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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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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파업을 보며

진재연 | 노동위원
울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 중 하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의 행렬이다. 때로는 어마어마하게 떼를 지어 가기도 하는데, 최근엔 기름값이 올라서 그런지 스쿠터가 많아졌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더 많아졌다고 한다. 울산을 처음 방문해 이 광경을 처음 본 사람들은 종종 ‘웬 오토바이 동호회?’ 라는 의문을 갖기도 하는데, 잠시 바라보면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의 행렬임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의 거대한 오토바이 행렬은 때로는 감동으로, 때로는 고된 삶에 대한 상징으로 느껴진다. 경이로울 만치 밝고 환한 빛을 내는 현대중공업 건물의 야경을 보고, 우뚝우뚝 높은 굴뚝이 서 있는 현대자동차의 열여섯 개나 된다는 출입구를 쭉 돌아보면, 노동자들이 갖고 있을 노동의 자긍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높고 거대한 기계 앞에서 견딜 수밖에 없는 길고 고된 노동과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이 다치고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이 교차되기도 한다.

울산 노동자투쟁의 역사와 비정규직 노동운동

울산은 노동자들의 도시다. 노동자들이 많이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대왕국이라 불리는 자본의 도시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들을 만들어 온 곳이라는 의미다. 1987년 이후 늘 격전의 연속이었고,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노동자들의 굵직굵직한 투쟁 속에서, 노동운동은 자본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경험들을 차근차근 쌓아왔다. 비단 현장에서 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가 실로 거대한 노동자들의 공동체이기도 했다. 흔히 울산을 노동운동의 메카, 중심이라고도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거대한 계급투쟁의 공간에서 노동자들이 승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동조합의 민주적이고 계급적인 투쟁의 정신을 잃지 않고 민주노조를 사수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울산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많은 활동가들은 ‘이젠 울산도 더 이상 노동운동의 도시가 아니’라고 자조하듯 말한다. 노동조합은 민주적·계급적인 공간으로서 올바른 역할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회사 측의 통제와 압박은 어느 때보다도 더 과감해지고, 노골화되었다. 보수언론에서 ‘대기업 강성노조’라고 떠들어대는 울산의 정규직 노조조차 이들 자본의 공세를 제어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1987년 이후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는 지난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투쟁을 일궈왔다. 지게차와 샌딩머신을 앞세우고 남목고개를 넘어 운동장으로, 시청으로 진군해 갔던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 1988-1989년 현대중공업 노조민주화를 위한 128일 파업투쟁,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 “현중이 깨지면 현자도 깨진다!”고 외치며 연대를 외친 현대자동차 4·28 연대투쟁, 1991년 5월 투쟁, 1991-1992년 현대자동차 성과분배투쟁, 1992-1993년 지리했던 민주노조 재건투쟁, “현중과 현자가 만났다!” 1993년 현총련 공동임투, 1994년 현대중공업 파업투쟁, 1995년 현대자동차 양봉수 열사 투쟁, 그리고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투쟁까지.
2000년 들어서 잇달아 결성된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울산 노동운동의 새로운 기점이 되었다. 현자비정규노조, 현중하청노조, 울산건설플랜트노조, 구몬학습지노조, 자치단체비정규직노조 등의 결성은 비정규직 투쟁 중심으로 지역연대를 가능하게 했다. 현대자동차를 기점으로 한 ‘불법파견 정규직화’투쟁의 여러 계기는 울산 노동운동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어 왔다. 2010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투쟁은 이 역사의 연장선에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이후 정규직이 떠난 자리에 비정규직이 채워졌고, 본격적인 후과는 2002년 이후 드러나기 시작했다. 2010년 현재 30대 초중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2년 이후 입사한 이들이다. 그때 그들은 20대 중후반이었는데, IMF 이후 대부분의 청년세대가 그렇듯 당시 그들이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부분 ‘젊은’세대들로 구성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은 하나의 낙인이며, 신분이 되었다. 현대자동차를 둘러싼 지역 공동체내에서는 이러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존재하는, 때로는 암묵적인 때로는 명시적인 차별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아주 일상적으로 삶의 전반을 아우르며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30대 초중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연애나 결혼의 과정에서 언제나 부딪히는 물음이 있다. 맞선을 보거나 소개팅을 할 때 ‘직영인지, 하청인지’를 물어본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고, 떳떳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현실에 대한 좌절이 밀려온다고 했다. 한 조합원은 ‘그래서 여기 비정규직은 노총각이 많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는 가족대책위 모임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비정규직 조합원의 젊은 아내들은 결혼할 때 남편이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집안의 반대에 부딪힌 경우가 많았다. 또한 ‘직영인지, 하청인지’ 물어보는 건 이미 오래된 질문이 되었고, 언젠가부터는 1차 하청인지, 2차 하청인지, 3차 하청인지까지 구체적으로 물어본다고 한다. 실제 원청과 직접 계약한 1차 사내하청 업체는 2차, 3차 사내하청에 비해 원청 자본에 의해 상대적으로 내부화되어 있어서, 이들 사내하청들 간에서조차 각 노동자 간의 차별이 점점 더 크게 드러나고 있다. 절반의 임금, 작업복·안전화에도 적용되는 차별, 월차 한번 마음 놓고 쓰지 못하는 일상이다. 정규직과 같은 라인에서 같은 공정의 일을 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공정을 떠맡느라 겪어야 하는 노동강도에서의 차별들. 원청 자본을 정점으로 하는 하청 업체의 먹이사슬 구조는 노동자들의 인간관계와 일상적인 삶까지 지배하며, 차별과 억압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25일간의 현대차 비정규직 공장점거 파업투쟁

지난 11월 15일, 울산 공장에서 시작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은 이러한 차별에 대한 오랜 시간 동안의 분노로부터 촉발되었다. 수년간 경험했던 차별은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열망’을 더욱 부추겼고, 지난 7월 22일 대법원 판결과 11월 26일 고등법원 판결은 더욱 공세적인 투쟁을 밀어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2010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뿌리 깊은 패배감과 무기력을 걷어내고 새로운 투쟁의 공간을 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6년 불법파견 투쟁 패배 이후 5년의 세월 동안 자신을 가두었던 억압을 뛰어넘어 파업투쟁을 일구었다. 11월 15일 시트 1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의 불길은 공장을 멈춰 세웠고, 1천 명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1공장 도어탈착 농성장을 가득 메웠다.
자신감과 정규직화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던 1공장 점거 파업의 불길은 야만적인 폭력을 뚫고 2, 3공장의 파업으로 이어졌고, 아산과 전주공장으로 번졌다.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외치며 분신으로 항거한 황인화 동지의 염원이 들불이 되었고, 울산 비정규직 지회 조합원 1,700여 명 중 1,200여 명이 파업에 참가했고, 전주 350명, 아산 250명 등 1800여명의 조합원이 노조지침에 따라 끝까지 파업에 참여했다.
2010년 12월 9일, 25일간의 파업투쟁이 끝난 후 우리에겐 남겨진 과제가 매우 많다. 2차 파업을 준비하고 있는 현재,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천천히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투쟁은 비정규직 투쟁이 지난 10년간 이야기했던 정규직-비정규직 연대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지난 파업기간동안 가장 많이 강조되고 이야기된 것은 “아름다운 연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들이었다. 그 무엇보다 정규직-비정규직 단결과 연대가 중요했고, 그것은 비단 비정규직의 힘이 약해서 정규직의 도움이 필요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자본이 노동자들을 정규직-비정규직, 원청-하청으로 ‘분할’해 통제하고 억압할 때, 노동자들이 그 경계들을 뛰어넘어 계급적으로 단결하고 공동투쟁을 만드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된 ‘운동의 위기’는 자본이 만든 다양한 분할(정규직-비정규, 남성-여성, 정주-이주 노동자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노동조합조차 그 경계들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파업은 아직 우리가 넘어서야 할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현대자동차 지부(정규직노조)는 ‘중재’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거부했을 뿐 만 아니라 사실상 비정규직 노조의 파업투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노골적인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아니러니하게도 그런 상황에서 이번 투쟁 내내 회자되었던 ‘아름다운 연대’라는 말을 처음 꺼낸 사람은 현대자동차 지부 이경훈 지부장이었다. 이경훈 지부장은 간간이 지부 간부들과 함께 식료품을 가지고 들어와 ‘아름다운 연대’를 강조했다. 그리고 농성장 안 조합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매번 밥을 들여오는 것이 전쟁이라고 말했다. 그 무렵은 하루 한 번 김밥 두 끼 분이 들어왔지만 김밥이 이내 쉬는 문제가 발생해, 조합원들은 전날 저녁에 들어와 그 다음날 아침에 쉰 김밥을 먹기도 했다. 그렇게 전날 김밥이 두 줄 나오면 다음날은 저녁에 한 끼만 김밥이 나왔고, 운 좋은 날은 점심 때 컵라면이나 건빵이 나오기도 했다. ‘아름다운 김밥연대’는 조합원들이 춥고 배고픈 농성장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었지만, 현대차지부의 “교섭과 동시에 농성해제”요구와 “손 떼겠다”, “내가 없으면 김밥도 못 먹는다” “김밥도 못 넣어주겠다”는 모욕적인 협박도 감수해야 했다. 조금씩 음식반입이 줄어들기도 했는데, 조합원들 사이에서 “현대차 지부가 농성장기화 되는 것을 막고 빨리 교섭에 매달리게 해서 농성을 해제하도록 하기 위해 밥을 줄이는 것”이라고 말이 돌기도 했다. 이 말은 농성을 해제할 때 정확히 들어맞았다. 농성해제를 결정하기 바로 전날인 12월 8일은 하루 종일 전기가 끊어져 암흑 속이었다. 현대차 지부는 비정규직지회에서 ‘선 농성해제 후 교섭’을 거부하자 지원을 끊겠다고 선포하고 농성장을 떠났다. 농성장 아래에서 사수를 맡고 있던 상집 간부들도 모두 철수했다. 또한 식사 지원을 중단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비상식량인 초코파이 2개로 저녁을 때울 수밖에 없었다.

비정규직-정규직, 아름다운 연대는 가능한가?

하지만 지금 우리는 현대차 지부 이경훈 집행부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애초부터 이경훈 집행부에게 기대할 것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의 문제는, 특정 정파나 몇몇 현장조직들만의 문제를 초과하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1998년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합의하고 그 이후 매 시기 비정규직의 권리를 제대로 조직하지 못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축소하기 위한 투쟁을 공세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또한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조는 1998년 정리해고 투쟁 패배 이후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현장분위기를 일신하지 못했다. 현장권력이 급격히 축소되는 상황에서 조합원들은 더욱더 불안해지는 고용위기 앞에 위축되었고, 그것은 지도부가 투쟁을 회피하는 근거가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2000년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조는 사내하청 대거 투입을 사측과 합의한다. 2000년 6월 현대자동차 노조는 현 조합원들이 고용을 보장받는 대신, 부족한 생산인력은 비정규직(사내하청)을 대거 투입하여 해결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 합의는 향후 고용위기가 발생할 경우, “비정규직은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사용한다”는 점을 내용적으로 포함하는 것이었다. 구조조정이 광풍처럼 휩쓸고 간 자리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은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잃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불안한 고용 앞에 놓여 있는 유혹에 무너져 갔다. 자기 부서에 비정규직이 많을수록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덜 수 있다는 생각, 비정규직이 많을수록 힘들고 어려운 공정을 그들에게 넘기고 정규직은 상대적으로 편한 공정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정규직들의 현실적인 이해관계 때문이다. 1998년 현대차 정리해고 투쟁 패배와 고용의 불안 속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마음은 유혹 앞에 급속하게 허물어진다. ‘벌 수 있을 때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정서는, 현장 내 노동강도 강화와 살인적인 노동시간연장 등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가운데 비정규직 노조 설립조차 정규직 노조가 방해하거나 반대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비정규직 노조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정규직 노조와 활동가들은 자기 방향을 명확히 하지 못한 채 ‘비정규직을 고용보장의 도구로 인식’하는 반계급적인 태도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계급적 연대’속에서 혼돈을 거듭하고 있다. 자본이 만들어 놓은 원하청 노선의 단층선을 따라 노동자들의 인간관계, 삶의 양상까지 규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노조 운동은 허물어지고, 노동자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진정 ‘아름다운 연대’를 위하여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번 투쟁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헌신적이고 모범적인 정규직 활동가들의 연대가 투쟁의 큰 힘이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25일간의 파업투쟁에서 진심어린 ‘아름다운 연대’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1공장 대의원들은 비정규직 파업에 대한 대체인력 투입 저지를 결의했고, 파업농성장에 대한 침탈을 인간방패가 되어 막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농성장을 지켰고, 농성자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반입시키며 농성자의 손발이 되어 주었다. 파업 처음부터 끝까지 비정규직 조합원들보다 더 열성적이고 헌신적으로 싸웠다.
1980년대 혹은 1990년대부터 투쟁경험이 많은 정규직 활동가들은 상대적으로 투쟁 경험이 적은 젊은 비정규직 조합원에게 직접 ‘훌라송’을 불러가며 집회 사회 보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고, 투쟁방향을 함께 토론하며 격려하고 투쟁을 만들어갔다.
많은 정규직 활동가들은 매일 아침저녁 공장 정문 앞에서 출근투쟁을 벌였고, 공장 앞 천막농성에 결합했으며, 1공장 농성장을 방문해 필요한 물품을 전달하고, 담요를 대신해 잠바를 벗어 비정규직을 덮어주었다. 2공장의 대의원은 비정규직 파업에 대한 구사대의 폭력을 온몸으로 막아 큰 부상을 입었다. 많은 대의원들은 사측으로부터 고소고발당하고, 체포영장을 받았다.

2차 파업을 위하여

자본이 만들어 놓은 분할 속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자신의 존재조건을 뛰어넘어 새로운 운동을 일구어나가는 것은 매우 지난하고 고된 과정이 될 것이다. 파업이 진정으로 민주주의의 학교가 되려면, 노동조합은 민주적이고 계급적인 원칙을 가지고 힘겨운 과정들을 함께 고민하고 교육하고 토론해야 한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차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은 현대자동차 자본이 ‘원청사용자’임을 명확히 하며, 자신들을 고용한 ‘정몽구’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고, 이젠 차별받는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으로서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들불처럼 일어났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만들어 놓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의 돌파구를 어떻게 확장하고 뚫어 나가느냐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2011년 1월 울산공장 최병승 조합원의 고등법원 선고가 진행될 가능성이 크고, 아산공장의 대법원 판결은 3-4월 중으로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기들을 고려하여 비정규직 지회는 2차 파업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25일간의 파업투쟁을 통해 보여준 조합원들의 의지와 자신감을 모아 2차 파업을 성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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