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2 겨울. 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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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시대, 속삭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올랜도 파이지스, 『속삭이는 사회』 (후편)

장명호 | 조직국장

1. 들어가며

 
 
『속삭이는 사회』 책 소개 전편에서는 콘스탄틴 시모노프, 골로빈 가족, 퍄트니츠키 가족을 중심으로, 소련 시기에 특히 농업 집단화와 굴라크(노동수용소), 대숙청을 경험하며 속삭이는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소련 시민들의 삶을 확인했다. 억압적 체제하에서 소련 시민들은 체제에 수동적으로 순응하여 소곤거리는 사람이 되거나, 체제에 적극적으로 복무하며 고자질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편에서 소련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을 중심으로 당시의 사회를 살펴봤다면, 후편에서는 스탈린 시대를 다루는 역사학 연구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주요 쟁점과 저자의 평가는 무엇인지 다룬다.

저자는 스탈린 이후 혁명이 굴절하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특히 그 속에서 나타나는 개인들의 비극을 다루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이러한 비극을 초래한 독재, 폭력의 문제를 단순히 스탈린 개인의 잘못으로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소련 사회가 역사적 시기마다 마주했던 곤란과 그때마다 취했던 선택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함축되어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논점을 꼽아 보았다. ‘신경제정책의 중단을 어떻게 볼 것인가?’, ‘농업 집단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숙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전시의 국민적인 단합이 소련을 승리로 이끌었는가?’, ‘전후 스탈린의 개혁 거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스탈린 사후에도 소련 시민들은 왜 오래도록 침묵했는가?’ 
 
 
 

2. 신경제정책의 중단: 스탈린주의의 전조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 이하 ‘네프’)은 1921년 레닌이 도입했다. 전쟁, 혁명, 내전을 겪으며 소련은 경제적 파탄 상황에 직면했고,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전시 공산주의 경제정책에서 네프로의 전환이 나타났다. 내전 시기 시행됐던 식량 징발이 중단됐고, 농민들이 20%의 세금을 현물로 지급하면 여분의 농산물을 자유롭게 팔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처럼 네프는 전시 공산주의 시기에 대한 평가 속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위한 일종의 양보 조치이자 경제정책으로서 시작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레닌은 네프를 사회주의 이행기의 필연적인 전략으로 사고하기에 이른다. 즉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의 확대만으로는 사회주의로 갈 수 없고, 새로운 생산관계를 조직해낼 수 있는 대중들의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레닌의 구상을 당시 대다수 볼셰비키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즉 네프는 어쩔 수 없는 정치적, 경제적 양보 조치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1927년에 반 신경제정책 운동이 개시되며 네프는 결국 붕괴했다. 

저자는 이 과정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해 설명한다. 실제로 1920년대 소련사 연구에서는 네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핵심 쟁점이다. 기존 연구 경향은 네프를 1917~1921년의 혁명과 내전, 그리고 1930년대 ‘스탈린 혁명’ 사이에 있었던 ‘숨 쉴 틈’으로 규정했다. 즉 전시 공산주의와 스탈린 혁명 사이에 있었던 혁명의 휴지기라는 의미다. 한편, 부하린의 전기를 쓰기도 했던 미국의 학자 스티븐 코헨은 네프를 전시 공산주의의 가혹함과 스탈린주의의 공포에 대한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 간주했다. 네프는 ‘숨 쉴 틈’이 아니라, 점진적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성취할 수 있는 영구적 모델이라는 것이다. 홀란드 헌터와 로버트 앨런은 소련이 네프를 유지했어도 1930년대 중반까지 비슷한 수준의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계산하기도 했다.  

저자는 네프의 성격을 규명하기보다는, 네프가 중단된 맥락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이는 기층 볼셰비키와 대중적 차원의 지지와 결합한 스탈린이 권력 투쟁 속에서 부상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개인 상점의 가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많은 프롤레타리아는 네프에 반대했다. 네프에 대한 이들의 불신은 시장의 심각한 시세 변동으로 더욱 강화됐다. 농촌의 재화 부족으로 농민들이 식료품 공급을 보류할 때마다 가격이 급등하며 혼란이 나타났다. 

네프 지지자들은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부하린은 국가 지출의 확대가 산업 투자율을 둔화시킨다고 하더라도, 시장 메커니즘과 농민들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조달 가격을 인상하고자 했다. 통합반대파(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는 농민에게 더 양보하는 것이 사회주의 산업화라는 소련의 목표를 연기할 뿐이라고 우려했다. 이들은 국가가 소비재 생산을 늘리는 데 필요한 식량과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의 곡물을 일시적으로 징발하고, 그런 다음에 시장 메커니즘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부하린 편에 일시적으로 섰다가,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패배한 이후에는 네프를 등졌다. 스탈린은 곡물 위기를 ‘쿨라크(부농, 농업자본가)들의 파업’ 때문이라고 비난했으며, 5개년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전 시기의 징발 정책으로 되돌아가자고 요구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수사는 프롤레타리아에게 폭넓은 호소력을 발휘했다. 많은 사람이 네프가 사회주의 이상에서 후퇴했다고 생각했고, 자본주의 경제의 부활을 가져올까 두려워했다. 한 볼셰비키는 “우리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화폐가 단번에 일소된다는 믿음 속에 성장했다. 만일 내전 동안 폐지되었던 화폐가 다시 나타난다면, 부자도 다시 나타나지 않겠는가? 우리는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파멸의 길 위에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이 질문을 근심 어린 마음으로 자신에게 던졌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전시 공산주의 방식으로 복귀하자는 스탈린의 요청은 1917~1921년의 혁명적 싸움에 참여하기에는 어렸으나, 내전 이야기에 바탕을 둔 투쟁 숭배 분위기 속에 교육받은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스탈린은 내전을 영웅적 시기로, 소련을 국내외 자본주의 적들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국가로 보는 낭만적 인식을 이용했다. 또한 스탈린은 전쟁 공포를 조성했는데, 네프가 산업 장비를 마련하는 수단으로는 너무 느리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 곡물을 조달하는 수단으로도 안정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1928~1929년에 당의 통제권을 차지하기 위한 부하린과의 경쟁에서, 부하린이 계급투쟁이 시간이 흐를수록 약화할 것이고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사회주의 체제와 융화할 것이라는 위험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나아가 이러한 견해는 당이 자본주의 적들에 맞서는 방어 체제를 느슨하게 하도록 만들고, 그 결과 적들이 소비에트 체제에 침투하여 내부에서부터 체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로 나아감에 따라 부르주아의 저항은 반드시 강화되며, 그래서 “착취자들의 반대를 뿌리 뽑고 분쇄할”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단언했다. 저자는 이 대목이 이후 대숙청에서 억압을 합리화하는 주장의 전조라고 강조한다.

파이지스가 보기에 반 신경제정책 운동은 스탈린 혁명전쟁의 전초전이었다. 수천 명의 네프만(네프로 재산을 모은 신자본가)이 투옥되거나 집에서 쫓겨났다. 1928년 말까지 40만 개의 자영업체 중 절반 이상이 세금 때문에 사라졌다. 리셴치(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로 전락한 수많은 네프만과 그 가족들은 곤궁한 처지에 내몰렸다. 그들에게는 배급표가 지급되지 않았고, 결국 얼마 남지 않은 개인 상점에서 가격이 엄청나게 솟은 식품을 살 수밖에 없었다. 또 국영 주택에서 쫓겨났고, 자녀들은 학교와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3. 공업화를 위한 농촌의 희생: 스탈린 혁명

 
 
농업집단화는 오랫동안 지속한 농촌의 생활방식, 즉 가족 농장, 농민 공동체, 독립적인 마을과 교회, 농촌 시장을 파괴했다. 볼셰비키는 이를 사회주의 산업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간주했다. 농민들이 곡물을 시장에 내놓지 않음으로써 불안정을 일으켰던 내전의 경험으로, 볼셰비키는 농민들이 식량의 공급을 통제하는 한 혁명을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세력이라고 간주했다. 곡물 확보를 위한 전투가 격화되며 스탈린은 식량 생산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고 쿨라크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대규모 집단화 정책을 시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특히 1929년 스탈린은 5개년 계획의 목표 수치를 상향 조정하고(“5개년 계획을 4년 안에!”라는 구호로 대표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는 산업 노동자가 먹을 식량을 싸고 확실하게 공급하고자 대규모 집단화 정책을 승인한다.

공업화와 농업집단화로 대표되는 스탈린 혁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는 네프에 대한 평가와 함께 소련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논쟁적인 쟁점 중 하나다. 스탈린은 레닌의 진정한 계승자인가, 아니면 혁명의 배반자인가? 소련 내부에서의 논쟁을 먼저 살펴보자. 1980년대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네프를 시행한 레닌의 결정에 자신의 급진적 개혁을 비유했다. 하지만 당 보수파는 스탈린에 대한 공격을 혁명 이후 소련이 물려받은 유산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했다. 결국 정치국 내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의 갈등으로 혁명 이후 역사 서술에 대해 이견이 발생했고, 급기야 1988년 고등학교 역사 시험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구에서도 스탈린 혁명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됐다. 미국 정치학자 제리 호크는 1937~1938년의 대숙청을 제외하면, 스탈린은 레닌이 원하는 일을 했다고 규정했다. 모셰 르윈은 내전 이후 전자본주의적 양식으로 되돌아간 농촌은 사회주의 경제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레닌이나 스탈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즉, 호크와 르윈은 스탈린이 레닌을 계승했다고 보았다. 반면 캐서린 메리 데일은 스탈린 혁명의 기원을 레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겪은 곤경에서 찾았다. 세상을 반동과 진보라는 흑백논리의 충돌로 봤던 대중들이, 일자리가 없었던 시기에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약속했던 공업화를 열렬히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근간이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스탈린 시대에 들어 혁명이 굴절되었다는 견해에 따라 농업집단화를 비판한다. 즉, 농촌의 해체, 그리고 쿨라크에 대한 탄압 과정에서 드러나는 폭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쿨라크로 낙인찍힌 유능한 농민들에 대한 탄압이 소련 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저자는 농업집단화를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기반이 되었던 세력에 대한 분석을 덧붙인다. 

농업집단화는 농촌의 생활방식을 철저히 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대다수 농민은 몇백 년 동안 지켜온 생활방식을 포기하는 것을 주저했다. 농민을 설득하지 못한 활동가들은 폭력적인 조치를 동원하기 시작했고, 스탈린이 ‘계급으로서 쿨라크 청산’을 요구한 1929년 12월부터 농민들을 집단농장으로 몰아넣는 운동은 전쟁의 형태를 띠었다. 지역 민병대, 특별 군대, 오게페우 부대가 동원되어 집단농장을 조직했다. 이들은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것보다 목표를 초과하는 것이 더 낫다”, “지나친 행위를 했다고 비난받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기억하시오. 그러나 만일 목표에 미치지 못한다면, 조심하시오!”와 같은 압박을 했다. 1930년의 첫 두 달 동안 소련 농민의 절반인 약 6천만 명이 집단농장으로 내몰렸고, 집단화에 반대 목소리를 낸 농민은 쿨라크로 분류되어 집과 마을에서 쫓겨났다.

스탈린은 집단농장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쿨라크에 맞선 전쟁’을 활용했다. 스탈린의 쿨라크 박해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집단화에 대한 잠재적 저항을 제거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집단화를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농민들이 집단농장에 가입하도록 추동하기 위함이었다. 쿨라크는 정의상 고용 노동을 사용하는 농촌자본가였으나, 1929년 이후 실제로 쿨라크로 몰려서 억압당한 상당수의 사람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저자는 네프 시기 농민이 자신의 노동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허용됐지만, 고용 노동 사용은 통제됐으며, 농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이 늘어난 1927년 이후에는 부유한 농민이 사유재산의 상당 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농촌자본가로 이루어진 ‘쿨라크 계급’이라는 개념은 환상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허구적인’ 쿨라크 말살은 소련 경제에 재앙을 가져왔다. 쿨라크라는 명목으로 탄압받은 이들은 보통 마을에서 가장 근면한 농민들이었다. 쿨라크를 박해하면서 이들의 노동 윤리와 전문 기술은 사라졌고, 결국 소련 농업 부문은 출구 없는 사양길로 들어서게 된다. 스탈린의 쿨라크 박해는 경제적 고려라기보다 사실상 농촌 집단화에 대한 잠재적 저항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였다. 탈쿨라크화 운동이 최고조에 올랐던 1930~1931년에 총 170~180만 명의 쿨라크와 그 가족들이 시베리아와 같은 소련의 오지로 추방됐다.

그렇다면 농민들은 쿨라크 박해에 저항했는가? 놀랍게도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마을 연대라는 러시아의 강력한 역사적 전통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는 특히 이례적이었다. 물론 거부 반응을 보인 지역도 있었으나, 농민 대다수는 이웃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보며 공포에 사로잡혀 소극적인 체념으로 반응했다. 농민들은 때로는 마을에서 누가 쿨라크로 없어져야 하는지를 회의를 통해, 혹은 제비뽑기를 통해 직접 결정했으며, 마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나 외따로 사는 농부, 과부, 노인과 같은 약자들이 그 대상이 되기 쉬웠다.

쿨라크 박해에 앞장섰던 자들의 동기는 무엇이었나? 일명 ‘집단화주의자’ 대다수는 징집되었던 병사와 노동자였고, 이들은 농업집단화를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이들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기를 갈망했으며, 쿨라크를 인민의 적으로 묘사한 선전을 통해 쿨라크를 향한 증오를 주입받았다. 몇몇은 공산주의적 열정에 휩싸인 자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5개년 계획의 선전이 불러일으킨 낭만적 열의에 고무되어, 볼셰비키와 함께 인간의 의지만으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의 창조를 위해서는 구사회 세력과 치르는 격렬한 투쟁이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 집단화주의자들은 쿨라크를 향한 폭력과 자신들의 유토피아적 믿음을 결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따라서 이들이 단순히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거나, “명령을 따르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그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으며 자기 행동을 합리화했다.

대부분의 농민은 쿨라크 박해는 묵인했지만 농업집단화에는 저항했다. 경찰에 따르면, 1929~1930년에 44,779건의 ‘심각한 소요’가 있었고 볼셰비키 농촌 활동가들이 공격받았다. 농민 시위와 폭동, 기관 습격, 방화와 함께, 집단농장 재산을 공격하고 교회를 폐쇄한 조치에 항의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체제는 농민들의 저항을 분쇄할 만큼 강력했다. 무력한 농민들은 집단농장의 징발을 막기 위해 가축을 도살하는 식으로 약자의 저항을 이어갔다.
농촌이 황폐해지자 스탈린은 집단화 운동의 일시적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1930년 3월부터 6월 사이에 집단농장에 가입한 농가의 비율이 58%에서 24%로 급격히 감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집단농장을 떠나는 것은 어려웠으며, 사유재산과 농기구, 가축을 되찾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6개월의 불안정한 휴전 이후, 9월부터 스탈린은 집단화의 두 번째 물결을 개시했다. 스탈린은 1931년 말까지 농가의 최소 80%를 집단화하고 쿨라크들을 절멸시킬 것을 공언했고, 실제로 성공했다. 
 
 

4. 대숙청: 극단적 형태의 폭력

 
 
파이지스는 스탈린 시기 자행된 극단적 폭력인 대숙청에 특히 주목한다. 1937년과 1938년 단 두 해 동안 적어도 681,692명의 사람이 반국가 범죄로 총살당했다. 엔카베데에 따르면, 이 수치는 1921년부터 1940년 사이에 정치적 범죄로 내려진 모든 사형선고의 91%에 달했다. 같은 기간 굴라크와 특별 정착촌의 인구는 1,196,369명에서 1,881,579명으로 약 70만 명 가까이 증가했다. 대숙청 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 희생자들이 죽임을 당한 시기이기도 했는데, 체포된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총살당했다. (스탈린 통치 시기에 처형 건수가 두 번째로 많았던 해인 1930년에 피체포자의 10% 미만이 사형당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이는 놀라운 수치다.)

이와 같은 극단적 폭력의 기원에 대한 논의 역시 쟁점적이다. 스탈린 전기작가인 로버트 터커는 대숙청의 원인을 스탈린 개인의 심성과 개성에서 찾는다. 신경증에서 비롯된 편집증은 스탈린에게 자신이 레닌과 같은 위상을 갖는 혁명적 영웅임을 입증할 것을 강요했다. 스탈린은 진보를 가로막는 반역 분자인 고참 볼셰비키로부터 인민을 구원하는 영웅으로 자신을 상상했다는 것이다. 엘렌느 까레르 당꼬스는 거의 10세기 동안 지속했던, 폭력에 의존하고자 하는 러시아 정치 체제의 경향이 스탈린에게서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혁명 발생 이후부터 이어진 테러가 스탈린에 이르러 법과 테러의 결합으로 죽음의 차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와 정반대로 아치 게티는 소련 정부는 스탈린 하에서조차도 전체주의적이지 않았으며, 스탈린은 너무나 바빠서 숙청에 사사건건 관여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았다. 폭력은 오히려 당과 국가 기구의 하급 수준에서 일어난, “혼란에 대한” 급진적이고 “심지어 히스테리적이기까지 한 대응”이라고 보았다. 돈 라우니는 숙청이 이뤄지기 직전까지 자신의 기대만큼 상향 이동을 하지 못한 소련 사회의 비 엘리트층이, 자신들의 승진을 막는 상급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행동하며 벌어진 비극으로 보았다. 파이지스는 이러한 관점들 중에서 몇몇 측면을 수용하고 있다.

우선 파이지스는 대숙청이 집중되었던 시기에 대해서 주목한다. 일각에선 대숙청의 기원을 1934년 12월에 발생한 레닌그라드 지구당 서기장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지만, 이러한 주장은 키로프 암살과 대숙청 사이인 1935년과 1936년의 고요한 소강상태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저자는 대숙청이 내부 위협에 대한 스탈린의 두려움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는 관점도 기각한다. 그 당시 엔카베데의 보고는 내부 위협이 다른 시기보다 1937년에 특별히 더 심각했음을 시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왜 대숙청이 고참 볼셰비키를 대상으로 한 전시재판, 정치 엘리트 숙청, 도시에서의 대규모 체포, 쿨라크 작전, 민족 작전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동시에 일어났는지에 주목한다. 이는 각각의 현상을 그 자체로 독자적인 것으로서 설명함으로써 대숙청을 별개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시각에 대한 저자의 비판을 함의한다. 저자는 대숙청이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는 하나의 통일된 작전이라고 판단한다. 즉 대숙청이 통제받지 않았거나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며, 스탈린 시기에 언제든 발생할 수 있었던 대혼란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았다. 더불어 돈 라우니가 묘사한 것처럼, 저자는 대숙청에 대한 시민들의 침묵과 방조와 더 나아가 적극적인 고발이 그 광기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 결과는 수많은 죽음, 체포, 그리고 고발을 두려워하면서 나타난 인간관계의 단절이었다. 

파이지스는 대숙청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다가올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두려움과 소련을 위협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스탈린의 인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1937년 스탈린은 소련이 유럽에서는 파시즘 국가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상황에 놓였다고 확신했다. 스탈린은 파시스트들과의 전쟁을 벌이기 전에 ‘파시스트 첩자와 적’이라는 제5열만이 아니라, 모든 잠재적 반대자들을 분쇄하기 위한 정치적 억압이 소련에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로버트 터커처럼 대숙청의 원인을 스탈린의 개인적 결함으로 환원하지는 않지만, 파이지스 역시 적에 대한 편집증적 두려움이라는 스탈린 특유의 성격이 대숙청에 영향을 끼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이러한 두려움이 1932년 부인 나데즈다의 자살, 그리고 형제처럼 사랑한다고 주장한 키로프의 암살로 더욱 심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은 위험을 피하고자 했다”며 죽을 때까지 이러한 입장을 변호했다. 대숙청은 지도부가 전쟁 시기에 위험 요소인 당 내부의 동요자, 출세주의자, 숨은 적을 찾아내는 수단이었다. 숙청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고 불공정한 체포 역시 많았음을 인정하지만, 내부 충돌을 허용했으면 전쟁에서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났을 것이고, 아마도 패배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한다. 카가노비치 역시 몰로토프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자와 동요자들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5.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소비에트 체제와는 거리가 먼 요인들

 
 
스탈린이 대숙청까지 벌여가며 대비한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스탈린 시대는 역사적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가? 스탈린이 취한 조치들이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 아니라면 승리의 원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파이지스는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으로 소비에트 체제와는 거리가 먼 요인들을 지적한다. 우선 자기 집과 고향, 그리고 개인적 인간관계와 같은 전통적 가치들을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활약한 일반 병사들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군에 대한 통제권이 정치인에서 군사 전문가에게로 넘어가며 소련군 구조가 효율적으로 변한 것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꼽는다. 

파이지스에 따르면, 전시의 국민적 단합이라는 소비에트 신화와는 반대로, 소련 사회는 전쟁 동안 그 어떤 시기보다 분절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국가가 일부 소수민족들을 희생양으로 추방함에 따라 인종 분리가 악화되었으며, 사회 전반에 잠재되어 있던 반유대주의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런데도 소련이 군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 요인은 일반 병사들의 활약이었다. 병사들을 싸우게 한 것은 두려움이나 영웅심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소비에트 모국이라는 추상적 관념보다는 특정 지역 사회, 현실 속 인간관계의 방어를 위해 더더욱 적극적으로 싸우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1941년 4백만 명의 사람들이 국민 의용군에 자원했다. 사실상 국민적 단합보다는 병사들 간의 동지애가 전쟁의 승리요인 중 하나였다. 병사들은 신뢰받는 동지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에 충성심을 느끼면서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들의 동지애는 위급한 상황에 직면하면서 발전했고, 이러한 신뢰는 개개인을 생존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퇴역 군인들은 동료 병사들로 이루어진 무리 속에서 전쟁 전에는 자신들의 삶에 없었던 ‘진정한’ 가족을 발견한 것처럼 회고하기도 한다.

일반 병사들의 활약 외에도, 소련이 군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전쟁의 첫 1년이 지난 후 소련군 내부의 권위 구조가 변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자신과 당의 개입이 군 사령부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며, 지휘관들의 자율에 맡기는 게 가장 좋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8월 주코프가 최고사령관 대리로 임명됐으며, 전쟁 수행 정책의 전략적 계획과 운용은 점차 국가방위위원회의 정치인들에서 참모본부로 이전됐다. 정치장교를 비롯한 정치 지도위원들의 군사적 결정 권한은 급격히 축소됐다. 당의 통제에서 벗어난 군 사령부는 안정된 군 전문가 집단을 창출하며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전쟁 수행에서 100만 명이 넘는 징용 노동자들의 존재 역시 중요했다. 이들은 경비병의 감시를 받으며 굴라크 죄수와 똑같은 노동 임무에 징용됐다. 이들 중 대다수는 소비에트 체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소수민족이었고, 소비에트 체제의 적으로 탄압받던 쿨라크도 포함되었다. 굴라크 노동은 전시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굴라크는 소련 탄약의 15%와 군복, 군 식량의 상당 부분을 생산했다. 50만 명의 죄수가 전선에 동원됨에 따라 1943년까지 감소했던 수용소 인구는, 1943년 말부터 막대한 인력을 동원하기 위한 대량 체포가 이뤄지면서 다시 급속히 증가했다.
 
 

6. 전쟁 시기 해빙, 그리고 다시 스탈린주의로

 
 
전쟁이 소련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전시에도 전체주의적인 사회 통제가 유지되었는가에 대해서도 논쟁이 전개됐다. 제임스 밀러는 전쟁이 엄청난 경제적, 인적 손실을 일으켰고 체제를 거의 붕괴 지경에 이르게 했지만, 사실상 소련 제도들을 강화했다고 주장했다. 그와 달리 윌리엄 모스코프는 모스크바가 나치와 기아 문제라는 이중전선을 마주했고,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없던 지도자들은 민간인들에 대한 식량 공급의 책임을 지역 당국과 개별 국민에게 떠넘겼다고 주장했다. 이에 농촌 주민과 도시민은 재빠르고 효율적으로 식량 위기에 적응했고, 관리들은 이들의 상행위를 묵인했다. 존 바버와 마크 해리슨 역시 노동자, 농민이 전쟁으로 탈집중화된 사회에서 자급자족하는 양상, 그리고 전시에 통제가 느슨해지며 문화계 인텔리겐치아가 가졌던 전후 사회에 대한 희망을 다뤘다.

하지만 자유가 확대될 것이라는 희망은 스탈린의 수많은 전후 정책하에서 무너졌다. 그 원인에 대해서 쉴라 피츠패트릭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 국가 통제를 다시 부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당의 정치 문화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파이지스도 전쟁 기간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사람들 사이에 유대가 형성됐고, 유럽이나 미국과 교류하는 등 소련 내에 잠시나마 해빙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분명한 사실임을 짚는다. 하지만 전후 스탈린이 정치 개혁을 거부하고, 긴축적인 계획경제를 추진하며 강제 노동을 강화하면서 통제가 복귀했다는 사실 역시 짚는다. 저자는 피츠패트릭이 언급한 당의 정치 문화를 체현한 새로운 중간 계급의 존재를 지적한다. 이들은 스탈린 시기에 출세를 위해 적어도 겉으로는 당에 복무한 전문가들로, 스탈린이 전후에 개혁을 거부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었다.

전쟁 시기에는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표현의 자유가 생겼다. 사람들은 감정과 의견을 표출했고, 정치적 토론과 체제에 대한 비판까지 이루어졌다. 군대의 병사 집단, 그리고 식품을 사려고 늘어선 줄에서 비판과 토론이 즉석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와 상호작용이 확대됨에 따라 시민 정신과 국민 의식이 부흥했다. 파이지스는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 가치관의 근본적 변화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고, 모든 시민적 의무는 국가의 명령으로 수행됐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시민적 의무는 나라의 방어라는 실질적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문제는 국가의 통제와는 무관하게 사람들을 단합시켰으며 새로운 공적 태도를 낳았다.

전쟁은 다른 방식으로 자극을 주기도 했다. 전쟁 막바지에 소련군 상당수가 유럽에 들어가 다른 생활방식에 노출되면서 자신과 사회를 되돌아보는 경향이 널리 퍼졌다. 콘스탄틴 시모노프는 “유럽의 생활 수준과 우리 소련의 생활 수준 사이에 가로놓인 격차는 감정적, 심리적 충격을 안겨주었고, 수백만 병사들의 관점을 바꾸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서구 세계를 접한 병사들은 전쟁이 끝나면 집단농장이 소멸할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다.

또 소련이 영국, 미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소련 사회 내부도 서구의 영향력에 노출됐다. 미국과 맺은 무기 대여 조약을 계기로 할리우드 영화, 서구의 서적과 물품이 소련에 유입됐고, 수많은 사람이 소련의 거짓 선전이 아닌 서구의 실제 모습을 알게 됐다. 모스크바에는 레스토랑과 상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전쟁이 끝나면 생활이 좀 더 편해지고, 소련이 서구에 문호를 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부채질했다. 심지어 경제 개혁조차 토론의 주제가 됐으며, 일부 경제학자는 전쟁 후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시장으로 복귀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스탈린은 모든 정치 개혁 사상을 거부했다. 1946년 2월 9일, 전후 시대에 들어와 처음 한 중요한 연설에서 스탈린은 소비에트 체제가 느슨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스탈린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조짐이 보이면 강력히 타격하라고 부하들에게 주문했다. 전쟁 이후 군대와 당 지도부에서 ‘자유주의 개혁가’, 혹은 1945년 승리로 큰 인기를 누리게 된 최고위 지도자들을 잘라내는 숙청도 개시됐다. 이 과정에서 승장인 주코프 원수가 우랄 지역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전후의 정치적 탄압은 긴축적인 계획경제로 복귀하는 흐름과도 연계됐다. 국제적으로 긴장이 높은 상황에서 1946년 새로운 5개년 계획이 도입됐다. 하지만 생산 목표는 여전히 비현실적이었고, 전후 경제에서 강제 노동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전후 스탈린주의의 복귀에는 새로운 유형의 중간 계급이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엔지니어, 행정가, 경영자 계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스탈린 체제가 의식적으로 추진한 정책(고등교육 제도의 확대)의 결과물이었다. 이들은 교육을 더 많이 받았고, 덜 이데올로기적이었으며, 더 안정적이었다. 또한 전문적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높은 직책을 보장받았고, 계급적, 이데올로기적 비순수성 때문에 강등당할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스탈린은 전후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압력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이들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들의 충성을 획득하기 위해 안정되고 급료가 높은 직업, 개인 아파트와 같은 부르주아적 열망을 충족시켜줬다.

이들은 출세하기 위해서 적어도 겉으로는 체제의 요구에 순응했다. 당시 가장 흔한 소련의 관리 유형은 공산주의 신봉자나 열성분자가 아니라, 당이나 당의 목표를 불신하더라도 당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출세주의자였다. 일부는 성공, 혹은 사회적 지위의 유지를 위해 과거의 이력을 숨기는 선택을 했다. 이와 달리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출세를 위해 엔카베데의 정보원이 되기도 했다.
 
 

7. 스탈린 사후에도 여전히 속삭이는 사회: 소련 시민들은 왜 침묵했는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6년 제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고발하는 비밀 연설을 한 이후, 소련에서도 비로소 해빙의 분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 외부의 일부 사람들은 흐루쇼프의 연설을 모든 것을 논의하고 의문시할 수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지식인들이 먼저 입을 열기 시작했으며, 굴라크에서 돌아온 죄수들 역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전히 침묵했다. 흐루쇼프 시기의 해빙이 지속될 것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체포될 수도 있다는 공포는 스탈린 사망 이후에도 사람들을 수십 년 동안 침묵시킬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실제로 해빙기는 짧았고 제한적이었다. 또 흐루쇼프 시기 내내 정권은 소비에트 체제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스탈린 시기 억압에 대한 어떤 논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60년대 초 해빙이 절정기였을 때조차도, 스탈린 시기 수백만 명이 죽거나 억압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공식적 인정도, 정부의 사과도 없었다. 마지못해 복권해준 희생자들에게 적절한 배상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은 불신과 적대의 대상이 됐다.

시민들의 예상처럼,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리면서 해빙 분위기는 돌연 끝났고 다시 검열이 강화됐다. 승전 20주년 기념으로 위대한 전쟁 지도자로서 스탈린의 명성이 되살아났고, 정권은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며 스탈린 시기 억압에 대한 논의를 가로막았다. 다시 체포될 수도 있다는 위협은 스탈린 시대의 희생자들을 1956년 이후 수십 년 동안 더욱 무겁게 침묵시킬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공포 정치는 종결됐지만, KGB(국가보안위원회)는 여전히 엄청난 범위의 가혹한 처벌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석방된 죄수였던 지나이다 부슈예바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내내 끊임없는 걱정과 다시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1981년에 노동수용소 수감 기록이 없는 새 여권을 받은 뒤에야 두려움이 가시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딸에 따르면 “일생에 걸쳐, 세상을 하직하는 바로 그날까지도 공포 체제가 부활할지 모른다고 무서워”했다고 한다. 마리야 부트케비치는 오늘날(2004년)까지도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어딘가로 멀리 보내질까 봐 계속 불안에 떨었다. 스베틀라나 브론시테인은 노동수용소가 등장하는 악몽을 계속 꾸며, 서류를 작성해서 미국 대사관 앞에 줄을 설 기력만 있다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겠다고 말했다.
 
 

8. 나가며

 
 
파이지스는 스탈린 체제의 억압적 성격과 인민주의적 성격, 그리고 그 대중적 토대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네프를 중단하고 농업 집단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억압적인 방식의 현대화, 스탈린 정권의 인민주의적 호소와 이를 승인하고 체제에 적극적으로 복무한 대중, 그리고 배제된 사람들의 고통을 확인할 수 있다. 네프 중단과 농업집단화는 공업화를 위해 농민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 선택이었고, 부하린과 같이 이견을 보인 자들에 대해 정치적 탄압을 가하며 이후 대숙청에서 상영될 본격적인 억압의 예고편을 보여줬다. 공업화를 자신의 과업으로 삼은 스탈린은, 때로는 네프만과 쿨라크와 같은 ‘계급의 적’을 상정하고 탄압하며, 때로는 내전 시기의 향수나 전쟁의 공포를 자극하며 소련 시민에게 통치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현대화로 표현되는 사회주의 이상, 폭력에 대한 공포, 출세의 기회는 소련 시민이 억압적인 스탈린 체제에 복무하도록 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 시기에 스탈린주의의 공백이 일제히 드러났다. 전시에 소비에트 이상을 중심으로 한 국민적 단합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당의 통제하에 있던 소련군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를 대체하여 소련을 승리로 이끈 것은 스탈린 체제가 의식적으로 부정해왔던 개인 간의 관계들이었다. 자기 집과 지역 사회, 그리고 인간관계를 지키기 위한 일반 병사들의 활약이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기간 해빙의 시기가 나타나며 시민들이 사회 변화에 대한 기대를 품기도 했지만, 스탈린이 개혁의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또다시 사회는 전쟁 이전의 억압적 체제로 회귀했다. 여기에는 체제의 존속과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새로운 중간 계급의 등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자는 특히 대숙청에 주목한다. 대숙청이 보여주는 충격적인 수치를 보면, 왜 소련 시민은 이러한 극단적 폭력을 경험하면서도 스탈린의 통치에 순응했는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에도 입을 열지 못했는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스탈린 혁명이 본격화되던 농업 집단화와 제1차 5개년 계획 시기에는 사회주의 경제 건설이라는 대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 중심으로 계획이 제출되고 실행됐다. 이 과정에서 소련 시민은 주체적인 위치에 있지 못했다. 누군가는 사회주의 혁명을 ‘현대화’로 이해하며 스탈린 혁명의 충실한 지지 기반이 됐고, 누군가는 자유와 권리를 억압당하고 체제에 순응하기를 요구받았다. ‘혁명의 완수’, ‘혁명 조국의 수호’가 절대적인 가치로 여겨졌으며, 이를 위해서는 이견의 배제, ‘인민의 적’에 대한 억압이 용인됐다. 이러한 배제와 억압을 합리화하는 과정은 결국 스탈린 시기 억압적 체제, 나아가 극단적인 폭력의 동원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속삭이는 사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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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노동 국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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