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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1-2.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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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노조주의에 대한 재검토'

E.J 홉스봄 |
'신노조주의'에 대한 재검토

ERIC J. HOBSBAWM



그 발생기인 1880년대와 1890년대 초기에 적용할 경우, 신노조주의(New unionism)라는 용어는 영국노동사가에게 세 가지 사실을 제안한다. 첫째, 기존의 '구'노조주의와 연계된 전략, 정책, 조직형태에 반대하는 일련의 새로운 전략, 정책, 그리고 조직형태의 출현을 검토해야 한다. 둘째, 그것은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의 성장이라는 맥락에서 노조들이 취한 보다 급진적인 사회적·정치적 태도를 제안한다. 셋째, 이제까지 조직되지 않았거나 조직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새로운 노조주의를 창조하였고, 이러한 혁신자들의 제안한 노선에 따라 구노조들도 변형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 결과 신노조주의는 노동조합 조직과 조합원의 폭발적 성장을 경험하였다. 1889년의 [런던]부두파업과 그 여파는 신노조주의의 이러한 모든 측면들을 보여주며, 따라서 신노조주의라는 현상 전반에 관한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흥미로운 점은 1911-13년에 발생한 매우 유사한 노조주의의 상승과 변형이 신노조주의만큼이나 혁신적이고 더욱 급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노조주의와 유사한 명칭을 한번도 부여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 당시에도 그것이 1889년에 시작된 과정의 연속 또는 재개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상 이러한 관점이 이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1890-1914년의 기간동안 다양한 국가들에서 출현했던 신노조주의에 대한 비교연구에 따르면, 그들 내에는 비교가능한 노조발전의 공통적 특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시기 영국의 사례는 한 측면에서 유럽대륙과의 차별점을 드러낸다. 당시 영국에서는 기본적 산업들에 뿌를 둔 중요한 '구'노조주의가 이미 구축되어 있었으며, 신노조주의는 그것과 투쟁하고, 그것을 변형하고 확장시켰다. 이는 벨기에와 같은 여타의 전통적 산업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독일의 자유노조는 1889년부터 거의 4배 가까이 회원수가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1887년 영국의 '구노조주의'와 비교할만한 수적인 힘을 획득할 수 있었다(680,000 대 674,000). 요컨대, 19세기말 대륙의 신노조주의는 주요한 세력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대부분 새로운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 때까지 대륙의 노조들은 몇몇 지역이나 인쇄나 연초와 같은 몇몇 직종을 뛰어넘지 못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국의 신노조주의는 독특한 기원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대륙의 노조주의는 대중적인 정치적 노동운동 및 그 정당과 동시에 발전했고, 그 영향 하에 크게 종속되어 있었다. 그것의 주요한 문제들은 노조주의가 충분히 거대해져서 노동조합 지도자들―비록 그들도 사회주의자들이지만―의 정책이 사회주의 정당의 정치적 지도자들의 정책과 온전히 일치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출현했다. 조합원의 수는 당원의 수보다 아마도 빠르게 증가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노조가 당을 규모의 차원에서 능가했다. 보헤미아나 핀란드같이 민족 감정의 지역적 영향으로 인해 당이 항상 노조보다 많은 회원을 보유하고 있었던 나라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당을 지지하는 유권자 의 수는 1913년까지의 덴마크를 제외하고는 노동조합원을 크게 웃돌았다. 반면 영국에서는 노동당 자체가 노동조합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1914년 이전까지 모든 노동자 및 사회주의 후보(그들의 관계가 어떠하든 간에)들의 모든 득표수가 조합원수의 20퍼센트를 넘지 못했다. 반면 몇몇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독일에서는 노조들이 영국보다 더 큰 규모와 조직률을 획득한 후에도 사회민주당의 득표수가, 봉급 고용자들의 단체를 제외하고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지향을 망라한 모든 노조들의 조합원수의 두 배에 다다랐다.
그러므로 몇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영국과 대륙 국가들에서의 신노조주의는 비교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과 대륙의 사례에서 유비가 가능한데, 그것은 노조주의의 광범위한 확장이 이전에 제기된 바 없는 전략과 조직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몇 가지 측면에서 볼 때, 모든 노동조합 운동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동일한 해법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 물론 주로 일반노조주의를 통해 보다 확장된 직종별 노조주의를 보완했던 영국의 유형이 유럽 대륙에서 동일한 규모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역으로 노조 운동을 산업전체를 아우르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포괄적 조직으로 형성하려는 정책(산별 노조주의)이나 노동회관(bourses du travail) 또는 노동자위원회(camere del lavoro)와 같이 지역적 차원에서 직종을 아우르는 조직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영국과 대륙은 노조운동의 주도성과 이념이 주로 급진적이고 이론적으로는 혁명적인 좌파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비교가 가능하다. 영국에서는 '구'노조들의 지도부 대부분이 사회주의자들이 아니었고 혁명가들은 더더욱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크레그(Hugh A. Clegg), 폭스(Alan Fox), 그리고 톰슨(A. F. Thompson)과 같은 회의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영국 노조들에서 수적으로 소수인 사회주의 운동이 그 숫자에 비해 매우 큰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특히 1890년대 중반 이후로―을 지적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1890년대 중반 모든 사회주의 단체의 회원 총수는 넉넉히 잡아도 20,000명을 넘지 못했으며, 노동자대표위원회(Labour Representation Commitee) 창설 당시 회비를 낸 회원의 수는 그들이 스스로 고작 23,000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10,000을 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영국 좌파의 일부―맑스주의자들과 이후의 생디칼리스트―는 의심의 여지없이 국제적 이데올로기와 전략적 지침을 따랐고, 역으로 영국 노동조합의 경험은 대륙에서 주목을 받았다. 특정한 산업 국가의 운동이 다른 국가들의 경험과 이데올로기와 전략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되는 사실은 그 자체로 비교의 증거가 된다. 물론 만일 영국에서 누구도 혁명적 생디칼리즘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영국 노조의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지, 혹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누구도 영국의 'ca'canny'(천천히 해라)라는 용어를 알지 못했다면 대륙에서 조합의 발전이 눈에 띄게 달라졌을지는 의심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외국의 모델이나 국제적 모델들은 민족적 활동가들이 순수한 국산 술을 담은 병에 붙였던 화려한 상표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다. 1880년대의 국제적 맑스주의는 포괄적 계급조직을 요구하고 직종 배타성을 경고하는 것 외에는 노동조합에 대한 별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대략 1906년부터 산별 노조주의의 맥락에 따라 노동조합 구조를 합리화하려는 영국의 목표는 분명히 해외의 이념과 경험으로부터 도출되거나 획득되었다. 어떤 경우에든 이 시기 노조의 지도력과 행동주의가 사회혁명 운동들과 광범위하게 일치된다는 사실, 그리고 또한 노동조합이 스스로의 국제적 조직을 발전시키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총파업과 같이 국제적으로 발생하고 많은 논란이 되었던 새로운 행동 양식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신노조주의에서 가장 쉽게 비교될 수 있는 측면은 노동조합들이 불연속적인 도약이나 폭발을 통해 성장했다는 일반적인 유형이다. 그러한 도약은 비록 동일한 시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1880년대에서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동안 대부분의 유럽 노동조합 운동에서 일어났다. 영국에서 운동의 기반이 독일의 다섯 배에 달하는 규모에서 시작되었지만 영국과 독일은 1889-1890년 사이에 이러한 도약을 경험했다. 두 국가 모두 이 짧은 시기에 대략 90퍼센트의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1903-4년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 네덜란드의, 그리고 1905년 오스트리아의 도약 등 대륙의 대규모 도약에 대응하는 경험을 영국에서 찾을 수는 없다. 역으로 1911-13년의 영국의 대폭발에 대응하는 사건을 대륙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노동사가들이 국내적이든 국제적이든 노동조합의 확장과 주기적 경제 파동의 상관관계를 지나치게 가깝게 가정하는 것을 경계토록 한다.
그러나 자명한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노동조합의 성장은 특정단계에서 불연속적일 수 밖에 없다. 한 국가의 노조주의가 승인되고 제도화되었을 때, 또는 자발적이거나 의무적인 가입을 통해 노조 조직률이 특정한 수준에 도달해서 최저한의 성장이나 노동력 규모 변화에 따른 확장과 수축의 여지 밖에 남지 않았을 때를 제외하면 노조의 성장 곡선이 부드럽고 완만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1914년 직전의 영국 석탄광산의 경우와 같은 희귀한 예외를 제외하고 어느 국가, 어느 산업도 1880-1914년의 기간동안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성장은 불연속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노조들이 효과적이고자 한다면, 몇몇 개인들이 아니라 단체교섭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노동자 집단을 동원하고 조합원으로 충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더기로 충원해야한다.



1889년은 의심의 여지없이 영국 노동운동과 노사관계에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해이다. 부두 대파업과 1차 세계전쟁 사이에 항만연맹, 엔지니어링고용주연맹, 언론경영인협회 등과 같은 효과적이고 항구적인 고용주 단체들이 전국적 차원에서 형성되었다. 영국은 처음으로 전국적 규모의 산업분쟁과 단체교섭, 노사분쟁에 대한 중앙정부의 개입, 그리고 이러한 사안들에 대한 정부의 일관된 이해관심을 표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부 부처의 창설 등을 경험했다. 이 기간동안 처음으로 영국 경제의 경쟁적 지위에 대한 파업과 노조의 잠재적인 [부정적] 효과에 관한 정치적 우려의 목소리가 나타났다. 본질적으로 노동조합 지부조직들로 구성된 전국적인 노동당의 출현과 1914년 이전의 복지법안 등장은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노조 그 자체에 관해 말하자면, 가장 큰 변화는 운동의 증가된 규모나 변화된 구성이 아니라 노조의 경제적 효과에 있다. 대체로 말해서, 1900년 이전 노조주의는, 굳이 말하자면, 상이한 노동자 집단들 사이에서 임금격차를 심화시키는 기능을 했다. 1900년 이후, 특히 1911년 이후에 노조주의는 그러한 임금격차를 점진적으로 완화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렇지만 노동조합 구조와 산업이나 직종 분포에 있어서의 실질적 혁신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865-8년 노동조합과 고용주연합에 대한 왕실위원회 기록에 따라 1885년과 1963년의 최대규모 노조의 목록을 비교해보면, 1885년의 가장 큰 노조 중 하나―합동기계공노조―만이 80년 후의 목록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으로 1963년의 가장 큰 10개 노조 중 7개가 1880-1914년의 기간동안 창설되었거나 그 시기에 창설된 새로운 노조의 계보를 이은 것들이다: 운수일반노조, 지방자치일반노조, 영국탄광노조, 전기노동조합 등의 전신은 1888-9년에, 유통서비스노조(Shop, Distributive and Allied Workers)의 전신은 1891년에, 영국철도노조의 전신 중 하나는 1889년에, 영국지방공무원연맹은 1900년대에 창설되었다.
노사관계와 계급갈등 내에서 새로운 시대가 명백히 시작되었다. 1889년의 충격은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노조에게 뿐만 아니라 정치인과 정부 관료들의 태도의 영구적 변화를 촉진시켰고 그들 모두가 이미 집단적 시야의 수면 아래서 시작된 변화가 존재함을 인식하도록 부추기거나 강제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면에서 아마도 1889년의 충격은 더 크고 더 오래 지속된 1911-1913년의 폭발보다도 파급력이 있었다. 후자의 격변은 노동조합 세력에 150만명의 회원을 더해주었고, 3년간 3165회의 파업과 총 6천만 개인 노동일수의 손실을 수반했다. 이것은 이전의 어느 시기의 동일한 기간보다 훨씬 더 집중된 산업갈등이었다. 1892년 이전 시기의 적절한 통계가 부재하기 때문에 1889-90년의 영향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1888년과 최고조에 다다랐던 1890년 사이 TUC의 조합원 수는 65만명(80%)이 증가했고 1889년과 1890년에 2400회의 파업과 천백만 개인당-노동일수 손실을 수반했다. 그러나 1911-13년간에 획득된 조합원들과 달리, 1888-90년의 신규 조합원의 1/3 이상이 대체로 1889년에 형성된 새로운 조합들 대다수의 몰락으로 말미암아 손실되었다. 조직된 노동운동에서 그 두 충격의 상대적 비중은―1892년 이전의 신뢰할 만한 공식적 조합원 집계가 없다는 점과 신노조 자신들의 통계를 사실상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할 때 정확히 추정할 수 없다―1911에서 1913년 사이의 한 시점보다 1889-90년의 한 시점에서 확실히 더 컸다. 그러나 1889-90년 동안의 연간 총 파업수는 실질적으로 더 많았지만 파업의 평균 규모는 1911-13년의 1/4에 미치지 못했다. 1888-90년의 많은 파업들은 기록조차 되지 않았다.
1889년 충격의 규모와 파급력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지만 소급해 봤을 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유가 무엇이던 산업적 불만이 그 긴장을 해소하지 못한 채로 축적되면 결과적인 폭발은 거의 불가피하게 거대하고 극적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최초의 투쟁의 선전효과가―특히 그것이 성공적이었을 경우에는― 대단하기에 노동운동의 분출은 더더욱 극적이다. 최근 브라질과 폴란드의 거대한 노조주의의 발생에서도 이 효과를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1889년의 파업들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결과가 알려진 1051건 중 20%만이 패배했고 45%는 승리했으며 나머지는 협상으로 결말이 났다. 이것은 한편으로 경기순환의 시기가 노동조합의 요구에 잘 맞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1889년 폭발의 선도적인 산업들인 부두노동과 가스산업에서 긴장을 축적시켰던 구조가 또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비상한 협상력을 창출했거나 또는 그 협상력과 우연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가스 산업에서는 수년전에 제시된 주장이 여전히 유효하다. 운하를 통한 운송산업에게 1889년은 국내로 들어오는 화물량과 국외로 나가는 화물량 모두 최대를 기록한 해이다. 이것이 왜 젊은 항만 하역 노동자들의 조합이 매우 유망한 산업에 대해 전국적인 공격을 개시했는지 설명해준다. 이 공격은 리버풀에서만 16개 대서양 운수회사의 공동전선에 의해 패배했다. 그 공동전선은 그들의 행동을 협의할 수 있기에 충분히 작은 규모였다. 부두 노동자들의 경우, 러벨(John Lovell)은 하역량의 급증과 부두하역 회사의 이윤압박이 결합되어 폭발적 소요를 낳았음을 보여주었다. 당시에 하역량의 증가는 원시적이고 수동적인 방식으로 짐을 싣고 내리는 노동의 속도를 높혔고, 부두회사의 이윤압박은 회사들이 임금삭감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이 두 가지 요소 중 적어도 첫째는 대부분의 영국 항구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간략히 말해 고용주들은 오래도록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것에 의존해 왔고, 그 노동자들은 이제 그들 자신이 상대적으로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오랜 분쟁을 감당하려 하지 않는 고용주를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 철도파업을 분석했던 마버(John Mavor)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철도파업은 그들 산업의 비효율적인 조직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반란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철도는 구조를 전환하거나 장비를 근대화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빠르게 성장했고, 그 와중에 두 개의 주요 노선간의 치열한 경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마버의 관찰에 따르면 '효율적인 노동자를 신속히 끌어올 수 있는 고도의 숙련공들의 수는 제한되어 있었다. 숙련공 계급은 고도로 기술이 특화되고 각 단계로 분화되기까지 한 수많은 계층으로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숙련공 중 특정 계층들에 거대한 힘을 주게된다. 고작 9000명에 의한 파업에 의한 광범위한 마비는 중대하고 심각한 상황이었다.' 사실 사측이 분쟁을 종결시키고 노동조합을 파괴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업참가자들을 대량 해고할 수는 없었다. 세 철도회사에서 단 500여명의 다양한 지위의 노동자들의 희생되었을 뿐이었다.
이상이 이미 확립된 산업과 직종에서의 상황이었다. 신노조주의가 새로운 산업과 직종의 노조들에 관련된 것이라면, 이것은 아직 대체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 신노조주의는 미래를, 앞으로 전개될 양상을 상징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화이트칼라, 유통직종과 공공 서비스 노조주의의 전개, 또는 전기산업 노동조합의 설립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단기적으로 볼 때, 이들 조합이 살아남았다고 해도 아직 거대하지도 성공적이지도 못했다.
이 짧은 분석에서 두 개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노동조합들과 파업은 새로운 것이었지만, 그것들은 산업이 구래의 것이었기 때문에 야기되었다. 대체로 산업은 근대화 혹은 합리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구태의 방식으로 노동력 착취를 증가시킴으로써 팽창과 보조를 맞추었다. 때때로 합리화는 1889-90년 충격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 그 역은 아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오랜 대공황 기간 동안 가격과 이윤에 대한 압력이 이러한 정책을 부추겼음과 동시에 공황이 조직된 노동자들이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을 주저하게 했고 1870년 대호황기에 급히 조직되었으나 조직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던 산업들에서 노조주의가 부활하는 것을 지연시켰다. 1880년대 중반 미래의 신노조주의자들의 초기 투쟁들은 구노조들의 이러한 수세적인 면과는 정반대였다. 만(Tom Mann)이 1886년에 말했듯이 '노조주의자의 진정한 공세적 정책은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성공적인 공세의 계기가 도래했을 때, 성공의 사례나 또는 이제껏 비활동적이고 사기가 떨어져있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하는 모습까지도 일종의 눈덩이 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두 번째 결론이 있다. 신노조들의 지속적 성공과 노조의 팽창은 고용주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에 의존했다. 신노조주의가 발생했을 때 영국 고용주들은 원칙적으로 그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직종위원회가 1889-90년에 수집한 갈등을 예방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고용주들의 제안들을 보면, 그중 20%만이 노동조합에 적대적이거나 비타협적이었고 이 비율은 이후 4년동안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공무원의 태도는 강력하지만 중도적인 노조주의에 우호적이었다. 반면에 대(大) 고용주들, 또는 조치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신구 노조들이 자신들이 용인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선을 넘는다면 그들을 역공격하거나 저항할 위치에 있었다. 보통 양측 모두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노조주의의 대폭발이 이 균형을 네가지 방식으로 깨뜨렸다.
첫째로, 대폭발은 이제까지 지배적이었던 구태의, 그리고 기본적으로 국지적이고 부분적인 형식의 단체협상이 적용불가능한 산업 혹은 노동자 집단으로까지 노조주의를 확장시켰다. 그리하여 부두에서 노동조합들은 폐쇄적인 기관이거나 전문가들의 소규모 집단일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철도에서 협상의 단위는 보통 일개 공장이나 지역이 아니라 이상적으로 한 회사의 전 철도 시스템이었다. 둘째로 갑작스럽고 통제되지 않은 조직화는 생산성을 저하시키거나 경영기능에 간섭하는 등의 방식으로 노동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구 노조주의자들은 경영에 대한 제한적 조처들을 강화했을지 모르지만, 미숙하고 규율이 없는 신노조주의자들은 단순히 일을 덜 열심히 했을 것이다. 이는 1890년 런던 부두에서 매우 실질적인 문제가 되었다. 셋째로 노조주의의 거대한 확장은 하루 8시간 노동제나 기계화의 원리와 같은 말 그대로 전국적인 사안들을 전면에 등장시켰다. 이러한 사안들은 노조들이 충분히 확산되고 광범위하게 조직됨에 따라 양자 모두에 의한 조정된 행동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1893년에 이르러서 광산에서의 단순한 임금삭감조차도 동시다발적이고 전국적인 투쟁을 내포했다. 이제 대형 탄광들(웨일즈, 스코틀랜드, 동북부를 제외한)이 새로 설립된 영국광산노동자연합(Miners' Federation of Great Britain)과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로, 이러한 싸움의 규모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타임즈 지는 1890년에 광산노동자연합에 의한 짧고 성공적이었던 임금파업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했다. '20년, 또는 10년 전만해도 30만명의 노동자들이 한 순간에 작업을 그만두고 다음 한 순간에 작업을 재개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단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거대하게 또는 새롭게 연합한 고용주들을 선두로 한 반격이 시작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했고, 이는 1890년부터 현실화되었다. 이 반격은 신노조주의를 대부분 쓸어버렸고 그로 인해 신노조주의의 두 번째 후속편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사실 철도와 같은 산업에서 기관사를 제외하면 효과적인 노동조합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두가지 이유로 그 후속편은 대체로 1889년 신노조주의나 그 이후 때때로 그와 유사한 경로를 따라 형성된 조직들의 형식의 부활 혹은 확장이라는 형식을 따랐다. 첫째 이유는 노동조합들을 전멸시키거나 그들이 존재할 권리를 부정하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쇠약해진 철도일반노조 합동철도종사자협회(Amalgamated Society of Railway Servants)와 협상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금지시키지도 않았고, 따라서 그들은 기회가 되었을 때 급속히 확장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1897년의 소위 '전직급운동 (all-grades movement)'이 그들의 수를 순식간에 두배로 만들었던 것처럼 때때로 확장하고 퇴보하면서 천천히 성장할 수 있었다. 둘째로, 전문화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전체 노동자들을 포괄하려는 노조가 아니라 특정 산업, 직종, 공장의 노동자들의 다양한 지역·지방적 집단을 결합한 변화하는 집합으로서 스스로의 생존력을 확립한 '일반노조'라는 장치의 발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속편은 전편과 중요한 차이를 갖는다. 먼저 그것은 기존 빅토리아 시대 산업의 빈 공간을 조직화한 것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변형된 새로운 산업까지도 조직화했다. 이것은 금속산업에서 매우 명백하게 드러난다. 1910년에서 1914년 사이에 TUC에 더해진 백만명의 조합원들 중 20만명이 하이만(Richard Hyman)이 보여주듯이 기본적으로 준 숙련 기계공들의 집단인 합동기계공노조에 소속되었다. 이 노조들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금속, 기술, 조선 노조의 조합원수는 1910-13년의 기간동안 50%가 증가했다. 둘째로 그 동안 노조주의의 경제적·정치적 지향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협상은 점차 전 산업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고 산업갈등과 맞물리게 되었다. 고용주들이 연합된 노동조합들을 상대할 때 서로 연계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산업 자체가, 그리고 사실상 산업경제의 전 부문이 점점 더 전략적으로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레닌의 독점자본주의 분석이 1914년 이전의 영국에 얼마나 적용가능한가에 대한 논쟁에 굳이 빠져들지 않더라도, 1890년에서 1910년 사이에 영국 자본주의의 규모가 커졌고 1880년대보다 그 조직에 있어서 더 빈틈없이 구조화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간략히 말해서 1889년의 소요가 대체로 연쇄작용에 의한 지역적이고 일반적으로 그리 크지 않은 파업들로 이루어졌던 반면 1911년의 폭발은 전국적인 대립 혹은 애스크위드(Askwith)경의 회고록이 생생하게 보여주듯 전국적인 집단들의 신중한 교전에 의해 지배되었다. 구태의 지방주의와 개인주의의 본거지인 면화산업에서 이러한 변형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다.
노동자 투쟁에 대한 정부의 민감함은 산업갈등의 이 전국적이고 조직된 차원을 심화시켰다. 아직 중앙 정부보다는 지방 정부에 고용된 빠르게 성장하는 공공부문이 1889년부터 노조주의에 상당히 개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제쳐두더라도 공공 기관들은 노조주의의 양식에 참여하고 그리하여 그 양식을 형성할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이제 대다수 노동계급 유권자들을 위해서 일했고 영국 정치의 계급 양극화 현상을 기피하고자 한다면 노동계급의 압력과 요구를 고려해야만 했다. 그들은 처음으로 특히 교통과 석탄과 같은 특정 산업들에서의 전국적 갈등이 경제와 국민생활의 완전한 붕괴를 가져올 수 있는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1890년대부터 그들은 해외경쟁에 대한 영국 경제의 상대적 취약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영국 노동자와 산업의 관계는 영국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측면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880년 이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1893년부터, 특히 1906년 이후 거대한 갈등에 대한 중앙정부의 개입은 영국 산업에서 일상사가 되었고, 중앙정부의 주 목표가 조속한 해결이었기 때문에 그 효과는 노동조합을 공식적으로 승인함으로써 노조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게다가 정부의 확장된 복지 프로그램은 새로 설립되거나 약한 노동조합들에게 패배를 딛고 살아남는 수단을 제공하는 부차적 효과를 갖고 있었다. 전국보험법(National Insurance Act)은 노동조합들이 높은 불입금 없이 우애협회들(Friendly Societies)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허용했고,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조합원 자격을 유지할 이유를 주었다. 전쟁은 노동조합들의 행정체계로의 통합을 영구화하였다. 1870년대 농업에서의 노조주의는 완전히 괴멸되었었고 1889년 폭발 때 또 한번 파괴되었다. 1914년에 그것은 그다지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 한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1889년과 1911년의 노동조합 개혁 전략의 차이에서 새로운 국면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다. 두 경우 모두에서 당시 좌파 혹은 극좌파에 속한 개혁주의자들의 목표는 수세를 공세로 전환하고 부문적 노조주의를 계급적 노조주의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80년대의 대안은 매우 모호했고, 그 대안에 도달하기 위한 전략도 사실 모호했다; 아마도 이는 노조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부족한 사고를 고려한다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돌이켜보았을 때 개혁프로그램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신노조들은 이제까지 조직화되지 않은 노동자들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일반적으로 숙련되지 않고 유동적이고 대체 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노동자들이었고 다른 일부는 직종적 측면에서 보다 전문화되었고 자신들에게 적합한 직종 노조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을 기대되는 노동자들이었다. 둘째, 기존 직종별 노조는 조합원 범위를 덜 숙련된 직급으로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확장하고 모두를 위해 협상을 해야 했다. 셋째, 다양한 노동자 집단들의 투쟁들이 지역적으로는 직종 위원회를 통해, 국가적으로는 급진화된 TUC를 통해, 그리고 물론 법제화된 일일 8시간 근로제와 같은 획일적이고 일반적으로 적용가능한 요구를 따르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 조정되어야 했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일반노조'의 발명이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의도된 것도 예상된 것도 아니었고, 일반노조가 1911년 이후까지 그 모든 잠재력을 발휘한 것도 아니었다. 대체로 구래의 직종별 노조를 확장시키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TUC는 오랫동안 급진적인 상태로 있지 않았고 1895년에 TUC로부터 추방되면서 급진적인 단계를 마감한 직종평의회(Trade Councils)는 노조주의의 가장자리에 남아있었다. 사실 이들은 두 번째 확장에서 첫 번째 확장보다 적은 역햘을 수행했다.
다른 한편, 두 번째 단계는 노동조합 구조와 전략을 합리화하고 개혁하려는 의식적이고 신중히 계획된 시도들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구조의 합리화와 변형은 주로 한 산업당 한 개의 노조를 이상적인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그 대변인에게 있어 산업 노조주의의 매력은 1889년의 일반노조주의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정치적인 것이었을 수 있다. 그것은 부문주의에 대항한 계급적 노조주의로 보일 수 있었고, 또는 미래의 생디칼리스트 사회를 위한 준비로까지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1906년 이후 20년동안 진행된 노동조합 구조의 전략에 대한 논쟁의 수준에서 볼 때, 실제로 벌어졌던 연합과 통합의 물결과 1914년 삼자동맹에서 총파업까지 지속된 전국적인 노동조합의 공동투쟁 전략과 충돌은 개혁의 동인이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것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구노조와 신노조들은 이제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었던 산업적 행위의 조건에 스스로를 적응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것은 산업 노조주의로의 어떤 중요한 일반적 전환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러한 조직화 양식에 대한 좌파의 열광적이고 지속적인 옹호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때로는 1924년 훌(Hull)에서처럼 이에 대한 TUC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 노동조합 운동을 산업에 따라 재조직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영감이었다. 그러나 1911년 이후 개혁운동의 중요한 진전에 대해서는 의심할 것이 없다. 주요 합동노조들 중 몇몇은 조합원 수의 감소로 합리화가 더욱 다급해졌던 전후에서야 건설되었지만, 사실상 영국 노동조합들은 크게 재구조화되었다.




비교연구를 통해 모든 국가들에서 노동조합 구조의 문제가 대두되었고 뜨겁게 논쟁되었으며 각기 매우 다른 방식으로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주요 분기점은 지방 자율의 여지를 얼마만큼 남겨두었건 간에 기본적으로 전국적 노조주의를 고수하려했던 나라들과 지방주의라는 것이 성립불가능한 철도와 같은 산업을 제외하고 지방주의 혹은 연방주의를 선택했던 나라들 사이에 있다. 프랑스와 이태리에서 명백하게 번성했던 지방·연방주의라는 선택은 무정부주의와 생디칼리즘 사상가에 의해 이데올로기화 되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민족적 경제가 단체협상에 부적합했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역으로 특정한 상황에서 과소평가할 수 없는 순수하게 지방적인 노조주의의 잠재력을 보여준다. 미국 도시들의 건설·공공부문 시장은 대체로 자급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건설노동조합은 지방 직종 독점을 성립시킴으로써 항상 번성했다. 한편, 경제적 총파업 혹은 한 직종의 투쟁에 대한 광범위한 지방 동맹 파업은―가장 전형적으로 항구도시처럼― 그 경제가 지정학적으로 결정되는 지방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발생했다. 1900년대 초에 그러한 파업들은 트리스테(1902), 마르세유(1904), 제노아(1904), 바르셀로나(1902), 암스테르담(1903)과 같은 도시들에서 전형적으로 일어났다. 노동총동맹(CGT)의 내규에 따르면, 프랑스와 같은 국가에서 전국적 차원의 상대적 무의미성은 전국적 연합을 형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 지방조합의 수가 세 개 이하였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영국과 독일같은 국가들에서는 노조의 중앙집중화 정도가 다양하고 이론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밖에 달성되지 못했지만 지방적인 선택은 전국적·지역적 선택에 자리를 내주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쟁점은 숙련 또는 직종별 노조주의와 하나의 산업 내에서 다양한 직종이나 숙련도를 포괄하거나 더욱 일반적으로 전체 노동자를 포괄하려는 다양한 형태의 조직을 둘러싼 것이었다. 산별 노조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역사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산업'이라는 특정한 개념 자체에 관한 적합한 역사, 또는 무엇이 사회주의자들이 ― 그리고 물론 이후의 공식 통계학자들과 기타 다른 사람들을 포함해서 ― 이상적으로 각기 해당되는 산업의 모든 노동자를 조직하도록 고안된 조합들의 나열을 제시하게 했는가에 대한 적절한 역사조차도 없다. 이러한 종류 중 가장 체계화된 문제제기의 시도를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무엇이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비일관적으로 선택된 열 여섯 개의 산업만을 구상하게 만들었는가?
어찌되었든 간에 보다 포괄적인 조합구조를 위한 투쟁이 보편적이었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직종을 비롯한 여타 부문주의와 그 '직종 의식'에 대한 반대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영국 이외의 지역에서 이러한 부문주의는 구래의 수공업적 직종에 한정되어 있었다. 1890년경 이전의 모든 노조주의가 '구노조주의'였던 만큼 모든 국가들에서 직면한 문제는 유사했지만, 해결책은 매우 특수할 수 있었다. 특정한 상황에서는, 1940년에 미국 철도산업에서 32개 조합의 집합이(그 중 14개가 큰 비중을 가졌던) 그 산업을 완전히 포괄했던 것과 같이 가장 명백히 '산업적'인 산업에서도 직종 노조가 성공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역으로 또 다른 상황에서는 합동기계공협회와 같이 그 직종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한 직종조차도 보다 포괄적인 노동력을 충원할 것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서부 호주가 세계 어느 곳과도 구별되는 사례다.
모든 곳에서 보다 포괄적인 노조주의가 발전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산별 노조주의에 경도된 강력한 전국적 노조 중앙이 존재하는 국가들에서조차 직종 노조나 그 상관물인 막노동자 조합, 일반노조, 또는 무차별적 공장 노동자 조합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노동조합 운동은 넓고 좁은 숙련/직종 노조, 그와 공존하거나 그것을 흡수하는 산별노조, 그리고 일반노조들의 혼합물 형태로 발전했다. 그러나 그 혼합물의 조합은 각기 달랐다. 영국 혼합물의 경우 산별노조는 광산과 철도 부문을 제외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르웨이의 경우 결국에는 (1954년에) 일반노조 조합원의 5-6% 밖에 포괄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일반노조가 일시적으로 지배적이었다. 반면 영국에서는 노총의 비중이 크게 증가했는데, 특히 최근의 복합적 노동조합을 형성하려는 경향(기계공노조와 주물노동자 및 제도공노조가 통합하고, 배전공과 배관공 노조가 합치는 방식으로)이 일반노조주의와 본질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일반노조가 부재했다. 예는 얼마든지 더 있다.
1923년 이래 산별노조주의를 지향했던 노르웨이의 노조운동은 1954년에 이르러 43개의 노조로 구성되었으나, 그 중 일부는 석판인쇄와 사진제판의 경우처럼 직종 협회로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기관사들은 철로 노동자와, 벽돌공은 건설노동자와 스스로를 구별해서 조직했다. 그리고 물론 일반 노조도 있었다. 산별 노조주의는 철도, 석탄, 정부 고용직을 제외하고 20세기에 그 산업전반에 걸친 조합을 건설하고자 했던 내부적 압력이 그 어느 산업보다도 컸던 금속산업 내에서조차 상당한 저항에 부딪혔다. 대부분의 노조주의는 혼합된 상태로 존재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국과 대륙의 조합운동의 일종의 유사성을 볼 수 있다.
광산, 철도, 공공부문을 제외하고 가장 포괄적인 산별노조들은 외부와 위로부터 건설된 조합들이었다. 이것들은 이후의 팽창을 위한 틀거리 역할을 했다. 이태리의 금속노동자 연합이 그 예인데 이는 1914년 이전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무시할 만한 것이었다. 분명히 이것은 영향력 있는 노동계급 정당의 존재와 초기 노동조합들의 부재 혹은 허약함을 의미했다. 다른 곳에서는 흔했던 섬유 노동자 조합의 건설은 오래도록 면화산업이 스스로를 조직해왔던 영국에서는 상상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산별노조주의가 다른 곳에서는 상대적으로 성공한 반면 영국에서는 실패한 이유를 대체로 설명할 수 있다.
동일한 이유로 유럽 대륙에서 일반노조가 부재했던 것은 아니지만 영국에서 발전했던 것과 같은 전망은 부재했다. 대다수의 조직가능한 노동자들은 그들이 원한다면 가입할 수 있는 기존의 전국적 노조가 있었던 한편 전혀 분류가 불가능한 노동자들의 노조나 기존의 분류된 조합들에 즉시 편입시킬 수 없는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공간의 여지가 있었다. 이러한 단체들이 독일,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에 있었지만 영국의 일반노조와 달리 그들은 잔여물에 불과했다. 제재소 노동자들과 제지, 펄프 노동자들의 예와 같이 해당 직종에서 충분한 노동자들이 조직되는 즉시 별개의 산별노조는 일반노조로부터 분리될 수 있었다. 영국 일반노조들의 강점은 직종별 노조들이 고의적으로 채우기를 거부한 공간을 메울 수 있는 다른 노조가 부재한 상황에서 어떠한 산업이건 관통할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 상당히 자주 그들은 사실상의 산별노조를 탄생시키곤 했지만 운수일반노조 내 부두 노동자들의 경우와 같이 그 안에서 분리된 지구 혹은 직종 집단을 형성했던 일반노조로부터 이탈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특히 1890년대에 뚜렷이 관찰되듯이 숙련 직종 집단들의 뚜렷한 주저에도 불구하고 왜 영국에서와 달리 대륙에서는 산별노조들이 발전했는가? 결국 이들 집단들이 자연스럽게 통합의 핵이 되었고, 이들 중에서 가장 급속한 진전이 일어나곤 했다. 하나의 이유는 '산별 노조주의'로 보이는, 혹은 대륙에서 '산별 노조주의'로 불려진 것들이 사실상 1850, 60년대 영국 노조들의 소위 '새로운 모델'의 유사품이었기 때문이라고 제시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전국적이고 상대적으로 중앙집중화된, 상당히 긴밀하게 관계된 직종들의 통합을 구상했었다. 중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전형적인 두 개의 '신형' 노조인 합동기계공협회와 합동목공협회가 1890년대 독일에서 가장 강력하고 산별노조에 가장 고무된 노조였던 독일목공노조(Deutsche Holzarbeiterverband)와 독일금속노조(Deutsche Metallarbeiterverband)에 상응한다는 사실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금속 노동자의 경우,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해 기계공의 경우는 또다른 가능성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거의 모든 곳에서 그러한 노동자들의 노조는 산별노조주의를 택했다; 혹은 이러한 선택을 한 노조들이 결과적으로 번성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는 금속공업에서 숙련된 수공업자들의 지위가 매우 위태로웠고 보호되었던 몇몇 소수집단을 제외하고는 복잡한 기계장비의 발달과 대량생산에 의해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숙련된 금속공들은 세력이 강했지만 지위가 보장되지는 않았다. 전쟁 시절은 모든 교전국들에서 군수산업이 산업적 계급투쟁의 최전방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군수산업에서 기계화가, 격하되는 것에 저항했던 자신있고 전투적이며 종종 정치적 의식이 높은 기계공들을 대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인과 그 직종을 물려받은 숙련공, 그리고 새로이 분류되는 준 숙련공 혹은 가장 좁은 범위의 기술만을 가진 노동자들 간의 구분이 매우 불분명해졌다는 사실은 숙련된 금속공 조합들에게 직종 배타성을 방어할 것과 동시에 더 이상 효과적으로 배제할 수 없었던 점증하는 생산 노동자 집단을 가입시킬 것을 권고하게끔 했다. 이 두 정책은 종종 충돌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합동기계공협회를 산별노조에 가까운 무언가로 확장시키는 것에 대한 평조합원들의 저항이 강했고 조합 지도자들의 개혁정책에 일관적으로 제동이 걸렸다. 직업적 특권이 덜 확고하고 덜 강한 곳에서 노조의 확장을 옹호하는 세력이 강했거나 혹은 그에 저항하는 세력이 약했다. 금속 산업에서 직종 노조의 미약함과, 허약한 노조들과 급진적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대륙의 산별 노조주의 개척자들의 선견지명은 프랑스와 이태리에서와 같이 대륙 금속노동자 조합들이 자동차산업을 조직하는데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에서 이 산업은 1930년대에 숙련된 기계공들의 직종 조합이 오래도록 밀려나 있었던 특별한 산별노조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영국에서 자동차 산업 노동자 대다수의 조직에 실제로는 일반노조들, 주로 운수일반노조에 남겨져 있었고 숙련공들의 노조는 소수로 남겨졌다. 그러나 이들은 1890, 1900년대 투쟁에서 무시하지 못할 만큼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 바 있다. 이태리와 프랑스에서는 선택지가 무조합이냐 금속노동자 산별노조냐에 있었고, 실제로 토리노에서는 1906년에 도시의 전 금속노동자의 40%를 조직하는데 성공한 금속산업노동자연맹(Federazione Impiegati Operai Metallurgici)은 그 첫 번째 주요 자동차 계약에서 승리했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은 노동조합의 조직과 노조주의의 분포에 있어서의 변화를 내포했다. 여기에서 또한 영국과 대륙의 경우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고 유용하다. 대중적 노조주의가 확립된 곳에서 ― 1910년에 모든 노조원의 1/3을 형성했던 이태리 농업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1914년까지 프랑스와 이태리에서는 확립되지 않았다 ― 그 분포는 1914년에 이르러 지리적으로 그리고 산업적으로 변화했다.
변화의 일반적 양상은 운송노동자 조합과 공장노동자―일반노조로 조직되거나 산별적으로 혹은 공장 노동자 조합으로 조직된―조합들의 성장과 아직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탄광노동자들의 부상, 그리고 금속 노동자 조합의 확장으로 나타났다. 독일의 운송, 금속, 공장 노동자들이 1896년에 자유노조 조합원의 12%를 형성했지만 1913년에는 거의 39%에 달했다. 영국에서의 부상―33%에서 39%로의―은 덜 눈에 띄었는데, 왜냐하면 금속산업이 이미 강력히 조직되었고 이것이 1892년에서 1913년까지의 기간동안 100%가 약간 넘게 천천히 발전하면서 4배로 늘어난 조직된 운송노동자들과 일반적 노동자들의 마찬가지의 성장을 은폐했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1890년대의 독일과 비교할 수 있는 1888년에 운송과 일반 노동자들의 수는 영국의 모든 조합원의 8%정도를 구성했으나 1913년에는 25%에 육박했다.
지역적 분포에 관한 한 1900년대 초 독일의 조합들이 주 산업지역인 라인-베스트팔리아 지역에서 유동적인 광산노동자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력이 약했지만 1907년 이후 이 지역으로 조합들의 침투가 가속되었다. 영국에서는 구 노동조합들이 스코틀랜드를 제외하고 북부 잉글랜드의 주요 산업지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892년 웹 부부가가 남긴 현존하는 유일한 지리적 분석에 의하면 더햄(Durham), 모섬버랜드(Morthumberland), 렝카셔에서 전국 평균 노조조직률의 두배, 더어비(Derby), 글라스터(Gloucester), 레스터(Leicester), 요크셔의 동·서 리딩스(Ridings), 그리고 웨일즈 남부 등의 카운티에서 평균보다 20-100%이상, 체셔(Cheshire), 노댐턴(Northampton), 스타포드(Stafford), 서포크(Suffolk), 워믹(Warmick)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평균의 20% 내외, 그리고 그 외 전지역에서 평균 이하의 조직률을 보였다. 1913년에 대한 어떠한 필적할 만한 지리적 연구가 뭐라하던 간에, 1911-13년의 노동조합 폭발이 웨스트 미들랜드(West Midlands)와 같은 격동적인 신 공업지역에서처럼 이제까지 세력이 약했던 지역에서 불균형적인 진전을 가져왔음은 명백하다. 이제 이 지역은 노동자 조합 세력의 40%를 담보했고, 영국의 가장 큰 다섯 혹은 여섯 개 조합 중 하나가 되었다.
마지막 질문 하나에 대한 답이 이미 본 글의 전개과정에서 우연히 나왔지만, 다시 명료하게 다룰 가치가 있는 질문이다. 이 기간 전 유럽 국가들에서 있었던 노조 확장에 커다란 공헌을 한 이데올로기적으로 투철한 좌파들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우선 맑스 혹은 맑스주의 이론이 노동자의 즉각적인 경제적·사회적 요구와 구별해서 노동조합 구조와 전략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할 것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짚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죠르주 옵트(George Haupt)가 보여주었듯이 대륙의 사회주의정당들 대부분이 최초에는 독일 사민주의 모델보다는 영국모델에, 혹은 더 정확하게는 당이 정치집단, 노동조합, 그리고 협동조합 등의 기타 노동자 단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던 벨기에 모델에-가깝게 발전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듯이 1870, 80년대 대공황은 그러한 정당 대다수의 구심점을 쇄약해진 조합들에서 멀어지게 하곤 했다. 게다가 노조 전략은 사회주의 이론에서 배타적·직종적 또는 부문적 노조주의에 대한 일반적 적대성을 추출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1900년 이후부터는 자본주의 생산의 집중과 기계화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으로부터 점점 더 많은 전략적 관념들을 도출하기 시작했다.
대중적 노조주의와 대중적 노동자 계급정당의 부상에 따라 노조에서 주로 활동했던 사회주의자들은 정치정당에서 주로 활동했던 사회주의자들과 크게 구별되기 시작했다. 이는 득표를 위한 시도에 대체로 한정되었던 정치적 행동을 특별히 거부했던 프랑스 CGT나 무정부주의나 혁명적 생디칼리즘 조직 전반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노조에서의 지위가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같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 정치적 경력을 시작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에게 매우 도움이 되는 발판이 되었고 노동계급정당과 동일화되었던 운동에서도 이는 거의 마찬가지로 명확히 드러났다; 노조들이 영국에서처럼 의회 파견단 내에서 자신들의 직접적인 대표성을 강화함으로써 당내 지배적 위치를 강조하거나 독일에서와 같이 당내에서 더욱 커진 자신의 독립성을 강조하기를 바랬던 곳에서도 유사한 양상이 나타났다. 종종 당과 노조의 마찰을 동반하기도 하는 이러한 분기는 양자의 기능적 전문화에서 주로 기인한다. 노조의 일상적 활동이 자본주의의 전복으로 여겨지던 또는 그렇지 않건, 그러한 일상적 활동은 당의 활동과 똑같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취향이나 상황에 따라 정치적 파업을 주장하는 것과 같이 노조의 빵과 버터의 임무와 동떨어진 지나치게 급진적인 것으로 인식되거나, 또는 선거활동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또한 노조들 내의 차이―예를 들어 평조합원들의, 또는 지역적 전투성과 증가하는 전국적 단체들의 독단성 사이의 ―에서 기인하기도 했다. 혁명성을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전국적 노조들 혹은 노조 연합들의 지도자들 거의 전부가 실제로 혹은 이론적으로 과도하게 개혁주의자에 속했다. 이는 순수한 무정부주의자들의 눈에 비친 생디칼리스트 노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1차 세계전쟁 도중과 그 이후 스페인에서 무정부주의자들과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조직인 전국노동자연맹(Confederatione Nacional del Trabajo)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에서 드러났다. 지도자들은 투사들보다 덜 급진적이었다; 이태리 금속노동자 연합의 창시자인 베르치(Verzi)는 1909년에 개혁주의자로 추방되었고, 그를 대체한 부오치(Buozzi)는 가장 극단적인 온건파는 아니었어도 확실히 좌익은 아니었고 이후 신질서(Ordine Nuovo)의 젊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비난받았다.
사실 혁명적 슬로건들은 오직 노조들이 너무나 취약해서 미조직 노동자들의 간헐적 반란을 조직하는 정도 이상의 활동을 할 수 없는 곳에서만 의미를 가지거나 또는 거대한 산업적 갈등을 준비하는 것으로만 의미를 가지거나, 또는 국가 관료제와 노조의 중앙화 전략의 잠식에 맞서 평조합원들의 자율성이나 지방적 노조주의를 방어하는 것으로서 의미를 가졌을 뿐이다. 사실 혁명적 슬로건 자체만은 조합들이 너무 약해서 종종 발생하는 미조직된 노동자들의 반란을 간신히 조직화하는 정도의 활동밖에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또는 거대한 산업전쟁의 준비로서, 또는 잠식하는 국가관료제와 중앙화 전략에 맞선 평조합원 자율성이나 지방 노조주의의 방어로써 주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영국에서 벌어졌던 것과 같은 역설적 상황을 낳을 수 있다. 영국에서 모든 조합들 중에서 가장 사회주의적인 기원을 가졌던 가스노동자 조합이 1914년에 와서 뚜렷이 온건해졌던 반면, 혁명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합동기계공협회의 평조합원들이 구래의 직업적 배타성 이데올로기에 기초해서 사회주의자 총서기인 독립노동당의 죠지 바네스(George Barnes)에 저항하다가 전쟁 도중 자신들의 직종적 권리 수호를 위해 급진적인 좌익적 정당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노조들을 좌우로 분류하는 작업은 그들이 어떠한 정치적·정당적 프로그램과 계획을 지지 또는 반대하느냐에 따라 가능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 영국의 노조주의를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알고 있듯이 현실은 보다 복잡하기 마련이다. 대체로 말해서 1880-1914년 동안 노동자들로 결합되었던 노조, 사회주의 정당들, 노동자 운동들은, 노조와 당 또는 노조들 사이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당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은 중요했고 결정적인 것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대륙에서는 거대한 유권자를 보유한 대중 정당의 강력함과 민족적 포괄성은 노조들이 성장할 수 있는 하나의 틀거리를 제공했고 그리하여 노조구조의 합리화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노조구조와 전략의 발전은 유력한 이데올로기들, 예컨대 맑스주의나 아나코-생디칼리즘 등과는 독립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적 의식성이 노조 선동가와 지도자, 활동가들에게 자신감과 완고함 그리고 활력을 주었다는 사실 만큼은 예외로 할 수 있다. 구조와 전략은 노동자들이 조직화해야 했던 실질적인 경제적·산업적 상황과 그들이 그렇게 조직화한 ― 과거 역사와 노동계급의 성장에 의해 형성된 조직들도 포함해서 ― 조건을 크게 반영했다. 아마도 이것이 생디칼리즘이 1914년 이전의 해들에 노동자 투사들과 급진주의자들에게 거대하고 국제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유용한 일련의 관념들을 가진 독자적인 국제적 운동이 되지는 못했던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생디칼리즘은 독일, 영국, 덴마크와 같이 노조주의가 강력하고 꾸준히 성장하고 있던 국가들에서보다, 스페인, 프랑스, 이태리,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와 같이 노조주의가 약하거나 불안정한 국가들에서 자연히 더 큰 호소력을 발휘했다. 이것은 그 풋내기들이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단체들에 의해 조직되지 않는 한 시골과 외국에서 온 미숙한 노동자들이 이미 노조의 틀거리를 가지고 있던 새로운 산업으로 홍수처럼 밀려들어온 남웨일즈 탄광이나 노르웨이의 시골과 같이 개척시대 미 서부를 연상시키는 산업화 붐 타운들에 호소력을 발휘했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들의 산업이나 직업에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자신들의 지역 공동체에 본질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특별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스페인, 이태리, 그리고 프랑스가 이러한 경우인 듯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경우는 마르세이유, 르 하브르(Le Havre), 낭트, 제노아, 리보르토, 바르셀로나, 벨파스트, 리버풀 등과 같이 지역 공동체 중 항구도시에서는 무시해야 한다. 생디칼리즘 사상의 다양한 호소력은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쇼터(Edward Shorter)와 틸리(Charles Tilley)가 보여주었듯이 이데올로기적 차이가 파업경향이나 파업행동의 양식의 차이에 거의 무관하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따라서 유럽의 다양한 조합운동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가 아니라, 그것들이 대변하는 산업화의 국면과 등급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법으로 영국과 프랑스, 이태리와 같이 산업화가 약하거나 뒤쳐진 국가들, 벨기에와 영국과 같이 최초의 산업혁명이 지배적인 국가들, 그리고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와 같이 보다 근대적인 진로를 따라 빠르고 거대하게 산업화된 국가들 사이의 구분이 가능해진다. '세계의 공장'이었던 영국을 제외하면 이들 중 어느 국가에서도, 그 국가의 기초적 산업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숙련 또는 직종 노동조합이 발전하지 않았다; 영국과 같은 거대한 숙련부문이 부족했던 벨기에에서는 물론 아니었다. 사실상 이 기간동안 벨기에의 조합들은 훨씬 덜 혹은 훨씬 최근에 산업화된 네덜란드의 조합들보다 특이하게 약했고 1913년에서야 간신히 강해졌다. 어느 국가에서도 영국과 같은 양상이 발전하지 않았다.
첫 번째 집단에서는 이 기간 동안 어떠한 대중적 노조주의도 발전하지 못했다. 공공부문, 아마도 광산, 그리고 이태리의 특별한 경우로서 농업 노동자들은 예외다. 이 집단은 직종적 투쟁을 주도할 수 있었던 상당한 강력한 노조간 지역 중심과 숙련 노동자 간부들을 발전시켰다. 세 번째 집단에는 새로운 산업적 발전에 뛰어든 노르웨이에서 독일에 이르는 나라가 포함된다. 노르웨이에서는 다양한 산별노조들을 분출하기 전에 근대적 산업들에서 전체 조합원의 50%를 획득하고 1900년대 전체운동을 사실상 지배했던 일반노조가 조직되었다. 독일에서는 매우 강력한 숙련직종-기반 노조들이 운수 노동자나 공장 노동자들의 노조와 같은 조직에 의해 조직되기 이전에 자신들의 활동영역을 확대했다. 다시 말하건데, 1913년까지 산별노조주의와 일반노조주의의 이러한 조합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미 관찰한 바와 같이, 이들 국가 중 어느 곳에서도 직종별 노조주의가 사라지지 않았다. 둘째, 셋쩨 집단을 형성하는 국가들에서 노조주의는 1913년에 이르러 근대적 모습을 띄기 시작했고, 그 이후의 직종 변화들을 허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국가에서도 노조주의가 한 산업의 대다수 노동자들을 전국적으로 단일하게 모집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보기드문 예외조차도 이 규칙을 입증할 뿐이다.
1차 세계전쟁 말에 영국, 덴마크, 노르웨이 노조 조직률은 1913년의 두배에서 세배, 스웨덴과 네덜란드는 세배 이상, 벨기에에서는 거의 다섯 배까지 상승했다. 특히 영국과 독일에서와 같이 특정한 경우에서는 노동력의 조직비율로 파악된 노조의 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으며, 프랑스, 덴마크, 아마도 노르웨이와 같은 다른 경우에서는 1930년대 중반 혹은 후반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 시기의 조직률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세계전쟁 중과 그 이후의 노조주의의 일대도약은 1880-1914년 기간 노조 팽창 양상의 합리적인 연속으로 이해될 수 없는가? 1914년 이전시기의 신노조주의는 1918-20년에 그 최고점에 도달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국과 서유럽 운동들은 다시 한번 비교가능하다. 그리고 이 놀라운 국제적 성장의 수치―그리고 일시적인 급진화―는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노조의 발전 국면의 역사적 중요성의 척도이기도 하다.
주제어
노동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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