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9.77호

기적을 만들어 온 우리는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 윤송단 이랜드 일반노조 여성국장 인터뷰

정지영 | 편집국장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써 세 달을 향해가고 있다. 소위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라는 것이 어떻게 비정규직의 목줄을 죄는지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이대로 쫓겨날 수는 없다고 시작한 투쟁이었다.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의 투쟁은 많은 이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그만큼 많은 이들이 연대하고 있다. 그러나 집회나 매장 타격·봉쇄 투쟁에서 들을 수 있는 많은 이들의 발언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아주머니들의 투쟁임을 강조하며 눈물로 지지를 호소하는가 하면, 비정규직법안의 기만과 폐해를 폭로하고 막아내기 위한 상징적인 투쟁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가정에서 엄마와 아내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하루 빨리 투쟁을 승리하고 가정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호소가 나오는가 하면, 여성노동권 쟁취 투쟁이 비정규직 철폐 투쟁에 핵심이고 나아가 비정규직 철폐 투쟁의 출발임을 인식할 수 있는 중요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랜드-뉴코아 투쟁은 비정규직이 다수지만 정규직-비정규직을 분할·통제하여 이들의 갈등을 정규직의 양보와 비정규직의 분리 고착화로 해결하려는 자본의 시도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공동 투쟁으로 맞선 이례적인 싸움이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저임금, 비정규직에 시달려야 하는 이 땅 대다수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투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싸움이다. 그만큼 많은 쟁점을 보여주고, 그만큼 이 투쟁을 해석하고 지지를 호소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인터뷰에서 보았듯이,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은 이 싸움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이렇게 많은 해석과 평가를 낳을 줄은 몰랐다. 그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동료에게 닥쳐오는 부당한 해고에 맞서 정당한 싸움을 시작했다. 투쟁이 진행되면서, 그 투쟁의 경험은 이들의 인식과 마음가짐에 갈등과 변화를 낳았고, 또 그 변화를 발판으로 투쟁을 지속시키고 있다.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의 변화를 인식하고, 또 그 속에서 계속 갈등하는 지점들을 함께 들어보는 것은 이 투쟁이 진정한 승리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좀 더 끈질기게 붙잡고 가야할 지점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소중한 자리가 될 것이다. 이랜드 일반노조 여성국장으로 투쟁하고 있는 윤송단 동지와의 인터뷰는 우리에게 그 소중한 고민의 발판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8월 20일 오전에 인천에서 회의를 마치고 급히 민주노총에 도착해 쟁위대책위원회 회의에 참가한 후 평촌 NC 백화점 매장 봉쇄투쟁으로 향하는 윤송단 동지와 동행하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매일 쉼 없이 진행되는 투쟁 일정 속에서도 짬을 내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신 윤송단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일시 8월 20일
장소 민주노총 3층 전교조 회의실 & 평촌 NC 백화점 앞
인터뷰 & 사진 정지영 편집국장·신진선 편집부장
정리 정지영 편집국장


윤송단
사회운동 우선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소개해주시겠어요?

우선 저는 41살이고요, 남편이 하나 있고, 딸도 하나 있고, 시부모님과도 함께 살고 있어요. 저는 원래 노동조합 활동이나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그냥 평범하게 살았어요. 환경 쪽에는 관심이 조금 있어서 환경에 관한 책을 보기도 하고. 저는 환경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생활 속에서 환경에 관한 실천을 해야 된다 싶어서, 세제 대신에 소다로 행주를 소독하거나 걸레를 빨거나 하는 실천을 했죠. 지금은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데, 원래는 환경운동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사회운동 이랜드에 입사하시게 된 계기는요?

시부모님하고 같이 살고 있는데, 아이도 어느 정도 크고, 시어머니께서도 제가 아직 젊고 놀기 아깝다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제 개인적으로도 보고 싶은 영화나 책도 있는데 생활비에서 여자가 자기 용돈을 쓴다는 게 쉽지 않기도 했고. 원래 처음부터 제 취미 때문에 일을 한 건 아니고, 가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 맞벌이를 나갔는데, 벌다보니까 나한테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여자들도 자신만의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일이 자기 취미와 맞지 않고 단지 직업으로 하는 거라도, 일을 해야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도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어요. 평생을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내라는 이름으로만 살수는 없잖아요. 여성이 결혼해서 가사나 육아에 묶여버리면, 아주 부지런한 사람 아니고서야 자기가 스스로 원하는 게 뭔지, 자신의 중심이나 가치관조차 흐려져요. 아무리 대학을 나왔어도 집안에만 처박혀 있으면, 기껏 할 수 있는 게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보는 건데, 물론 그런 것을 통해서도 세상을 볼 수는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세상은 밖에 나와서 봐야 해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은 현상만을 보여주는 것이지, 내가 피부로 느끼고 가슴으로 느끼는 세상은 다르다는 거죠. 실제로 세상과 부대끼면서, 그 안에서 내 모습도 찾고, 하고 싶은 거 하려면, 일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 일이 취미이면서 직업이면 더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니까. 어쨌든 여성도 일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직장 생활하면서 많이 느꼈어요. 일을 하다 보니 남편이나 딸 등에서 벗어나 나만의 시간이 있는 거예요. 처음 직장 생활 시작했을 때는 그게 아무리 적은 시간이라도 나만의 시간이 있는 게 행복했어요. 금액에 상관없이. 그런데 점차 직장 생활에 빠져들면서 일이나 성취, 보람, 이런 게 느껴졌죠. 내가 열심히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고, 완성시키고 했을 때 만족감이 생기고, 내가 흘린 땀에 대한 보람도 느끼고,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또 그걸 통해서 주변 사람들과의 유대 관계도 깊어지고, 이런 것들이 너무 행복했어요. 그래서 그 때 한 2년 동안은 일에 취해서 너무 행복하게 살았죠.

사회운동 노동조합 활동은 언제부터 하시게 되셨나요?

이랜드 전에 까르푸였을 때 계약직으로 입사를 했는데, 9개월만에 정규직이 됐어요. 워낙 욕심이 많은 성격이기도 하지만, 까르푸가 프랑스 기업이었는데, 프랑스 기업은 그 때만 해도 외주용역을 마구 확산하지는 않았거든요. 원칙적으로 생산직이든 소분작업이든 계산하는 일까지 직접고용을 하면서 2~3년 후에 소수는 정규직으로 전환이 됐어요. 제가 2000년에 입사했는데, 2002년까지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한국인 점장들이나 경영진들이 인사과에 포진하면서부터는 비정규직이 확산돼서, 원래 정규직이 60% 정도 되고, 비정규직이 30%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 3년 안팎으로 이 숫자가 뒤바뀐 거예요. 정규직이 40% 되고, 비정규직이 60% 정도로 늘어났어요. 숫자가 늘어난다는 것을 평상시에는 못 느꼈다가, 3~4년 후의 집계를 보니까 이게 바뀌었더라구요. 원래 노동조합의 가입조건이나 규약에 계약직이 포함되어 있어서 정규직, 비정규직이 노조에 같이 있었죠. 어쨌든 까르푸에서는 노조에 가입하면 그 자체가 회사에 압박이 돼서,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을 회사에서 함부로 하지 않으려는 태도 정도는 보였고, 그래서 그나마 눈치를 안 보고 다닐 수 있었어요. 이랜드로 바뀌면서는 이 판도도 바뀌었죠. 제가 노조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 주5일제가 실시되면서 오히려 연장근로를 강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 연장근로를 너무 무리하게, 주말 11시간 근무를 강요해서 노조에 가입했어요. 처음에는 지금처럼 이렇게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죠.

사회운동 노동조합 가입하시면서 개인적으로 변화했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은요?

처음에는 그냥 일하는 게 너무 행복했는데 노동조합 가입하면서는 그 차원을 넘어, 사회적 모순을 더 분명하게 알게되었어요. 여성으로서 이 사회, 세상에 뛰어들어서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느꼈죠.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봤는데, 제도나 틀이 선진화 됐다거나 자유, 민주화 같은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직까지도 이 사회가 여성이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사회는 아닌 것 같아요.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누릴 수 있는 제도는 아직 되어 있지 않다는 거죠. 지금 정치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의 주역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반쪽짜리잖아요. 교육이나 제도에 관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그런 부분에서도 민주화를 이루었어야 제대로 된 토대가 되는 것인데, 호헌철폐하고 정권을 바꾸는 것까지만 성공했지, 그 이후에 한 일은 별로 없는 거예요. 사실 서민들의 입장에서 법은 여전히 멀리 있고, 경찰은 우리편이 아니고. 개인이 사회를 상대로 싸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데, 아주 작은 자유, 취미 생활을 누리는 정도의 권리지, 진정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권리를 누리는 것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어차피 제도와 싸우는 것은 조직이 있어야 되고, 조직으로 모여 싸울 때만이 그 틀에 금이라도 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아무리 혼자 던져도 안 되는데 여러 명이 함께 하면 금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가 싸우는 상대가 사회의 제도나 견고한 틀이라고 한다면 조직이 있어야하고, 그것이 모여서 힘이 되어 시정할 것은 시정하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완전히 원하는 만큼 다 갖는 것은 아니라도, 건강한 사회라면 승자독식은 없어야 한다는 거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리고 그게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의 잘못이라도 힘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의를 제기하면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사례가 전혀 없잖아요.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경찰이나 물리력을 동원해서 정리하려는 사회가 사실 선진화됐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이 투쟁을 하면서 제가 깨달은 가장 큰 것이 있다면, 이 사회가 OECD 국가다, 성장을 얼마 했다, 이런 얘기하는데, 겉모습만 번지르르 한 것이지, 내용면에서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쟁의에 저렇게 경찰이 막고 폭력을 유도하는 것, 권력의 힘으로 개인과 집단의 문제 제기를 강제로 진압하려한다는 것 자체가 군사독재랑 똑같은 거예요.

사회운동 특히 여성국장을 하시게 된 이유나 계기가 있으셨어요?

여성국장 한 지는 6개월 됐고, 그 전에는 그냥 지부 사무장이었어요. 원래 간부를 안 하려고 했는데, 하실 분들이 없고, 추천을 받아서 했죠. 여성국장은 위원장이 임명하는 건데, 사실 위원장한테 많이 들이대고 싸웠던 사람이에요. 위원장이 남자라 성에 대한 문제 가지고 많이 싸웠어요. 그랬더니 위원장이 ‘한 번 당해봐라, 네가 그렇게 여성 문제 얘기했으니까 한 번 해봐라.’ 그래서 맡긴 것 같아요. 제가 여성문제로 싸울 때 있었던 일화 하나를 말하자면, 위원장이 육사 출신인데, 무슨 얘기를 하다가 자신을 변호를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남자들이 사회 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가 없었다, 여성에 대해 무지한 건 나도 인정한다, 여성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 못하는 부분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을 그렇게 몰아붙이는 윤송단 국장도 문제가 있다.’ 그래서 그게 왜 문제가 되냐고 했더니, ‘배울 기회도 없었고, 접할 기회도 없어서 몰라서 그러는데, 그걸 모른다고 야단을 치면 되냐, 비난하면 되냐?’고 변호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모른다고 비난한 것이 아니다, 모르면 최소한 알려고 자기가 노력을 하는 게 마땅한 것이지, 모르는 걸 모른다고 그렇게 당당하게 얘길 하느냐, 모르는 게 물론 죄는 될 수 없지만, 모르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는 권리를 주장하려면, 배우려는 노력을 하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게 맞지 않냐, 노력을 안 한 부분을 두고 얘기를 한 것이지 그 자체를 두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랬죠. 이러면서 많이 싸웠어요. 그랬더니 여성국장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노조가 올해 통합되고 임명받자마자 교섭 들어가고, 교섭위원이 돼서 교섭 준비하고, 5월부터 바로 본교섭 들어가고, 사실 제가 5월부터 지금까지 하루 온 종일을 쉰 날이 딱 하루에요. 교섭을 하고 바로 일이 터졌기 때문에. 제가 여성국장을 맡았지만 실제로 여성에 관한 일을 할 시간이 없었어요. 개인적 욕심은 수유실은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 거고, 매장 내에 작게라도 탁아 시설 마련하는 거예요. 아이 있는 엄마들이 아이와 같이 출근해서 거기에 맡기고, 일하다가 점심 같이 먹고, 퇴근할 때 같이 데리고 가는. 쉽게 들어주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걸 목표로, 이룰 수 있도록 제기하고 싶어요. 수유실과 여성 휴게실, 제대로 된 수면실을 만들고 싶죠. 어떤 사람들은 회사에 와서 일이나 하지 잠을 자냐고 하는데, 여성들은 한 달에 한 번 생리를 하는데, 개인이 느끼는 고통의 강도가 일률적으로 똑같지 않고, 그럴 때 배를 대고 눕거나 하면 좀 나아질 수도 있으니까. 여성으로서 남성과 다르게 겪는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원래는 휴게실이 있었는데, 그걸 반으로 줄여서 기도실로 만들었어요. 휴게실이 좁아지니까 기도실에 들어가 쉴까봐 기도실을 잠가요. 박성수가 오면 열거나, 일상적으로 열어놓는 데도 있는데, 그런 데는 기도실에 들어가서 쉬는 사람 보면 나오라고 하거나, 징계한다고 하면서 감시를 하죠.

사회운동 이랜드가 까르푸를 인수했을 때 정규직 고용승계가 된 건가요?

고용승계 됐어요. 지금 정규직, 비정규직 같이 싸우고 있는데, 정규직이 같이 들고 일어난 이유는 비정규직 문제가 비정규직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걸 느낀 거죠. 실제로 이랜드가 신규점포를 내는데, 관리자 빼고 나머지를 다 용역업체를 통해 채용을 하는걸 보며, 이게 앞으로 우리의 문제가 될 거라는 점을 알게 되는 거죠.

사회운동 전에도 이렇게 파업을 하신 적이 있으세요?

사실 전면파업, 점거는 처음이에요. 작년에 하루 이틀씩 하는 파업을 몇 번 하기는 했는데, 이렇게 파업을 해본 적은 없어요. 이런 투쟁 자체가 처음이거든요. 처음 하는 걸 이렇게 두 달씩 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래서 파업을 하면서 학습도 겸하고, 그렇게 파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운동 이번 파업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셨을 것 같은데요.

40년 넘게 살았던 인생 중에 사람으로 살아가는 진한 맛을 이번 파업투쟁과 점거를 통해 처음 느끼는 것 같아요. 이 투쟁하면서 순간 순간 가슴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흐르는데, 서러움 때문은 아니고, 정말 내가 사람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감동으로 흘리는 눈물이에요. 이런 경험이 생전 처음이고, 쉽게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가끔 중독성이라는 생각도 하는데, 예를 들어서 아무리 뜨거운 뙤약볕에 앉아 있어도 못 견디게 뜨겁지는 않아요. 보통 실내에서 근무하시던 분들이나 아무런 의식의 무장이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런 뙤약볕에 6시간 앉아 있으라면 못 앉아 있죠.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는데도, 그 장소에 앉아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건,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데,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상암점에서 22일 점거투쟁을 하면서 그런 느낌을 절실하게 느꼈는데, 사실 저는 노숙이라는 걸 그 때 처음 해봤고, 여행도 많이 다녀보지 않아서 바깥 잠자리가 그렇게 익숙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리고 점거 농성도 준비된 게 아니었어요. 위원장이 비정규법안 시행령이 시행되면 정말 역사적인 해악인데, 그런 것이 시행되는 날을 눈 뜨고 맞을 수 없다 해서 그냥 무작정 들어간 거예요. 처음에는 1박 2일만 하자는 거였죠. 그런데 현장 조합원들이 ‘비정규 보호법 하에서는 우리가 무사할 수 없다. 제대로 회사를 다닐 수도 없고 노예처럼 살아야하고 내 권리도 찾지 못한다.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다.’ 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결의했어요. 사실 투쟁의 단계랄까 그런 것들이 있잖아요. 1인 시위나 선전전이나 집회처럼 중간에 거치는 단계가 있는데, 그런 것 전혀 없이 바로 점거 농성을 들어간 거고, 그렇다보니까 준비된 것이 전혀 없었어요. 그러니까 박스를 깔고 잘 수밖에 없는데, 조합원들이 자기가 가져온 점퍼나 수건 같은 걸 다른 사람 추울까봐 덮어주는 거예요. 또 한 쪽에서는 냉장고 돌아가는 거 시끄러울까봐, 끄면 물건이 상하니까 끄지는 못하고, 온도 낮출 수 없나 고민하고. 사실 그 자리에서 처음 본 얼굴들도 많거든요. 각 점에서 왔기 때문에, 경기도 사람도 있고 서울 사람도 있고, 뭐 서울도 중랑구, 마포구 다 틀리잖아요. 얼굴을 아는 사람은 위원장하고 간부들 소수밖에 없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람이 동지라는 이유만으로 챙기는 모습들이 참 감동이었어요. 그리고 솔선수범하는 모습들. 한번은 제가 밤 11시 엔가 화장실엘 갔는데, 박미경 문화국장이 혼자 화장실 청소를 하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뭐 하세요?” 물었더니, “여자들이 몇 백 명이나 쓰는데, 화장실은 작고, 휴지라도 비워놔야지. 치우시는 분들도 노동자인데, 우리가 투쟁하면서 그러면 안 되지 않겠냐.” 하시면서 화장실의 모든 휴지통을 비우고, 집게로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줍고, 물을 뿌려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그건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하는 거잖아요.
점거파업의 일과가 그렇게 쉬운 건 아닌데, 사실 그건 누가 돈 주고 하라 해도 하기 힘든 일이거든요. 자기 월급 깎여가면서도 하는 거죠. 사실 남편이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직장이 있어서 생활이 당장 크게 어려워지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생계형 가장들도 있거든요. 자식 있고, 부모 모시고 하면 그 달 생계비가 없으면 생활이 어려운데도, 그래도 집에서 자기가 담근 김치 바리바리 싸와서 나눠 먹고, 청소하고. 월드컵 분회 사람들은 점거농성하면서도 거기가 자기 계산대라며 “여기 묶은 때 끼면 안 되잖아.” 그러면서 거길 닦아요. 전통적으로 파업, 점거하면 부수고 때리는 게 많이 떠오르는데, 이건 쓸고 닦고 하는 투쟁이구나 하는 생각도 했죠. 보통 점거파업이라고 하면 어마어마한 수위인데, 조합원들은 그냥 내가 일하던 자리니까 내가 여기 앉아 있으면 이 자리 지키겠구나 하면서 쓸고 닦는 거예요. 그런 거 보면서 진짜 사람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김진숙 지도위원도 슬리퍼를 끌고 김치 국물 흘리며 매장 바닥에 앉아있는 우리가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걸 정말 많이 느꼈어요. 자본주의, 선진화, 이런 것 때문에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지배하는 세상이 됐는데, 여기서 제가 본 것은 사람의 가치고, 사람 본연의 마음이었어요.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애정을 베풀 수 있고, 애정을 표현하고 실천할 수 있는, 그것도 자기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처음 본 조합원인데, 그 사람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보이지 않게 뒤에서 청소하는 사람, 보이지 않게 박스 치우는 사람, 밥 먹고 나면 누가 먹었는지 신경 안 쓰고 설거지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 거죠.

사회운동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도 많이 변하셨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사회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어요. 그냥 골치 아픈 거 신경 쓰기 싫은 거죠. 그냥 책이나 영화 같은 거 좀 보고, 관심 있는 환경에 관한 다큐멘터리 좀 보고. 저는 환경오염 중에서도 수질 오염처럼 가정에서 신경 쓸 수 있는 부분들에 관심이 많이 가더라고요. 그리고 또 관심 있었던 부분은 자연을 파괴하는 거, 갯벌을 밀어버린다든지, 산을 뚫어서 터널을 만든다든지 하는 부분들이요. 사실 요즘 생활 많이 편하잖아요. 내가 보기엔 많이 편해진 것 같은데, 그렇게 몸이 편해지고, 그러다보니까 여유 있는 시간이 생기잖아요. 그런 시간을 가치 있게 쓰기보단 대부분은 향락 문화에 빠지는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인간이라면 몸을 쓰고, 땀도 흘리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예 땀도 안 흘리고 인형처럼 기계처럼 항상 쾌적한 환경에 산다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편하게만 살다보니까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고통에 무신경해지는 것 같아요. 저는 이런 것도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커다란 범죄라고 생각하거든요.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아이가 사는 세상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보다는 사람이 사람냄새 진하게 맡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볼 줄 알고, 그 아픔을 덜어주려고 노력하는 그런 세상이요. 아무리 좋은 집과 차와 이런 것을 물려준다고 해도, 그 아이가 진정으로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못 느낀다고 하면 사람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나친 발전을 위한 발전이 인간성을 말살시킬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어쨌든 우리 세대만 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세대에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물려주고, 그를 통해 정서와 풍요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을 하죠.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이랜드 스피릿이라고 해서 ‘돌파’라는 게 있어요. 이랜드가 강의할 때 그래요. 이 기업은 하나님의 기업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가다가 장애물, 시련이 있으면 그걸 뚫어야 한다, 그것을 돌파해야 한다고 강의를 하는데, 저는 사실 그건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프랑스 어디엔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리가 있는데, 산과 산 사이를 다리로 연결한 거예요. 산을 뚫지 않고 있는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서 다리를 놓은 거죠. 그걸 보면서, 우리나라 기업가들도 자기 나름대로 철학이 있고, 경영원칙이 있고, 논리가 있겠지만, 돌파, 이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가 기업가로서, 사회 지도층으로서 최소한의 양식과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윤추구도 목적이겠지만, 자기가 이윤을 추구하는 대상이 이 사회와 국민이라면 거기에 대해 최소한의 도덕적 책임을 가지고, 이 사회에 대한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죠. 무조건 뚫어, 무조건 파헤쳐, 이건 아니잖아요. 이런 환경적인 측면에도 박성수는 위배되는 사람이죠.

사회운동 이랜드-뉴코아 투쟁을 하면서 박성수 회장의 문제도 많이 제기되고 있는데요.

사실 앞서 말한 환경에 관한 문제도 있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종교에 관한 문제도 있죠. 신앙을 신과 나의 개인적인 문제로 삼아야지, 그걸 집단화하고, 그 속에서 이윤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건 벌써 신앙이 아니라는 거죠. 신앙을 그런 식으로 기업의 경영 원칙으로 적용하는 것, 그로써 종교를 훼손하는 것에서 박성수의 문제가 있고요. 또 하나는 여성에 대한 인식에도 문제가 많아요. 사실 이랜드가 여성 대졸자들이 들어가기 가장 좋은 기업이라고 하는데, 그건 극소수에 한한 것이고, 4~5,000명이 넘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박성수가 말하는 여성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 없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이랜드 홈에버 본사에는 수유실이 있어요. 물론 매장에도 있긴 하죠. 그런데 어떤 매장 수유실 팻말 밑에는 ‘거래처 접견실’이라고 붙어있어요. 저희 사이트에 사진도 있는데, 수유하면서 거래처 접견을 같이 하라는 건지. 거래처 사람들에게 수유하는 모습을 자랑하려는 건지 알 수 가 없네요. 형식적으로 만든 수유실과 휴게실은 그냥 이름뿐인 공간인 거예요. 아무리 현장에서 일하고, 80만원 받는 비정규직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너무하죠. 그 안의 열악한 환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그 발상 자체가 기가 막힌 거 아니에요? 그 발상 자체가 무개념이라는 거죠. 물론 회장 자신이 그런 조치를 한 건 아니지만, 회장이 최소한의 원칙과 양식을 갖고 여성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밑의 현장 책임자가 그따위 발상을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8월 20일 평촌 NC백화점 봉쇄투쟁 중에 발언하는 윤송단 국장.


사회운동 개인적으로 힘든 부분은 없으세요?

우선 남편이 매우 힘들어하죠. 아이는 많이 울고, 왜냐하면 엄마가 싸우기도 하고, 상처도 많고 하니까. 남편은 그냥 앞에 나서지만 말라고 하는데 상황이 그런 상황이 아닌지라, 나설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이번에 방학이어서 다행이었는데, 제 딸은 거의 국토순례를 했어요. 친척들 피서 갈 때마다 딸려 보낸 거죠. 초등학교 3학년인데, 우리 딸이 한 말이 있어요. “무슨 사장이 그 따위야. 그렇게 혼자 다 독차지하고 욕심부릴 거면, 혼자서 거기서 수박도 나르고, 돈도 받고, 청소도 하고, 불도 켜고 혼자 다 하라 그래, 같이 놀아주지 마.” 이러더라구요. 제 가족들은 다른 조합원가족들에 비하면 대놓고 반대하거나 그렇진 않아요. 얼마 전에 가족회의를 했는데. 연세 있는 분들은 잘 이해 안돼서 그런지 지금 투쟁이 남을 위한 봉사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남을 위해 하는 봉사도 좋지만, 내 가족도 챙겨가면서 해야지, 내 몸 다치고 가족 등한시하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조금 절제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시작은 해놓고 중간에 멈출 수는 없다는 입장을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시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이 그렇다면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마련해서 가족들이 소외되지 않게 하라고 하셔서, 그래서 알았다고 했죠. 일단 알았다고 해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남편은 여성이 이런 투쟁하는 것 자체를 안 좋아하는 것 같긴 한데, 같이 살아야 하니까 반대를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는 입장이고, 제가 기질이 강하다고 느껴서 그런지 나서다가 몸 다치는 것만 없었으면 좋겠다, 유치장에 들어가는 것만 안 했으면 좋겠다는 입장이에요. 가족하고 큰 문제는 없어요. 사소한 갈등은 있는데, 그 정도 갈등은 가족 간에 있을 수 있는 거니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에요.
조합원이 현장 복귀할 때도 많이 힘들어요. 그리고 실제로 가장 힘들 때는 내 자신의 결의가 떨어질 때. 나도 사람이니까 쉬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고 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간부든 누구든 의견이 안 맞을 때 내가 사람한테 너무 공격적으로 대하는 것 때문에 힘들어요. 사실 대화로 풀어가야 하는데, 너무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차 있다 보니까, 싸움으로 화해 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런 내 자신을 보면서 힘들죠.

사회운동 투쟁이 길어지다 보니 조합원 분들도 많이 힘드실 것 같아요.

딱 한 가지 현상으로 나타나는 건 아니에요. 여러 부류가 있어요. 경제적으로 그다지 어렵지 않아서 한두 달은 자기가 안 벌어도 괜찮은 사람들이 있고, 자기가 못 벌면 약간 빠듯하게 돌려 써야 하는, 저축해 놓은 걸 헐어야 한다든지 그런 사람들도 있고, 또 하나는 진짜 어려운 사람들이 있어요. 이렇게 여러 부류가 있다 보니까, 자기가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들은 생계비가 가장 큰 문제일 거고, 경제적으로 약간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이런 투쟁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길어지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고생해서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가족들이 자꾸 뭐라고 하면서 흔들리는 사람들도 있고, 또 꼭 맞벌이를 해야 하는데, 투쟁을 그만 둘 수도 없고 그런 갈등도 있죠.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도 있어요. 정규직은 어차피 잘려도 나는 나중에 잘리니까 들어가서 일하다가, 적당히 다니다가 말까 생각하기도 하고, 비정규직들은 어차피 비정규직인데 얼마나 다니겠어, 회사가 그렇게 악랄한데 이거 받아주겠나 생각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죠. 생계비부터 동료들 사이의 소통 문제, 가족과의 갈등 등등.
그리고 노동조합, 노동법, 근기법 이런 거 다 떠나서 일상 교육이 많이 안 되어 있던 사람들이다 보니, 노동운동이 무엇이고, 왜 해야 하는지 노동자로서 사는 게 어떤 것인지, 인간의 역사가 왜 투쟁의 연속이었는지에 대해 성찰할 시간이 부족했어요. 막연히 본능적으로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서 투쟁을 시작했고, 그 속에서 두서없이 공부하게 되는 부분들도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투쟁을 끌어가려다 보니 어려운 점이 있기도 해요.

사회운동 그래도 조합원 분들 보면 늘 힘이 넘치시는 것 같아요.

사실 이 분들이 투사들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엄마들이에요. 그런데 이건 아니라는 거죠. 이 분들 생각에는 보호법 때문에 사람을 자르는 게 어이없고 기막힌 일이고, 그래서 합법적인 쟁의활동으로 투쟁하는 것인데 그걸 경찰이 짓밟는 게 또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거죠. 이런 사회는 우리 자식들이 살만한 세상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거예요. 자식에 대해서 느끼는 본능적인 감정으로 아는 거죠. 20년 전 구로공단에서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을 때도 열일곱, 열여덟 소녀들이 오빠 대학 등록금, 노모의 병원비, 생계비 때문에 자기 학력을 포기하고 공장에 흘러 들어오고 그 속에서 투쟁하는 사진을 보면, 단지 남성들이 인정을 안 해서 그렇지, 한국 사회는 여성의 힘으로 크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남성들의 투쟁은 체계적이고 전투적이지만, 여성들의 투쟁은 전투적인 게 아니고 감성적이고 본능적인 거예요. 사람의 본능이라는 것은 어떤 틀이나 계산으로 재단할 수 없다고 봐요. 본능이 해결되어야만 끝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 싸움이 이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스스로가 논리적으로 설명은 못하지만, 그럴 수 있도록 전혀 교육도 안 되어 있던 1년도 안 된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파업을 하고 점거를 했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위기감과 부당함을 느껴서 싸우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 싸움을 두고 자본가들이 기획회의를 하고 공권력이나 노동부가 어떤 잣대를 들이대서 계산을 해도 답이 안 나올 거예요, 언제쯤 정리가 되고, 조합원 수가 어떻게 변하는지 예측을 못할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어요. 그런 예측을 깨나가는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고, 결국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해요.
현재 한국이 OECD 가입국가고, 발전했다는 수치가 많이 나오는데, 저는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사회 속에서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세상을 향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우리 조합원들, 그것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주먹을 불끈 쥐고, 아니다, 부당하다, 철폐해라,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저 용기들, 순수한 본능들이 이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권력이나 자본가들의 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름 없는 민중들의 투쟁들이 모여서 지금의 시대까지 왔잖아요.
우리를 스머프들의 투쟁이라고 하는데, 저희가 처음 매장에서 사복 투쟁할 때 저 파란 티셔츠를 입었어요. 그걸 보고 제가 우리 사이트에 스머프라고 올렸더니 그게 이제 우리의 이름이 됐어요. 스머프들이 되게 부지런하고 항상 웃잖아요. 아줌마들이 두 달을 월급도 못 받으면서도, 옆의 동료와 작은 것이라도 나누려고 하고 작은 일에도 함께 울고 웃고, 진짜 스머프들을 많이 닮았어요. 피곤하니까 지쳐 보이는 건 있지만 표정이 밝아요. 두 달을 힘든 투쟁을 하면서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조합원들이 아주 순수하고 담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기득권층이 이런 사람들을 과연 이길 수 있는지 두고 볼 거예요.

사회운동 이 투쟁의 성과를 어떻게 보세요?

성과만 있을 수는 없고, 손실도 있겠죠. 의지가 약했거나 사회에 대한 인식이 다르게 다가갔던 사람들 중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조합원들이 현장에 돌아갔을 때 괴리감이 생겨서 고립될 수도 있을 것 같고. 이 투쟁 전까지는 조합원, 비조합원 사이에 구분이나 차이가 거의 없었는데, 지금 파업 중인 조합원들이 돌아갔을 때 강성으로 찍혀서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현장에 먼저 복귀한 조합원들과의 사이에서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조합원 아닌 사람들이 조합원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생길 수 있는 괴리감, 이런 것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조직이 멈추는 거죠. 이런 것이 손실이 될 수 있겠죠. 게다가 나중에 또 투쟁을 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 때 이 분들이 선뜻 나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지금은 생각지도 못하게 여기까지 왔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저런 투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죠. 그래서 지금은 조합원 교육이나 그런 것들을 배치해서 일상적으로 이 사람들의 활동을 탄탄하게 묶어 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해요.
성과는 일단 주부들이 내 가족만 보다가 사회를 볼 수 있었다는 거, 사회 전반에 걸쳐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죠. 단적인 예로 이 분들이 기자들을 되게 싫어하게 됐는데, 전후 맥락 다 떼고 사진 한 장 딱 보여줬을 때 왜곡되거나 하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자본의 힘이나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지만 얼마나 우리를 옥죄고 있는가 하는 것들에 눈을 떴다는 것이 성과가 되겠죠. 그리고 노동조합 하면서 스스로는 못 느낄 수도 있지만, 자신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연대나 동지애와 같은 것들을 알아 왔고, 그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투쟁이 끝난 이후에라도 우리 투쟁의 내용이 더 많이 알려지고, 확산되면 그런 것들이 성과라고 생각해요.

사회운동 마지막으로 이 책을 보는 사회진보연대 회원들이나 『사회운동』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저는 진보라는 단어가 들어간 단체를 참 좋아하는데, 사실 진보를 표방하면서도 그저 자기 배경으로만 내세우면서 진보라는 말에 부합하지 않게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가 봤던 사회진보연대 동지들은 정말 진정성 있고, 실천하는 운동가들이었어요. 사회진보연대 동지들 전부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본 사람들은 그랬어요.(윤송단 동지가 인천 구월점에서 근무하시는데,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 활동가들이 인천 지역대책위에 결합하면서 윤송단 동지를 알아왔습니다.) 이런 동지들, 이런 친구들을 보면서, 이들이 있어서 이 사회에 거름이 되고, 현장 노동자들도 그걸 바탕으로 살 수 있고, 현장이 건강하게 살아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할을 하는구나 생각했어요. 이런 동지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너무 든든하고 힘이 됩니다. 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이 투쟁, 힘들지만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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