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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1.9-10.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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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튀니지 혁명의 미래

임필수 | 노동자운동연구소 부소장
튀니지 혁명은 아랍 세계를 고무했다. 튀니지 혁명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던 데 반해, 그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다. 23년간 튀니지를 지배한 철권통치자 벤 알리 대통령이 해외로 망명했고 그 직후 법원은 궐석재판을 통해 3차 재판까지 도합 66년 형을 선고했고 앞으로 남은 재판에서 최종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릴 가능성이 크다. 집권 여당 헌법민주주의회의(RCD)는 법원 명령에 의해 해산을 당했고, 과도정부는 시위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제헌의회 선거를 발표했다. 따라서 튀니지 혁명은 아랍사회를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한 힘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이집트 혁명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었다. 바레인, 시리아, 예멘에서 봉기가 발생했고, 알제리, 요르단, 모로코, 이스라엘 국경지역, 이라크, 모리타니아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현재에 이르러 ‘아랍의 봄’이 갈 길이 멀고도 험난하다는 보도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독재자가 물러났지만 장기독재 잔재의 청산이나 사회경제적 변화가 더디어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으며, 시리와와 예멘에서는 정권이 대중시위의 요구를 무시하고 강력한 탄압으로 맞서면서 사상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리비아의 대중시위는 내전으로 발전했고 더구나 서방의 군사개입으로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그렇다면 아랍 민중은 무엇을 자각했고 아랍사회는 2011년 봉기를 통해 지금 어디에 도달하였는가. 앞으로 아랍 민중과 아랍 사회는 어떤 과제를 안고 있으며 어떤 역경이 이를 가로막고 있는가. 이 글은 북아프리카 민중혁명의 선도자이자 그 대표적 사례라고 말할 수 있는 튀니지 혁명의 특징과 성과, 의의를 살펴보면서 그러한 질문에 부분적으로나마 답하고자 한다.


튀니지 혁명, 어떻게 가능했나

국제연합 인권팀에 따르면 튀니지 혁명 과정에서 2011년 2월 1일 현재 219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72명은 형무소에서 발생한 폭동 과정에서 사망했다.) 그 후에도 간헐적으로 시위 중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최근 7월 18일에도 처음 시위가 발생했던 시디 부지드에서 14살 소년이 시위대와 보안군의 충돌 과정에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1960년 4·19 혁명의 경우 사망자가 187명이고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경우 한국정부가 인정한 사망자가 154명, 행방불명자가 70명이다. 이 숫자만 보아도 튀니지 민중이 얼마나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는지, 얼마나 값비싼 희생을 감내해야 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유명 UCC 사이트에는 사망자를 추모하는 동영상이 수십 편 등록되어 있다.)
튀니지에서 시위가 발생했을 때 서방 관측가들은 시위가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시위가 비조직적이고 반대 세력의 공식적 지도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장기간 발전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반정부 조직은 빈혈증 상태다”, “벤 알리 정권이 한 주 또는 한 달 내에 무너질 것이라고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 등등.) 그러나 대중운동은 23년에 이르는 벤 알리의 철권통치를 무너뜨렸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남동부 도시 시드 부지드의 한 청년의 분신으로 시작된 시위가 마침내 12월 27일 수도 튀니스에 도달했을 때, 튀니스에 모인 시위자는 실업자, 학생, 법률가, 블로거, 예술가, 해커, 주부, 의사, 교수, 상인 등 정말로 이질적인 집단이었고 지도자를 자처하는 집단도 없었다. 따라서 서방 관측가의 단언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놀라운 속도로 하나의 저항운동으로 융합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융합이 가능했는가? 첫째, 정보 공유가 빠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시위 참여자 스스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비디오, 사진, 인터뷰를 유포하고 다음 시위의 시간과 장소를 공유했다. 둘째, 튀니스, 카프사, 수스, 시드 부지드 같은 도시의 거리들에서 광범위한 대중토론이 벌어졌다. 시위자들은 과거 벤 알리 정권 치하에서 경험했던 권리 박탈과 부패에 대해 토로했을 뿐만 아니라 정세분석과 운동노선을 서로 제안하고 토론했다. 사실상 정부의 통치도구로 기능했던 기관들, 예를 들어 튀니지노동조합총연맹(UGTT)도 이러한 변화를 점차 수용했다. (튀니지 노동조합의 어떤 열성 활동가는 노동조합운동이 튀니지 혁명의 후위대 역할을 했다고 자부했다. 즉 혁명운동의 전진을 위해 그 후방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UGTT는 1980년대 후반 이후로 벤 알리 정권을 지지했으나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고, 특히 우체국, 통신 부문 노동자와 초등학교 교사를 시발로 수많은 지역지부가 기층 수준의 토론을 조직했다. (UGTT 조합원 517,000명 중 초등, 중등학교 교사가 10만 명에 달한다.) 셋째, 여성의 시위 참여가 인상적인 수준이었다. 모든 시위에서 남성과 여성이 함께 행진했다. 이들이 ‘이슬람’이 아니라 ‘시민권’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다. 이처럼 튀니지 혁명이 보여준 힘은 튀니지 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와 대조되는 사회운동의 극도의 무기력을 극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튀니지 혁명의 배경

1990년대 후반 이후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한목소리로 북아프리카 경제개혁의 모델로서 튀니지를 지목했다. 예를 들어 2008년 세계은행은 튀니지를 북아프리카 지역 ‘최상의 개혁국가’로 칭송했고, 국제통화기금 총재 스트라우스 칸은 ‘신흥국가의 훌륭한 사례’로 언급했다.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튀니지의 현실은 훨씬 더 어두웠다. (집권 여당인 헌법민주주의회의는 독일 사회민주당, 프랑스 사회당, 영국 노동당 등 서구 사민주의 정당 주도로 구성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가입 정당이다. 이는 서구 사민주의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례다.)
1987년 벤 알리의 집권 이후 권위주의 체제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국가의 감시 프로그램은 세 차원에서 작동했다. 첫째, 정치활동가는 경찰의 수중에서 심각한 억압과 협박을 받았다. 튀니지는 인구 1,040만 명에 경찰이 13만 명에 이를 정도로 강력한 경찰국가다. (한국은 2010년 현재 인구 4,821만 명에 직업경찰이 약 10만 명, 전의경이 약 5만 명이다.) 고문과 정치범 사례는 튀니지 국내외 인권단체에 의해 끊임없이 보고되었다. 둘째, 집권여당 헌법민주주의회의(RCD)는 매우 복합적이며 광범위한 시민 감시체제를 확립했다. 일반 시민은 진학, 취직, 여행과 같은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지역 RCD 감시자들의 심사를 건드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셋째, 23년간 공포가 내부화되면서 주민 스스로 검열자가 되었다.
하지만 억압이 벤 알리 정권이 장수하게 된 유일한 요인은 아니었고. 상대적으로 신용과 소비재에 대한 접근이 용이했기 때문에 일종의 ‘암묵적 용인’이 존재했다는 분석도 있었다(즉 정부가 제공하는 대출 프로그램과 소비재 보조금). 그러나 신용제공 약속은 단명하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만연한 부패였다. 고위직과 연결된 사람이 신용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벤 알리 정부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권고에 따라 공공부문 산업과 농업협동조합을 매각하거나 축소했다. 그 대신에 해외투자자가 운영하는 섬유산업과 콜센터가 성장했지만 이는 단기 저임금 일자리를 제공할 따름이었다. 관광산업과 콜센터는 튀니지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벤 알리 정권하에서 빈곤층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고 중간층이 쇠퇴했고 실업이 급상승했다. 대학졸업자의 46%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도달하였다. 튀니지 경제는 수출을 위한 아웃소싱 기지로 전환되었다. 튀니지에 있는 1,250개 프랑스 기업이 대 프랑스 수출의 1/3을 차지했다. 주변부 국가는 중심부 국가에 비해 2007-2009 금융위기로부터 더욱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2008년부터 공장폐쇄, 실업, 노동조건 악화가 심화되었다. 또한 벤 알리 일가의 부패에 염증을 느낀 투자자들이 튀니지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벤 알리 일가는 은행, 통신, 수출입업, 자동차, 농업, 식량분배, 석유, 관광, 부동산 등 경제의 광범위한 부분을 통제했다. (이번 튀니지 혁명을 계기로 망명지에서 돌아온 부흥당 당수 간노우치는 튀니지와 아랍 국가들이 ‘정치적 권위와 마피아의 혼합’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마피아가 국가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2010년 12월 시드 부지드 지역 시위에서 나온 구호는 “일자리는 권리다. 도둑놈들아!”였다. 이는 튀니지 실업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튀니지의 실업률은 약 14%로 추산되지만 지역별, 세대별로 큰 차이가 있다. 해안지역 도시의 실업률은 7% 미만으로 추산되지만 내륙지역은 30% 이상이다. 특히 시위가 처음으로 발생한 시드 부지드는 50%로 추산된다. 또한 30세 이하 실업률은 26%에 이르고, 이 중에는 40만 명의 대학졸업자가 포함된다.


튀니지 혁명의 전개 과정

튀니지 혁명이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 대통령의 망명과 과도정부 수립으로 절정에 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후 과정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단계를 통해 더욱 강력한 대중시위의 압력을 통해 과도정부에서 집권여당이 배제될 뿐만 아니라 집권여당이 공식적으로 해산명령을 당하고 제헌의회 수립 일정이 발표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의미는 한국 1987년 6월항쟁의 결과와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새 장을 연 기념비로 묘사되지만 그 성과는 매우 불완전했다. 6월항쟁 과정에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사실상 단일 이슈로 채택되었다. (물론 ‘혁명으로 제헌의회’와 같이 더욱 급진적 구호를 제시한 운동 집단도 있었다.) 전두환 정부는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비상사태 선포를 검토했지만 미국의 압력과 군부 내 이상기류, 즉 항명 가능성 때문에 결국 이를 포기했고, 6월항쟁은 노태우 후보가 6·29 선언 형식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 대중운동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개헌안은 여야 협상을 통해 마련되었다.) 군사쿠데타와 민중학살의 주인공 전두환 대통령은 즉각 퇴임하거나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임기종료 후 퇴임하여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집권여당 민정당은 해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정당 후보 노태우가 1987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87년 당시 김영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야당세력은 6·29 선언 발표 후 ‘반동의 역공세’를 근거로 대중운동의 확산을 제지하려 했고 7~8월 노동자대투쟁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야당 세력은 광범위한 사회변혁 요구를 대통령 선거 후의 문제로 지연시키면서 대선 준비에 몰입했다. 개헌 문제도 ‘단임 5년제 대통령 직선제’ 도입만 합의되었기 때문에 한국민은 헌법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의 경우도 결선투표제 도입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다.) 개헌 후 김대중 후보는 4자필승론에 근거하여 야권후보 단일화를 사실상 거부하였다. 4자 필승론이란 김영삼 후보가 경상도 표를 분할하고 김종필 후보가 충청도 표를 분할하면 자신이 노태우 후보를 제치고 1위로 당선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선거 결과 36.6%로 노태우 후보가 1위로 당선되었고, 김영삼 후보가 28%로 2위, 김대중 후보가 27%로 3위, 김종필 후보가 8.1%.로 4위를 차지했다. (사실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의 재집권을 위해서는 야권분열이 그 전제조건이라고 여겨 6·29 선언에 김대중 사면복권을 포함시켰을 뿐만 아니라 두 후보 중 어느 누가 확연히 불리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은밀히 개입했다.) 시야를 1987년에 벌어진 사건들로 좁힌다면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는 뭐라 말할 수 없이 허망했다.
그럼 2011년 튀니지 혁명의 전개과정을 1단계, 즉 2010년 12월 17일 부아지지의 분신으로부터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 대통령의 망명에 이르는 시기와 2단계, 즉 1월 17일 과도정부의 새 내각 발표부터 3월 3일 제헌의회 선거계획 발표에 이르는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한다.

튀니지 혁명의 1단계: 2010년 12월 17일 부아지지의 분신으로부터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 대통령의 망명까지
시드 부지드 봉기 이후 처음 두 주 동안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로 가난한 도시의 노동자와 실업자였다. 즉 내륙지방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격렬한 시위가 발발했다. 같은 기간 동안 해안지역 거대도시의 주민들의 시위 참여는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물론 UGTT의 좌파 활동가들은 시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노력했다. 1차 혁명 초기에 단일한 정치적 지도부가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UGTT는 대중의 폭발을 지지하는 ‘후위’(또는 ‘후진’) 역할을 했다. 2011년 1월 초, 좌파활동가들의 요구에 따라 UGTT는 지역노조들이 총파업을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했다. 정부는 사회적 항의에 직면하여 몇 가지 양보와 약속을 내놓았으나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정부의 주된 반응은 강력한 억압이었다. 벤 알리 정부는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순차적으로 휴교령을 내리고, 경찰에 폭동진압 장비 사용을 허가하고, 야간통행금지를 선포하고, 군대를 주요 도시에 배치하고 궁극적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하지만 어떤 조치도 시위 확산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시위가 더욱 강화되면서 ‘정부 억압의 강화와 시위의 급진화’라는 순환이 형성되었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 목표는 벤 알리 일가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되었다. 그럼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남동부 도시 시디 부지드에서 과일, 채소 노점상을 하던 무하메디 부아지지가 분신자살 시도했다. 26세의 부아지지는 가족 8명의 유일한 부양자였으나, 경찰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손수레와 상품을 몰수했다. 부아지지는 관청에 부당함을 호소하러 갔지만 냉대를 받고 이에 분개하여 바로 분신을 시도했다. 이 사건을 목격한 대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시위가 벌어졌으나 경찰은 폭력적으로 대응했다. 이에 따라 12월 18일 시디 부지드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부아지지는 수도 튀니스의 병원으로 이송되고 벤 알리 대통령은 폭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12월 28일 병원을 방문했다. 그러나 부아지지는 2011년 1월 5일 사망했다.) 그러자 이와 유사한 사건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2010년 12월 22일, 시위에 참여했던 라흐센 나지가 ‘배고픔과 실업’에 항의하며 송전탑에 올라 스스로 감전사를 선택했다. 같은 날 람지 알 아부디도 소액대출 연대프로그램에서 빌린 빚 때문에 자결했다. 12월 24일 튀니지 남부 도시 보우지아네에서는 모하메드 아마리가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고, 역시 총을 맞은 차우키 벨하우시네 델 하드리도 12월 30일에 사망했다. 시드 부지드에서 정부 당국과 주민이 충돌할 때마다 폭력의 강도가 점점 더 높아졌다.
12월 27일, 마침내 시위가 수도 튀니스에 도달하게 되었다. 12월 27일 1,000명의 시민이 시드 부지드 주민에 대한 연대를 표현하고 일자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하지만 독립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개최한 집회는 내무부 소속 보안군에 의해 제지되었다. 시위는 수스, 스팩스, 메크나시 등 주요 도시로 확대되었다. 12월 28일 튀니지노동조합총연맹(UGTT)도 카프사에서 집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역시 경찰이 제지했다. 12월 27일 300명의 법률가들도 튀니스 정부청사 주변에서 집회를 개최했다. 법률가들의 시위는 12월 29일까지 지속되었고, 경찰은 폭력으로 이를 진압했다.
12월 28일 벤 알리 대통령은 텔레비전 방송에서 시위대에 대해 ‘[이슬람]극단주의자와 용병’이라며 범죄자라고 부르고 강력한 처벌을 경고했다(벤 알리의 1차 텔레비전 발표). 하지만 시위대는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12월 29일 벤 알리 대통령은 유화책을 제시했다. 그는 내각을 교체하면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장기 실직 중인 청년들에게 생계수단을 제공하기 위해 민간부문과 협력할 것을 내각에 지시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여러 지역들에 자원을 공평하게 할당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는 시위대의 주요 요구 중 하나였다.). 다음날 1월 30일 벤 알리 대통령은 시드 부지드, 젠주바, 자그후안 주지사를 해임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는 시위자는 아무도 없었다.
12월 30일 경찰은 모나스티르에서 벌어진 시위는 평화적으로 해산시켰지만, 스비크하, 체바에서 벌어진 시위에 대해선 폭력을 사용했다. 12월 31일에도 시위가 지속되었고, <튀니지법률가집단>도 계속 시위를 이어나갈 것을 호소했다. 2011년 1월 3일, 타흘라에서 실업과 생계비용 상승에 항의하며 벌어진 시위가 폭력적으로 전환되었다. 대부분 학생이었던 250명의 시위에 대해 경찰은 최루가스를 발포했다. 그에 대응하여 시위자들은 집권여당인 헌법민주주의회의 당사를 공격했다. 1월 6일에는 <전국변호사협회> 의장의 요청에 따라 튀니지 8,000명의 법률가 중 95%가 파업에 돌입했다. 1월 7일 교사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급기야 1월 8~10일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십 명의 시위대가 사망했다.
1월 10일 벤 알리 대통령은 텔레비전 방송에서 3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코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지 못했다(벤 알리의 2차 텔레비전 발표). 동시에 그는 여전히 시위가 복면을 한 폭력단의 테러 행위라고 묘사하고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월 10일 정부는 모든 학교와 대학의 무기한 휴업을 선언하며 시위 확산을 막고자 했고, 1월 11일에는 경찰이 시위 진압을 위해 폭동진압장비를 사용했다. (튀니스에서 건물 약탈, 타이어 소각, 차량 방화가 발생했다.) 또한 군대가 주요 도시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1월 12일에는 튀니스에 야간 통행금지가 선포되었다.
1월 12일 벤 알리는 세 번째로 유화책을 발표했다(벤 알리의 3차 텔레비전 발표). 그는 실탄 사용 중단을 명령했고 체포된 시위대를 풀어주고 언론에 가해진 제한을 해제했으며 내무부 장관을 해임했다. 또한 벤 알리는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면서 2014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위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1월 12~14일 UGTT 소속 노동조합이 파업을 벌였다. 파업은 1월 12일 스팩스 지역, 1월 13일 카세린, 카이로운, 수스, 모나스티르 지역, 1월 14일 튀니스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또한 1월 12일 해방당(히즈브-우트-타흐리르)은 1월 14일 금요 정오 합동예배 후 시위를 조직하여 이슬람 칼리프 국가의 재수립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1월 15일 해방당은 정치범 석방을 위해 <4?9 형무소>로 행진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1월 14일에는 사진기자 루카스 돌레가 근거리에서 발사한 최루탄에 맞아 1월 16일에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어떤 억압이나 유화책에도 시위가 약화되지 않자 결국 1월 14일 벤 알리는 정부를 해산하면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세 명 이상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구속하고 만약 도주하면 발포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그는 6개월 내에 총선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1월 14일에도 시위가 벌어졌고, 결국 1월 14일 밤 벤 알리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그가 정치를 떠난다는 조건으로 망명을 수용했다. 그에 따라 1월 15일 아침 튀니지 방송은 벤 알리가 공식적으로 사임했다고 발표했다. 간노우치 총리는 권력 승계를 선언할 듯 보였으나 곧 국회의장 푸아드 메바자에게 권력을 넘긴다고 발표했다. 이는 튀니지 헌법재판소장 페티 아브덴나드헤르의 선언 직후 발표되었다. 그는 간노우치가 권력을 승계할 권리가 없고 메바자가 60일 이내에 새로운 총선을 조직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호응하여 메바자는 단일한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발표했다.
결국 서방 언론의 시각과는 정반대로 2010년 12월 17일 부아지지가 분신을 시도한 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 정권이 무너졌다.

튀니지 혁명의 2단계: 1월 17일 과도정부의 새 내각 발표부터 3월 3일 제헌의회 선거계획 발표까지
벤 알리가 망명을 선택할 때까지 튀니지 혁명 과정에 단일한 정치 지도부가 없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벤 알리 망명 이후부터는 정치조직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부흥당 당수 간노우치가 1월 30일 귀국한 것을 비롯해 타국에 망명해 있던 정치활동가들이 대거 입국했다. 부흥당은 벤 알리 퇴진 이후 운동 주제를 분명히 밝혔다. 그것은 “RCD와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벤 알리 퇴진 후 25개 조직들이 <혁명수호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에는 UGTT, 전국법률가운동, 튀니지인권연맹, 튀니지노동자공산당 등 봉기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조직이 참여했다. <혁명수호위원회>는 자신이 일종의 ‘의회’ 역할을 하겠다고 과도정부에 요구했다. 즉 <혁명수호위원회>는 입법, 결정, 감독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과도정부는 이를 명확히 거부했다. 그 후 과도정부는 <혁명 목표의 실현, 정치개혁, 민주주의 이행을 위한 고위위원회>를 구성했고 여기에 <혁명수호위원회> 소속 단체가 참여했다. (튀니지노동자공산당과 같은 좌익조직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고위위원회>는 과도정부에 소속되어 자문역할을 맡았다. <고위위원회>는 RCD 지도자들의 선거 참여를 배제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과도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혁명수호위원회>는 RCD의 제거, 제헌의회 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조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럼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1월 14일 벤 알리의 망명 직후에도 사태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1월 15일 시위자들은 통행금지에 항의하며 시위를 지속했다. 또한 1월 16일에는 벤 알리의 측근으로서 내무부 소속 보안군 수장 알리 세리아티가 구속되었는데, 구속 직후 튀니스에서 군대와 보안군 간 총격이 발생하여, 군대가 보안군을 제압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1월 17일 새로운 내각이 발표되었다. 새 내각에는 집권 여당 RCD 소속 인사가 12명에 이르러 다수를 차지하였다. 나머지는 과거 벤 알리 정부 당시 합법으로 분류되었던 야당 인사 3명(<진보민주당 설립자> 체비가 지역개발장관에, <자유와 노동을 위한 민주포럼>의 당수 벤 자파르가 보건장관에, <쇄신운동> 당수인 이브라힘이 고등교육장관에 내정되었다), 튀니지일반노동조합(UGTT) 인사 3명(디마시 노동장관, 베두이 총리실 소속장관, 벤 게두르 교통장관), 시민사회 인사(저명한 블러거 아마모우 포함)로 구성되었다. 또한 헌법과 일반 법령 개정을 검토하는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내각 발표 직후부터 새로운 정부에 RCD 당원이 포함된 것에 항의하는 시위가 매일 개최되었다. 시위에 참여했던 일부는 과도정부에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대부분은 과도정부가 정통성을 결여했다고 규탄했다.

그에 따라 1월 18일 UGTT에 소속된 세 명의 장관은 RCD 인사들이 내각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사임을 발표했다. <자유와 노동을 위한 민주주의포럼>의 당수 무스타파 벤 자파르도 보건장관직을 거절했다. 임시 대통령 푸아드 메바자, 총리 간노우치도 항의 시위를 무마하기 위해 RCD를 탈당했다. 1월 18일 RCD의 내각 참여에 항의하는 거리 시위가 튀니스, 스팩스, 가베스, 비제르타, 수스, 모나스티르에서 벌어졌다. 1월 19일에는 튀니스 내무부장관 청사 주변에서 연좌시위가 벌어졌고 시위 참여자는 RCD 해체를 주장했고, “새로운 의회, 새로운 헌법, 새로운 공화국”을 요구했다. 1월 20일 수백 명의 시위대가 튀니스의 RCD 중앙당사 밖에서 시위를 벌였고, 1월 21일에도 내무부 밖에서 수천 명이 시위를 벌였다. 연일 시위가 지속되자 1월 20일 벤 알리의 측근 주하이르 음다파르가 내각에서 사임했고(그는 2002년 대통령 임기 제한을 제거하는 헌법개정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졌다), 1월 20일 모든 RCD 소속 장관들이 RCD에서 탈당했다. 또한 같은 날 1월 20일 RCD 중앙위원회가 해산되었다. 계속되는 시위에 밀려 1월 27일 간노우치 총리는 RCD 소속이었던 6명의 내각 구성원(국방부, 외무부, 재무부, 내무부 장관 등)이 과도정부를 떠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간노우치 본인을 제외하면 산업부 장관, 국제협력부 장관 등 2명만이 과거 벤 알리 정부의 장관 출신으로 남게 되었다. (그 두 명은 RCD 소속이 아니었다.) 이는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UGTT는 내각 재구성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월 28일에도 수백 명의 시위대가 간노우치가 과도정부에 잔류하는 것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총리실 밖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2월 19일, 20일 다시금 시위가 고조되었다. 4만 명의 시위대는 새로운 과도정부에 구정권과 관계가 있는 어떤 인사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고, 또한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개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2월 25일 총선 일자가 2011년 7월 중순으로 발표되었다. 그 후에도 10만 명의 시위대가 과도정부 총리 간노우치의 사임을 요구했다. 결국 2월 27일 더 큰 규모의 시위가 벌어진 후 간노우치 총리가 사임하고 에셉시가 새로운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간노우치 총리의 사임 이후로는 제헌의회 문제가 가장 큰 쟁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월 28일 UGTT는 제헌의회를 선출하여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3월 3일 메바자 대통령, 2011년 7월 24일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총선이 그 후로 연기된다는 뜻이었고, 이러한 발표는 시위대의 핵심 요구를 받아들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3월 3일 제헌의회 선거 실시 발표는 튀니지 혁명에서 ‘최후의 일격’을 의미했다. 이로써 튀니지인은 출발점에서부터 헌법을 새롭게 제정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거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임 이후 국방장관을 장으로 하는 군사최고평의회가 권력을 승계했고, 3월 20일 정부가 조정한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었다. 이집트에서 벌어진 일은 튀니지 시위대가 결사코 막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3월 3일 제헌의회 선거 계획 발표 후 최근 상황
3월 6일 내무부는 RCD의 모든 활동을 전면 금지했고 3월 9일 법원 명령에 따라 RCD가 해체되었다. (또한 3월 7일 과도정부는 비밀경찰이 해체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RCD의 영향력이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7월 24일로 예정되었던 제헌의회 선거가 10월 23일로 연기되었는데 가장 큰 요인이 RCD의 영향력이다. 비록 RCD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지만 인적, 조직적 영향력이 막강한 데 비해 벤 알리의 집권기 동안 불법화된 정당들은 여전히 준비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6월 8일 에셉시 총리는 이날 정당 및 시민단체, 지역 대표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우리는 모든 견해를 검토해 선거를 10월 23일에 치르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벤 알리의 망명 후 궐석재판과 폭로를 통해서 벤 알리 집권기의 막대한 규모의 비리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 5월 2일 스위스 외교부가 북아프리카 지도자들의 은닉 재산을 공개했다.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와 그 측근이 3억 6,000만 스위스프랑(약 4,428억 원), 무바라크 이집트 전 대통령과 연계된 자산 규모는 4억 1,000만 스위스프랑, 벤 알리 튀니지 전 대통령의 자산은 6,000만 스위스프랑에 달했다. (외교부 대변인은 “연방정부 지시에 따라 불법일 가능성이 큰 이들의 자산은 동결된 상태”라고 밝혔다.) 또한 6월 20일 월스트리트저널은 국제투명성기구(TI)의 집계를 인용해 벤 알리와 인척들이 집권 23년 동안 은행과 통신, 부동산 업체 등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해왔다면서 440억 달러 규모의 튀니지 경제 중 3분의 1가량을 이들이 통제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벤 알리는 1987년 권력을 잡은 뒤 대부분 국가가 운영하던 경제 각 부문의 업체를 민영화하면서 이를 인척들에게 배분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축적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벤 알리 대통령에 대한 궐석재판이 진행 중이다. (튀니지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벤 알리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사우디가 이를 거부함에 따라 궐석재판이 진행되었다.) 6월 20일 튀니지 형사법원은 공금횡령과 오용 등의 혐의로 벤 알리 대통령에게 35년 형을 판결하며 벌금 5천만 디나르(약386억 원)를 선고했고, 또 부인 트라벨시에게도 징역 35년과 벌금 4천100만 디나르를 선고했다. 7월 4일에는 무기, 마약 등의 불법소지 혐의로 벤 알리 전 대통령에게 징역 15년형을 추가로 선고했다. 7월 28일에도 부패와 권력남용 혐의로 벤 알리 대통령에게 징역 16년이 추가로 선고되었다. 벤 알리의 딸인 네스린과 사위 사케르 마테리도 각각 징역 8년과 16년형을 선고받았다. 조카인 소피엔 벤 알리도 징역 2년이 선고받았다. 앞으로 튀니지 혁명 과정에서 시위대 살해와 같은 중대 혐의가 남아 있기 때문에 벤 알리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선고가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
대중 시위도 여전히 진행 중이고 사망자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벤 알리 대통령이 물러났지만 튀니지의 공식 실업률이 오히려 높아지는 상황이 말해주듯이 사회경제적 상황은 과거와 달라진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5월 7~9일 사이에는 에셉시 총리의 퇴진과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벌어져 군경과의 충돌로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에셉시 정부는 5월 7일부터 통행금지령을 발령하고 대대적인 단속을 실시하고 5월 10일에도 “경찰을 공격하거나 절도를 저지르고 최근 발효된 통행금지령을 어긴” 혐의로 197명을 체포하면서 시위를 적극적으로 억압하고 있다. 7월 18일에도 시드 부지드에서 벌어진 시위 과정에서 14살 소년이 보안군의 발포로 목숨을 잃었다. 이에 따라 7월 21일에는 수도 튀니스에 6,000여 명의 시위대가 폭력중단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튀니지 혁명의 역사적 의의

그렇다면 서방 관측가들이 “모든 반정부 세력은 빈혈증에 빠져 있다”고 단언할 만큼 2011년 튀니지 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기존 반정부운동, 사회운동은 극도의 무기력에 빠져 있었는가.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튀니지 현대사를 지배한 두 명의 정치지도자인 부르기바와 벤 알리 집권기의 통치전략, 국가와 사회운동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생전에 튀니지 독립의 영웅이자 국가건설의 아버지로 칭송되던 부르기바는 자신의 정당인 신헌법당을 사회주의헌법당으로 개편하면서 사회주의를 실험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민중의 민주적 참여를 실질적으로 배제한 것이었고 부르기바는 노동조합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지도자들의 사적인 이익을 거래수단으로 삼는 일종의 후원-수혜 관계로 경쟁자와 사회운동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적 정책전환으로 인한 위기 속에 권력을 찬탈한 벤 알리는 노골적인 억압과 탄압으로 경쟁자와 사회운동을 제거하기로 결단했다. 부르기바 집권기에 권력이 제공하는 후원에 취해 있던 사회운동은 더 이상 집권당과의 후원-수혜 관계라는 거래에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당황했고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처하자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부르기바 집권기(1956년~1987년)의 후원-수혜 관계
1956년 3월 프랑스와 튀니지가 의정서를 교환하여 마침내 프랑스의 튀니지 위임통치가 종식되었다. 부르기바는 제헌의회 의장과 내각 총리를 맡게 되었다. 1957년 제헌의회가 베이(오토만 제국이 소규모 부족집단의 수장에게 부여한 명칭)의 권한을 박탈함으로써 부르기바를 국가수반으로 하는 독립 튀니지 공화국이 탄생했다. 1959년 헌법은 부르기바에게 사법, 입법, 행정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부르기바는 사법부를 통제했고, 입법부에 최소한의 권한만 부여했으며 언론의 자유에 제한을 가했다. 따라서 그의 권력은 거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부르기바는 자이투나 모스크(대학)의 국유화나 가족법 개혁과 같은 세속화 정책으로 종교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부르기바는 일부다처제 금지, 여성 이혼권 확대, 결혼 연령의 17세로 상향 조정을 입법했다. 1965년 통과된 <개인 지위에 관한 법률>도 여성의 권리를 확대했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가족의 장으로 제도화한다.) 식민 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노동조합과 여성운동은 국가의 통제 하에 들어가고 당 기구에 통합되었다. 1958년에 설립된 튀니지전국여성연합이 대표적 사례다. (여성연합의 초대 명예의장은 1962년 부르기바와 결혼한 와실라 벤 아마르였다.) 1959년에 제정된 법률에 따라 시민조직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예를 들어 공산당에 가맹한 여성조직은 정부 승인을 받을 수 없었고 1961년 불법화되었다. 1963년 이후로 신헌법당은 튀니지의 유일한 합법정당이 되었다. 1964년 부르기바는 신헌법당을 사회주의헌법당(PSD)로 개편했고, 당원 수는 약 2백만 명으로 증가했다. 부르기바는 선거법과 선거구 조작, 협박, 투표함 조작, 투표용지의 선택적 분배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90~98%에 이르는 득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부르기바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통치전략은 ‘후원-수혜’(patron-client) 관계였다. 그는 이러한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정당과 국가관료제에 대한 통제권을 공고히 했다. 부르기바는 튀니지의 유일한 정치적 후원자가 아니라 여러 후원자 중 최고 후원자 역할을 자임했다. 그는 중요한 직위를 수여하거나 박탈하면서 충성심에 대한 현실적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이는 오직 억압과 공포에 의존한 체계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방식으로 부르기바의 개인 권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부르기바는 시위와 분쟁을 활용하는 데도 능통하였다. 부르기바는 대중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을 하며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러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노동조합 지도부를 교체시키기 위해 노동자의 불만을 활용하기도 했다. 즉 부르기바는 엘리트 정치와 대중 시위를 혼합하는 데 능숙하였다. 그는 경쟁자를 궁지에 빠뜨리려고 개별적으로 불만을 자극하고 학생운동, 노동자운동과 동맹을 형성하기 위해 협상을 벌임으로써 대중적 지지를 유지하였다.
1967년 부르기바의 건강 문제가 등장하자 분명한 후계자도 없고 후계자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엄청난 경쟁이 발생했다. 부르기바는 총리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엘리트 간 경쟁을 자신에 유리한 방식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대통령이 총리를 선출할 권한을 지니고 대통령이 죽거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총리가 대통령직을 자동 승계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정당의 고위 인사들은 부르기바에 대항하여 동맹을 형성하기보다는 총리가 되기 위해 부르기바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부르기바가 고령으로 접어들자 튀니지 정치는 부르기바의 죽음에 판돈을 건 집단적 도박이 되었다. (즉 부르기바가 죽을 때 총리인 자가 권력을 승계한다는 도박.) 1975년 부르기바는 헌법 40조를 수정하여 스스로 ‘종신대통령’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부르기바는 사회주의헌법당으로 당명 개칭이 보여주듯이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실험하였다. (물론 그것은 민중의 민주적 참여가 배제된 국가주의, 엘리트주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부르기바 정부는 1970년대 초반부터 그 실험을 포기하고 헤디 누이라 총리를 선봉으로 삼아 10년간에 걸친 자유주의 경제발전 모델에 착수했다. 이는 사기업의 융성과 사적부문의 강화로 이끌었다. 그로 인한 1977년 노동조합 운동의 급진화는 부르기바가 더 이상 정치상황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두 가지 요인 때문에 부르기바는 사회적 갈등이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첫째, 1970년대 높은 경제성장률은 지속적인 임금인상과 광범위한 소비자 보조금 체계가 작동할 수 있게 했다. 둘째, 노동조합, 학생조합이 공적 기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부르기바는 그들의 내부 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이러한 조건조차 지속되지 않았다. 1980년대 초반부터 재정적자 축소를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했고, 1986년부터는 일부 무역부문에 지원을 집중하는 구조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처럼 경제 악화, 외채 위기, 국제금융기구가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개혁은 사회적 평화를 ‘매수’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을 잠식했다. 부르기바는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를 더 이상 인내하지 않았고 1984-85년 노동조합을 강력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부흥당의 전신인 <이슬람경향운동>은 노동조합 억압이 창출한 공백에 진입하여 사회세력으로 성장했다. 정치인들은 공개적으로는 <이슬람경향운동>을 비난했지만 사적으로는 그 조직의 환심을 사려 했다. <이슬람경향운동>은 비밀조직이었고 외부 조정이 가능한 틈이 없는 독립적 실체였다. 따라서 부르기바는 <이슬람경향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무리한 싸움을 시작했고, 이는 1987년 벤 알리가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튀니지 사회운동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 튀니지 정치문화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대중시위를 활용하는 부르기바의 전략은 저항을 위한 기회를 제공했으나 노동자, 학생, 이슬람주의자 지도자들은 그러한 기회를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고자 했다.

벤 알리 집권기(1987~2011)의 권위주의 체제
1980년대 총리와 내무부장관을 맡았던 벤 알리는 1987년 11월 헌법을 수정하여 대통령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공직을 수행할 수 있을 때만 종신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조항을 추가했고, 의사를 불러 부르기바의 건강상태가 나쁘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는 벤 알리가 기습적인 ‘궁정 쿠데타’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벤 알리는 쿠데타를 ‘변화’로 선전했다. 1987년 집권 후 벤 알리는 법의 지배, 인권 존중, 민주적 정치개혁을 약속했다. 집권 첫해, 벤 알리는 개혁에 열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정치범을 사면하고, 국가보안법원과 대통령 종신제를 폐지하고, 재판 전 구금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고 국제연합의 고문에 관한 협약을 비준했다. 벤 알리는 정당, 사회단체 결성이 용이하도록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고 주요 정치조직, 사회단체와 ‘전국협약’을 체결했다. 또한 1988년 부르기바의 사회주의헌법당을 헌법민주주의회의(RCD)로 개편했다.
그러나 1989년 선거는 튀니지가 더욱 깊숙이 권위주의로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1988년 벤 알리는 부흥당의 합법화를 거부했다. 또한 야당이 비례대표제 도입을 요구했지만 1989년 총선은 과거의 다수대표제 하에 치러졌다. 다수대표제와 언론 제한을 통해 1989년 4월 총선에서 RCD는 모든 의석을 독차지했다. 1989년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유일한 후보자였고 99%를 득표했다. 그 후 벤 알리 정부는 부흥당과 튀니지노동자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심야 급습, 가택 수색이 일상사가 되었다. 1991년 튀니스 바브수이카 구역의 집권여당 RCD 사무실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고 보안군이 부흥당의 정권 전복 음모를 밝혀냈다고 발표한 후 부흥당을 붕괴시키려는 공세가 더욱 강화되었다. 1990~92년 사이 8,000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그 중 일부는 고문을 받았다. 최소 8명이 고문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벤 알리 집권기에 언론은 일자리가 경쟁적 환경에서 해외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또한 알제리와 이집트를 지목하면서 어떤 종류의 이슬람 정당도 경제적 카오스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2년 말에 이르러 경제성장률이 8% 이상으로 상승하고, 부흥당도 더 이상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1992년 12월 벤 알리는 새로운 선거법을 제정했지만 합법적 야당이 매우 적은 의석만 차지할 수 있게 했다.
벤 알리 집권 후 10년간 보안기구가 극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확장은 내무부와 공식 경찰력 외부에서 이루어졌다. 벤 알리 정부는 예산에서 ‘주권 기금’이라고 명명된 비자금을 활용하여 대통령 직속으로 운영되는 보안기구를 구축했다. 내무부와 대통령 직속 보안기구는 감시와 전화도청, 비디오카세트 위조, 가족 협박, 여권 몰수, 구타, 암살을 자행했다. 저명한 야당 인사뿐만 아니라 기층 노동자, 인권활동가, 대학교수도 그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벤 알리는 부르기바와 매우 상이한 국가-사회관계를 구축했다. 벤 알리가 1986년 내무부 장관이 되기 전 그의 경력은 군대와 보안군이 전부였다. 그는 1970년대 이후로 부르기바가 노동자, 학생, 이슬람주의자를 탄압할 때 이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정치체계는 마비된 상태였고, 경제위기는 당의 전통적 엘리트의 평판을 악화시켰다. 야당과 다른 조직들은 내부 분열과 정부의 억압으로 인해 장애를 겪고 있었다. 즉 벤 알리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조직화된 도전 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가지 요인이 그에게 약점이었다.
첫째, 집권 후 10년 동안 부흥당은 벤 알리 정부의 가장 큰 근심사였다. 특히 알제리 벤자디드 정부의 사례는 충격적이었다. 알제리에서 1988년 대규모 식량폭동이 발발하여 6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1989년 2월 알제리 벤자디드 대통령은 민주화를 약속하며 다당제와 국민투표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알제리 최초로 이슬람 정당이 구성될 수 있었다. 이슬람구국전선(FIS)은 1989년 6월 지방선거에서 55%의 득표율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알제리 군부는 1992년 총선을 취소하고 이슬람구국전선을 불법화하면서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벤 알리는 이슬람 세력이 선거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심했다.
둘째, 벤 알리는 전통적인 정당정치로부터도 자유로웠지만 이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당의 고위인사들이 벤 알리가 기습적으로 대통령직을 차지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이들이 정당, 국가관료, 또는 여타 조직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벤 알리의 권력을 훼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벤 알리는 부르기바의 통치 스타일을 실행하기에는 사회적 기반도 없었고 후원-수혜 네트워크도 없었다. 따라서 벤 아리는 부르기바처럼 강력한 정치인과 사회행위자들 간 경쟁을 촉발시킬 만한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벤 알리는 정당과 국가 관리가 권력 중심부에 진입하는 것을 억제했다. 그는 1970년대에 상당한 권력을 누린 당 고위직을 폐지하고 장관들의 자율성을 축소시켰다. 벤 알리의 내각은 정치경력이 전혀 없거나 당과 국가관료에 연계망이 없는 인사들로 구성되었고, 내각 교체도 빈번히 일어났다. 또한 그는 엘리트와 대중정치의 결합을 파괴하기 위해 시민사회를 무력화했다. 벤 알리도 초기에는 부르기바 스타일로 야당과 사회단체를 속박하려 시도했으나 1989~90년 광범위한 반대 전선이 형성되자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1990년 튀니지 내외부의 반대 집단이 참여한 튀니지구국전선이 결성되었다. 주도 인사는 전 총리 모하메드 음자리와 구 사회주의헌법당 인사들이었다. 튀니지구국전선은 부르기바 정권의 인사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 부흥당 인사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강력히 규탄하고, 이데올로기와 제휴조직에 상관없이 모든 민주주의자들이 통일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벤 알리 정부는 튀니지구국전선이 부흥당, 튀니지인권연맹(LTDH),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전투적 부위, 합법 야당 등과 동맹을 결성하는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벤 알리 정부는 모든 종류의 파업, 시위, 성명에 대해 강력한 탄압을 가했다. 벨 알리 정부의 억압 전략은 튀니지 시민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사회단체가 시위에 참여할 때 가해지는 위험이 커지고 집단행동을 조직하는 게 훨씬 더 어려워졌다. 벤 알리의 시도가 30년간 유지된 지배 엘리트와 대중정치의 연계를 파괴하자, 튀니지 시민사회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번 튀니지 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튀니지 사회운동은 20여 년간 조직적 저항을 시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튀니지 혁명의 미래

벤 알리 대통령이 제거된 후 혁명의 사회적 측면은 언론에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전통적 지배층이 권력을 잡고 있으며 그들은 혁명의 심화를 원하지 않고 있다. 내각과 주류언론은 혁명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무시하거나 “순전히 물질적 관심사는 튀니지 경제의 안정화를 손상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류 언론은 노동자, 실업자가 경제적 요구를 내거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혁명의 고결한 목표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그들을 비난한고 있다. 특히 주류언론은 튀니지노동조합총연맹과 튀니지노동자공산당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또한 RCD는 해산했지만 그 영향력이 확실히 제거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RCD 인사들은 새롭게 정당을 조직하여 선거에 참여할 수 있으며 벤 알리 치하에서 축적한 인적, 조직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RCD 인사들이 결국 과도정부에서는 배제되었지만 여전히 주요 국가기관과 기업에서 중요 직책을 맡고 있다. 벤 알리 직속 정치경찰은 해체되었지만 벤 알리를 지지했던 민병대, 경찰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특히 농촌지역으로 갈수록 악랄한 파괴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따라서 튀니지 혁명의 미래는 전혀 낙관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튀니지 혁명의 미래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대중운동의 발전 전망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지역별로 자율적인 혁명수호위윈회가 구축되었다. 시드 부지드, 멘젤 부아자이외네, 아가레브, 타흘라 지역의 혁명수호위원회가 그 대표적 사례다. 이 지역에서는 벤 알리 정부의 경찰, 지역정부의 억압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이 건설되었는데 이것이 대중적 조직이자 지방의 운동 지도부로 발전되었다. 벤 알리 정부가 붕괴된 후에도 벤 알리 정부에 충성했던 민병대나 경찰에 의한 공격이 벌어졌고 이에 따라 자위대가 조직되기도 했다. RCD가 붕괴한 후 RCD 사무실이 지역 자치조직의 사무실로 이용되기도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자발적인 조직형태가 유지되기도 하고 어떤 지역에서는 지역 지도부가 선출되기도 했다. 마을위원회는 사실상 지방자치체로 기능하기도 했다. 이는 일상생활을 조직하고 민병대, RCD, 경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토론하기 위한 자기 조직화의 과정이었다. 현재 여러 지역에 건설된 혁명수호위원회는 매우 이질적이지만 기층운동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형태의 조직은 사회정의라는 문제가 다시 튀니지 사회의 최전선에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둘째, 튀니지 혁명 과정에서 UGTT 조합원의 급진화가 나타났다. 또한 노동조합은 부패한 경영자를 제거하고 이를 적임자로 대체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튀니지 텔레콤에서 사유화된 30%의 지분을 재국유화하고 가장 부패한 관리자를 제거하기 위한 노동자 투쟁이 전개되었다. 정부 부문 노동자들도 부패한 장관들을 거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2002년 UGTT 대회는 집행위원회의 임기를 2회로 제한했다. 그에 따라 다음 번 대회에서 UGTT 집행위원회가 대거 교체될 수도 있다. 혁명과정에서 모든 기관들에 대한 민주화 요구가 증진되었기 때문에 UGTT 지도자들과 운동 노선의 변화를 기대할 수도 있다.
또한 2011년 10월로 예정된 제헌의회 선거가 튀니지 혁명의 미래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지, 아니면 퇴행적 역할을 할지 주목해야 한다. 현재 튀니지에는 신생정당을 포함해 50개 정당이 활동하고 있다. 다가올 10월 제헌의회 선거에서 어떤 정당이 얼마나 득표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관측가들은 부흥당의 우세를 점치기도 한다. 혹자는 부흥당의 35% 득표가 가능하다고 말하고 혹자는 25%까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부흥당이 얼마나 대중기반을 지니고 있는지 누구도 말할 수 없다. 부흥당은 1991~2011년 동안, 즉 20년 간 활동이 금지되었으므로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정당도 마찬가지다. 벤 알리 정권 하에서 튀니지 사회가 극단적으로 탈정치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흥당이 1980년대에 벤 알리 정부의 살인적 탄압에 저항하며 호텔에 폭탄 테러를 가하고 튀니지의 핵심산업인 관광산업에 위협을 가했던 사실이나 1991년 튀니스의 RCD 당사에 방화와 공격을 가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튀니지의 세속적 엘리트들은 과거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부흥당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현재 부흥당은 벤 알리 망명 이후 혁명 과정에서 협력했던 단체들이 선거에도 동맹을 유지하여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했다. 부흥당은 어떤 정당도 혼자 힘으로 정국을 이끌 수 없다며 사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노동조합, 인권단체 등이 모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부흥당이 다른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자유, 정교분리, 보통선거, 다당제, 자유언론을 지지한다고 주장하지만, 부흥당이 협력을 원하는 세력이 과연 부흥당을 동반자로 받아들일 것인가 문제는 아직까지 다소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신정국가를 표방하는 해방당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와 경쟁해야 하는 부흥당이 오히려 앞으로 이슬람적 요소를 강조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현재 튀니지에서는 선거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지만 튀니지 혁명의 미래는 기층 조직화, 대중운동의 발전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튀니지 혁명 과정에서 제기된 광범위한 사회변혁 요구를 담아내는 대중운동이 발전할 때만 제헌의회가 튀니지 민중에게 새로운 기회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이슬람주의와 무슬림형제단

튀니지 제헌의회 선거에서 부흥당이 가장 많은 득표를 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부흥당이 가맹한 조직인 <무슬림형제단>과 이슬람주의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에 뿌리를 둔 조직이다.
이슬람주의는 다양한 용어로 표현된다. 이슬람 근본주의(Islamic Fundamentalism, 또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문자주의적 해석에 기초한 경전 중심주의, 구원에서 교회의 중재역할 부인, 세속화의 거부 등에서 볼 수 있는 19세기 말 미국의 개신교 근본주의와 유사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슬람 절대주의(Islamic Integralism)는 19세기 말 나타난 로마 카톨릭의 보수적 경향처럼 여타 사상, 종교의 존재가치를 전면 부정하고 그 자체로 충분한 이슬람 원리를 총체적으로 세상에 실현시키려는 측면을 강조한다. 이슬람주의(Islamism)는 이슬람 원리의 실현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측면을 강조한다. 정치적 이슬람(political islam)은 현재 이슬람 종교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슬람 급진주의(Radical Islam, Islamic Radicalism)는 현 사회체제에 대한 평가와 대응방식, 교리해석에서 나타나는 급진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슬람주의는 이슬람의 가치를 세속적인 세계에 적용시키려는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을 뜻한다는 점에서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로 볼 수 있다. 현실세계의 이슬람은 제도권 정치세력으로서의 이슬람과 저항세력으로서의 이슬람, 아랍 근대성의 상징으로서 이슬람과 보수·반동의 주역으로서 이슬람이 공존한다. 따라서 통일적인 중동, 또는 동질적인 아랍사회를 전제로 한 이슬람의 정치와 종교나 아랍의 이슬람주의에 대한 논의는 모두 부적절하다.
1928년에 설립된 무슬림형제단의 창시자 하산 알 바나가 대중적인 지지를 얻게 된 것은 1936~38년이었고, 이 시기에 회원 수가 300명에서 20만 명으로 늘어났다. 무슬림형제단은 평등하고 부유하며 자유로운 이슬람사회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내세웠고 그 수단으로서 전도단, 교육, 교리화, 이슬람사원·학교·병원·의료봉사시설 건설을 제시했다. 이런 수단을 바탕으로 그는 모든 정당의 금지, 정부의 부패행위 종료, 사법권의 독립, 교육과 대중교육에 대한 정부의 관리 강화를 주장했다. 그 시기에 무슬림형제단은 내적으로는 교육, 의료 등 사회봉사 활동에 헌신하고 외적으로는 당시 떠오르고 있던 팔레스타인 문제에 집중하면서 대중의 폭발적 지지를 모을 수 있었다.
1948년 12월 28일 무슬림형제단원이 이집트 수상이었던 노크라쉬를 암살하자(수상은 무슬림형제단을 불법화하려 함) 정부는 1949년 2월 지도자 하산 알 바나를 암살했다. 나세르 혁명 후 무슬림형제단은 1957년 이집트에서 불법단체가 되고 활동이 금지되었다. (1954년 무슬림형제단은 나세르 혁명정부가 영국군이 6년 이상 더 주둔하도록 영국과 협정을 맺자 나세르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70년대 사타트가 좌파에 대한 경쟁세력으로 형제단을 활용하였고 형제단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법에 반영했다. 즉 ‘위로부터 재이슬람화’가 추진되었다. 이러한 제도화를 배경으로 형제단은 무력사용을 포기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조직원들은 자마 이슬라미야를 구성하고 이들이 1981년 사다트 암살에 관여하게 되었다.
1984년 총선에서 무바라크 정권은 형제단을 정당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종교조직으로 인정하면서 유화정책을 펼쳤다. 형제단 소속 정치인은 무소속이나 다른 정당 후보자로 국회에 진출했다. 1990년대에 오면 형제단은 적극적으로 세속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인정하였다. ‘필수불가결한 민주주의’, ‘여성의 지위’, ‘소수자로서 형제단과 콥트족의 권리’에 대한 선언이 발표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양복을 착용하고 면도를 하고 단체의 로고를 부드럽게 수정하면서 이미지 개선을 추구했다.
한편 1999년 자마 이슬라미야도 모든 형태의 폭력을 중단한다고 선언했고, 지하드 역사 유사한 내용의 전술변화를 단행했다. 다수는 폭력사용 및 대정부투쟁 중단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받아들였지만 일부 소수는 글로벌한 차원의 테러리즘으로 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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