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12.31호
첨부파일
0212특집-편집실.hwp

38일간의 발전노조 파업과 '4월 2일'이 우리에게 남긴 것

편집실,기자단 |
'노동운동 혁신'이라는 담론

올해는 어느 해보다 자주 "노동운동 혁신"이라는 담론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노동운동의 위기가 가시화 되었다는 진단이 몇몇 계기를 통해 절박함을 더해갔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운동 혁신"의 과제로 두 가지가 주요하게 제기되었다.

하나는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하는 불안정 노동자층의 확산에 대해 노동운동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과제였다. 대중적으로 불안정 노동의 문제가 '가시화' 되면서,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을 혁신해야한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되었다. 이는 노동운동이 향후에도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문제의식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과제는 38일간의 발전노조 파업과 4월2일의 총파업 유실이라는 사건이 보여주는 "무엇"에 대한 것이었다.

'노동운동 혁신'의 과제로 제기되는 것 중 전자의 문제, 불안정노동의 확산에 대한 대응에 대해서는, 아직 그 문제의식이 제한적이고 촛점이 어긋나는 측면도 있지만 상당히 구체적인 대안까지 고민되고 있다. 우선 민주노총 안팎에서, 불안정노동철폐연대 본조직 출범과 민주노총 미조직특위의 구성과 같은 조직적 결과물이 형성되었다. 또한 각급 단위의 노동조합들의 구체적인 사업 방안이 제출되고 있으며, 기아자동차, 세원테크 투쟁 등 일정한 성과도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대중들이 무엇이 문제인지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동운동 혁신의 또 하나의 과제로 회자되었던 발전노조 파업에 대한 평가와 4.2총파업 유실 이후의 과제에 대해서는 대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전자와는 달리 그것은 아직 명확히 드러내면서 개념화되지 않았고 인식되지도 않고 있다. 한 순간 동안 무수하게 제기만 되었을 뿐, 연말이 되는 지금에도 그 사건으로부터 노동운동 혁신의 어떤 교훈을 얻어야한다는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마치 집단적 망각에 빠진 것처럼.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4.2일 총파업 무산은 민주노조 운동이 연대투쟁을 조직해왔던 방식 자체의 한계를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가가 더욱 난망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4.2 사건은 이전에 모든 '총파업'이 소진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공공부문 투쟁만이 아니라, 대우차 매각 반대 투쟁, 현자 정리해고 반대 투쟁 등, 당면 시기에 핵심적인 정치적 과제를 제기하는 노동자들의 투쟁들이 있어왔다. 이러한 투쟁들은 단사의 고립투쟁과 연대 총파업의 불발을 겪으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패배했는데, 이 과정들은 덜 '극적'이기는 했지만 4월2일 총파업 무산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상황을 봤을 때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양상을 보여주었다.
}} '극적이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몇 년 동안 총파업(혹은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의 유실과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극적이었기 때문에 더 피부로 느껴지기도 했으나, 이전부터 계속 누적된 '익숙한' 문제이기 때문에 문제의식이 추출되기 오히려 더 어려웠다.

노동자 대중의 상황, 투쟁조직화의 상황

잘 알려진 것처럼 4.2 총파업이 불발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민주노총 협상단이 4월2일 당일 협상시한을 넘겨가면서까지 '합의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총파업 무산의 1차적인 책임을 협상단에 묻는 것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황은 협상단을 비난하는 것으로 끝날 만큼 그리 간단하지 않다. 민주노총 지도부, 발전노조 지도부, 그리고 협상단을 강제한 조건이 무엇인지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을 보지 않고 몇몇 개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분노를 풀 대상을 찾는 방식일 수는 있어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될 수는 없다.

2002년 상반기의 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투쟁은 철도, 가스, 발전 3사의 2월 25일 공동파업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3사 연대파업의 성격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연대파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시기집중 파업에 불과했던 상황이었다. 철도노조와 가스노조는 자신에게 해당되는 쟁점이 타결되자 곧바로 현장에 복귀했던 것이고, 이로 인해 공공부문 공동투쟁 전선은 형성될 수 없었다. 철도노조와 가스노조가 모두 복귀한 2월27일부터는 3사 '연대파업'은 종결되고 발전노조의 독자 파업국면으로 전환된다. 한편, 민주노총 차원에서는 2월26일 연대 총파업이 금속연맹 등을 중심으로 4시간 파업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결의는 민주노총 총파업 '기간산업 사유화 저지'에 대한 대중적인 문제의식의 공유에 기반하기 보다는 상층의 결의에 의한 파업의 결행이라는 측면이 더 강했다.

2월 26일 연대 총파업에도 불구하고 기간산업 사유화저지 투쟁의 의의는 노동운동 내에서 충분히 공유되지 못하였다. 공투본 건설 과정에서 공공부문 투쟁이 3사 연대 투쟁으로 협소화 된데다가 그나마 철도와 가스의 조기 종료라는 상황은 투쟁의 폭을 계속 좁혀 가는 과정에 있었다. 이런 속에서 발전노조는 고립되었고 공공부문 타 노조의 결합은 계속 지체되었다. 2월26일 총파업이나 4월2일 총파업 준비에 있어서도 공공연맹의 대규모 사업장들에서 사유화 저지의 문제의식을 공유한 것을 토대로 파업투쟁이 조직화된 것은 아니다. 그나마 연대 파업을 조직한 노조의 경우에도 열심히 투쟁하는데 연대해야한다는 당위성의 측면이 오히려 강했다. 각 노조들의 경우에도 사유화 저지 투쟁의 의의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총파업의 조직화는 기층으로부터 문제의식 공유에서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상층의 결의로 조직되는 한계적인 상황이었다.

4월2일 총파업은 2월26일에 비해서 발전파업의 의의에 공감하는 흐름이 확산되었으며 14만 정도의 파업대오가 확인되는 등, 강력한 조직화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공장 사업장을 중심으로 대부분 사업장의 파업이 반나절 파업 정도로 제한되었으며,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수준으로 강력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여전히 기간산업 사유화 저지의 투쟁과제 자체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는 노동조합은 별로 없었다.

발전지도부의 경우에도 발전 조합원들의 투쟁동력 저하가 심각하게 우려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 차원의 총파업 조직화가 저조한 상황을 의식하고 있었다. 발전노조라는 단위 노조 차원에서는 당면 투쟁을 더 이상 진행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어 왔던 것이다. 민주노총 차원의 총파업 조직화가 미흡한 데다가 전민중적인 사유화 저지 전선 형성이 무산된 상황에서, 심대한 정치적 과제를 단위 노조의 투쟁만으로 선도적으로 돌파하려고 했던 시도가 한계 지점에 도달했던 것이다. 단위 노조의 선도적 투쟁에만 의존해서는 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전선을 구축한다는 것이 난망할 것이라는 점이 이 상황 속에서 확인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3사 공동파업의 조기 종료의 사후적 효과일 뿐이라는 점에서 4월2일은 지체된 2월27일이었던 셈이다.

물론, 사후적으로 평가해볼 때 파업투쟁으로 4월2일을 돌파했어야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다. 4월2일을 넘어섰다고 하더라도 투쟁동력의 소진은 동일한 결과를 낳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나 그것은 정치적인 연대 파업을 가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의미를 가졌다. 실재로 이 시기에 대중은 대단히 역동적으로 움직여갔는데, 이 속에서 조직된 투쟁의 경험은 이후에도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4월2일의 총파업을 예정대로 진행하였다면 정세가 반전될 수 있었을까? 설사 그랬다고 해도 투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마련되어서 대중투쟁을 촉발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거나, 정부의 입장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낼 수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 이유는, 4월2일 파업투쟁의 조직화가 가진 문제에 있다. 대중적으로 사유화 저지 투쟁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투쟁하고자하는 의지가 형성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총파업이 조직되었는데, 이렇게 진행되는 총파업은 뚜렷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적 결의만 가지고 돌입한 총파업을 통해서는 당장 '세 과시'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길고 완강한 투쟁을 지속하기는 힘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4월2일을 다른 방식으로 경과했다고 해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 이에 대해서 지도부의 당면 판단을 규탄하는 감정적 반응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는 점을 우선 인식해야한다.

이러한 상황의 배후에 있는 문제는 이런 것이다. 왜 전국민적인 지지여론이 형성되는 와중에도 노동자들은 정세를 반전시킬만한 강력한 총파업에 돌입할 수 없었을까? 그것이 민주노총과 각 연맹이 조직화의 책임을 방기한 것이 분명히 중요한 원인이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4월2일 총파업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2월26에 비해서 역동적이기는 했지만 상당수의 노동조합들, 노동자 대중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으며, 이것의 원인이자 결과로 사유화 저지 전선은 더 이상 강력하게 확대되지 않았다. 당시 협상단, 지도부의 오류는 분명하지만, 그것을 비난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대중의 상태에 있다.

사유화 저지 전선의 형성이라는 과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애초 조직하려고 했던 공공부문 연대 투쟁은 쟁점이 협소화 되었다. 공투본 투쟁을 본격적으로 조직하기에 앞서 공공연맹의 애초 계획은 공공부문의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공무원 및 교사의 노동기본권 확보, 보건의료노조를 비롯한 직권중재 철폐, 국가기간산업 민영화(사유화)를 포함한 구조조정 분쇄를 통합한 전선구축을 계획했으나 이러한 틀은 크게 축소되었다.

특히 발전노조 등이 결합하는 방식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이 늦어지면서 조직화가 늦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투쟁동력의 점검을 비롯한 준비가 늦어졌고 1월27일에야 대의원대회를 통한 결의가 이루어지면서, 1월말까지 투쟁결합이 확정되지 않는 등 투쟁 조직화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만큼 민주노총 전체적으로도 대중적 쟁점을 형성하고 조직화하는 데 난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4월2일 총파업 조직화에 있어서까지 이러한 어려움을 강조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데, 민주노총 총연맹과 각 연맹 등은 38일간의 발전파업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재조직하기 위한 노력을 방기하였기 때문이다. 대중운동 지도부는 대중의 실리주의 뒤에 숨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직화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전국민적 지지가 있었지만 이에 걸맞는 대중투쟁은 조직화되지 못했다. 여론의 우위가 전선의 형성이나 대중투쟁의 활성화로 즉각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대중투쟁의 조직화는 여론전과는 다른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기간산업 사유화지저 투쟁이 발전노조 단사의 투쟁으로 협소화된 상황에서, 범대위{{) 민주노총, 한국노총과 전농등 각급 대중조직, 정당, 사회단체 등을 망라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민영화), 해외매각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는 2001년 11월 15일에 발족했다.
}}의 조직화 작업도 대중투쟁을 확산했다기보다 외곽 지원부대, 선전부대로 역할이 제한되었다. 민주노총이나 발전노조 역시 범대위를 전선의 확장을 위한 조직적 틀로 사고하기보다는 여론전을 중심으로 하는 외곽지원부대로 사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민주노총 이외에 대중적인 투쟁을 진행할 수 있는 대중조직이 없는 한계는 이러한 상황을 당연한 것인 양 만들어갔다.

결국 범대위는 여론화작업을 담당하는 것으로 역할이 협소화되고, 발전노조가 고립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런 점에서 실질적인 대중투쟁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전선의 구축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조직적 틀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전선형성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직적 틀-상설공투제 혹은 그것을 넘어서는 전선체-의 건설이라고 하는 것은 조직형식적인 문제로만 사고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것의 건설이라는 것 자체가 대중들 사이에 공통의 인식을 형성해가는 과정, 대중운동 내에서 공통의 정치노선을 정립해가는 과정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11월 투쟁과의 비교

4월2일 총파업의 무산에 비해서 11월 5일 3대악법 저지 총파업은 상당한 규모에서 실행되었다.(민주노총 집계 12만5천)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은 11월 5일 총파업은 근로기준법 개악과 공무원 조합법 저지의 실질적 성과를 얻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제조업 중심의 한계가 있었으나 실질적인 대중동력의 형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연대총파업이 가능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1월 투쟁은, '법안 저지'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그 '성과'가 과연 파업투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도 평가가 필요하다.) 민주노총은 이 투쟁을 조직함에 있어 "법안이 통과되면 임금이 얼마 삭감된다"는 논리로 대중의 경제적 실리주의에 근거해서 파업투쟁을 조직하려 하였으며 이것은 일정하게 대중에게 수용되었다. 주5일제의 당위성을 오히려 정권이 강변하는 가운데도, 대중적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 분노가 존재했던 것인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민주노총이 구체적인 임금 삭감을 폭로하면서 선전, 조직화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소는 제조업 중심으로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한국노총의 제조업 연맹과 함께 '제조업연대"를 구성하고 투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투쟁조직화는 노동법 개악 저지 이외에 경제특구 투쟁에 대해서는 동의를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을 보아야한다. 즉, 경제특구법 저지 투쟁이 남아있는 상황에서도 파업의 조기 종료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이 불가피했다고 해서 파업을 접은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의 도래는 사전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는 경제특구법 저지 투쟁에 대해서는 총파업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명시적이지는 않더라도 이미 암묵적으로 이루어져있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은 뒤늦게 경제특구 투쟁 역시도 경제적 실리주의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조직하려고 했는데, 경제특구가 되면 임금이 어떻게 낮아진다는 식의 선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사업장-지역의 일이 아닌 이상 그러한 전 계급적 요구에 대해서 대중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11월 총파업을 조직하는 방식은 대중의 실리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만 귀결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해야한다. 투쟁은 대중의 경제적 실리를 수호하는 수준까지만 정확하게 진행되었으며, 그 이상으로 대중의 요구를 확대하려는 노력은 부재했던 것이다. 오히려 가능한 최대한 파업투쟁의 쟁점을 전환하면서 경제특구반대 투쟁의 정치적 쟁점을 부각했어야했을 것이다. 11월 5일 파업의 조기 종료는 대중투쟁을 정치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경험을 포기한 것인데, 이는 당시 시점에서 지도부의 판단 실책이기보다 이전에 이들 지도부가 현장을 조직하던 방식의 한계를 사후적으로 드러낸 것일 뿐이다.

4월2일과 11월5일은 어떻게 다르고도 같은가.

한편, 우리는 이 파업의 과정에서 제조업 사업장을 중심으로 짧은 시간 안에 상당한 투쟁동력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노동자 대중들은 기간산업 사유화 저지를 위한 연대 총파업의 무산 이후에도, 직접적인 경제적 이해를 지키기 위한 노동법 개악저지 투쟁에 보다 쉽게 움직였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 노동운동에 만연한 '실리주의'가 활동가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현장에서도 대중적으로 이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제까지 노동운동의 주요한 경향으로서 "단위사업장 중심의 전투적 경제주의" 속에서 확대되는 데, 이 것은 '전투적인' 지도부를 세워내는 것으로는 넘어설 수는 없는, 만만치 않은 과제이다.

한편, 11월5일 총파업의 한계는 4월2일 총파업의 무산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와 일치하고 있다. 11월 투쟁을 놓고 투쟁력 혹은 지도력의 복원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인데, 4월2일 총파업이 무산된 그 지점에 11월 5일 총파업이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대중의 정치적 진전이 이루어질 것인가 말 것인가의 그 문턱에서, 갈등하는 두 경향의 한 쪽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두 투쟁은 동일하게 멈추어 섰다. 대중들이 머뭇거렸을 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대중운동 지도부가 여전히 그 한계 지점까지만 투쟁을 가능하도록 조직했다는 점에서 4월2일과 11월5일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던 셈이다.

이제까지의 이른바 '총파업' 투쟁은 주로 실리적 요구를 내걸고 각 단사노조의 투쟁(전투적 경제주의+전투적 경제주의)을 집중하는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단사 이기주의"는 전투적 경제주의를 동반하는 역사성을 가진 것으로 인식해야한다.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형성된 단위 노조 중심의 전투적 경제주의가 극복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매년의 투쟁을 선도하는 대규모 파업의 경우에도 대공장 노조의 대규모 파업으로 진행되는 것이지, 여러 노조의 연대파업 투쟁으로는 확산되지 않는 한계를 계속 보여주어왔다.
}} 11월 투쟁은 단사 노조의 투쟁을 시기적으로 집중하는 식의 투쟁이 아니라 최소한 이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던 것이지만, 그 역시도 그 자리의 한계에서 멈추고 말았던 것이다. 11월 총파업의 성공은 민주노총이 투쟁력과 조직력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여전히 4월2일이 보여준 문제의 한계 속에 있었다. 여전히 우리는 대중의 정치적 진출이 시작되려는 그 시점에서 더 나가지 못했다.

'지도력의 형성'이라는 문제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가 지도력의 형성, 강화라는 과제이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민주노총에서는 중앙위, 대의원 대회 등의 형식적 의결기구로 대표되는 공식적인 지도력이 노동운동의 '지도력'의 거의 전부인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력은 현장에서 경제적인 요구를 넘어서는 쟁점에 대한 투쟁을 조직하는 데 있어 대단히 취약하다는 점이 4월2일을 경과하면서 드러났다. 대중이 집단적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투쟁하고자하는 의지를 가져야 투쟁이 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의지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지도력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지도력 구축은 4월2일 총파업 무산을 평가하는 중요한 쟁점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문제를 진단하면서 지도력을 새롭게 형성할 것을 주문하는 요구는 단일한 스펙트럼 속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지도력이라는 것이 대중운동 지도부가 지도력을 강화하는 것, 혹은 이를 위한 조직적 틀을 구축하는 것으로 이해되거나, 그보다는 대중을 조직할 수 있는 민주노조 운동의 정치적 지도력이 새롭게 형성될 것을 요구하는 이해되는 등, 서로 상이하게 제기되었다.

전자의 문제의식은 지도력 형성을 위해서는 강력한 조직체계, 따라서 산별노조의 건설 흐름을 강화해야한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후자의 입장은 '정치적 지도력'의 형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민주노총의 공식적인 의결체계, 정치단체, 현장조직 등으로 분할된 정치적 지도력을 통합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노동자의 힘" (4/20, 5호) 「민주노조운동의 붕괴와 재건」/ 고민택
}} 지도력의 구축을 산별노조 건설로 이해하는 입장은 노동운동의 위기를 조직 형식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드러내는 데, 산별로 전환한 노동조합이 효과적인 총파업을 조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드러났다.{{) 물론 산별노조 건설의 과제가 일반적으로 의미없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산업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산별노조의 건설은 노동조합 운동의 한 단계 발전이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기업별 노조 구조는 노동자 대중의 계급의식의 발전을 가로막고 더 넓은 계급적 단결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한다. 이 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지도력 구축의 과제에서 곧바로 산별노조 조직화라는 '정해진 답안'을 끌어내고 진정으로 노동자 대중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정치적 지도력의 형성이라는 문제는, 분할된 정치적 지도력의 통합이라는 문제의식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정치적 지도력의 문제가 단일한 정치적 지도가 가능한 '조직의 건설'이라는 식으로 곧바로 등치 될 경우 또 다른 조직 형식적 해결책이 되고 말 것이다. 정치적 지도력의 문제는 정치적 지도가 가능한 구체적 '조직'의 건설을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오히려 노동운동의 정치노선을 새롭게 확립하고 그것에 대해 대중적인 동의를 얻어 가는 과제를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어야한다. 4월2일 총파업 실패의 과정은 정치적 지도를 행할 조직의 부재, 혹은 민주노총의 의결-집행기구의 취약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제기된 정치적 과제에 대한 대중적 동의를 제대로 얻어낼 수 없는 한계에 있기 때문이다.

4월2일 이후, 그 날을 넘어서기 위해서.

글머리에서, 4월2일 총파업의 무산 과정은 이전에 민주노총의 총파업 무산 과정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발전노조의 38일간의 파업투쟁과 4월2일 총파업의 준비는 어느 때보다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대중적인 동의가 형성되어 있었고, 총파업을 실현해야한다는 결의도 대단히 높았던 것이다. 발전노조는 비록 한 개 단위노조였지만 사유화 저지라는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강고하게 투쟁하였는데, 이런 조건은 지난 몇 년간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도 총파업은 무산되었다는 점에서, 4월2일의 사건은 우리 노동운동에 보다 깊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 실리를 넘어서는 요구에 대중이 머뭇거리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도부가 투쟁의 조직함에 있어서도 일정한 한계 이상 진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년간에 고착화된 노동운동의 어떤 경향들이 가진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단사 이기주의, 전투적 경제주의 등이 그 경향은 자주적이고 강력한 노동조합들을 형성해왔지만, 일정한 선 이상으로 투쟁을 전개하는데 한계를 지우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 두 투쟁에서 대중들 스스로가 일정한 정치적 진출의 계기 앞에서 더 과감하게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지도부의 교체나 조직형식의 발전의 측면만으로 제한될 수 없다는 것, 대중운동의 주체로서 대중자신의 구체적인 상황을 변화시킬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시한다. 대중들이 이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보편성, 새로운 정치노선을 대중운동 내에서 정립해야할 필요성을 긴급하게 제기되는 것이다.

4월2일의 총파업 무산이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4월2일은 우리 노동운동에 누적된 문제가 극적으로 표출된 계기로서, 문제를 보다 발본적으로 인식하고 대안을 만들어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재현될 수 있다. 바로 내년 2003년에 예상되는 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투쟁이나 그밖에 다른 노동자 투쟁에서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으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대중운동이 처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과제를 추출하여야한다. 그리고, 이를 대중이 스스로 인식하고 투쟁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비록 대중운동이 실리적인 이해에서 출발한다고 하더라도(오히려 현실의 대중투쟁들은 그러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매순간 이를 넘어서는 투쟁전략을 구사하는 가운데, 대중적으로 정치적 문제의식의 상승시키고 연대를 확장하는 투쟁을 만들어 가야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몇 개 노동조합의 고립된(!) 투쟁을 뛰어넘는 전선의 형성이 가능해질 것이다.PSSP
주제어
노동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