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1.1-2.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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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

김정래 | 조직국장

△ 인혁당 사형수 이수병 평전 『암장』, 지리산, 1992(좌)
△ 어느 통일 운동가의 육필 수기 『비트』, 일과놀이, 1993(우)



해방 이후 남한사회는 전쟁과 혁명 그리고 대규모 사회격변을 경험하게 되고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계급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와 직면해야만 했다. 당시 남한사회에는 운동진영의 혁명적 경향들이 들끓고 있었다. 사회정치적인 억압과 굴레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사람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이 당시의 좌익 활동가들은 근본적인 체제 변혁으로서 공산주의에 경도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을 거치면서 사회운동의 전통이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되고, 정치적 공간을 현격히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전후 사회운동은 폭압적인 정권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표출되는 과정에서 다시 발전하게 된다. 일제하 및 미군정기의 전통적 좌익 활동가들은 지배계급의 정치경제적 위기에 따라 재등장하게 되고 4·19 이후 새롭게 성장한 변혁적 활동가와의 결합을 시도한다. 역사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이들의 이념과 조직 활동은 대중운동의 활성화와 지배계급과의 결전에서 땀과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남한의 지배계급은 사회 변혁적인 조직 활동을 무력화시키고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좌익적 사회운동에 대한 지배계급의 탄압 시도는 1960-70년대의 여러 ‘조직사건’들로 표출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지배세력의 정치적 위기와 변혁세력의 조직 활동을 일명 ‘용공조작사건’이라는 반공 극약처방으로 맞물리게 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비트』,『암장』의 주인공인 김세원, 이수병은 그러한 좌익사건의 당사자들로서 전 생애를 통하여 남한사회의 변혁을 위하여 온몸을 바친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일제치하의 학창시절부터 시작해, 사회과학 이념서클을 조직하고, 빨치산 투쟁과 4·19혁명, 인혁당, 민청학련, 남민전, 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굽이쳐 가고 있다. 이와 더불어 각각의 정세 속에서 선거논쟁, 조직논쟁, 북한에 대한 태도, 중-소 논쟁에 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들의 사상과 실천, 삶 속에서 남한의 좌익적 혁명운동의 면면한 지속성을 관찰할 수 있다.

빨치산의 꿈과 좌절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등의 조직사건은 돌발적 사건이 아니었으며 오랜 기간 철저히 준비하고 투쟁해온 데 따른 필연적 귀결이었다. 1960-70년대 조직사건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멀리 해방공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미군정기와 분단조국의 현실은 민청 가입, 소년빨치산 투신 등 이들이 어린 나이부터 걸어야 했던 험난한 삶의 도정을 예고하고 있었다.
『비트』의 저자인 김세원은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고 있던 자형인 조규연의 영향을 받는다. 1946년 화순중학교에 입학한 김세원은 학내에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을 조직하고 외곽 조직으로 민주학생연맹(민학련)을 조직한다. 조선공산당의 지시로 화순중학에 부임한 배인수 선생으로부터 사회과학과 체계적인 교양 지도를 받는다. 1948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중심으로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민학련은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제주 4·3항쟁, 여순봉기 등의 여파로 공산당 체포작전이 벌어지고, 1949년 3월 25일 남로당 특수부 조직책인 김세원의 자형 조규연이 경찰서로 연행되던 중 산기슭에서 집단 총살당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세원은 화순군 학도자위대장을 맡게 되고, 9·28 후퇴 당시 남로당 유치지구당(장흥군 유치면 화학산) 화순군당 소속으로 유격대에 합류하게 된다. 1951년 3·4월경 토벌대와의 화학산 전투 이후 빨치산 근거지는 무너지게 된다. 입산한 지 1년 만에 화순 빨치산 90%가 전사하거나 하산하게 되고 일부는 자수하게 된다. 김세원은 마을 근방의 산골에 비밀 아지트를 두고 활동하다가 9월경 친인척에 의하여 체포 형식의 강제 자수 후 풀려난다. 빨치산 색출작업이 한창일 때, 공적인 신분을 회복하기 위하여 1952년 3월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7월경 증명 불소지로 가두 검색에 걸려 제주도 수용연대로 끌려가 강제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4·19가 있기 전 엄혹한 상황에서도 소규모 이념 서클을 통한 사상학습이 조직되고 있었다. 인혁당 사형수인 이수병이 참가했던 암장(岩漿)이 대표적 사례다. 1953년 부산사범학교에 입학한 이수병은 사범학교 동기생뿐만 아니라 부산고등학교, 부산공고에 다니던 친구들도 포함한 사회과학이론서클을 구성하기로 합의한다. 분출 직전의 마그마를 뜻하는 암장은 변혁운동의 분출을 예비하는 상징성을 품고 있다. 암장 성원들은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서적을 중심으로 착실하게 학습을 진행해 나갔다. 암장의 활동은 이미 작은 학습 단위를 넘어 초보적이나마 전체 변혁운동의 핵심적 흐름을 준비하는 과정이 되고 있었다. 암장은 이후 그 구성원들의 활동으로 볼 때 남한 변혁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가볍지 않은 서클이었다. 암장의 성원들은 4·19 후에 건설된 민족민주청년동맹(민민청), 인민혁명당(64년, 1차 인혁당), 인혁당재건위(74년, 2차 인혁당) 등 사회운동조직에서 활동하거나 조직 사건에 연루되어 생사고락을 함께한다.

5·16 쿠데타, 반역의 세월

4·19 혁명 후 이어진 권력 이완기의 광범한 대중투쟁은 이를 이끌어 갈 지도 세력의 부재로 뚜렷한 전망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1960년 7·29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사회대중당은 선거 기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로 선거에 임했다. 김세원은 남로당 출신 활동가들과 협의해 사회대중당 전남도당 창당준비위원회에 참가한다. 그러나 매카시즘적 반공논리와 사분오열 난립해 있는 혁신세력, 지식인 중심의 활동에 대한 의존 등으로 4월 항쟁 후 실시된 7·29 총선은 혁신세력의 실패로 귀결된다.
선거 후 김세원은 서울에 상경하여 전국에서 올라온 동지들과 분열된 사회대중당의 개편과 노선 문제를 숙의한다. 이후 김세원은 사회당 창당에 참여하게 되고 전남도당 청년학생 지도책을 맡게 된다. 김세원은 사회당 주도로 건설된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과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한편 1961년 5월에 들어서 남북 통일운동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이승만은 무너졌으니, 이제 분단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당시 운동세력 내의 공감대를 배경으로 하여 혁신정당, 청년운동, 학생운동은 통일문제를 중심으로 한 운동으로 수렴된다. 그것의 조직적 표현이 바로 '민자통'이라고 할 수 있다. 바야흐로 통일운동은 반통일세력과의 일대 격돌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이수병은 경희대 민족통일연구회를 결성하게 되고, 민자통, 민민청 관계자들과 남북학생회담 추진방향 등 현안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1961년 5월 5일 전국 20개 대학에서 참가한 50여 명의 대표가 모여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전학련) 결성준비대회를 했다. 이들은 5월 20일로 계획된 결성대회를 마치고 남측 대표들이 판문점을 향한 행진을 개시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이에 혁신정당을 포함한 재야단체들도 일제히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민자통은 이를 지지하기 위해 5월 13일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통일 촉진궐기대회>를 시작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환영대회를 개최했다. 학생대표 연사로 나선 이수병은 통일운동의 정당성과 남북학생회담의 필요성을 설파한다. 하지만 이러한 통일의 열정에 일대 시련이 닥쳐왔다. 바로 5·16 군사쿠데타였다.
김세원에 따르면 이 당시 운동의 지도부는 군사쿠데타 음모와 관련하여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시급히 민주 민족 민중역량의 단결을 위해 혁신 제정파(사회당, 혁신당, 사회대중당 잔류파)가 합당하고, 통민청과 민민청을 통합하여 민자통을 협의체에서 통일전선체로 공고히 발전시키는 등 통일전선을 구축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사회당은 예견되는 정세에 대항할 새로운 조직노선 문제를 결정하기 위하여 5월 16일 중앙당 전략회의를 하기로 한다. 중앙당 간부회의 비상 좌담회에서 혁신계 정당, 그중에서 사회당과 민자통, 민족일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예상하고 피신하기로 결정한다.
군사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민통전학련, 민자통, 민민청, 통민청 등 통일운동과 진보적 단체를 해산시키고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하기 시작했다. 김세원이 장기간 피신해 있는 동안 김세원의 아내는 매일 경찰서에 끌려가 남편의 소재와 관련된 심문을 당하게 된다. 공안기관에서는 김세원의 가족에게 간첩활동에 연루된 사실이 없다면 안심하고 자수하라고 권한다. 결국 김세원은 1964년 9월, 5·16후 3년간의 피신을 끝내고 자진 출두하게 된다. 간첩 조작수사와의 싸움 끝에 반공임시특별법이 폐기되면서 면소처분으로 석방된다. 이수병은 민통전학련과 관련해 구속되어 1961년 9월 30일 혁명재판소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는다. 두 번의 감형 후 구속되고 7년의 세월이 지난 1968년 4월 17일 출소하게 된다.

야간업체 ‘회사’ 설립

1968년 출소한 이수병은 옛 동지인 암장회원들이나 민민청, 통민청 동지들을 다시 규합하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사전 모임 후 1971년 9월 경 서도원, 이수병, 우동읍, 김세원, 이00은 전국적인 조직건설에 착수하기로 합의한다. 이들은 이번에 건설될 회사(조직)의 명칭을 ‘경락연구회’로 정한다. 한방의학을 방편으로 합법적인 모임을 가장할 수 있었다. 경락연구회는 각 지역회원 아래 민자연(민족전통의학자연건강연구회-민족자주통일운동연합)을 각각 구성하여 은밀하게 운영했다. 민자연은 철저한 3불 원칙-문서로 남기지 않는다(不文), 조직에 관한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다(不言), 기구·개인 명칭을 쓰지 않는다(不名)-에 의해 운영되었다.
1972년 10월 27일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비상계엄의 서슬 퍼런 세월이었지만 압제에 대한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에서 시작된 유신 반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세력이 결합된 민중운동에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권이 내놓은 게 바로 긴급조치였다. 1974년 1월 8일 박정희 정권은 유신 헌법을 반대·비방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이를 위반한 사람은 영장 없이도 체포·구속할 수 있다는 내용의 대통령 긴급조치 1·2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선포에도 1974년 새 학기에 접어든 대학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독재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학과 일부 고등학교까지 망라된 전국적인 반독재 유신헌법 철폐투쟁이 4월 3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전국협의체인 경락연구회는 1974년 3월 22일 서울에서 긴급 전원회의를 열었다. 모임은 중앙정보부의 혁신세력 말살음모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혁신세력을 제거하는 구실로 이용될 학생데모를 중지시키자는 의견과 지금의 상황이 독재권력의 타격투쟁에서 물러설 수 없는 국면이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논란 끝에 학생 시위를 학생들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기기로 결정한다. 가능한 범위 안에서 전국대학의 일제데모를 축소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3월 28일 무렵부터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주요 간부들에 대한 수배와 검거를 내부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4월 3일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 행위 금지, 학교 내외의 집회·시위 금지, 주동자 최고 사형 등을 내용으로 하는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었다.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에서 계획한 4월 3일의 봉기를 겨냥하여 선포된 초법적인 군사독재의 일대 폭거였다. 중앙정보부는 이미 민청학련을 미끼로 학생운동 지도부와 혁신계를 포함한 지하 활동가들을 싹쓸이하려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계획은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4월 9일 중앙정보부는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민중봉기를 획책한 혐의로 민청학련 및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발표한다. 체포·구속된 지 1년이 지난 1975년 4월 9일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광기가 섬뜩하게 드러난 날 가운데 하나다.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관련 서도원, 도예종, 이수병, 우동읍, 하재완, 송상진, 김용원 등 7명과 민청학련 사건으로 여정남이 대법원 확정판결 다음날 새벽 전격적으로 처형되었다.
김세원은 인혁당 관련 동지들이 처형되고 다수가 중형을 받고 교도소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전국조직을 재건하기엔 시기상조라는 판단으로 우선 광주지역조직을 재정비하기 위해 청년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 중후반 이래 연계를 유지해온 광주지역 후배인 김동근, 박석무, 이홍길, 김운기, 전성회 등이 있었다. 민청학련 세대 중에는 이강(가톨릭농민회), 김남주(민중문화연구소), 김정길, 김상윤(녹두서점), 이양현(들불야학), 윤상원(들불야학) 등 여러 후배들과 접촉을 시작했다. 이처럼 광주(전남)에서는 ML계의 이기홍, 남로당 출신의 김세원 그리고 4·19, 6·3, 민청학련 등이 1960-70년대 전반에 걸쳐 좌익운동의 맥을 이어 가고 있었다.
김세원은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도피 중인 이재문을 만나게 된다. 이재문은 새로운 지하조직(남민전) 건설의 지도를 받고자 김세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김세원은 이재문에게 현재 상황에서는 중앙은 소수 정예로 하고 각도와 부문에 비선(秘線)과 반합(半合)의 이중의 조직 형태가 적합하다는 것과 결정적 시기(전민항쟁)까지는 완벽한 보안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세원은 수배 중인 이재문이 조직을 맡는 것과 조직 건설을 너무 서두르는 조급성을 경계했다. 김세원은 선배로서의 책임감과 조직운동의 중요성 때문에 남민전에 가입하게 된다. 남민전 규약은 민투(민주투쟁위원회)에 가입하여 투사로 일정 기간 활동하다가 남민전(전사)에 승진 가입하게 되어 있으나, 김세원은 곧바로 전사로 가입하게 된다. 1979년 10월 6일 이재문이 검거되고 10월 9일 건국 이래 최대 지하 간첩단 사건이 발표된다. 김세원은 10월 22일 체포되어 광주 도경 대공분실로 연행된다. 1심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의 실형이 선고되지만, 1980년 9월 6일 진행된 항소심에서 군 장교 출신이라는 점과 극도로 악화된 건강상태 등을 고려하여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게 된다.
한편 1980년 5월 18일 광주 시민들 앞에 계엄확대 발표가 방송되었다. 5월 22일에는 도청이 시민군에게 접수되고 오후에는 윤상원, 이양현, 정상용, 김창길 등이 학생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김세원은 5월 26일 윤상원에게서 걸려온 전화 통화에서 시민들을 귀가시키고 본인도 도피하라고 충고를 한다. 하지만 윤상원은 “마무리를 남에게 맡길 수 없어 제가 철야를 할 각오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5월 27일 새벽 최후의 결사항전 끝에 도청에서 전사한다.

정치적 위기와 조직사건

1960-70년대의 일련의 조직사건은 정서상으로나 이념적으로 크게 이질적인 존재들은 아니었다. 4·19 직후에 건설된 통민청과 민민청, 민자통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이후 1960-70년대 한국사회 변혁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민민청에 이수병, 서도원, 도예종, 하재원, 여정남, 송상진 등이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이수병이 속한 암장그룹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사회당 외곽 청년조직인 통민청에는 최백근, 우홍선, 김배영, 김영광, 김영옥, 이재문, 배근식, 양춘우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해방 후 잠복하고 있던 빨치산, 남로당계가 대거 참여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1차 인혁당, 인혁당재건위, 통혁당, 남민전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군사정권이 내걸었던 ‘민족적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했고, 5·16 이후 위축되어 있던 정치적 분위기가 활성화된다.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확산되자 박정희 군사정권은 6월 3일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8월 14일에는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그러나 초기 사건을 맡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은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며 반발, 사표까지 제출하며 기소장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이후 항고심에서 도예종 징역 3년, 양춘우 등 6명에게 징역 1년, 이재문 등 6명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고, 이 사건은 용두사미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중정이 주장하는 ‘북의 지령’에 의한 ‘인민혁명당’의 창당은 허구임을 말해준다. 인혁당 관련자 대부분은 4·19 혁명 시기 혁신정당과 청년단체에서 활동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5·16 군사쿠데타의 탄압을 피하면서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비합법 지하활동을 한 것이다. 따라서 1964년의 인혁당은 오히려 남한 변혁운동세력의 자체적인 결집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학생운동 출신 세력은 4·19 이후 정치적 경험과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통해 이념적으로 성숙되어 간다. 이 당시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의 실패라는 상황에서 더욱 근원적인 문제를 고민하게 되면서 사회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은 대중운동과 전위조직의 관계 문제와 남한 사회의 운동역량과 북한 혁명역량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북한은 4·19 혁명의 실패에 대한 자체 평가 위에서 남한의 혁명역량을 기반으로 지하당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통혁당은 1960년대 이후 지하당 건설노선과 남한의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의 급진화가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집단적인 저항은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의 시위였다. 이를 계기로 ‘유신헌법 철폐 및 개헌’ 요구를 전면에 내건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1973년 12월부터 전개되고, 1974년 1월에는 서명인원이 30만 명을 돌파하게 된다. 이처럼 반유신 분위기가 확산되어 가자 군사정부는 반유신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1974년 4월 9일 민청학련 및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2차 인혁당) 사건을 발표한다.
2차 인혁당 사건은 10년 전에 실패한 ‘인혁당’을 혁신세력이 재건하려 한다는 것으로 중앙정보부의 소위 ‘용공 조작’의 대표적인 사례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박정희가 긴급조치만으로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충격요법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2차 인혁당 조직은 1960년대 후반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변혁운동 내부에서는 1960년대 전반에 걸친 정치논쟁을 통하여 대오를 일원화하고 있었다. 지도부 건설은 고도의 보안을 유지하면서 추진되었고 경락연구회는 지도부 건설의 초기 단계에 해당되는 협의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지역별로는 서울 우홍선, 대구 서도원, 광주 김세원, 부산 이00이 조직을 분담하였으며, 학원·문화계는 이수병에게 위임되었다. 경락연구회는 대중적인 정치투쟁을 추동하기 위하여 학생운동과 연계를 맺는다. 경북대 학생회장을 지낸 여정남은 대구지도부에서 서울지도부로 파견되어 이수병, 김용원의 지도를 받아 민청학련 봉기계획에 착수하고 조직활동을 벌여 나갔다. 하지만 인혁당재건위와 민청학련의 관계는 조직적 관계라기보다는 상호 접근을 모색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김세원의 기록에 따르면 1974년 봄 학생시위 중단과 관련하여 지역별로 학생들의 자율에 맡기자고 제안하는 등 자문하는 정도의 간접적인 연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민청학련 주도세력들은 전국적 조직 결성 및 전국적 동시 궐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학생운동수준을 한 단계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청학련 세대 중 상당수는 출옥 후 재야 민주화운동에 투신함으로써 반파시즘 민주화운동의 기반을 넓혔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일부 그룹은 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농민운동 등 기층 민중운동으로 투신하게 된다. 민청학련 세대 이후 비로소 변혁적 사회운동의 인적 연속성이 시작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유신체제는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저격사건, 1975년 봄 월남 패망으로 말미암은 국민들의 반공적 위기의식 고양을 주요한 계기로 삼아 보다 강고한 탄압체계로 전화하고자 하였다. 그 집약적 표현이 ‘긴급조치 9호’의 선포다. 긴급조치 9호 하에서 학생운동은 이념적 심화를 경험하게 되고, 학생운동의 선진적인 그룹은 노동운동으로 투신하거나 지하 전위당운동으로 선회한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은 비공개 이념서클 및 조직에서 활동했던 진보적인 학생운동가들이 여려 형태로 사회로 이전하면서 기존의 지하 혁명세력과 연결되어 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남민전의 조직구성에 있어 특징적인 점은 1960년대 인혁당(이재문), 통혁당(신향식) 구성원들이 최고지도부를 구성하였다는 점과 그 조직 내에 4·19, 6·3, 민청학련으로 상징되는 학생운동 및 민주화투쟁 출신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남민전은 새롭게 성장한 학생운동세력이 전통적 변혁운동의 흐름과 결합하려 한 시도로서의 의미가 있다.

1960-70년대 노선 논쟁

1950-70년대 치열했던 이들의 투쟁과 조직 활동은 수많은 노선 논쟁으로 드러난다. 현재의 시점에서도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논쟁이 이 당시 활동가들 사이에서 벌어지게 된다. 당시 운동진영의 논쟁은 30-40년이 지난 현재에도 형태를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다.
1967년 당시 선거를 앞두고 첨예한 노선대립이 있었다. 한쪽은 의회진출과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노선(역량비축론)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운동을 선두로 민중들의 광범위한 봉기를 통하여 승리하자는 변혁노선(전위조직론)이었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야당 후보단일화의 과제가 제기되었다. 신민당의 김대중과 국민의 당의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 야권이 분열된 상황에서 윤보선을 중도 사퇴시키고 김대중과의 연합전선을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세원에 따르면 김대중에게 범야 단일후보로서 혁신계가 요구하는 슬로건을 선거공약에 포함함으로써 혁신계가 김대중을 지원할 명분과 계기를 만들어 전국 혁신 세력이 범민족민주전선(반독재) 투쟁에 참여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인혁당과 통혁당의 조직사건은 후배 활동가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엄혹한 현실에서 조직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합활동가들 사이에는 조직의 수위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북한과의 관계 설정에는 대단히 신중한 자세를 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북한의 직접지도는 북과 연계된 조직사건으로 표면화되면서 남한의 활동가들을 위축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직성원이 북과 선이 닿았을 때는 스스로 조직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활동가들의 생존과 재건할 비합법 및 반합법 조직의 사수를 위해서는 북과 일정한 거리를 가져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1970년부터 시작된 중-소 대립 역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소련과 중국은 서로를 수정주의, 교조주의로 몰아붙이며 격렬하게 대립했다. 중-소 논쟁을 통하여 남한 활동가 내에서도 변혁노선에 대한 검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병묵, 이재문 등은 소련의 수정주의 노선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서도원, 도예종, 이수병 박중기 등 인혁재건계열은 마오노선을 받아들였다.
한편 한국 사회운동에서 노선대립의 역사를 통혁-NL과 인혁-CA(혹은 PD) 식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인혁당은 남한 독자노선이었다고 보지만 통혁당은 북한과의 연계노선으로 보는 관점이다. 인혁당의 경우 북한과의 직접적인 연계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김세원과 이수병의 글에도 조직원이 북과 연계되었을 때 조직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혁당 활동의 주요한 형태는 과거 좌익운동에 관여하였던 활동가를 월북시켜 집중 교양을 받은 후 지하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과의 비 연계성이 반드시 남한의 변혁과정에서 북한역량의 무관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비 연계성은 주체역량의 조건, 분단시점보다 남한사회의 객관적 조건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다. 인혁당과 통혁당은 북한의 혁명역량에 대한 전략적 사고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혁명 전통의 복권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에 근거해 선포한 대통령 긴급조치 1호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어서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판결(2010년 12월 16일)이 나왔다. 최근 군사정권 아래서 자행된 용공조작 사건이 당사자와 유가족들이 청구한 재심에서 잇따라 무죄로 판결되었다. 또한 이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인혁당재건위, 민청학련 등 무수히 많은 사건이 군사정권의 고문에 의한 용공조작의 결과라는 사실이 다시 밝혀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고문에 의한 조작’으로 인정받았고, 재심 끝에 2007년 1월 23일 희생자 8명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재심에서의 무죄 판결과 그에 따른 국가의 손해배상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고문과 조작으로 말미암은 반공이데올로기의 극단화는 민중운동 발전에 질곡으로 다가왔다. 또한 당사자들에게 가해진 고문과 사형, 가족들이 당한 고통과 상처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른바 ‘용공조작’ 사건은 단순한 간첩사건도 아니며 단순히 희생으로 취급되어서도 안 되는 고유한 운동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의 사상과 활동을 복원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변혁운동의 역사적 전통을 복원하기 위함이다. 또한 그것은 역사에 온몸을 던져 치열하게 싸우고 숨져간 혁명가들의 진정한 복권을 이루는 첩경이 될 것이다.
1950-70년대 격변의 시기에 소년 빨치산과 사형수, 그리고 광주항쟁의 전사가 있었다. 선배 혁명가들의 투쟁과 삶은 단지 개인들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각인된 역사적 흔적이다. 그들의 인생은 역사 속의 전설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정확히 기억하고 재구성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이들의 비극적 역사를 딛고 민중들이 투쟁의 거대한 함성을 열어젖히는 1980년대로 진입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이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밑거름 삼아 새로운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주제어
반전평화 이론/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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