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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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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역사』, 윌리엄 맥닐 지음, 김우영 옮김, 이산, 2007

고원 |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

흔히 역사학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역사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투스에게로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사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학의 모습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1825년 랑케가 베를린대학에 최초의 역사학 강좌를 개설하면서 역사학은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랑케 이래로 역사학의 발전 과정이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랑케의 역사 연구는 자료수집에서부터 분석과 종합, 서술에 이르기까지 민족과 국가의 테두리를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역사가의 주관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로지 객관적인 사실만을 기록하는 역사서술을 강조했지만, 실제 그의 저서들은 자신이 기반하고 있는 독일 민족국가의 역사적 정당성을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19세기 유럽의 각 국가들은 랑케의 역사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민족국가 체제를 강화하는 데 랑케의 역사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사회비판적인 좌파 계열의 역사이론가들, 역사철학자들은 대학에서 추방당하고, 대신 그 자리를 랑케의 후예들이 채우게 된다. 의무교육 과정에 역사 과목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학교에 역사 교사들이 배치되고, 표준화된 역사 교과서가 만들어져 학생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학습하며 국가 의식을 고취하게 된다.
랑케의 역사학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국가주의를 강조하던 박정희 정권 시대 각 대학에는 국사학과가 생겨나고,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도 국사를 교양필수과목으로 들어야 했다. 아마도 이 때가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의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역사학이 체제 유지에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한 박정희 정권은 랑케 류의 역사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날 국가주의보다는 이른바 ‘세계화’를 강조하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기존 역사 연구의 행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높이지고 있다. ‘우리’만을 강조하는 고립되고 폐쇄적인 민족/국가 중심의 역사에서 탈피하여 세계라는 보다 큰 틀을 보려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세계사에 관한 책들이 우리 사회에 하나 둘씩 선보이고 있다. 윌리엄 맥닐이 쓴 『세계의 역사』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책이다. 시카고대학 역사학부 명예교수인 맥닐은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전염병의 세계사』, 『전쟁의 세계사』 등의 저서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거시적인 시각을 보여준 바 있다. 『세계의 역사』에서도 맥닐은 거시적인 시각을 통해 기원전 서남아시아에서부터 20세기 후반 소련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역사를 서술하는 기본 단위가 국가가 아닌 문명이라는 점이다. 제1부에서 맥닐은 인류 문명의 발생과 주요 고대 문명들의 성립을 살펴본다. 제2부에서는 그리스에서 아시아, 이슬람, 그리고 아프리카, 아메리카까지 각 지역 별로 문명들이 발전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후 1500까지의 이 시기를 맥닐은 ‘여러 문명 간의 평형 상태’라고 부른다. 평형 상태라는 것은 제3부에서 다루게 될 ‘서양의 우위’를 고려한 표현일 것이다. 유럽은 대항해시대의 개막과 함께 스스로 자기 변용의 과정을 거치고 다른 지역들을 식민지화하면서 여러 문명들 간의 경쟁에서 우위에 나서게 된다. 마지막 제4부는 ‘전지구적 코스모폴리터니즘의 출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산업혁명 이후 오늘날까지 세계가 하나로 묶이게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16세기를 기준으로 책의 1, 2부와 3, 4부가 나뉘는 점도 흥미롭다. 보통 유럽의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18세기 영국의 산업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맥닐은 16세기 대항해시대를 기준으로 유럽의 중세시대가 끝나고 근대로 진입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18세기와 16세기, 어느 것을 기준으로 보느냐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18세기는 국가적 단위에서 역사를 보는 이들에게 중요한 시기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에서는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근대적 국민국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반면, 16세기는 유럽 문명이 이제까지 자신들을 가두었던 대서양이라는 지리적 경계를 벗어나 다른 지역의 문명들과 만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입장에서도 18세기는 별다른 큰 의미를 가지기 힘들지만, 16세기는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에 유럽인들이 침범해 들어와 오랜 시간 유지되어 온 전통적인 문명을 변용시키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서구와의 접촉이 거의 없었던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유럽인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시기가 바로 16세기 후반이며, 이후 17세기에 접어들면 벨테브레, 하멜 등을 통해 조선이라는 낯선 나라가 유럽에 소개된다. 결국 16세기를 중요하게 부각시킨다는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기본 관점을 국가가 아닌 문명에 두고 있다는 의미이며, 서구의 입장이 아닌 세계사적 시각을 강조한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 책이 거시적인 시각에서 세계사의 큰 흐름만을 단순하게 훑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역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아메리카 등 세계 여러 각 지역의 역사적인 모습을 촘촘하게 살펴보고 있다. 책 앞부분에 실린 사진 자료들과 본문 중간 중간에 나오는 각 시기 별 지도들은 해당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관련 분야의 지식을 넓히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책 후반부에는 방대한 참고문헌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 책들은 따로 표시를 해준 점은 번역을 담당한 출판사의 세심한 배려라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맥닐이 이 책을 쓰면서 대상으로 삼은 독자층이 교양 수업을 듣는 대학생들이라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딱딱한 역사서가 아니라 쉽게 풀어 쓴 역사책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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