요한 계기였다.

시모노프는 말년에 자기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스스로에 대해 혹평을 했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 희곡과 회고록 등을 집필하며 자신을 심판했던 시모노프는 1979년 8월 28일 생을 마감했다.
 

2) 골로빈 가족: 농업 집단화와 수용소 생활

장면#1. 쿨라크로 낙인 찍히다

안토니나 골로비나는 1923년 모스크바에서 북동부로 800km 떨어진 오부호보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골로빈 가족은 항상 오부호보에서 살아왔고, 오부호보는 가족과 친족 관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지역 사회였다.(1929년 마을의 59가구 중 20가구가 골로빈 집안이었다) 내전 기간 볼셰비키는 오부호보의 농민들을 쿨라크와 빈농으로 나누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아버지 니콜라이는 근면한 농민이었으며, 오부호보에서 꽤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후 니콜라이는 오부호보 농민 공동체(미르)의 지도자가 됐다.

1930년 오부호보는 정부의 명령대로 집단농장(콜호스)을 조직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양분됐다. 농민 대부분은 몇 세대에 걸쳐 일군 가족 농장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재산, 말, 암소, 농기구를 집단농장에서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오부호보 사람들은 북부의 다른 마을들에서 폭력적으로 집단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겁을 먹었다. 군인들이 농민들을 강제로 콜호스에 가입시키고 있으며, 대량 체포와 추방이 자행되고 있고, 농민들이 마을에서 도망치고 집단화를 피하기 위해 자기 가축을 도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니콜라이는 “우리 농장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으나, 콜호스에서는 다시 농노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부호보에서는 전투적인 젊은 콤소몰 활동가들이 집단화 운동을 주도했다. 오부호보 콤소몰의 주축은 십여 명의 10대였는데, 지도자 콜랴 쿠지민은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18살이었다. 어릴 때 콜랴는 가족이 시킨 심부름으로 다른 농장에 식량이나 물건을 빌리러 다녔고, 니콜라이는 콜랴를 동정하여 자신의 가죽 작업장에서 일하도록 일거리를 주기도 했었다. 콜랴는 콤소몰에 가입하여 골로빈 가에 등을 돌린 1927년까지 몇 년 동안 그곳에서 일했다.

콤소몰 활동가들은 골로빈 가와 같이 오부호보에서 가장 부유한 농민들을 비난했다. 콤소몰은 농민들을 빈농, 중농, 부농이라는 상이한 계급으로 분류했고, 그 명단을 학교 밖 게시판에 내걸었다. 1929년 봄에 니콜라이는 오부호보 소비에트에서 쫓겨났고, ‘가죽 가공 기업의 자본주의적 소유자’로서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골로빈 가에는 800루블의 무거운 세금이 부과됐고,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니콜라이는 형제들과 레닌그라드의 건축 현장에서 일하기까지 했다. 

1930년 봄 니콜라이는 귀향했고, 콤소몰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어느 날 밤 콜랴와 그 추종자들은 술에 취해 골로빈 가에 총을 쏴댔고, 니콜라이의 형 이반이 머리에 총탄을 맞아 죽었다. 사건 이후에도 갈등은 이어졌다. 결국 1930년 8월 2일 니콜라이는 체포됐고,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솔로베츠키 수용소로 보내졌다. 니콜라이가 체포되고 몇 주 뒤 오부호보의 농민들은 마을 회의에 동원됐다. 회의에서는 콜호스 설립을 위해 가족 농장을 폐쇄하고 모든 토지와 농기구, 가축을 넘겨준다는 결의안이 통과됐다. 
 

장면#2. 농업 집단화 이후: 특별 정착촌에서의 삶

골로빈 가는 재산과 농기구, 가축을 집단농장에 빼앗겼다. 골로빈 집안은 체포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으나, 대부분 경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당하거나 굴라크(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니콜라이의 직계 가족은 완전히 해체됐다. 형제 두 명은 추방됐고, 어머니는 가까운 도시로 도피했다. 장남은 체포되어 백해 운하에서 굴라크 노동자로 일하게 됐다. 다른 자녀 마리야와 이반은 체포를 피해 도망쳤다. 아내와 가장 어린 자녀 3명은 집단농장에 가입하려 했으나 쿨라크라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격리됐다.

이들에게는 결국 추방 명령이 내려왔고, 시베리아로 유형당했다. 긴 여행에 필요한 옷가지를 챙기는 데 주어진 시간은 고작 한 시간이었다. 그들은 시베리아 알타이 지역의 쿨라크 특별 정착촌인 샬티르로 이송됐고, 거기서 3년을 보냈다. 특별 정착촌은 원시적이고 격리된 수용소였다. 샬티르는 강둑을 따라 지은 다섯 동의 2층짜리 목조 바라크(막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좁은 공간에 1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살았다. 남자들은 근처의 벌목 수용소에서 나무를 베다가 일요일에 돌아왔는데, 아직 15살밖에 안된 알렉세이도 나무 베는 일을 했다.

샬티르에서의 첫 겨울에 폭설로 바라크 두 동이 무너졌기에 일부 유형자들은 얼어붙은 땅에 토굴을 파고 살아야 했다. 마을이 눈으로 막혀 고립되면서 식량이 보급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집에서 가져온 양식으로 버텨야 했다. 수백 명이 티푸스로 쓰러졌고, 의약품이 없었기에 이들은 바라크 한 동에 격리된 채 방치됐다. 많은 사람이 배고픔, 추위, 티푸스로 죽어 나갔다. 두 번째 겨울은 더 끔찍했다. 식량을 전혀 받지 못한 유형자들은 나무 껍질과 감자 줄기의 썩은 뿌리를 갈아서 케이크를 만들어 먹었다. 사람들이 배가 부풀어 올랐고 많은 이들이 죽었다. 골로빈 가족은 예브도키야가 읽고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우편물을 모아 배달하는 일을 하게 되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장면#3. 재결합한 가족

1933년 2월, 니콜라이는 솔로베츠키 노동수용소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샬티르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과 합치면 다시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받고 페스토보(전 쿨라크들과 그 가족들이 살던 도시)로 갔다. 니콜라이는 페스토보에서 건설 현장 목수 일을 시작했고, 작업반 지도자가 되어 작은 나무 오두막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차츰 가족이 다시 모였다. 백해 운하로 끌려갔던 아들 니콜라이, 그리고 오부호보에서 도주했던 이반과 마리야가 합류했다. 마리야는 쿨라크의 딸로 도망을 다닌 3년 동안 이름을 바꾸고 볼셰비키 노동자와 결혼했는데, 남편은 마리야의 정체를 알고서는 관계를 끊어버렸다.

니콜라이는 엔카베데(내무부이자 최고 정보기관)에 거듭 청원서를 보내 마침내 아내와 어린 세 자녀와 재결합할 수 있었다. 작은 방 한 칸짜리 집이었으나, 수용소와 특별 정착촌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재결합한 가족들에게는 마치 낙원과도 같았다.
 

장면#4. 쿨라크의 딸로 살아가기

안토니나 골로비나는 아버지가 있는 페스토보로 합류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나 자신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안토니나는 학교에서 ‘쿨라크의 딸’이라고 비웃음과 학대를 당했다. 선생들마저 다른 아이들 앞에서 “인민의 적, 비열한 쿨라크!”라고 안토니나를 질책했다. 부당함에 분노했지만, 안토니나는 쿨라크 출신에 대한 깊은 두려움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쿨라크 출신이라는 오명은 안토니나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계급이 전부인 사회에서 안토니나와 같이 계급의 적으로 낙인 찍힌 사람들은 고등교육과 직업 등에서 배제됐고, 박해와 체포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안토니나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열심히 공부한 그녀는 학교 우수 학생 명단에 몇 번이고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비록 쿨라크 출신이라는 이유로 피오네르단(공산주의 아동 정치조직)에는 가입하지 못했지만, 1939년에는 콤소몰 가입이 허용됐다. 자신감이 쌓이고 야심이 커지면서 안토니나는 과거를 용인받으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새 이력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안토니나는 질문서를 채워야 할 때마다 출신을 속이기 시작했고, 10대 막바지부터는 친구, 심지어 연인이나 가족에게조차 자신의 가족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다. 전쟁 시기는 안토니나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1941년에 그녀는 레닌그라드의 의과대학에 지원했으나, 고등학교 성적이 매우 좋았음에도 (아마 쿨라크 출신 때문에) 입학을 거부당했다. 1943년에는 스베르들로프스크대학에 지원했는데, 의사가 필요한 대학이 의학부 입학 규정을 완화하면서 쿨라크 출신인 안토니나 역시 입학할 수 있었다. 안토니나는 “내 생에 처음으로 실력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1944년 1월에는 레닌그라드 소아과학대학에 지원했다. 하지만 안토니나는 레닌그라드에 거주할 여권도 없었고, 쿨라크 출신이라는 배경도 여전히 문제였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포위 때문에 고아가 된, 병든 수만 명의 아이를 돌봐줄 소아과 의사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안토니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권이 없었기에 학생으로 정식 등록할 수 없었고, 장학금도 받을 수 없었다. 정식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도,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1945년에야 대학 학장 덕분에 여권을 제공받고, 대학에 정식 등록할 수 있었다. 신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안토니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장면#5. 용서하기, 그리고 화해하기

1953년, 집단화 운동 당시 골로빈 가족을 쿨라크로 고발했던 콜랴 쿠지민은 골로빈 가족이 이주했던 바로 그 페스토보로 이주했다. 스탈린이 죽은 후 콜랴는 골로빈 가족을 찾아가 자신이 그들을 고발하고 니콜라이의 형 이반을 살해한 것에 대해서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놀랍게도 니콜라이 부부는 콜랴를 용서하고, 심지어 페스토보로 와서 함께 살자고 권하기까지 했다. 안토니나는 이의를 제기했으나, 신앙심이 깊었던 예브도키야는 “진정한 기독교인은 적을 용서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콜랴는 골로빈네 바로 옆집에 정착했고, 지난날 자신의 죄를 반성하며 골로빈 가족을 위해 심부름을 자처했다. 콜랴는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했다.

놀랍게도 당시 많은 이들이 자신을 밀고한 사람들을 용서했다. 골로빈 가족의 경우처럼 신앙심에 뿌리를 둔 용서는 드물었다. 보통은 굴라크 체제의 감옥과 수용소를 경험한 사람들이 널리 공유했던 모종의 이해에서 비롯된 용서가 많았다. 그들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엔카베데의 압력을 받으면 누구든 정보원이 될 수 있었음을 이해했다. 그들의 용서는 “체제가 사람들에게 저질렀던 부끄러운 일들을 깨달은 데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안토니나는 거의 평생을 망가진 이력이라는 비밀을 안고 살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 시베리아로 유형당한 지 무려 60여 년이 지난 1990년대에야 딸에게 자신의 쿨라크 배경을 얘기했다. 안토니나는 함께 20년 이상씩 산 두 남편에게도 가족사를 숨겼다. 부부는 결혼하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서로 거의 말하지 않았다. 한 발 더 나아가 안토니나는 1961년 당원이 되기까지 했는데, 당의 이데올로기를 믿어서가 아니라 입당하면 의심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토니나만 가족에게 비밀을 안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두 남편 역시 억압받은 가족 출신이었다. 그들은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놓고 자유로워졌으나, 혹시나 스탈린주의자들이 돌아왔을 때 딸이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안전하리라 생각하여 딸에게는 자신들의 출신을 숨기기로 했다. 하지만 안토니나는 점차 두려움을 극복했고, 딸에게 자신의 쿨라크 출신을 밝힐 용기를 냈다. 용기를 낸 계기는 그녀가 자신이 유형 생활을 했던 특별 정착촌 샬티르를 방문했을 때였다. 샬티르에서 안토니나는 스스로를 쿨라크의 딸이라고 말하는 여자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안토니나는 이 말을 들었던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온몸이 떨렸다. 나는 누군가가 자신은 쿨라크의 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 여자처럼 자부심을 느끼며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나로서는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생 동안 나는 쿨라크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노력해 왔다. 그 여자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이 듣지는 않았는지 주위를 살펴보았다.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누군가 들은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살폈는가? 두려울 것이 뭐가 있는가? 갑자기 나는 내 두려움이 부끄러워졌다. 그런 다음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쿨라크의 딸이에요.” 나는 그때 처음으로 큰 소리로 그 말을 했다. 비록 머릿속에서 천 번이나 속삭여왔지만 말이다. 주위에는 내 말을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황량한 도로에 혼자였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마침내 내가 말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강둑으로 내려가서 강물로 몸을 씻었다. 그런 다음 우리 부모님을 위해 기도했다.”
 

3) 퍄트니츠키 가족: 대숙청이라는 비극과 가족의 해체

장면#1. 인민의 적이 된 고참 볼셰비키

오시프 퍄트니츠키와 율리야 퍄트니츠카야는 충직한 볼셰비키 부부였다. 남편인 오시프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당 때부터 당원이었으며, 레닌이 가장 신뢰하는 동지인 고참 볼셰비키였다. 레닌의 부인 크루프스카야는 퍄트니츠키를 “당에 철저히 헌신하고 당을 위해서만 사는 전형적인 직업 혁명가”로 묘사했다. 오시프는 1917년 이전에는 러시아와 유럽을 오가며 불법 책자를 몰래 들여오는 책무를 맡았고, 율리야와 결혼할 때는 모스크바 당 중앙위원회 서기였다. 그는 코민테른에서 조직부를 운영하며 사실상 코민테른의 지도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율리야 역시 헌신적인 볼셰비키였으며, 내전 당시 볼셰비키에 가담해 적군의 첩자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37년 7월 7일 오시프가 체포됐다. 오시프는 스탈린에게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받았고, “코민테른 내 트로츠키주의자와 우파의 파시스트 첩자 조직”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하지만 오시프의 아들들에 따르면, 오시프가 체포된 진짜 이유는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의 연설 때문이었다. 엔카베데의 폭주에 충격을 받은 오시프는 엔카베데의 업무를 감독할 특별 당 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 몇몇 당 지도자들이 오시프에게 발언을 취소해 목숨을 보전하라고 설득했지만, 오시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당의 단결과 도덕적 순결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필요하다면 자녀와 부인의 시신도 밟고 설 태세가 되어 있었다. 7월 5일 오시프는 당에서 축출됐고, 7월 7일 엔카베데 수장 예조프가 오시프를 직접 체포했다.

체포에 직면했을 때 볼셰비키 엘리트들은 놀라울 정도로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은 당의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았기 때문에 당 앞에서 결백을 입증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강했다. 자신이 결백하다고 믿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은 결백하므로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공산주의 신념에 충실한 나머지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겨냥한 혐의를 자백할 태세가 되어 있는 볼셰비키도 있었다. 오시프도 이에 속했다. 그는 체포되기 직전에 당을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즐겁게 감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체포된 이들 중 과반수가 돌아오지 못했고, 오시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면#2. 인민의 적의 가족

율리야는 어떻게 남편이 인민의 적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율리야는 20년 동안이나 사랑해온 남편을 인민의 적이라고 하는 소련 언론을 믿어야 하는지, 그렇다면 함께 아이를 낳고 키우며 산 남자는 도대체 누구였는지 혼란에 빠졌다. 율리야는 “퍄트니츠키는 누구인가?”라고 일기에 적었다. 율리야는 인민의 적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종종 일기에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언급했고, 소련 법정의 정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순진했던 율리야는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막 16살이 됐고, 콤소몰에서 이름을 떨치고 싶었던 큰아들 이고리는 콤소몰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이고리 역시 아버지에 대한 분노, 아버지를 잃은 슬픔, 의기소침한 마음과 수치심 속에서 혼란을 겪었다. 동생 블라디미르는 적군에 들어가 성공하고 싶은 꿈을 망쳤다고 아버지를 비난했다. 스탈린의 비서 아들이자 블라디미르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예브게니 로기노프는 그들 집에 놀러 오는 것을 그만두었다. 블라디미르 역시 학교에서 인민의 적이라고 놀림 받았다. 

대숙청 시기에 남편을 잃은 많은 아내들처럼, 율리야는 생존을 위한 일상적 투쟁에 내몰렸다. 율리야는 적은 봉급으로 두 아들, 나이 든 친정 아버지와 계모, 백수인 이복 여동생을 먹여 살려야 했다. 율리야 가족은 집에서 퇴거당해 더 작은 아파트로 쫓겨났고, 율리야는 절망에 빠졌다. 그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으며, 남편에 대한 의심은 점점 더 커져갔다.

율리야는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찾고자 했으나, 그 어디에서도 인민의 적의 아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당내의 동지들, 그리고 직장 동료들 역시 율리야를 외면했다. 한 고참 볼셰비키는 율리야에게 “직접 당국에, 예조프에게 가세요. 동지들에게 아무 부탁도 하지 마세요.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고, 또 도와줄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율리야는 일기에 “그러나 나는 아주 작은 관심이나 충고라도 좋으니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라고 썼다.
 

장면#3. 해체된 가족

1938년 2월 9일 이고리 역시 체포되어 부티르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율리야는 남편이 유죄일 가능성은 받아들였으나, 이고리가 범죄에 연루됐을 가능성까지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율리야는 아들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남편을 부인하기로 결심했다. 율리야는 모스크바의 검찰로부터 오시프가 반국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이제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검사는 율리야에게 새 삶을 시작할 것을 권했고, 율리야는 엔카베데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숙청 당시 수많은 아내들이 체포된 남편을 부인했다. 배우자가 인민의 적이라고 생각한 경우도 있었지만, 남편을 부인해야 살아남기가 더 수월하고 가족을 보호할 수 있어서 그렇게 한 경우가 많았다. 국가는 공개적으로 인민의 적의 아내들에게 남편을 부인하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율리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고리는 결국 반소비에트 선동이라는 혐의로 노동수용소 5년형을 선고받는다. 율리야 자신도 1938년 10월 27일 체포됐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반정부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칸달락샤 노동수용소로 보내졌고, 아들 블라디미르가 동행했다. 율리야는 수용소 인근 강의 수력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블라디미르는 수용소를 탈출하여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자신에게 등을 돌렸던 친구 예브게니 로기노프의 집에서 지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예브게니의 아버지가 곤경에 빠지자 블라디미르는 모스크바 소비에트에 자진 출두했고,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장면#4. 비극적 죽음

1939년 3월 율리야는 수용소 동료들에게 고발당했다. 반소비에트 선동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율리야는 카자흐스탄 카라간다 노동수용소에서 5년 동안 구금당하는 형에 처해졌다. 마침 아들 이고리도 카라간다 수용소에서 복역중이었고, 둘이 잠깐 만나기도 하는 등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율리야는 육체적으로 허약했고 정신적으로 불안했다. 도저히 수용소 생활을 견딜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는 수용소 사령관의 성적 요구를 거절했는데, 이로 인해 댐을 건설하는 육체노동 현장으로 보내지면서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고리는 노동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가족의 오랜 지인인 지나라는 여성을 만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듣게 된다. 1958년에 지나는 율리야가 수용소 병원에서 죽었고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얘기해주었다. 하지만 1986년 지나는 다시 한번 이고리를 방문해 율리야의 끔찍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얘기해준다.

1940년 12월 지나는 카라간다 수용소로 율리야를 찾으러 갔다. 율리야는 초원의 양 우리 안 양 떼 틈에서 땅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죽어 가고 있었고, 온몸이 열로 부풀어 올라있었다. 병이 든 율리야는 양 우리에 버려졌고, 어느 누구도 그녀를 방문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율리야는 지나에게 이고리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과,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말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죽었다. 그녀는 죽은 자리에 그대로 묻혔다.
 
 

3. 나가며

 
 
세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이면서도 당대 모든 소련 시민들이 겪은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콘스탄틴 시모노프는 개인의 출신성분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소련 사회에서 망가진 이력을 가졌지만 성공하고 싶었던 구시대 엘리트들의 모습을 대표한다. 시모노프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소련 사회에서 배제되고 싶지 않았다. 성공을 원했던 그는 공장학교에 진학하여 프롤레타리아 정체성을 형성하려고 시도하기도 하고, 시를 써서 스탈린과 그 체제를 찬양하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마침내 소련 엘리트에 편입된 그는 스탈린의 총애를 받으며 정권에 한껏 복무한다.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동료 작가들을 탄압하기도 하던 시모노프는 스탈린 사후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후회와 반성의 나날을 살았다.

골로빈 가족은 폭력적으로 진행된 농업 집단화의 희생양이 된 농민들의 모습을 대표한다. 근면한 농민이었던 니콜라이 골로빈은 일순간에 쿨라크로 몰려 재산을 빼앗기고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가족들 역시 노동 수용소나 특별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마을에서 추방되거나, 도피하는 등 뿔뿔이 흩어진다. 해체된 가족은 운 좋게 다시 함께할 수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상처와 함께 쿨라크라는 낙인이 남았다. 망가진 이력을 갖게 된 안토니나 골로비나는 의사로서의 성공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일평생 자신의 비밀을 안고 불안에 떨며 살아갔다.

퍄트니츠키 가족은 1937-1938년 기간 자행된 대숙청의 비극과 가족의 해체를 대표한다. 수많은 사람이 제대로 된 조사와 재판 없이 인민의 적으로 낙인 찍혀 총살당했다. 오시프 역시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고참 볼셰비키 중 하나였다. 그 가족들은 생계가 어려워졌고, 동료와 친구에게 마저 외면받았다. 가족은 집과 꿈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신뢰마저 잃었으며, 결국에는 수용소와 고아원으로 뿔뿔이 흩어지며 해체되고 만다.

파이지스는 스탈린 통치 시기 소련 사회가 ‘속삭이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한다. 그에 따르면 ‘속삭이는 사람’에 해당하는 러시아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누가 엿들을까 두려워 소곤거리는 사람’(shepchushchii)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 몰래 당국에 고자질하거나 귓속말을 하는 사람’(sheptun)이다. 스탈린 시대의 소련 시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든 체제에 수동적으로 순응하는 소곤거리는 사람이나, 적극적으로 복무하는 고자질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신뢰와 상호작용이 존재하기 어려웠고, 형해화된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고독감을 느꼈다.

다음 글에서는 스탈린 시대를 탐구하는 역사학자들 간에 광범위한 토론이 벌어졌던 주요 쟁점이 무엇이었는지, 구술사 연구를 통해 저자가 어떤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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