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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9-10.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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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로 뭉치면 승리할 수 있다"

40년 만의 민주노조 전환, 나대진 삼화고속지회장 인터뷰

나대진 | 삼화고속지회장
나대진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민주버스본부 삼화고속지회 지회장
인터뷰어: 한재영 | 인천지부 집행위원
사진: 한종현 | 인천지부 회원

2011년 5월 18일 삼화고속지회는 임시대의원대회를 통해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조직전환을 결의했다. 600여 명의 조합원들이 10년이 넘는 노조민주화투쟁을 통해 어용노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롭게 민주노조를 건설한 것이다.
나대진 지회장은 이번 인터뷰를 통해 민주노조 운동이 어렵고 힘들수록 원칙으로 돌아가야 함을 보여주었다. 본인은 햇병아리 지회장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12년간의 노조민주화투쟁을 바탕으로 자본의 탄압에 맞선 현장활동, 지역운동과 민주노조운동의 발전 방향, 자본과 조합원을 대하는 지도부의 자세 등 노동자운동의 과제들에 대해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삼화고속, 회사와 노조 소개

사회운동: 삼화고속은 인천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월간 사회운동』을 구독하는 다른 지역 분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간단하게 삼화고속 회사 현황에 대해서 소개 부탁드린다.

나대진 삼화고속지회장(이하 나대진): 삼화고속은 1966년에 설립되어 45년이 된 회사이다. 삼화고속은 고속버스와 시외버스 노선에 150여 대의 버스와 150여 명의 조합원이 있고, 경기광역노선 2개, 인천광역버스 20개 노선 250여 대의 버스와 450여 명의 조합원이 일하고 있다. 인천과 서울을 잇는 광역버스 노선의 78%를 삼화고속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화고속 노동조합은 1967년도에 설립되어서 45년 역사를 갖고 있는 노조이다.

사회운동: 다른 무엇보다 지난 10년간 임금이 동결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난 10년간 임금 및 노동조건에 대해서 설명 부탁드린다.

나대진: 현 집행부에서 10년 동안 임금이 동결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회사 측에서 시급을 올리는 대신 상여금을 삭감하는 방법으로 시급인상분을 상쇄시켰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본급을 4% 정도 약간 올리고 심야시간 상여금 산출수당을 300%에서 200%로 삭감하는 방식이었다.
광역버스의 경우 새벽 첫차 5시부터 시작해서 심야근무까지 마치면 새벽 평균 3시 30분쯤 끝난다. 격일제로 하루 20시간씩 일을 한다. 삼화고속의 경우 노사간 합의한 소정근로시간이 5시부터 24시까지(19시간)인데 사측은 편법으로 근로기준법에도 없는 심야수당 1만 원을 지급하면서 평균 2시간 일을 더 시킨 것이다.
조합원들은 새벽 평균 2시에 끝나고 집에 가면 3시다. 거기다 맞벌이 부부가 많다. 그러면 이튿날 10시쯤 일어나서 빨래도 하고, 아이들과 아내가 밥 먹은 거 설거지하면 12시쯤 된다. 잠깐 개인 일도 보고, 모여서 회의하고 그러면 4-5시까지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 집에 가서 저녁하고, 7-8시에 자야 다음 날 3-4시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5시까지 나오려면 집에서 최소한 4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영업소 가까이에 사는 직원에게도 정말 열악한 상황이다.
현재 삼화고속 노동자들은 인천 시내버스 노동자보다 근무일수 근무시간도 더 많고 월급은 58여 만 원 정도가 적은 상황이다. 이는 10년 전과 역전된 상황이다. 보통 1년에 평균 100명 정도가 이직한다.

사회운동: 지난 10년 동안 열악한 근무조건을 강요해온 사측과 어용집행부의 탄압이 굉장히 심했을 것 같다. 이들은 어떻게 조합원들의 불만을 관리하고 탄압했나?

나대진: 조합원들이 부성운수를 비롯해 인천지역 민주노총 버스사업장의 근로조건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12년 동안 4번의 선거를 치를 때마다 어용세력은 ‘민주노총으로의 조직전환’과 ‘현실적인 근로조건 개선’을 늘 머리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당선이 되고 나면 사측과 결탁, 노무2과로 전락해서 늘 조합원들을 앞장서서 탄압해왔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근로조건 악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에 저항하는 조합원들은 탄압했다. 예를 들면 연수동이 집이면 반대편인 마전으로 출근을 시키며 불이익을 줬다. 출근 40분 전에 일어나 준비하면 될 것을 1시간 반 전에 일어나야 되고, 출퇴근 비용의 경우 6만 원 정도면 한 달 왕복 기름값이 되는데 25~35만 원 정도 기름값이 들게 만들었다. 숨도 못 쉬게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조합원들은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워 울며 겨자 먹기로 10년 넘게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주노조 건설투쟁과 교섭

사회운동: 불만이 많더라도 10년의 침묵을 깨고 새롭게 민주노조를 건설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해왔던 노력들, 조직전환의 결정적인 원동력, 그 과정에서 있었던 사측의 탄압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나대진: 우리는 사측과 어용노조가 결탁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꾸준히 홍보해왔다. 현재 통상임금 소송이 진행 중에 있고, 주휴일가산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것도 소송을 하고 있다. 또 최저임금 위반한 것을 노동청에 고소해서 111명이 받아낸 적도 있다. 그리고 회사와 결탁한 어용노조의 행태를 꾸준히 비판해왔다. 똑같이 사고를 내도 어용노조의 간부조합원은 그냥 넘어가고, 민주노조 활동가는 승무정지 두 달, 심하면 해고하는 등 차별이 많았다.
꾸준히 회사와 노동조합을 상대로 홀로 투쟁하던 조합원이 2006년 노동조합으로부터의 징계를 계기로 뜻있는 조합원 9명이 함께 뭉쳤고, 여명회라는 친목단체로 시작해서 선거 때는 40명까지 회원이 늘어났다. 회원 중에 사측과 노동조합을 비판하다가 노동조합의 제명징계와 회사로부터 승무정지나 해고를 당한 조합원도 있었다.
나 또한 이번 선거에 나서면서 민주노조로 조직 변경해서 인간답게 살 수 있고, 노동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노조가 곧게 설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선의 원동력은 꾸준한 활동을 보아온 조합원들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2011년 3월 1일부터 현 집행부가 임기를 시작했고, 5월 18일에 조직형태 변경을 했다. 사측은 일부대의원 개개인들을 불러 회유했다. 하지만 대의원들은 민주노총으로의 조직전환 의지가 강했다. 대의원들 중에는 노조민주화 활동을 해왔던 분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회사 눈 밖에 날까 봐 선전물 돌릴 때 만 원, 2만 원을 주기도 하고 인쇄비에 보태라고 통장으로 부쳐줬던 사람들도 있었다.

사회운동: 파업집회에서 지켜본 조합원들의 분노가 10년의 설움이 폭발하듯 강력했고, 사측에서 민주노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업투쟁은 불가피했다고 본다. 하지만 공공성이 강한 버스의 특징과 10년간 지속된 회사의 탄압 때문에 파업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파업을 조직할 때 조합원들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그리고 어떻게 파업을 준비해 오셨는지 궁금하다.

나대진: 조합 선거 공약이 조직형태 변경을 통한 민주노조 건설이었지만, 대의원대회에서 결의할 때까지도 조합원들이 긴가민가했다. 실제 조직형태가 변경되고 나니까 그때부터 조합원이 믿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이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한다’는 사측의 악선전에도 현 집행부가 파업 찬반투표 했는데 85.3%의 높은 찬성률이 나왔다. 그래도 ‘설마 파업까지 가겠느냐’는 의견이 간부들과 일부 조합원들 빼놓고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간부들이 선봉에서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집행부 투쟁행동을 보고 조합원이 파업투쟁에 많이 동참했다.

사회운동: 쟁의행위에 돌입한 후 회사 측의 방해, 보수언론의 공격 등 여러 장애물들이 나타났을 텐데 부분·전면 파업과 준법투쟁은 물리적인 측면에서나, 여론적인 측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투쟁들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나대진: 노조는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전 기자회견을 통해 시민들에게 파업 일정을 알렸다. 그리고 6월 25,26일 시한부 파업에 들어갔다. 노조는 그동안 임금교섭요구를 11번이나 했으나 사측은 단 한 차례도 협상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시민들에게 많이 홍보해왔다. 시민들이나 언론들도 사측에 정당한 임금교섭을 요구하며 이틀 시한부 파업을 하고 근무에 복귀하니까 노조를 나쁘게 보지 않은 것이다.
쟁의행의 찬반투표에서 찬성률이 85.3%가 나왔는데도 노동조합이 40년 만의 첫 파업이어서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걱정은 개인적인 우려였고 조합원들의 호응이 너무 좋았다. 파업 첫날 구사대와 부딪혔을 때도 그동안의 울분이 지도부와 간부들 중심으로 선봉에 서서 차가 나가지 못하게 차바퀴 아래 들어가고, 차 뒤에 드러눕게까지 만들었다. 또한 주차장이 일곱 군데인데 차가 못 드나들게 조합원 승용차로 출입구를 원천봉쇄하고, 심지어 간부조합원은 주차장에 있는 버스 키를 다 빼 와서 노조 사무실에 갖다놓기도 했다. 업무방해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조합원들에게 강건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니까 무전기, 핸드폰, 트위터 등을 통해 관망했던 동료들에게 시시각각 파업투쟁소식이 알려지면서 동참 조합원들이 많이 늘어났다.

사회운동: 민주노조 건설과 40년 만의 파업투쟁을 거치면서 조합원들의 변화가 많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나대진: 파업을 통해서 자신감이 붙은 거다. ‘아~ 우리도 뭉쳐서 하면 되는구나’라고 첫 파업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사측이 ‘파업하면 무노동 무임금이다 회사는 민주노조와 끝까지 교섭하지 않을 것이니 착각하지 말아라’라고 해도 조합원들은 개의치 않고 ‘그래도 우리는 집행부와 함께 간다’며 파업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또한 현 집행부는 조합예산의 50%를 교육에 할당할 정도로 집중 편성하고, 교육을 꾸준히 진행했다. 조합원 90%가 솔직히 팔뚝질도 못해봤는데 팔뚝질, 노동가, 우리는 왜 투쟁을 해야 하는가를 교육을 통해서 알게 됐다. 첫 정기대의원 대회 때에는 노동가요를 잘 몰랐다. 임시 대의원대회 때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국민의례 대신 민중의례로 대신하게 되기도 했다.
나는 ‘버스협의회’라는 노동활동가 단체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민주노조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근로기준법을 학습하면서 ‘우리가 권리를 모르고 노예처럼 살아왔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노조가 발전해야 지역(운동)이 발전하고, 지역(운동)이 발전해야 지역 주민들이 깨어나서 자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아무튼 나는 지금도 지난 석 달간의 교육이 파업투쟁에 큰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조합원들의 분노에 교육을 더해 길을 열었던 것이다. 나는 조합원들 원동력과 함께할 뿐이다.


법/제도와 삼화고속 투쟁의 의미

사회운동: 세 번의 파업을 통해 삼화고속지회는 7월 10일 사측에게서 성실교섭을 약속하는 ‘노사 기본 합의서’를 받아냈다. 하지만 사측은 ‘복수노조 창구단일화’와 어용세력을 악용해 교섭을 지연시켜왔었는데 그 과정은 어땠나?

나대진: 사측은 공문을 통해서 ‘교섭창구단일화로 교섭에 임할 것이다’라며 교섭을 해태해왔다. 처음에는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교섭창구단일화를 들먹이면서 교섭을 해태해 온 것이다. 파업을 통해서 불편을 겪는 시민들에게 압박을 많이 받은 인천시가 나서서 사측에 ‘노조는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요구를 하는데 왜 응하지 않느냐’며 계속 중재를 서고 노동청도 중재를 섰다. 그래서 억지로 회사가 교섭에 나오게 된 것이다. 첫 교섭은 무산됐는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용 세력이 회사와 짜고 사측 교섭위원들을 교섭장소 출입구 앞에서 가로막은 것이다. 어용 세력이 교섭장 입구를 막아서고 있으니까 사측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10분 동안 출입을 시도하는 척하다가 가버리게 된 것이다.

사회운동: 교섭창구단일화’라는 악법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사업장에서 복수노조를 활용해 새롭게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고, 삼화고속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 중심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삼화고속 투쟁은 복수노조 시대의 버스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시는지?

나대진: 이번 파업투쟁은 생존권을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절박한 투쟁이며, 반드시 우리의 요구를 쟁취하여 ‘버스노동자들이 뭉치면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 회복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 조합원들이 파업 첫날 운행 나갔다가 못 하겠다며 다시 집으로 많이 돌아갔다.

사회운동: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과 교통 공공성 확대를 위해 ‘교통제도 개혁’은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버스의 경우 준공영제가 각 지자체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인천에서 시행하고 있는 버스 준공영제에 대한 의견은 어떠한가?

나대진: 버스준공영제의 경우 시민단체가 참석해서 운송원가 조사에 공동으로 참여해 공정성을 보장해야 하는데 인천시는 사용자측하고만 의논해서 운송원가를 결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측이 자료 제시하면 사측 이야기만 듣고 논의해서 결정하는데 그게 무슨 준공영제냐. 시민단체가 참여를 하고, 노동자도 단체도 참여해서 정확한 운송원가를 책정해서 완전공영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연구소에 준공영제 조사용역을 줘서 8월 31일에 보고서가 나올 예정이다. 참고로 6대 도시에서 인천이 제일 먼저 준공영제를 발의했지만 제일 늦게 시행을 한 도시이기도 하다.


현 교섭국면의 상황과 과제

사회운동: 다시 삼화고속 현장으로 돌아와 보겠다. 현재 사측이 파업관련 고소고발 취하 등 선결조건을 받아들이면서 교섭국면에 접어들었다. 교섭국면에서는 투쟁국면과 달리 조합원들의 긴장감이 이완되어 또 다른 과제가 지도부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교섭에서 사측의 분위기는 어떤지, 현재 조합원들의 분위기는 어떤지, 교섭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지도부의 전략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대진: 계속되는 전면파업과 부분파업에 사측은 8월 12일 2차 고소고발취하, 조합비 지급 등 선결조건을 수용하고, 성실교섭에 임하겠다는 합의를 한 상황이다. 하지만 역시 (5차 교섭이 이뤄진 8월 22일) 최근까지도 선결조건에 대해서 조합비 입금을 제외하고 이행을 안 하고 있다. 소정근로시간 축소, 시급인상, 법정 수당 근로기준법 적용 등의 본협상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측이 교섭하려는 자세를 조금은 보이지만 그것을 100% 다 믿을 수는 없다. 언제든 합의서를 뒤집으려는 것이 자본의 생각이고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첫 파업투쟁에서 미숙했던 파업물품을 꾸준히 준비하고 있다. 지금도 대나무 만장기 500개, 등벽보 1,500장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쟁의기금도 모금하고 있는데 벌써 80% 정도가 동참해서 상당금액을 확보하고 있다. 집행부가 달콤한 말로 조합원을 속이지 않고 약속에 대해서 행동 실천하면서 아직까지 파업 동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 현장의 파업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조합원 교육을 통해 투쟁방침과 교섭 위반 시 바로 파업에 돌입하겠다는 결의를 하고 있다. 화물연대 파업동영상도 보며 교육도 하고, 하종강 선생님도 초빙하고, 노동가수들을 불러서 노동가요도 계속 배우고 선봉대 교육, 조반장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계속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집행부에게는 긴장의 연속이다.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사회운동: 삼화고속지회의 민주노조로의 전환과 위력적인 파업투쟁은 침체되어 있던 인천지역 노동자운동에 많은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민주노조를 건설하면서 지회장님이 가장 보람있었던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을 들으면서 인터뷰를 마치려고 한다.

나대진: 이제 갓 나온 햇병아리 지회장이고, 경험도 없어 선배님들 자문 받아가면서 배우고 있는데 민주노조 선배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나. 투쟁의 현장이야 다 똑같겠지만 어쨌든 세 번 파업의 경험으로, ‘파업은 곧 학습’이다. 그 말만 드리고 싶다.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준 조합원들에게 정말 너무 고맙게 생각한다. 이 파업 최고의 결과물은 조합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우리가 민주노조로 뭉치면 뭐든 해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게 최고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어용노조만을 겪다가 ‘이런 것이 민주적인 노동조합이구나, 노동조합의 권력은 우리 현장 조합원들한테 있구나’라고 알아가는 것. 그것이 제일 큰 성과라고 본다.
좀 일찍 장가를 가서 큰 애가 30살, 작은 애가 26살, 막내가 22살이다. 파업과정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파업 중에 아내로부터 문자가 온 적이 있다. 힘내라고. TV 인터뷰를 봤나 보다. 그리고 애들이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지 몰랐고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문자가 왔다. 문자를 보고 순간적으로 가슴 뭉클해지며 피곤이 싹 가시더라. 정말 힘이 많이 됐다. 조합원들도 나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줬지만 가족들이 ‘아,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51세 됐지만 처음으로…… 뭐라 표현은 못 하겠다. ‘아, 내가 올바른 삶을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가 바가지만 긁고, 돈만 밝히는 줄 알았는데, 자식들한테는 미안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무형의 재산을 남겨주고 간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

※ 바쁜 와중에도 성심성의껏 인터뷰에 응해주신 나대진 지회장님 그리고 삼화고속지회 동지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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