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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9-10.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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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컨 폴리의 경제학사 강의 『아담의 오류』

송명관 | 회원
경제위기 논란이 일상화된 요즘, 『아담의 오류』(후마니타스, 2011)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참 제목을 잘 지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아담’이라는 태초의 인간과 우리가 믿고 신봉하는 자본주의 ‘교리’의 이미지가 서로 겹치면서, 거기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 듣는 우리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서평을 부탁 받기 두 달 전부터 틈틈이 읽고 요약 정리도 해보았지만 쓰기가 쉽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독후감’을 쓰기로 맘을 먹었으니, 독자 여러분들도 책을 읽으며 느낀 ‘감상’의 기록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흰 가운을 입는 경제학자 이야기

미국에 어떤 경제학자는 강의할 때 실험실에서 입는 흰 가운을 걸치고 강의한다고 한다. 그 이유가 경제학은 과학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에겐 이미 경제학이 과학이 아니라 종교가 되어버린 듯하다. 이렇게 경제학을 종교처럼 떠받드는 현상을 우리도 주변에서 종종 관찰할 수 있다. 경제신문의 어느 논설위원은 TV 토론에 나올 때 마다 경제논리의 원칙이라는 말을 첫 마디로 시작하면서 훈계조의 강연을 늘어놓기 일쑤다. 증권시황을 중계하는 케이블 TV의 유명한 투자상담사와 고객의 대화는 마치 울먹이며 간증하는 신도와 이를 어루만지며 기도하는 신의 대리자 간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첫 번째는 경제학자로서, 두 번째는 정치적 이데올로그로서, 세 번째는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길 바라는 투기꾼으로서, 다들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모두들 바라는 건 자본주의가 흔들림 없이 꿋꿋이 발전해야 한다는 신념이다. 그래야 자신의 학문적 위상도 높아지고, 정치적 입지도 튼실해지고, 은행계좌의 잔고가 늘어난다.
“정치논리는 배제하고 오로지 경제논리로만”, “신물 난 여의도 정치를 멀리하는 CEO 대통령.” 우리는 이미 경제논리를 종교화하는 대통령을 선출했다. 그리고 4년을 보내고 있다. 여기저기서 욕먹고 있는 대통령을 다시 언급하자는 게 아니다. 우리 삶에 내면화되어 있는 경제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정치적 순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언제나 우리 행동을 검열한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실제로 ‘경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상당히 ‘비경제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이비 신자이며, 사이비 종교의 사이비 신자이기에 지극히 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합리적’ 인간이다. 그런데 기도회 때마다 신의 대리자는 신도들에게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자중할 것 강요한다. 그리고는 뉘우침과 자학의 간증이 벌어진다. 자신의 ‘인간적인’ 행동에 대해 구원받기 위해서. 흰 가운의 경제학자처럼 말이다.


경제신학으로의 초대: 스미스의 오류

저자 던컨 폴리는 부제목에서 말하듯이 경제학을 경제신학이라고 평가한다(이 책 영어판본의 부제는 ‘경제신학 안내’이다). 사회과학의 꽃으로 평가받았던 경제학이 여기저기서 두들겨 맞는 요즘, 그 경제신학의 위기가 태초 탄생에서 오류로 뒤엉킨 교리들 때문이라는 지적은 간명하면서 날카롭다. 왜 이기적인 개인의 행동이 결국 사회전체의 부를 증대시키는가? 이에 대한 논리적 근거는 『국부론』 어디를 찾아봐도 없다. 다만 몇 가지 설정에 근거한 직관적 추론만 있을 뿐이다. 마치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자연현상을 보고 우주만물을 통치하는 신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과 같다.
이기심의 추구가 긍정적인 이득이 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스미스는 적대적인 시장 관계가 분업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고, 사적 소유관계가 수반하는 분배적 불평등과 도덕적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어떤 대안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 주장을 제기하지 못했으며, 그의 도덕적 관점과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결합시키려고 할 때도 일관되지 못했다. 그래서 스미스는 경제 발전의 선순환이라는 ‘빛나는’ 전망과 경제학이 더 큰 정치사회적 틀에 포함될 수 있다고 사고함으로써 이 상반되는 관점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 계승자들은 이 풀리지 않는 쟁점들을 붙들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미시경제학 강사의 푸념: 신고전파 한계주의자들의 편의적 발상

지난 겨울학기 계절수업을 청강하였다. 경제학 대학원을 가고 싶어 모처럼 오랜만에 캠퍼스에서 젊은 학생들과 수업을 들었다. 미시경제학을 강의하는 강사의 첫 수업 첫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앞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강의할 내용들의 이론적 전제들 중에서 우리 현실과 맞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딱 하나 정도 있을까요?” 처음에는 의아했던 강사의 푸념을 매회 수업을 들을 때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의 효용함수가 존재한다는 가정. 그리고 그 무수히 많은 각 개인들의 효용함수를 대표하는 함수를 설정할 수 있다는 가정. 사회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재화에 대해 수요와 공급의 곡선을 설정한다는 가정. 이 모두 검증되지 않는 대전제들이다. 개인들이 자신의 효용함수를 알고 거기에 맞게 최적의 해를 구해 자신의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는가? 그렇지 않다. 대부분 자신의 선호와 취향에 따라 각자의 ‘합리적’ 선택을 할 뿐이다. 오히려 이렇게 합리적으로 선택한 개인들의 행동들이 서로 충돌하는 역설이 무수히 많이 관찰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그 효용함수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시시각각 변한다. 더구나 새로 쏟아지는 대체재와 보완재의 모든 정보를 알고 그때마다 효용함수를 만들 수 있을까? 설령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대푯값을 추정한다 하더라도 개인들의 합리적 행동이 그 대푯값으로 수렴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던컨 폴리는 경제사상사에서 가장 기이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가 리카도 경제학이 이후에 앞서 언급한 비상식적 전제들이 난무하는 ‘신고전파 경제학’ 즉, ‘한계주의자’들에 의해 대체된 것이라 짚는다. 한계주의는 사전에 결정된 공리집합의 틀 내에서 경험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연역적이고 수학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이들은 효율성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 정태학과 할당배분을 주요 주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균형을 현실 속에서 달성되거나 근사화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들의 논증방식이 수학적 계산과정을 거치기에 상당히 견고한 틀을 갖춘 것처럼 보이나, 수학에서 허용되는 전제 설정의 자유로움을 이용해 현실 제약을 무시하거나 축소, 왜곡한다. 수학의 창조성을 ‘편의’대로 사용하는 모든 사회과학적 분석방법은 항상 현실 타당성에 대한 자기검증과 긴장감을 필요로 한다. 한계주의자들은 스스로가 리카도의 논리적 방법과 지대론을 확장했다고 주장하지만, 리카도가 경제학적 논거의 유일한 논리적 기초로 노동가치론을 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주의는 노동가치론을 거부했다. 이 대목에서 이들 한계주의자들의 ‘편의적’ 발상이 얼마나 자의적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처럼 한계주의적 접근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상적이고 자의적인 비약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계주의자들은 개인이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함으로써 균등화되는 한계효용의 비용과 현실 경제의 실제 시장가격을 매우 유사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전체 경제를 하나의 합리적 자원할당 과정으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유비가 성립하려면, 사회가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상품의 양을 주어진 것으로 간주해야 하고, 이에 따라 그런 상품들의 상대적 희소성이 한계효용과 가격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은 시장가격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이것이 정태학적 자원할당을 목표로 하는 이들의 오류이다. 무엇이 종속변수이고 무엇이 독립변수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가역적 방법으로 비가역적 현실세계를 설명하려니 현실 제약을 뛰어넘는 가정을 남발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시간 제약의 개념이 없으며, 현실의 비가역적 진화 과정의 동역학을 놓치거나 무시한다.
이들의 주요한 설명 방식 중 하나인 한계주의적 시장가격에 대해 살펴봐도 이들이 시간에 대한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경제에서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현재 상품의 한계효용과 효용을 규정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그래서 한계주의 이론의 가격설명이 완결성을 갖추려면 미래의 기대에 대한 이론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신고전파의 대응은 ‘합리적 기대’라는 가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들이 마치 현재 시점의 일관된 수요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미래 가격 및 미래의 우발적 사건들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합리적 기대 가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이 현대 신고전파 경제학의 가장 큰 약점 가운데 하나다. 빈번히 일어나는 금융시장의 극심한 변동성을 봐도 알 수 있듯, 정보의 비대칭성에 처한 각각의 개인이 미래 가치에 대해 ‘합리적 기대’를 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전학파가 장기 평균 가격 개념을 통해 경제 변동과 시간을 다루려고 했던 것과 달리 신고전파는 분석의 초점을 단기로 확고하게 제한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간의 제약이 반영되지 않는 전제 설정과 수학적 도구를 이용해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해를 구하는 과정에 집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석적 전략은 인간의 경제생활이 갖고 있는 복잡한 시간 제약적 측면을 연구하는데 적절하지 않다. 시간의 제약을 받는 현실은 항상 시간에 따른 동역학적 진화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시간의 제약을 넘고자 하는 시도는 스스로 신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과 같다. 매순간 주어진 모든 정보를 파악하고 그래프를 그려 최적의 해를 구하는 것을 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할 수 있겠는가. 한계주의자들은 어설프게 신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크루그만의 역설 혹은 본심?: 케인즈주의자의 자본주의 전망의 부재

얼마 전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크루그먼이 한 방송에서 ‘가짜 외계인 침략론’을 주장해서 큰 논란이 일었다. 그는 “만약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우리는 그것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무언가를 개발해야 한다”며 “그 과정에서 인플레이션과 재정적자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며 현재의 경기침체는 당장 18개월 안에 해결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현재 미국에 닥친 경제위기에서 부채는 관건이 아니다”라면서 “2차 세계대전의 군수산업이 대공황을 끝냈다”라고 덧붙였다. 문맥상 그가 전쟁을 불사하자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1930년대 대불황이 2차 대전을 통해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이는 그만큼 현재의 미국 경제가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으며 위기 탈출을 위해서는 대규모 경기부양책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총수요관리정책’으로 요약되는 케인즈주의의 ‘보이는 손’의 처방이 대불황 이후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를 이끈 주춧돌이 되었음은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후 케인즈의 교훈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케인즈주의 재정정책이 상시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실제 케인즈 자신은 언제나 장기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주 인용되는 그의 경구 가운데 하나는 “장기적으로는 우리 모두 죽는다”이다. 또한 그는 장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끊임없는 단기의 연속만이 있다고 주장했다. 던컨 폴리는 이 대목에서 이것이 경제와 같은 복잡계의 작동에 대해 매우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라 말한다. 단기적인 힘이 순간순간 경제의 현실 경로를 규정할 수도 있지만, 단기적 과정을 경향적으로 장기적 균형에 이르게 하는 포괄적인 교정력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일지 모른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를 이러저런 방식으로 믿고 있지만, 매우 세련된 기술을 사용한다 해도 이런 장기적인 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케인즈는 「우리의 자손들을 위한 경제적 전망」이라는 글에서 자본주의의 장기적인 운명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조심스레 제시한다. 그의 전망은 리카도의 정상상태와 매우 유사하다. 그는 총수요가 대략 60년 정도에 안정화될 수 있다면, 급속한 자본축적의 결과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생활수준이 엄청나게 상승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본의 한계 생산성이 제로가 되는 지점까지 자본축적이 진행되면, 이윤율과 이자율 역시 매우 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정치적 혁명 없는 자본가 계급의 효과적인 소멸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면, 케인즈의 전망을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60여 년이 흐른 지금을 보자. 케인즈의 예언대로 전후 자본축적의 ‘황금시대’가 펼쳐졌고 노동생산성이 거대하게 증가하면서 선진 자본주의 시민들의 생활수준 또한 향상되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이런 긍정적인 발전은 케인즈가 희망한 정도로 자본주의적 경제생활의 갈등과 긴장을 제거하지는 못했다. 이윤율은 제로로 떨어지지 않았고, 금리생활자들도 제거하지 못했다. 생산성 향상에 비례해서 자원고갈과 환경 파괴가 벌어졌고, 자본주의의 세계화 속에서 불평등한 분배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그리고 2011년 현재 계속되는 금융위기 속에서 크루그만과 같은 케인즈의 후예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여기저기서 토해내고 있다. 심지어 케인즈 자신이 목격했던 그 끔찍한 전쟁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케인즈 자신이 고백했듯 장기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던 그에게 지금의 혼란에 대해 답을 요구하는 것은 맞지 않다. 이로써 그의 ‘단기적’ 처방이 이후 수십 년에 이르는 ‘중장기적’인 황금기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당시는 효과적인 결과를 얻었을 지라도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며, 시간에 따른 자본주의 동역학의 변화가 이제 케인즈주의의 유효성을 의심케 하고 새로운 분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의 케인즈주의자들이 60여 년 전의 케인즈처럼 단기의 연속이 장기적 과정을 이루는 것이라 믿는다면, 버냉키의 추가적 수량완화와 지속적인 국가채무상한 연장을 유일한 대안이라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비관주의자 루비니도 이것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노벨상 수상자 크루그만 조차 말하고 있지 않은가, 전쟁이 대안이라고.


신학에서 과학으로: 경제학 비판과 정치

던컨 폴리는 ‘아담의 오류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자연법칙에 필적할 만한 특정한 경제법칙이 있다는 믿음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방법에 따라 사람들은 살고 행동하며 경제 데이터로 측정 가능한 질서를 발생시키지만, 이런 통계적 현상을 보편적 원칙으로 격상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경제학자들의 어리석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이 매번 상기시키는 것처럼 분업의 확대는 잠재적 경제 잉여를 창조하며 그 잉여를 실현시킬 시장 교환의 가능성을 열어 놓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 현상은 ‘인간본성’ 또는 인간 삶 그 자체의 보편적이고 불가피한 표현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이런 제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인간들이며, 만약 그들이 이런 제도들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이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제 경제학에 대한 낡은 교리를 걷어내고 그에 대한 비판과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던컨 폴리는 과학이 갖는 경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과학의 경계를 사람이 자의적으로 허물 때 종교가 되고 만다는 점을 우리에게 『아담의 오류』를 통해 지적해 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현재 만연한 경제관념과 종교화된 경제원칙에 대해 윤리적인 비판과 대안을 찾길 권하고 있다. 반(反)경제학적 편향이 아닌 이론의 한계를 이해하고 그 경계를 탐구하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비윤리적 효과에 대해 저항하고 현실을 변화시킬 정치적 선택을 조직하라고 말하고 있다.
주류경제학에서 촉망 받던 젊은 학자에서 시작하여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신해석’의 선구자로 남은 던컨 폴리는 정년퇴임 후에도 자신의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파란만장한 학문의 과정만큼 현대경제학을 둘러싼 쟁점도 언제나 불꽃이 튀는 지적 생산의 현장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 지식의 현장에서 이론 투쟁은 항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동역학적 진화과정을 분석하기 위해 아리기와 뒤메닐의 분석을 종합하고 ‘자본축적의 로지스틱 가설’을 제기한 윤소영 교수의 연구 역시 그러하며, 그에 대한 우리의 활발한 검토가 대안세계화 정치를 만드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누가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운동주체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할 몫이다. 『아담의 오류』를 통해 우리가 얻을 현재적이고 운동적인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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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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