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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5.12.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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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반핵평화운동

진재연 | 정책편집부장·반전팀
핵무기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움직임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우라늄 핵폭탄을 떨어뜨림으로써 인류는 역사상 최초로 '핵무기에 의한 집단학살'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사흘 뒤 8월 9일 나가사키에 또 한 번의 핵폭탄이 투하되었다. 두 번의 원폭 투하로 히로시마의 경우 피폭 4개월 후까지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13만5000명이 사망했고 나가사키에서는 전체 인구 19만5000명 가운데 6만4000명이 사망했다. 그 후 5년 안에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방사능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생존자들도 비정상적으로 높은 사망률을 보였을 뿐 아니라 원폭 피해자의 2·3세까지 고통이 이어져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원폭투하 직후 일본이 항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지만 미국은 핵무기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미국은 전후 아시아와 유럽에서 정치·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소련을 견제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핵실험을 지속했다. 1954년 미국은 태평양의 산호섬 비키니에서 15메가톤의 수소폭탄 '브라보'를 폭파시켰다. 이로 인해 일본 어부 23명이 방사능 낙진을 맞았고 그중 한 명은 6개월 뒤 방사능증으로 사망해, 첫 수소폭탄 피해자가 되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폭발한 핵폭탄의 1200배의 파괴력을 가진 핵무기가 출현한 이 사건은 핵실험금지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 세계의 민중들은 인류의 절멸을 초래할 핵무기의 공포를 온몸으로 느끼고, '핵무기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생존의 절대적 과제로 인식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반핵운동의 부침

반핵운동은 1950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태동기를 지나고,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에 들불처럼 일어나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서유럽에서 미국, 일본, 동유럽, 오세아니아 등 세계적 규모로 확산되면서 역사적 대 고양을 보였고, 반전평화운동은 '반핵'운동이었다고 할 만큼 핵 절멸의 위협에 맞선 대중적인 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1970년대 후반부터 반핵운동의 연장으로 원자력 발전에 반대하는 운동도 등장했다. 반면 냉전 이후에는 반핵운동이 퇴조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핵 절멸'에 대한 위기감이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반전평화운동의 쟁점도 분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가별로 다양하게 반핵운동이 전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처럼 폭발적인 대중투쟁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핵무기를 안보의 핵심으로 삼으며 정당화해 온 각 국 정부들의 이념적 조작과 통제가 낳은 대중들의 무감각과 무관심의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핵에 의한 위험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으며, 경쟁적인 핵무기 개발로 인해 그 절대적 파괴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엄청난 인명살상은 물론이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본 것처럼 핵의 위험은 재래식 무기와 달리 살아남은 사람의 생명도 다양한 방식으로 파괴한다. 또한 현재 비축되어 있는 핵무기의 1%만 폭발한다고 해도 지상에서 솟아오르는 먼지와 매연으로 태양광선이 차단되어 극저온이 되고 동식물이 절멸하는 '핵겨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핵전쟁이 일단 일어나면 그것은 이미 한 국가, 한 지역, 한 대륙에 그치지 않고 지구 그 자체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한되고 통제될 수 없으며, 대비하고 보호받을 수도 없다. 그리고 그 피해를 회복할 수도 없다. 대피소를 건설하고 대피훈련을 한다고 해서 핵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핵전쟁이 났을 때 대피소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뿐더러 그들이 대피소를 나왔을 때 세상은 이미 죽은 세계다. 핵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의사협의회는 "핵전쟁이 일어나면 우리 의사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 당신도 죽고 우리도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강대국 정부들이 조장하는 대피와 회복개념을 비판하였다.1)
핵은 인류를 절멸할 것이다. 핵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살아 남는 길은 핵을 폐기하는 것뿐이다. 이는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거짓을 폭로해내고 핵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 아래로부터 '반핵평화운동'을 일구어나가는 속에서만 가능하다. 반핵평화운동이 이렇다 할 흐름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지금 힘 있고 끈질기게 진행되었던 지난 시기의 역사를 돌아보며 교훈을 되짚어 보자.

반핵운동의 초기 전개 (1950년대-1960년대 초반)

1949년 서유럽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결성되고 당시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었던 미국이 유럽에 핵우산을 제공하기로 한 상태였다. 그 해 9월 소련이 미국에 이어 첫 원자폭탄을 실험을 성공하자, 두 강대국 사이의 핵 대결에 말려들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은 민중들의 대규모 반핵운동을 촉발시켰다.
최초로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성격을 띤 운동은 1950년 스톡홀름 어필(Stockholm appeal) 서명운동이었다. 이는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세계평화평의회가 소련의 제창을 받아들여 제안한 것으로서 원폭을 금지하라고 요구했고, 5억~6억 명에 달하는 전례 없이 많은 민중들이 서명에 참가하였다.2)
또한 비키니 섬에서의 수소폭탄폭발을 경험한 일본에서는 원수폭금지운동이 광범위한 대중적 성격을 갖고 발전했고(1954년에 2천만 명, 1958년 3천2백만 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1955년부터 매년 8월에 원수폭금지 세계대회를 진행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영국, 서독, 스웨덴 등에서도 원폭항의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어서 1957년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완성하고 인공위성을 발사하면서 핵전쟁 발발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졌다는 인식은 핵무기금지운동을 크게 자극했다. 이에 1957년부터 1960년 초반에 걸쳐 서유럽, 미국, 일본 민중들의 행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1958년 부활절 때 런던에서 열린 앨더매스턴 대행진에는 10만 명의 민중이 참가하였다.
전 세계의 반핵평화운동을 촉발시킨 대표적인 조직으로 퍼그워시와 영국의 핵비무장캠페인(CND) 운동을 들 수 있다. 이 두 단체는 각각 1955년, 1958년에 시작되어 반핵평화운동의 다양한 부침 속에서도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퍼그워시 운동

CND가 대중적인 조직이었다면 과학과 국제문제에 관한 퍼그워시 회의는 과학자들의 소규모 모임으로 출발했다. 핵무기의 출현은 과학이 갖는 무한한 힘을 과시했고 이러한 과학의 발전이 무조건적인 진보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55년 버트란트 러셀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조지프 로트블랫 등 11명의 저명한 학자들은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의 취지는 핵무기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각 국 정부에게도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권고하는 등 더욱 적극적인 반핵평화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과학자들에게 핵폭탄과 같은 연구 결과물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연구에 임할 것을 촉구했다.
퍼그워시 회의는 이 선언에 자극 받은 전 세계 과학자들이 이 운동을 실천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최초의 회의는 1957년 7월 버트란트 러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 22명의 핵물리학자들이 캐나다의 '퍼그워시'라는 작은 어촌에 모여 핵무기 철폐에 관한 첫 토론을 열면서 시작됐다. 이후 회의는 계속해서 소련·영국·유고슬라비아·인도·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스웨덴·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 개최되었다.
회의가 창립된 이후 여러 해 동안 퍼그워시 운동은 무기통제와 군비감축에 관한 수많은 보고서들을 발간했다. 회원들은 핵무기 개발과 시험을 제한하기 위한 중요한 국제조약을 준비하는 데 이러한 자료들을 활용해왔다. 1961년 쿠바 미사일위기 때 미국과 소련 정책 결정자들의 만남을 주선해 유명해졌고 화학무기금지조약,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등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핵비무장캠페인

영국의 핵비무장캠페인(CND)은 1958년에 결성되어 영국 반핵평화운동의 우산조직 역할을 했다. 전국 규모의 CND는 다양한 지역운동과 결합하며 대중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을 형성했다. CND는 첫째 핵무기 실험의 금지, 둘째 미사일기지의 신축금지, 셋째 비핵지대의 설정, 넷째 핵무기의 제조와 저장금지, 다섯째 타국의 핵무기 취득 방지 등 5개 항목을 캠페인의 목적으로 채택했다.
전국에 걸쳐 수많은 지회, 위원회들이 만들어졌고, 이들 지역조직들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중앙의 집행부에 대해 끊임없이 다양한 압력을 행사했다. CND가 보수당의 핵 공세와 노동당의 애매모호한 입장 속에서도 영국의 일방적 핵무기 포기선언을 의미하는 '일방주의'(unilateralism)를 목표로 내걸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CND는 반핵이라는 단일 이슈를 뛰어넘는 정치적 쟁점을 제기하며 운동을 상승시키지 못했다. CND 집행부는 베트남전 반대시위에 참가하지 않을 것을 공식적으로 결정했고, 인종주의, 주택, 의료 등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철저한 단일 이슈 중심의 '비정치성'과 배타성을 의도적으로 고집한 CND 활동은 핵 위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고양하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광범위한 연대를 창출하지 못했고 핵문제를 정치화하는 데도 실패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CND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평화운동은 때 이른 조락을 맞이했다.

유럽 반핵평화운동의 고양 (1970년대 후반-1980년대)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에 걸쳐 고조됐던 반핵운동은 1980년대에 접어들어 서유럽을 휩쓸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979년 NATO 가입국가들이 새로운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소련의 SS-20 중거리탄도미사일에 대항하여 미국은 1983년 말까지 순항미사일 464기를 서유럽에 배치하고(서독 96기, 영국 160기, 이탈리아 112기, 네덜란드·벨기에 각 48기) 퍼싱 Ⅱ미사일 108기를 서독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서유럽의 정부들이 '전략무기제한협정(SALT)Ⅱ' 이후에 미국이 전시에 핵무기를 이용해 유럽을 방어해 줄 것인가를 의심하면서, 자국이 미국의 '핵우산'에서 제외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네델란드

서유럽 반핵운동이 고양된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1979년 나토의 미국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결정이었지만 그 출발점은 1977년이라고 볼 수 있다. 1977년 카터 미국대통령이 중성자폭탄 생산방침을 밝힌 데 대해 네델란드 민중이 서유럽에서 제일 먼저 반대운동의 횃불을 드높였고 그것이 벨기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영국 등 각 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8년 5월 나토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가맹국들이 10여 년에 걸쳐 군사비를 매년 3% 증액하기로 결정하고,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대한 군사력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방침을 구체화했다. 이처럼 유럽의 군사화가 심화되면서 서유럽 반핵운동은 다시금 대중적 투쟁을 시작했다
네델란드에서는 1977년 결성된 '중성자폭탄저지. 핵군확저지 협동그룹'은 중성자탄이 무엇인지, 그 잔혹한 효과는 무엇인지, 그 개발이 일반적 군비증강에, 특히 핵군비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을 세균·화학무기와 마찬가지로 방치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폭로하며 1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집회를 지역마다 개최했다. 이 운동의 영향으로 네델란드 상원에서는 중성자폭탄의 제조를 찬성하지 않으며 정부가 이 입장을 미국 및 다른 나토 국 정부에게 통고할 것을 요구하는 동의안을 가결했다. 특히 네델란드 반핵운동은 서독 반핵운동에 직접 가담하면서 적극적인 지원을 벌이는 등 유럽반핵운동의 고양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

영국은 네덜란드를 비롯해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아 전진하고, 거꾸로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국제적 연대를 실현하면서 서유럽 반핵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에서 민중의 항의가 최초로 집약된 것은 1980년 10월 26일의 런던 반핵집회였다. CND가 주최하고 노동당과 영국교회평의회가 함께 한 런던 반핵집회에는 7만 명의 군중이 집결, '순항 미사일·트라이던트 반대, 군사비 삭감'을 외쳤다. 이 집회는 1958년 앨더매스턴 대행진 이후 20년 만에 반핵운동을 크게 고조시킨 사건이었다. 또한 CND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오던 마르크스주의자인 톰슨은 유럽핵비무장운동(END)를 조직했다.3) 당시 END는 '대서양에서 우랄까지 비핵유럽'이라는 구호를 내걸면서 유럽에서의 모든 핵무기의 철수를 강령으로 내세웠다.

-그린 햄코먼의 여성들

영국 그린 햄코먼에서 '평화캠프'를 세웠던 여성들은 나토의 핵배치 결정 3주년인 1982년 12월 12일, 기지주위 14km를 여성들이 손을 잡고 '인간사슬'로 포위하자고 호소했다. 1981년 9월에 200km에 걸친 평화행진이 있었지만 이미 핵미사일 배치를 위한 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에 여성들은 비 오는 날에도, 눈 오는 날에도 캠프에 눌러 앉아 버텼다. 그녀들의 투쟁이 알려지자 영국의 다른 11개 미군기지에도 평화캠프가 생겨났다. 1982년 11월 두 번에 걸쳐 캠프가 강제철거 되었을 때 23명의 여성이 체포돼 2주간 투옥됐었지만 다시 캠프로 돌아갔다. 이러한 여성들의 행동은 유럽반핵운동의 상징으로까지 일컬어지게 되었다.
'순항 미사일로 세계가 폭발하는 것을 저지하자'고 모인 이들은 히로시마의 체험을 듣고 가족과 떨어져 캠프에 자리를 잡았고, 캠프에 참가하여 이혼 당한 주부도 있었다. 이들은 '남성들로부터 장난감(핵폭탄)을 빼앗자'라는 슬로건으로 12월 12일의 행동참가를 호소하며 싸웠다. 12월 12일은 영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참가하였는데 3만 5천명의 여성들이 기지를 포위하여 인간사슬을 완성했다.

-서독

나토가 신형 핵미사일 배치를 결정하고 슈미트 사민당 정권이 이를 수락하는 과정은 서독 민중들에게 불안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반핵운동의 불을 당겼다. 특히 1981년 4월 결성된 '군축을 위한 행동하는 뤼덴샤이드 시민의 모임'은 다양한 단체와 개인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광범위한 '통일전선' 형태를 취했다. 단체로는 녹색당, 독일공산당, 독일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 사회민주당청년부, 독일평화협회, 병역거부자동맹, 환경보호운동그룹, 기독교 신도그룹, 절대평화주의자그룹, 무당파시민그룹등이 참여했으며 다양한 직업을 가진 개인들이 참여하였다.
1981년 10월의 집회는 슈미트 정권과 노동총동맹의 방해를 무릅쓰고 30만 명이 참가해 서독 평화운동 사상 최대 규모였다. 사민당 청년부는 공공연히 슈미트 정권에 대해 반기를 들며 반핵을 외쳤다. 이러한 움직임은 제한 핵전쟁의 위기, 미국 핵과 동거하고 있다는 불안과 함께 나토, 즉 미국에 추종하여 군사비는 증액하면서도 전반적인 재정긴축으로 실업 증가를 초래한 슈미트 정권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것이기도 하였다.

-동유럽의 반핵운동

서유럽의 반핵운동은 동유럽 국가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미국의 퍼싱Ⅱ와 순항미사일에 대항해 SS-20을 비롯한 소련 미사일이 배치된 체코와 동독에서는 정부당국의 엄중한 감시와 압력 속에서도 규모는 작지만 끈질기고 강한 저항이 있었으며, 일부에서는 서유럽의 반핵운동과 손을 잡는 움직임도 있었다.
체코에서는 1983년 12월초 브르노의 고등학생들이 반핵평화운동을 조직해 체포되었고 이후 경찰은 그 지역 교사와 학생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브르노 외의 대도시에서도 학생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소련의 미사일배치 반대 서명운동이 몰래 진행돼 관련 지식인 다수가 체포되었다. 또한 몇몇 대공장에서는 노동조합중앙위원회에 반기를 들고 미사일 배치를 반대하고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들은 '미국뿐 아니라 소련에 있는 대량살상무기에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동독에서의 반핵운동은 1984년 들어 정부의 탄압에도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1984년 11월 22일에는 동서독 양국의 반체제 인사들이 소련의 신형핵미사일배치에 항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활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반핵운동의 연대를 위한 움직임이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유럽 반핵운동의 교훈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유럽을 휩쓴 반핵평화운동은 1987년 중거리 핵미사일이 폐기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4) 중거리 핵미사일이 배치되기 직전에 신속한 행동이 조직되어 실질적인 힘을 모았기 때문이다. 또한 미소냉전의 핵심고리라 할 수 있는 유럽에서 펼쳐진 반핵평화운동은 전 세계 반핵평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각 국의 반제운동·민족해방운동과 연대할 수 있는 지반을 마련했고, 특히 동유럽·소련의 반핵운동세력과 연대를 이루어내었다.
또한 유럽 반핵평화운동의 고양은 핵문제를 포함해 미국과 유럽의 군사주의와 냉전의 모순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과 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유럽 반핵평화운동 세력의 일부는 각 국의 운동세력이 명목상의 나토로부터의 철수가 아니라, 나토의 실제 소멸을 의식적인 목표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이러한 탈 군사화가 동유럽 인민들을 희생하면서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바르샤바조약기구의 문제도 제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적극적 중립주의'로 표현된 이러한 입장은 톰슨의 '대서양에서 우랄까지 비핵유럽'이라는 구호와 마찬가지로 당시 서유럽과 동유럽 국가의 핵정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5)
그러나 유럽 반핵평화운동에 위기가 몰아닥친 것은 오히려 중거리 핵무기가 폐기된 이후였다. 서유럽 정부들은 이제 '핵방위'를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받아들였고, 스스로 군사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서유럽의 양대 정치세력인 보수-기독교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합의가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유럽의 평화운동은 미국의 중거리미사일을 거부하는 데에는 영향을 끼칠 수 있었지만, 유럽 군국주의가 쇄도하는 상황을 막아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반핵평화운동은 이렇다 할 행동을 개시하지 못했다.

아시아의 반핵평화운동

아시아의 반핵운동은 피폭국가인 일본을 제외하면 미국이나 유럽의 백만 대행진과 같은 대규모의 동원은 보기 드물었다. 반면 각 지역의 농촌마을이나 소도시를 중심으로 지역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작은 그룹의 저항운동이 끈질기게 전개되었던 특징이 있다. 물론 앞서 언급되었듯이 일본에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대재앙 이후 대규모의 투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대규모 동원이 침체를 겪으며 운동이 쇠퇴하기도 하였고,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역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자발적인 움직임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운동이 정착하였다.

-일본

인류최초로 핵에 의한 끔찍한 재앙을 경험한 일본에서는 자위대나 미군 기지 철수를 위한 마을의 주민운동, 핵잠수함 기항을 저지하기 위한 시민운동에 지역의 노동조합이나 민주단체가 합세하여 평화행진, 연좌데모를 벌이는 등의 지속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남한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었을 때,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을 때 일본의 미군기지 요꼬다 비행장에서 별안간 미군 전투기 엔진이 밤낮 없이 요란한 소란를 냈다. 요꼬다 주민들은 24시간 교대 감시하여 미 전투기의 엔진이 한국 민중들의 동태를 경계하여 대기하고 있음을 감시하기도 했다.

<비핵3원칙>
일본민중들의 투쟁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비핵 3원칙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비핵 3원칙은 1968년 오키나와와 일본에 핵무기를 반입하는 문제에 대해 일본 내에서 반대의 여론이 높아지고 있을 때, 사토에이사쿠 수상이 국회 답변과정에서 표명한 것으로 역대 내각이 이를 국시로서 인정해 왔다. 물론 최근 고이즈미 내각이 이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해 논란이 되고, 미국과 일본이 이를 수시로 위반함으로써 비핵 3원칙 자체가 애초부터 반쪽자리였지만,6) 일본 민중들은 그 모순을 극복하고 온전히 비핵 3원칙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을 지속해왔다. 의회의 결의에 머물러 있어, 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비핵3원칙을 법제화하고자 하는 비핵법제정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비핵자치체 운동>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반핵운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비핵자치체 운동인데, 비핵자치체 운동은 지방자치단체가 의회 결의나 조례제정 등을 통해 그 지방을 비핵화하는 것이다. 일본의 비핵자치체는 해를 거듭하면서 꾸준히 증가해왔다. 대표적인 비핵자치제인 고베 에서는 1975년 지방자치법에 근거한 시의회의 결의를 통해, "고베항에 입항하는 모든 외국의 함선(군이 관리하는 배)은 핵무기를 탑재하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비핵증명서를 제출하도록 의무화"했다.
지역적인 반핵, 반전운동이 강화되면서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도 확대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살해되었을 때와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을 때 일본의 미군기지 요꼬다 비행장에서 별안간 미군 전투기 엔진이 밤낮 없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 때 요꼬다 주민들은 미 전투기의 동태를 24시간 교대 감시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오키나와의 독립과 반핵운동 >
1980년대 초 미국은 오키나와 제도에 그린베레 부대를 재배치한다. 악명 높은 그린베레 부대는 단순한 작전부대가 아니고 정보부대인데,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 부대의 배치를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를 겨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린베레가 배치된 요미단 마을 주민들은 기지철거운동을 전개하여 땅을 되찾으면서 오키나와 도의회에서 비핵선언을 가결했다. 전 주민이 반대위원회를 만들고 오키나와 노동자조합협의회를 중심으로 섬 전체의 반대위원회를 조직했고, 시민단체, 종교단체와 합세하여 그린베레와 순항미사일 토마호크 배치를 하나로 묶어서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1피트 매입운동'을 하기도 했는데 미군이 촬영한 오키나와 전투 필름을 도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금으로 각자가 1피트를 매입하여 도민들이 자신의 눈으로 오키나와 전투를 다시 보려는 계획이었다. 1983년 11월에는 군사기지에 땅을 내주지 않는 토지거부운동도 전개했다. 한사람이 만 엔씩 돈을 모아 미군기지 안에 있는 땅을 매수하여 미군에게 제공하지 않기로 한 투쟁이 결성되어 1천 명의 노동자, 지식인, 학생, 시민이 참가했다. 1984년 6월 26일에는 8일간 카데나 기지 제 1문에서 연일 100명의 젊은 노동자가 24시간씩 교대하면서 연좌데모를 진행했다. 괌 주민과 벨라우 주민들과 협력하여 태평양에서의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하고, 오키나와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운동도 힘차게 진행했다.

-남 태평양섬들의 반핵운동

태평양 전역에는 일만 개의 작은 섬들이 있다. 인종 수와 언어 수가 거의 맞먹을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5만 종류의 언어가 있어 서로 정보교환하기도 어렵다. 과거 3백년 이상 여러 외국의 식민지였던 이 작은 섬들에서 제국주의 핵 위협은 끊이지 않았다. 지구상의 핵무기 대부분의 본적지가 태평양이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1946년부터 1984년까지 태평양 바다 위에서 시행된 원자·수소폭탄 실험은 200회가 넘었다. 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태평양에 영토와 식민지를 보유하는 강대국들이 강제로 자행했지만, 소련은 북태평양을, 중국도 피지 섬 부근의 해상을 핵 미사일 시험 사격의 탄착지로 사용하였다. 미국의 국무장관 키신저는 미국의 태평양 핵 기지 전략에 항의하는 원주민과 평화 운동가들에게 "태평양 섬에 사는 원주민이라야 겨우 7.8만 명밖에 더 되느냐"라고 해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 지역에서는 지리적 지역적 특색으로 인해 자료 및 정보교환을 원활히 해야 한다는 필요에서 1980년 태평양문제 자료센터(PCRC)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는 해양군비철폐와 국제적 민중운동에 관한 최초의 자료센터가 되어, 태평양 운동전체의 정보교환과 소통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폴리네시아 모루로아섬의 싸움들 >
프랑스는 모루로아 환초 주변에서 핵폭발 실험을 자행했다. 남태평양의 핵실험에 분노한 민중의 항거에 대해 "폴리네시아는 프랑스만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토이며, 국제법상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다. 핵실험은 우리 프랑스의 국방정책상 꼭 필요한 행사"라고 일축했다. 1983년 1년 동안 7회의 핵실험이 모루로아 환초에서 실시되었다. 모두 중성자탄의 탄두개발실험 이었는데, 정식 명칭은 '방사능 강화폭탄'이었다. 이것은 열풍과 폭풍에 의한 살상효과보다 고속 중성자선으로 인체에 대한 살육능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형의 핵폭탄으로, "사람은 죽이지만 물건은 다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장에서의 핵의 사용을 편리하게 하는 무기로 알려졌다. 미테랑 사회주의 정권도 핵정책을 유지했고 프랑스 정부는"모루로아에서의 대기오염은 실험결과 무에 가깝다. 세계 어느 지역보다 훨씬 깨끗하다"라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1979년 이 섬에서는 해일이 발생하고 산호초가 붕괴했는데, 이런 현상은 방사선 물질과 가스가 균열된 지각을 통해 해수와 대기 중에 누출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환경오염이 없다는 것이 거짓임을 드러내었다.

<벨라우 국민의 완강한 반기지 운동>
벨라우는 태평양의 섬들 중에서 가장 완강한 반기지 운동을 펼쳤다. 벨라우 주민들은 자치적으로 헌법을 제정했는데, 75%이상의 찬성표를 얻지 못하면 핵에 관한 모든 물자의 수송, 저장실험을 금지한다는 조항을 결정했고 1979년 국민투표를 통해 비핵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을 이를 승인하지 않고 방해공작을 계속했는데, 미국은 벨라우의 헌법을 수정하기 위해 '자유연합협정'을 제안했다. 이 협정은 벨라우에 대해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는 대신 벨라우 영토 내에 미군기지를 설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벨라우 국민은 1983년 2월 10일의 국민투표에서 '자유연합협정'의 핵에 관한 규정을 거부해 비핵, 비기지를 고수했다.

-반독재, 반핵 반기지 운동에 앞장선 필리핀 여성들

필리핀에서는 농촌에 기반을 둔 여성들의 평화운동이 강력하게 진행되었다. 여성들은 1만 5천명의 서명을 모아서 1978년 미군기지를 필리핀에서 철거시키려는 운동을 벌였다. 1981-82년에 열세 군데 지역에서 40회의 반핵평화 학습모임을 열었고, 이런 학습모임은 마을의 지도자와 협동조합, 노동조합, 농민조합, 그리고 청년회의 협력으로 시행되었다. 1981년 7월에는 평화행진을 계획했다가 미국대사관이 필리핀정부에 압력을 가해 실패했다. 필리핀 평화운동은 민중계층 지도자의 교육에 성공했다. 필리핀 새 여성조직의 회원들은 학습교육을 통해 농촌에서 4천명의 여성이 교육을 받고, 40여명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일부는 1982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원자력발전소 반대운동

원자력 발전 역사상 최초의 대형사고는 1979년 3월 미국 펜실바니아주 드리마일 섬 원전 사고다. 드리마일 섬 사람들은 상당수가 독일계 이민 후손들로서 보수적이고, 정부정책에 협조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부나 기업이 핵 에너지가 안전하고 값싸고 효율적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원자력발전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그러나 그 신뢰가 깨지는 사고를 경험하면서 분노가 번져나갔다.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드리마일 섬 주위의 미들타운이나 해리스버그로 확대되었다.
그 후 미국에서는 지역중심의 원자력 발전소 반대 운동이 발전했는데, 뉴햄프셔등 6개 주를 포함하는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1980년대 초반까지 100여 개의 단체가 반핵과 안전한 에너지를 표방하며 활동했다. 이 단체들은 전문가나 중앙 집권적 지도력에 의존하지 않고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원자력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또 한편으로는 다국적 기업의 행태를 비판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1980년 워싱턴의 자발적 결사체들이 에너지연합(ICE)이라는 조직을 세워, 다국적 원자력 기업인 웨스팅하우스가 필리핀에 원자로를 수출하려는 것을 저지했다. 그들은 강도 7-8의 지진이 원자로 파이프의 파열을 가져와 원자로의 핵심장치들이 파괴됨으로써 대형사고가 일어나고, 필리핀 주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필리핀 정부에서도 자체조사에 나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연기시켰고, 웨스팅하우스도 법원에 제소했지만 패소 당했다.
원자력 반대운동이 힘차게 진행되고 대체에너지 개발에 대한 노력이 이어져온 대표적인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에서는 1998년 9월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승리하면서 개혁안의 중요한 의제로 원자력발전 포기를 채택했다. 이는 독일 민중의 활발한 원전반대운동의 결과였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좌파 사민당이나 우파 기민당·기사당 연합 모두 원자력 발전이 진보와 번영의 상징이라는 데 동의했다. 독일의 원전반대 운동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를 거치며 최고조에 달했다. 1986년 6월 집권 기민당의 총리 콜은 체르노빌 사고(1986년 4월)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가라앉히기 위해 연방정부에 '환경원자로안전부'를 설치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처리시설 건설을 강행했고, 이는 끊임없는 대규모 충돌사태를 몰고 왔다. 재처리시설 건설은 이미 사민당 집권 때부터 시작되었고, 1985년 최종적으로 건설 허가가 나왔다. 독일 전역에서 4만 명이 건설 예정지에 모여 반대시위를 벌였고, 이 때부터 1989년까지 건설현장 주위에서는 크고 작은 반대시위가 끊이지 않고 벌어졌다. 1985년 말에는 수천 명이 현장에 천막촌을 세웠고, 1987년 6월에는 4만 명이 재처리 시설 현장에 모여 경찰과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냉전 이후 반핵평화운동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끝나면서 세계 핵 문제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낙관론이 잠시 등장하긴 했으나, 현실은 정반대로 나아갔다. 미국은 자국의 전략핵무기 보유고를 유지하면서 타국으로 핵무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 강력한 '대량살상무기 반확산' 전략을 세웠다. 미국은 자신의 핵독점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핵보유 잠재력이 있는 나라를 '불량국가', 심지어 '악의 축'으로 지목하며 오히려 선제 핵공격 위협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우주의 핵 군사화를 위해 미사일방어망(MD) 계획에 박차를 가하고, 실전에서 활용하기 위해 전술핵무기를 혁신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을 정점으로 한 핵국가들의 핵위협에 맞서기 위해 반핵평화운동도 다시 점차 활성화되고 있다. 물론 핵 문제 자체에 대한 대중적인 운동은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상태며, 학술 연구자나 활동가들의 국제적 논의가 중심을 이루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계기로 반전운동이 확산되면서 핵 국가들의 핵위협과 군사주의에 맞서기 위해 반전운동의 포괄적인 방향과 구체적인 과제를 토론하는 가운데 핵 문제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스타워즈 반대 국제대회

NMD/TMD 및 우주의 군사화를 반대하는 국제대회는 1992년 미국과 영국의 평화운동가들이 조직한 '우주의 핵무장을 반대하는 세계 네트워크'와 영국의 대표적인 반핵 단체인 CND, 그리고 진보적 과학자들의 네트워크인 '세계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과학자들'이 공동 주최한 행사였다. 미국이 21세기 패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우주에 대한 군사적 지배 구상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 미국과 유럽의 몇몇 지식인과 평화운동가들이 시작한 '스타워즈' 반대 국제 네트워크 활동은 현재 전 세계에 걸쳐 약 150여 개의 시민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매년 미국의 스타워즈 구상을 반대하는 국제대회를 열고 있다.
'스타워즈 반대 국제대회'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결정적인 배경은 1990년대 후반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구상이 본격화된 이후부터다. 레이건 시대 때 추진된 스타워즈의 '축소판'이라고 지칭되고 있는 미국의 MD 구상은 전 세계적인 군비경쟁을 촉발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으면서 국제사회의 첨예한 이슈로 부각되었다. 스타워즈 반대 국제대회는 MD의 문제점을 미국의 우주 군사화 전략에서 찾고 있다. 2001년 당시 한국에서도 4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NMD/TMD저지와 평화실현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고, 2001년 영국 리즈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참여했다.

-전 세계 비핵지대와 웁살라 선언

2002년 2월 스웨덴 웁살라에서는 전 세계 핵문제 전문가와 활동가 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비핵지대 국제회의가 열렸다. 스웨덴의 다그 하마스졸트 재단과 유럽평화연대기구인 TNI, 그리고 일본의 피스데포등이 공동 주관한 이 대회에서는 전 세계적인 핵무기 폐기와 비핵지대 창설을 위한 전 세계 네트워크 구축을 선언하는 웁살라 선언이 채택되었다.7)
이 선언에서는 냉전 해체 이후 인류는 "핵무기를 완전 철폐하느냐, 아니면 가공할 핵무기와 최첨단 무기를 가진 제2의 핵 시대에 직면하느냐"라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우리는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이 인류의 도덕적 정치적 법적 안보적 당면과제이며, 전 세계적인 핵군축을 위한 강력한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며 비핵지대 강화와 확산을 위한 전지구적 네트워크 결성을 선언하였다. 또한 이러한 활동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당면과제로 새로운 비핵지대 창설 및 현존 비핵지대 강화, 핵문제에 대한 대중교육의 강화, 유엔을 통한 국제대회의 창설요구, 핵보유국가들에게 조약 준수 촉구, NMD/TMD의 저지등을 제시하였다.

반핵평화운동의 방향과 과제

첫째, 핵문제에 대한 대중적 토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핵문제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는 대중들이 핵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접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핵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이 핵 불감증을 낳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각 국 정부와 자본은 "진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은 본질을 파악하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즉 지배계급은 핵문제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통제해 왔다. 각 국 정부들은 핵무기를 안보의 핵심으로 삼는 가운데 핵무기 중심의 안보논리를 전개하며 이를 끊임없이 정당화해 왔다. 핵에 대한 불감증과 지배계급의 이념적 조작을 넘어 반핵평화운동의 불씨를 지피기 위해서는 대중들이 핵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접할 수 있어야 하며, 그들이 핵문제에 대한 지식을 통제하는 것은 결국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인식해야 한다. 우리에게 진정한 위험은 단지 새로운 핵무기 기술뿐 아니라, 전쟁과 평화, 핵의 문제가 개인들에게는 차단된 특수한 영역, 즉 지배세력이 독점하는 영역이 되게 하는 사회적 구조로부터 생긴다. 지역, 단체, 노조등 다양한 모임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시민교육을 실시하고 끊임없이 토론해나가야 할 것이다. 끈기 있고 지속적인 대중들의 공적 토론만이 핵문제에 대한 '전문가'의 독점을 깨뜨리고 아래로부터 운동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반핵평화운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군사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반전운동과 결합되어야 한다. 현재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침략전쟁만이 유일한 전쟁이 아니다. 현재 미국은 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중동과 같이 미국의 이해에 '사활적인 지역'에서는 기존의 군사동맹과 무기체계를 강화하면서 전쟁을 도발하고 있으며,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거나, 콜롬비아나 베네주엘라에서 저강도전쟁(마약과의 전쟁, 정권의 전복)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도발의 근거를 이라크나 북한 또는 테러집단들의 핵확산으로 돌리고, 자국의 핵은 약소국을 위협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핵에 대한 문제는 미국의 군사전략을 비판하고 전쟁을 기반으로 지탱하고 있는 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과 결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핵 선제공격 옵션 폐기와 한국과 일본에 대한 핵우산 정책 폐기, 한-미-일 군사동맹의 해체, 주둔 미군의 철수 MD체제 해체를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 또한 현재 이라크 전쟁을 끝내기 위한 투쟁과 함께 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영국의 CND가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반핵운동을 이끌었음에도 정치적으로 상승 발전하지 못했던 것은 단일 이슈에 갇혀 폐쇄성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CND가 결국 베트남전 반대시위에 참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CND의 이러한 태도는 '핵 문제'마저도 정치화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셋째, 원자력 에너지의 종국적 폐기와 에너지 자원의 민주적 통제를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 반핵투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원자력 에너지 문제다. 반핵을 외치면서도 원자력과 핵무기를 분리해서 사고하는 경향도 있으며, 원자력 에너지를 반대하지 않거나 이를 전력공급만의 문제로 보기도 하며 '원자력'을 매우 안전한 에너지원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현재 한국에서 원자력 에너지는 전력공급의 40%를 넘게 차지하고 당장 중단하기는 힘들지라도, 핵무기 체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종국적 폐기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8) 원자력 발전은 그 폐기물이 지니는 위험성과 폐기물 재처리를 통한 핵무기로의 전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그 원자력 에너지 역시 '사고'를 회피할 수 없으며 이러한 안전문제는 전혀 해결되어 있지도 않고 해결될 전망도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원자력 발전은 그 탄생 자체가 에너지원으로서가 아닌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한다. 핵을 에너지로 사용하게 되었던 출발점은 1953년 미국의 '평화를 위한 원자'라는 제안이었다. 2차 대전 이후 1949년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했고, 1952년 영국이 보유하게 되면서 미국이 핵에 대한 주도권과 조절권을 갖기 위해 '평화를 위한 원자'를 제안하였다. 또한 원자력 관련 초민족 자본인 제너럴일렉트릭과 웨스팅하우스가 개발한 경수로도 원자력 잠수함에서 사용되던 원자로를 개량하여 탄생된 것이다. 결국 원자력 발전은 핵무기 제조 과정의 부산물이며, 미국의 군사적·정치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거래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원자력 발전은 종국에는 폐기되고 다른 평화적·생태적 에너지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이는 또한 궁극적으로 인류의 에너지 자원에 대한 민중적 통제에 대한 문제이다. 민중들이 핵에 대한 총체적 이해 속에서 원자력을 반대하고 대체 에너지원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민주적인 통제를 가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각주]

1) 1950년 초부터 전개된 '민간방위계획'은 1960년대에 들어와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뒤뜰에 대피소를 파라!'는 호소(1962)에 의해 본격화되었고, '삽만 있으면 누구나 핵전쟁에서 살아남는다'는 핵전쟁 승리론을 낳기에 이르렀다.본문으로

2) 1950년에 결성된 세계평화평의회는 원자무기의 금지, 군비확장과 군사 블록 반대, 식민지체제의 반대, 전쟁 준비의 파시스트 정권 반대, 일본 ·독일의 재군비 반대 등 세계평화운동의 기본방향을 밝히고 ① 평화공존, ② 교섭에 의한 분쟁해결, ③ 민족자결 ·내정불간섭을 국제평화의 3원칙으로 내세워, 이에 찬성하는 한 사상 ·신조를 불문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세계정치가 미 ·소의 대립을 기축으로 양국 충돌로 인한 대전의 위험을 안고 있던 1950년대에 이 운동은 큰 영향력을 끼쳤다.본문으로

3) E. P. 톰슨은 핵무기경쟁의 책임이 미국 못지 않게 소련에도 있다고 주장하였고 END도 이러한 입장을 취하였다. END는 정책과 인적자원에서 CND의 가장 중요한 연대세력이었다. CND가 동구에서의 소련의 SS-20 미사일 배치를 반대한 것도, 또한 '대서양에서 우랄까지' 비핵 유럽을 창설하자는 주장을 수용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본문으로

4) 물론 이는 소련의 일방적 군축을 요구한 것에 다른 없는 '더블-제로 옵션' 즉 소련이 현존하는 핵미사일을 폐기한다면 NATO가 새로운 미사일을 배치하지 않겠다는 제안에 대해, 고르바쵸프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1987년 '중거리핵무기협정(INF)'을 체결하게 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본문으로

5) 이러한 주장에 관해서는 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 자료실에 등록된 '평화를 향한 대장정(에티엔 발리바르, 1982년)을 참고할 수 있다.본문으로

6) 일본이 미국의 일본내 핵문제를 고의적으로 무시했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1989년의 타이콘데로가 스캔들일 것이다. 이것은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5년 12월 미 7함대 소속 항공모함 타이콘데로가 선상에서 스카이호크기가 수소폭탄을 탑재한 채 갑판에서 미끄러져 바다에 침몰한 사건이다. 당시 타이콘데로가는 베트남에서 작전을 마치고 7함대의 모항인 일본 요코스카를 향해 항해하던 중이었으며, 따라서 미국이 일본에 핵을 반입했다는 중대한 증거가 되었다.본문으로

7) 지구상의 첫 비핵지대는 남극이다. 그것은 1959년 남극비핵지대 조약으로 구체화되었다. 그 후 비핵지대의 개념은 1967년 우주공간을 대상으로 하는 조약으로 확대되었다. 같은 해 인구집중지역으로는 처음으로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 국가들 사이의 트라테롤코 조약이 성립되었다. 1971년에는 해양을 대상으로 하는 해저비핵지대 조약으로 나아갔다. 1985년에는 라로통가 조약이 성립되었고, 1995년에는 펠린다바 조약, 1997년에는 방콕 조약이 발표되었다. 현재는 일본과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지역의 핵 경쟁을 막기 위한 동북아 비핵지대, 인도-파키스탄의 핵전쟁 위협을 차단하기 위한 남아시아 비핵지대, 이스라엘의 핵무기를 없애고 핵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중동 비핵지대, 전술핵무기 철수와 나토 해체를 위한 중부 및 동부유럽의 비핵지대 등이 논의되고 있다. 비핵지대화 운동의 의의와 한계에 대해서는 정영섭, [한반도 핵 현실과 반전반핵운동], {사회운동}, 2005년 9월호를 보라.본문으로

8) 원자력이란 원자핵이 다른 원자핵으로 전환할 때 처음의 질량이 끝의 질량보다 크면 그 차가 대량의 에너지로 방출되는데 그 에너지를 일컫는다. 이 원자력 또는 원자에너지는 내용상으로는 원자핵에너지라고 부르는 게 더 맞지만 '원자력'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 즉 원자력에너지가 '핵'무기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려는 것이다. 핵반응을 이용한 원자로를 영어로 표기하면 nuclear reator인데, 일본에서는 이를 '원자핵반응로'로 부를 것인지 '원자로'라고 부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가 결국 원자로로 결정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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