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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3.가을.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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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세대 이후, 노동자운동은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박준형 | 노동위원장
87년 세대 이후 25년

87년, 노동자들의 눈부신 투쟁으로부터 25년도 더 흘렀다. 그동안 전노협이 건설되고, 민주노총이 만들어졌다. 96~97년 총파업에 이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와 노사정합의,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2000년대 노동자 투쟁이 계속되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25년은 생물학적으로도 한 세대가 지날 기간이다. 87년 당시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했던 노동자들은 어느새 퇴직을 앞두고 있고 정년연장이 화두가 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남한의 87년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출발인 플라자합의의 결과였던 3저 호황의 한가운데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노동자운동은 이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 마주하고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앞으로의 시기는, 87년 이후 노동자운동이 경험한 것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정세가 달라졌을 뿐 아니라, 노동자운동의 주체들도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새로운 시기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남한 노동자운동의 경험 속에서 발견된 어떤 가능성, 변화된 조건에서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시사점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특히 98년 금융위기 이후 급변한 상황을 반영하여 출현한 새로운 노동자운동 흐름은 2000년대 일부 성공사례에서 그 모습이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을 뿐, 전면화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 가능성을 발굴하고 뚜렷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통해 87년 세대 이후, 노동자운동은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를 검토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이를 위해 우선 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부터 전노협, 민주노총의 건설과정을 살펴본다. 이어 90년대 후반 IMF 구제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전면화 된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을 검토하고,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주체 형성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이 운동이 더욱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지 제안하고자 한다.

87년에서 전노협, 민주노총까지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3저 호황의 전개 과정에서 중공업 남성 노동자가 대거 진출하는 것과 같은 노동자 구성의 변화 속에서 시작되었다. 기업의 임금인상 여력은 충분했지만 국가와 자본은 억압적 노무관리를 통해 임금을 억제했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급진화된 학생들은 공장에 투신해 현장학습모임을 결성하는 등 투쟁의 주체를 형성해갔다. 87년 민주화투쟁 속에서 급진적 이념이 확산되는 와중에 7·8·9월 한순간에 투쟁이 폭발했다. 그리고 이렇게 건설된 노동조합들은 곧이어 지역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를 건설하고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건설한다. 전노협의 건설은 87년 이후 기존 한국노총의 외부에서 급격하게 조직된 노동조합의 결집임은 물론, 노동운동단체(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와 정치단체들의 전국적 단결과정이기도 했다.
전노협의 강점은 이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첫째, 투쟁 속에서 조합원이 형성되는 과정이 곧 학습과 조직화를 결합하는 과정이었으며 둘째, 지역 기반 운동의 전통을 형성했고 셋째, 노동조합이 노동운동단체와 결합하였다. 이는 노동조합이 좁은 의미에서 노사관계에 규정되는 틀을 벗어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전노협은 건설 과정에서부터 가혹한 탄압에 노출되고 조직적 확대는 지체되었다. 92년이 되자 ‘노동운동 위기논쟁’이 제기되었다. 논쟁을 제기한 이들은 ‘노동조합의 활동작풍을 개선해야 한다’거나, ‘과도한 임금투쟁을 지양하고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는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거나, ‘정부와 자본은 노동자의 노동생활조건 개선과 경영참가를 받아들이고, 노동조합은 생산성 향상에 협력하는 진보적 코퍼러티즘을 지향해야 한다’거나, ‘퇴조기에 노동자의 다양한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는 진보정당 운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노동조합은 한국노총에 대한 반대를 최소공약수로 해서 광범위한 결집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위기 논쟁은 노동조합운동 이념의 탈각이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노동조합운동도 이념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실용주의적이거나 코포러티즘적 대안을 제시했던 것이었다.
ILO공대위, 전노대를 거쳐 이루어진 민주노총 건설은 전노협에 포괄되지 않았던 대기업, 공기업노조와 업종회의가 결합하는 계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노협의 청산과정이기도 했다. 전노협 청산과 민주노총 건설은 노선적 측면에서는 ‘평등사회’, ‘노동해방’에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라는 사회개혁노선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전노협 청산은 앞서 언급한 조직적 장점의 후퇴과정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노동운동 위기논쟁’ 제기자들의 주장이 민주노총 건설과정에 관철되고 만 것이다. 전노협 건설에서 청산까지, 민주노총 건설과 현재까지 변화된 조건에서 전노협의 장점이라는 요소를 단순히 부활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그러나 이때부터 민주노총 운동은 지속적으로 ‘이념’을 상대화시켜 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95년에 건설된 민주노총은 기업별 대기업노조가 주도하는 산별연맹의 연합체에서 출발했다.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전노협이 상대화된 결과다. 지금도 유사하게 ‘기업별 대기업노조가 주도하는 형식적 산별노조의 연합체’의 모습을 띤다. 그러나 이 체계에는 지노협을 계승한 민주노총의 지역본부와 각 산별노조라는 기업별노조 외부도 존재하며, 이러한 ‘차상위 조직’이라는 틈새에서 다양한 운동이 시도되었다. 의식적인 활동가집단의 노력을 통해 비정규직 조직화 등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운동들도 이 공간에서 형성되었다.

97~98년 금융위기 이후 10년

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의 조건은 이후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90년대 남한 재벌의 과잉축적은 90년대 중반의 금융세계화 편입을 거쳐 97~98년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IMF 구제금융협약 체결과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기업 부실화와 국부유출이 일어났고, 다양한 형태의 불안전노동자가 증가하고 정리해고제가 도입되는 등 고용안정이 심각하게 침식되었다. 민주노총 건설 이후 민주노조운동 내에 실리주의의 확산과 이념적 요소의 쇠퇴가 이러한 조건과 결합하면서 98년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도입 등 노사정합의가 이루어졌다.
98년에 민주노총 집행부가 합의한 노사정합의를 이해하려면 역설적으로 금융위기 직전인 96~97년 총파업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엄청난 대중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당시 총파업의 결과, 정리해고는 단지 ‘유예’되었다. 총파업은 일종의 노사정 삼자협의기구인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논의가 결렬된 결과다. 그런데 정작 이 논의에서 틀 잡힌 개별적 노동관계법과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교환이라는 패키지 협상구도는 여전히 폐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불과 1년 후 98년 노사정합의에서 정리해고제와 함께 부활한다. 노사정합의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는 IMF의 요구사항(구제금융협약)의 내용을 대부분 수용하였는데, 당시 경제위기의 원인과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있었다면,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념적 후퇴는 정세를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인식할 수 없도록 했다.
결국 98년 민주노총의 노사정합의는 대의원대회에서 거부되고 집행부는 교체되었다. 그러나 비대위를 맡은 단병호 집행부나, 선거에서 당선된 이갑용 집행부 모두 약속했던 총파업을 조직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노사정합의에서 거부에 이르는 과정은 민주노총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이념정책적 취약성을 드러낸 것은 물론, 노사정합의 거부와 집행부 사퇴, 그 이후 수차례 총파업 시도의 무산은 조직적 취약성 역시 보여주었다.
금융위기 이후 민주노총의 주요한 투쟁은 대부분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에 대한 반대투쟁의 성격을 갖고 진행되었다. 2000~2001년 한통계약직노조 투쟁(비정규직 독자 노조운동),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2002년 철도발전가스 3개 노조 공동파업(공공부문노조, 새로운 주체의 진출), 2003년 비정규직정리해고노조탄압 사업장 열사투쟁 및 화물연대 파업, 2005~2006년 사내하청, 플랜트 노동자 투쟁, 2007년 뉴코아이랜드 투쟁,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 공공부문 선진화 분쇄투쟁(철도파업 등)이 이어졌다.
IMF 구제금융위기 속에 노동자운동이 조직적 위기에 빠지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향은 민주노총 내에서 크게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제시되었다. 논쟁은 있었지만 주류가 이러한 흐름을 수용했는데 첫째, 기업별노조를 산별노조 형태로 전환하고 둘째, 진보정당을 건설한다는 것이다(양날개론). 이에 더해 셋째,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전략조직사업을 추진한다. 물론 산별노조나 진보정당 건설은 90년대 초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오던 것이지만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금융위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러한 전략은 지금 잘 작동하고 있는가? 불행히도 2013년 현재 산별노조와 진보정당 모두를 결산해볼 때 이러한 전략은 시효만료 되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개별적으로 산별노조와 진보정당이 각각 어려운 사정에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런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둘을 결합함으로서 추구하려고 했던 운동노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별노조가 경제투쟁을 담당하며 의회에 진출한 진보정당이 정치를 담당하고, 이에 기반해 노사정 삼자협의 체제를 갖춘다는, 중북부 유럽을 모방하려했던 시도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각각을 보더라도 산별노조는 조직형식적 전환 이후 정체되어 있고, 진보정당 운동은 조직적 분열만이 아니라도 애초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세력화’라는 의미를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비정규직 전략조직사업은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비정규직 확산에 대응하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러나 총연맹 차원의 조직활동가 양성과 산별연맹(1기) 혹은 전략 지역업종(2기)에 배치하는 것을 넘어서지는 못한 상태다. 노동조합 전체가 조직화를 핵심사업으로 배치하는 전체 조직의 ‘체질개선’은 아직 먼 과제다.
게다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할 민주노총(총연맹)도 약화되었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2003년을 기점으로 국민파와 민족해방파 연합으로 교체된다. 이들이 주도하는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극대화한다는 전략으로 김대중-노무현 민주당 정권과 타협을 시도하지만 불발된다. 그런데 이 과정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노사정위원회 참여 문제를 둘러싸고 조직 내 대립이 격화되면서 총연맹의 지도력은 지속적으로 약화되었다.
한편, 진보정당 운동도 민주노동당의 분열 이후 혼란을 거듭한다. 통합진보당과 정의당 등 국회에 진출한 진보정당들은 이미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통합진보당의 분당 이후에는 전국회의가 주도하는 정파노조 흐름과 같이 민주노총에 근거를 둔 정파들이 자신들의 정치노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대중조직을 분열시키는 행태도 확산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노총 내 운동노선에 입각하여 경쟁해왔던 정파들(의 구분선)도 오히려 지속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과거에 “국민파-중앙파-현장파”로 형성되었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이다. 2013년 민주노총 선거에서도 과거의 구분선에 따른 선거구도가 형성되지 못했다. 일부 후보는 과거 구도의 대표성을 주장하고 싶었을지라도 실질적으로 그러한 지지를 획득하지 못했다. 이는 92년 노동운동 위기 논쟁 과정에서 형성된 논점, 즉 이른바 ‘전투적 조합주의’, ‘사회적 조합주의’ 등으로 대별되었던 운동노선 경쟁이 의미 없는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투적 조합주의’로 불린 경향은 기업별노조의 전투적 경제주의로 수렴되고 있으며, ‘사회적 조합주의’로 불린 노선은 보수 정권 하에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실현불가능하게 되면서 노동운동의 노선적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했다(물론 이를 주장한 일부는 민주당이나 안철수 세력에 흡수되었다). 따라서 이들 노선에 근거한 구래의 정파구도도 유지되기 힘든 조건이다. 기존 노선 논쟁에서 그나마 의미 있었던 노동운동의 가치로서 전투성(투쟁성), 사회적 의제 확장 등의 일부 요소를 재평가하는 것 정도가 남아있는 과제이다.

산별노조 운동의 실험

2000년대 들어 노동조합운동이 중점을 둔 조직발전과제는 ‘산별노조 건설’이었다. 산별노조 건설운동은 애초 의도한 성과를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의 운동주체 형성에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깊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
2002~2006년 사이에 기업별노조의 조직형태 전환을 중심으로 산별노조 건설이 본격화된다. 건설 당시에는 복수노조 허용,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등이 주요한 산별전환 논거 중 하나였지만, 실상 이들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난다. 2006년을 거치면서 자동차 완성4사의 금속노조 전환, 공공노조운수노조 건설과 함께 주요 산업에서 조직형식적으로 산별노조 건설이 진행되었지만, 산별교섭산별투쟁을 전면적으로 실현하는 것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부분적 성과를 남기는데 그친다. 남한에서 초기업적 노사관계는 느리게 성장하고 있으며 기업별교섭관행이 모든 산별노조에서 강력한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조건이 수년간 지속됨에 따라 산별노조운동의 정당성은 약화되어 왔다.
산별노조의 정착이 지연되는 동안 정규직 노조 현장은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다. 비정규직과 격차가 벌어지고 고용안정이 위협받으면서 기업별노조에서 (회사와 노조에 대한) 이중몰입과 실리주의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기업별 노사관계의 유지는 작업장 노동조직과 노조가 단일화되어 있는 한국의 기업별노조 체제의 역사적 결과이며 역설적으로 노동조합 힘의 근거이기 때문에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남한의 산별노조들은 유럽의 경우처럼 작업장 노동조직과 노조가 분리되지 않았다. 이러한 토대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기업노조주의를 단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것은 지속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한편 정규직 신규채용이 상당 기간 중단되면서 노조운동의 경험이 단절될 우려도 있다. 80년대 초중반 베이비붐 세대(57~60년 생)의 노동시장 진출과 80년대 후반 3저 호황으로 인한 노동시장 팽창 과정에서 형성된 87년 대투쟁 세대가 퇴직을 앞둔 시기에 있고, 이들의 경험이 단절된다는 의미다.
금속(제조업), 공공부문, 민간서비스 등 주요 산업부문에서 한국 산업구조와 기업지배구조 특징 상 산별교섭이 짧은 시간 안에 지배적인 교섭형태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우선 가능한 영역에서부터 초기업 교섭구조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미 몇 개의 영역에서는 초기업적 투쟁과 조직화가 연계된 초기업적 교섭구조가 실현되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기업별 교섭 자체가 어려운 조건에 있는 중소영세비정규 부문에서 성공적으로 신규 조직을 확대한 경험이 나타났다. 이들은 조직화와 투쟁의 초기부터 초기업적인 교섭투쟁을 전개해왔다. 산별적(초기업적) 교섭투쟁 구조를 구축한다는 산별노조의 목적이 여기서 진짜 빛을 발했다.
산별노조 건설을 제기하였던 일부 논자들은 기존 기업별노조의 산별노조 전환에서 시작하더라도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략조직사업’ 등과 연계하여 새로운 조합원을 조직할 것으로 기대하기도 했다. 이는 산별노조에 ‘개별가입’한 조합원을 통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조합원층이 점차 기존 조직의 규모를 대체해가는 방식을 말한다. 대부분의 산별노조는 기업별노조의 (불완전한) 산별 조직형태 전환에서 한계에 봉착해있지만, 한편으로는 초기업적 조직화교섭투쟁이 새로 조직되는 영역에서 나타났다. 이 점을 좀 더 살펴보자.

조직화 경험: 성과와 한계

지난 10여 년 동안 노동자운동 주체의 혁신에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중소영세비정규직 조직화투쟁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노동자 대중이 진출하는 중요한 조직화의 경험이 축적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에서 성과와 한계, 교훈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화물연대, 건설노조플랜트노조, 금속노조 지역지부지회, 공공운수노조 지역지부, 학교비정규직노조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 건설노조 지역지부는 지역적 차이는 있으나, 성공적인 사례들은 몇 가지 주목할만한 특징을 보여준다. 앞으로의 조직화 전략을 세우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몇 가지 지표들을 아래와 같이 찾아낼 수 있다.
첫째, “기업을 넘어선[초기업적] 조직화”만 성공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기업단위의 비정규직노조운동은 치열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을 조직적으로 확장하는 데 한계에 봉착했다. 비정규·영세 사업장의 특징 상 개별 기업별조직은 붕괴할 수도 있으나, 초기업조직은 조직을 재생산하기 위한 조직적 경험과 활동가가 지속적으로 축적될 수 있다. 비록 기업단위로 조직된 운동이라 하더라도 조직의 운영과 투쟁에서 초기업적 운동을 전개해나가는 경우에는 운동의 성과가 지속적으로 축적된다.
둘째, 일정한 ‘정체성의 범위’ 내에서 시작한 조직들이 성공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화물, 건설, 학교비정규직 등의 업종조직이나, 지역노조의 경우에도 정체성을 공유하는 중심 조합원 집단이 형성된 경우에 실질적인 투쟁력과 조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새롭게 조직되는 노동자들이 단결하는 데에는 현실적으로 조합원 정서에서 수용가능한 일정한 정체성의 범위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조직적 단결의 범위를 의미하는 정체성의 범위를 산업과 지역으로 더 확장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노력을 지속해야겠지만, 이는 단계적 과정 혹은 중층적 조직이라는 ‘매개’를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정체성의 범위 내에서, 조직화 노선을 채택하고 불굴의 의지로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 또한 형성될 수 있다.
셋째, 조직 전체가 확고한 ‘조직화 노선’을 채택하고 자신의 운동대상에 미조직 노동자를 포괄한다. 비조합원에게도 적용되는 요구안을 투쟁의 전면에 제기하는 투쟁을 통해 투쟁이 조직화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해당 부문 노동자 대표성을 획득해나가는 조직이 성공해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화물연대, 건설노조, 학교비정규직노조의 요구는 소속조합원의 배타적 요구라기보다는 해당 부문 노동자 전체의 요구를 담았다.
한편, 평가를 위해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해온 다른 운동의 경험, 지역일반노조와 기업별 비정규직노조, 청년노조를 잠시 비교해보자.
지역일반노조는 지역별 차이는 있으나 과연 기업별 체제를 성공적으로 넘어섰는지에 대해서는 더 평가가 필요하다. 지역일반노조는 다양한 업종의 소규모 사업장 조직이라는 특성 상, 초기업 조직 형태에도 불구하고 집단적인 교섭투쟁을 조직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 결과 상당수의 조직이 사실상 기업별로 운영되어 초기 조직화 이후 운동주체를 안정적으로 형성하는데 한계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동질감에 기반한 효과적인 교육훈련, 이를 통한 간부양성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사례가 나타난다.
다른 측면에서 기업별 비정규직노조는 영웅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지속성과 확장성이라는 측면에서 큰 한계에 봉착했다. 따라서 새로운 운동주체를 ‘조직’으로 남길 수 있는가의 측면에서 기업별 조직화는 지양하고, 기존 조직도 재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한편에서는 청년층 세대노조도 실험중이다. 그런데 여기서 청년층이 조직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조직화에 성공한 초기업노조들의 경험을 살펴보면, 조직화의 성공은 자연스럽게 해당 영역의 청년 조합원 조직화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년 조직화가 지연되거나 실패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청년’에 대한 별도의 조직화 계획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노동시장에 불안정하게 편입된 청년들이 주로 진출하는 영역(특히 민간서비스업, ‘아르바이트’ 고용 형태)에 대한 전반적인 조직화가 성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년층 세대노조들은 조합원을 확대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것보다는 사회적 쟁점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활동하는데, 이는 물론 의미 있는 사회운동이기는 하지만 대중적 단결을 확대한다는 측면에서 기존의 노조운동을 대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세대 대립을 특권화하는 청년층 세대노조가 아니라 초기업노조가 더 넓은 영역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다. 한편 이러한 방식의 노조가 주목받는 것은 학생운동의 상대적 약화와 청년 노동권에 대해 문제제기할 수 있는 주체의 공백이 낳은 효과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기존 정규직 노조 안에서도 (별도의 노조가 아니라) 청년층 조합원 조직화와 활동가 양성은 중요한 과제다. 청년 조합원을 조직교육하고 87년 세대의 퇴직 이후에도 민주노조 운동의 노선, 문화, 리더십이 계승되도록 하는 노력이 시급히 필요하다.

2009년 금융위기 이후, 노동자운동이 처한 조건

앞으로의 운동을 전망하기 위해서는 2009년 금융위기 이후, 노동자운동과 노동자계급은 어떤 중장기적 조건에 놓여있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의 장기침체와 위기, 노동의 불안정화와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다. 한편, 인구론적 전환도 이루어질텐데 2015~2017년 이후 대량 은퇴(정년퇴직)와 노동력 공급 감소가 진행된다. 박근혜 정부는 이렇게 예측되는 정세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 준비가 곧 노동력 부족에 대한 대안으로 노동신축화(고용률 70% 정책), 창조경제(산업구조 재편), 국민행복연금(연금제도 개악) 정책이다. 이주노동자 관리 정책도 더욱 정교해질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공격도 계속 심화되고 있다. 민주노총 주요 조직의 위기 가능성도 예상해볼 수 있다. 어용복수노조를 활용한 공공부문의 노조탄압, 완성차노조의 보수화는 특히 위험한 요소다. 지난 이명박 정부는 민주노총 핵심노조(금속노조 지역지부의 핵심지회, 공공부문의 철도발전노조 등)에 대해 정권 차원의 공격과 복수노조 설립, 노무컨설팅업체와 용역깡패를 통한 노조파괴 공작을 전개했다. 민주노조 운동은 일부에서는 방어하고 일부에서는 패배했다. 박근혜 정부도 유사한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민주노총 리더십의 분할은 정치적(정파적)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진보정당의 분할과정에서 더욱 심화된 상태다. 민주노총이 직선제 선거 과정 등을 통해 내부 갈등이 증폭될 경우 극단적으로 정파노조로 분할 혹은 한국노총으로의 수렴 등 위기가 전개될 우려도 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직적 토대의 강화와 리더십 형성이 중요한 조직과제다.
민주노총의 리더십과 핵심부문노조가 함께 붕괴할 경우 민주노총이 일본 총평의 붕괴와 같은 ‘노동운동의 우익재편’으로 나아갈 우려도 있다. 과거 많은 이들이 민주노총의 위기가 전개되는 양상을 독일과 같이 코포러티즘을 수용하여 체제에 순치되는 양상, 혹은 미국과 같이 비즈니스노조주의로 경도되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조직적으로 축소되는 양상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오히려 기업별노조 체제 하에서 핵심조직리더십의 위기를 통해 ‘우익적으로 재편’되는 방식, 즉 일본식 위기의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총평이 붕괴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철도노조의 분할 민영화가 남한에서도 정부에 의해 추진된다는 점은 이러한 위기 가능성을 높인다.
반면 2000년대 초반 이후 기존 노조의 관행과는 다른 새로운 운동, 운동주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어떤가? 비정규직노조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안정적인 조직적 기반을 유지하지 못하고 붕괴하기도 하고, 기존 노조운동의 관행을 답습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투쟁 속에서 살아남은 초기업노조로서 중소영세비정규직 조직들은 이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운동노선적 과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민주노총 건설과 98년 IMF 금융위기 이후 정세에 대응하면서 민주노총의 전략들은 현실적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현재의 민주노총 운동은 87년에 형성된 민주노조 운동의 인적조직적 토대에 근거한 전략이었는데, 이 역시 어려움에 놓여 있다. 조직적인 위기만이 아니라, 2009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장기침체’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붕괴 가능성이라는 조건에 처해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객관적 조건에서 노동자운동의 부활을 위한 새로운 방향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
87년 대투쟁,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현재 민주노총의 주력군(대기업, 공공부문노조)이 형성되어 왔다. 이 주력군은 여전히 중요한 운동의 근간이지만, 여기에 머물러서는 노동자운동이 포괄하는 범위는 점점 더 줄어들고 만다. 따라서 이를 넘어서는 운동 주체 형성이 중요한 과제다. 2000년대의 경험을 평가해볼 때 ‘비정규직 조직화’의 지체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조운동에는 일정한 성과가 있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확대하기 위한 실천과 조직적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변화된 조건에서 노동자운동의 노선에 대해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하여 많은 정치단체 활동가와 학자들은 (비록 그 강조점과 내용에 차이가 있지만) ‘사회운동노조’를 주장했다. 사회진보연대는 ‘사회운동노조’가 하나의 노조 유형을 지칭하기 보다는 노동조합이 광범위한 정치사회적 투쟁에 나서는 사회운동의 기관이 됨을 의미한다고 강조해왔다. 금속노조, 공공운수노조, 건설노조와 구분되는 별도의 노조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이들 노동조합들이 ‘사회운동노조’로 변모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사회운동노조’의 현재적 과제로는 △사회운동을 자기과제로 하는 노동조합 △자본주의 경제위기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실천 △미조직비정규노동자 적극적 조직화 △민주노총[총연맹] 강화(전국적전계급적 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조직으로) 등을 제시한 바 있다.
우리는 이를 좀 더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2009년 금융위기와 87년 세대 이후라는 조건에서 어떤 방향으로 노동자운동의 실천을 조직할 것인가 라는 운동노선적 과제로서 질문을 다시 던지고자 한다.
첫째, 어떻게 새로운 계급주체를 형성하고 조직적 단결을 확대 강화할 것인가? 둘째, 어떻게 노동자운동이 자본주의 위기를 넘어선 대안을 제기할 것인가?

첫째, 주체형성: 조직화 노선
이제까지 새로운 운동 주체를 조직하려는 시도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초기업 조직화를 중심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는 지속되고 확대되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노총(지역본부)과 산별노조 등 노동조합들이 조직화 사업을 혁신하고 또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는 단지 사업을 몇 가지 더 배치하는 것으로 될 수는 없다. 조직 전체의 목표를 새로운 운동주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조직화 노선’을 공공연히, 공식적으로 채택할 필요가 있다. 각각 개별 조직화 사업을 확대하여 실행하는 것은 물론, 조직의 전망과 존재 의미를 ‘새로운 운동주체의 확장’으로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조직화 노선’을 채택한다는 것은 미조직 전략조직사업에 재정인력을 투자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노조의 투쟁과제, 사업방식도 지속적으로 변화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산별요구와 투쟁 전략에 있어서 저임금미조직 노동자 공동 임투를 우선 배치하는 등의 방식이다.
앞서의 논의를 통해 ‘초기업적 조직화’가 갖는 가능성을 분명히 확인하고 조직화 경로로 집중할 필요성을 확인했다.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를 ‘초기업 조직’으로 조직하는데 더욱 집중하고 새로운 노동자운동 주체들이 진출하는 조직적 장으로 만들자. 물론 시론적으로 검토한 ‘성공사례’는 아직은 경험적이고 잠정적이다. 앞으로도 몇 가지 성공의 요소, 실패의 요소에 대해서는 보다 과학적인 분석이 진행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특히 노동시장과 경제정세의 변화에 대해 분석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전제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화물연대는 자본의 운동구조, 물류정책의 변화에 조응하는 대응전략을 수립하는 데 투자해왔고, 최근 금속노조 지역지부 투쟁 전략 수립에는 기업 지배구조와 공급사슬에 대한 분석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다.
한편 미조직부문 조직화만이 아니라, 이미 조직된 대기업공공부문 노조에서는 어떤 ‘방어전략’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 현재 (사실상) 기업별 조직에서도 산별 노사관계의 지속적 확대를 통해 단계적으로 초기업적 정체성을 형성해 가야한다. 기업별노조(지부)의 조직형식적 전환을 넘어서는 실질적인 산별조직으로의 전환은 구체적인 상황에 맞게 중기 과제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금속노조의 경우 현대기아차지부와 하청사가 조직된 지역지부의 연대전략, 공공운수노조의 경우 공기업 등 공공기관 노조들의 구심 재구성 등 구체적인 실현경로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산별노조의 지역조직을 강화하고, 민주노총 지역본부가 ‘공동실천연대투쟁의 조직가’로서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운동의 강화를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운동주체들과 기존의 조직들이 단결하고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미조직노동자 신규조직화만이 아니라 기존에 조직된 기업별 조직의 변모를 위한 재조직화도 앞서 살펴본 조직화 운동의 경험을 접목할 수 있다. 예컨대 임단투에서부터 기업을 넘어선 요구와 투쟁을 확대하고, 끈질기고 의식적인 사업을 통해 점차 실질적인 초기업 조직으로 변모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할 것은 금속산업(제조업) 부문 조직화의 중요성이다. 사용자자본이 국경을 벗어나기 힘든 공공부문, 사회서비스부문, 건설노조와는 달리 금속노조(제조업부문)의 조직화는 더 어려운 영역임은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조직화의 성공사례도 (해외 이전이 힘들고) ‘육지에 갇힌’ 공공사회서비스 산업부문이 다수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조업(금속)부문은 노동자운동에 원칙적 중요성을 가지는 영역으로서, 조직확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금속노조가 자신의 전략조직사업을 시행하고 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물론, 노동자운동사회운동정치운동이 관심을 더 기울여야한다는 의미다. 공단을 중심으로 한 하청기업 노동자의 광범위한 조직화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둘째, 정치사회운동: 이념의 복원
앞으로 전개될 세계자본주의 위기, 장기침체로 인한 민중생존의 위기 국면에서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고 대안사회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이념적 대안이 더욱 중요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민주노총은 설립과정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이념적 요소가 취약해져왔다. 이후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주장하게 되는 노동운동 위기론자들(1992년)은 민주노조운동 사회변혁이념의 “과잉”을 위기의 원인으로 진단했다. 앞서 강조한 ‘조직화’는 그 자체로서 계급적 단결을 확대한다는 운동적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정세에서 ‘이념’ 없는 단결은 맹목이며, 우리가 지향할 운동은 아니다.
1998년 금융위기 대응과 신자유주의 반대투쟁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혼란을 반성하고, 자본주의 위기 이후에 노동자 계급의 투쟁전망을 정확히 수립하기 위해서 변혁 이념의 복원은 시급한 과제다. 따라서 우리는 10여년 간 “노동자 운동 내 변혁 이념의 지속적 약화”라는 경향을 대역전시키고, 전노협 시기(80~90년대) “노동해방, 평등세상”을 현재의 2009년 이후 정세에 적합한 이념 형태로 노동자운동 내에서 전면화해야 한다.
사회진보연대는 현 시기 사회운동노조의 과제로 △노동계급의 단결 확대를 위한 총연맹 강화와 조직화 사업 확대 및 △‘대안세계화운동’을 제시해온 바 있다. 특히 대안세계화 운동을 구성하는 이념으로는 ‘전위당·국유화’ 노선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사회주의 운동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가운데, 금융세계화 반대, 평화주의, 국제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을 함께 지향해야한다고 주장해왔다.
노동자운동에 이념적 요소가 중요하다는 것은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자본주의 극복과 대안사회 건설의 추상적 지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념에 근거한 구체적인 정세분석(능력), 그리고 이를 실천 사업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획과 실행력을 동시에 의미한다. 이념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은 이러한 힘의 종합을 의미한다. 예컨대 이념적 기반이 확고하다면 초민족적 기업의 자본철수로 인한 정리해고에 대해서 완강한 투쟁계획을 갖는 것은 물론이고, 이와 연계하여 자본의 전략의 어떤 부분을 공격할 것인지, 이를 위한 전술은 어떻게 구사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 구체적인 전략정책을 수립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이념적 요소의 강화, 사회운동적 성격의 강화가 노조 운동 이외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면밀한 검토와 토론은 필수적이다. 다양한 주장으로 제기되는 운동의 아이디어들에 대해서, “그 운동이념[실천]은 노동자계급 주체를 형성하고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확대할 수 있는 입장인가”라고 질문한다면 답이 나온다. 노동운동 이념이 참신한 아이디어들로 대체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최근 유행하는 ‘사회적 경제론’과 이에 입각한 다양한 운동 아이디어(협동조합으로의 노조운동 대체,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 비정규센터, 변형된 사회봉사활동 등)가 사회운동노조에 적절한 이념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다. 노동조합 운동이 사회운동과 결합하는 행위 이전에, ‘사회운동노조’를 통해 사회운동 내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복권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념적 요소가 조직 내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실천 투쟁과제로 구체화되는 ‘정책 공정’이 필요한 것은 물론, 조합원 이데올로기로 스며들 수 있도록 하는 교육사업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따라서 민주노총(지역본부)과 산별노조는 기존 교육사업을 혁신하고 이념정책과 결합한 교육 기능을 강화 필요가 있다. 이념의 재건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활동가, 조합원과 함께 할 수 있는 매개인 교육사업이 없다면 제대로 된 의미를 갖지 못한다. 교육사업은 이념의 재건에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중요한 필요조건이다.

87년 세대 이후 노동운동의 대안 현실화를 위한 조직적 과제

위와 같은 노선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운동의 여러 실천이 교통하면서 힘을 모아나갈 필요가 있다. 또한 노동조합들이 구체적인 혁신과제를 자신의 사업 속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운동의 주체를 확대강화할 필요를 공감하는 활동가들에게 몇 가지 공동의 과제를 제안하고자한다.

첫째, 대중운동의 경험을 공유하고 공동으로 분석하기 위한 네트워크를 구성하자.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주체를 형성해가기 위해서는, 실천과제에 대해 노동운동 내 합의를 만들어가기 위한 논의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민주노총(지역본부)과 산별노조의 현장 활동가들이 구체적 과제를 토론하고 조직적 실천에 나설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각급 조직에서 운동경험에 대한 평가와 공유, 과학적 분석을 진행하기 위한 논의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이러한 대중운동의 경험과 논의를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분석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말하자면 각 노조, 정치사회운동의 활동가들이 “87년 세대 이후, 노동운동은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공동의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함께 밟아보자는 것이다. 사회진보연대도 이와 같은 실천과제의 한 부분에서 기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는 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의 역할이기도 하다.

둘째, 민주노총 운동의 혁신 과제 실현을 위해 합의를 확대하자.
위에서 제안한 대중운동 경험의 공유와 공동의 분석이 지역현장 활동가들에 대한 제안이라면, 민주노총(총연맹) 차원에서도 민주노조 운동 전체가 혁신될 수 있도록 하는 출발점의 의미를 갖는 혁신과제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한다. 운동 관행과 운영의 혁신 과제가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총연맹의 혁신과제 수립을 위해서는 이번 민주노총 새 집행부가 혁신과제에 대한 논의의 장을 형성하고 차기 직선제 선거 전까지 제 운동세력이 합의하는 공동의 혁신과제와 투쟁과제(공유기반)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제는 아래와 같이 예시할 수 있다.

1) (노조답게) 투쟁하자!: 재벌 통제, 반신자유주의 노동자 투쟁 전선 구축
• 노동권 확대와 재벌 통제 전략 (경제민주화 비판)
• 노동자의 계급대표성 회복을 위한 투쟁 태세 구축
: 정리해고노동유연화 분쇄! 노동기본권 쟁취! 민주노조 사수!
•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에 기반을 둔 정치세력화 운동의 전면적인 재구성
• 노동자국제연대: 재벌의 초민족화에 맞서는 국제 노동표준 향상 전략

2) (노조답게) 단결하자!: 계급 단결 확대강화
• 시기집중 임단투 투쟁전선의 복원
• (조직 노동자, 미조직 노동자 단결) 임단투와 최저임금 투쟁 결합
• (공동요구안에 근거한)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
• (고용안정을 위한 연대의 확대) 비정규직 철폐!

3) (노조답게) 확대하자!: 조직화에 전념, 현장사업 강화
• 경제위기시대,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향한 제2의 전략조직화 운동
• 산별지역조직, 지역본부의 미조직 사업 역량 강화,
제 사회단체와의 미조직사업 협력 강화
• 지역과 현장 주체로부터 출발하는 현장사업 강화

4) (노조답게) 운영하자!: 조직운영 혁신
• 총연맹 중집의 실질적인 역할 강화
• (투쟁의 구심, 미조직사업의 구심으로서) 산별지역조직 강화, 지역본부 강화
• 사무처 운영 혁신 : 임원―(정무직) 실장단, 활동가 순환배치 (현장-순환배치)

마치며 : 사회운동노조를 위한 하나의 비교

이 글을 시작하면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변화된 주객관적 정세와 물리적 세대교체를 맞아 현 정세에 적합한 노동자운동의 방향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서 87년 이후 노동자운동의 주요 시기별 운동을 반성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이 2000년대 시도했던 산별노조, 진보정당, 미조직전략조직화의 조합으로 구성된 전략은 유효성을 상당히 잃어버렸다. 따라서 2000년대 운동 경험에 대한 평가를 통해 대안을 재구성하자는 것이 우리의 제안이다.
2000년대를 돌아볼 때 초기업 방식으로 진행했던 중소영세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 주체형성 시도가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다. 이는 초기업노조운동(산별노조지역노조)과 전략조직화 사업이 결합될 필요를 보여준다. 이에 따라 2009년 금융위기,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25년동안 노동자운동을 책임져온 세대 이후 시기의 운동과제로 몇 가지를 제안했다. 노선적 측면에서는 첫째, 산별노조·지역본부가 ‘초기업적인 신규 조직화’를 노선으로 채택하고 조직적 투자를 집중하는 방향으로 혁신할 것과 둘째, 건설 과정부터 “노동해방, 평등세상”의 이념적 성격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켜왔던 민주노총의 추세를 대역전하여 대안세계화 이념을 운동 내에서 전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노동자운동의 조직적 과제로는 (지역현장) 대중운동의 경험을 공유하고 공동으로 분석하기 위한 활동가 네트워크 운영과, 민주노총(총연맹) 운동의 혁신 과제 실현을 위한 합의 확대를 위한 노력을 제안했다.
우리는 이러한 실천에 나서는 노동조합을 ‘사회운동노조’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사회운동노조’의 구체적인 의미나, 이 운동에서 제안하는 이념의 모호성이 노동운동포럼 토론과정에서도 지적되었다(‘어떤’ 사회운동인가, 어떤 ‘실천 활동’인가?). 정당과 ‘사회운동노조’의 관계도 논의가 제안되었다. 이러한 쟁점에 대한 보다 정리된 토론은 이후 공동의 논의과정에서 보완되어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 짧은 비유 혹은 비교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1998년 IMF 구제금융위기에 대한 민주노총의 대응을 돌아보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른바 노동유연화 ‘3제’(변형시간제,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에 대한 노사정합의와 번복, 총파업의 실패가 있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비판하고 경제위기의 부담을 자본가에게 질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이념정책적 능력의 부재가 낳은 안타까운 결과다. 세계경제, 한국경제의 상황을 볼 때 이런 식의 심각한 경제위기는 앞으로 남한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닥쳐올 것으로 예상된다(물론 98년과 같은 외환위기 형태가 아닐 수도 있다). 그 때 민주노총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최근 경제위기를 심각하게 겪고, 또 그 과정에서 노동자사회운동의 저항이 확산되고 있는 그리스의 사례를 보자. 물론 그리스의 양대노총을 사회운동노조의 사례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지만, 남한 노동조합운동의 대응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리스 경제위기의 전개 과정에서, 민간부문 노총인 GSEE와 공공부문 노총인 ADEDY은 2010년 최초로 총파업 투쟁을 전개한다. 이들 노총은 원래 (한국과 굳이 비교하자면 민주당과 유사한) 사회당을 지지하는 조직들이어서 애초에는 총파업에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경제위기의 부담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긴축정책을 인정할 수 없었다. 노동자들의 연이은 총파업과 이어 확산된 ‘분노한 사람들’의 저항에서 좌파 정치운동은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긴축반대 투쟁, 트로이카(IMF,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가 강요한 채무조건 재협상 투쟁이 핵심 요구다. 이러한 대중투쟁의 성과로 급진좌파연합 시리자(SYRIZA)는 총선 결과 집권 직전까지 갈 정도로 대중적 지지가 확대되었다. 그리스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동조합운동이나 정치운동이 노동자계급의 입장과 금융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트로이카의 요구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리자와 그리스 사회운동, 노동자운동의 요구는 ‘대안유럽’을 요구하는 국제주의적 방향을 취하고 있다. 유럽의 변혁이 그리스의 변혁에도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한편 98년과 그 이후의 민주노총으로 다시 돌아와보자. 민주노총의 요구는 노동자에게 경제위기 부담을 전가하는 긴축정책을 반대한다거나 IMF 구제금융협약을 거부하고 재협상을 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장에서는 정리해고를 막아내고 비정규직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전체 노동자계급의 거시적 투쟁방향을 제시해야할 총연맹 차원의 정책은 결이 달랐다. 집단적 노사관계의 일부 양보를 대가로 노사정위원회에서 노동유연화 ‘3제’를 합의했다. 재벌개혁(해체)을 요구하거나 소액주주운동과 연대하기도 하고,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사회복지 확대 등을 요구했다. 경제위기의 원인을 오해하거나, 그게 아니면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투쟁은 없이, 온통 ‘결과를 완화’하기 위한 요구에 집중했다. 경제위기의 결과를 완화하는 것도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투쟁에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그쳐서는 한계가 분명하다. 민주노총은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벼리는 노력보다는 중간계급 ‘개혁적’ 전문가들의 이런저런 정책제안을 수용하는데 오히려 열심이었다.
‘이념을 가진 조직화 노선으로서’ 사회운동노조라면, 경제위기 상황에서 다른 것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직화를 통해 꾸준하게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확대’하는 것은 물론, 세계자본주의 위기와 연계된 한국경제 위기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이념을 활동가들과 조합원이 가질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다.
시리자를 대표하는 치프라스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전쟁은 국가와 인민들 사이의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한편으로 노동자 및 인민 다수와 다른 한편으로 전 세계 자본가, 은행가, 주식으로 부당이득을 취한 자, 거대 펀드들 사이의 투쟁이다. 이것은 인민들과 자본주의 사이의 투쟁이며, 그리스는 이러한 투쟁의 선두에 서 있다.”
경제위기는 계급투쟁의 문제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사태의 원인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에 입각해서 투쟁하기 위해서는 ‘이념’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투쟁을 가장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위한 조직화, 미조직노동자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성이 투쟁 속에서 확보되어야 한다. 또한 남한 경제의 위기도 세계자본주의 경제위기의 효과로서 나타날 것이라는 점에서 ‘대안세계화’라는 사회운동의 이념(시각)이 필수적이다. 사회운동노조라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대안세계화 사회운동’을 노동자운동이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의미다(모든 종류의 사회운동들과 별다른 기준도 없이 연대하자거나 의제를 확장하자는 것이 사회운동노조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념’과 노동자운동의 주체 형성을 위한 ‘조직화’도 다른 과제가 아니다.
경제위기에 대해서 “인민들과 자본주의 사이의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세력 역시, 정당들의 이합집산 이전에 노동조합의 총파업 등 대중 투쟁의 과정에서 (그 결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정당들은 대중운동의 분출에 뒤따르면서 이를 지원하는, ‘전위당’이기보다는 (사회운동의 조직가지원자로서) ‘후위당’ 일 수 있다.
남한 노동자운동이 98년의 민주노총과 다를 바 없이 다음 경제위기를 준비 없이 맞는다면, 그 때는 너무 늦을 것이다. 민주노총과 현장의 민주노조들은 현장의 고용안정 투쟁만이 아니라, 혹은 경제위기의 결과를 완화하는 요구만이 아니라, 경제위기의 원인을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인식하고 이에 대한 투쟁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이러한 투쟁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인가?
경제위기가 어느 한 순간의 파국이 아니라 매순간 여러 정치사회적 쟁점으로 드러나는 ‘현재진행형’ 정세라고 할 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과 투쟁 준비가 사회운동노조의 주요한 실천이라 할 수 있다. 1998년 이후 현재의 노조운동은 실책을 범하면서, 살아남을 조직적 자산도 취약해졌다. 2009년 경제위기 이후 정세를 분석하면서 새로운 운동주체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 중에 하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노동자계급 단결의 확대와 이념의 재건이라는 의미로서 사회운동노조’가 필요한 정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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