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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7-8.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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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의 불안정화,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정지현 | 집행위원, 파견철폐공대위
<b>노동의 여성화가 가시화되고 있다</b>

지난 20년 동안 선진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노동력이 여성화되어 가는 것을 목격했다. 근래에 자본은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남성들보다 더 싸고 더 유연하며 집단적 저항이 없을 것으로 예측되는 여성의 고용을 선택했다. 그 결과 가정 안에 묶여있던 과거에 비해 이제 여성들은 밖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사분담자로서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여성 대부분은 여전히도 가사노동과 비공식부문에 종사하고 있고, 공식적인 부문에서도 대부분이 생산직·사무직·판매/서비스직에 몰려있는 가운데 그 대부분이 비정규직 또는 영세중소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의 여성화는 결국 그녀들의 신세를 가정의 안과 밖에서의 이중적 착취로 남겨놓았을 뿐이다. 가속화되는 여성노동의 불안정화 속에서 우리 여성노동운동이 취해야 할 길을 찾는 것이 여전히 남겨진 과제다.


<b>여성노동의 불안정화는 왜 발생하는가? </b>

역사적으로 가사노동의 전담자로 위치지워졌던 여성의 노동은 19세기 페미니즘의 태동과 함께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고민거리의 하나로 다루어져 왔다. 여성노동은 항상 종속적이며, 남성과 같은 직종에 취업을 한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어머니와 같이 누군가를 보살펴야 하는 역할로 규정받아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한 배경에는 여성의 본성이 "모성"에 있고, 여성의 1차적 역할이 "가정"에 있다는데 기인한다. 그러한 여성노동력은 낮은 임금과 낮은 생산성을 가지고 있기에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가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되었고, 많은 부분 어머니 역할을 할 수 있는 직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는 1990년대 들어 급증한 서비스산업으로의 여성 진출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여성노동의 이러한 역사적 성격은 자본의 위기와 결합하면서 보다 불안정한 모습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일반적 위기'와 그에 대응하기 위한 '전세계적 금융화'는 노동 전반의 불안정화를 낳았는데, 신자유주의는 금융화와 노동의 불안정화를 동시에 진전시키면서, 그 결과 '고용 없는 성장'의 일반화를 가중시켰다. 자본이 노동을 불안정하게 만든 이유는 다양한 종류의 불안정 노동을 사용함으로써 비용절감과 유연화를 통해 이윤을 증가시킬 수도 있지만, 더불어 노동통제를 용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의 전략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모성'과 '가정'으로 유폐된 여성의 임노동을 더욱더 유연하게 만들어 착취하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가사노동과 비공식부문 노동의 형태로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노동해왔던, 그럼에도 노동한다 일컬어지지 못했던 여성들은 자본에게 점점 포섭되어 가고있는 것이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후 이제 가정의 영역뿐 아니라 전 노동시장의 영역에서 여성들은 가정에서와 똑같은 역할을 강요당하고 있다.


<b>여성노동의 역사적 고찰과 여성노동운동의 쟁점</b>

그렇다면 현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여성노동의 불안정화에 맞선 다양한 저항들이 취해야 할 과제와 방향에 대한 검토를 위해, 우리나라에서 여성노동자가 임노동에 종사해온 과정과 함께 열악한 노동환경에 어떻게 저항해 왔는지는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1950년대 한국전쟁을 거치고 1960년대부터 산업화에 이르게 된 한국경제는 1960년대 이후 몇 단계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여성노동력의 활용과 취업 구조의 변화도 진행되어 왔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의 변화는 크게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 지향적 산업화의 시기(1960년∼1970년대), 중화학 공업의 시기(1970년대 후반∼1980년대), 그리고 최근 정보화와 서비스 산업 경제로의 변화의 시기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동의 역사적 변화와 함께 여성노동운동의 투쟁은 매시기마다 매우 조직적이고 격렬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b>수출지향적 공업화와 민주노조운동의 주역으로의 여성노동자 (1960년대∼1970년대)</b>

1960∼70년대 한국의 노동은 주로 노동집약적인 섬유·식품·전자조립 부문의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지향적 산업화였다.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조립, 가공한 후 수출하는 방식에 의거하는 수출지향적 산업에서 농촌으로 유출된 양질의 저렴한 여성노동력의 역할과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경공업의 생산방식은 포드주의적 대량생산 체제를 특징으로 하므로, 저임금의 단순미숙련 생산직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대하였다. 공업중심 정책하에서 갈수록 피폐해지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16~17세의 어린 여성들이 이같은 산업의 여성노동자로 충원되었다. 이처럼 이 시기 취업한 여성들은 대부분 어린 여성이었으며, 소위 '여공'으로 지칭된 이들은 잔업과 철야로 이어지는 장시간 노동과 살인적인 저임금을 받으며 우리 산업의 기간 노동력으로 활동하였다.

이 상황에서 노동운동 역시 여성노동자들이 대부분을 주도해 나갔다. 한 마디로 폭발적·전투적이었지만 일회적으로 끝나버렸던 남성노동자들의 투쟁과는 달리, 여성노동자들은 수년 동안 민주노조운동의 주역으로 조직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왔다. 1970년 청계피복노조를 필두로 1972년 5월 동일방직 노조 민주화, 1973년 12월 콘트롤데이타 노조 결성, 1974년 4월 반도상사 노조 결성, 1975년 5월 YH무역 노조 결성, 1977년 방림방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등 민주노조들의 설립이 1960∼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투쟁의 사례들이다.

대개 그 양상을 보면 첫째, 노조가 없거나 기존의 노조가 어용일 때,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독자적으로 노동조건 개선하였다. 둘째, 기존에 남성간부 중심으로 운영되어오던 어용노조를 민주화하거나 민주노조를 결성하는데 여성노동자들이 앞장서는 경우거나 셋째, 일반적인 노동문제의 해결과정에서 여성노동자의 문제에 눈을 떠 그 권리를 획득해나갔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듯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의 최선봉에서 선진적으로 투쟁하였으며, 노동조건 개선 및 민주노조 건설이라는 과제뿐만 아니라, 모성보호, 평생노동권 확보 등 여성노동자의 특수 문제에 대한 자각과 요구가 싹트게 되었다.

그러나 개별사업장으로 진행되었던 투쟁과 대부분이 미혼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은 결혼후 가정에 안주하여 노동운동을 이탈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운동의 단절은 많은 부분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의 한계와 단절을 보여주었다. 이는 여성노동운동가들을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의 대열로 견인할수 있는 체계적 이론과 조직이 부재했다는 한계를 노정한 것이었다.


<b>중화학공업의 성장과 여성노동자 연대투쟁으로의 확산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중반)</b>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화의 추진과 함께 소재 및 중간재를 공급하는 철강, 비철금속, 석유화학 등 기초소재 산업과 조선, 전자, 자동차, 기계 등 기계·기구를 생산하는 전통적인 중화학공업이 산업 생산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중화학 공업은 자본집약적·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숙련된 남성노동력이 주된 기간 노동력으로 충원되었고 따라서 종래의 섬유, 봉제산업 등은 경쟁력이 낮은 산업으로 점차 사양산업화되어 제조업 부문의 여성 취업은 상대적으로 정체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 경제구조는 종래의 섬유·식품 등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기계·자동차·화학 산업 등의 중화학공업과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전자 산업으로 중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이 때의 여성노동운동의 특징은 1970년대의 개별 사업장에서 진행되었던 투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여성운동조직들이 대거 출범하면서 공동 연대투쟁으로 확산을 들 수 있다. 이리 및 인천 지역에서는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이 벌어졌고, 1970년대 민주노조의 주체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노협)가 1984년 3월 10일 창립되었다. 1985년 4월에는 '노동운동탄압저지 투쟁위원회'(노투)가 결성되었고, 6월에는 '구로지역 노조민주화 추진위원회'(구민추)도 결성되었다. 이는 1985년 6월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3인에 대한 구속을 계기로 구로지역 10개 사업장의 여성노동자들 3천명이 벌인 구로동맹파업에 돌입하도록 이끌었고, 사업장을 초월한 연대투쟁의 본보기로 기록되었다.

이 투쟁의 주역들은 노투, 구민추, 1984년 복구한 청계피복노조와 더불어 1985년 8월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1970년대 노동운동의 개별분산성을 극복하고 연대투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여성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투쟁을 만들었음을 알수 있다.
덧붙여 주목해야 할 것은 여성노동운동과 여타 여성운동단체와의 연대활동이 시작이었다. 일례로 구로공단 성도섬유에서 자행된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해고 및 인권유린에 대해, 1985년 여성평우회, 여성의 전화, 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 등 12개 여성단체와 18개 대학 여학생회가 '복직추진위'를 결성, 5개월간 톰보이 불매운동을 펼쳤다.


<b>사무/ 판매/ 서비스산업의 육성과 대중운동으로의 발달 (1987년 이후)</b>

이 시기에는 금융·보험·유통산업 등 3차 산업이 크게 확대됨에 따라 여성 사무직 종사자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의 분위기에서 유흥산업이 비정상적으로 급격하게 확대되면서 도·소매, 개인 서비스업 부문으로의 여성의 유입도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여성노동자 운동은 1987년 민주노조 운동과 함께 대중운동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1987년 후반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가장 두드러진 투쟁사안은 결혼퇴직철폐였다. 그와 함께 평등법개정운동, 동일노동 동일임금, 모성보호문제, 성폭행 등 여성노동자의 특수한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검토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여성노동자들의 특수하고 구체적인 요구의 수용 및 그 실현을 위한 노력을 통해 여성노동자 대중을 운동으로 견인하여 그 요구를 관철시킴과 동시에 노동운동 전반을 강화한다는 입장으로 정리되었다.


<b>1990년대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는가?</b>

198∼90년대를 중심으로 여성노동의 성격은 사무직·생산직에 이어 판매직·서비스직 등에 높은 비율을 보이며 나타나고 있다. 이전에 미혼 여성들 대다수가 생산직에 분포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서비스 산업으로 대다수가 분포되고 있고, 생산직에는 저임금의 기혼여성 노동이 증가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경제 발전과 더불어 생산에서는 물론 소비에서도 서비스업의 중요성이 증대되면서 '경제의 서비스화'가 진전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되어온 젊은 미혼 여성들이 열악한 제조업 생산직을 떠나고 상대적으로 보수가 높은 서비스 산업으로 이동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서비스 분야의 직업은 매우 양극화되는 현상을 보이는데, 한쪽에서는 금융·보험·사업 등 지식과 정보집약적 부문을 형성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노동집약적이고 미숙련·저임금의 일자리가 비정규직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미혼여성 대부분이 후자에 속한다는 것에 그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난다. 여기에 유흥업의 범람과 인터넷의 매체를 통한 각종 성산업은 여성들을 더욱 사지에 내몰고 있다.

뿐만 아니라 IMF이후 열악해진 생계를 연명하기 위해 주부노동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앞서 얘기했지만 1980∼90년대 이후 생산직 취업여성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으며, 따라서 생산직 노동력의 주된 구성원도 미혼의 어린 여성노동자에서 기혼여성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되고 있다.

문제는 과거에 공식적인 정규직 취업으로 대표되던 생산직 부문이, 더욱 유용한 통제를 위해 비정규직으로 전환되고 기혼여성들을 더욱 불안정한 노동의 상태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결국 미혼 여성처럼 쉽게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기혼 여성으로서는 아주 열악한 근로조건과 임금을 감내하며 일해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려는 자본가의 가장 쉬운 포섭 대상이 된다. 뿐만 아니라 기혼 여성의 시간제 고용을 확대하려는 정부와 기업주의 정책은 이미 자녀 양육을 끝낸 여성들을 고용함으로써 모성보호비용의 부담을 계속 개인에게 전가하고, 임시직이라는 이들의 불안정한 위치를 이용하여 해고의 위협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 불황이 닥쳐올 경우 여성의 본업은 가정이라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기혼 여성들을 일차적으로 해고하는 것을 정당화함으로써 성별분업을 확고히 하는 역할을 하게된다.

이러한 1990년대 여성노동의 현황은 다음 <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보다시피 임시·일용직 노동자의 구성을 성과 연령별로 살펴보면, 여성노동자 중 상용직이 31%에 불과한 반면 임시 일용직이 69%에 달해, 남성과 비교할 때 여성의 비정규직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고용의 형태인 임시·일용직 노동자들은 산업별로는 주로 도소매·음식 숙박업 등의 서비스업에, 직업별로는 서비스 판매직, 사업체 규모별로는 10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체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으며, 성별로는 여성에 상대적으로 집중되어 있다. 이처럼 최근에 여성고용이 늘어나고 있는 서비스업과 소규모 사업체에 이와 같이 임시·일용직 등의 불안정화가 늘어나는 것은 1990년대 여성노동의 열악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b>새로이 부상하는 여성독자 노조의 흐름</b>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불안정노동의 확산속에서 1990년대 여성노동운동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된다. 1990년대 후반들어 나타난 여성독자노조의 건설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이 불안정노동을 강요당하고 있고, 기존의 노동조합 속에서 여성노동자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못했으며, 조직화 방식이나 사업방식에 있어 여성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등이 결합되어 전국여성노동조합, 서울여성노동조합 등의 여성독자노동조합이 건설되었다.

전국여성노동조합의 경우 "지속적인 여성조직률의 하락과 변화하는 여성고용구조에 대응하여 여성노동자의 평생 노동권을 확장하고 조직력을 높이기 위해 1) 기존 노동조합과 연맹·중앙 노총에서 여성관련 사안을 주요조직 정책 사안으로 채택해야 하며, 비정규직의 조합원화, 상급단위 간부, 대의원 여성할당제 도입 등 양성 평등적 관점과 정책을 실현해야 하며 2) 여성노동자의 요구와 권익을 조합의 일차적 과제로 안고, 그 해결을 위해 스스로 조직하고 투쟁하는 여성노동조합에 대한 적극적 모색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으로 1999년 8월에 결성되었다.

서울여성노동조합의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으로 발족하게 된다. 기존 남성중심적 노동조합이 성차별적 정리해고에 우선적으로 희생당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대응력을 상실하고 있고, 한국여성노동자의 절대다수가 4인이하의 사업장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으나 조직률은 0.1%에 불과하다. 그래서 여성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세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는 현행 기업별 노조의 틀 속에서는 어렵고 여성들의 조직률이 계속 저하되고 있는데, 기존 노조는 이에 대한 대응력을 상실하고 있다. 싸울 때는 단결, 여성권리 쟁취는 뒷전인 한국 노동조합은 더 이상 여성 노동자의 이해를 전적으로 대변할 수 없기에 지역노조 형태의 여성독자노조를 결성한 것이다. 또한 내용적인 면에서 여성노동운동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노동운동'일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이기 위한 내용들을 조합의 일상활동 속에 녹여내기 위한 시도를 진행한다.


<b>여성노동자를 무엇으로 조직할 것인가?</b>

이처럼 30년을 넘게 지속되어온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마침내 여성독자노조의 흐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축적된 여성노동운동의 흐름속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도래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역사적 맥락에서 기인한 것이다. IMF 구제금융 위기가 도래한 1997년 말까지 한국의 고용구조는 낮은 실업률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완전고용 형태의 안정적인 구조를 유지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97년 이후 수많은 기업의 도산과 노사정위원회에서의 정리해고 합의 도입이후 실업률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997년 노동법 개정에 의한 개별 노사관계법에서의 노동력 수급의 유연화 입법으로 인해 그동안 지켜왔던 안정적인 고용구조는 파괴되고, 개별 노동자는 생계의 안정성을 고용의 보장에서 찾을수 없게 되었다. 또한 노동과정에서도 성과급의 도입, 초과근로시간 증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임금과 근로시간의 불안정 요인이 증대되고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노동 전반에 불안정화를 불러 일으켰는데 문제는 이 불안정화가 여성노동자에게는 2중, 3중으로 집중포화되고 있기에 그 심각성이 더욱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가?
우리의 여성노동의 역사가 여성들로 하여금 조직적인 연대의 성과와 독자적 활동에까지 이르게 하였다면 이제는 명확한 실내용 속에서 투쟁을 조직화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명확히 선언하는 가운데 가족임금제, 성별분리 등의 고착화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얼마나 악랄하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투쟁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IMF 구조조정 당시 단연코 정리해고 1순위는 여성노동자들에게 돌아갔고, 고용위기와 실업 속에서 여성은 더욱더 고되게 어머니 역할을 수행했어야 했다. 그것은 때로는 집안의 의사, 간호사가 되고 아이들에게는 교사가 되기도 했으며 자신의 은폐된 노동을 끊임없이 쏟아부어야만 했던 여성에게 더욱 적대적인 현실이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공격이 가시화되고 있는 이 때에 보여지고 있는 여성노동운동의 흐름을 살펴보자. 여성적대적인 현 상황의 도래를 직시한다면 지금 시기 여성노동운동은 엄밀히 "노동조건 악화에 대한 반대 투쟁"으로의 성격을 가지고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내재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노동배제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이어야 하고, 동시에 노동운동 속에서 여성노동자의 이해와 요구가 각인될 수 있도록 비판하고 추동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나타나고 있는 여성독자노동조합의 경우 주목해 봐야 한다. 여성독자노조의 흐름은 여성노동의 다수가 불안정화되고 있는 지금, 특히나 대공업 남성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기간의 민주노조 운동속에서 가리워진 여성노동자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30년이 넘는 여성노동운동과 비교한다면 이제 막 출발을 시작한 여성독자노조는 섣불리 평가를 내릴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지켜봐야 하는 또 하나의 흐름이다. 다만 법적 보호망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일련의 모습이 여성노동의 비정규직화가 필연적이라는 귀결에서 여성의 성역할의 고착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위험을 내포할 수 있음을 고려해 봐야 한다.

그러한 속에서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중소영세 사업장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노동의 유연화에 대한 그리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이 진행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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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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