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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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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운동과 여성④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최윤정 | 정책위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문제를 이론화하고 그것을 운동을 통해 현실화하려 했던 탁월한 여성이었다. 엘러너 마르크스는 영국 노동자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에이블링과의 관계에서 고통을 받고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그녀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으로 자신의 길을 충분히 펴지 못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훌륭한 이론가이자 혁명가로서 사회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지만 여성으로서 많은 심적 고통을 겪었다. 그녀 역시 엘러너처럼 고통을 혼자 짊어지고 가려고 했고 그것을 개인이 극복할 문제로 보았다. 클라라 체트킨은 산업에서 여성의 역할과 노동조건을 강조하고 여성노동자 조직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녀는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가족, 재생산노동 등 여성에 고유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여성 혁명가들이 겼었던 갈등과 어려움은 콜론타이에 의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새로운 이론으로 제시된다. 콜론타이는 앞선 여성혁명가들이 여성으로서의 고통에 굴복하거나 여성으로서의 문제를 개인적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그것을 이론화, 체계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녀는 여성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하고 여성문제의 해결을 혁명의 과제로 제기했다. 이런 면에서 콜론타이는 탁월했다. 물론 콜론타이가 그런 문제의식을 제기한 데는 당시 소비에트라는 새로운 사회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진행할 수 있었던, 혁명이라는 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한 측면도 있었다.

혁명 전야, 주체적 여성으로 성장

꼬마 소녀, 슈라(1872~1888)
슈라(콜론타이의 아명)는 1872년 4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도몬토비치는 핀란드 상인의 딸이었다. 그녀는 첫 남편 므라빈스키와 헤어지고 육군 대령인 미하일 도몬토비치와 살았는데 이혼하기도 전에 도몬토비치의 딸을 낳았다. 도몬토비치는 우크라이나의 오랜 지주 가문의 귀족출신이었으며 이후에는 장군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덕분에 슈라는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영어와 불어, 독일어를 깨칠 수 있었으며 교양 있는 여성들을 존경하도록 배웠다.
슈라는 아버지로부터 정의감을 배웠고 어머니로부터는 저항감을 배웠다. 그녀의 아버지가 불가리아 정당에서 자유주의파에 가담한 것으로 인해 정치적 탄압을 받을 때 슈라는 분노했다. 한번은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손님이 집에 왔을 때 담배 갑을 건네주길 거부하여 부모님을 당황하게 한 일도 있었다. 슈라는 일반사회규범을 따르지 않는 아이였고 그녀는 이를 어린 나이에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남들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엄마 속을 많이 썩였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구하고 전제군주를 쫓아내고 민중들을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영웅’이 되는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 슈라의 스승은 언니 제니아의 가정교사였던 마리아 스트라호바였다. 그녀는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진 독립적인 여성의 전형으로 스트라호바는 활동적인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슈라를 여성 혁명가들의 세계에 좀 더 가까이 가게 해 주었다. 1881년 소피아 페롭스카야라는 여성이 지도한 테러리스트 그룹이 짜르를 암살한 사건은 콜론타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콜론타이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국왕을 시해한 여성에게 동정심을 느낄 뿐이었지만 슈라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도 급진적 여성들의 진실된 군대가 전제군정을 끌어내리기 위해 남성동지들과 함께 투쟁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블라디미르와의 우울한 관계(1888~1896)
1888년 슈라는 젊은 여성 알렉산드라가 되었고 마리아 스트라호바의 교육을 받은 후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사랑과 교육은 알렉산드라의 관심 영역에서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첫사랑은 그녀가 흠모하던 사람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을 함으로써 끝났다. 그녀는 페미니스트들의 요구에 의해 1878년 정부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마련한 여성을 위한 대학수준의 교육 프로그램을 받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곳의 급진적 분위기를 염려하여 그녀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는 대신 사립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폴란드의 정치적 망명가의 아들이었던 그녀의 먼 친척 블라디미르 콜론타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슈라의 어머니는 자신의 비전통적인 행적에도 불구하고 슈라가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슈라의 아버지는 블라디미르가 독서나 진지한 대화에 관심이 없고 슈라와 정신적 친밀감이 없다는 점에서 결혼에 반대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서둘러 알렉산드라를 유럽으로 보냈고 그곳에서 그녀는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게 된다.
슈라는 결혼을 허락해주지 않으면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해 결국 부모의 동의를 얻었고 러시아로 돌아와 1893년 블라디미르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 생활에 만족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정치활동에 대한 책임과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은 엔지니어였던 그녀의 남편의 이해와 직업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녀는 후에 “남편을 사랑했지만 주부와 아내로서의 행복한 생활이 나에겐 하나의 새장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했다.
슈라는 가장 친한 친구 조야 샤두르스카야의 독립적인 생활에 자극을 받았다. 당시 조야는 1893년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로 와서 이들 신혼부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슈라는 그녀의 자유와 그녀 주위의 연주회와 강연과 학생들의 모임을 부러워했다. 슈라는 곧 남편과 단둘이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을 그만두고 조야와 함께 독서하고 토론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러시아의 ‘두꺼운 잡지들’ 속에서 1890년대 러시아 인텔리겐차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을 읽고 토론하였다. 블라디미르가 공학도들과 함께 수학 문제를 풀 때면 조야와 슈라는 그들을 시사적인 사회, 경제 문제들에 대한 토론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곧잘 웃어 넘겨 버리거나 “조용히, 조용히.당신은 아이를 재워야 하오”라는 말로 토론을 망쳤다.
슈라는 사랑받기를 원했지만 자신에 대한 성취욕구 또한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그녀의 관심사를 공유해보려는 시도는 실망스러운 결과로 끝났다. 블라디미르는 이미 그녀에게 방해스러운 존재였다. 조야는 콜론타이에게 가정 일을 유모에게 맡기고 글을 쓰라고 충고해주었지만 문을 잠그고 일을 시작해도 어린 아이가 넘어져서 울고 엄마를 찾을 때 달려 나와 무슨 일인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어 도무지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녀는 단편 소설을 썼는데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던 여인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남편을 버리고 애인과 결합한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남자들의 자유와 대조되는 여성들의 이중적 규범을 타파하려는 콜론타이의 최초의 시도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 소설을 잡지사에 보냈을 때 잡지사에서는 문학이 아닌 선전문을 써 보냈다는 평과 함께 반려해 보냈다. 블라디미르는 편집자가 아마도 중년 여인보다는 젊고 예쁜 여주인공을 좋아하는 모양이라며 아내를 놀려댔다. 잡지사의 거절에 상처받고, 남편의 경박한 농담에 화가 난 콜론타이는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마르크스주의에 입문(1896~1898)
아내와 어머니를 넘어선 자아를 찾고 있던 콜론타이는 노동계급의 절박한 경제적 상황과 접촉할 기회를 갖게 된다. 1896년 남편과 그의 동료, 그리고 조야와 함께 나르바를 여행했을 때 12,000명의 남녀직공을 고용하고 있는 거대한 직물 공장 통풍 시설을 개선하는 기술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공장에는 기혼과 미혼 노동자들의 침대가 뒤섞여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그 침대 사이사이에 많은 어린아이들이 울거나 놀고 있었다. 콜론타이는 그녀의 아들 또래의 한 조그마한 아이에게 관심이 쏠렸는데 그 아이는 조용히 누워 죽어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콜론타이가 그 아이들을 돌보는 듯한 늙은 여자에게 아이가 죽어있다고 하자 늙은 여자는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누군가가 그 아이를 치웠다. 바라크에서의 전율, 그날의 광경과 악취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후에 콜론타이는 말한다. 이 일로 그녀는 통풍을 개선하기 위해 기술자들이 계획을 세우는 일보다도 경제 체제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크론호름에서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콜론타이는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소설을 쓰는 대신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마리아 스트라호바는 콜론타이에게 의미있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그녀에게 노동자들의 야간학교에 교육자료를 공급하는 이동 박물관의 업무에 참여하도록 권했다. 여기에서 콜론타이는 베라 멘진스카야와 뤼드밀라 멘진스카야, 엘레나 스타소바와 같은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만났다. 어느 날 엘레나 스타소바가 콜론타이에게 어떤 모임에 참석해달라고 했을 때 콜론타이는 처음으로 비합법적인 회합을 접할 수 있으리라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그녀가 요구받은 것은 그녀가 부유한 사람들과 친분이 많다는 이유로 단순히 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콜론타이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진정으로 의미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엘레나 스타소바는 콜론타이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질 필요는 없으며 조직에 헌신하는 것만큼 유용한 것이 없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그녀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엘레나 스타소바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부르크 위원회의 창설 요원이었지만 그녀는 스스로에게 한계를 설정하고 그녀의 생애를 이차적이고 비이론적인 임무에 기꺼이 바쳤다. 반면에 콜론타이는 스스로에게 자기 한계를 허용할 수는 없었으며 탁월해지기를 갈망했다. 콜론타이는 이론적 인물, 생산적인 사상의 저술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취리히에서의 유학생활(1899~1905)
1899년 그녀는 취리히 대학에 가서 자신이 읽었던 책의 저자인 경제학자 하인리히 헤르크너에게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그곳에서는 남편과의 갈등에서 벗어나 학생으로서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러시아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많은 저작들을 읽을 수 있었다. 콜론타이의 아버지는 딸의 계획이 불만스러웠지만 재정적 지원과 감정적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어린 아들 미샤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콜론타이는 결코 취리히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콜론타이는 그녀의 자서전에서 페테르부르크를 떠난 기차에서 5살 난 아들의 조그맣고 따뜻한 손이 어른거리고, 자신을 떠나보낸 남편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매 역 마다 열차를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진정으로 탁월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면서 두 통의 편지를 썼다. 하나는 남편에게 그녀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왜 그녀가 가족을 떠나면서까지 노동계급과 여성의 권리를 위한 싸움 속으로 뛰어들게 됐는지 조야에게 밝히는 것이었다.
블라디미르 콜론타이는 아내가 결혼생활을 버리고 혁명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혼란스런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블라디미르는 그가 표현했듯, 아내가 ‘남자들의 세계’인 정치에 뛰어드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시각에서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전통적인 아내의 역할에 만족해야만 했던 것이다. 80세의 노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콜론타이는 블라디미르에게 입힌 고통을 상기하는 것은 언제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쓰고 있다. 콜론타이는 그녀의 모성애를 만족시키는 것과 ‘남자들의 세계’에서 ‘커다란 업적’을 성취해야 한다는, 두 가지의 양립될 수 없는 욕구의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중년에 “사랑, 결혼, 가족 등 모든 것이 부차적이고 순간적이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들에 대한 그녀의 헌신과 아들과 떨어져 있는 아픔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그녀는 또 미샤가 자기를 이해해 줄까를 걱정하며 우울해 하기도 했다. 콜론타이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는 운동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혁명과 여성운동에 뛰어들다

혁명가로 데뷔(1905)
1896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섬유노동자 4만 명이 하루 14~15시간 노동에 반대하는 파업을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된 ‘피의 일요일’까지 러시아 군대에 의해 무자비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수많은 파업이 발생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소비에트와 노동조합을 탄생시켰다.
콜론타이는 1905년의 전환점이 될 때까지 유럽과 러시아를 오가며 지냈다. 그녀는 카우츠키, 플레하노프,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에 이끌렸다. 그녀는 자유주의적 친구들과 이념적 그룹을 형성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네브스키 지역에서 노동자들에게 불법 사회주의 선전물을 배포했다. 1904년에 콜론타이는 빠르게 급진주의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콜론타이가 이후에 집중한 여성해방에 대한 관심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콜론타이는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독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한 서점에서 <공산주의자 선언>을 통해 마르크스를 발견했다. 이는 빠르게 그녀의 얕고 감정적이었던 인민주의를 대체했고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그녀는 많은 청년들이 그랬듯이 지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콜론타이가 혁명가로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짜르 니콜라스 2세에게 청원을 하려는 평화적인 수백 명의 노동자들을 향해 짜르 정부의 군대가 총살을 자행했던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이었다. 지역의 사회민주주의 위원회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콜론타이는 동궁을 향해 행진하는 데 참여했고 거기서 서늘한 장면을 목격했다. 이 경험은 그녀를 전업 혁명가로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선전물을 배포하고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연락책을 제공했으며 책자를 만들고 기금을 마련하고 위원회에서 회계를 담당하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불법 공장 모임에서 콜론타이는 민중지도자로 데뷔를 하게 된다. 그녀의 음악적이고 열정적인 목소리와 깔끔하게 손질한 외모는 산업지대 빈민가의 거친 프롤레타리아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여성운동에 첫걸음(1905)
당시 러시아에서 페미니즘이 태동된 지는 50년이 되었지만 대부분은 자선, 반성매매 활동, 교육을 위한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러시아 전국 규모의 여성운동 조직은 러시아여성상호자선회로 1895년 설립되었다. 이 조직은 러시아의 페미니스트들을 단합시키고자 했지만 명확하게 비정치적이었다. 그 와중에 여성투표권에 대한 요구로 두 개의 새로운 페미니스트 조직이 탄생했다. 여성평등을 위한 동맹(1905~08)과 여성진보당(1905~17)이었다. 이들은 모두 여성투표권의 쟁취를 목표로 했다. 그 중에서도 ‘여성평등을 위한 동맹’은 가장 전투적이었는데 이들은 노동자계급 여성에 대한 동정심이 있었고 개혁과 여성권리를 위한 “모든 여성”의 투쟁에 그들을 조직하길 원했다.
콜론타이가 페미니즘에 처음 발을 내딛게 된 것은 1905년 4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여성평등을 위한 동맹‘의 총회 개회식이었다. 1905년 혁명 초기 선거권 획득을 위해 결합한 모스크바의 전문직업 여성들과 지식층 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창설된 ‘동맹’은 사회주의자들처럼 급진적 사회개혁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고, 사회주의 대열에서 여성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콜론타이는 이런 부르주아 여성들의 활동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콜론타이는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비계급적인” 페미니즘에 반대하며 여성노동자들이 사회민주당에 가입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에 함께 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녀는 적은 수의 여성하인들, 여성숙련공, 여성섬유노동자 등에게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여성문제에 대해 교육을 함으로써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콜론타이는 여성문제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분석해내지 못했다. 그녀의 주요 입장은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이 ‘노동계급의 생활과는 관계없다는 점’에서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해방을 위해 그녀에게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완전한 여성 해방도 이룰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어거스트 베벨의 <사회주의와 여성>(1883)은 여성들이 불가피하게 생산활동에 참여하게 되고 경제적 자립을 하게 되는 과정과 사회주의 미래에서의 여성들의 밝은 전망을 묘사함으로써 그런 공백들을 채워주었다. 클라라 체트킨은 1889년 비사회주의적인, ‘모든 여성의’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여성노동자들을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으로 조직하여 자본주의 철폐를 향한 행진에 남성노동자들과 함께 할 것, 그리고 모성 보호와 같은 여성노동자의 문제들에 대해 선전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여성운동의 모호함을 제거하였다. 콜론타이는 1906년까지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 문헌들을 잘 알지 못했으므로 여성운동에서 그녀의 첫걸음은 시험적이고 임의적이었다.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과의 대결
1905년 혁명 이후, 1906~07년 동안 노동조합은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1907년 힘을 재집결한 정부의 재공세를 물리칠 만큼 세력이 공고하지 못했다. 1907~1911년 반동기 동안 활동가들은 클럽, 협동조합, 문화단체 등에서 활동하면서 노동조합이 부활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이 시기에 콜론타이는 1908년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를 썼고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과 대결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1908년 부르주아 여성들은 ‘전 러시아 여성대회’를 개최하는데 콜론타이는 이에 파견할 노동자 여성대표단을 구성할 것을 당에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내 남성혁명가들과 이견과 갈등을 유발되었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굽히지 않고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라는 팜플렛을 작성하고 대표단을 이끌고 대회에 참석했다. 노동자계급의 대표 1,000여 명이 모인 대회에서 수배 중이었던 콜론타이를 대신해 바르바라 볼코바는 콜론타이의 연설문을 읽었다.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에서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이 여성노동자들의 해방을 위해 싸울 수 없다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의 요구가 아무리 급진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들의 계급적 지위 때문에 여성해방에 필수적인 현재의 경제사회적인 구조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해 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해방론자들이 “현존하는 계급 사회의 틀 안에서 평등을 구하고”, “이미 존재하는 특권들에 도전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 싸운다”고 비판했다.
콜론타이의 비판은 당시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의 운동이 노동자 여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없었고 여성해방론이 자유주의와 결합함으로써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여성의제를 부차화시키는 정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여러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기초>는 여성운동으로서 초기 투표권 운동의 제한적 관점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유럽에서의 망명생활
콜론타이가 여성대회에 참여하여 여성해방론자들과 심각한 공방이 이어져 그녀의 소재가 경찰에 탐지되었다. 그녀는 구속되고 감옥에서 몇 년을 보내기보다 러시아를 떠나기로 했다. 그녀는 1908년에서 1914년까지 독일에서, 1914년부터 1917년까지는 스톡홀름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콜론타이는 유럽에서의 황폐하고 쓸쓸한 10년 간의 망명 기간 동안 공허함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콜론타이는 유럽에 있는 동안 중년의 (결혼한) 경제이론가인 P.P.마슬로브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후에 그녀가 회고하듯이 그것은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적 욕망과 활동가로서의 결의를 존중받고 관심을 받고 싶어했지만 마슬로브는 혼외의 성적인 모험을 원할 뿐이었다. 수번의 만남과 기차역에서의 쓰라린 이별 후에 콜론타이는 마슬로브와의 관계를 끝내고 당의 전업 정치선동가로 돌아가게 된다. 마슬로브는 가족과 아이들에게로 돌아간다.
이런 경험들과 성적관계에 대한 생각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썼던 여러 개의 글로 나타났다. 그녀는 정신분석에 관심있는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레테 마이젤-헤스의 글을 읽게 되었다. 콜론타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1) 결혼은 부부간의 불일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많은 경우 애정의 침식으로 끝난다. 2) 매춘은 더 심하다. 콜론타이는 “(매춘은) 사랑을 질식하게 한다. (매춘의) 에로스는 황금빛 날개를 더럽히게 될까 하는 두려움 속에 날아간다”고 썼다. 마지막으로 3) 대안적인 자유결합 또한 부적절했다. 왜냐면 그것은 대개 “위대한 사랑”이라는 형식을 띠었는데 그것은 파트너 모두의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특히 여성의 자존감을 훼손시키는 고통스럽고 소비적이며 비극적인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런 세가지 형식의 성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 여성들은 반대로 그녀들의 “사랑의 역할”을 통해 “사랑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성적 우정으로서, 서로를 유폐시키거나 소멸시키지 않으면서도 주의깊고 서로를 인지하며 서로에게 민감하고 세심한 관계였다. 그녀 스스로를 “신여성”이라고 부르며 그녀는 “감정보다는 자기절제, 복종과 정체불명의 인간성보다는 자유와 독립의 가치 인정, ‘사랑받는 이’의 고립된 성질에 몰두하고 골몰하기보다는 개인성을 인정하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녀는 “남성의 그림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되어야만 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국제사회주의가 붕괴되자 콜론타이는 멘셰비키 경향의 유보적 자세를 청산하고 1915년 여름, 레닌과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콜론타이는 볼셰비키로서 레닌의 반전 국제주의 슬로건을 생생한 호소로 바꾸어 곳곳에서 연설을 했고 그해 9월 미국으로 건너가 4개월 동안 4개 국어로 123회의 강연과 연설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볼셰비키로서 여성운동을 전개

볼셰비키 중앙위원으로 선출(1917)
1907년에서 1911년까지 노동자운동의 침체기가 지나고 1911년 다시 노동자 파업이 증가하기 시작하고 러시아 도시지역에서 다시금 폭발적인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는 혁명의 열기에 찬물이 끼얹었다. 1914년 세계대전 발발 이후 노동자계급은 전쟁이라는 비상사태에서 굴복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의 정체는 오래가지 않아 1915년 다시 파업의 물결이 일어났다. 1916년 초에는 전쟁중지와 같은 정치적 요구까지 나타났다. 1914년 전쟁 발발 후 페트로그라드는 국방장비의 3분의 2를 생산하는 러시아 군수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6년 말~1917년 초 임금은 상승했지만 작업조건은 열악해지고 노동강도는 강화되었으며 노동시간이 연장되었다. 이에 따라 산업재해가 증가했지만 노동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전선으로 보내지거나 체포 또는 해고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혁명은 예기치 않게 도래했다. 1917년 2월 23일(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에 여성들이 시위를 하면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3월 3일 니콜라이 2세는 이런 봉기의 물결에 밀려 퇴위에 동의했다. 8월 31일 전국 소비에트 헤게모니를 장악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을 대표하는 정부, 대영지의 몰수, 산업상의 노동자관리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볼셰비키 결의안을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그해 10월 25일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에서는 소비에트 전체 대의원의 60%가 볼셰비키였다. 이어 10월 26일 2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서 볼셰비키만으로 구성된 인민위원회가 결성되고 이로써 볼셰비키 정부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렇게 볼셰비키의 권력이 막강해지는 가운데 콜론타이는 1917년 8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전체 위원 중에서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선출되었고, 스탈린과 스베르들로프보다 더 많은 표를 받았다. 그것은 여러 정황적 요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혁명적 연설가로서의 탁월함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은 콜론타이를 재능 있는 선동가로서만 보지 않고, 비록 일시적이나마 이론가로서 인정을 했다. 이것은 10월 이론적 문서인 ‘최중요 임무’에 관한 당강령 초안 작업을 위한 위원회에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케메네프, 소콜니코프와 함께 콜론타이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중요 인물로 인정받은 후 콜론타이는 여성의 것으로 분류되는 일들을 회피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여성해방에 대한 신념을 지속적으로 실천해나갔다. “새로운 계층들을 분리시키고 후진 부분에서 새로운 주도권을 각성시켜라”라는 레닌의 지시는 콜론타이에게 여성들을 대상으로 작업하라는 명령으로 해석되었다. 콜론타이는 ‘프라우다’에 실은 최초의 논설 중 하나에서 임시정부의 남자들은 빵을 달라는 시위와 요구로써 2월 혁명을 점화시켰던 노동계급의 여성들에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했다.
콜론타이는 여성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위원회나 담당부서를 설치해야 한다고 1906년 이래로 수없이 제안했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계획은 진척되지 않았다. 레닌의 명령은 분리주의에 대한 혐의 때문인지 콜론타이의 계획과 조화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콜론타이는 끊임없이 병사부인과 여성노동자들을 흡수해나갔다. 1917년 봄, 콜론타이는 세탁부들의 파업을 지도하도록 파견되었다. 사설세탁소에서 극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던 세탁부들은 처음에는 본질적인 경제적인 요구를 했지만 콜론타이의 지도 아래 전쟁에 반대하고 소비에트를 지지하는 볼셰비키들의 결의를 찬성하게 되었다.
볼셰비키 여성운동은 콜론타이가 원했던 중앙화된 기구를 갖지는 못했지만 대신 잡지 ‘라보트니차(여성노동자)’를 복간했다. ‘라보트니차’의 편집인들은 실업과 같은 시사적인 문제들, 여성들을 괴롭게 하는 높은 생계비와 전쟁의 관계 등을 기재하여 반전과 국제주의의 깃발 아래 여성노동자들은 대중 시위를 벌이라고 호소했다. 집회는 ‘라보트니차’의 예상을 뛰어넘어 수천의 군중이 운집했다.
1917년 10월 초가 되어 볼셰비키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반대해왔던 당내 여성사업 전담 기관을 설치하는 데 동의했다. 그것은 1910년 이래 러시아 노동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이 보다 명백하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볼셰비키들은 공장노동자이거나 파업참가자라할지라도 ‘여자’는 동지로서 진지한 대우를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1917년의 역경 속에서 볼셰비키가 깨닫게 된 것은 노동계급여성을 조직하려는 ‘라보트니차’ 그룹, 특히 ‘콜론타이’의 잠재력이었다. 10월에 페트로그라드의 공장과 상점을 연결하는 조직망이 발전해 가는 가운데 ‘라보트니차’의 편집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의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콜론타이는 중앙위원회 앞에서 비당원 여성노동자들이 볼셰비키를 따라 결집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191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제1차 전 러시아 여성대회가 열렸고 여기에는 공장, 노동조합, 당 조직의 8만 명 여성을 대표하여 500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이 대회에서 콜론타이는 <가족과 공산주의>를 발표했다. 콜론타이는 러시아 여성들에게 1)혁명과 더불어 남성들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는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에 대해 마음을 열어야 하며, 2)이혼에 대한 권리로서 “새로운 자유”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또 3)낡은 가족의 유형은 그 종말을 보이고 있으며 4)가정생활이란 여성들을 종속적으로 묶어두며 집단적 사회의 발전을 방해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가장 핵심적이자 강제적인 사회적 제도다, 5)집단이 가족을 대체하게 될 것이며, 6)노동자들의 국가는 두 평등한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결합을 필요로 한다고 호소했다.
콜론타이는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의 사회화를 통해 여성의 출산과 생산적인 노동이 결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정부는 여성의 결혼 여부를 떠나 생계를 보장해야 하며 공동체 양육으로 여성들로 하여금 출산의 부담에서 벗어나 모성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성보호소와 탁아소가 보장된다면 여성들은 더 이상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또한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 동료애, 연대 상호부조, 집단생활에서의 헌신을 배워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협동을 습득하길 원했다. 그리고 여성들이 자기 자식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노동자 농민의 모든 자식에게도 어머니가 될 것을 촉구했다. 그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적토대인 가족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이는 모두 여성해방을 위한 여성의 사회적 노동과 경제적 독립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비에트연방공화국 후생성인민위원으로 임명
1917년 11~12월 총선거에서 볼셰비키는 병사 표의 42%와 노동자 표의 과반수를 얻었지만 제헌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1918년 1월 5일 제헌의회를 옹호하는 시위대에게 볼셰비키 병사들이 총격을 하는 암울한 분위기에서 제헌의회가 개최되었다. 볼셰비키가 제헌의회 측에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라고 했지만 제헌의회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이들은 제헌의회를 폐쇄해버린다. 이와 동시에 개최된 3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는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여기서 콜론타이는 공화국의 후생성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인민위원회는 임시정부와의 차별성을 보여주기 위해 1918년 1월 평화, 토지, 노동자 생산관리, 이혼 등에 관한 116개의 포고령을 발표한다.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이 경시했던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보호할 방책을 강구하였다. 1918년의 소비에트 가족헌장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지만 콜론타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일부분 반영하고 있다. 출산전후의 휴가를 보장하는 법률은 노동여성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규정 중의 하나였다. 가족헌장은 정부 부담의 아동보호 및 인민들이 무관심한 친지들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는 ‘질병과 노후에 대한 보험조항’, 그리고 입양의 금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입양 금지 조항은 입양아가 아동노동에 대한 농민들의 착취를 은폐하는 데 이용되는 것에 대한 우려와 고아들이 쁘띠 부르주아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아동보호소에서 보다 더 잘 양육될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녀가 부유한 알렉산더 네브스키 수도원을 퇴역군인들을 위한 병원으로 급격하게 탈바꿈하려고 하자 이에 수도승들은 그녀를 바빌론의 창녀라고 부르며 저항하였고 볼셰비키의 복지부가 만든 어린이 보호소를 불태웠다. 수병과 병사들이 인민위원회로 몰려와 그들이 전선에 나가있는 동안 그들의 사랑하는 딸들을 모성보호소에서 맡아달라고 콜론타이에게 애원했지만 보호소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시설이 부족했던 아동보호소는 곧 황량한 장소로 변했고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그런 한심한 상태에 맡기려 하지 않았다. 콜론타이는 혁명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원조가 전무한 상태 속에서 좌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혁명을 구하려는 필사적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18년 전시 공산주의 시기, 소비에트 여성정책을 주도

1918년 여름, 반볼셰비키 백군 대 볼셰비키 적군 사이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으로 인해 3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티푸스, 천연두, 이질 등의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내전은 경제를 황폐화시켰고 산업은 거의 정체상태에 빠졌다. 1917년 이후 기계마손, 공급차질, 노동강도 약화 등으로 인해 공업생산성이 하락하고 대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소비에트 여성정책 주도
콜론타이는 권력에 있어서는 아니지만 정치적 활동에 있어서는 내전 중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혁명정부에서 여성관련 정책들은 대부분 콜론타이에 의해 주도되었고 레닌은 이를 지지, 지원하는 형식이었다. 당시 콜론타이는 ‘여자 레닌’으로 불리며 소비에트 정부와 적극적 공조를 펼쳤다. 소비에트 정부는 가장 먼저 가족법을 새로운 소비에트 여성상에 맞도록 제정하였다. 1918년 정부는 교회의 결혼에 대한 영향력을 제거하고 여성이 자신의 성이나 남편의 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으며 사생아도 적자와 같은 법적 권리를 갖도록 하는 가족법을 공표했다. 이 법은 남편과 아내의 법적 신분이 동등함을 명시하고 부인이 획득한 재산에 대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또 이혼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혼 후에는 남편이 자녀 부양비를 아내에게 지급하도록 조치하였다. 1918년 10월 새로운 가족법에 근거하여 여성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8년 가족법 제정은 가족제도가 쇠퇴할 미래를 대비하는 콜론타이와 같은 급진론자들과 가족을 강화하려는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긴장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가족에 대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개별가족이 자식을 부양할 책임, 교육과 양육의 책임 등이 규정되었다. 1920년 낙태가 합법화 되지만 이데올로기적 이유가 아닌 기아와 내전 속 불가피한 비상조치였다. 볼셰비키정부의 정책은 그 미사여구와는 반대로 처음부터 콜론타이의 입장에 따라 핵가족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노텔의 건설과 활동(1919~1921)
콜론타이는 후생성과 제노텔을 통해 여성해방론을 현실화시키려고 했다. 1918년 12월 레닌의 적극적인 지지로 아르망, 콜론타이, 니꼴라예바가 주축이 되어 개최한 ‘제1차 전 러시아 여성노동자, 농민대회’에는 10월 혁명 이후 최초의 전국규모의 대회로 1천여 명의 노동자계급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 대회 이후 여성해방을 위한 전국적인 여성조직을 결성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고 기존 여성국을 중앙위원회 사무국 산하의 여성부로 전환시켜 소비에트 여성사업 전담기구인 제노텔로 승격시킨다.
제노텔은 콜론타이가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설립하기 원했던 것이었다. 여성문제를 전담하는 정치기구를 따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콜론타이를 배제하고 당 통제가 가능했던 아르망을 초대 국장으로 임명했다(1919-1920). 아르망이 있는 동안 제노텔은 콜론타이의 구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성의 문제를 주도적으로 제기하기보다는 백군과의 내전기간 동안 적국에서 선전선동 활동을 하거나 군인들에게 보낼 물자를 만들고 부상군을 치료하는 일 등에 여성인력을 동원하는 기구로 전락한 것이다.
제노텔이 여성노동자들을 동원하는 데 그치는 것에 불만이었던 콜론타이는 1920년 제노텔의 대표로 임명되면서 제노텔의 자율성 문제를 거론한다. 그녀는 제노텔이 전체 노동자 운동의 하나이며 서로 불가분의 것이라는 입장에서 자율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제노텔이 당 사업에 여성을 동원하기 위한 하부조직이 아님을 강조했다. 콜론타이의 이러한 입장은 제노텔 회의에서 채택되었으나 이는 당 지도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당내에서는 콜론타이의 견해를 경계했다.

노동자반대파(1920~1922)
1920년대 초반 트로츠키의 ‘노동군’ 계획은 동원해제하기로 되어있는 적군 병사들을 주요 공공작업장과 공업체에 배치하여 군사적 규율에 따라 노동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노조가 국가에 통합되어 국가의 관리를 받고 국가 계획에 따라 노동자를 훈련, 교육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선봉대의 임무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 3월 9차 당대회에서 이에 반대한 것이 ‘노동자 반대파’였고 이것이 노동자 반대파의 시초였다. 노동자 반대파는 노동 조직을 군사화함으로써 사회주의 체제의 선봉그룹을 만든다는 트로츠키의 구상을 권위주의적이라 비판했다.
콜론타이의 의견이 처음부터 노동자 반대파와 의견이 합치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1920~21년의 겨울 동안 그녀는 노동자 반대파가 자신의 항의를 전달할 수 있는 적합한 매개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 운동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도자가 되었다. 극도로 불안한 사회경제적인 상황에서 레닌은 권력의 문제보다 생산성의 문제를 더 절박하게 생각했다. 이에 콜론타이는 레닌이 생산력 향상에만 몰두한 나머지 새로운 체제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생산과정과 경영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레닌 동지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조합에 경영권을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노동자는 혁명을 수행했음에도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하였다. 노동자는 사소한 임무나 수행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고 비판했다.
1921년 3월 10일 제10차 당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크론슈타트 수병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중앙집권적인 당의 통제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강화되었다. 제10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는 노동자반대파의 입장을 ‘아나코-생디칼리즘’으로 매도했다. 이로써 콜론타이의 정치적 생명도 타격을 입게 된다. 콜론타이는 노동자 반대파 내에서 운동이론가로의 역할을 자임하며 단순히 노조의 문제가 아닌 소비에트 사회의 근본적인 병폐에 대해 말하며, 날카롭게 노조에 대한 분석을 했다. 당시 자율적 노동자조직이 붕괴되고 내전을 거치면서 생산성이 극도로 저하된 상황에서 노동자 반대파의 이상과 프로그램이 실행 가능했는가는 또 다른 문제지만 노동자 반대파와 콜론타이의 문제제기는 혁명정신의 원칙을 상기하는 것이었다.

제노텔의 위기와 해체(1921~1930)
내전을 겪으면서 생산성이 하락하고 대중들의 생활이 비참해짐에 따라 민중봉기가 점증했다. 이런 위기에 직면하여 당은 전시 공산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정책을 도입할 필요성을 느꼈다. 1921년 봄부터 레닌에 의해 진행된 ‘신경제정책’은 여성노동자의 대량실업사태를 초래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과 취업차별 철폐의 원칙이 무너지고 여성노동자 우선해고가 진행되었다. 제노텔의 대중기반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의 실업은 제노텔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노텔은 해고 범위 결정에 대표자 참석과 실업자에 대한 기술 교육 실시를 당에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콜론타이는 1920년 10월 제노텔 조직자 회의에서 ‘제노텔의 임무는 당의 과업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보다 어떤 영역이든 여성문제가 제기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주도권을 쥐고 할동하는 것’이라는 강령을 채택했다. 이는 당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당은 콜론타이를 제노텔에서 해임시키고 골루베바로 교체했다. 그러나 골루베바는 콜론타이와 의견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23년 12차 당 대회에서 골루베바와 콜론타이의 주장을 ‘여성의 일상생활을 개선한다는 기치 아래 남녀의 공통 과제인 계급투쟁으로부터 여성을 멀어지게 하는 여권론적인 일탈’로 규정하고 제노텔에 대한 모든 논의를 종결시키기로 한다. 결국 여성해방을 위한 콜론타이의 원대한 프로그램은 내전과 경제적 위기로 실현되지 못했다.

콜론타이의 ‘새로운 도덕’
콜론타이는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1918)에서 전통적 결혼관계를 논박하고 이 관계를 갖지 않고 살 수 있는 ‘새로운 여성’을 묘사하며 가족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완성시켰다. 그녀는 ‘성적인 면에서 유연성을 가진 덜 안정된 결혼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적합하다’라고 주장했다. 개인적인 부부나 가족의 연계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노동자의 연대는 약해질 것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족 보존을 위해 자본을 빼돌리는 자본가처럼 파업 중에 가족의 보존을 위해 일을 하는 파업파괴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전의 가족관계가 몰락하는 공동체 내에서는 두 명의 동등한 노동자간에 ‘애정과 동지의식’에 기초한 새롭고도 자유로운 결혼관계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도덕은 당내에서 격렬한 반대와 비난에 직면하였다. 콜론타이의 이론은 소련에서 공동체 생활의 기초를 제공하기보다는 정치적 방해물로 간주되었다. 콜론타이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계급과 국가, 종교의 소멸과 더불어 부르주아 가족제도 역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들은 가족을 대체하기보다는 노동자 어머니를 위한 가사노동의 사회적 대체를 구상하는 정도였다. 여성들에게 결혼의 문제가 그들의 종속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하는 출발점임을 인식하지 못한 레닌은 1918년 독일 노동자들이 결혼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다루려는 토론회를 구성했다는 말을 듣고 통탄한다. 한편 부하린은 <공산주의의 기초> 중 당 프로그램의 설명에서 종교, 국가, 은행, 금융제도는 소멸될 것이나 가족은 가사와 육아를 제외하고는 손상되지 않고 보전될 것이라 보았다. 볼셰비키는 핵가족의 붕괴를 바라지 않았다. 이는 결혼이 여성에게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한 콜론타이 견해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날개달린 에로스
콜론타이는 여전히 전통적인 생활을 하는 볼셰비키들을 놀랍게 하는 여성이었다. 46세의 콜론타이는 1917~1918년 29세의 혁명 해군인 파벨 디벤코와 혼인등록을 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했다. 콜론타이가 디벤코의 육체적 매력과 혁명적 에너지에 이끌렸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그와의 관계를 결혼을 통해 신성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의 설득으로 인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콜론타이의 이런 결혼에 불만이었다. 레닌은 한번은 “연애가 정치와 뒤섞이는 여성은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하였고 스탈린은 트로츠키에게 이 커플에 대해 거친 농담을 던지기도 하였다.
디벤코와의 결혼생활이 5년이 된 즈음 디벤코는 한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결국 그들의 결혼은 불행으로 끝났다. 콜론타이는 다시 한번 혁명적 정치와 혁명적 사랑을 결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달았다. 그 불행의 상처는 콜론타이로 하여금 애인인 동시에 공산주의자인 남성들과 여성들 사이의 감정, 의사소통, 그리고 신뢰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만약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면 왜 그들은 진정으로 동료가 되지 못하는가, 콜론타이는 반문하였다.
노동자 반대파 활동과 제노텔에서 당과 마찰을 빚는 활동으로 인해 쫓겨나고 디벤코와도 헤어짐으로써 1922년은 그녀의 정치생명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최저점이었다. 거칠고 고통스러운 나날들 속에서도 그녀는 페미니스트로서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혁명이후(1918~1923) 시기 동안 성에 관한 글을 썼는데 이 당시 글은 교육받지 못한 여성과 남성, 그리고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당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여성의 종속을 토대로 한 과거의 결혼관습을 거부하면서 두 평등한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결합으로서 새로운 소비에트적 남녀결합의 이상형으로서 “동지애적 결합”을 제시했다. 1860년대 이미 많은 인텔리겐차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녀는 비합법적 결합도 합법적 결합만큼이나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결혼제도 안이든 밖이든 태어난 아이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날개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 젊은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1923)에서 그녀는 성에 대해 통속적이고 생리적이며 “물질적인” 이론들에 반대하면서 친구이면서도 동지인 파트너에 대한 정제된 열정과 숙려를 전제로 하는 “날개달린 에로스”라는 그녀 고유의 개념을 발전시키게 된다. 그녀가 사랑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제시한 것은 사회주의에서 이전의 부르주아 계급의 사랑과 결혼을 대체할 노동자계급에 알맞은 사랑의 방식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었다.
<날개달린 에로스>에서 콜론타이는 사랑이 단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당대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구성되었음을 지적한다. “사랑은 절대 사랑하는 두 당사자들만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한 집단에 가치 있는 요소들을 결합하게 해준다. 역사적인 발전의 각각 단계들에서 사회는 어떤 조건 하에서 사랑이 ‘적합한지’(즉 주어진 사회의 집단적 이익에 부합하는지) 혹은 죄악시되는지(주어진 사회의 업무에 반하는지) 정의하는 규범들을 마련했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는 명확해진다.” 이를테면 봉건제 하에서 정신적 사랑과 영주의 부인이나 여왕에 대한 동경은 귀족 계급의 이해에 봉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가족의 기반은 부에 대한 공동소유보다 자본의 축적을 위한 것으로 부의 축적에 공통의 이해가 달려있는 가족 구성원들은 강력한 감정적, 심리적 유대로 묶이게 되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도덕은 에로스의 자유를 단호하게 제한하며 법적으로 혼인한 부부에게만 오직 협조적이다. 이들의 사랑은 서로에 대한 배타적 소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결혼 외부에서 남성은 성적 관계를 돈으로 사거나(성매매) 은밀한 간음을 통해 성욕을 해결하게 된다. 반면 여성의 성욕은 무시된다.
그러나 콜론타이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의 도덕은 어떤 공식화되어 있는 사랑의 형식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단지 성적 본능이 아니라 동지애에 대한 다면적인 경험을 추구한다. 이는 다음의 원리에 입각하는 것이다. 1)관계에 있어서의 평등(남성이기주의와 여성 개인에 대한 노예적 억압의 종식), 2)타인의 권리와 타인의 마음과 영혼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부르주아 문화에 의해 고무되는 소유 관념과 달리), 3)동지적 감성, 사랑하는 이의 내적 움직임을 이해하고 들을 수 있는 능력(부르주아 문화는 오로지 여성에게만 이를 요구한다).
그러나 레닌은 콜론타이의 ‘자유로운 남녀 결합’ 사상이 소비에트 젊은이들에게 도덕적 혼란을 야기한다고 비판했다. 콜론타이의 자유결합에 대한 레닌의 비판은 여성관의 차이에서 발생하는데 레닌은 여성을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자녀의 재생산과 교육을 담당하는 존재로 설정했다. 자녀를 공산주의 재원으로 양육하는 이러한 노동자-어머니 모델은 70년 간 소비에트 국가의 여성상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여성관에 의하면 소비에트 여성들은 남편과 자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제노텔에서 제거되고 노르웨이로 추방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레닌은 죽고 스탈린과의 평화적인 관계로 그녀는 쉴리아프니코프와 디벤코를 포함한 그녀의 동지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간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에 그녀는 스웨덴의 왕립의회에서 소비에트 연합을 대표하도록 임부를 부여받는다. 그녀는 첫 여성 외교관(스웨덴)으로서 마지막 활동을 장식했다. 그녀는 러시아로 돌아와서 은퇴생활을 하며 글을 쓰다가 1952년 모스코바에서 생을 다했다.

콜론타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콜론타이는 여성문제에 사회적 기초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사와 양육의 문제, 낙태, 성매매, 남성에 대한 경제적, 심리적 의존 등 여성에게 고유한 여러 문제들이 사회경제적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여성이 2차 노동력으로 착취되는 문제, 재생산노동을 위해 착취되는 문제들이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를 이룬다. 콜론타이는 여성문제의 사회적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그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갖는 이해는 부르주아 여성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자본주의가 철폐되면 자동적으로 여성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성의 문제를 사회경제적 문제로 환원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여성을 억압하는 가족제도가 변혁되지 않고는 여성이 자유로워질 수 없으며, 새로운 사회는 그런 변화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가족을 대체하는 대안적인 관계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것이 기존 가족의 근간을 이루는 배타적 관계, 결혼관계 내에서만 긍정되는 관계가 아닌 공동체적인 동지애적 사랑이다.
콜론타이에게 노동력 착취의 문제와 가족, 사랑의 문제, 이 두 가지 측면이 콜론타이의 사상의 근거가 된다. 첫 번째 측면에서 여성이 가족에서 불평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여성이 감정적으로 남성에 의존하게 되는 문제는 일차적으로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는 존재였고 이로 인해 여성은 공적인 일을 하더라도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콜론타이는 경제적으로 독립적이며 감정적으로도 남성에 의존하지 않는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신여성’이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그런데 신여성 모델이 가능하려면 가사, 육아가 사회화되어야 했다. 여성 개인, 혹은 개별 가족이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시스템이 필요했고 콜론타이는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분투했다.
두 번째 측면에서 콜론타이는 끊임없이 노동자 대중들에게 가족의 약화와 새로운 관계가 필요함을 호소했다. 콜론타이가 말했던 육아의 사회화는 단지 공공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는 것을 넘어 여성들이 자식에 대한 배타적 사랑을 넘어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공동체의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즉 자식에 대한 소유 관념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부르주아 가족제도 안에서 형성되는 사랑의 개념을 깰 것을 요구한다.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적 조건은 여성해방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개념화한 것이 기존의 서로에 대한 소유 관념에 얽혀 있던 ‘날개 없는 에로스’를 버리고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 간의 동지애적 사랑을 추구하는 ‘날개달린 에로스’였다. 그것은 여성의 역할이 남성을 보조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으며 독립적인 운동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공동체적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여성과 남성 모두의 변화를 요구한다. 유념할 점은 콜론타이가 제시한 동지애적 사랑이 ‘혁명의 주체로서 노동자들이 추구해야 할 사랑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동지애적 사랑이 노동자들의 주체화 과정과 결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날개달린 에로스‘를 노동자운동의 관점과 유리시켜 사고하는 것은 콜론타이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그녀가 제안한 것은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와 문화적 변화의 동시적 진행이었다. 또 그녀의 사상에서 여성 고유의 문제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문제와 분리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여성권과 노동권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여성문제를 제기하고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결합하려 했던 그녀의 관점은 탁월한 것이었다. 참정권 운동을 위시로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이 노동자 여성들의 이해에 복무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며 노동자운동 내에서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여성들을 아래로부터 조직함으로써 여성문제를 알려내려 했던 그녀의 노력은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이 처한 어려운 현실에서 감정적 늪에 빠지지 않고 그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고민하려 했던 그녀의 노력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는 단순히 여성 스스로 ‘이성적이 되자’거나 ‘감정을 억제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이 운동의 한 주체로 살면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들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요인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바꿔나가기 위한 집단의 실천을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콜론타이는 아들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개인적 감정 문제로 축소하지 않고 그러한 문제의 사회적 맥락을 분석하여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토대를 만들고자 했다. 돌봄 노동의 사회화를 혁명의 과제로 제기하고 새로운 사랑의 형태, 방식을 제안한 것이 그런 것들이다. 그녀의 사상을 현재적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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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이론/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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