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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9.77호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통해 바라본 남한 정부의 무능과 기만, 그리고 보수 기독교회

박준형 | 회원
1.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한국인이 인질로 잡힌 지 40여 일이 지난 상황에서, 살해당하거나 석방되지 않고 남아있는 19명의 석방을 위한 협상이 급진전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사태가 어떻게 종결되더라도 피랍 사태 40여 일 동안 한국정부가 보였던 입장들, 이번 납치사태가 제기하는 쟁점들에 대해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 7월31일,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되고 나서 곧 청와대, 외교통상부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정부는 여기서 이번 사태에 대한 자신들의 대응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능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정부는 탈레반의 포로교환이라는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피랍 한 달이 되어간 이 당시에야 '공식확인'하는 등 사태가 진행될 때마다 '확인 중'이라는 말로 일관했다. 협상에서 무능을 감추기 위한 수사도 대거 동원한다. 언론에는 협상․타협 가능성을 흘리는 한편, "책임을 묻겠다"는 엄포까지 늘어놓았는데. 남한 정부가 탈레반에 책임을 묻겠다는 말은 정부 당국자 스스로도 진지하게 믿지 못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미국 괴뢰 '정부'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책임전가도 진행되었지만 남한 정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도 시종 일관 돋보인 것은 미국의 책임을 배제해주는 '감동적인' 충성이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물론, 미국도 공식적으로 '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마치 故김선일 씨 납치 때 노무현이 '철군은 없다'고 곧장 대응하면서 살해를 재촉한 것을 반복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여기서 납치 사건은 탈레반은 물론 미국도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납치 사태의 해결에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심지어는 피랍자 가족들까지 미국대사관에 '호소'하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상태에서 해결할 의지가 별로 없는데 그것은 단지 '테러범과 협상없다'는 공허한 원칙 때문이 아니다. -이미 곳곳의 납치 사건에서 각국 정부들의 협상은 일반적인 것이다. 미국도 선례가 있으나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 현재의 갈등, 즉, 탈레반의 잔인성을 부각하는 것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럼 탈레반은 어떨까? 이들 역시, 자신들의 건재함과 주장을 전세계에 위성 TV로 매일 중계하고 있는 마당에 아쉬울 것이 없다. 미국과 탈레반, 양 극단주의자들의 이해가 이렇게 일치하는 사건인데다가, 이들이 사태 해결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마당에 남한 정부의 무능은 구조적으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남한 정부가 이러한 자신의 무능에 대해서 책임지지는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한 발 더 나아가 기만으로 일관해왔다는 점이다. 남한 정부의 무능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충실한 동맹국으로 복무해온데서 비롯된다. 독자적인 정치적 결정은 실종되고 미국의 전쟁전략이 곧 남한 정부의 결정사항이 되는 상황에서 남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남한정부는 가장 미국에 충실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장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여준 무능은 인질협상에서의 무능이라기보다 미국에 대한 무능이라는 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1) 따라서 정부가 기자회견을 통해서 한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능이 노무현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게다가 이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 데 이르면 정부의 태도는 ‘기만'이 된다.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지도 못하고, 그것의 해결을 요구하지도 못하는 전적인 무능. 더구나 자신의 무능을 폭로하는 자리에서조차 미국의 책임을 끝까지 배제하는 태도는 정부의 기만이 매우 ’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 사태의 해결을 위해 미국이 나서야한다는 반전운동의 진단과 주장은 정당했다. 그러한 요구가 이 사태의 원인은 물론 해결되지 않는 원인 또한 미국의 전쟁에 있다는 것과 남한 정부의 '묻지마 한미동맹'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된 당일, 곧장 정부가 한 또 하나의 일은 뉴코아 농성장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이다. 필수공익사업장도 아닌 민간사업장, 국가기간산업도 아닌 사업장에 공권력을 두 번이나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 '신속한 집행'도 더 이례적이다.
남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완전한 무능을 국내에서 '만회'라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자들은 구할 수 없지만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이랜드-뉴코아 악질자본은 구해줄 수 있다는 뜻일까?
정부가 '인질 살해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황당한 공문구라는 것을 아는 대중들은,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공문구'를 날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탈레반에 대해서는 (자신이 불가능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무력사용을 배제하지만,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그것을 ‘당장’ 사용한다. 신중함의 시차조차 없다. 이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전혀 해결할 능력이 없는, 오직 쉽게 사용가능한 폭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남한 정부의 무능을 더욱 부각시킨다.

3.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들이 미국이 벌인 전쟁과, 이에 무조건 동조한 남한 정부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은 사태가 어떻게 정리되더라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것이 바로 정세적 개입이다. 따라서 피랍자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이 문제라는 식(여러가지 판본의 피랍자 책임론)으로,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고 정부의 무능을 실천적으로 비호하는 입장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다소 논쟁적일 수도 있는 하나의 쟁점을 피해갈 수 있을까?
피랍자들에게 어떤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남한 보수 기독교회의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일까라는 점이다. 피랍자들과 보수 기독교회(라는 제도와 사회적 세력)은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피랍자들이 살아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단기선교' 혹은 '봉사'활동이 정당하거나 혹은 부당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그것과 무관하게 그/녀들이 인간으로서, 조건없는 인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탈레반의 납치행태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다.)
피랍자들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낸 샘물교회는 기독교 우익 NGO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기독교 뉴라이트 등과 관계를 가져왔다. 이들의 기독교 뉴라이트 단체는 신지호 등이 주도하는 또 다른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와 통합을 논의하기도 했다. 강남과 신도시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 대형교회들은 적극적으로 뉴라이트 운동을 통해 정치화되고 있다. 미국에 대해 비판의식이 전무한 것은 시청 앞 성조기 집회를 주도하는 순복음교회, 금란교회 등과 같은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 주류의 선발대형교회와 다를 바 없다. 다만 보다 중산층의 구미에 맞게 보다 세련된 정치적 포지션을 유지할 뿐이다.
이들 기독교 보수주의 진영, 복음주의이자 근본주의자들인 이들의 행태는 비판적으로 보아야한다. 이들이 공격적인 '해외선교'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국내에서의 선교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측면도 작용한다. 그럼 이들이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곳에서 하는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에서 '선교'하면서 반공발전주의에 기반한 이들 기독교 교회를 '부흥'시킨 것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수행하는 ‘테러와의 전쟁’의 유기적인 일부, CNN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전쟁의 일부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오히려 보수주의 기독교가 수행하는 '해외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은 제기될 필요가 있으며 피랍자들은 그것과 무관하게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점을 요구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비판이 없는 상황에서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기독교 교회들은 '피해자 책임론은 안 된다'는 여론, 혹은 더 정확히는 '피랍 피해당사자' 뒤에 숨어서 자신들도 '피해자'인 척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보수 기독교 교회는 오히려 23명을 사지로 내몬 가해자의 유기적 일부다. 이들은 지금도 일말의 회개와 반성이 없다. <한기총>에서 어떤 진지한 반성적인 입장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대중들의 이들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숨김없이 표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납치피해자=보수 기독교 교회’로 더욱 강하게 등치되고 있다. 극단적인 네티즌들은 '반-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할 만큼 극단적인 (상징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고, 그 폭력은 성격에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주류 기독교 교회들과 그렇지 않은 기독교 교회를 구별할 수 있는 비판, 책임묻기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중 하나이다.
이미 그러한 은폐구도, 등치구조가 공고해진 지금 시점에서 다른 비판이 실제로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늦어서 이제는 그것을 대중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실천적으로는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문제제기라고 해도,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에서 그것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선교는 이번 사태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들에 대해서도 그 순진함을 의심해볼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다함께>는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과 억압"이라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모두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관용적인 이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에도 역시 그런 것일까? 그러나 그 제국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그런 극단의 이데올로기들이라는 점을 인식해야한다. 제국주의 지배 세계체제의 유기적 일부인 종교적 근본주의에게만 면죄부를 주는 방식은 이해하기 힘들다. 모든 지배체제와 같이 제국주의 역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비판이 필요한 이유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행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남한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는 어떤 반성도 없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테러와의 전쟁’에 계속 복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비극을 또 다른 방식으로 예고할 수밖에 없다.

※ 이 글이 최종적으로 작성된 시점은 아프가니스탄 인질이 석방되기 전인 8월 25일 경이다.

1)탈리브(Ṭālib)는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이슬람 전통학교) 학생들을 가리키는 단어로써, 그 복수형 단어가 '탈리반'(혹은 탈레반)이다. 서방 언론에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탈레반’이 이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에 ‘탈레반’이란 명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탈리반’ 대신 ‘탈레반’으로 표기했다.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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