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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2.9-10.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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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 후 가장 큰 위기에 처한 시리아 민중운동

시리아 봉기의 쟁점

임필수 | 노동자운동연구소 부소장
2011년 1월에 시작된 시리아 반정부 시위가 사실상 내전으로 전환되었다. 2012년 7월까지 사망자가 2만 명을 넘었다. 또한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15만 명이 주변국인 레바논, 터키, 요르단, 이라크에 설치된 난민 캠프에 수용되었다. 유엔은 시리아 분쟁을 내전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 정부와 반정부 세력 모두 내전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부는 불법적인 테러집단에 대응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반정부 세력은 독재와 억압에 대항하는 적법한 봉기라고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빠른 시일 내에 정부군과 반정부 세력 사이의 정치적 대화나 휴전, 중재가 이뤄질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유엔 특사 코피 아난은 8월 초 사임 의사를 밝혔고, 시리아에 파견된 유엔감시단 활동도 뚜렷한 해결책 없이 8월 16일 종료되었다. 8월 3일 유엔 총회는 ‘시리아 규탄 결의안’을 채택하여 ‘유엔 안보리가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 때문에 시리아 문제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총회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중국과 러시아의 행태에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시리아 봉기가 발생하자 서방 관측가들은 아사드 정권이 곧 붕괴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시리아 사태가 장기화되자 아사드 정권이 상당히 내구성이 있다며 정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시리아 정권은 통일적이고 응집력이 강했던 반면, 시리아 사회는 이질적이고 분할되어 있었다. 정권은 종파, 부족, 계급, 지역에 따라 시리아 사회를 분할하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시리아에서 현재 벌이지고 있는 전투가 ‘대리전’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시리아 분쟁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 전략적 경쟁을 지역적 배경으로 한다. 또한 미국과 러시아의 긴장은 그 적대관계를 강화한다. 지역적, 국제적 경쟁, 적대관계는 시리아를 점점 더 고강도 폭력으로 이끌 가능성이 크다.
시리아 상황을 전망하려면 우선 시리아 사회의 계급적, 사회적 분할을 인식해야 한다. 누가 시리아 정권을 지지하는가? 시리아 봉기 세력과 반정부군은 누구인가?

누가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가?

시리아 정권을 지지하는 세 부류의 핵심 집단이 있다. 군사정보기관의 고위 인사, 신흥 자본가 계급, 모든 종교 분파의 고위 인사.
전 대통령 하피즈 아사드는 1970년대 정권을 장악한 후 군부와 정부 관리들의 거대한 부패를 용인했다. 특히 대통령의 가족과 가장 충성스런 보좌진을 포함한 권력의 핵심층은 국가기구를 현금인출기처럼 사용했다.
또한 국가와 연계된 신흥 자본가계급은 다양한 부문에서 부를 축적했다. 1991년 투자법은 신흥계급의 돈 세탁을 위한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법령은 사적 부문 투자를 허용하고 수출입 산업을 장려했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는 국가 통제 하에 있었고, 부패가 만연한 시스템이 지속되었다. 2000년 바샤르 알아사드가 권력을 인수한 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소규모 과두세력에 큰 이익을 주었다. 바샤르의 사촌인 라미 마클르푸는 정권이 주도한 마피아 스타일의 사유화를 대표한다. (그는 시리아 전기통신 사업을 지배한다.) 사유화 과정은 바샤르 친족에 의한 부의 독점을 창출했지만 상품, 서비스의 질은 하락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상위 계급과, 특히 아랍 걸프 지역의 외국인 투자자는 큰 이익을 얻었지만 시리아 민중의 다수는 인플레이션과 생계비 상승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시리아의 농업부문과 공공부문이 쇠퇴했지만, 그 부문을 강화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 제시되지 않았다.
모든 종교 분파의 고위 인사들도 지난 20년간 정권으로부터 큰 이익을 얻었다. 시리아 정권과 보안기구는 특히 1980년대 이후로 수니파 공동체를 포함해 종교 인사들과 정치적, 경제적 연계를 구축했다. 종교 기관들은 마치 시리아를 대표하는 ‘시민사회’인 것처럼 행동했다. 시리아 정권의 행동은 시리아가 세속국가라는 공식적 입장과 완전히 모순된다. 정치담론에서 종교 용어가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1980년대 이후로 종교 사원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1만 개의 이슬람 사원과 수백 개의 이슬람 학교가 건설되었다. 문학, 예술에 대한 검열은 늘었으나 종교 서적이 도서관을 채우고, 고등교육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바아스당과 보안기구: 혁명 정당에서 국가 관료로

현재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이 속한 지배정당은 아랍사회주의부흥당(약칭 바아스당)이다. 아랍부흥당은 1947년 시리아에서 설립되었고 곧 아랍국가들에 지부를 건설했다. 1952년 아랍부흥당은 아랍사회주의당과 통합하여 아랍사회주의부흥당으로 재편되었다. 바아스당의 슬로건은 ‘통일, 자유, 사회주의’다. 이는 아랍세계를 단일 국가로 통합하고, 서구 제국주의의 아랍 지배를 종식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이상을 담았다. 바아스당은 계급투쟁 사상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공산당과 차별적이었으나 주요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조합 조직화, 토지개혁을 지지했다.
바아스당은 1952년 시리아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될 정도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합한 통일아랍공화국(1958–1961년)이 해체된 후 바아스당의 군사위원회가 1963년 5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라크의 경우, 바아스당 이라크지부 성원들도 참여한 자유장교운동이 1958년 권력을 장악했고, 1963년 2월 사담 후세인이 주도한 쿠데타로 바아스당이 권력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하지만 시리아 바아스당 내부에서 군사위원회와 민간인 지도부 사이에 권력투쟁이 발생해 결국 1966년 쿠데타로 민간인으로 구성된 전국지도부가 축출되었다. (이 시점에 시리아와 이라크 바아스당의 분할도 발생한다.) 1970년 11월에 또다시 쿠데타가 발생해 30년간 권좌를 장악하게 될 하피즈 알아사드가 권력의 전면에 나섰다.
바아스당 초기의 사회주의 이념은 시리아의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에 매력적이었다. 사회주의 이념은 농촌 빈민층에 경제적 기회를 주고 세속주의 이념은 소수 종파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제거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많은 알라위파 청년들이 당원에 가입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1955년 알라위파는 군 하사관의 65%를 차지하게 된다. 군대는 소수 종파에 속한 청년이 생계를 해결하는 곳이자 정치적 야망을 품게 한 공간이었다.
특히 1963년 바아스당이 집권한 후 소속 종파가 군 인사 기준으로 부상한다. 알라위, 두루즈, 기독교 출신에 우선권이 부여되었고 수니파는 차별을 받는다. 점차 바아스당 간부는 친구나 같은 가문, 부족, 종파 출신에서 충원되었다. 그에 따라 1963-1966년 동안 바아스당의 성격은 완전히 변화했다.
그 후 바아스당은 국가와 일체화되었다. 관료제가 번성하고 하피즈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충성후원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는 시리아 사회가 ‘족벌 자본주의’로 변모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정부 정책과 기본적으로 일치하는 입장을 지닌 다른 사회주의 정당의 활동은 허용되었다. 1972년 합법화된 야당들이 민족진보전선을 구성했고 여기에는 공산당, 아랍사회주의연맹, 아랍사회당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야당은 바아스당의 하위 파트너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2000년 하피즈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바샤르가 시리아 대통령직과 바아스당 지역지도부 사무총장을 승계했다. 다른 인사가 바아스 전국지도부 사무총장을 맡았으나 이는 명목에 불과하다. 바아스당은 의회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대중의 지지라기보다는 선거에 대한 강력한 통제 때문이다. 시리아 봉기가 발생한 후 2012년 2월 헌법개정을 통해 ‘바아스당이 사회와 국가의 지도 정당이다’라는 8조는 삭제되었으나, 봉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신흥 자본가계급: 아랍사회주의에서 족벌자본주의로

시리아 사태에 관한 분석에서 항상 누락되는 사실이 있다. 1970년대 이후로 정권이 자본가 집단과 네트워크를 구축하였고, 이러한 관계는 과거나 지금이나 위기상황에서 정권을 지지하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1963년 혁명이 성공한 후 바아스당은 아랍식 사회주의 정책(정확히 말하자면 국가자본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1965년 정부는 100개의 회사를 국유화했고 사유 토지를 몰수, 재분배했다. 하지만 1970년대 하피즈는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같은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는 보수적 대기업가들에게 손을 뻗었다. 그들은 1960년대 바아스당의 국유화 정책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정권은 상당한 자본과 전문지식, 외국기업과 연계를 지닌 기업가들을 선택했다. 이러한 기업가들은 다양한 배경을 지녔는데 일부는 구 부르주아 출신이었고, 일부는 1973년 석유호황으로 큰 이익을 본 공공부문의 신진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공공기업 입찰에 참여해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기업을 운영했다.
기업가들과의 관계회복 정책은 1970년대 말, 80년대 초 정치적 결실을 거두었다. 그 때 정권은 무슬림 형제단이 주도한 반란에 직면해 있었다. 정부가 1973년 석유호황 이후 로 대규모 국영기업의 상품을 통해 소상인의 상태를 악화시키면서 무슬림 형제단 간부층을 이루는 전통시장 주민, 소규모 상인과 수공업자의 불만이 커졌다. 대기업 공장은 시리아 전역으로 퍼져갔고 특히 시리아 도시 지역의 보수적 수니파의 분노를 샀다. 수니파 지역은 이미 정권이 억압적이라고 인식한데다, ‘알라위파’가 주도하기 때문에 이단적이라고 보았다. 또한 바아스당 집권 이후 처음으로 정권이 대규모 민간기업 설립을 허용하자 수니 이슬람 성향의 소기업과 국가 간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무슬림 형제단과의 대치상태는 6년간 지속되었다. 국가로부터 특혜를 얻은 도시의 수니파 대기업가들은 아사드 정권을 지지했고, 시리아 상공회의소 의장은 1982년의 역사적 회합에서 정권을 변함없이 지지한다고 약속했다. 정권이 북서부 도시 하마에서 벌어진 봉기를 진압하면서 최소한 1만 5천 명의 주민이 죽었다.
1982년 이후로 비공식적 국가, 기업 파트너십은 번성했다. 대기업가는 다양한 특혜를 누렸다. 공공부문 프로젝트의 커미션, 세금 면제, 특정 상품에 대한 보호무역 등. 이러한 관계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경제정책에 불균형 효과를 미치기 시작했다. 국가 관리와 사적 기업인으로 구성된 지도위원회는 명목상의 ‘사회주의 5개년 계획’ 초안을 작성하는 각종 위원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기서 사적 기업인은 그 자신이 국가관리이거나 그 가족이었다. 따라서 정책을 입안하는 자와 그 정책의 효과를 누리는 자가 같은 기업에 속한 셈이었고, 경제정책 입안에서 부패가 만연했다.
1990년대 총리실은 경제계획의 핵심부서였다. 기업을 운영하는 국가관리는 신속하게 이윤을 획득할 방법을 선택했다. 즉 그들은 산업보다는 상업을, 농촌보다는 도시를 선호했다. 총리를 포함해 고위 관리는 직업 자동차 대리점과 같은 최고급 소비재 판매업을 운영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 대통령 부인의 조카는 새로운 거물로 부상해 관광산업이나 자유무역지대를 통해 큰 돈을 벌었고 그 후 전기통신 사업에 뛰어들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시리아는 과거 지향한 아랍식 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에서 아주 탁월한 족벌자본주의로 변모했다. 1991년에 시작된 경제 자유화는 경제계 거물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 주었다. 사적 부문이 공공 부문을 능가하기 시작했지만 사적 부문의 가장 부유한 인사는 국가 관리, 정치가 또는 그들의 가족이었다. 1990년대 경제성장은 소비 증가에 따른 단기 효과에 불과했고, 2000년대 이후 경제는 슬럼프에 빠졌다. 5-7%에 이르던 성장률은 1997년 이후로 1-2%에 머물렀다.
2000년 권력을 승계한 바샤르 아사드는 자유화 정책으로 경제하강을 막고자 했다. 그는 국가보조금을 줄이고, 40년 만에 처음으로 민간 은행을 허용하고, 주식시장을 준비했다. 2005년 정권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선언한 후 국가와 기업의 결합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국가에 공공서비스, 보조금, 복지를 의존하는 시리아인 다수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새로운 정책은 족벌주의를 영구화했고, 정권과 결탁한 가문들이 민간 부문을 지배하고 공공 자산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금도 대기업가들은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 대통령의 혈족뿐만 아니라 주요 기업을 지배하는 가문들도 정권을 굳건히 떠받들고 있다. 경제계 거물들은 정권과 운명을 같이 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반대편에 선다는 것은 엄청난 도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종교세력과의 갈등과 타협

1970년대 초 하피즈는 수니파 종교 세력과 타협을 모색했다. 대통령의 이슬람 선서규정을 부활시켰고, 교회신축을 장려하고, 성직자들의 봉급을 올렸으며, 하피즈 자신이 앞장서서 신앙심을 선전했다. 그러던 1973년 시리아 헌법에서 ‘대통령의 종교는 무슬림이어야 한다’는 조항을 삭제하려 시도하자 무슬림 폭동이 발생했다. 나아가 1976년 레바논 내전에서 시리아 정부가 마론파 기독교도를 지원하자 무슬림 형제단의 분노가 폭발했다. 국유화나 토지개혁으로 몰락한 계층들도 무슬림 형제단을 지지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비폭력을 주장하는 ‘요르단 훈련파’와 폭력형명을 주장하는 ‘알레포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형제단의 무장대원은 1978년에 알레포 지역에서만 5-7천 명에 이르렀고 전국적으로 3만여 명에 달했다. 1979-1980년 잇달아 무슬림 형제단과 보안군 사이 충돌이 발생했다. 1980년 무슬림형제단의 하피즈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 하피즈 정권은 ‘무슬림 형제단 단원은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실제로는 사형 확정 후 보통 12년으로 감형했다.) 1982년 2월 무슬림 형제단이 바아스당 간부 100명을 죽이자, 군대가 탱크와 헬기를 동원해 하마시를 공격해 최소 1만 5천 명이 사망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무슬림 형제단은 붕괴했고, 수천 명이 구속되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1980년대 후반 하피즈는 하마 사건의 여파를 완화하기 위해 다시금 타협책을 내놓았다. 무슬림 형제단 구속자를 석방하고 해외 망명 지도자의 귀국을 허용했다. 그리고 이슬람 사원 건설을 확대하고 쿠란학교를 개설했고 다양한 이슬람 문화활동을 장려했다.
1990년대 초반 하피즈 정권은 무슬림 형제단과 전략적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걸프전 이후로 미국-이스라엘-터키 동맹관계 형성이 중요한 계기였다. 이 시기에 무슬림 형제단은 아랍 각국에서 세속주의 정권에 대항하는 투쟁 대신 반이스라엘, 반미 투쟁에 집중했고, 시리아 정권은 이를 활용해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고자 했다.

반정부 세력은 누구인가?

최근 시리아 경제 상황은 대중적 저항을 촉발시킨 결정적 매개가 되었다. 2003년 이후 여러 해 동안 가뭄이 들자 농촌에서 도시로 거대한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2009년까지 약 백만 명 이상이 도시로 이주했다. 이는 시리아의 사회적, 지역적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다. 다마스쿠스, 알레포와 같은 대도시가 이주민을 흡수했으나 인프라 투자는 매우 부족했다. 지방도시들, 예를 들어 디라, 이들리브, 홈스, 하마와 같은 도시와 그 배후 지역은 이제 반란의 주요 전투지역이 되었다. 농촌 지역은 정부의 보조금 축소, 투자의 부족, 도시화의 영향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파괴되고 있고 수십 년에 걸친 권위주의와 부정부패로 인해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다고 믿는다.
시리아 봉기 전 빈곤선 이하 인구의 비중이 급상승했다. 그 비중은 2000년 11%에서 2010년 33%로 올라갔는데, 이는 700만 명 이상이 빈곤선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업률도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20-25% 수준에 이른다. 특히 25세 이하의 실업률은 55%에 이른다. (30세 이하 인구 비중은 55%다.) 매년 38만 명 정도가 노동시장에 나오지만 시리아 경제는 그들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시리아 정부는 10개년 계획에서 매년 25만 개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으나 전혀 실현할 수 없었다. 2010년 4월 새로운 노동법이 도입되었으나 명백히 고용주에게 유리했다. 물가상승과 생계비 부족, 높은 실업률, 정부보조금 감소 등 시리아 주민이 경험한 현실은 아랍의 봉기가 발생한 다른 지역, 국가와 완전히 동일했다.

시리아봉기 후 전국조직 형성: 시리아지역조정위원회, 시리아혁명최고평의회, 시리아혁명총사령부

시리아 봉기가 전개되면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청년들을 주축으로 삼는 세 개의 전국적 집단이 형성되었다. 시리아지역조정위원회(LCC)는 2011년 3월에 설립된 조직으로 시리아 봉기를 조직하거나 그에 관한 정보를 교류하는 지역 집단들의 네트워크다. 이들은 시리아 봉기의 ‘중추’라는 평가를 들었다. 네트워크는 매우 다양한 종교적, 계급적 배경을 지닌 청년 시위자들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지역위원회는 다마스쿠스 외곽의 다라야에서 구성되었고, 그 후 홈스를 거쳐 2012년 2월 현재 총 14개 지역에 구성되어 있다. 지역조정위원회는 시민불복종 운동이나 총파업을 호소하며 평화적 운동을 지지한다. 지역조정위원회는 2011년 8월 무장저항과 국제사회의 군사개입에 호소하려는 경향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군사화는 대중적 지지와 도덕적 우월성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조정위원회는 평화적 시위가 혁명 후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더 좋은 조건을 창출할 것이며, 군사화는 시리아 사회를 위한 적법한 기초를 만들 수 없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하나의 전국조직 중 하나인 시리아혁명최고평의회(SCSR)도 주로 청년들로 이뤄진 단체다. 최고평의회는 정치적 해결책이 필요하지만 무장투쟁의 중요성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지역조정위원회과 구분된다. 최고평의회는 시리아민족위원회(SNC)에 대표를 보냈지만, 공식 구성원은 아니다. (SNC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시리아혁명총사령부(SRGC)는 2011년 8월 19일 터기 이스탄불에서 창립을 선언했다. 총사령부는 시리아 내부 40개 조직이 연합한 조직이다. 혁명총사령부는 지역 군사위원회를 통한 무장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앞의 두 조직과 달리 시리아민족위원회(SNC)와의 협력을 거부했다. 민족위원회가 끝없는 내부 권력다툼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존 야당의 재편: 민족조정위원회와 시리아민족위원회

시위 확대 와중에 기존 야당 세력도 재결집을 이뤘다. 먼저 2011년 6월, 30여 년간 정권의 탄압을 받던 야권 정당과 인사들은 다마스쿠스에서 <민주적 변화를 위한 민족조정위원회>(NCC) 결성을 선언했다. 민족조정위원회에는 민족민주회의(RND)를 비롯해 좌익 정당들과 쿠르드 정당이 속해 있다.
민족조정위원회는 정치범 석방, 군사행동 중지, 독립적인 조사위원회 설립, 발포책임자 처벌, 긴급조치 해제, 즉결처벌 중지, 평화적 시위 인정, 헌법 8조 폐지를 정부가 받아들인다는 필수적인 조건 하에 정부와 야권 세력 간의 진지한 대화를 촉구했다. 또한 9월에는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세 가지 구호를 제시했다. ‘폭력 행위 반대, 군사적 개입 반대, 종파주의 반대’.
따라서 민족조정위원회는 결성 시점부터 정권 퇴진을 우선시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예를 들어 11월 11일 일단의 반정부 운동가들은 민족조정위원회가 시리아 전역의 시위대들을 대표하지 못하며 정부 측에 기울어져 있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몇몇 운동가들은 조정위원회가 정권의 수족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한편 2011년 8월 23일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시리아민족위원회(SNC) 구성이 선언되었다. 민족위원회는 시리아 국내외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민족위원회는 시리아 인민이 직접 위원을 선출하지 않았지만, 시리아 인민의 관심사와 요구를 대표한다고 선언했다. 2011년 10월 2일에는 총회, 사무총장, 집행위원회를 포함하는 조직 구성을 결정했다.
SNC에는 무슬림형제단의 망명자 집단, <다마스쿠스 선언>, 아시리아 민주조직, 일부 쿠르드 조직, 지역조정위원회(LCC) 등이 참여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민족민주회의는 2008년에 다마스쿠스 선언 조직이 “피상적인 행동, 소수 집단과 인물에 의한 독점으로 인해 어떤 목적도 달성하는데 실패했고 아랍이슬람 정치 동맹으로 변질되었다”며 탈퇴하였다.) 민족조정위원회와 시리아민족위원회에 참가하는 단체는 거의 중복되지 않는다. 민족위원회는 자신이 시리아 저항세력의 약 60% 정도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부 성원은 민족위원회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주의자라고 주장했다.

평화시위와 무장투쟁

정권이 행한 고강도의 억압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민중운동은 초기 몇 달간 평화적 운동으로 남아 있었다. 간혹 일부 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했지만 이는 보안기구의 광적인 폭력 도발에 대한 개별적 대응이었고, 민중운동의 지도자들은 폭력을 통제할 능력을 지녔다. 2011년 12월 총파업과 시민불복종 운동도 큰 성공을 거뒀다.
보안기구는 민중운동의 폭력을 유도하는 간계를 부렸다. 평화시위대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하며 자신이 ‘테러집단’과 대치 중이라고 선전하려는 의도였다. 정권은 두 가지 방식을 활용했다. 첫째, 보안기구와 무기상인의 관계를 이용해 시민들이 값싼 경무기를 손에 얻기 쉽게 했다. 둘째, 시위 중 살해, 감옥에서의 처형, 지도자 구금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지도부를 제거했다. 이는 보안기구와 무장투쟁을 선호하는 새로운 지도부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 국외에서 무장투쟁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군대 사병들의 탈영이 늘어나지 않았다면 민중운동은 평화적 시위를 유지했을 것이다.
시리아 군대의 지휘부와 부대들은 하피즈 아사드 시절에 구성되었는데, 반란이나 집단 불복종이 어려웠다. 하지만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민중운동을 야만적으로 탄압하라는 임무가 주어졌을 때 군인이 이를 거부하고자 한다면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으로서 반란을 선택하는 길 밖에 없었다. (혁명에 동조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수천 명의 장교가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장교운동과 자유시리아군

자유장교운동은 2011년 7월 정부군에서 이탈한 후세인 하르모쉬 중령에 의해 설립되었다. 자유장교운동은 설립 시부터 승진 등에서 차별 받던 시리아 정부군 내 소수 세력들을 끌어들이고자 했고, 소수 세력이 자유장교운동 내의 군사 기구 및 민간 기구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군대, 친정부 민병대, 보안군으로부터 비무장한 시위대의 보호’를 자신의 임무로 규정했다.
한편 자유시리아군(FSA)은 2011년 7월 29일 정부군에서 이탈한 알아스아드 대령 및 장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 성명서에서 군의 (공격)목표는 도시를 포위하고 민간인을 공격하는 정부군임을 밝혔다. 설립 이후 몇 주 동안 자유시리아군의 여단들은 홈스주, 하마시 및 하마주 북부, 데레졸, 보크말, 자위야 산맥, 다마스쿠스, 리프 디마슈끄, 데르아 등으로 배치되기 시작했다. 가장 피해가 큰 홈스 주에서 활동하는 칼리드 븐 알 왈리드 여단은 자유시리아군의 가장 큰 여단이며, 2011년 10월 초에 자신들이 8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홈스 주의 주요 도시 및 마을들을 담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9월 23일, 아스아드 대령은 자유시리아군과 자유장교운동이 하나의 군사 지도부 아래로 통합되었다고 발표했으며 11월 14일 시리아 내의 최고군사지휘권을 가지는 군사 위원회의 결성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군사 위원회는 자유시리아군에 가담하지 않는 군인 및 보안군에게 처벌을 가할 권리를 부여했으며, 민간인 피해에 가담하지 않은 모든 군인 및 보안군이 즉각 자유시리아군에 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자유시리아군에는 탈영병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참여하고 있다. 자유시리아군의 민간인 자원병들의 다수는 하층계층 출신이다. 그들은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또는 보안기구의 추적을 피해서 자원했다.

시리아민족위원회와 자유시리아군의 공조

2011년 10월 시리아민족위원회는 리비아 시나리오가 시리아에서 반복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민족위원회는 저항의 군사화를 경고하고 시민불복종 행동의 확대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평화적 수단은 기업이나 여타 전쟁의 피해를 두려워하는 여러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논거였다.
하지만 그 후 민족위원회는 입장을 변경했다. 현재 저항세력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개의 길은 ‘더 강력한 군사적 지역 저항’ 또는 ‘외국의 개입’인데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개입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군대 내부 이탈이 확대되는 맥락에서 민족위원회는 자유시리아군과 협약을 체결했다. 자유시리아군을 시리아 내부에서 전투를 벌이는 반군 단위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위원회는 반군을 지지하는 것이 반정부 세력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민족위원회는 자유시리아군에 직접 무력을 지원하지 않지만 자유시리아군을 유지하기 위한 기금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2012년 1월 중순 시리아 민족위원회는 자유시리아군의 지도부와 연계된 사무국 설립을 선언했다.

시리아 봉기 향후 전망

시리아 봉기의 전개과정은 점점 더 리비아를 닮아가고 있다. 평화시위에 대해 정권의 폭압이 가해지고 이에 대응해 무장투쟁이 전개되고, 해외에서 기존 야당들로 구성된 정치기구가 강대국과 채널을 형성해 외국의 군사개입을 호소하고 있다. 반면 시리아 아사드 정권은 다른 아랍 정권들에 비해 훨씬 견고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아스당, 군부, 대기업가, 고위 종교인사들로 구성된 정권 지지기반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아 봉기는 중대한 쟁점들을 낳고 있다. 첫째, 평화시위와 무장투쟁이라는 쟁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리아 내부에서 형성된 전국조직들도 무장투쟁에 대한 지지와 참여 여부를 두고 큰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어느 관측가는 이렇게 말했다. “초기에 대부분 자발적인 저항운동을 지지한 빈민, 실업자 그리고 대학생은 이제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정권의 억압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나토-사우디-카타르 그리고 특히 무슬림 형제단이 주도하는 시리아민족위원회와 자유시리아군 등 반대 진영의 군사화에 대한 반대 때문이다.”
둘째, 시리아 국내에서 무장투쟁이 강화될수록 외국의 군사개입을 지지하는 경향과 반대하는 경향 사이 갈등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이제 미국은 반군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미국은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의 완전한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시리아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7,400만 달러로, 통신장비 등 ‘비살상’ 원조금을 2,500만 달러로 증액했다. 미국 재무부는 자유시리아군을 대표해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시리아지원단(SSG)의 반군 지원 모금활동을 허용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 등 정보기관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비밀명령에 따라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바아스당은 아랍민족주의, 반제국주의에 뿌리를 둔 이데올로기로 외국 침략자에 저항한다는 명분으로 지난 수십 년 간 당원을 동원했다. 수백 명의 당원이 비폭력 시위자 살해에 항의하며 탈당했지만, 외국의 군사개입이 노골화된다면 더 이상의 탈당은 거의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강대국의 힘에 호소해 바샤르 정권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정권 지지 집단들의 결속력은 강화시키면서 역으로 민중운동의 정치적 분열을 가속화시킬 위험이 있다.
셋째, 현재 국제사회가 대체로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시리아민족위원회의 정통성 문제다. 시리아 봉기를 주도한 시리아 내부 집단들은 민족위원회 결성 당시 지지를 표했지만, 이는 민족위원회의 강령이나 그 내부 구조에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경향을 대표하는 조직에 통일성과 집중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민족위원회는 민중운동을 지지하고 활성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했으나 점점 민중운동으로부터 멀어졌다. 민족위원회는 리비아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서 주로 강대국의 영향력에 호소할 뿐, 혁명운동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짧은 시간 내에 시리아 봉기가 아사드 정권의 퇴진과 시리아 사회의 급진적 전환을 성취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사우디와 이란의 적대관계, 미국과 러시아의 긴장관계는 시리아 내전을 격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리아 봉기를 이끌었던 ‘아랍의 각성’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초기 시위를 주도했던 시리아 대중운동이 봉기 이후 가장 큰 위기에 처한 현재 시점에 어떤 운동을 선택할지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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