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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9-10.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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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노동운동 현황과 쟁점

울산노동뉴스 이종호 편집국장 초청, 노동자운동연구소 3차 월례 워크숍

한지원 |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워크숍의 취지

노동자의 도시 울산에서 벌어지는 일은 언제나 노동운동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곤 했다. 민주노조 운동이 폭발한 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부터, 노동법 개악 이후 정리해고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98년 현대차 점거 파업, 그리고 작년 말 불법 파견 문제를 전국적 쟁점으로 다시 만들어낸 현대차 비정규직 지회의 1공장 점거 파업까지 당대의 핵심 노동 의제들이 울산에서 투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울산의 노동운동은 한국 민주노조 운동의 가장 곤란한 문제들이 공존하고 있기도 하다. 울산에서는 실리주의 노동운동, 비정규직과 연대하지 못하는 정규직 운동 등 98년 이후 본격화 된 민주노조 운동의 핵심 문제점들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
노동자운동연구소에서는 경주 노동운동, 구미 노동운동에 이어 5월 27일 3번째 워크숍으로 울산 노동운동의 현황과 쟁점을 살펴보았다. 발표는 1988년부터 현재까지 울산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울산노동뉴스 편집국장 이종호 동지가 해주었다.


울산 노동운동 역사

이종호 동지가 울산에 내려간 것은 1988년 5월이었다고 한다. 당시 울산은 이미 전국의 수많은 활동가들이 공장과 지역사회단체에서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교수도 노동 문제 조사를 위해 위장취업을 하던 분위기였다고 한다.
울산 민주노조 운동은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에서 노동조합 설립과 이후 6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오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풍산금속 등에서는 어용노조를 급조하여 민주노조 설립을 막았지만 어용노조퇴진과 민주노조설립을 위한 투쟁으로 이를 돌파해내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신규 노조가 자본의 탄압과 회유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1988-1989년 노민추 등의 조직을 통해 노조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1988년 6월 현대차 이상범 집행위 불신임 투표나 1988년 임투에서 위원장의 직권조인을 불인정하며 파업지도부를 중심으로 128일간 진행된 현대중 파업투쟁이 대표적이었다.
이종호 동지는 이 부분에서 현장 활동가 조직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 당시 현장 활동가 조직은 현재와 같은 선거 조직이 아니라 현장 대중투쟁조직이었다는 것이다. 87년 투쟁 이후 선출된 노조가 민주노조 역할을 하지 못함에 따라 현장 활동가 조직들이 파업지도부를 꾸려 공식 지도부를 무력화하거나, 노민추를 꾸려 현장을 장악해나갔다. 일종의 현장의 이중 권력 상태가 88년부터 이어졌다는 것이다.

“1988-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지도부, 1991년 현대자동차연합투쟁위원회(현연투), 1995년 현대차 양봉수동지 분신공동대책위원회(분신공대위) 등이 바로 대표적인 현장대중투쟁조직들이다. 1988-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 당시 파업지도부는 어용 집행부에 맞서 부단히 현장의 이중권력을 만들어내면서 투쟁하는 대중들의 목소리와 의지를 직접 반영하고 그 지도력을 즉각적으로 검증받았던 명실상부한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기관이었다. 1991년 현연투는 노민추, 구속해고동지회(구해동), 공동소위원회(공소위), 민주연합대의원회(민대), 풍물패연합 등 당시 현대자동차 민주세력이 총결집하여 만들어졌다. 현연투는 1991년 5월 투쟁에서 노동조합을 제낀 채 연일 4,000-5,000명의 조합원들을 직접 이끌고 공장 안 대규모 집회와 시내 거리행진을 감행한 후 격렬한 반민자당·반노태우정권 거리투쟁을 벌여냈다. 1995년 현대자동차 양봉수 동지 분신투쟁 당시 현장활동가들이 사업부별로 즉각 투쟁대오를 꾸리고 전공장에 걸쳐 분신공대위를 결성함으로써 노동조합과는 무관하게 바로 파업투쟁을 벌였던 것도 노동조합을 뛰어넘는 대중투쟁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현장대중투쟁조직과 노동자들의 분출하는 투쟁을 바탕으로 1990년대 초 내내 울산에서는 쉬지 않고 투쟁이 펼쳐진다. 1990년 4월 25일 현대중공업에서 골리앗 투쟁이 펼쳐지고 28일에 현대차 노동자들은 정권의 미포만 작전(경찰과 군인 1만 5천 명이 미포만에서 육해공으로 골리앗을 진압하려 했던 작전)을 지연시키기 위해 수천여 명이 가두 투쟁을 진행했고, 마창노련의 동맹파업을 시작으로 전노협은 5월 총파업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노총 사업장들마저 임금 인상을 내걸고 투쟁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에서 시작된 투쟁이 정치 투쟁으로 발전해 나갔다.
1991년 현연투는 대중투쟁을 통해 그해 9월 3대 노조 선거에서 이현구 집행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현구 집행부는 출범과 동시에 3중고에 부딪히게 되는데, 집행경험은 없는 상태에서, 조합원들의 기대는 매우 컸고, 자본은 청와대까지 나서 집행부를 압박해왔다. 3대 집행부는 1991년 말 성과급 투쟁을 벌이며 자본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공장점거까지 시도했지만 다음해 1월 21일 공권력과 대치 중 퇴각하게 되고 이후 500여 명이 구속 수배 징계되며 노조 집행부가 사실상 와해되었다. 사측은 대의원회의실까지 폐쇄했다. 하지만 현장 활동가들은 부산대에 수배자들을 중심으로 장외 집행부를 꾸리며 조직을 정비했고, 1992년 8월 4대 윤성근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4대 집행부는 김영삼 정권의 긴급조정권을 돌파하지 못하고 임투를 마무리하며 집행부를 내려와야 했다. 93년 5대 임원선거에서는 최초로 민주노조 진영이 정갑득과 김강희 후보 진영으로 나뉘어졌으며, 그 결과 이영복 어용 집행부가 들어섰다.
1991년 대량 구속 수배 사태 이후 1992년부터 93년까지는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모두 지리한 노조 정상화 작업이 펼쳐지던 시기다. 노조 정상화 과정과 이후 투쟁방향을 둘러싸고 논쟁하며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현장 정파가 탄생했다. 이영복 집행부는 현장조직에 대해 갖가지 탄압을 벌였고, 현장조직들은 ‘노동자의 길’(노길)을 창간해 상호 소통했다. 95년 이영복 집행부가 재선에 성공하며 현장탄압이 더욱 거세졌고, 그 와중에 양봉수 열사가 분신으로 이에 항의하는 투쟁이 펼쳐졌다. 침체되어 있던 현장활동가들은 6월 대책위를 조직하고 비공인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투쟁의 성과로 8월 ‘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 투쟁위원회’(민투위)를 결성함으로써 오랜 공백을 뚫고 현장민주조직을 재건했다. 그리고 그 해 6대 집행부 선거에서 정갑득 집행부를 출범시키게 된다. 하지만 민투위는 이후 여러 계기를 거치며 계속 분화했다.
96-97년 총파업은 한국 노동운동에서 역사적인 투쟁이었으며, 울산 노동운동에도 그러했다. 울산지역 민주노총 사업장의 파업 참가율은 거의 100%에 육박했었다. 이종호 동지는 96-97년 총파업이 보여주었던 노동자 정치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대선 정치로 수렴된 문제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인간선언’이었다면 96-97년 총파업투쟁은 한국 노동자계급의 ‘정치선언’이었다. 민주노총은 이 투쟁으로 합법화를 뛰어넘는 지위를 얻어냈고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총파업투쟁으로 한국노총 산하 노동조합들의 한국노총 탈퇴와 민주노총 가입이 늘어났으며 이름만 있고 활동이 없던 ‘휴면노조’들이 상당수 정상화됐다. 미조직 노동자들 또한 이 투쟁으로 노동조합 결성의 필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 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세계 노동자들에게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투쟁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투쟁으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이 국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96-97년 총파업투쟁은 19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최초의 정치총파업이었고 노동자정치, 총파업정치의 힘과 가능성을 보여준 투쟁이었다. “1990년의 정치적 총파업이 노동운동탄압분쇄, 전노협 사수를 위한 방어적 투쟁이었다면 1996-97년 정치총파업은 노동법 개악과 재개정을 둘러싼 공세적 투쟁이었다. 1991년 5월 투쟁에서 거리정치와 현장정치가 분리됐고 거리정치를 현장정치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면, 1996-97년 총파업은 이 둘을 역동적으로 통일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노동자 정치가 아니라 1997년 대선 정치로 수렴되는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이렇게 투쟁이 끝나버린 후과는 1998년 대규모 정리해고로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1991년 이후 계속 무쟁의 상태였고, 결국 현대차에서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이 7월에 펼쳐졌다. 1997년 7대 집행부 선거 준비 과정에서 정갑득 전 집행부 측이 실노회를 결성해 나간 상태에서 선거가 치뤄졌으나 민투위가 승리하고 김광식 집행부가 출범했다. 김광식 집행부는 36일 간 점거파업을 이어갔지만 결국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며 파업을 종료시켰다. 5천 명 이상의 조합원들이 결사 항쟁 분위기를 이어갔고, 경찰 병력도 진입을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집행부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한편 당시 무급 휴직자가 대규모로 발생했는데, 이들 중 장사하다 파산한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이들이 복직된 이후 정리해고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보수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1997년부터 1998년 정리해고 투쟁 이후까지 민투위는 계속 분화했다. 1997년 선거 준비 과정에서 정갑득 전 집행부 진영이 실노회를 꾸렸고, 1998년 점거 파업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서 김광식 집행부 진영이 미래회를 꾸렸다. 이후 박유기 등도 이탈하며 현재 형태의 현장조직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현장 조직들은 이른바 정파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현장조직 간 경쟁으로 현장 활력의 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2001년 초에는 울산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사내하청 노조인 INP중공업 사내하청 노조 투쟁이 벌어졌다. 노조 설립 후 노조 간부에 대한 탄압 및 조합원에 대한 대규모 계약해지가 이어졌고, 현장조직대표자회의, 지역사회단체 등이 연대 투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곧이어 효성, 고합, 태광 화섬 3사 투쟁이 진행되었다. 효성에서 시작된 투쟁은 대규모 용역깡패와 공권력 투입 이후 6월 12일 지역 화섬 공동 투쟁으로 발전했다. 한편 현대차 이상욱 집행부는 7월 총파업을 약속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했다.
2003년 3월에는 현대차 근골격계 투쟁이 진행되었는데, 현장조직이 집행부 선거 외에 오래간만에 대중적 사업을 전개한 투쟁이었다. 민투위 간부들이 대우조선에서 교육받은 내용을 토대로 진행한 이 투쟁은 현장 교육, 현장 선전 작업을 현장조직이 직접 진행하였으며, 부산에서 의사를 모셔와 직접 현장 검진을 하기도 했었다. 이후 집단 요양 투쟁과 3명이 구속된 근로복지공단 점거 투쟁으로 이어지며 산재 인정을 받아내었다.
같은 해에는 비투위가 구성되어 현대차 사내하청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했다. 비투위는 내부에서 1사1조직 형태로 갈 것인지 아니면 독자노조를 유지할 것인지를 두고 내부 논쟁이 있기도 했다. 당시 대의원대회에서 정규직 대의원들이 비정규직 조직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어 역설적으로 1사1조직이 통과될 수도 있었는데, 비투위 내부 결정으로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종호 동지는 이 대목에서 몇 가지 의견을 피력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1사1조직하고, 비투위는 현장대중조직으로 남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비투위는 오히려 공동소위원회연합(공소위)을 참조해 볼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공소위는 규약상 노동조합 공식체계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노동조합의 공식 의사결정과정에서 아무런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없고 집행에서의 권한 또한 없다. 그래서 실제 공소위는 스스로 부서별, 사업부별, 전공장 체계를 꾸리고 출범식도 독자적으로 해왔다. 노동조합의 맨 밑바닥에 있으면서 동시에 노동조합 바깥에 있는 셈이다. 공소위는 주요 시기에 자신의 입장을 대중적으로 표명하여 현장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고 대의원회와 대립하여 소위원회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소위원회는 활동가를 발굴하고 훈련하는 풀이고, 많은 현장활동가들이 소위원회를 통해 활동에 입문해왔다. 공소위는 노동조합 대의원체계와는 달리 현장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의 일부로 인식되고 그만큼 소위원과 대중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소위원이 현장 대중들 안에서 투표를 통해 선출되고 있지는 않지만 전공장 공소위는 노동조합의 다른 체계들과는 달리 현장의 직접성을 담보로 커다란 대중적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울산에서는 이후 2006년 울산과학대 투쟁을 지역연대투쟁을 통해 승리로 이끌며 오래간만에 지역에서 승리 분위기를 만들었고, 2008-2009년 미포조선 용인기업 투쟁을 거치며 울산 민주노조 운동 진영의 무너진 연대를 복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울산 노동운동의 과제

이종호 동지는 울산노동운동 역사를 반추하며 현재 생각해봐야 할 화두 중 하나로 ‘과소비-과노동 체제’ 를 지적했다. 소비 수준을 맞추기 위해 초장시간 노동을 감내하고 살아가는 울산 노동자들의 의식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소비와 과노동의 악순환을 끊어내지 않고서는 현재 울산 노동자들이 변화할 계기를 찾기 힘들다고 진단했다. 노동자운동의 과제에 대한 이종호 동지의 말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심야노동 철폐와 주간연속2교대제 쟁취를 넘어 주35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더 단축시켜야 한다. 시간급제를 없애고 월급제를 정착시켜야 한다. 비정규직과의 차별을 줄이는 데서 더 나아가 비정규직 없는 공장, 비정규직 없는 사무실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운동의 사회적 확장과 재구성을 위해 지역사회운동과의 연대와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퇴직 이후의 삶을 집단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젊은 활동가들을 키워내야 한다.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노동운동의 미래를 제대로 설계할 수 있다.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을 해야 하는 청소년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처지에서 미래를 바라볼 때 자기 세대와 자식 세대를 위해 노동운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현재의 이익만을 좇아갈 때 자식 세대는 점점 더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게 된다. 내 자식만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만들지 않으려고 휴일도 없이 밤샘 노동해 번 돈을 사교육비로 쏟아붓는 ‘악순환’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
1987년 우리는 한낱 기계의 부속품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임을 선언했다. 자본의 노예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주인임을 자각했고, 1996-97년 우리 노동자가 정치의 주체임을 역사에 알렸다.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은 빛바랜 깃발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자본주의를 넘어 우리 노동자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가고자 하는 꿈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민중의 삶을 옥죄면 옥죌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커져갈 것이다.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되고, 함께 걷는 걸음 하나하나가 뒷 사람의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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