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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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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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정치

밀턴 피스크(Milton Fisk) | 번역>실업운동정책 생산팀
***Milton Fisd, "New Politics of Class", in Marxism Today, 1996, Preager.


나는 노동계급에 대해, 특히나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계급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노동계급의 익숙한 정치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많은 나라에서 이제는 노동계급의 적은 부분에 불과한 노동조합들이, 이러한 구(舊) 정치를 규정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 바램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계급의 더 광범위한 부문들이 그들의 새로운 정치를 규정하는데 참여하는 것이다. 나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넘어서까지 일반화될 수 있는 새로운 노동계급 정치의 전망을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의 새로운 정치를 논함에 있어, 신자유주의를 그 토론의 배경으로 이용하면서, 그 범위 안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그것은 1970년대 이후 노동계급이 직면해 왔던 세계적 현실인 것이다.


노동계급의 구(舊) 정치

노동계급의 정치에 관해서, 나는 그것이 좀더 확장된 보편성을 확보하는 새로운 지향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할 것이다. 내가 '복지 자본주의'라고 칭하는 시기, 나라마다 다르지만 1910∼1940년에서 1970년에 이르는 이 기간 동안에, 노동계급의 정치는 너무나도 편협하였다. 본질적으로 계급이 부문적이며 상호대립적인 것이라고 할 때, 계급정치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 어쩌면 모순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나의 제안과 관련된 보편성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나의 제안과 관련된 보편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적 영역의 보편성인데, 이는 한 사회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기본요소들을 결합시킨다. 노동계급은 그들의 정치를, 그 자체보다 더 큰 공적 영역의 일면으로 만들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노동계급 내부에서 나타나는 이해의 보편성이다. 노동계급의 정치는 단지 작업장에서 발생하는 이해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내부 모든 범위의 이해를 포괄하고 옹호해야 한다. 이 요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공적이면서도 포괄적인 부분에서 더 보편적인 성격의 새로운 계급정치가 필요할 것이다.
구래의 정치가 하나의 경로를 밟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개의 경로를 따랐다.

가장 낡은 길은 협조주의(collaboration)의 길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다소 거칠게 들릴 수도 있지만, 완곡하게 표현한다고 해서 협조주의의 길을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협조주의의 길은 진정한 보편성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스스로를 지배계급이 수용할 수 있는 정치 속으로 밀어넣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배계급의 정치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부문들이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을 증진시키는 정치가 결코 아니었다. 공적 이해에 대하여 말한다고 할지라도, 지배계급의 정치는 언제는 편협한 것이었다. 계급 협조주의적 길은, 따라서 많은 전쟁속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지지하는 길이 되어왔으며, 또한 서로간의 경쟁 속에서 자본가들을 지원하는 길이 되어 왔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른 계급의 이해를 위해서 하나의 계급이, 그들의 부문적 이해를 포기하는 것이 결코 보편성을 진전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부문주의를 또다른 부문주의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보다 덜 이용된 길은 수많은 노동계급 급진파들에 의해 타올랐던 길이다. 이들은 임금 인상 및 작업 규율에서부터 조세 문제와 저렴한 제3세계 노동을 향한 법인기업의 이동에 이르는 모든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타협에 대하여 반대해왔다. 그들은 단순히 자본가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동자들의 이해를 찬양함으로써, 부문을 넘어 보편으로 탈출한 것이 아니다.

공적 영역은 타협의 정신을 요구한다. 이러한 타협에 대한 반대는 종종 공적 영역으로부터의 고립을 낳을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이해를 아주 협소하게 바라보는 관점과 연결된다. 그것은 비타협정신을 노동계급 내부 논쟁에까지 미치게 한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삶의 다른 측면에서 가지는 이해를 희생시키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이해 그 자체에 집중할 것을 고집한다. 따라서 이 길은 공적 보편성으로부터도, 노동계급 내의 이해의 보편성으로부터도 멀어진다. 나는 이것을 노동주의적 길이라고 부르는데 신자유주의하에서 이 길은 파국을 맞고 있으며, 이 길이 무엇을 성취하든지간에 복지 자본주의라는 조건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계급정치는 협조주의의 포기와 노동자주의의 속박을 뛰어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협조주의를 피하기 위해 독립적이어야 하고, 노동자주의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광범위해야 한다.

이들 두 성격 사이에는 확실히 하나의 긴장이 있다. 계급정치가 어떻게, 작업장 쟁점들이라는 제한 속에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으면서 또한 독립적일 수 있을 것인가? 협조주의로의 매몰로 나아가자 않고, 어떻게 광범위할 수 있을 것인가?
구래의 정치는 이러한 딜레마를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 하나의 문제점을 가졌다. 구래의 정치학은 노동자주의를 피하기 위하여, 결국 협조에 이르렀던 타협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협조주의를 피하기 위하여, 노동주의라는 고립으로 퇴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식으로 구래의 정치는 노동계급을, 협조주의적인 실용주의자와 노동자주의적인 강경파로 분리시켰다.


공적 영역으로의 진입

노동계급은 공적 영역에 대해 주변적이다. 파업, 고용주의 의료보험 가입의무, 혹은 값싼 노동력 보유국과의 자유 무역 등이 문제가 될 때, 우리는 공적 담론 속에서 노동계급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의 존재는 지질학자의 존재와 비슷하다. 지진, 화산분출, 혹은 석유발견 등이 있을 때에야 지질학자의 의견은 경청된다. 그러나 헤드라인을 만드는 광범위한 정치적 이슈 속에서, 노동계급은 지질학자와 마찬가지로, 논쟁의 파트너에서 제외되거나 지배집단 뒤로 밀린다.
노동계급이 주변적으로만 존재하는 이러한 공적 영역이란 무엇인가?

첫째로, 어떠한 집단도 그 사회의 다른 집단들과의 관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공적 영역은 중요하다. 그들의 관계가 아무리 대립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혁명 직전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일상과 관련된 수많은 이슈들에 대한 공적 토론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학교, 고속도로, 병원, 여가와 예술, 택지조성 사업, 법원, 수도체계 등이 토론될 수 있다. 이러한 토론에서 빠져나가길 원하는 집단이라면, 위와 같은 이슈들이 그들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혁명을 통해 그런 토론에서 그들의 상태가 순식간에 개선될 것이라 생각하거나, 혹은 다른 집단이 그 사안에 대해 적절하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믿음 중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공적 영역은 모든 집단들에게 중요한 것이다.

둘째, 공적 영역은 서로 다른 사회 세력들 사이에 도달한 합의-무엇이 적절한 행동인가(올바른 행동인가), 그리고 무엇이 추구할만한 것인가(좋은 것인가)에 대한 동의-의 기반 위에 존재한다. 일단 어떤 합의가 존재하면, 긴급한 주요이슈에 대한 의미있는 토론의 기반이 존재한다. 합의가 없다면, 공동의 근거는, 과거에 어떤 공유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채 토론해 왔던, 무언가 부족한 채 남아있는 토론자들이다. 하나의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세력들 중 적어도 일부가 자신들의 근본적 입장에서 타협을 봐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따라서 공적 영역은 하나의 기본적 합의에 의해 열려 있는 논쟁과 토론의 영역이다. 근대적인 민주국가가 존재하는 것도 공적 영역 내부이다. 그렇지만, 형식적으로 구성된 의회에 들어가야만 공적 삶의 일부가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공적인 삶은 부엌 식탁과 교실, 신문의 특집란, 그리고 마을회합에까지 확장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계몽주의의 계약론 사상가들이 말한 것과 진배없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공적 삶이 근거를 두고 있는 합의의 본성에 대해 덧붙여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합의가 모든 종류의 조건들에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안다 : 합의는 자율적 의지의 고립된 행위로 포착되지 않는다. 합의는 권력에 의해서 조건지워진다. 또한 권력자들이 경제적 상황을 구축해온 방식에 의해, 혹은 의식에 대한 그들의 통제에 의해 조건지워진다. 이 사실은 공적 영역이, 자율적 의지의 유사한 행위들에서 기원한다는 관념에 근거한 평등주의적 환상들을 즉각 깨어버린다.

사실, 합의를 형성하는 동의 사이에는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강자의 동의와 약자의 동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약자의 동의는 억압에 대한 저항을 무력화시킨다. 그들은 축소된 취약성을 약속받지만, 또한 그 때문에 스스로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의에 제한되어 버린다.
약자의 아이러니는 그들의 동의가 공적 삶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보증수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동의를 통해서 공적 삶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며, 또한 지배적 권력에 의해 공적 삶으로부터 자의적으로 배제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동의과정에서 그들이 포기하는 것은, 아무런 쟁점이나 관심없이 그들에게서 멀어진다. 즉 그것은, 그들을 종속시키는 사회체계의 더 큰 변수들에 대해 논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쟁점 없이 멀어진다는 것이다.

공적 담론에 필수적인 사회 안정에 대한 이해관심 속에서,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 그들은 벌써 침묵을 유지하는 것으로 동의해 왔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약자들이 논쟁과 토론에 진입하려 할 때, 아무도 그들에게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아무 관심도 없이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결국 약자들이 자신들에게 결정적인 문제로 싸우기 위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이제 사용하지 않는다는데 동의해 왔다는 것은 상식이 되어 버렸다. 전반적 범위의 주요쟁점에 대한 그들의 동의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공적 삶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은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합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노동계급은 이 격하된 공적 삶에 대해 주변적인데, 이는 동의의 비대칭성 때문이다. 구래의 계급정치-적어도 그것의 협조주의판-는 이같은 제스처를 취해왔다. 그들은 사회의 다른 부문들과 함께 공적 삶에 진입하기 위해, 스스로의 규율을 동요시키지는 않았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우드로 윌슨의 재임기간 동안, 미국의 노동계급은 공적 삶의 '완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한 길을 충실히 밟았다.

그러나 적어도 완전한 구성원 자격에 도전할 필요는 있다. 그 완전한 구성원 자격이, 타락한 자격(그것을 가진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않는)이 아닌 것처럼 가장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완전한 구성원 자격은 비대칭적 합의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명백하게 도전받을 수 있다. 그 합의는 노동계급이 권력의 불평등에 도전하는 이슈들을 주장할 수 없게 하였다. 더군다나 비대칭적 합의는 노동계급에게 귀기울일 이유를 제공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합의는 중대 이슈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노동계급의 새로운 정치에 대해 말할 때는, 이러한 협조주의적 방식으로 공적 삶에 진입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말하는 진입이란, 계급의 근본적 이슈들이 논쟁되고 토론되는 것을 허용한다는 의미이자, 관심과 주목을 강제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진입이라는 것은 구성원 모두의 노력을 요구하는데, 왜냐하면 공적 영역이란 현관 앞 논쟁에서부터 공원에서의 집회, 그리고 연방의회에 이르기까지 확장되기 때문이다. 정치정당은 공적 삶에서의 이러한 활동을 조직하는 수단이며, 그것을 소진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독립성이라는 관점에서 공적영력으로의 진입은 보편성을 향한 일보전진이다. 공적 영역은 모든 집단이 쟁점들을 토론하는 곳이다. 그러나 만약 몇몇 집단들이 다른 집단들의 협조자로서만 그 곳에 존재한다면, 그들은 다른 집단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주요 이슈에 대한 논쟁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성을 향한 일보전진은 - 모든 집단들이 이슈를 토론할 수 있는 일보전진 - 독립성이라는 관점에서 공적 영역으로의 진입이라는 것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이는 노동계급 내에서만 이슈들을 토론하기 위해, 노동자주의자들과 함께 가만히 들어가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호의존성을 시인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권력이 수용할만한 수준에서 이슈들에 대해 타협하는 협조주의적 노선도 아니다. 왜냐하면 협조주의가 노동자를 공적 영역에 진입시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영역에서 다른 계급에게 더 많은 역할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의미

노동계급이 매우 약할 때, 노동계급적 이슈들을 공적 삶으로 이전시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타당한가? 계급권력의 비대칭성이 너무나 강력하여, 협조주의자들이 오늘날 행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행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여기서 우리의 새로운 계급정치를 위한 역사적 맥락으로서 신자유주의가 결정적인 문제가 된다.
지금은 복지 자본주의시대 동안 실행되었던 합의를 재협상해야 할 시기이다. 지난 시대에는 노사관계의 분명한 표준, 삶의 질을 개선하는 공공재, 꾸준히 향상된 생산성에 기반한 번영 등에 대한 약속이 존재했었다. 비록 충분히 이행되지는 않았지만, 이 약속들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합의를 유지하여 전후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맥락에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그 약속들 자체가 철회되어 왔으며, 현실은 유연화된 노동, 공공재에 대한 공격, 번영이 아니라 이윤을 높은 생산성 등의 약속들 뿐이다. 과거의 합의들이 타당할 수 있었던 조건들은 이제 사라졌다. 따라서 지금은 협력을 위한 조건들을 재협상할 때이다.
그것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한단계 떨어진 주변적 지점에 머물기보다, 활기있는 공적 삶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분노의 물꼬를 틀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분노는 복지국가의 축소라는 것 뿐만 아니라, 만인에게 존엄하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제공하지 못하는 사회체계에 비굴하게 아부해온 현실 주변에서도 구축되어 왔다.
이러한 분노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새로운 합의도출을 위해 위해 계속해서 노력할 수 있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권력의 비대칭성과 관련이 있는데, 왜냐하면 지금 나는 노동계급이 자본가들의 권력을 매우 급격히 따라잡거나 앞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노동계급의 특별한 이해를 더 많이 공적 의제로 만드는 것에 대해, 더 이상 그 누구도 이러한 이슈들에 대한 논쟁과 토론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시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결과 발생하는 공적 담론의 탈신비화는 대단한 장관을 이룰 것이다. 어떻게 인플레이션을 피할 것인가를 모든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이야기하는 대신, 날조된 경기침체 속에서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를 사람들의 이해와 함께 주식소유자들의 이해를 개방적으로 말할 수 있는 공적 대화의 자리에서 단일한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국민의료보험을 위한 노력은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대신, 의료보험 개선을 위한 대통령의 전략에 미칠 수 있는 거대보험회사들의 영향력을 주장하는 하나의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 적절한 계급적 용어들로 공적 담론들 속의 모든 것을 분석하는 하나의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

분노는 그 곳에 존재하며, 신자유주의가 진정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 분노는 훨씬 더 집중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위한 무제한적 경쟁을 이념으로 삼는 다윈주의적 자본주의가 세계적 규모로 재출현한 것이다. 그 목적은 복지 자본주의의 종말과 함께 시작된 불황의 극복이다. 개별기업들은 경쟁자를 물리치면서 수익성이 회복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개별기업들은 규제장벽에서 탈출하기만 하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경쟁의 미시적 전략은 정책입안자들이 탈규제, 민영화, 세계규모의 자유시장이라는 거시적 전략을 제안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경쟁은 심장을 약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패배의 위험이 높을 뿐만 아니라, 승리를 위한 부담도 크다. 승리를 위한 노력은 회사들을 합병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값비싼 것이지만, 본질적 시장을 다른 회사들이 장악하는 것을 가로막는데 필수적이다. 그러한 경쟁에서 초래되는 부채에 대한 지불은 극단적인 수단들을 취하는 것을 동반한다. 이는 수익성이 덜한 자산을 처분하고 노동력을 절감하는 다운사이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은행들과 다른 금융기관들은 중심적 역할을 차지한다. 자본으로 하여금, 격렬한 경쟁에 의해 요구되는 재조직화에 투자하게 만드는 갈망이 존재한다. 게다가 비용절감에서 기인하는 다운사이징과 더 낮은 평균 임금은, 하층 계급 소비자들의 생계를 은행에서 신용대부로 뒷받침해야 하는 필연성을 드러낸다. 투자자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더 높은 이윤에 대한 희망 속에 투기를 진행하며, 은행들은 그러한 투기적 노력들을 기금으로 모으도록 요구받는다. 간단히 말해 다윈주의적 경쟁은, 생산적 투자들로부터 돈을 버는 것 대신에 금융적 부문에서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의 우위성으로 나아간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조는 주변화된다. 생산성 증가는 혁신 기술이 아니라 노동력 절감을 통해 얻어진다. 또한 노동자의 협력을 얻고 총괄적 품질 관리(TQM)를 통해 노동자들의 동기를 개선시키려는 노력들이 진행된다. TQM의 핵심은 상품 및 서비스의 생산에서 직면하는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토론이다. 이에 따른 새로운 노동자 상은 아무 생각 없이 기계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탁자 위에 허리를 구부리고 챠트와 도표를 연구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자신의 재능이 더 완전하게 발휘되고 있다고 느끼면서, 노동자들은 TQM으로의 상승 경향을 보고 있다. 하지만 생산에서 이러한 협력의 한계는 수익성에 기반을 둔 경영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자들의 필요가 이러한 한계들에 맞서서 상승될 때, 협력과 동기화에 대한 희망은 사라진다.

이러한 세계 경제는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노동을 공격하는 것과 노동으로부터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 사이의 모순이 존재한다. 경쟁력을 더 향상시켜야 하는 것과 점점 더 많은 부채로 투기하는 것 사이의 모순이 존재한다. 그리고 저임금 및 고실업과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수익을 충분히 올릴 수 있을 만큼 상품 판매 사이의 모순이 존재한다. 케인즈주의 경제의 제도화는, 조절되지 않는 시장이 이러한 모순들에 따른 해결 불가능한 결과들을 가진다는 관념에 기초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응으로서 케인즈주의로 돌아갈 수 없다. 케인주의적 정책과 제도들은 세계적 경쟁이 상대적으로 약했고 민족적 경제들이 적절하게 하나의 단위로 추상될 수 있는 동안에 작동했다. 오늘날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보다 합당한 추상은 세계 경제이다.
이러한 모순들에 대한 통찰로 얻어지는 결론은, 따라서 세계 경제를 위한 케인즈주의가 없다면, 우리는 신자유주의 하의 폭풍우 몰아치는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는 운명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전체 민족 경제에 대한 어떤 전망도, 세계 시장에 대한 효과적인 교역의 불가능성에 직면하여 실패를 경험한다.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 수출주도형 모델을 취한다면, 그것은 세계 시장에서 요구되는 것을 수익성 있는 가격으로 생산하는 데 필요한 기술에 투자를 해야하며, 여기에 대한 지불에 소요되는 부채를 그러한 발전지향에 부과한다.

부채 제공은 의료보험, 연금, 고용, 임금 등에 대한 공격과 관련되어 있다고 세계 은행(World Bank)은 그들에게 말한다. 미국에서 저축 및 대출의 위기는 재무성(Treasury)으로부터의 2억 5천만 달러를 끌어들임을 통해 대처되었다. 이제는 금융 공동체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지만, 카드를 사용하는 가계들이 의존하고 있는 은행들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붕괴를 막기 위해, 세계 은행이 제3세계에서 요구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더 많은 긴축이 미국에서도 존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공적 삶을 뒷받침하는 더 높은 수준의 합의에 대한 재협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느끼고 있다. 한편으로,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는 것에 따른 분노가 증폭되고 있다는 데에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가 안정성과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에 이 비관적이라는 데에 있다. 더 높은 수준의 합의는 협조주의의 그것이 아닐 것이다. 협조주의의 합의는 노동계급의 실용주의자들이 공적 삶에 진입하기 위해 그들의 협약을 만드는 수준이다. 더 높은 수준의 합의는 노동계급이 더 이상 공적 삶에 주변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노동계급이 그들 자신의 전망으로부터 쟁점들을 구성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다면적인 계급과 통일성의 거부

노동계급은 게이와 비게이, 유색인과 백인,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유사한 능력을 가진 사람, 남성과 여성, 숙련과 비숙련, 종교인과 비종교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계급 정치에 대한 도전임과 동시에 즉각적인 잇점이 된다.
이러한 다면성은, 그것이 공적 삶의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한, 하나의 잇점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는가? 일반적 관심의 주요한 쟁점들이 공적인 삶에서 토론된다. 노동계급이 다면적이라는 사실로 인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그들 내에서 토론될 것인데, 이는 공적 삶 속에서 더 광범위한 참여자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토론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인종주의, 불관용, 환경오염, 가정 폭력, 교육 등과 같이 노동 계급 부문들 내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노동계급 가족들, 공동체들, 클럽들, 노조들에서 토론된다.

명백히 계급 내부에서 발생하는 이슈들은, 단지 노동자로서 노동자들이 가지는 이슈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관심을 가지는 노동계급과 유사한 문제들 -- 그것들이 노동계급적 배열이건 아니건, [노동계급의 처지에서 노동계급의 언어와 관점으로 이해되는 것이건 아니건 -- 이 토론되는 공적 영역 사이의 전후방을 연결하는 다소 넓은 범위를 갖는다. 노동계급적 이해들을 노동자주의자들이 행하는 방식으로 제한하는 것은, 따라서 공적 삶으로부터 고립된 채 머무는 전략이다.

한편, 계급의 다면성은 도전이 되는데 나는 그것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한다. 다면적 하위 집단들을 그 내에 보유하고 있다면, 계급의 통일성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통일성이 없다면, 굳건한 계급적 입장을 공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목적이 없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다면화된 계급이라는 현실에 직면하여, 통일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부적합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으로, 이러한 반응은 하위 집단들을 분절화시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집단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추상적 개념화 속에서 통일성을 추구하기 위해, 역으로 계급에 근거한 통일성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반응은 그들이 그들의 자율성을 상실하는 방식으로 하위 집단들을 통일시킨다. 이러한 두 갈래 길 사이에, 하위 집단들을 위한 자율성을 상실하지 않고 통일성을 확보하는 길이 있다.

분절화를 강조하는 첫번째 반응은 계급이 매우 취약한 설명원리이며, 최근에 더욱 취약해져 왔다는 관점에 근거를 둔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경우 노동계급과 겹쳐지는 비계급적 집단들이 노동계급 그 자체보다 더욱 중요해진다. 일단 계급이 다면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이러한 관점은 공적인 영역에서 계급을 유의미한 목소리로 만드는 전반적 기획을 포기한다. 노동계급 내 각각의 하위 집단들은 그 자체로 다른 계급들 내 평행한 하위집단들의 구성원들과 함께, 그들의 요구들을 정식화할 자유를 부여받는다. 그렇게 정식화된 요구들의 경우, 협소한 의미의 노동에 초점을 맞추는 노조같은 집단에 의해 정식화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계급적 내용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분절화를 강조하는 반응은 성공적인 충격 전술이 되어왔다. 그것은 노동계급 정치를 원하는 사람들이 계급 내부의 다양한 하위 집단들의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강제해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오랫동안 그들이 단순히 노동계급 운동 내부의 집단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도록 만들어왔다. 그들이 경험하는 특수한 억압은 가장 먼저 인지되어야만 했다. 서부 인디언 혁명가, C.L.R. 제임스(James)는 1945년에 미국 좌파들이 이를 인식할 수 있도록 웅변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알려냈다. 그러나 충격 전술과 장기적인 전략은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의 장기적 전략으로서, 분절화를 강조하는 반응은 다양한 종류의 억압에서 계급적 맥락의 중요성을 무시한다. 나는 여기서 단어들을 신중하게 선택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관점이 어떻게 계급 착취가 억압을 창조하거나 생산하거나, 혹은 결정하는지에 무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단지 계급적 맥락이 억압에 있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약한 주장은 기껏해야 다음의 사실, 즉 주위 환경들이 억압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계급적 맥락에 의존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하나의 맥락은 어떤 설명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의 명시적인 준거가 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의 설명적 담론의 지평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전히 관련된 원인들을 그것의 결과에 연결시켜 나가는 서사의 가지성(intelligibility)을 위해 필요하다. 대체로, 널리 퍼져 있는 분석적 사유 양식의 우세함 때문에 맥락은 무시되고, 또 일단 그것이 무시되면, 계급이 억압에서의 다양한 변화양상들을 뒷받침한다는 나의 주장은 결정론적이거나 혹은 환원론적인 인과적 주장으로 해석된다.

그러한 잘못된 해석을 피하기 위해, 하나의 인과적 요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맥락적 요인으로서 다음과 같은 계급의 이용을 고려해보자.
클린턴에 의해 주도된 복지 체계의 개혁은 편모에 대한 연금 지급을 2년으로 제한하는 제안을 담고 있다. 그 제안은 이러한 여성들의 다수가 어떻게 만족스러운 혹은 수입이 좋은 일자리를 훌륭한 양육과 함께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여성들의 다수는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지만, 그들은 어머니로서 아이의 양육과 임금 노동 사이에 대립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분노하게 될 것이다. 클린턴의 제안은 그러한 양육을 평가절하하며, 동시에 임금 노동을 그 자체로 보상의 성격을 갖는 것(redemptive)으로 간주한다.

임금 노동은 보상적인 것으로 기대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구호품에 대한 그 여성들의 의존을 끝내고 그들을 노동시장에 통합시키기 때문이다. 자녀 양육이라는 관점에서 그들 생활을 보장하는 것은, 그들을 임금 노동 속으로 강제하는 것보다 덜 중요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 경우 임금 노동은 보상적 성격을 띠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클린턴의 제안은 여성이 그들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을 임금 노동과의 관계에서 평가절하하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임금 노동은 남성의 역할로서 그것의 관련성(association)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한 제안은 여성을 되찾기보다는, '여성들이 하는 일'을 '남성들이 하는 일'에 비해 평가절하하며, 이러한 평가절하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 억압의 또다른 양상이다.

또한 노동계급적 맥락에서 볼 때, 클린턴의 제안은 억압적 효과를 가진다. 만약 편모들에 대한 보조가 독립적으로 부유한 여성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라면, 그것의 철회는 노동에 대한 보살핌의 가치절하와 같은 일을 발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부유한 독립적 여성들에게 일을 하도록 강제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노동의 보상적 가치에 대한 호소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었을 것이다. 클린턴의 제안과 여성의 억압 사이의 연계는 따라서 노동계급적 맥락이 있다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이러한 곳, 즉 복지로부터 분리되어 대중들이 생존하기 위하여 자신의 노동을 팔아야만 하는 곳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노동계급적 맥락 속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결과의 억압적 본성은 노동계급 여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경우 어떤 여성의 자녀 양육이건, '남성들이 하는 일'에 비해 평가절하된 것이다.


통일성과 순수한 계급적 이해

분절화를 강조하는 반응이 계급적 맥락의 중요성 때문에 작동하지 못한다면, 자율성 없는 통일성을 강조하는 반응은 무엇인가? 이처럼 통일성을 강조하는 반응에서는 노동계급의 요구 그 자체가 강조된다. 이에 따르면, 주요한 노동계급의 조직들은 이러한 요구에 기초해야만 한다. 이 요구들은 흑인과 백인, 여성과 남성, 숙련과 비숙련의 요구가 아니다. 그것들은 노동자로서의 노동자들의 요구이다. 노동계급 조직들 -- 노조들이나 노동자 정당들 -- 은 이러한 요구들을 받아 안아야만 할 것이며, 다른 조직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순수한' 노동계급 조직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만약 피억압 집단의 요구나 생태주의자들의 일반 요구들을 받아안는 노동자 조직들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조직들은 '자율성을 강조하는 반응' 없이 통일성을 강조하는, 순수한 노동계급 조직들의 지도력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예컨대, 여성 노조회의(Congress of Labor Union Women)가 AFL-CIO의 지도부로부터 명령을 받을 때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만약 그러한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들 조직들은 관련된 이해들을 가진 채 비계급적 조직들의 일부가 되어야만 한다.

이와 관련된 중심적 어려움은 그러한 쟁점들이 서로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임금이 노동계급에게 공통적인 문제라는데 동의할 수 있지만, 순수하게 이론적인 차원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방식으로 임금을 취급하지 않는다. 성적으로 구분된 집단들 사이에서는 임금을 불균등하게 다루거나, 전쟁시에 임금을 동결한다거나, 회사의 합병으로 인한 부채를 갚기 위해 임금을 삭감하거나 한다. 공통적이라기보다는 공통적이지 않은 요인들이 특정한 노동자들의 투쟁의 초점이라는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노동계급의 핵심적인 쟁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과의 관계가 항상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억압과 관련된 대다수 쟁점들과 주위 환경은 그러한 핵심적인 쟁점들에 강한 영향을 끼친다. AFDC를 수급하는 어머니에게 복지급여를 지급하지 않는 것도 예외는 아니다. 이 여성들을 저임금 일자리로 몰아넣는 것은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들 사이에서 경쟁을 증가시키고, 실업의 위협이 편모이거나 잠재적으로 편모인 어머니들 사이에서 작업장 규율을 확보하는데 더 효과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나는 노동계급에 속한 대중들 --그런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노동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에게 영향을 미치는 쟁점들이 노동계급의 쟁점이 된다는 점을 제안하려 한다. 나는 이 쟁점들을, 연대가 요구된다는 식으로 간단히 언급되는, 노동계급의 주요한 하위 집단들을 특징짓는 것으로 제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업장과 노동시장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규정되는 쟁점들이, 주변환경들을 너무 협소하게 만들어서 노동계급의 효과적 정치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최소한의 진실을 담고 있다. 노동계급이 직면한 문제는 그에 관련된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정치가 노동계급의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들 문제를 외면한다면, 노동계급 내부에서의 지원을 감소시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치는 보편성을 향한 하나의 계기인데,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노동계급을 형성하는 '다채로운 신병들의 군단'이라고 부른 모든 쟁점들을 받아안는 것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동계급에 내적인 보편성이지만, 동시에 그에 기반해서 공적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은 노동계급에 대해 외적인 보편성이다.
이런 방식으로 노동계급적 쟁점을 규정하는 데 대해 저항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완고함에 연유해왔다. 보수가 좋은 산업에 종사하는 백인 남성은, 계급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계급적 쟁점으로 만드는 것을 통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 -- 물론 그들 자신들에게 --을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들은 계급적인 쟁점이 그들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쟁점이기를 원하며, 그때 이러한 쟁점들은 '순수한' 계급적 쟁점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쟁점들은 대체로 계급 내에서 당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마치 중립적인 것처럼 취급된다. 소위 순수한 계급적 쟁점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선택되는 정도만큼, 그것들은 편견적 기반 위에서 선택되었다.

또한 개념적 실수에서 기인하는, 보편성에 대한 저항도 존재한다. 한편으로, 어떻게 노동계급의 경계를 정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존재한다-- 누가 [노동계급의] 구성원인가?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어떻게 노동계급 정치의 이슈들의 경계를 정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존재한다 --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실수는 두번째 질문에 대한 결정을 위해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사용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구성원 문제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만약 사적 부조(자선이나 부채)나 국가로부터의 복지, 혹은 노동자로부터 결혼을 통한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당신이 살기 위해 노동 시장에 나가야만 한다면, 당신은 노동계급이다. 따라서 자본가들, 쁘띠 부르조아, 그리고 노동시장을 통해 그로부터 떨어져 나오더라도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벌어온,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의 관리층은 모두 노동 계급 외부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표면적 구성원 자격을 갖춘 구성원들을 위해 싸웠다고 말함으로써 정치 문제에 대답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왜 이러한 것은 올바른 대답이 아닌가? 그러한 대답은 수학자 협회나 의학 연맹 등과 같은 조직에 적용되는 것이다.

노동계급 정치의 목적은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새로운 것이건 이것과는 다르다. 연대는 탁월한 목적이다. 협조주의자들은 이러한 목적을 노동 계급의 전통적 투사들보다 더 취약한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여전히, 연대의 이념이 호소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단지 노동자로서의 노동자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노동자들인 인민 대중(people)간의 유대의 제안들이 존재한다. 연대는 단순히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몫을 증진시키고 좋은 복지 패키지를 얻을 때까지 버티고 있는 것을 뛰어넘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디저트를 얻을 때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대체로, 평등한 시장적 교환의 이념 속에 사실상 각인되어 있는 분배 정의라는 지향에 의해 단순하게 동기화된다. 그렇지만 연대는 주고받기식의 단순한 시장 평등을 넘어 그것에 정서적 요소들을 덧붙인다. 그것은 한 집단 내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 혹은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는다는 욕망이 있을 때 존재한다.

따라서 노동 계급 내에서의 연대는 내가 옹호하고 있는 내적 보편성을 함의한다. 노동계급의 구성원인 모든 이에게 그 혹은 그녀가 필요한 것을 원한다는 것은, 노동 계급 내의 상이한 부문들의, 필요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내포한다. 노동 계급은 단순한 직업적 결사가 결코 아니다. 그 정치는 주어진 규율 내에서의 단순한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를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연대는 또한 단순한 도구적 방식으로 이해될 수 없다. 우리는 순수한 계급적 이해를 실현하려는 충동을 뒤로 감춘 채, 우리 동료 계급성원들을 도구적으로 획득하기 위해, 그들에 대한 억압에 관심을 표현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동계급 정치의 낭만적 맥락이 피할 수 없이 제기된다. 나는 '낭만적'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 자체를 숨막히는 시장, 최저 수준의 삶 및 최신 기술에 대한 갈망 등에 대한 반대 속에서 규정하기 때문이다. 미셸 뢰비(Michael Lowy)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처럼, 이러한 낭만적 요소는 계급정치에 대한 어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심지어 그것이 초-근대(transmodernity)의 어떤 형태들을 향한 근대성과의 단절을 의미할 때 조차도.
이러한 요소는 공동체주의적인 것으로, 시장의 분절화와 자본주의 하에서 삶의 취약성에 대한 반경향이다. 그들의 구성원들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것을 갈망하는, 공동체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

연대라는 말이 여전히 인격들의 유대를 불러일으키고, 단순히 평등한 시장 교환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의 사회 세력으로 다시 한번 형성될 수 있는 전통 속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만약 연대가 목적이라면 새로운 계급정치는 노동자로서 노동자의 이해관심을 넘어서 나아가야 하며, 최소한 다면화된 노동 계급대중의 모든 집단들의 이해관심에 동등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단순히 노동자로서의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들인 (인민) 대중들 사이에서의 유대로서 연대는 노동자들의 취약성에 대한 그들 자신의 뿌리 깊은 대응 방식이다. 이러한 취약성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심화되어 왔으며, 노동계급 내의 다양한 이해들 사이의 연대를 추구하는 정치를 더욱 더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새로운 정치의 전술들

마지막으로 나는 조직화와 공적인 의제를 획득하는 것에 대해 몇가지 제안할 것이다.
만약 노동 계급 조직들에 의해 순수한 계급적 이해들이 추구된다면, 노동계급 내의 인민 대중들의 다른 이해들에 기반한 자율적 조직들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의 논의들은 조직들의 더 많은 다양성에 대한 필요를 지적해준다. 만약 소위 순수한 노동계급적 이해들을 추구하는 조직들이 존재한다면, 노동계급의 다른 이해들을 위한 조직들은 존재하지 않는가? 사실상 조직들의 다양성을 가지는 한 가지 강한 이유는, 인종주의, 호모혐오증 등으로 인해, 더 넓은 이해들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 노동 계급 그 자체 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대에 대한 지향은, 다양한 하위 집단들이 자신들에게 적합해 보이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조직화할 수 있는 많은 여지를 남겨둔다. 오직 자율적 집단들간의 형제-자매 관계를 요구하는 것에 의해서만 연대는 자율성을 제한할 수 있다. 여기서 자율성은, 형제-자매적 활동방식에 대한 이러한 비공식적 규정을 넘어, 노동계급의 어떤 일반적 관례(convention)나 어떤 일반적 집행위원회에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 집단들에 존재한다.
이는 쉬운 부분이다. 우리는 여전히 독립적으로 조직화하는 하위 집단들이 다른 계급들의 구성원들과 함께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혹은 그들 없이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또한 노동계급 정당들이 무수하게 복잡한 이해를 가진 노동계급 대신, 그러한 노동자들을 대표해야만 하는가라는 문제 또한 존재한다.
인종, 성, 그리고 생태적 쟁점들 주변에 있는 노동자들의 독립적 조직들은, 적어도 오늘날 미국 노동계급 내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것보다 진전된, 계급에 대한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확실히 이러한 쟁점들을 다루는 현존 다계급 조직들 속에 많은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직들은 계급적 맥락과 분리된 채, 쟁점들을 정식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그들이 쟁점들의 뿌리를 파악하고 그들의 대안들 속에서 계급적 요소들을 파악하는데 있어 하나의 장벽이 된다.

게다가, 심지어 노조-- 순수한 계급 조직의 패러다임 --도 경제적 환경에서 보면, 노동계급 외부에 위치한 사람들(위에서 이해되었듯이)에 의해, 그리고 계급적 맥락에서 노동계급에게 가장 중요한 쟁점들을 고려하지 못하는 정치적 전망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인도된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그러한 노조로부터 나와서, 노동자 자신들에 의해 통제되는 조직들을 구성해야만 하는가? 그들이 그것을 할 준비가 되었을 때는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사유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이러한 계급적 지향은 현재 전세계 대다수 지역에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한 이야기가 전국여성조직(NOW)과 같은 조직들에 대해서도 말해져야 한다. NOW 내의 노동대중은 여성과 관련된 쟁점들에 대한 정식화 및 전략 수립에 있어, 계급을 무시하지 않는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거대한 노동 여성들의 조직을 형성하기 위해 NOW와 같은 조직들이 포기되어야 할 때는 아닌 것이다. 시간이 무르익었을 때, 구성될 필요가 있는 것은 단순히 노동 여성들의 조직이 아니라 자율적인 노동 여성들의 조직이다. 이러한 조직은 다른 계급 조직들과 연대를 가지지만, 그들에 의해서 통제되지는 않는다. 노동하는 여성들의 조직으로서 그들 존재의 이점은, 그것이 여성들의 쟁점들을, 착취가 여성들이 직면하는 문제들 속에서 함축되는 방식을 무시하지 않고 다룰 수 있도록 해준다는데 있다.

새로운 정치에 적합한다면 조직화 모델은 따라서 개방적인 것이다. 노동계급의 무수하게 복잡한 이해들을 인지함으로써, 이 새로운 정치는 그들 주변에 자율적 조직을 허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조직이 노동계급으로 구성원을 제한해야만 한다고 명령할 수 없다. 그것은 다계급적 조직을 허용해야만 하며, 동시에 노동대중이 계급 차원에 대한 민감함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고양시킨다. 이러한 다계급적 조직들에서, 사람들은 우리의 수학 협회에 현존하는 것과 같은, 협소한 종류의 연대로 빠져들곤 한다. 사람들은 어떤 조직들이 맞서 싸우고 있는 억압에 대해, 그들이 취약한 한도 내에서 그 조직의 구성원들을 지지한다. 이는 노동계급의 전반적 연대와는 꽤나 다른 단일-쟁점 연대이다. 어떤 게이 권리 조직 내에서, 사람들은 게이에 대한 억압을 끝장내기를 원하면서 다른 구성원들과의 연대에 들어선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구성원들 중 어떤 이들이 자본가라면, 동일한 조직의 노동계급 구성원들은 자본가로서의 그들과 연대하는데 어려움을 가질 것이다.
정당들은 우리가 이야기해온 압력집단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의 정당은 하나의 계급적 개념 주변에서 조직되며, 그 속에 가입하거나 그것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은 그 개념의 실현을 증진시키는 데에 복무하고 있다. 미국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판본들 주변에 조직된다. 사회민주당은 계급들에 양다리를 걸치려고 노력하지만, 그들 중 하나-- 노동계급 --를 다른 하나의 소굴로 견인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정당들은 지배하고 있으며, 계급에 대한 그들의 개념화는 그들 자신의 통치 전망을 구축시킨다. NOW, 유색인종권리증진을위한전국협회(NAACP), 시에라 클럽 등은 지배하지는 않으며, 계급적 개념의 주변에 조직되기보다는 여성, 아프리카계 미국인, 환경적 쟁점들 주변에서 조직된다.

이러한 다계급적 조직들 내에서 이들 쟁점에 대해 주어진 논쟁 속에서 계급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미국에서 오늘날 우리는 몇 개의 준정당적(preparty) 노동계급 집단들을 가지고 있다. 이들 각각은 계급의 모든 하위 집단들의 필요들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부족한 경향이 있다. 이는 명백히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기대되어야 한다. 우리는 브라질 노동계급과 다른 상황들 속에 놓여 있다. 브라질 노동계급의 노동자 당은 그 계급의 거대한 세 부문들 -- 도시 노동자들, 게토 거주자들, 그리고 농촌 지역 노동자들 -- 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켜올 수 있었다. 미국에서 노동계급의 모든 부분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러한 관점에서 보편적인 정당 형태로 나아가는 것은, 특수한 형태의 노동계급적 통일성을 향해, 즉 연대를 향해 만들어져야 할 노력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보편화를 지향하는 정당 유형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연대가 확보될 때까지 정당 형성을 연기할 수 없다. 보편화를 지향하는 정당과 연대가 동시에 발전해야 하며, 각각은 보편성이 도달한 쌍방의 최고 단계에 의존할 것이다. 따라서, 보다 특수주의적인 정당 집단의 구성원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제의 일부분으로 연대 구축을 희망하는 비정당 압력집단들과의 제휴를 구축해야 한다.

'노동당 옹호자(Labor Party Advocates)'와 같은 준정당은 노조 활동가들 사이에 그들의 기반을 구축하기를 원한다. 그 시도의 새로움은, 그것이 기층 평조합원에 의해 통제되는 노동자 당을 창조하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이를 제외한다면, 노동당의 개념이 전통적인 유럽 노동당의 그것과 급진적으로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그들의 초점은 노조로 조직된 노동계급의 필요(요구)에 맞추어진다. '노동당 옹호자'는 노조 소속 노동자들로서의 노동자들을 향한 지향이, 하나의 안정적인 정치적 관행으로 발달할 때까지, 자기-의식적으로 성과 인종의 이슈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거부해왔다.

나는 이것이 지금의 상황에서는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노동당 옹호자'의 성원이나 나의 중앙노동위원회(central labor council)에서 그 지지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안정적인 계급적 지향을 가진 어떤 정당이건, 그것에 대한 필요가 존재한다.-- 그것이 노조 조합원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작하건, 아니면 유색 노동대중이나 여성 노동자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작하건간에 --. 심지어 그들의 지향이 모든 노동계급적 쟁점들을 관통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지금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러한 정당 구성체들이 다른 지향들을 가진 압력집단들과 다른 정당 구성체들과 형제-자매적 관계들을 구축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들이 하나의 보편 지향을 가진 노동계급 정당 형태를 포함하는 전망을 기획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처음 출발했던 공적 삶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나는 노동계급 구성원들이 직면하는 주요한 쟁점들 주변에서 단결된 노동계급이, 공적 영역 내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더 좋은 기회를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구성원들이 직면하는 쟁점들의 다수는 비록 다른 방식이라 할지라도, 다른 집단들의 구성원들도 직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신자유주의는, 자율적인 방식으로 공적 영역에 진입하는 노동계급적 추동력을 창조할 것으로 예상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노동계급 삶의 모든 양상에 대한 공격을 개방해왔으며, 노동계급은 공적 영역에서 항의하고, 동맹을 요청하며, 변화를 위한 운동을 시작하는 어떤 자율적인 목소리도 가지지 못한다. 요컨대, 노동계급을 깊이 있게 포괄하는 공적 토론을 위한 기초를 놓기 위해, 공적 영역으로의 진입이 전제하고 있는 합의 기반 자체가 재협상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단결된 노동계급과 재협상의 필요성에 대한 감각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공적 영역에 대한 접근성을 획득하는데 충분 조건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침투를 위한 충격을 취한다. 부사령관 마르코스와 그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1994년 1월 1일 치아파스에서의 봉기와 함께 멕시코의 공적 영역으로 침투할 것을 결정했다. 원주민 (인민) 대중들과 농민들은 공적 영역에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해왔다. (공적) 대화는 그들과의 대화라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대화가 되어왔다. 그러나 2월에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이 마뉴엘 카마쵸 솔리스(Manuel Camacho Sol s) 및 사무엘 루이쯔(Samuel Ruiz) 대주교와 새로운 합의를 구축하는 것을 논의했을 때, 이는 변화되기 시작했다. 치아파스의 원주민들과의 협력 속에서 사파티스타는 산 크리스토발 드 라 카사에서 발전된 계획이 충분하지 않다고 결정했다. 재협상된 합의는 원주민들과 농장 노동자들에게 공적인 곳에서 자율적인 목소리를 보장하는 데 충분한만큼, 민족적 차원의 민주주의를 보증해야만 했다. 따라서 제안된 화합은 6월에 거부되었다.

1934년과 1935년, 샌프란시스코, 미니에폴리스, 토레도, 테라 오뜨에서의 총파업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새로운 합의를 향한 길을 닦았다. 하지만, 이러한 합의는 불행히도 미국에서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오랫동안 지속시킬 만큼 충분히 높은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브라질에서의 파업 물결도 그 곳에서 그러한 과정을 시작했다. 이제 어느 누구든 미국에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추측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충격이 없다면 노동계급은 공적 영역으로부터 배제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공적 영역에서 만약 노동 계급이 미시적 제안을 넘어서 싸움을 벌인다면 신자유주의를 극복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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