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3.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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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 모란공원에서

류주형 | 조직교육부장
얼마 전 故 김진균 선생님 2주기 추도식에 다녀왔다. 생전에 문병은커녕 장례도 참석하지 못한 터여서 늘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유족 분들과 서관모 선생 등 기념사업회에서 소중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셈이다. 모란공원 둔덕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었고,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찼다. 누군가 방금 다녀간 듯 하얀 꽃들이 가끔씩 눈에 띄었고, 공기는 적막했고 묘석은 비장했다. 양지 바른 곳에 안치된 선생님의 묘소 주변에는 이미 유족 분들과 많은 추도객들이 자리하고 계셨다. 명절에 찾아뵐 때마다 늘 자애로운 미소로 반겨주시던 사모님께서 특히나 애잔한 모습이시다. 곧 선생님을 기리는 추도사가 이어졌고 헌화와 참배가 이뤄졌다. 민교협 공동의장, 전노협 고문 및 민주노총 지도위원, 진보네트워크와 사회진보연대 대표를 역임하신 선생님의 너른 발자취만큼이나 추도객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이들은 나름의 사연 속에서 선생님과의 인연을 회상했고 은혜에 감사했고 부재를 슬퍼했다. 순간, 과연 나라면 선생님과의 인연을 어떻게 기릴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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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내가 대학에 들어온 1990년대 중반은 이른바 ‘낡은 것은 소멸했으되 새로운 것이 출현하지 않은’ 혼돈의 시절이었던 듯하다. ‘광주’와 민주화 투쟁은 이미 추억이거나 신화였고, 따라서 청산한 자들의 조증(躁症)과 청산하지 못한 자들의 울증(鬱症)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다가올 새천년에 대한 유토피아적 희망과 디스토피아적 절망은 세계화와 신경제 속에서 공존했지만 정작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해명하지 못했다. 다만 사람들은, 노찾사가 아닌 서태지에 환호하고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아닌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에 탐닉하고 깡소주 대신 병맥주를 홀짝거리는 우리를 ‘신세대’라 불렀다. 이를테면, 부채 의식도 없지만 부채 의식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신세대.
인권 변호사라는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한 나는, 대학생이라면 으레 지식인으로서의 앙가주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 (공교롭게도 고등학교 시절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자주 드나들던 독서실 앞 커피전문점의 이름도 앙가주망이었다!) 기질이 크게 작용한 탓이겠지만 1980년대를 살아온 주변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밥학’보다는 인문학과 사회학적 지식이 우월해보였고, 고답적인 암송보다는 공적 사안에 대한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논쟁이 절실해보였다. 그러나 사회성격논쟁의 소멸 이후 우리 손에 남아 있는 이론적 자원은 빈약했고, 종종 급진주의나 문화운동이 그 공백을 대체하곤 했다. 가령 당시 총학생회는 ‘서태지, 주류질서의 전복자’를 그대로 모사한 구호로 당선되었는데, 이들이 이후 민중가요의 쇠퇴와 락이나 재즈와 같은 문화산업의 부상을 상징한 ‘자유’ 공연을 유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좌익적 언사들이 난무했지만 그것은 대개 저항과 비판을 혼동한 결과였고, 따라서 ‘좌파’라는 규정도 특정의 지향이나 이념을 내포하기보다는 기존의 것에 대한 거부, 주류적인 것에 대한 반정립, 또는 급진적인 것을 막연히 의미할 뿐이었다.
알튀세르가 이론적 전통의 빈곤함이라 불렀던 것은 정확히 이런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제2인터내셔널의 사후 복수’처럼, 사회운동 전반이 IMF-DJ 체제의 등장을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경제위기설이 부르주아의 악선동이라고 일축했던 일부의 웃지 못 할 소극을 비롯하여, 온갖 사이비 이론들이 좌우에서 횡행하는 가운데 이미 비극은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경제위기의 충격 속에서 사람들은 부랴부랴 낡은 서고를 뒤지기 시작했고 위기의 본질과 성격을 해명하기 위한 시도들도 뒤늦게나마 재개되었다. 1980년 ‘광주’가 인민주의적 재야운동이 중심을 이룬 1970년대 이전의 운동과 단절하는 계기를 상징하듯, 1997년의 충격은 사회성격논쟁의 소멸 이후 이론적 전통의 복원 및 개조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주요한 계기였다. 이를 계기로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적 비판의 현재성을 규명하려는 흐름이 촉발된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위기는 이중적이었다. 한총련 출범식과 서울지하철노조 농성 등을 계기로 극단화된 학내 갈등은 결국 1980년대 이후 최초의 ‘비운동권 총학생회’의 등장으로 귀결됐고, 좌절은 깊었다. 더구나 선의는 확정적인데 반해 개념이 우둔했던 과거와 달리 선의도 불확정적이었고 개념도 우둔했다. 졸업을 전후로 진정성을 찾기 힘든 고백이 줄을 이었고, 평범한 시민으로도 모자라 지배 엘리트로 전향하는 것도 용인되었다. 학생운동에 대한 ‘노동자주의적’ 경멸이 다시 한번 정당성을 얻는 순간이었다.
한편 운동의 위기 속에서 이론과 실천의 융합 또는 지식인과 대중의 결합이라는 고전적 테마가 진보정당 건설 흐름으로 부활한 것도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대중운동 자체의 우경화, 개량화, 부문적 요구로의 후퇴를 극복하기 위한 계획 일반이 부재한 가운데, 의회주의적 전망에 경도된 진보정당 건설 흐름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관점을 전도해서, 1980년대 사회성격논쟁의 이론적․실천적 성과가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적 정당, 코포러티즘적 노조, 정치적․행정적 NGO 등으로 부정적으로 수렴되었다고 했을 때, 문제는 이를 지양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조건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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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는 생전에 나를 비롯한 사회진보연대 활동가들이 사회운동에서 ‘펜’을 잡을 것을 주문하셨다. 투병 중에도 우리들에게 새로운 고민을 들려주는 걸 마다하지 않으셨으며 사회진보연대 활동가들이 우리 운동의 희망이라는, 분에 넘치는 격려도 잊지 않으셨다. 선생님과 나는 좁은 의미에서 스승-제자도 아닐뿐더러 선생님께서 사회진보연대 대표직을 사임하신 시점에 활동을 시작한 탓에 개인적으로 애틋한 기억도 거의 없다. 하지만 짧다면 짧은 10년간의 운동 이력에는 선생님의 흔적이 곳곳에 베어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진보연대는 물론이거니와, 1980년대 이후 우리 진보학계의 집단적 생산물에 이르기까지 선생님께서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 그 무엇이랴.
철도노조의 파업이 당장 목전에 다가온 시점에, 문득 몸이 불편하신 가운데서도 서울대 노천강당에 운집한 발전노조 파업 대오에게 연대사를 낭독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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