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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4.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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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③ 두 사람, 같은 시대 다른 길] -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장용경 |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졸
1.

몇몇 국회의원과 광복회의 친일파 명단 발표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다. 1980년대 이전에는 민족이라는 관념이 없었으므로 친일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다는 억지논리를 만드는 사람부터, 명단에 들어있는 사람 몇몇은 친일행위도 했지만 '민족적'으로 의미 있는 일도 많이 했으므로 공과 죄를 서로 상쇄시키자는 주장도 나왔다. '지도자연'하던 사람들이 그럴 수 있었느냐면서,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에 당혹감을 표현하는 인터뷰도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알고 모르고 라는 식으로 표현되는 이른바 진실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친일명단 발표에 대해 제기되는 반응이, 참으로 진지함마저 잃어버려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하는 그 사실 자체가 문제의 본질이 아닐까. 즉 이 진지함의 상실이라는 것을 생각에 넣는다면, 친일을 했다는 사실을 당사자들이 감추고 싶어했기 때문에 은폐되어 있고, 진실을 드러내는 순간 그들의 기반은 모두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도 순진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뭔가 그들과 우리, 혹은 우리와 그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아니 의사소통이 안되는 구조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 '진지함의 상실'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구체적으로 그 사실을 밝힐 수 없더라도 그 문제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대략적으로 그려보자.

2.

오기영이라는 사람은 해방 당일에 느낀 감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그런 감정이다. 그는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생을 만나러 자전거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풋낯이라도 아는 사이면 서로 붙들고 반기었다. 사람마다 사사로운 혐의나 미움을 모두 잊어버리고 서로 즐기고 기쁨을 주는 얼굴이 되었다. 만세 소리에 싸여 전차가 지나갈 때마다 나는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자꾸 흔들었다. .... 생각하면 우리는 이제 일본의 압박으로부터만 해방된 것이 아니다. 역사는 다시 봉건시대로 돌아갈 리가 없고 몇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사회제도가 생길 리 없으니 우리는 실로 4천년 역사를 통하여 처음으로 해방되는 백성이다. 얼마나 큰 기쁨인가. 모두 이 기쁨을 즐기는 것이다. 오늘 이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거리에 나와 보지 못하는 사람이야, 어저께까지 동포의 이름을 팔아서 압박자에게 아첨하던 무리요, 거기서 조각권력을 얻어 가지고 동족을 치던 무리뿐일 것이다. 지금까지 겪은 고초가 끔찍하나 나는 오늘 쥐구멍에 숨어야 할 무리에 들지 않고 이렇게 거리에 나서서 민족의 기쁨 속에 섞일 수 있음을 생각할 때에 또 다시 가슴을 벅찼다.

한 점의 의혹도 없이 가슴이 벅찼다. "어저께까지 동포의 이름을 팔아서 압박자에게 아첨하던 무리", "거기서 조각 권력을 얻어 가지고 동족을 치던 무리"만 "쥐구멍에 숨어" 있기만 한다면야 투명한 하늘아래 "사사로운 혐의나 미움"은 모두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날이었을 것이다. 당시 생각한 해방이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 미소의 분할점령에 불과했다는, 또한 '건국의 대업'에 어쩔 수 없이 필요하기에 '쥐구멍'에 숨어있던 친일파를 스스로 불러낼 수밖에 없게 될 것이었다고 말함으로써, 해방에 드리워진 구름을 보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말하더라도, 그 가슴 벅참을 멈추게 하기에는 부족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는 것은 결과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하튼1945년 8월의 하늘은 희망과 투명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3.

그러나 채 2년도 지나지 않은 1947년 2월, 오기영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다가 모를 일이 또 하나 있다. 이들 모리배와 악덕 관리와 친일파의 작폐가 이렇듯 심한 것은 이제 와서 전민중의 일상생활에서 체험하고 남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숙청하라는 주장이 대단히 극렬한 사상의 발로로 인정되는 점이다.
친일파가 친일 하던 수단으로 또 다시 친미를 하되 진실된 친미가 아니라 제 버릇 개 주지 못하여 사리사욕을 위한 친미인지라, 모리의 원천이 여기 있고 선량한 인민의 생활고가 여기서 말미암음을 누구나 알고 있건만 어째서 이들을 시급히 숙청하라는 주장이 어느 한편의 주장으로만 되어 있으며 그래서 그들을 싸고도는 편에서는 이것이 政爭의 한 표어쯤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오기영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친일파가 친일 하던 '수단'이다. 진실된 친일, 진실된 친미는? 그것을 오기영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잠깐 지나가는 김에 말해 본다면, 진실된 친미, 친일이라는 말에는 오히려 뭔가 '진지함'이라는 것이 있어서, 참회나 반성이라는 개념을 같이 사고할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지금 찾고자 하는 의사불통의 원인으로서는 잠깐 제쳐두자. 다시 한번 말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친일파가 친일 하던 수단'으로서, 다름이 아닌 모리배, 악덕, 작폐, 사리사욕으로 표현되는, 개주어야 할 버릇이었던 것이다. 진실된 친일을 위해서 '조선인'에게 모리배, 악덕, 작폐, 사리사욕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의도 제기될 수 있겠지만, 이건 어쨌든 지금 문제를 위해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개 주어야 할 버릇이 사람들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킨 까닭은 왜일까? 그 이유를 지금에 와서 설명하는 것 보다 이 문제가 개인에게 어떻게 다가갔는가를 당시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자. 김만선의 소설 <귀국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러고 보니 조선 안에서는 그의 발을 붙여 놀 곳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하루속히 떠나야 할 것이 아닐까. 아니 그렇다면 이런 기회에 아주 아내의 청을 들어 돈벌이라도 마음껏 해보는 것이 살 길이 아닐까. 양심이나 체면이나 하는 것도 이제는 돌아볼 계제가 못되지 않는가.

사람들이 해방에 얼핏 맛본 새로 시작한다는 희망은 다시 양아치처럼 살 것인가 올바로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 왔고, 친일파들의 보여주는 버릇은 "양심이나 체면이나 하는 것"을 돌아보는 사람을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무색함을 거치면서 '환경에 순응하는' 사람도 있었고, '투쟁'을 통해 불꽃을 살리려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김만선의 〈노래기〉라는 글에는,

조선이 인민을 위한 민주독립을 한다는 것, 이것은 전 인민의 열망이며 또한 환에게도 확실히 커다란 희망이다. 그래서 당장 고생되는 것을 참자는 말이었다. 참는다는 것은 희망을 전제로 해서만 괴로움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니까 절망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참는다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질질 끌려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던가. 인간생활에 경제적인 조건이 절대한 것으로 그의 아버지는 환 그보다 무식하고 전에 남문창 안에서 어물장사를 하다가 몰락한 장사꾼이지만 꼭 그렇게만 믿는 때문에 참아야 한다는 그의 말이 얼른 통하지 않는 것이나 안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인민위원회가 탄압을 당하면서 친일반역자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어 혼란해진 국내문제가 정리되고 민주독립을 전취하자면 환 그가 생각해도 앞날이 먼 것 같은데 그의 아버지에게 무작정 참으라는 말은 당치 않을 것 같다. 고생을 참고 나가는 데는 한 가지 길이 있다. 이것을 그의 아버지가 알게 해야 한다. 누구 때문에 우리는 못 사느냐? 우리뿐 아니라 몇몇 배부른 친일매국노들은 제외한 모든 조선 사람은 굶주려야 하느냐? 물론 이래서는 안 된다. 누구 때문이란 것도 빤하다. 우리는 그러므로 이 빤한 표적을 겨냥하여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을 속히 결말짓도록 전인민이 결속하는 길, 이 길을 택할 때 비로소 고생도 참아지고 희망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후의 과정이 어떤 과정이었는지는 더 이상의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그 표적이 더 이상 '빤하지' 않게 되었고, 설령 그 표적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침묵 당하거나, "날이 먼 길을 참지 못하고" 절대적인 경제적인 조건에 끌려갔다.

4.

이제 다시 의사불통의 문제로 돌아오자. 오기영의 다음 말은 이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를 준다.

한때 술이 귀해졌을 때 술에다가 물을 타서 파는 자가 있었다. 이것이 더욱 발달한 나머지 물에다가 술을 타서 파는 자가 보통으로 되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물에 술을 탄 것이나 술에 물을 탄 것이나 술과 물이 섞인 것은 매 한가지다. 그렇지만, 술에 물을 20% 탔다면, 80%의 술이라고 하고, 물에 술을 20% 탔다면 80%의 물이라고 해야 옳은데, 이 준거가 되는 술과 물을 말하지 않고 그냥 80%라고 하던 데에 의사불통의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술인지, 물인지, 준거가 되는 것을 밝히라고 하는 것인데,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하여, 중심을 잡을 수 없으니 의사가 불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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