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9.11-12. 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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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덜 필요한 세상을 꿈꾸면서

문설희 | 회원
살아있다는 증거: 또 다른 세상을 꿈꾸다

작년 이맘 때 즈음 활동공간을 옮겼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면서,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쏟아지는 일거리에 파묻혀 허우적대면서, 정신없이 지내다보니까 어느새 겨울-봄-여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와 있다. 계절이 한 바퀴 돌아갈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생각이 많아지는 요즈음이다.
집회나 회원모임에 빠지기 일쑤이고, 회원게시판에 글 한줄 남길 여유도 없이 살다보니 종종 주변 사람들로부터 “잘 살아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면 나는 나 자신에게 다시 물어본다. “당신, 살아있는가?” 잘 살고 있는지, 아니면 마지못해 살고 있는지, 나의 경우는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라는 말을 상기함으로써 그것을 가늠해보곤 한다. 이 말에 대한 설렘이 남아있다면 너는 살아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너는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면서. 다행스럽게도 나는 또 다른 세상을 여전히도 꿈꾸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또 다른 세상, 특히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 여성억압의 제반조건들이 분쇄되고 여/남이 새로운 관계를 맺어 더욱 자유로워지는 그런 사회를, 여/전/히/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본 적 없는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현실로 만들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이 쉽지 않음을 뼈저리게 깨달아가고 있는 요즈음이기에, 살아있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괴로움과 때로는 좌절감을 맛보기도 하는 요즈음이다. 쉽게 이루어질 꿈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꿈을 꾼다는 것이 이토록 지난하고 외로운 일일 줄이야….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사회진보연대와 함께 걸어온 길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에 대한 꿈은 가깝게는 2003년에서부터 시작된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에서는 여성억압이 남녀의 적대관계 및 남녀불평등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가부장적 젠더관계가 재생산되는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여기고, 그것의 핵심적 장소이자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가족’에 주목한다. 그리고 ‘가족제도의 사회화’를 일찍이 주장했던 콜론타이와 같은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역사적 유산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통해 여성해방 이론을 재정립해나간다.
당시 여성위원회 세미나에 함께했던 나는 내 인식 속의 ‘여성억압’에 드리워져 있었던 추상적 정념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비로소 그 실체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해방을 위한 사상적 무기를 벼리는 속에서 만난 콜론타이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녀가 간 길에서 더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후세대인 우리가 그녀를 정당하게 기억하는 방법이자 그녀에게서 꿈을 빚진 우리가 응당 지녀야 할 역사적 몫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는 또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처절하게 전개되어가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1997년 말 IMF 경제위기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노동력 재생산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가족구조 해체와 편부모 가족의 증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 등은 여성의 노동력 재생산 부담을 가중시켰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저임금 노동력인 여성을 노동시장에 동원하기 위해 각종 재생산 노동을 최저가격으로 제공할 필요를 낳았다. 2003년 겨울을 뜨거웠던 계절로 기억하게 해준 서울대병원 간병인 노동자들의 투쟁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중심에 놓여있었다.
간호사 등이 해야 할 의료 행위와 어머니 등이 해야 할(것으로 여겨지는)돌봄의 행위 그 중간의 빈 부분을 하루 24시간 노동에 일당 5만 원이라는 열악한 대우를 받으며 메우던 간병인. 노동자로 취급되지도 못하였던 그녀들이 세상에 목소리를 내게 된 계기는 서울대병원 간병인 무료소개소가 폐지됨에 따른 고용불안과 생존의 위협이었다. 서울대병원은 ‘간병’이라는 영역의 시장화에 따른 사용자 책임을 덜기 위해 병원이 직접 운영하던 소개소를 유료업체로 넘겼고, 이 과정에서 간병인 여성노동자들이 저항하게 되면서 우리는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깊이를 더해나가는 소중한 계기를 얻게 되었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간병인 문제 해결 및 공공병원으로서 서울대병원 제자리찾기 공동대책위원회’를 함께 꾸리고 간병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지지함과 동시에 간병제도의 사회화,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실천을 전개하였다. 이때 학생의 신분으로 투쟁에 동참했던 나는 처절하게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당위적으로 연대하는 것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노동자로 병원 안에서 24시간 일하는 ‘간병인’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알려냄으로써 그녀들의 노동의 의미를 재평가하고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켜나가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대개의 공대위가 현안이 해결되면 해소되기 마련이었던데 반해, 간병인 공대위는 간병노동자들이 치열한 싸움 끝에 비로소 2004년 봄에 ‘노동조합이 운영하는 무료소개소’를 통해 서울대병원으로 복귀하게 되는 성과를 이룬 후에도 해소하지 않고 간병노조를 정책적, 조직적으로 지원한다. 또 2005년 노무현정권이 저출산 고령화 대책 하에서 제출한 노인수발보험제도(현재의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본격시행을 앞두게 되자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노무현 정부가 “이제는 국가가 효도를 하겠습니다”라면서 야심차게 추진한 ‘노인수발보험제도’는 노인을 비롯한 요양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돌봄의 영역을 본격적으로 시장화하겠다는 정부와 자본의 전략의 발로라는 점에서, 이제까지 우리가 요구해왔던 간병제도의 사회화와는 정반대의 성질을 지닌 것이었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 가족과 여성이 더 이상 책임지기 어려워진 재생산의 영역을 시장화함으로써 가족을 기능적으로 보완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기에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 담론에 민주노총을 비롯한 운동진영조차 이데올로기적으로 포섭되어있던 상황에서 이러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간병인 공대위 참여단위를 중심으로 그나마 공유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기간 간병투쟁에 밀착 지원하면서 ‘재생산 영역의 사회화’라는 문제의식을 주체들과 나누려했던 사회진보연대(여성위원회)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사회운동의 첫 발을 내딛고 있던 나에게 있어, 우리의 선도적 문제제기가 오랜 기간의 헌신을 매개로 하여 일련의 실천으로 발전해나갔던 이시기의 경험은 운동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있다.

문제제기를 넘어서 한판 싸움을 벌이자: 재생산의 사회화인가 재생산의 시장화인가

‘노인수발보험제도’이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로 이름이 고쳐져 추진되어나가는 것과 동시에 2006년부터는 가족을 둘러싼 지배계급의 전략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가 함께 추진한 ‘보호자 없는 병동’시범사업과,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충이라는 장밋빛 슬로건이 동반된 ‘사회서비스바우처 사업’등이 그것이다.
‘보호자 없는 병동’사업은 몇 개의 병원사업장을 모델로 가족간병이 필요 없는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얼핏 보면 간병제도화가 비로소 실현되어 여성들이 가족간병의 부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도의 수혜자는 누구이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는 누구인지를 따져보면 제도의 모순적 면모가 선명히 드러난다. 최저임금에 준하는 열악한 임금, 혼자서 여러 명의 환자를 돌봐야 하는 높은 노동 강도, 파견노동자라는 불안정한 고용조건 하에서 간병인 노동자들이 신음하는 가운데 몇몇 여성들만이 가족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가족제도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을까?
‘사회서비스 바우처 사업’은 보육, 간병, 방과 후 활동, 장애인 활동보조인 서비스, 노인 돌봄 등 그동안 가족이 책임져 왔던 재생산 영역을 사회서비스로 가시화하고 바우처 방식으로 사업화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표적으로 노인돌보미, 장애인활동보조인, 산모·신생아돌보미라는 노동자군이 양산되었다.
정부에서는 이를 두고 취약계층과 중고령 여성에게 적합한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이라고 선전하였지만, 직업여성의 가사노동에의 해방과 기존의 전업주부들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꾀한다는 정부의 사업 목적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듯이, 이는 재생산의 위기를 다시금 여성노동력의 유연한 활용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전략에 다름 아니었다.
이에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하여 간병제도의 사회화 등을 요구해왔던 운동단위들이 결집하여 ‘사회서비스 공대위’을 꾸려서 이동 시간조차 노동시간으로 보장받지 못한 채 이 집, 저 집을 전전해야하는 시간제 시급제의 불안정한 일자리의 양산에 불과한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사업의 기만을 밝혀내는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노동자 민중의 재생산과정을 노동시장의 유연한 활용을 극대화하는 전략 내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시도에 맞서 재생산의 사회화의 문제의식을 확대해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누구와 함께 싸울 것인가? 재생산 영역의 사회화냐, 아니면 시장화냐? ‘가족’을 둘러싼 상반된 전략이 부딪치는 가운데 이제는 문제의식을 선도적으로 제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가족’을 둘러싼 저들의 전략과 우리의 전략이 경합을 벌이며 한판 싸움을 치뤄야 하는 때임은 분명한데, 그 싸움에 나설 해당주체들은 여전히도 문건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에 사회서비스 공대위는 지역사업을 통해 해당 주체들과 직접 만남을 시도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애초 느슨한 공대위의 틀거리로 조직화사업을 목표했다는 것 자체가 한계적이었을 뿐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분당이라는 악조건과 맞물리면서 지역운동 단위들이 합력을 내지 못하게 된 연유 등으로 인해 사회서비스 공대위의 시도는 아쉽게도 문제의식의 제기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요양보호사와 함께 한 1년

사회서비스 공대위의 지역사업을 마지막으로 나는 2008년이 저물어갈 무렵 요양보호사와 동고동락할 수 있는 곳으로 활동의 공간을 옮기게 되었다. 요양보호사는 2008년 7월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이 시행됨에 따라 생겨난 직군으로 50-60대 여성노동자들이 주를 이루며 간병인으로 일을 했던 경력을 가진 이들이 상당수를 점한다.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이 생긴다는 소식에 간병인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이제야 우리도 족보를 찾는다며 (간병인 노동자들은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를 스스로 ‘족보 없는 노동자’라고 불렀다.)
굉장히 기뻐했다. 열악한 간병인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국가가 인정한 자격증을 가지고 요양기관의 직접고용 하에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으며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신분상승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십만 원의 학원비와 240시간 교육을 이수하는 동안 벌이를 포기하는 것까지 감수하며 앞 다투어 요양보호사 학원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요양보호사 교육기관들이 장삿속을 차릴 요량으로 수요를 아랑곳하지 않고 요양보호사를 배출함에 따라 제도 시행 1년 만에 애초 필요인력의 열배가 넘는 50만 명의 요양보호사가 양산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지역에서는 서비스를 받는 노인의 수보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지닌 인구가 더 많게 되어버린 웃지 못할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다. “‘요양보호사’과 같은 사회서비스 일자리야말로 경기한파에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중고령 여성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라는 달콤한 선전으로 수많은 이들을 유료학원으로 발걸음하게 만들고서는, 정작 자격을 취득하고서도 취업이 막막한 절망적인 상태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장기요양기관들의 출혈적인 경쟁 속에서 요양보호사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불안정한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말이 좋아 요양보호사지 이건 일용직에 불과하다는 한탄이 도처에서 들려온다. 식모살이를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통곡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기본적인 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낮은 임금, 언제 일이 없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노동조건, 인력기준이 턱없이 낮음으로 인한 높은 노동 강도,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을 감내하며 비인격적 대우를 감수해야 하는 불안정한 위치, 근로기준법 및 최저임금법이 무시되고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환경, 노인복지는 뒷전이고 영리추구가 목적이 된 본말전도의 요양현장 속에서 겪게 되는 양심의 고통…. 노인요양기관 설립 및 운영에 있어서 민간기업의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함으로써 시장을 형성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야심찬 계획 속에서 만들어진 요양보호사 일자리는 결국 요양보호사에 대한 착취와 노인들에 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실망한 이들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서도 다시금 병원간병으로 발걸음을 돌리기도 하고(공식노동에서 비공식노동으로의 역행이라니, 이 얼마나 부실한 제도인지!), 큰 용기를 내어 어렵사리 딴 자격증을 그저 장롱 속에 넣어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양현장을 개척해나가면서 부당한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요양제도 개선의 주역을 자처하는 이들이 있다. 어쨌거나 제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요양보호사이니만큼,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노인요양의 시장화가 가져온 폐해가 사회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시점이다.

“언제나 일손이 모자라서 전전긍긍하고, 어르신들을 충분히 돌봐드리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인력이 부족하니 어르신들이 그저 얌전히 누워계시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어르신들이 최대한 잘 움직이시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요양보호사의 일일 텐데…. 안타까울 뿐입니다.”
2009.3.28, <전국요양보호사대회-요양보호사 이야기> 중에서.

가끔 “요양보호사 일을 하게 되니 뭐가 좋으세요?”라고 몇몇 친한 요양보호사분들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이토록 열악한 조건에서 꿋꿋이 일을 해나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 동력이 무엇일지 궁금하기도 해서다. 돌아오는 답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 나이에 내 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소중하다”, “이제는 가족이나 자식들이 노인들을 뒷바라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아니냐, 누구라도 그 일을 대신 하긴 해야 하는데 우리 같은 직업이 생겨 얼마나 다행이냐”, “나도 나이가 들면 이 제도의 혜택을 받아야 할 텐데 그때 고생하지 않으려면 제도개선이 하루라도 빨리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 일을 쉽게 관둘 수가 없다.”
요양보호사, 아직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들이지만 이들의 절실함과 현명함, 그리고 강인함이 존재하는 한 희망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이들이 가족의 기능을 보완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첨병의 역할에 그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신자유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재생산 영역의 사회화, 즉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이라는 사실을 모순의 중심에서 알려나가는 주체로 거듭나게 될 지는 아직 남은 과제다. 이 과제를 잘 풀어나가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그동안 가족이 담당해왔던 기능이 여성노동력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전되는 것이 지금의 암울한 시대를 헤쳐나갈 해법이 결코 아니라, 가족을 구성하지 않고서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가 우리에게 보장되는 것만이 진정한 대안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사실이 요양보호사를 비롯한 투쟁의 주체들과 공유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그/녀들이 현재의 열악한 조건에서 자신의 발로 현장에서 설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과 관심과 연대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도 꿈을 꾸기 위해, 여전히도 살아가기 위해

고작 1년인데도 퍽이나 지쳐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여전히도 꿈을 꾸기 위해, 그리고 여전히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생각이 많아지는 요즈음이다. 우선적으로 외롭지 않아야 하겠다. 불가능에 가까운 꿈을 꾼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괴로움과 좌절감은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로 해소될 수 있기에…. 그동안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와 함께 꿔온 꿈을 더욱더 많은 이들과 함께 꾸는 꿈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은 말에 여전히도 가슴이 뜨거울 수 있는 나, 그리고 우리를 계속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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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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