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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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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항쟁, 절대공동체와 사회적 주체성의 출현

고길섶 |
부안항쟁, 절대공동체와 사회적 주체성의 출현

고길섶 문화비평가

예고 없이 찾아 온 불청객

부안사태는 예고 없이 찾아온 불청객이었다. 2003년 2월부터 시작된 울진, 영덕, 영광, 고창(정부 후보부지 선정지역) 등지의 지역주민들의 핵폐기장 반대집회가 잠잠해지고 정부가 지자체의 자율유치 방안을 발표하자 5월 13일 부안군의 위도주민들이 군의회에 유치 청원을 함으로써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부안읍내에서도 반대운동이 태동되었고, 7월부터 본격적으로 핵폐기장 반대 대규모 군민집회가 시작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공권력의 폭력진압에 의한 부안사태가 속출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부안 군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하였다. 대규모 궐기대회, 촛불집회, 상경투쟁, 해상시위, 서해안고속도로 점거, 등교거부 등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내소사에서의 군수 응징사태마저 발생하였다. 이후 정부와의 대화기구가 마련되면서 부안 군민들은 핵폐기장 부안 백지화 쟁취를 기대했으나 이마저 무산되어 마침내 11월 19일 민란사태로 번졌고 11월 20일에는 부안지역에 경찰계엄이 발동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부안 군민들은 오히려 좀 더 평화적인 방식으로 촛불집회를 중심으로 저항을 계속하였으며, 2월 14일에는 주민 독자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강력한 반대의사를 수치(72% 투표율에 92% 반대)로 정확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신규공모 절차를 준비하는 한편 부안군의 공식적인 주민투표를 통해 밀어붙이려 했으나, 정부가 2004년 9월 15일 마감으로 고시한 지자체장 예비신청이 단 한군데서도 접수되지 않아 결국 정부와 유치예비신청을 하는 지자체가 주도하는 주민투표 일정 자체가 무산되고 말았다.

한편, 부안 군민들은 2·14 주민투표 이후 투쟁동력이 현저하게 떨어졌고 더군다나 4·15 총선 때 반핵부안대책위가 정확히 대응을 하지 못함에 따라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나마 투쟁동력이 이어진 것은 2·14 주민투표 이후 매주 갖는 촛불집회와 매일 아침마다 군청 앞에서의 군수퇴진 1인 시위, 그리고 그때그때 사안에 따라 연속된 ‘게릴라전’/‘국지전’ 등 때문이었다. 부안군민들은 정부의 주민투표 일정이 무산됨에 따라 부안의 백지화가 공식화되기를 기대하고 있으나 정부는 여전히 또 다른 전략과 일정을 꿈꾸고 있다. 11월 들어 부안에서 한국수력원자력이 철수하기 시작하고 감사원의 유치과정 감사계획이 보도되는 등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지만 모든 게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부안 군민들은 쓰라린 기억으로 11·20 경찰계엄 1년을 맞이했다.

투쟁의 역동성

부안의 핵폐기장 반대투쟁은 반핵투쟁이자 민주주의 투쟁으로 요약된다. 부안은 분명 한국수력원자력/한국전력이라는 거대독점 전력자본 및 전력권력과, 그리고 그에 동맹하는 군정독재 및 노무현 정권에 대항해왔다. 부안 주민들의 집단적 분노와 저항의 기원은 군수의 독단적 유치신청 행위에 있으며, 그 분노와 저항은 필연적으로 예고된 군수의 군정독재 및 국가권력의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투쟁으로 성장되었고, 투쟁의 ‘절대공동체’를 형성하면서 군정권력에 대응하는 ‘주민권력’이 생성되었다. 부안항쟁은 군대책위라는 조직화된 투쟁체를 통해 준비되었다. 하지만 부안 군민들은 이미 군대책위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화되면서 분노의 감정구조에 따른 자발적인 투쟁공동체로 연대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공권력과 맞서는 격렬한 투쟁양상들로 표현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촛불집회를 통한 문화투쟁으로 결속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부안 주민들은 사회적 주체성으로 새롭게 출현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주체성은 주체형태로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는 다중적 주체성이자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는 민중적 주체성이라는 이중적 형태로 나타났고 그 내용으로는 ‘생명-민주효과’로 생산되는 주체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체성은 투쟁하는 절대공동체의 힘의 원천이 되었다. 절대공동체의 부안적 구성은 장기화된 과정 속에서 역동적인 주체성의 학습으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2·14 독자적 주민투표 형태로 ‘자치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창발을 실험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부안반핵민주항쟁은 매우 풍부하게, 역동적으로 이어져 왔다.

공동체의 새로운 구성

부안의 투쟁하는 절대공동체는 첫째, 부안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하는 사회적 주체로 출현하도록 하였으며, 둘째, 그 사회적 주체는 생명-민주효과로 구성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담지자이며, 셋째, 그 새로운 주체성은 다중이자 민중으로서의 집합적 행위주체로 표현되었다. 넷째, 그 집합적 행위주체들은 성별이나 연령이나 위치에 따르는 수직적 종속관계로서가 아니라 수평적 동지관계로 결속되었다. 그리고 다섯째, 부안 사람들은 핵마피아 집단 및 찬핵집단에 대한 적대성으로 대치해왔다. 마지막으로, 그러면서도 절대공동체 내 ‘동지’들은 형식화된 지역-행정적 공동체를 해체하고 연대하는 지역-문화적 공동체로 이끌어 왔다. 부안지역은 핵폐기장 문제 이전에는 지역-행정적으로 규정되는 형식적 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면, 반핵투쟁 이후로는 투쟁공동체의 운명 속에서 교통하고 연대하는 문화적 공동체로 진화되었다. 사람들은 집회장에 모여들어 공론장을 형성하면서 정보와 의견의 교환, 감정구조의 교감 등을 통해 낯선 사람들에서 낯익은 동지로 소통하고 연대해왔다. 이것은 동어반복되는 듯 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워져 왔다

부안 사람들은 일반적 지역 사람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대개 개별화된 개인으로서 존재해왔으나 핵폐기장 사태를 맞이하여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사회적 주체로 급부상하면서, 적어도 행동적으로나 인지적으로 무관심했던 사회적 이슈들에게까지 폭넓은 수용성을 가지면서 세계-내-존재로서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핵폐기장 반대투쟁의 명분을 지역이기주의에서 찾지 않고 ‘핵없는 세상’에서 찾은, 투쟁의 초기화조건을 세계 보편적 문제로서의 반핵투쟁으로 배치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사실 위도주민들이 유치청원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바로 인접지역인 고창에서 핵폐기장 반대투쟁을 하는 상황에서도 부안 사람들은 핵폐기장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였다. 그러나 부안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의 문제로 불어 닥치자 지역적 존재로서의 위기를 느끼면서 세계-내-존재로서 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사안 자체가 가져다준 자발적 생명-민주효과이기도 하며 대책위에서 촛불집회와 교육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공급해준 의식적 교육-학습효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도 반대할 수 있게 되었고, 찬성이 대세였던 새만금 사업 문제도 서서히 반대하는 쪽으로 기류가 형성되어 왔다.

진정한 승리를 위해

아직도 부안 주민들은 계속 투쟁 중이다. 일개 군수의 독선적 행위로 촉발된 부안주민항쟁은 핵마피아 집단이 구축하려는 핵산업-위험사회와 맞서 싸우는 전쟁기계가 되어 왔다. 작은 지역에 갇혀 고립된 싸움을 하면서도 부안 사람들은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면서 한국 사회운동사의 새로운 역사를 기록할 텍스트들을 생산해왔고, 세계적으로도 전례 없는 주민저항방식을 창출해왔다. 부안 주민들은 핵폐기장 반대투쟁을 하면서 삶의 의미와 새로운 생활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부안 주민들의 반핵민주항쟁은 다름 아니라 정치적 투쟁과 결속된 문화투쟁이다. 부안항쟁은 매우 풍부하게 투쟁의 대서사시를 기록해왔다. 그러므로 부안항쟁은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되며,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의미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부안항쟁은 정부가 백지화 선언한다고 해서 종결되는 게 아니다. 아픔과 후유증과 희생을 치유하면서 항쟁의 성과를 이어 대안사회로의 이행을 전망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들과 장치들을 강구해야 하고 지역적 연대가 모색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곧 부안항쟁의 진정한 승리를 향한 발걸음이 되지 않을까 한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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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태그
정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