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6.36호

희망사항

이현대 | 조직국장
희망사항

20대 초중반 학생운동에 몸담고 있던 시절, '운동의 표상'은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의로운 길로서 대의적 명분이 있었다.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아도 도덕적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때도 동맹휴업을 주장하는 소위 '운동권'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학생들은 부당하게 강요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혁명'을 꿈꾸던 많은 '인사'들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내버리고 금뱃지를 달기도하고, '시민운동'이 민중운동을 부정하고 주류적 운동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할 즈음, '운동의 표상'은 바뀌기 시작했다. 운동하면 시민운동하거나, 정치하는 줄 안다. 심지어 장인 어른은 나를 친구들에게 '정치개혁포럼 사무국장'으로 소개하기도 했으니까. 물론,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가진자들의 정치를 갈아엎고 민중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개혁이라 한다면야...

사회진보연대 활동을 시작하면서 모 선배와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요즘, 운동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인 정당성'이 사라진지 오래인 것 같다. 사회단체 활동하면 자기 하고 싶은 일하기 위해 조금 불편하게 살겠거니하고 생각한다. 제대로된 운동전망을 내놓지도 못하고, 그로 인해 탄압받는 것도 아니니 그럴만도 하지. 운동권 스스로 만들어온 게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온몸 바쳐 '평등-자유 세상'을 만들고자 젊은 동지들이 활동을 결의했다. 하지만, 현실의 조직운동의 조건은 이들에게 노동조합, 여느 사회단체들이 주는 최소한의 활동비도 지급하지 못한다. 결국 일정한 생활비를 벌 수 밖에 없다. 그것으로 인해 활동의 어려움을 겪고... 마음이 아프다.

희망사항

운동이 세계를 변혁해야 하는 것, 그를 위해 끊임없는 이론적 탐구와 실천적 모색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운동의 기본이니, 논외로 하고, 나의 희망사항을 적어본다.

하나, 운동의 '도덕적 헤게모니'를 복원해야 한다.
운동하는 자는 사는 모습도 달라야 한다. 똑같이 생(生)을 걸고 운동하는데, 어떤 자는 잘 살고, 어떤 자는 홀로 고통스럽고. 공동체적 삶을 만들어보자. 일시에 되지는 않겠지만, 가족까지 연관되어 쉽지는 안겠지만, 운동하는 사람들의 삶 자체에서 공동체적 삶을 형성해 보자. 모든 재산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까지도.

하나, 회원들은 십일조를 내야 한다.
나를 포함하여 회원들은 십일조를 내야한다. 적어도 전쟁과 야만으로 가득한 신자유주의에 맞서 운동을 하는 사람끼리 서로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십일조 어떻게 생각하면 엄청난 금액이고, 그리 각박하게 살지 않는 사람은 술한번 먹는 금액일 수 있다. 십일조 꼭 내자. 우리 회원이 500명이니까 10명이 1사람씩 챙겨도 50명의 활동가를 책임질 수 있다.

하나. 1달에 한번은 토론을 하자.
한달에 한번은 토론을 하자. 사회진보연대 활동이 풍기는 이미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진보연대 활동가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한달에 한번쯤은 토론에 꼭 참가하도록 하자. 그간 집행위원들이 잘못한 것은 반성하고 앞으로 적극적으로 자리를 만들도록 하자.

끝으로, 오늘날 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 혹자들은 민주노총이나 당의 활동가들을 쉽게 관료라 하기도 하고, 현장운동에 몸담는 혹자들은 단체활동가들을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녹녹하지 않다. 사업장 투쟁 쫓아 다니느라 집에 못 들어가기 일수고, 일에 치여 사느라 너무도 힘겹다. 요즘같이 투쟁동력이 없는 시절, 낮이면 집회 쫓아다니고, 밤이며 불켜진 사무실, 널부러진 시체처럼 새벽녘까지 일해야 하는 단체활동가들의 삶도 고단하다. 운동하는 우리 모두 자신의 활동의 20%는 운동의 전망을 고민하고 토론하고, 공식적이지 않는 활동에 투여하자. 이제까지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내가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나를 몰고 다니고 있지 않은가?

ps. 글만 쓰면 길어진다(짧게 못쓰는 건 능력부족)는 편집자의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기관지를 통해 꼭 소개하고 싶었던, 박정희 유신정권에 할복으로 맞서 항거했던 김상진 열사의 '양심선언문'을 첨가한다. 이 양심선언문은 1975년 4월 11일 서울농대 교정에서 김상진 열사가 할복직전 학우들 앞에서 낭독한 글이다.

양 심 선 언 문

더 이상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으며 더 이상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두움이 짙게 덮힌 저 사회의 음울한 공기를 헤치고 죽음의 전령사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가고 어미닭을 잃은 병아리마냥 우리들은 반응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이 결코 그릇됨이 아닐진대 우리의 주장이 결코 비양심이 아닐진대, 우리는 어떻게 더 이상 자존을 짓밟혀 불명예스런 삶을 계속 할 것인가.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세멘트 바닥 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들으라! 동지여! 우리의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용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금일 우리는 어제를 통탄하기 전에, 내일을 체념하기 전에, 치밀한 이성과 굳은 신념으로 이 처참한 일당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진의 결의로 진격하자. 민족사의 새날은 밝아오고 있다. 그 누가 이 날의 공포와 혼란에 노략질 당하길 바라겠는가. 우리 대한 학도는 민족과 역사 앞에 분연히 선언한다. 이 정권, 끝날 때까지 회개치 못하고 이 민족을 끝까지 못살게 군다면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뜨겁게 외치는 이 땅의 모든 시민의 준열한 피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역사는 이러한 사태를 원치 않으나 우리는 하나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을 것임을 재천명한다.

탄압과 기만의 검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라. 우리는 이제 자유와 평등의 민주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가 도래했음을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발코자 한다.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

1975. 4. 11 서울농대 축산과 4년 김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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