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5.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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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중동, 21세기의 중동 (2)-아랍 사회주의의 이념과 현실

김용현 | 집행위원
<font color="##003366">●편집자주 : 지난호에 예고되었던 "중동의 혁명"은 다음호로 미루고, 중동의 혁명의 배경과 경과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해를 위해 이번호의 기획을 변경하였습니다. 갑작스런 기획의 변경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20세기의 중동, 21세기의 중동"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애정어린 관심을 부탁드립니다.</font>


<b>아랍 민족주의운동의 전화</b>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아랍은 분열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의 건국은 아랍 민족주의 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랍 민족주의 운동에서 실패의 상징이 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통치세력의 계속적인 아랍국가 지배에 대해 반대하여 나온 결과였다. 따라서 아랍 민족주의의 목표는 이 지역의 정치적 독립과 아랍통합의 실현에 있었다. 아랍 민족주의에 동의한 국가들은 1차 세계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아랍의 통합을 앞당기는 길이라 여겼다. 그러나 1917년의 발포어 선언은 이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 즉 이스라엘의 건국을 낳았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영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라는 상황은 아랍민족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이 운동은 지배계층만의 운동으로 바뀌었고 노동자·농민 계층의 이해는 외면하는 결과를 낳았다. 2차 세계전쟁이 끝나고, 개별 아랍국가들은 독립하게 되어 다시금 아랍 통합의 목소리는 높아져 갔다. 오히려 아랍 민족주의는 각각의 아랍 국가들의 지배전략이 되어 있었다. 예컨대 아랍연맹(Arab League)의 탄생은 역설적으로 개별국가로의 분열을 고착화하고 실질적인 통합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지배층은 지주, 부동산 소유주, 상인 등으로 독립된 국가권력을 차지하고 이전 식민지배 때의 방식으로 국내 민중들을 지배했다. 개별 아랍 국가들의 탄생과 국가장치의 형성은 도시성장을 촉진했고, 농촌의 노동자·농민들이 공장 및 상업분야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어 인구의 도시집중화가 일어났다. 농민과 노동자는 천대받고 착취당하는 계층으로 전락했으며 이러한 착취와 박해는 혁명의 분위기를 서서히 형성해 갔다.

한편, 2차 세계전쟁 기간 중에 아랍의 부르조아들은 식품을 독점하고 가격을 조작하였으며, 생계를 위해 토지를 헐값에 파는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구입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할 때, 중산층 즉 지식인, 소상인, 관료, 산업체와 서비스 부문의 노동자들, 학생, 군인들 역시 경제위기 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산층은 사회변혁의 과제를 부여받게 되었다.
한편, 소련, 중국, 쿠바 등 세계 곳곳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고 있었고, 서유럽과 영국에서는 각각 사회당과 노동당이 큰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 즉 아랍 민족주의 운동의 실패, 경제위기와 사회적 궁핍화의 확대, 그리고 세계적인 혁명의 물결은 결국 아랍 민족주의 운동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화시켰던 것이다.


<b>아랍 사회주의의 원천과 특징</b>

아랍 최초의 공산당의 등장은 1920년 알제리 공산당의 설립이었다(아랍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발전한 개괄은 아래의 표를 참조.). 이러한 아랍 사회주의 사상이 형성된 데에는 우선 서양의 이 론적·실천적 영향이 주요했다고 볼 수 있다. 유럽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을 접하고 돌아온 유학생들은 이러한 사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써클이나 사회주의 정당을 조직했다. 특히 아랍지역에 설립된 외국재단의 대학들이 그 거점 역할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베이루트의 아메리칸 대학과 성요셉 대학, 알제리의 프랑스 대학, 그리고 카이로의 아메리칸 대학이 그것들이다. 한편, 프랑스 공산당의 '뤼마니떼' 같은 서양 공산당의 기관지들이 일부 아랍국가들에 송달되었다. 당연하게도 1917년 러시아혁명과 2차 세계전쟁 후 중국혁명은 아랍 세계에서의 공산주의 서클의 조직을 고무하였고, 당시 역사적 과정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이 요구되면서 사회주의 성격을 띤 운동들이나 단체들로부터 반제국주의, 반시온주의 및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의 동맹자들에 대한 투쟁들이 촉발되었다.

한편, 아랍 사회주의 운동의 내부에서도 서구의 논쟁과 유비될 수 있는 논쟁들이 존재했다. 이집트의 후쓰니 알 오라비가 이끈 이집트 사회당은 지식층에 의해 주도되는 운동을 지지했다. 또한 민족해방투쟁 대신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코민테른에 참가하고 1923년 전국적 총파업을 주도하였지만 민족해방운동세력과의 연대의 실패, 노동자 운동의 미성숙 등으로 실패하게 된다. 여기서 이집트의 초기 사회주의 운동은 실패하게 된다.

한편 파라흐 안툰은 공상적 사회주의의 전형이었다. 그는 중동사회가 극단적 이기주의와 분열로 인해 오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언젠가는 사회주의적 국가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계급투쟁을 부정하고 오히려 유럽의 공상적·진화론적 사회주의를 지지하였다.
이에 반해 쉬블리 슈마이일은 사회주의의 공상적이고 진화론적인 경향에 반대하고 오히려 과학적 사회주의를 정초하고자 한다. 그는 노동만이 개인소득의 원천이 되어야 하고, 그 정의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종국적인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회주의로의 평화로운 이행과 협력을 호소하였다.

니꿀라 ?다드는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양자를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그 혁명을 폐기한다. 오히려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발전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사회주의로의 첫단계는 바로 중동사회에서의 민주주의의 확립이라고 보았다.


이상에서 언급된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이른바 '초기 서구형 아랍 사회주의'의 범주에 속한다. 이는 그들이 서구의 사회주의 논쟁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반대로 아랍 사회주의의 원천을 애초에 이슬람 자체, 즉 꾸란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들도 존재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에 비해 꾸란은 보다 깊은 유물론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즉 이슬람은 평등, 정의 그리고 번영이 우세한 계급없는 사회구현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꾸란에 나타난 경제일반의 사회원리에 따르면 각 개인의 생활수준에는 합리적인 최소의 몫과 최대의 몫이 있으며, 이 양자간의 한계 사이에서 각 개인은 그 능력에 따라 자유로이 그 몫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이슬람 자체에 근거하여 사회주의론을 정립하려고 한 시도를 이른바 '무슬림 사회주의'라고 한다. 이같은 흐름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사실 얼마간 역설적이다. 즉, 소련의 국제적인 지위향상과 동부 아랍에서의 사회주의의 확장은 오리려 이슬람 사상가들로 하여금 사회·경제적 문제점으로서 사회주의 운동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1950년대 이집트와 기타 아랍국가들에 급진적인 정권이 대두하고 이 지역에 소련의 영향력이 팽창하면서 이슬람 사상가들의 고민은 심화되었다. 즉 이들에게 이슬람 세계에서 사회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도전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이슬람이 모든 사회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에 이르렀고, 따라서 이러한 생각은 '이슬람 부흥운동', '이슬람 근본주의운동'에 반영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실천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아랍 사회주의는 실질적으로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민족경제와 아랍민족을 해방시키고 전 아랍 영토에 민족주의 형태의 사회주의 건설에 목표를 두고 있었으므로 아랍인들에게는 하나의 민족제도로 인식되었다. 어쩌면 아랍 사회주의의 등장 자체가 아랍인들과 이슬람이 촉진시킨 경제적, 사회적, 사상적 혁명이었던 것이다.


이상에 근거하여 아랍 사회주의의 특징을 크게 3가지 정도로 정식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첫째, 아랍 사회주의는 아랍 민족주의의 형성에서 중요한 요인인 이슬람 가치들에 의존하고 있다. 둘째, 아랍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반대하지 않고, 다만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가 없는 사회건설을 지향하고 있다. 셋째, 아랍 사회주의는 철저하게 아랍 민족주의 운동의 맥락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아래에서는 아랍 사회주의 운동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아랍 바아쓰당과 나쎄르의 사회주의 시도를 통해 그것이 구체적으로 아랍사회에서 발현된 양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b>아랍 바아쓰 사회주의</b>

바아쓰(al-Ba'th: 부활)는 하나의 당 형태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아랍인들의 열망, 즉 위대한 아랍의 부활이라는 하나의 이념이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른바 바아쓰주의자들은 1945년 후반까지는 스스로를 하나의 정당이라고 간주하였으며, 1946년 여름, 당 기관지인 '알-바아쓰'를 창간하면서 실질적인 당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47년 200여명의 당원들이 바아쓰 당헌을 결의하고 같은 해 6월 바아쓰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미셸 아플락과 살라? 알 바이따르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현실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바아쓰당은 아랍 통합을 주된 목표로 내놓고 그 달성을 위한 혁명적 접근을 한 최초의 정당일 것이다. 사실상 아랍 민족주의는 바아쓰당의 형성 이전부터 두 단계에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첫째, 제국주의로부터 아랍영토의 해방이고, 둘째, 아랍의 통일이다. 바아쓰당은 이를 다시 첫째, 어떤 아랍국가도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 다른 아랍국가들과 고립되어 살 수 없으며 둘째, 세계 제국주의는 아랍인들의 주된 적이며 셋째, 반제국주의 투쟁 이데올로기는 그 내용이 더 효과적이 되도록 연합되어야 한다는 과제로 정식화하였다.
아랍 민족주의에서 이슬람 종교는 정치적 표현으로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슬람은 아랍정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일체감과 영원성의 상징이다.

그러나 바아쓰당은 종교와 국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다. 종교가 국가를 결속시키지 않고 오히려 단일 민족을 갈라놓을 수 있다는 이유로 바아쓰당은 바아쓰 민족주의가 종교적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종교는 항상 이상적으로 선을 선호하고 핍박받는 자들과 같이 나가고 있으나, 종교가 압제자나 반동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바아쓰 민족주의는 종교를 자신의 하위구조로 놓는다.
바아쓰당의 슬로건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아랍의 통합, 서구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의 실현이 그것이다. 당의 이론적 중심이었던 미셸 아플락은 이 세가지 원리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아랍 바아쓰당은 이 세가지 원리들 속에 실질적 민족의 목표들을 묶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민족의 목표들을 알게 되었고 이 세 원리들이 하나의 완전한 개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합작업은 자유를 향한 노력일 뿐만 아니라 아랍인들의 미래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만일 통합이 그들의 권리를 알고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는 자유로운 국민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통합의 가치가 무엇이겠는가? 제3의 원리인 사회주의 단계에서 부지런하고 자유로운 국민들은 운명대로 살고 그들의 힘과 잠재력이, 한 계층이 다른 계층에 부과된 인위적 장벽이 없이 내적인 차별이 없이 분명해질 수 있도록 많은 기회가 개인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 때 아랍인들은 그들의 위대한 힘을 발산하게 될 것이고 그들의 사회는 존재하고 스스로 방어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통합'의 경우 그 본질은 분할된 아랍의 장벽을 제거하는데 있으며, 아랍조국은 불가분의 정치적, 경제적 통합체이므로 어떠한 아랍국가도 상호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고 바아쓰 당헌 제 1조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통합의 노력은 이후 많은 국가연합의 실험들을 낳았다. 1971년의 이집트-리비아-시리아 연합, 1972년 이집트-리비아 연합, 1975년 리비아-튀니지 연합과 리비아-북예멘 연합, 1976년 시리아-요르단 연합, 1980년 시리아-리비아 연합 등이 그 현실적 양상들이다.

'해방/자유'는 모든 국면에서의 식민주의로부터의 해방과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고, 팔레스타인 해방전선을 포함한 활발한 반식민주의 운동을 의미한다. 또한 바아쓰당의 자유는 주로 식민지배로부터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을 의미하며, 바아쓰당의 기본적인 인본주의는 항상 자유와 사회정의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생산의 자본주의적 양식의 파괴를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바아쓰당은 소련이 계속적인 오류에 빠져 있으며, 오히려 적극적인 중립이 비동맹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진영보다는 사회주의 진영을 옹호하고 있다.

바아쓰당은 민족해방투쟁의 필요성으로부터 사회주의 이념을 도출하였기 때문에 제모순에 대한 사회주의적 해결책을 내세웠다. 바아쓰당이 내세운 사회주의의 의미는 아랍조국의 부의 분배를 재고하고 경제의 기반과 원칙들을 내세우는 데 목표를 두며, 시민들간의 평등과 경제 정의를 포함하고 생산과 생산수단의 변혁을 실현시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경제조정에 한정되어 있다. 한편 바아쓰당은 계급투쟁을 사회발전을 위한 주요동인으로 생각하였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러한 생각은 변화하였다. 이를 둘러싼 당 내부의 분열과 내부논쟁을 낳게 되었고, 결국 당은 계급투쟁에 대한 논의를 그 분열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정치투쟁에 대한 강조로 쟁점을 이동하게 된다.

한편, 바아쓰 사회주의는 자신의 정당노선이 공산주의에 반대되는 반공산주의 정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1959년 제3차 민족회의에서 '당의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에서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의 오류와 위험에 대항하여 우리의 지적, 이념적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아플락에 의하면 아랍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간의 혼합이다. 아플락은 "공산주의 국가는 블록 정책을 추구하고 제국주의를 돕고 있다"면서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들을 비판하고 있다.

한편, 시리아의 바아쓰당원들은 1958년 초통일아랍공화국(UAR)을 구성하기 위한 시리아-이집트 간의 동맹을 지지하였으나, 나세르와의 갈등으로 레바논·요르단·이라크 중심의 바아쓰당원들과 대립하였다. 바아쓰당은 1963년 이라크에서 잠시 집권하였다가 1968년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시리아의 좌익 바아쓰당 정권은 계속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하였으나 무슬림 형제단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이라크의 바아쓰당은 이란과의 전쟁 때문에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져 1980년대부터는 서방의 원조에 더욱 의존하였다. 1991년 걸프전 패배 이후 이라크에서는 쉬아파(派)와 쿠르드족이 중심이 된 반바아쓰당 세력이 저항 소요사태를 일으켰다. 이것은 바아쓰당의 정치적 탄압과 반이슬람적 경향이 그 원인이었다.

정교분리와 사회주의 민족주의에 근거한 순니파의 바아쓰당 노선은 근본적으로 정교 일치체제 속에서 무신론적인 사회주의나 종족적 민족주의를 배척하고 있는 정통 이슬람과 타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반바아쓰당의 소요 이후 이라크의 대통령 후세인은 집권 바아쓰당과 경쟁할 다른 정당들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법안을 선포하였다.


<b>나쎄르 사회주의</b>

"우리는 우리의 경험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우리의 이데올로기에 도달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자세한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의 이데올로기를 추출해 냈고, 어떠한 이데올로기가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건의 사실적 뒷받침 없이 이데올로기를 차용해 오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이데올로기는 생활에 봉사하게 되었다.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목표가 아닌 운동의 모범이고 방법이다."

위의 인용은 나세르가 1960년 7월에 행한 연설의 일부이다. 사실 이 연설은 나세르의 사상적 변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인데, 사실 이집트 혁명정권은 1952년 혁명이래 시행착오를 통해 전진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 연설은 '아랍 사회주의' 시기에 속한다.

나세르의 민족주의 이념은 그의 저서인 <혁명의 철학>에 집약되어 있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쓰여진 시기가 약간씩 차이가 있다. 그래서인지 1, 2부는 전형적인 이집트 민족주의의 내용이라면 3부는 아랍 민족주의로의 전환을 나타내고 있다. 아랍 민족주의와 이집트 민족주의의 차이는 이집트의 역사적 지리적 위치 때문에 발생한다. 이집트인들은 수에즈 동부 아랍과의 언어, 종교, 전통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이집트가 이탈리아와 프랑스처럼 유럽 지중해 세계에 속한다는 이념을 발전시킬 정도였다. 시리아에서 오만까지의 아시아 아랍국가들은 한 지역으로 간주되었고 인접한 이집트는 다른 분리된 국가로 간주되고 있었다. 1952년 혁명 당시 자유장교단 역시 이집트 중심주의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나세르의 <혁명의 철학>의 1, 2부는 아랍이 아닌 이집트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 운동의 목표는 '자유롭고 강한 이집트'로 정해져 있다. 조국은 이집트이고 민족은 이집트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3부에 이르면 아랍 민족주의로의 전환이 확연해진다.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아랍권이 있다는 것과 이 아랍권이 우리의 일부라는 것, 우리가 아랍권의 일부라는 것, 우리의 역사가 아랍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나세르가 이른바 '아랍주의'(Arabism)로 인식을 전환하게 된 이유는 첫째, 이 지역에서 강력한 힘을 갖기 위한 의지와 구상, 둘째,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에 대한 강한 증오심과 적대심, 마지막으로 이집트 국민들의 절대적 빈곤을 이집트 혼자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세르는 1954년 영국군 철수협정과 1955년 봄, 주은래, 네루와의 반둥회의 참석으로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세 중심 인물 중 하나로 등장했다. 이집트의 반제국주의 중립주의, 무기거래협정,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과 소련과의 협력,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영국·프랑스·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승리 등의 이러한 모든 발전들이 아랍인들의 눈에 이집트를 높게 평가하도록 했다.

1961년 말 국민연합(the National Union)이 아랍사회주의연합(the Arab Socialist Union)으로 대체되었다. 시리아와의 통합체였던 UAR의 붕괴 후 나세르가 도달한 결론은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전환이었다. 시리아와의 결별에서 나세르는 자기비판의 과정을 겪었으며, 그는 여기서 많은 중산층과 봉건적 요소가 민족통합에 침투했다고 인정하고 이것을 반동의 도구로 규정했다. 그후 그는 친제국주의적이고 악덕 자본가를 제외한 민족자본가를 구분하고 이들과의 협력하에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확고히 하려 하였다. 나세르는 1955년 4월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후 단계별로 사회주의 조치를 단행하였다.

바아쓰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역시 나세르의 슬로건을 통합, 자유, 사회주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나세르는 이집트를 이기적 고립에서 끌어내는 이집트에 아랍동질성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리고 아랍 통합문제를 이집트와 아랍국가들이 당면한 필연적인 것으로 내세웠다. 물론 나세르가 통합에는 성공했지만, 모순된 두가지 경향을 낳았다. 첫째, 나세르주의는 아랍대중의 열망을 현실화할 수 있는 운동으로서 성공적으로 등장했다. 둘째, 그러나 통합 과정에서 부르주아들의 반동과 통합 과정의 역기능에 대한 인식 결여가 존재했다. 결국 이러한 모순은 시리아 군사쿠데타와 UAR로부터의 시리아의 탈퇴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세르주의는 아랍통합의 의미를 변화시켰다. 즉, 모든 운동의 기본은 아랍통합과 사회주의간의 협력과 단결이라는 것이다.

한편 나세르는 독립이 국가들간의 행동의 자유를 위한 길이라면 민주주의는 개인들에게 보장되는 해방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세르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민주주의를 불가분의 관계로 보고 있다. 이 양자의 통합 없이 국민들은 자유를 얻을 수 없고, 이 양자의 상보성이 모든 형태의 착취로부터 자유를 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세르는 1952년 혁명 이래, 몇 단계에 걸쳐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실천해갔다. 1952년 1단계에서 나세르의 경제정책은 농지개혁, 민족자본 보호와 민족자본이 민족경제성장에 참여하도록 권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단계에서의 정책들은 2단계에 접어들면서 페기된다. 2단계 경제정책은 1961년 시행되었고 중요산업에 대한 국유화가 취해졌다. 이 시기 모든 생산의 국가통제가 이루어졌고 개인의 이익보다는 사회적·경제적 욕구에 우선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나세르주의는 개인 재산권을 인정하였다. 오히려 공정한 보상과 분배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바아쓰 사회당과 마찬가지로 나세르주의는 궁극적으로 계급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계급간의 불균형을 줄이려고 하였다. 계급은 사회·경제적 산물이므로 특권이나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소득의 불균형을 줄여 사회적 불화를 화해로 이끌려 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매우 간략하게 살펴본 대로 아랍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비판과 반대의 결과였다.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는 서구식 의회제도를 모방하고 대중의 사회적 욕구를 등한시한 채 제국주의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제를 파탄내고, 아랍통합에 대해 소극적 자세를 취하며, 팔레스타인 전쟁의 패배의 책임이 있었다. 아랍 사회주의는 사회전반에 걸친 혁신적 개혁을 요구하는 계층들이 수용한 '제도'이다.
아랍 사회주의는 중산층에 의해 이룩된 중산층 사회주의이며 그들의 이익에 목적을 둔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아랍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모든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고 중산층의 이익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희생으로 노동자 계급의 욕구를 수용해가는 양상을 띠었다.

"중동의 혁명"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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