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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8.1-2.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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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_책속의책_마르크스.hwp

마르크스와 바쿠닌(1)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

역주

이번 <책 속의 책>은 마르크스·엥겔스와 바쿠닌 사이의 논쟁을 다룬다. 1868년 바쿠닌이 제1 인터내셔널(이하 제1 인터) 내부에서 <국제 사회민주주의 동맹>을 결성하면서 시작된 갈등은, 1869년 바젤 대회에서 ‘상속’의 문제를 두고 공개적으로 표출되었다. 파리 꼬뮌에 대한 평가를 두고 양 세력은 화해할 수 없이 갈라졌으며, 결국 1872년 헤이그 대회는 제1 인터에서 바쿠닌을 제명하는 결정을 내린다. 바쿠닌은 1873년에 『국가주의와 무정부주의』를 쓰고, 여기서 마르크스와 라쌀이 국가주의를 공유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1874년에 마르크스가 『고타 강령 비판』을 통해 라쌀주의를 비판한 것은, 이 같은 바쿠닌의 비판에 대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1868년 이후 마르크스의 가장 중요한 적수 중 하나는 바쿠닌이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고유한 정치관을 제1 인터 안의 다양한 세력들과의 논쟁을 통해 구성해 갔다는 점을 상기할 때, 바쿠닌과의 논쟁을 검토하는 것은 후기 마르크스의 정치관을 이해하는 특권적 경로가 될 수 있다. <책 속의 책>에서는 앞으로 몇 가지 중요 문헌을 소개할 생각인데, 일단 이번에는 바쿠닌과 마르크스가 최초로 충돌한 1869년 바젤 대회 문헌인 「상속권에 대하여」, 그리고 바쿠닌을 제명한 1872년 헤이그 대회에서 대회 의장을 맡게 될 테오도르 쿠노에게 엥겔스가 보낸 편지 중 일부를 번역한다.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논쟁은,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에 고유한 정치관을 정립해 가는 과정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바쿠닌과의 대칭적 대립에 빠져 자신의 고유성을 왜곡하는 모순적 과정이었다. 예컨대 쿠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엥겔스는 자신들과 바쿠닌의 차이점이 자본에 중심을 두느냐, 국가에 중심을 두느냐에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1867년에 마르크스가 역작 『자본』에서 밝힌 것처럼) 국가를 필수적 일부―곧 필수적이지만, 그보다 넓은 과정의 일부일 뿐인―로 포함하는 착취 구조 전반의 변혁이 문제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국가보다 자본, 정치보다 경제가 중요하다는 ‘경제주의적’ 해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또 다른 ‘反정치’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정치의 변혁’ 또는 ‘정치의 새로운 실천’으로 볼 것인가 하는 질문이 여기에 걸려 있다.

마르크스-바쿠닌 논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정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특히 마르크스가 자신의 고유한 정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고, 바쿠닌이 국가주의를 집약하고 있다고 격렬히 공격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당 형태’가 무수한 비극과 도착(倒錯)을 남긴 후, 많은 사람들이 바쿠닌을 마르크스에 대한 대안으로 선택하는 오늘, 마르크스주의를 반성하면서도 무정부주의라는 쉬운 길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이 논쟁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바쿠닌과 마르크스를 나누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혁명’에 관한 서로 다른 관점이다. 전자가 혁명을 ‘폐지’로 정의한다면, 후자는 ‘변혁’ 또는 ‘이행’으로 정의한다. 폐지로서의 혁명이란 바쿠닌이 즐겨 사용하는 공간적·시간적 은유를 들어 말하자면, ‘주변’에 대한 ‘중심’의 권위, ‘아래’에 대한 ‘위’의 권위, 그리고 (상속에 대한 논쟁의 배경을 이루는) ‘미래’에 대한 ‘과거’의 권위를 ‘역전’시키는 것이다. 바쿠닌이 볼 때 양자는 아무런 내적 연관을 맺지 않으며, 따라서 다만 폐지를 위한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면 마르크스는 물질적 ‘조건’의 문제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조건들 속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조건들 속에서 만”들기 때문이다.(『브뤼메르 18일』) 더구나 이 조건과 (혁명의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내적 연관, 곧 변증법적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으로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언급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르주아지를 무의지와 무저항의 담지자로 하는 공업의 진보는 경쟁을 통한 노동자들의 고립화 대신에 연합체를 통한 노동자들의 혁명적 단결을 가져온다. (…)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을 생산한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직접적 생산과정의 결과들」에서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형식적으로 포섭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포섭한다고, 곧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신체적·정신적 재생산 과정을 장악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자본주의라는 물질적 조건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지배하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의 생존과 심지어 저항의 수단이 되는 양면성을 갖는다. 따라서 혁명은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결단이 아니라 이를 ‘변혁’하는 이행의 과정, 이를 통해 노동자들을 정치적 주체로 세워가는 장구한 과정이 된다.

엥겔스가 말한 국가 대 자본의 대립은 이 같은 혁명관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큰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여기서의 쟁점은 동일한 문제설정 안에서 어떤 항에 중점을 두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제설정 사이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바쿠닌에게는 착취와 자본이라는 구조에 대한 분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말하는 국가도 종별적인 구조라기보다는 위에서 말한 ‘중심/위/과거’라는 은유의 집약일 뿐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바쿠닌의 조직은 자본주의라는 모순적 구조에 맞설 수 있는 형태가 아니라, 머지않아 파국에 이를 낡은 국가를 대체할 수 있도록 ‘주변/아래/미래’라는 이상적 모델에 따라 건설되어야 한다. 반면 엥겔스가 말하는 자본이란, 사회의 자본주의적 조직화 양식이며, 그렇게 해서 탄생한 사회의 전반적 구조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예컨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나 「노동일」 장에서 나타나듯, 자본이라는 구조의 본질적 일부를 이룬다. 또한 이에 맞서는 조직은, 바쿠닌이 말하는 이상적 은유가 아니라, 규정된 역사적 정세라는 현재를 변혁하는 데 적합한 형태로 건설되어야 한다. 즉 조직의 이상적 모델이란 있을 수 없고, 다만 정세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 입각한 구체적 조직, 현재적 모순 외부에 있지 않으면서도 이를 변혁할 수 있는 변증법적 조직의 건설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바쿠닌과 마르크스는 ‘反정치’와 ‘다른 정치’로 나뉘게 된다. 이 때문에 양자 사이의 첨예한 쟁점인 ‘권위’에 관해서도, 바쿠닌은 ‘권위의 폐지’를, 마르크스는 ‘민주적 권위’를 말하는 것이다. 바쿠닌이 자율과 권위를, 결국 개인과 집단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키고, 후자를 전자―이른바 ‘개인들의 자율적 연방’―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는 데 반해, 마르크스는 양자의 변증법을 주장한다. 이 때 마르크스가 특히 권위와 집단이라는 항을 무정부주의자들처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지배 계급의 집중화된 권력에 맞서 투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지배 계급과 비대칭적인 본성을 가진, 그러나 동시에 그에 맞설 강력한 힘을 지닌 집단화 방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투쟁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 건설된 사회가 한편으로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주의’, 다른 한편으로 ‘전체주의’와 다른 성격을 갖는 사회,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을 빌리자면 ‘각인의 발전이 만인의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가 되기 위해 반드시 대결해야 하는 질문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한 이들이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질문을 바쿠닌과 무정부주의를 따라 폐기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르크스가 제기한 ‘다른 정치’를 사고하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마르크스-바쿠닌 논쟁을 상속받는 올바른 방식일 것이다.


총평의회 보고서: 상속권

1869년 8월 2~3일 칼 마르크스 작성, 1869년 8월 3일 총평의회 승인



상속권이 사회적 의미를 갖는 것은, 사망자가 생전에 행사했던 권력, 즉 타인의 노동의 산물을 자신의 소유를 수단으로 자기 자신에게 이전하는 권력이, 상속권을 통해 상속인에게 넘어가는 한에서일 뿐이다. 예컨대 토지는 살아 있는 소유자에게, 지대라는 명목으로, 아무런 등가물 없이, 타인의 노동의 산물을 이전하는 권력을 준다. 자본은 소유자에게 이윤과 이자라는 명목으로 동일한 일을 하는 권력을 준다. 국채 소유는 소유자에게 노동하지 않고 타인의 노동 위에서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을 준다 등등.
상속은 한 사람의 노동의 산물을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에 이전하는 권력을 창출하지 않는다 ― 그것은 그 권력을 발휘하는 개인들 사이에서의 변화에 관련될 뿐이다. 다른 모든 민법처럼, 상속법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생산 수단 즉 토지, 원자재, 기계 등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기존의 경제적 사회 조직의 법률적 귀결이다. 동일하게, 노예에 대한 상속권은 노예제의 원인이 아니며, 반대로 노예제가 노예 상속의 원인이다.
우리가 움켜쥐어야 하는 것은 원인이지 결과가 아니다. 곧 경제적 토대이지, 법률적 상부구조가 아니다. 생산 수단이 사적 소유에서 공적 소유로 변혁된다고 가정하면, (일체의 사회적 중요성을 갖는) 상속권은 스스로 사멸할 것인데, 왜냐하면 한 사람이 사후에 남길 수 있는 것은 그가 생전에 소유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위대한 목표는 일부 사람들에게, 그들 생전에, 다수의 노동의 과실을 이전하는 경제적 권력을 주는 이 제도들을 지양하는 것이다. 사회 상태가 충분히 발전하고, 노동자 계급이 이 같은 제도들을 폐기할 수 있는 충분한 권력을 가진 곳에서, 노동자들은 이를 직접적 방식으로 수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국채를 없앰으로써 그들은 국채의 상속도 당연히 함께 없애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들이 국채를 폐지할 권력을 갖지 못한다면, 국채의 상속권을 폐지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상속권의 소멸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지양하는 사회적 변화의 자연적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상속권의 폐지는 이 같은 사회 변혁의 출발점이 결코 될 수 없다.
지난 40년 동안 생시몽의 후예들이 상속권을 현재의 사회 조직의 법률적 결과가 아니라 경제적 원인으로 대한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이는 그들의 사회 체계 안에서 토지 및 기타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영속화를 전혀 방지하지 못했다. 물론 선출된 군주가 존재했던 것처럼 선출된 종신 소유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상속권의 폐지를 사회 혁명의 출발점으로 선포하는 것은, 현재 사회에 맞서기 위한 진정한 공격 지점에서 노동자 계급의 눈을 돌릴 뿐이다. 이는 상품 교환의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서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계약법을 폐지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부조리한 일이다.
이는 이론적으로 거짓이며, 실천적으로 반동적인 것이다.
상속법을 대할 때 우리가 필연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일 사적 소유가 산 자들 사이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는 그들이 죽고 나서 그들에게서, 그리고 그들에 의해 이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상속권에 관한 모든 조치들은, 따라서 사회적 이행이라는 상태에 관련될 수 있을 뿐인데, 이는 한편으로 현존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아직 변혁되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궁극적이고 발본적인 사회 변화를 초래하도록 계산된 이행적 조치들을 집행할 만큼의 충분한 힘을 노동 대중들이 결집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고려할 때, 상속법의 변화는 동일한 목적을 향하는 극히 많은 이행적 조치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상속에 관한 이행적 조치들은 다음과 같아야 할 것이다.

a. 많은 국가에서 이미 현존하는 상속세의 확대, 그리고 이렇게 얻어낸 기금을 사회적 해방의 목적에 활용.
b. 유언 없는 상속이나 가족의 상속권과 달리, 사적 소유의 원리 자체에 비추어 볼 때도 자의적이고 미신적인 과장으로 보이는, 유언에 따른 상속권의 제한.



테오도르 쿠노에게 보내는
엥겔스의 편지


(발췌, 1872. 1. 24)


바쿠닌은 1868년까지는 인터내셔널에 맞서 술책을 부렸는데, 베른 평화 대회에서 크게 실패한 다음에는 인터내셔널에 가입해서는 곧장 그 내부에서 총평의회에 맞서는 음모를 꾀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쿠닌에게는 자기 식의 괴상한 이론이 있는데, 이는 프루동주의와 공산주의를 뒤범벅한 것으로, 그 핵심 요점은 첫째로 그가 자본을, 따라서 사회적 발전 과정에서 성장한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사이의 계급 모순을 폐지해야 할 주된 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신 그가 주된 악으로 간주하는 것은 국가입니다.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들 대다수가, 국가 권력은 지배 계급, 지주,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갖춰 놓은 조직체일 뿐이라는 우리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데 반해, 바쿠닌은 국가가 자본을 창출했고, 오직 국가 덕택에 자본가가 자신의 자본을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국가가 주된 악이므로, 무엇보다 먼저 없애야 하는 것은 국가이며, 그러고 나면 자본주의는 제 발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반대로 말합니다. 자본, 곧 모든 생산 수단을 소수의 수중으로 전유하는 것을 폐지하면, 국가는 저절로 몰락할 것이라고. 이 차이점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선행하는 사회 혁명이 없다면, 국가의 폐지란 헛소리입니다. 자본의 폐지는 그 자체가 사회 혁명이고, 모든 생산 수단의 변화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바쿠닌에게는 국가가 주된 악이기 때문에, 그게 공화국이든, 군주국이든, 그도 아닌 무엇이든 간에, 국가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일체의 행위는 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에 따라 모든 정치로부터 완전한 기권이 나오는 것입니다. 정치적 행위를 지속하는 것, 특히나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원칙의 배반이 될 것입니다. 해야 할 것이라면 선전하고, 국가를 비방하고, 조직하며, 모든 노동자들을 전취할 때 즉 다수가 될 때 당국들을 퇴위시키고, 국가를 폐지하며, 이를 인터내셔널 조직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의 시작과 함께 개시되는 이 위대한 행위는 사회적 청산이라고 불립니다.
이 모두는 극히 발본적인 것처럼 들릴 뿐더러, 너무 단순해서 5분이면 외울 수 있습니다. 바쿠닌의 이 이론이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젊은 법률가와 의사들, 기타 공론가들 사이에서 급속히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동자 대중들은 자기 나라의 공적 업무가 그들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주장을 결코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본성상 정치적이며, 누구든 노동자들이 정치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려 든다면, 그들은 결국 큰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모든 상황에서 정치에서 기권해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은 노동자들을 사제나 부르주아 공화주의의 품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이제 바쿠닌에 따르자면 인터내셔널은 정치 투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청산이 발생하자마자 낡은 국가 기구를 즉각 대체하려는 목적으로 형성된 것이므로, 여기서 자연스럽게 따라나오는 결론은 인터내셔널이 바쿠닌주의적인 미래 사회의 이상에 가능한 근접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에는 무엇보다 권위가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권위 = 국가 = 절대악이기 때문입니다(최종적 수단으로서 하나의 결정적 의지 없이, 통일된 지도 없이 어떻게 이 사람들이 공장을 운영하고 철로를 건설하며 선박을 운행하자고 제안할지에 관해서는, 물론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소수에 대한 다수의 권위 또한 끝나게 됩니다. 모든 개인과 모든 공동체는 자율적이지만, 그러나 어떻게 하나의 사회가, 심지어 단 두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손 치더라도, 각자가 자기 자율성의 일부를 포기하지 않고서 가능한지에 관해서는 바쿠닌은 다시 한 번 침묵합니다. 그런데 인터내셔널은 이 모형에 따라 재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부, 그리고 모든 지부 안에서 모든 개인은 자율적입니다. 심지어 그 자신마저 타락시키는 사악한 권위를 총평의회에 부여한 『바젤 결의안』에 저주를!
이 권위가 자발적으로 부여됐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권위이기 때문에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협잡의 간략한 요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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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국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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