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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9.9-10.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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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재발견

구준모 | 정책위원
1980년대 초반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 신보수주의 정권은 노동조합 말살을 목표로 하는 노동정책을 밀어붙였다. 1981년 8월 미국 연방정부 소속 1만 7천여 관제사의 노동조합인 항공관제사노조는 1년 넘게 진행된 협상이 결렬되자 전면파업을 선언했다. 파업에는 1만 2천여 명이 참가했다. 항공관제사노조는 전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지지라는 전통적인 관례를 깨고 공화당 후보인 레이건을 지지했다. 레이건은 젊은 시절 미국노총(AFL-CIO) 산하 영화배우노조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동료들이 공산주의자라고 밀고하며 FBI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노조는 또한 휴가철 성수기인 8월에 비행기 운항이 멈출 경우 파업의 파괴력이 극대화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미국노총도 파업을 지지하고 나섰다. 하지만 레이건의 대응은 강경했다. 그는 “48시간 내에 복귀하지 않으면 관련법에 따라 전원 해고할 것이며, 평생 연방정부에 재취업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조는 이를 통상적인 엄포로 받아들이고 파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건은 8월 5일 기한 내에 복귀하지 않은 노조원 1만 1,359명을 바로 해고했다. 파업은 결국 패배로 끝났고 계속되는 와해 공작으로 항공관제사노조는 이듬해 10월 노동조합 자격을 박탈당했다. 평생 재취업 금지 명령은 15년 뒤인 1996년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야 폐지되었다. 레이건은 법과 원칙을 잣대로 일체의 관용을 베풀지 않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았다.
영국의 대처도 1979년 총리로 취임한 직후부터 노동조합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조치를 취했다. 1980년과 1982년에 고용법을 개정해 클로즈드 숍 금지, 노조활동 대한 손해배상, 지원파업과 동조파업 금지 등을 법제화했다. 1984년 탄광 폐쇄 계획이 발단이 되어 광부 파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경찰은 철저한 파업파괴 훈련을 받았으며, 노조파괴 전문가 이안 매그레거가 전국석탄이사회 의장이 되었다. 대처는 파업 광부들을 영국 ‘내부의 적’이라고 비난하며, 기마경찰 등을 동원해 사력을 다해 파업을 진압했다. 1년 간을 끈 광부파업은 결국 대처의 강경대응으로 막을 내렸다.
2009년 한국에서도 신보수주의와 유사한 노동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평택 쌍용차 공장은 이러한 정책의 시험장이 되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파업은 근래 경험하지 못한 영용한 공장점거 파업이었다. 그러나 정리해고를 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단일 노동사안 최대 구속자 수를 기록했고, 노동자 간 불신과 반목이 조장되어 이후 노조의 현장활동이 어려워지는 등 그 결과는 비극적이다. 쌍용차 파업의 양면적인 성격 때문에 매우 다양한 평가 시각이 제출되고 있다. 그 중 노동신축화의 수용과 사회안전망 구축이 유일하게 가능한 대안이라는 입장이 있다. 이 의견은 이명박 정부의 노조활동에 대한 엄격한 법적용과 불관용, 강경노조 말살 정책과 맞물려서 여론을 형성하고 노동조합 활동가 일부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신보수주의적인 노조탄압에 직접 맞서기보다는 노조가 대타협을 적극적으로 제안해서 사회적 지지를 얻고 어느 정도 실익을 방어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독일 폭스바겐의 사례를 즐겨 인용한다. 폭스바겐이 경영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실시한 일자리나누기, 노동시간계좌제가 노동자의 해고를 막고 기업의 생산성도 높인 윈-윈 해법이라는 것이다. 1994년부터 실시한 일자리나누기의 핵심은 사측이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노조는 임금보전 없는 노동시간 단축(주당 36시간에서 28.8시간으로)에 합의한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시간이 20% 줄어들고 노동자 소득이 16% 줄어들었다. 1995년에는 감산으로 조업이 단축될 경우 노동자에게 기존 노동시간에 해당하는 임금을 보장해주고 부족한 노동시간은 이후 증산 시 결산하는 노동시간계좌제가 도입되었다. 조업이 줄어든 노동자에 대해서는 최대 6개월까지 정부가 유급 직업교육을 보장했다. 또 고령 노동자는 정년퇴임 전까지 노동시간을 단계적으로 줄이는 조치도 취해졌다.
2001년에는 노사가 ‘아우토5000’ 프로그램에 합의했다. 독일 내에 새로운 공장을 만들어 노동자 전원을 장기 실업자 및 청년 실업자로 채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장의 노동자들은 다른 폭스바겐 노동자보다 10~15%가량 낮은 임금을 받는다. 성과급제를 도입하고 노동시간계좌제도 기존의 200시간에서 400시간으로 대폭 확대했다. 이렇게 임금삭감, 성과급제 도입, 노동시간의 신축화를 노조가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수용함으로써 해고를 막고 기업의 생산성도 높아졌다는 것이 폭스바겐의 사례를 즐겨 인용하는 이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들은 쌍용차 파업의 교훈이 “강력한 대기업 노조도 시장과 공권력의 힘을 넘어 설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또 “사측이 대규모 정리해고를 시도하고 노조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걱정한다. 그들은 폭스바겐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노동신축화 수용과 사회안전망 구축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유연안전성 추구로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입장은 정확히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에 조응한다. 신보수주의와 달리 신자유주의는 조직된 노동자를 대화와 포섭의 대상으로 여긴다. 따라서 일방적인 정리해고보다는 노동신축화를 통한 고통분담을 선호하고, 실업자를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도 추진한다. 비정규직 불안전노동을 양산해 기업의 이윤문제를 해결하고 실업문제를 관리하는 것이다. 또 노조의 활동을 일정부분 인정해주는 대신 제도화를 통해 순치하며, 몇 가지 논란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관행을 인정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추진했다. (다만 노동신축화를 보완하는 사회안전망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의 부재로 인해 서구 신자유주의에 미달했다.)
반면 이명박 정권은 금속노조를 비롯한 민주노총 탈퇴공작, 특히 눈엣가시 같은 자동차 기업의 노조 흔들기를 통해 민주노총의 대표성과 정당성을 파괴하고 있다. 또 올 하반기에 입법할 복수노조 허용,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통해 노동권을 제한하고 한국의 노사관계를 미국식으로 전면 개조할 움직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위기로 인한 한계기업들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법과 원칙, 공권력을 앞세운 국가와 자본의 공세 속에서 노동자운동이 현명하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권의 신보수주의 공세보다는 차라리 신자유주의 위기관리 정책이 더 낫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재발견이라 부를 만하다. 일부 개혁언론이나 학자, 연구소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감대가 활동가들에게까지 내면화된다면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노동조합운동의 목표, 노동자계급 형성의 문제가 부차화되고 양보교섭이 관행화되면서 결국 노동조합운동은 백기투항의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장기적 경제위기의 초입에서 유일한 대안인 노동자운동의 토대가 무너지는 것이다. 구체적인 입장과 투쟁 속에서 노동자운동의 원칙과 이념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운동> 2009년 9-10월호에는 현 경제정세에 대한 진단뿐만 아니라 쌍용차 투쟁, 경제위기에 대한 민주노총의 대응, 노동운동 활성화 전략, 복수노조 및 전임자 문제, 비정규직법 등 노동자운동의 주요 쟁점에 대한 글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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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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