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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4.1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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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과 현장] 희망텐트, 열 번은 더 모이자

쌍용차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존을 위하여

김유진 | 조직국장
2009년 쌍용차 법정관리와 대량 정리해고 이후 3년 동안 21명의 노동자와 가족이 숨졌다. 정리해고가 부른 끝없는 비극을 막고자 사람들은 작년 12월부터 쌍용차 앞에 ‘희망텐트촌’을 짓기 시작했다. 희망텐트촌에는 2010년 ‘희망버스’의 사회적 연대와 승리를 평택으로 옮겨오자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소망이 깃들어 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공장 앞에 텐트를 치고 농성 중이다. 비정규직 해고자들은 희망텐트보다 먼저 텐트를 쳤다. 지역 국회의원들의 사무실 앞에 조그만 텐트를 치고 몇 달 째 거리생활 중이다. 그리고 매월 한 번 사람들이 모여 공장 앞이 미어터지도록 텐트를 치고 밤새 쌍용차를 포위하는 난장을 연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희망텐트’라 부른다. 1차 희망텐트는 ‘와락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으로 12월 23일~24일에, 2차는 1월 13일~14일, 3차는 2월 11일~12일에 진행되었다. 횟수를 더할 때마다 규모가 커져 3차에는 4,000여 명이 모였다.
2010년 희망버스가 등장한 이래 전국 각지에 흩어져 평소에 보기 어려운 사람들을 한 달에 한 번 만날 수 있었다. 다른 지역에 있는 활동가들, 여러 연대기구에서 함께했던 동지들, 페이스북 친구들. 그리고 무엇보다 생계문제, 건강문제, 가족문제 등으로 투쟁 현장을 떠나있었던 쌍용차 조합원들을 만나는 것이 좋다. 반갑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 그들이 눈 앞에 ‘살아있다’는 것에 큰 안도를 느낀다.


쌍용차 노동자들, 오늘도 무사한가요?

2차 희망텐트에서 거의 반 년 만에 만난 김00씨는 2009년 파업 당시 노동조합 간부였고 파업 후에도 활동을 했다. 77일 내내 전쟁같은 현장을 지켰던 그는 파업이 끝난 직후 경찰조사를 받을 때, ‘노조를 왜 했는가?’라는 질문에 ‘노조를 하면 돈을 아낀다고 하더라고요’라고 대답했단다. 사람들 입에서 돌고 돈 말이라 얼마나 정확할지 모르지만, 노조 간부가 경찰조사에서 황당한 말을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때는 몰랐다. 그 말이 진심이 아니었고, 임기응변도 농담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중에 그가 웃으면서 이야기해주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했었는지 모른다고, 머리 옆에다 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렸다. 그는 공장을 나온 후에도 계속 헬리콥터 환청에 시달렸고 몇 달 동안 바깥출입도 전혀 못했다. 요즘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는 해고자들 중에서 잘 이겨내고 있는 편일 것이다.
21명, 그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성 질환과 자살로 세상을 떠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노동자들의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점거파업을 시작한 직후 한 노동자가 신경성 스트레스로 인한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 전에 이미 노동자의 아내들이 유산을 했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망한 터였다. 2009년 파업 당시 실태조사에서 중증도 이상 우울증을 보인 노동자가 54.9%였고, 파업 직후에는 71.1%, 2011년 故 임00 조합원의 죽음 이후 세 번째 조사에서는 80%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러한 후유증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0년 2월 차 안에서 연탄불 피워 자살한 김00씨. 쌍용차 출신이라는 낙인과 생활고에 끝내 자살한 황00씨. 2011년 1월 이혼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연탄불 피워 자살한 서00씨, 2월과 10월 똑같은 방법으로 돌아가신 조00씨, 고00씨. 10월에 대인기피증과 몇 차례 자살시도 끝에 자기 방에서 목을 맨 35세 김00씨. 11월, 해고되지 않았지만 어쩐 일인지 야산에서 목을 맨 윤00씨.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해고자니 비해고자니, 비정규직이니 무급휴직이니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아예 다른 세계를 선택한 사람도 있다. 2010년 7월, 쌍용차 파업에 참여했던 계00씨는 집 안에 물과 비상식량을 잔뜩 쌓아두고, 베란다에는 망원경을 놓고 노트북도 여러 대 설치해 24시간 바깥 상황을 살피는 등 ‘나홀로 파업’을 하다 발견되어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감당하기 힘든 충격 때문에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정신분열증상이라고 했다.
살고 싶었지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다. 대표적인 스트레스성 질환인 심근경색과 뇌출혈이 30-40대 젊은 남자들의 사인이라니. 그들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2009년 파업 당시 엄00씨의 뇌출혈 사망에 이어 관제데모에 동원된 김00씨가 허혈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2010년 5월 분사화 된 회사에서 일하다 심장이 멈춘 000씨. 11월 경제난에 시달리다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김00씨. 2011년 2월 회사의 복직약속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무급휴직자 임00씨. 5월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돌연사한 강00씨. 그리고 해고, 비정규직 채용, 계약해지, 정신질환 그 모든 고통을 겪다 2012년 1월 돌연사한 강00씨.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터질듯 한 심장을 움켜쥐고 깨질듯 한 머리를 부여잡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지 모른다. 이것은 사회적 살인이다.


가족에게로 번지는 죽음의 그림자

쌍용차 노동자들은 가족들이 자기만큼 다치는 모습을 봐야했다. 쌍용차 가족들의 지역공동체는 산산조각 났다. 아내, 부모, 아이들까지 산 자(비해고자)와 죽은 자(해고자) 편으로 나뉘어 싸우거나 서로 외면해야 했고, 파업이 끝난 후엔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가정도 산산조각 났다. 노동자들은 쌍용차 출신이라 재취업이 어렵고, 해고와 강제진압의 지워지지 않는 고통으로 망가져 갔다.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곱게 보지 않았고, 그들의 고통은 이전에 정규직으로 편하게 잘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며 그들이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쌍용차 가족들은 이혼, 자녀들의 비행, 자살시도 등에 직면했다.
2009년 파업 당시 회사의 협박과 강제진압 소식에 노동조합 간부 이00씨의 아내가 자살했다. 2010년 4월에는 조합원 임00씨의 아내가 아파트 11층에서 몸을 던졌다. 그녀는 우울증으로 약을 먹고 있었다. 2011년 11월에는 차00씨의 아내 오00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그들 가족은 희망퇴직 후 먼 곳으로 이사했다. 차00씨는 공사장을 전전하며 며칠 씩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카드회사를 다니던 아내는 폐렴을 앓은 뒤 어느날 일어나지 못했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수백 번 전화를 걸었지만 아빠의 전화는 고장 나 있었다. 아빠에겐 전화가 고장 나도 문제없을 정도의 인간관계만이 남아있었다. 다른 곳에 전화를 걸 생각도 못할 정도로 당황한 아이들은 엄마의 주검과 함께 며칠을 보냈다.
문제는 죽음에 이른 사람들만이 아니다. TV 인터뷰에서 조합원 신00씨는 어느 날 베란다 문을 열고 있는 아내를 붙잡았다고 했다. 많은 가족들이 ‘아, 죽으면 이 모든 게 끝날까’하며 문득 목에 넥타이를 묶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번 달만 버텨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이혼해야지’ 매일 생각한다는 아내도 있었다. 2011년 4월 PD수첩에 이런 인터뷰를 한 모든 사람들이 거의 한번쯤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투쟁하는 사람이라고, 노동조합 간부라고, 그들의 가족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더욱 심각해질 문제는 아이들이다. 아빠가 전경버스로 잡혀가는 걸 본 아이는 아직도 버스를 타지 못한다. 아빠를 때리려는 사람을 죽이겠다고 칼, 총 같은 장난감을 밤낮 지니고 다니는 아이도 있다. 한 아이는 나무 위에 올라가 ‘나 자살할 거야’라고 외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춘기 아이들은 비행을 일삼기도 하고 자살시도를 하기도 했다. 조그만 가슴에 스스로 이해하기 힘든 고통을 품게 된 아이들은 ‘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가끔 눈물이 난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 아빠가 힘드니까 자기는 힘들다 말하지 않는다.
2011년 심리치료가 시작되고 희망버스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자기 집과 가족 밖으로 나온 쌍용차 노동자들이 말했다. 2년 넘게 아이에게 용돈 한 번 줘 본적이 없고, 파업 이후 한 번도 가족들과 밖으로 놀러간 적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탓하고 가두었다. 자기를 때린 자는 너무나 거대했고, 자신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대했던 폭력의 생생한 기억이 그들을 압도했다. 시간이 지나도 상처는 작아지지 않고 증폭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옮아갔다.
이들은 파업 후에도 노동조합 활동을 했고, 나와 함께 술 마시고 밥 먹던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이렇게 밖에 나오고, 심리치료를 받고, 소식을 듣곤 하는 사람들이 이 정도다. 희망퇴직이든, 무급휴직이든, 정리해고든 그렇게 쫓겨난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 족히 4,000명은 될 그 사람들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2009년의 고통을 되새기고 있을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작년 1월 故 임00씨 죽음을 계기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가 심리치유를 자청했다. 그는 쌍용차 노동자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정신의학에서는 자살률이 가장 높은 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무자비한 폭력을 겪은 이들은 당시의 공포, 불안, 분노, 적개심 등이 시시각각 떠오르기 때문에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자기 분노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길 가다가 번개를 맞은 사람’과 같다고 했다. 자기는 맞았고 아픈데 정작 자신을 다치게 한 이는 너무나 멀고 거대해 따질 상대를 찾을 수가 없고, 그래서 공동체 내부에서 적을 찾게 되고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질환 문제가 가시화되기 전에는 쌍용차 노동자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워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중요한 일로 사람을 불러놓고는 헛걸음을 하게 만든 일, 무언가를 급히 해달라고 부탁해놓고 해 놓으면 쓸모가 없어진 일이 여러 차례였다. 밤새 고생했는데 그럴 때는 정말 나도 미칠 것 같았다. 연대단위에서 같이 회의한 내용도 노조 사람들끼리는 소통이 되지 않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고, 투쟁 계획에 대한 의견은 좀처럼 모이질 않았다. 별 것 아닌 일로 싸우는 건 일상이었다. 필자에게 그들은 극한의 국가폭력에 맞서 77일을 견딘 놀라운 사람들이었고 한편 실의와 고통에 찬 사람들이기도 했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하기도 했다. 모든 게 더디고 답답했다. 그들을 ‘자기 공장에만 갇혀 자기들 좋을 대로 살아 온 어쩔 수 없는 정규직노동자’라고 느끼며 분노하는 지경에 이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벼락 맞은 사람’ 이야기를 듣고 내 분노와 의문은 대부분 사그라졌다. 노동조합 간부들이라 해서 그런 충격을 쉬이 극복할 리 없었던 것이다. 나를 바람맞혔던 그 사람이 약을 먹고 자살시도를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TV를 통해 들었다. 그들은 자신을 탓하다가 서로를 원망하기도 하고, 그래서 싸웠을 것이다. 서로 얼굴을 보면 옛 생각이 나고 괴로워서, 함께 있어도 말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도 마치 남의 일 보듯 거리두기를 해버리곤 했을 것이다. 그래도 미운 동료들이나마 옆에 있었던 사람들은 나았을 거다. 죽음에 이른 수많은 이들에 비하면.


쌍용차 노동자의 사회적 질환을 치유하는 사회적 위로와 연대를

2011년 1월, 故 임00씨 사망을 계기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말 그대로 비극이었다. 그의 부인은 우울증으로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먼저 죽음을 택했다.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그도 갑자기 심장이 멈춰 버렸다. 아이들이 등굣길에 인사하려는데, 아버지는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아빠의 실업과 엄마의 죽음에 이미 자살시도까지 했던 아이들. 이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아빠는 끝내 자기 목숨도 지키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고,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해고노동자와 가족에 대한 심리치유가 있었고, 아이들을 지원하는 레몬트리공작단과 시민들이 있었고, 심리치유센터 ‘와락’이 세워졌다. 한편 한진중공업으로 향한 노동자 시민들의 희망버스가 있었다. 한진중공업과 유성기업 노동자들에게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자며, 자기 역할을 찾아 나선 쌍용차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희망텐트라는 이름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쌍용차 앞, 고통의 발원지에 모였다.
다시 쌍용차 평택 공장 정문 앞에 모이는 게 왜 이렇게 더뎠을까 생각했다. 문득 해고된 후에도 계속 싸웠던 노동자들에게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들은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고 설득하기 어려운 상태였던 것 같다. 주위에서는 그들을 ‘그나마 괜찮은’ 사람들, 여전히 투쟁하는 ‘노동조합 활동가와 주변 사람들’로 인식하고, 그들의 상태-질환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 본인들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가족들의 죽음을 ‘사회적 살인’이라 말했지만 그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질병’을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이 심리치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통곡을 하고, 비로소 자기 상처를 이야기하게 되었을 때 변화는 시작되었던 것 같다.
지난 3년 동안 그들은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죽음을 막기 위해 버텨왔다. 하지만 어떤 정당한 논리도, 상황 변화도 많은 동료들을 공장 앞으로 불러내지 못했다. 자기 문제를 가지고 자기 회사 앞에서 싸우는데 나서지 못하고 쭈뼛쭈뼛했다. 그들은 맨 몸으로 자기 고통의 근원과 마주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어떤 사회적 안전망도 없이 해고되고 망가져버린 그들에게는 이해와 인정이라는 안전망이, 함께 싸워줄 사람들이라는 안전망이 꼭 필요했다. ‘집단적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집단적 이해’, 치유와 원상회복을 위한 ‘사회적 장치’다.


희망텐트, 열 번은 더 모이자

2012년 희망텐트에 2011년 희망버스의 승리가 이어질까? 조건은 많이 다르다. 한진중공업에는 김진숙이라는 상징이 있었고, 공장 안에서 민주노조를 지킨 이들이 있었다. 쌍용차는 계속 외국의 먹튀자본에게 활용되고 있으며 전망이 불투명하다. 공장 안 사람들은 밖에 있는 노조가 공장을 망하게 한다고 불안해한다. 그러니 희망버스보다 더 질기고 큰 싸움을 만들어가야 한다. 희망버스가 5번 영도로 향했다면 희망텐트는 열 번은 더 쳐야 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공장 앞이 아닌 어디라도 모여서 싸움을 키우고 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희망텐트를 이어오면서 금속노조와 민주노총 등 조직된 노동자들이 보인 연대를 지키고 확대하는 것이 투쟁의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살인과 그들이 겪고 있는 집단적 정신질환,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분명하다. 경제위기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고,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를 테러리스트 진압하듯 짓밟고, 세계를 떠도는 먹튀자본에게 자유를 준 정부와 산업은행, 쌍용차와 상하이차, 마힌드라. 그들이 반드시 책임지게 해야 한다. 우리가 비록 긴 시간을 돌아왔어도, 뚜렷한 투쟁의 전망보다는 작은 위로로 다시 시작한다 해도,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는 날까지 떠나지 말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들을 붙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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