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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탄압을 두려워하랴?

또 하나의 첫 걸음,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서선영 |
서선영 | 전(前)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사무국장


면회실 플라스틱 벽 너머에서 아누아르 동지가 웃고 있다. 그 순간만큼은 근심 없는 아이처럼 천진해지는 환한 웃음. 손목에 갈고리 모양으로 내려앉은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 수갑에 저항하느라 난 상처였다. 아누아르 동지는 괜찮다고 했다. 바깥에 있을 때 보다 보호소 안에서 해야할 일도 더 많고, 단속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으니 머리도 맑아졌다고. 연행되기 전까지 늘 머리가 아프다고 했던 모습이 생각났다. 바깥에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보호소 생활이 괜찮다고 할까, 뭉클함이 밀려왔다. 이런저런 이야기에 면회시간 30분은 후딱 가고, 손을 흔들며 면회실을 나가는 아누아르 동지의 등에는 "보호 외국인"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주홍글씨처럼 새겨 있었다.
5월 17일 청주외국인 보호소



계속된다, 계속된다, 계속돼!

이번이 몇 번째냐? 라고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아누아르 동지가 연행된 후 긴급 대책회의를 위해 모인 날이었다. 머릿속으로 휘리리릭 지나가는 시간들, 장면들.
2002년 9월 2일 새벽 6시, 몇 시간 전까지 함께 회의를 했던 비두, 꼬빌 동지가 잡혀갔다는 전화는 순간 온몸을 팽팽한 긴장감으로 얼어붙게 했다. 곧바로 달려가서 본 두 사람의 집은 아수라장이었다. 질질 끌려가다 벗겨진 신발 짝이 대문간에 떨어져 있고,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이며 옷가지는 마구 뒤엉켜 마치 한바탕 전쟁을 치른 뒤의 폐허 같았다. 여기저기서 모여든 동네 이주노동자들은 근심과 경계의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았지만, 말이라도 걸려고 하면 슬슬 피했다. 투쟁하면 비두, 꼬빌처럼 잡혀가는데, 투쟁하는 사람들이랑 말도 하면 안 된다는 공포가 그들을 엄습했던 때였다.
2004년 2월 15일 오후 1시, 사말 동지가 없어졌다는 전화가 왔다. 설마, 하면서도 팔은 뻣뻣하게 경직되고, 전날 농성장 텐트에서 나오는 내 등뒤로 가지말고 있지, 라고 말했던 사말 동지의 한마디가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명동성당 들머리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농성단 동지들의 표정은 어두웠지만, 묵묵히 농성장의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법무부 직원들이 사말 동지를 납치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긴급 대책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농성장의 이주 동지들은 출입국관리소 앞 집회를 결의했다. 우리의 대표를 연행한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분노했고 힘차게 투쟁했던 때였다.
2005년 5월 14일 아침 8시, 아누아르 동지는 청주외국인보호소라고 했다. 토요일 아침부터 잠도 못 자게 이게 뭐냐며 농담을 주고받지만, 지난 밤 마지막 전화 통화가 못내 마음에 걸린다. 제발 조심 좀 하라고, 괜찮다고 뭐 그렇게 오고갔던 마지막 전화. 몇 시간 후에 아누아르 동지는 30명의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 의해 연행됐다. 이른 아침, 아누아르 동지의 연행 소식에 이주노동조합 샤킬 부위원장과 까지만 사무국장 동지, 지역의 대표 동지들은 전화 연락을 돌리고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정의 동요를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직무대행체계를 만들고 위원장 석방 투쟁, 노동조합 탄압 분쇄 투쟁을 시작했다.
벌써 세 번째다. 투쟁의 가장 앞선 곳에 있는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이 표적 연행된 것. 납치를 방불케 하는 연행에 너무나 무기력하게 당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주변의 많은 동지들은 왜 바보같이 똑같은 실수를 하냐고 질책한다. 대표의 연행으로 이주노동자 투쟁이 받게 될 타격도 타격이려니와, 연행은 곧 추방이기에 함께 투쟁한 동지를 잃는 아픔은 질책을 낳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탄압 없는 투쟁, 강제추방에 대한 결의 없는 투쟁은 이주노동자 투쟁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대표 동지들은 자신들에 대한 표적연행의 위협을 알고 조심하라는 주변의 충고를 듣지만 개 끌려가듯 잡혀가는 이주노동자들의 현실 앞에 끓어오르는 피를 식힐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숨죽이며 살아온 지난 세월을 떨치고자 일어선 투쟁이었기에 탄압을 피하기 위한 기술적인 전술조차 사치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똑같은 실수는 반복되고 있다. 투쟁이 계속되는 같은 이유로 말이다.

이노투본,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그리고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2000년 10월 3일 십여 명의 한국인들로 구성된 <이주노동자 노동권 완전 쟁취와 이주취업의 자유실현을 위한 투쟁본부>(이노투본)가 건설되었다. 고용허가제 당정협의안이 만들어지고, 고용허가제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 예상되었던 시기, '외국인 노동자'로 지칭되는 이주노동자들을 대신해 한국인들의 대리투쟁이 당연시되었던 시기, 노동운동 진영에서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시혜적인 시선을 넘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었던 시기, 바로 그 시점에서 이노투본은 작은 첫발을 내딛었다. 이주노동자 주체의 자기 세력화와 내국인 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 그리고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쟁취를 위한 투쟁을 목표로 운동 진영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던 이노투본은 투쟁하는 사업장을 중심으로 한 연대투쟁을 통해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알려내고 단결을 호소하는 한편, 공단지역의 이주노동자 간담회와 선전전 등을 통해 이주노동자 조직화를 시작했다. 공단지역 및 이주노동자 공동체와의 간담회를 통해 고용허가제 법안에 대한 논의와 정세토론이 시작되었고,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에서 동원되는 활동이 전부였던 뜻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속속들이 이노투본에 결합하기 시작했다.
한시적인 투쟁체로서 이노투본은 이주노동자운동의 중장기적 방향에 대한 고민을 하게되었고, 함께 결합하는 이주노동자 주체들과 함께 노동조합으로 조직전환을 결정했다. 그리고 2001년 5월 19일 평등노조 산하의 이주노동자지부를 창립하게 되었다. 이주노동자 선진활동가 양성과 한국노동자와 연대강화, 이주노동자 노동권 쟁취 투쟁을 목표로 한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는 초기 1년 동안의 활동을 바탕으로 2002년 4월 7일 100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결집한 집회를 통해 이주노동자 대중투쟁의 포문을 열고, 연이은 탄압에 맞서 77일간의 명동성당 농성투쟁, 화성외국인보호소 내 단식투쟁 등 강도 높은 대정부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현장에서의 체불, 폭행 등에 맞서는 현장투쟁을 조직했다. 그리고 2003년 7월 고용허가제 법안의 통과와 함께 광풍처럼 몰아닥치는 강제추방에 맞선 집회 투쟁을 조직하고 정부의 대대적인 합동단속이 시작된 11월 15일 '강제추방 저지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위한 농성투쟁'에 돌입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나긴 투쟁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100여명의 이주노동자로 구성되어 2003년 11월에 시작된 농성투쟁은 2004년 11월 28일까지 장장 380일간 지속되었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투쟁은 이주노동자 정책의 문제점들을 사회적으로 폭로하고, 노동, 시민, 사회, 학생 단체의 연대를 이끌었지만 정작 정부로부터의 실질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기나긴 투쟁은 이주노동자 주체의 성장과 투쟁의지를 더욱 확고히 만든 성과를 얻게 되었다.
2000년 이주노동자 주체의 투쟁을 외치며 시작되었던 이노투본의 작은 첫걸음은 한국인 활동가들의 시행착오와 온갖 불협화음들로 인해 정작 이주노동자 주체의 투쟁으로 가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조합원으로서 투쟁의 마디마디에서 단련되고 성장한 이주노동자 주체는 2005년 4월 24일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건설된 것이다. 서울경인지역에서 모인 10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은 '단속추방 중단! 미등록이주노동자 합법화! 고용허가제 및 연수제도 분쇄! 노동비자 쟁취!'라는 마르고 닳도록 외쳐왔던 우리의 구호를 더욱 절절히 외치며 노동조합 창립총회를 하였다. 전 조합원과 임원이 이주노동자로 구성된 이주노동자 독자노동조합. 지금은 서울경인지역의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이지만, 전국적인 이주노동자 조직에 대한 전망과 함께 산별체계 속에서의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중장기적인 전망을 품고 당당하게 이주노동자 주체의 투쟁을 선포했다.
노동조합의 희망과 투쟁의 확신 속에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은 건설되었지만, 정작 현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대안 없이 몰아치고 있는 것은 단속의 광풍이다. 42만 이주노동자 중 18만이 미등록 이주노동자이고, 올 8월이면 11만이 추가로 미등록이 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폭압적인 단속만이 대안인양 인간사냥을 하고 있다. 노동조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총회를 며칠 앞두고 지역의 활동가들이 대거 단속되어 추방되었다. 특히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의 주요 활동지역의 표적 단속과 주요 활동가들에 대한 연행시도는 노동조합의 존립 자체를 뒤흔들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불안해서 못살겠다고 한다. 한치도 긴장의 고삐를 늦출 수 없는 생활, 옆에서 동료들이 짐승처럼 잡혀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은 어떤 영화의 제목처럼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다'. 더군다나 아누아르 초대 위원장의 연행은 노동조합을 바라보고, 희망을 찾고자 했던 많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실망과 불안을 증폭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아누아르 동지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14일 아침, 샤킬 부위원장은 조합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는 것을 잠시, 아주 잠시 고민했다. 그만큼 많은 동지들의 걱정과 불안을 생각했던 탓이다. 하지만 곧 지역 대표자 회의는 소집되었고, 법무부의 감시와 사찰에도 불구하고 10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은 항의집회를 했다. 비두와 꼬빌이 연행되었던 2002년, 노동조합 조합원임을 숨기고, 조합원들끼리 서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려 했던 그 때와 2005년의 이주노동자들은 너무나 다르다. 투쟁의 고비 고비에서 단련되고, 쓰러뜨려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투쟁의 저력이 몸에 각인된 모습이다. 누가 탄압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지금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은 아누아르 위원장 석방! 노조탄압 분쇄! 단속추방 분쇄! 투쟁을 지속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자, 이제!

이주노동자 투쟁에서는 '시작'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한 고비 넘어서 도약하기 위해 늘 시작해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 이제 시작이다.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을 사수하여 주체의 투쟁을 더욱 강화하고 대중적 조직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 온정적인 연대를 넘어 현장에서부터 이주노동자들을 함께 조직하고 투쟁하는 것, 민주노조 운동 진영에서 이주노동자 투쟁을 더 철저히 엄호하고 함께 해 나가는 것 그리하여 노동자는 하나라는 우리의 외침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또 다른 첫발을 내딛는 시작이다. 언제나 처음이 그러하듯 설렘과 불안함을 동시에 안고 있는 첫걸음이지만, 나는 믿는다.
인간에게 인간이길 포기하게 만드는 극단의 좌절을 가슴에 품고 투쟁의 머리끈을 묶은 이주동지들이기에 믿는다. 온갖 탄압을 뚫고 여기까지 꿋꿋이 온 동지들이기에 난 믿는다. 깃발만 있으면 끝까지 투쟁하겠다던 동지들이기에 난 믿을 수밖에 없다.


동지들, 이것을 기억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정부의 탄압과 고통이 심해질수록 우리가 쉽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승리의 태양은 반드시 떠오를 것입니다. 피땀 흘리는 모든 노동자 승리가 이주노동자의 승리입니다.
2005년 5월 15일 청주 외국인 보호소에서 아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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