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8.11-12.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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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미디어 활동도 해야 돼?

김용욱 | 민중언론 참세상
10년 전, 아고라보다 훨씬 이전의 바통모

30대 후반의 한 여성활동가 J씨. 10년 전 일이 눈에 선하다. 당시만 해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그녀는 단지 피시통신모임이 재미있어서 ‘바른통신모임(바통모)’이라는 동호회에 가입해 게시판에 글을 쓰고 오프 모임에도 나가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 스스로 당시에 자신은 운동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96년 말 신한국당의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개악에 맞서 민주노총 총파업이 일어났다. 그녀는 통신공간에서 바통모 회원들과 채팅을 하다가 날치기 악법에 분개하며 총파업 통신지원단에 함께 했다. 당시 정부는 철저하게 언론을 통제했다. 사실 그것이 통제였는지 언론이 알아서 노동자들의 소식을 내보내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노동자 민중의 투쟁소식이 신문과 방송에 올바르게 실리기 어려웠다. 아니 투쟁 소식 자체가 기사화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집회에 나간 사람은 다음날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면 속이 터졌다. 2만 명이 모이면 겨우 몇 천 명 모였다는 식의 보도다. 하긴 80년대 내내 민주화를 위해 거리에서 투쟁하던 이들도 그랬다. 아무리 많은 수가 모여 독재타도를 외쳐도 군사정권은 언론을 통제하고 철저하게 거리의 시민수를 줄였다. 그날 저녁 9시 뉴스나 다음 날 신문에는 어김없이 집회 참가자 숫자부터 대폭 줄어 있었고 집회사진 역시 시위대의 폭력장면이나 적은 숫자의 시위대만 보여주었다. 방송 역시 말할 것도 없었다. 거리의 민주시민들은 대부분 폭도로 묘사됐다. 2008년 경찰이 촛불 시위 참가자들의 숫자를 줄여서 발표하자 촛불의 숫자를 컴퓨터로 돌려서 폭로하던 네티즌은 없었던 그런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총파업 통신지원단은 국내에 통신을 통해 민주노총의 각종 소식을 알렸다. 통신공간에서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저 평범했던 그녀도 통신공간의 힘에 놀랐다. 그녀는 운동권도 아니었지만 통신지원단의 일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노동자의 투쟁은 한 사람을 변화시켰다. 그녀는 그런 말을 했다. 자기가 10년 전 PC통신을 통해 운동을 하게 되었던 것처럼 2008년 촛불을 든 시민들은 인터넷을 통해 운동을 하고 조직을 꾸리고 있다고.
총파업 통신지원단은 그해 언론노조에서 주는 민주언론상을 받았다. 총파업 통신지원단을 현재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민중적 대안 미디어의 모태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그 총파업 통신지원단의 성과는 진보네트워크센터로 이어졌다. 지금은 정보인권 단체로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지만, 진보네트워크센터는 곧이어 2001년 대우자동차 구조조정 분쇄 투쟁에서 또 한 번 새로운 미디어로서 가능성 있는 역할을 하게 된다.
2001년 대우자동차 투쟁은 대안적 미디어가 언론독점이 가진 권력의 힘을 넘어 새롭게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4월 10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앞에서 1기동단 소속 기동대원의 방패와 군홧발에 짓밟히는 노동자들의 동영상은 삽시간에 한국사회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당시 대우자동차투쟁 영상중계단은 노뉴단, 진보넷 참세상 방송국, 대우자동차 영상패, 사회운동단체 등 다양한 단체·노조 영상패들이 함께 만든 영상지원단이었다. 이날 투쟁을 찍은 것은 대우차 영상패였고 중계단의 발빠른 대응은 한국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인터넷과 영상, 편집 장비 등의 발달이 소수 주류 언론만 가능하게 했던 영상 중계를 노동조합과 조그만 인터넷 언론, 사회운동 단체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주류 언론들만의 독점적 카르텔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저널리즘의 새로운 틈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 민중의 목소리를 전 사회적으로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보다 가볍고 고성능의 노트북과 무선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가 결합하면서 2008년 촛불의 생생한 목소리까지 이어지게 된다.

인터넷, 우리도 방송을 할 수 있다. 민중의 목소리를 알릴 수 있다.

미디어 운동은 이렇게 90년대 후반부터 통신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영역에서 자기 성과를 구축해 나간다. 그것은 소수의 자본과 권력만이 가진 독점적 미디어가 만든 자신들만의 저널리즘의 영역을 파괴하는 역할을 했다. 미디어의 균열지점을 파악한 노동, 사회운동진영은 현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한 다양한 고민들을 품어갔다.
특히 영상운동에 있어 대공장 노동조합은 일찌감치 독자적인 영상패를 만들어 나가며 그 인프라를 구축해 왔다. 90년대 후반부터 다루기 쉬운 디지털 캠코더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고 디지털 편집이 가능한 컴퓨터 역시 대중화 되면서 인터넷 동영상을 통한 대중과의 소통이 용이해졌다.
그러나 단지 기술의 발달이 미디어 운동의 진전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그 어느 시기도 미디어 운동의 발전은 운동의 절절함과 동떨어져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 혹은 시장에 통제 당하는 주류 미디어가 매체를 독점하고 현실을 왜곡하는 상황에서 진짜 현실을 알리고 싶은 노동자 민중이 가장 먼저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뉴스를 생산해왔다.
사실 인터넷은 역사상 그 어떤 미디어보다 가장 저렴하면서 가장 강력한 전파성을 가지고 있으며 네트워크를 통해 많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미디어다. 이런 특성으로 인터넷의 ‘민주적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이 일찌감치 점쳐져 왔으며, 자본과 권력이 이 새로운 미디어의 속성과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을 완전히 통제하기 전에 노동자, 민중이 먼저 그 가능성에 눈을 돌려 일찌감치 사용한 미디어라는 점에서 미디어 운동진영의 관심은 더욱 컸다.
그렇다면 왜 노동자 민중이 새로운 미디어의 가능성에 관심이 많았을까? 아마도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촛불생중계가 그렇게 활성화 되었던 것은 주류 언론들이 촛불시민의 목소리를 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촛불 시민들은 스스로가 작은 매체가 되어 거리에서 주류 저널리즘을 대체했던 것이다. 노동자 민중들 역시 미디어가 그 발전의 단계를 거칠 때 마다 독점적 주류 미디어의 왜곡보도에 가슴을 치며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줄 매체를 고대해 왔다. 그러나 어느 매체도 온전히 혁명적인 목소리를 담지 못했다.
미디어는 누가 통제제하고 조절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정치적 성격이 결정되고 대중과의 민주적 커뮤니케이션 가능성도 판가름난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넷을 둘러싼 자본과 권력의 통제시도는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이런 과정에서 2000년 대 초반 수도권 영상패와 주요 대공장 영상패는 당시 미디어의 물적 지형과 정세적 조건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현장 영상패들은 노동자뉴스제작단, 노동넷, 진보넷 같은 단체들과 함께 재생산과 유통경로를 확보함으로써 현장과 대중적 영역에서 미약하게나마 주류 저널리즘의 공백을 채워 나간다.
80년대 말 까지만 해도 고가에다 무거운 견착식 카메라가 90년대 말의 작고 기동성 있는 고성능의 디지털 카메라로 전환되면서 인터넷과 결합된 과정은 대중이 동원되고 결집하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양식은 최근 2008년 촛불로 이어져 가장 잘 드러났다. 인터넷을 통해 경찰의 폭력이나 자본의 비정함을 폭로하는 영상이나 기사를 본 대중은 바로 댓글이나 관련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을 공격하는 형태로 노동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보냈다. (반대로 보수언론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노동조합, 사회단체의 홈페이지를 역공하기도 하기도 한다.) 이런 방식의 지지와 연대는 거리로 몰려드는 대중동원의 가능성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여론군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세련되지 않고, 정제되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자본과 정권의 행태를 폭로하는 날것의 생산물이 대중의 관심을 사는 순간 반나절이 되지 않아 주요 이슈나 의제가 되어 대중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역으로 수구 세력의 미디어 전술로 이어질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운동 진영은 끊임없이 대중을 설득할 미디어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현장 영상패와 미디어 활동가들의 결합은 단지 대우자동차 투쟁에서 멈추지 않았다. 2002년 발전, 가스, 철도 공공 3사의 민영화 저지투쟁에서 민영화저지 미디어 활동단을 꾸려 다시 그 힘을 발휘한다. 특히 발전노조가 38일 간의 파업을 전개하면서 민영화저지 미디어 활동단은 다양한 실험을 전개한다. 발전노조 역시 이전까지 어느 노조도 성공하지 못했던 산개투쟁을 전개한다. 당시 발전노조의 산개투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핸드폰과 인터넷의 발전, 그리고 인터넷에 익숙한 조합원들이라는 조건 때문이었다. 산개투쟁의 가장 약한 고리는 집결지를 벗어난 조합원들이 보수언론과 정부의 왜곡된 보도에 휘둘리지 않고 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파업대오를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38일 간의 파업대오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발전노조와 민영화저지 영상중계단이 매일 영상으로 위원장의 메시지를 발전노조 홈페이지에 올리고 조합원들은 보수언론에서 정보를 취하기보다는 노조 홈페이지와 소수 진보적 대안 언론 등을 통해 다른 산개 조합원들의 파업대오가 건재함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디어 활동단은 산개한 조합원들의 건재한 모습을 영상과 뉴스로 알려냈다. 이러한 미디어 활동단 활동은 이후 비정규직 철폐 영상 프로젝트, 아펙 당시 미디어문화행동,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평택 대추리의 들소리 방송국 등의 다양한 미디어 생산 주체들의 연대활동으로 주요 정세에서 나타난다.

본격적인 인터넷 대안 언론의 성장

인터넷의 발전과 영상기술의 발전은 그 저렴함과 접근성으로 인해 2000년을 전후하여 다양한 인터넷 언론의 창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98년 ‘딴지일보’, 1999년 ‘대자보’, ‘참세상방송국’, 2000년 ‘오마이뉴스’, 2001년 ‘민중의소리’ 등 다양한 전문 인터넷 언론들이 창간되었다. 인터넷 언론의 특징은 종이신문이나 공중파가 가진 시간적인 제약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특히 주류 언론의 오보나 왜곡을 빠르게 비판해 냄으로써 대중에게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또한 인터넷 언론은 실시간으로 사건 현장을 보도하면서 HTML의 장점을 이용한 다양한 정보와의 링크, 지면 제약 없이 보다 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제공하는 등의 멀티미디어 활용으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또한, 인터넷 언론은 그 어떤 매체보다 쌍방향적인 소통이 가능해 독자의 직접적인 참여를 높였고 이를 중심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인터넷 언론이 본격적으로 사회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2년을 경과하면서다. 특히 개혁적 인터넷 언론들이 노동자들에게 진보적으로 인식된 것은 공공3사의 파업과 비정규직 투쟁, 미군 장갑차에 의해 살해된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한국사회 격변의 순간에 그들이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부터일 것이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는 촛불 집회가 당시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 ‘앙마’의 제안으로 확산되고,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개혁적인 인터넷 언론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보수세력과 보수언론 역시 인터넷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법 개정에서부터 전략적 투자를 하기도 한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은 한국사회를 격동의 현장으로 몰아넣었다. 주류 언론들은 월드컵의 광풍 속에서 두 죽음을 외면했다.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을 발 빠르게 알린 것은 오마이뉴스, 민중의소리 같은 인터넷 언론이었고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인터넷 언론들이 주도적으로 사회단체들과 함께 미군기지 문제를 알려나갔다. 당시 인터넷 언론들은 상당히 미약했지만 인터넷 언론을 통해 폭발적인 대중운동의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인력, 재정, 정보력, 실력 모두 주류 언론과는 비교도 안됐다. 하지만 주류 매체에서 접할 수 없는 촛불의 소식과 미군기지 문제를 알려내 대안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인정받게 된다. 어느 순간 주류 미디어에 갇혔던 대중들은 인터넷 대안언론을 통해 주류 미디어가 배제해 왔던 사회적 약자들의 이슈와 의제, 운동사회의 의제들이 뉴스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터넷 언론의 의제설정 기능은 시간을 넘어 2008년 스스로 거리에 나선 촛불 1인 미디어의 진화로 이어진다.

민주주의 투쟁이 신문과 TV에 나오지 않아서...

2008년 촛불은 사회 전 영역을 뒤흔들었고 미디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미디어가 이제는 더 이상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모든 이들의 영역에 존재함을 증명해주었다. 대중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고 권력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언론에 맞서 미디어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는 대중 스스로가 미디어로 진화하게 했다.
5월 25일 새벽 4시경 있었던 사건은 1인 미디어의 폭발적 가능성을 보여준 일이었다. 거리에서 미국산 쇠고기 협상에 분노해 촛불을 들던 선량한 시민들에게 최초로 공권력이 행사되고 37명을 연행되었다. 주류 언론의 기자들이 대부분 철수한 상태였고 몇몇 인터넷 언론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생중계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아프리카를 통해 생중계를 하던 젊은 청년 한 명이 그 사태를 생생하게 인터넷을 통해 보여주었다. 인터넷 언론들은 몇 년간 익숙한 시스템인 동영상 속보 편집과 실시간 기사 송고 등을 통해 그날 사건을 보도했지만 이미 시민들은 아프리카 생중계를 통해 밤새 현장에 함께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중계를 하던 시민은 아프리카와 아고라를 통해 날이 새면 광화문 현장으로 나올 것을 호소했다.
밤새 경찰과 싸우던 모습을 생방송으로 지켜보던 시민들은 그이들과 함께하기 위한 양심으로 동틀 무렵에 첫차를 타고 나오기 시작했다. 미디어의 힘으로 대중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곱상하게만 생긴 청년이 노트북 하나와 헤드셋을 끼고 쉴 새 없이 현장을 중계하다가 현장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노트북 배터리를 기증해 줄 사람은 없는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없는지 제안하던 모습. 그는 그 자리의 대중에게 유일하게 언론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에 밀린 그 현장에서 대중들은 자발적인 토론을 벌이고 그날 오전과 오후의 집회 일정을 공유하는 등 투쟁 전술을 논의했다. 그 모습 역시 생생하게 생중계 되었다. 미디어가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이다.
촛불은 이렇게 1인 미디어의 발전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언론의 측면에서 놓고 보면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와 다른 자발적인 시민기자단까지 생겨났다. 사진동호회 사이트인 SLR클럽(slrclub.com)의 회원들은 시민기자단을 꾸려서 경찰의 폭력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기자들이 없는 곳곳에서 경찰폭력을 감시했고 촛불 투쟁을 알려냈다. 시민기자단이 수많은 디카를 들고 SLR클럽과 아고라를 통해 전개한 신속한 속보의 공유는 새롭지만 낯설지 않은 커뮤니케이션 방식이었다. 또한 이들은 권력의 감시자로서 언론이 해야 할 그 본래의 기능을 대체해 냈다. 한편 촛불의 관심은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서부터 공공성 문제까지 확장되었다. 이번 촛불 투쟁에서는 방송의 공공성 사수가 매우 중요한 의제 중 하나로 떠올랐는데 이는 공영방송의 보도태도에서 기인한바가 크다. 물론 이명박 정권의 노골적인 방송장악 음모가 대중으로 하여금 KBS, MBC, YTN 등을 사수하자는 움직임으로 나아가기도 했지만 대중이 초기부터 KBS나 YTN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5월 25일 새벽, 민주주의 열망을 가진 대중의 토론이 생생하게 TV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들만의 저널리즘에 갇힌 공영방송의 한계가 얼마나 명확한지 보여주는 것이다.
MBC가 피디수첩을 통해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을 알려 대중을 거리에 나오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MBC 역시 그 한계가 분명했다. 언론은 스스로 객관성과 공정성에 대한 기계적인 잣대들을 만들어 놓았지만 대부분이 정부와 시장의 잣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정부와 보수단체들이 제기하는 피디수첩 논란은 그러한 공정성의 잣대가 얼마나 기계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찬성 멘트 하나 반대 멘트 하나, 찬성측 발언 시간과 반대측 발언 시간의 기계적 공정성. 이렇게 반론권을 보장한다는 식의 저널리즘은 언론이 민중의 목소리를 담는 순간, 혹은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담는 순간 언론조차 정권에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로 돌아왔다. 이제까지 권력을 가진자들의 공정성과 객관성은 자신들의 입장이 정확히 관철되었을 때만 공정했고 객관적이었다. 언론의 공정성은 힘 관계의 산물이었다. 국민의 생명과 생존권 문제에 있어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고 그 사실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언론은 도전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주류언론들은 그렇게 한국사회의 반동적 이데올로기 생산자로 기능했다. 이렇게 주류언론의 이데올로기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에 촛불 현장에 달려 나온 시민기자단이나 1인 미디어, 다양한 대안언론의 활동이 있었다. 그들이 거리에서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활동가들은 미디어와 어떻게 조우 할 것인가?

사회운동은 보다 많은 대중과의 소통을 외치지만 실제 대중과의 접촉면은 매우 얕다. 사회운동이 현재의 물질적 조건에서 가장 많은 대중과 소통하고 토론할 수 있는 방법은 인터넷과 언론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회운동 활동가들은 미디어를 통한 활동에 별로 투자를 하지는 않는다.
사실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중요한 사안이 생기면 기자회견을 하고 자신들의 기자회견에 많은 기자들이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세력들이 인터넷과 각종 언론에서 자신의 입장을 조율 없이 써내려가는 것에 대해 폄하하는 것을 종종 본다.
현실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조직의 입장보다 먼저 개인의 입장을 낸다는 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구체적인 사회적 정치적 사건에 활동가들이 그 누구보다 먼저 대중에게 논의를 제안하고 논쟁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마인드가 필요하다. 시장과 정권이 만든 의제의 프레임을 민중적인 프레임으로 만들기 위한 글쓰기, 혹은 컨텐츠 생산은 웹 2.0 시대와 결합한 새로운 저널리즘이 만들어지고 있는 시대에 활동가의 덕목으로 인정될 필요가 있다. 어차피 혁명이 멀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현실을 관망할 것이 아니라면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미디어적 활동이 각 단체의 사업계획에 반영되어야 하지 않을까? 노동자대회와 각종 범국민대회에는 돈과 인력을 들여서 선전물을 뿌리는데, 일상적인 자기 입장을 대중과 교감하는 일은 온전한 사업 계획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회운동은 대중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성명서와 논평에 익숙한 사회운동 세력의 입장 발표 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미 오마이뉴스에 익숙한 시민운동 세력들, 자유주의 세력들은 진솔하고 생생한 글쓰기, 자유로운 미디어 다루기를 통해 사회적인 쟁점에 대해 발언하고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물론 딜레마는 있다. 운동세력이 언론을 이용하는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예를 들면 시민운동이 주로 구사하는 언론 플레이가 가져온 명망가 중심의 운동은 운동진영에서 논란이었다. 사실 환경련에서 벌어진 일련의 비리문제는 소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명망가들 중심의 운동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독사과였을 것이다.
이것은 실제 민중이 자본과 권력에 독립적인 자신의 미디어를 갖느냐의 문제로 연결 될 수 있다. 얼마 전 한겨레는 삼성광고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겨레는 그동안 삼성 광고를 받기 위해 경제면 등에서 삼성을 띄워주는 낯 뜨거운 기사를 썼다. 그 낯 뜨거운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무노조 신화, 떡값 대명사, 편법증여 등 온갖 비리의 삼성이라는 삼성의 부정적인 면을 잊고 삼성에 친근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 이렇게 독립하지 못한 언론의 한계는 명확하다. 주류 언론들이 경우에 따라 잠시 민중의 발언을 적극적으로 지면에 할애 하지만, 그것은 언젠가 독사과가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가장 극명할 때가 민주노총이 선거다. 민주노총 선거에 대한 보도를 할 때면 개혁적 언론을 자처하던 세력들도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개혁언론을 넘는 독립적인 민중의 언론이 필요한 것이다.
더는 미디어를 시장과 권력의 영역에 놓아두지 말자는 것이다. 한축으로 미디어를 끊임없이 감시해야 한다. 베네수엘라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당장 혁명이 이루어졌을 때 방송과 신문을 누가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민중운동의 자산으로서 방송과 언론에 대한 개입과 주체의 발굴은 매우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혁명이 TV에 나오지 않았던 것은 혁명을 해도 모든 미디어가 결코 알아서 노동자 민중의 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명박이 대통령 되고나서 가장 먼저 방송과 신문을 장악하려는 시도에 견주어 보면 사회운동 세력은 너무 무관심해 보인다.
둘째 사회운동은 미디어를 통해서 자신의 의견을 알리고 대중과 소통하고 싶은 욕구를 더욱 키워야 한다. 알리고 싶은 욕구는 억압받고 미디어에 소외된 사람들이 더욱 절실하다. 그들이 미디어 운동을 발전시켰다. 촛불 역시 알리겠다는 욕구로 새로운 미디어 형태를 만들었고 새로운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대중운동의 영역에서 시도했다. 반면에 사회운동 세력은 기자회견과 선전물을 돌리고 각종 운동권 속보 게시판과 노조 홈페이지 등에 올리는 정도의, 단지 올드미디어의 수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만의 네트워크에 갇혀 있는 사이 인터넷의 광장에서 스스로 대안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 사이 대중은 아프리카와 아고라와 수많은 인터넷 카페, 블로그 등에서 매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제기하며 운동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제 사회운동은 자신의 네트워크를 넘어 광활한 네트워크에 나가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 사회운동 활동가들은 “이젠 미디어 활동도 해야 돼?”라고 묻고 싶겠지만 힘들어도 해야 한다는 것이 답이다. 최소한 부단히 공부하고 글을 쓰고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 사회운동의 적극적인 미디어 전략의 수립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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