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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7-8.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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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공화국?

김준범 | 편집부장
요즘 뉴스를 보면 거의 매일 납치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체포된 피의자들이 말하는 범행동기가 카드 빚인 만큼이나, 납치대상이 여성과 어린이로 국한되는 것은 공통적이다. 현재 신용불량자는 320만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경제활동인구의 다섯 명당 한 명은 신용불량자인 셈이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개인부채가 심각해진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유독 최근 들어 납치가 일상적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혹자는 만연한 도덕적 해이를 꼽기도 하고 또 빈부격차의 심화를 그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일어나는 납치를 단순히 각박해진 사회 탓으로 돌리기에는 무언가 의미심장한 여운이 남는다.

납치를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

최근 빈번한 납치사건은 사회에 다양한 반응들을 이끌어 냈다. 그동안 명품에 대한 열광을 고깝게 보던 많은 이들은 백화점의 명품판매가 줄었다는 보도를 듣고 통쾌해 했다. 사회문제로까지 언급되던 소위 외제 명품들에 대한 열광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만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분명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명품소비가 줄어든 배경이다. 납치와 살인이라는 끔찍한 폭력이 부유층의 과소비감소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납치와 살인의 배후에 극한의 폭력과 인간성의 포기를 강제하는 비인간적인 사회구조가 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의 납치사건들 둘레에는 이러한 단순한 도식화를 넘는 문제들이 있다. 그 첫째는 납치대상이 여성과 아이들로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납치대상의 문제

물론 여성과 아이들은 납치하기 위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기 쉬운 상대일 것이다. 또한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폭력은 물론 하루 이틀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패악이 노동계급의 여성과 아이들에게 가하는 폭력만큼 불특정한 여성과 아이들에 폭력이 지금 이 시간에도 쉼 없이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안정적인 치안을 자랑하더라도 100퍼센트의 검거율을 자랑하더라도 납치사건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물론 치안의 부재를 말하려 함이 아니다. 강남의 소위 부유층들이 사는 곳이 대한민국의 어느 곳 보다 치안이 잘되는 곳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납치로 상징되는 소위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범죄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결과가 공통적으로 서로 다른 계급의 여성들로 향해져 있음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저질러지고 있는 숱한 납치사건을 단순히 빈부격차에 의한 계급간 갈등의 심화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문제는 빈부격차에 의한 사회적 갈등의 심화인가?

1996년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술집 여주인을 납치한 후 생매장하는 등 부자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범행을 저질러 물의를 일으켰던 ‘막가파’의 조직원이 포함된 3인조 성폭행범이 얼마전에 검거됐다. 과거 이들과 또한 소위 ‘지존파’라고 알려진 집단의 엽기적인 범죄행각은 많은 이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놓고 빈부격차의 심화에 대해 심각하게 다룬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 재범행의 경과를 보면 이들의 행각이 부유층에 대한 증오에 있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준다. 이들의 재범행은 인터넷 채팅을 통해 이루어 졌고 피해자는 부유함의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익명의 인물이었다. 이들은 단지 돈을 얻기 쉬운 수단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뿐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빈부격차의 심화와 상대적 박탈감과 복수심 등은 범죄를 둘러싼 외연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범죄를 통해 다만 쉬운 돈벌이 수단을 찾았던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쉬운 납치 대상으로서 여성을 택한 것이고, 만약 피해여성이 돈이 많다면 그만큼 더 돈을 얻게 되는 ‘운’일 뿐이다. 게다가 최근 납치 사건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피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다. 소위 입막음 수단으로 사용하는 성폭력은 인질의 눈을 가리듯 납치사건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납치와 강금이라는 폭력에 덧씌워진 성폭력은 그렇지 않아도 끔찍한 납치를 훨씬 더 끔찍하게 만들고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의 강화

납치는 과거 인신매매라는 참혹한 범죄가 기승을 부리던 때와 같이 여성의 성에 대한 전면적인 폭력을 가한다. 인신매매가 여성을 극단적으로 상품화하는 맥락에 있었다면 납치사건들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은 순결이데올로기를 이용한다. 인신매매는 성적 상품으로서 노골적으로 여성을, 정확히는 여성의 신체를 매매했다. 어떤 성매매에 여성의 완전한 동의가 있을 수 있으랴마는, 인신매매는 무차별적인 납치를 통해 여성의 신체를 매매했다는 점에서 실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최근의 납치사건들은 물론 여성의 성을 매매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여성의 성을 그 자체로서 상품으로서 매매하지 않을 뿐이지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인신매매가 여성의 성이 그 자체로 매매되는 사회의 극단을 보여주었다면 납치사건들에서 소위 입막음이라는 것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수치심을 이용한 것이고 이것은 여성의 성에 대한 사회의 시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폭력은 한때는 인신매매로 한때는 납치라는 사건들로 극단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자체의 파괴성이다

과거 인신매매가 빈번했던 시기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사회적 변동과 그 배경에 있다. 인신매매가 주로 발생했던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은 급격한 고도성장이 만개했던 시기였다. 이때의 인신매매는 성매매 산업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했다. 자발적인(?) 성매매 여성의 감소는 수요에 대한 공급을 채우기 위한 인신매매를 부추겼다. 어쨌든 인신매매의 배경에 고도성장을 통한 경제적 안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군사정권 말기 극도로 취약했던 치안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납치사건들의 배경에 있는 극심한 경기침체와 만연한 실업은 납치를 부추기고 있다. 자살률이 최대라는 요즘의 경제상황과 광범위한 신용불량자로 대표되는 개인 파산은 단기간에 큰돈을 요구한다. 안정성을 담보할 수 없는 자본은 미래를 담보로 수요를 창출하고 결코 나아지지 않는 미래는 수많은 개인 파산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조건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강화한다. 체제 자체의 전복이 가능하지 않은 조건에서 불안정한 삶의 조건은 약자에 대한 폭력과 착취의 강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비단 자본이 이윤확보를 위해 여성 노동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것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여성의 성은 확실히 안정적인 돈벌이 수단이 될 수 있다. 굳이 납치라는 직접적인 예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는 최근 연예인들의 누드 열풍으로도 충분히 드러난다. 즉, 여성에 대한 착취와 폭력의 강화는 사회상황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늘어가는 폭력의 강화는 신자유주의의 폭력적인 폐해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은 불행히도 신자유주의를 없앤다고 해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원인은 여전히도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이기 때문이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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