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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7-8.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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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속의 논쟁 - 파쇼타도인가, 미제 축출인가

홍석만 | 편집실장
<b>- 1986년 민민투, 자민투의 분화와 노선논쟁-</b>


지난해까지 삼민투를 구성하여 공동으로 투쟁하던 학생운동진영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1986년 초, 대학가에는 두개의 투쟁조직과 두개의 투쟁구호가 등장한다. 어떤 대학에서는 두 명의 투쟁위원장이 연단에 올라가 서로 자신들의 투쟁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주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집회에 참석한 학생대중들까지 연단에 각목을 던지고 서로가 대립하는 양상까지 보이자, 서둘러 집회를 마친 이들은 스크럼을 짜고 각각 교문으로 진출하여 자신들의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1985년, 이른바 개헌정국 속에서 삼민헌법쟁취와 파쇼헌법철폐투쟁을 결의한 대학생들은 각 대학별로 민족·민주·민중(삼민)이라는 기치아래 삼민투를 조직하고 투쟁해 왔다. 그러나, 1986년 들어서 학생운동은 두 개의 조직적, 정치적 경향을 갖는 흐름으로 분열하기 시작한다. 이 분할의 주역들이 바로 우리에게 너무도 귀에 익은 자민투와 민민투이다.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며 반미자주화 투쟁을 강조한 자민투(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와 <파쇼독재타도와 헌법제정민중의회 쟁취>를 슬로건으로 반파쇼민주화 투쟁을 우위에 두었던 민민투(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와의 분열은 그러나 단순한 분열이 아니었다. 이후 십 수년이 지나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장고한 역사적 분열의 시초였던 것이다. 전두환 군사파쇼의 타도와 제국주의 식민지배의 청산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안고 투쟁해왔던 학생운동.
반파쇼민주화투쟁이 우선인가, 반미자주화투쟁이 우선인가라는 당시의 대립은 변혁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던 당대 학생운동가들의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우리는 오늘 이 역사적 분열의 한 페이지를 지면을 빌려 담아보고자 한다.


<b>논쟁의 전사- 1985년의 상황</b>

1986년 민민투와 자민투의 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85년 한국 학생운동의 치열하고도 찬란했던 논쟁의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민민투와 자민투의 분화는 단순한 조직분화가 아니라 전략적 노선에 대한 분립의 과정이었는데, 이는 1985년 학생운동 내부에서 진행된 논쟁을 통해 이룩한 이론적, 조직적 역량의 축적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985년 이전까지 학생운동의 논쟁은, 주로 학생운동의 조직관과 학생운동이 전체 변혁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논쟁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학생회 중심의 대중운동을 중시하던 MC(Main Current의 약자)그룹과 투쟁위원회를 통한 선도적 정치투쟁을 강조하던 MT(민투의 약자)그룹으로 나뉘어 있던 학생운동은 이른바 깃발-반깃발 논쟁을 필두로 하여, 학생운동의 위상과 대중관에 대해 열띤 논쟁을 진행한다. 그러나, 학생운동의 위상과 역할을 중점으로 논쟁을 진행했던 학생운동진영은 1985년에 이르러 한국사회 변혁에 대한 전략논쟁의 시초를 이루게 된다.

이 논쟁이 바로 그 유명한 C-N-P논쟁이다.
C-N-P 논쟁의 시초는 당시 민청련 내부에서 현재 존재하는 변혁이론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운동진영 내부에서, 특히 학생운동진영에서 논의되는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이 논쟁은 한국사회를 주변부자본주의 사회로 보고 시민민주주의혁명(CDR)을 통한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수립이라는 과제를 제출한 견해, 둘째, 한국사회를 민족적 모순과 파쇼적 모순이 겹쳐있는 신식민지(예속)독점자본자본주의로 파악하고 반제반파쇼투쟁을 통한 민족민주혁명(NDR)을 주장하는 견해, 그리고 한국사회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보고 민중민주혁명(PDR)을 주장하는 세 입장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이 논쟁을 통해 학생운동진영의 시야와 변혁에 대한 전망은 전에 없이 확장되고 이론적, 조직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게 된다.

또한 논쟁과정에서 1985년 초 학생운동은 NDR론이 다수의 동의를 획득해 나아가게 된다. 이에 따라, 비록 절충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조직적으로도 MT그룹과 MC그룹으로 나뉘어있던 학생운동조직은 삼민투(민중민주화와민족자주통일을위한투쟁위원회)를 공동으로 구성하게 된다.
변혁전망에 대한 논쟁을 통한 학생운동의 이론적, 전략적 성장은 조직적으로 수렴되고 실천적으로 이를 계승하기에 이른다. 1985년 5월 광주항쟁 투쟁기간에 즈음하여 이들은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5월 23일 감행하게 된다. 이로써 학생운동진영은 수다한 논쟁과 함께 공동투쟁의 대오를 형성해 나가는데, 85년 하반기 삼민이념과 개헌투쟁을 결합하여 삼민헌법쟁취투쟁으로, 나아가 파쇼헌법 철폐투쟁으로 발전시켜 나아간다.

9월말에서 10월중순까지 IMF·IBRD서울총회를 맞아 반외세 민족자주쟁취투쟁 및 민중민주정부수립 투쟁을 진행하고 10월말 이후 삼민헌법쟁취 및 파쇼헌법철폐 투쟁을 연이어 전개하게 된다. 또한, 1985년 11월 이후부터 민정당중앙연수원점거농성, 노동부 수원지방사무소 점거, 뱅크오브아메리카 부산지점 휴게실 점거농성, 노동부장관 비서실점거, 민정당중앙연수원 재점거, 광주미문화원점거, 전국섬유노련사무실점거농성, 민추협농성 등 이후 학생운동에서 찾아보기 힘든 가히 최고에 달한 기습적인 점거농성과 투쟁을 통해 이를 실천적으로 계승하고자 하였다.


<b>삼민투의 분화와 민민투, 자민투의 형성과정</b>

그러나, 일련의 투쟁으로 인해 전두환 군사파쇼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게 되고 구속자가 속출하자 학생운동진영의 조직역량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1985년 5월23일에 일어난 미문화원 점거농성은 가담 학생 73명 중 20명이 구속되면서 그 이후 일어난 대거 구속사태의 신호탄이 됐다. 미문화원 농성사건이 벌어지자 배후 조종혐의로 각 대학 삼민투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령이 내려졌다. 1985년 7월18일까지 전국 19개 대학 삼민투 간부 56명이 구속됐고 그 후에도 1백여명의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또한 7월23일에는 「깃발」사건이 발표되어 11명이 구속되고, 이후 이 사건은 관련자들이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를 구성하여 「깃발」을 제작했다고 하여 10월에는 26명을 구속하였다.

11월 들어 점거농성투쟁이 활발해지자 구속자 수도 대폭 늘어나게 된다. 특히, 민정당 정치연수원 농성사건은 농성가담자 1백91명 전원이 구속되고 배후혐의로 2명이 구속되는 등 모두 1백93명이 구속되는 등 1985년 11월은 관련자「전원구속」이라는 상황이 빚어졌다. 이렇듯 1985년 하반기에는 무수한 투쟁과 그리고 수많은 학생운동가들의 구속되고 학생운동 조직역량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한편, 1985년 하반기 들어서부터 학생운동 일부에서 당시 삼민투의 노선 즉, NDR론에 대한 비판과 반제자주투쟁에 대한 문제제기가 줄을 잇기 시작한다. 학생운동진영에서 미국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0년 광주에서의 경험에서부터 출발한다. 1980년 광주혁명을 무산시켰던 미국에 대한 응징으로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광주미문화원이 방화되고 강원대에서는 미문화원을 방화한 동지들에 대한 연대의 표현으로 성조기를 불태우는 일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방화사건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항거는 한국사회에서 미국과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크게 열어주지 못했다. 더구나 1984년 반미투쟁을 절절히 호소했던 「예속과 함성」이라는 소책자의 발간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의 문제는 여전히 주요한 화두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1985년 상반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5년 5월 삼민투에 의한 미문화원점거농성에서도 학생들은 "미국이 우리에게 진정한 우방과 자유세계의 수호자로 인식되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확인했으며…"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스스로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농성을 풀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까지 변혁에 있어서 제국주의국가이건 그렇지 않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반성이 강조되었고 '제국주의 지배와 변혁'의 문제는 쟁점화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85년 하반기 들어 상황은 달라졌다. 특히 IMF·IBRD총회기간의 반외세 민족자주투쟁이 외세문제를 전면에 걸지 못하고 경제주의적 관점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각 대학교에서 대자보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를 계기로 반제투쟁에 대한 인식과 문제제기가 확산된다. 여기에 학생운동진영에 하나의 문건이 돌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후 반제그룹에서 제출한 것으로 알려진 「반제민중민주화운동의 횃불을 들고 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일명 해방서시)라는 소책자인데 이 팜플렛의 문제의식은 급속히 학생운동진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학생운동진영은 1985년 겨울방학을 맞이하게 된다. 학생운동에 있어서 방학, 특히 겨울방학은 정기적인 학습을 통하여 새로운 이론을 모색하고 탐구하는 시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1985년 겨울방학도 어김없이 그런 시간들로 채워졌다. 각 대학과 서클에서는 하반기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반제그룹의 문제제기에 대한 활발한 토론과 새로운 조직체계들에 대한 논의들이 진행되었다. 당시 각 대학의 조직체계는 이른바 서클의 연합체인 시스템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이러한 체계에 대한 비판과 반제이론에 대한 많은 문제제기들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방학중에 건설된 투쟁체는 새롭게 제기되는 반제이론에 대한 입장 없이 그동안의 슬로건을 반복하는 수준에 머무른다. 이 상황에서 1986년 2월 4일, 서울시내 14개 대학 1000여명의 학생들이 서울대에 모여 '헌법철폐 투쟁대회'를 열고 '헌법제정국민회의' 구성에 대한 서명운동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 집회를 빌미로 전두환 군사정권은 학생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벌이는데, 이것이 이른바 「개헌서명 서울대 연합시위」사건이다. 이 사건으로만 2백3명이 구속된다.
그러나, 구속으로 인한 조직역량의 파괴보다 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반제그룹에 의한 반제투쟁의 의식의 확산과 이에 기반한 조직적 체계에 대한 반감이 더욱 확산되어 나갔다는 점이다. 결국 2월 4일 연합시위가 있은 한달 후, 3월 18일 서울대에서 반전반핵투쟁위원회의 결성식이 진행된다. 이 자리에서 학생들은 성조기로 감싼 허수아비를 불태우며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면서 자민투 결성의 시초를 알리게 된다. 이렇게 삼민투의 분화와 학생운동의 대분할은 시작되었다.

3월 들어 각 대학은 헌법제정 국민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민민투를 결성하게 된다. 그러나, NDR론에 반기를 든 일부 학교에서 자민투를 따로 건설하거나, 이름은 민민투이지만 사실상 자민투의 노선을 따르는 투쟁조직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1986년 4월 서울대에서 최초로 자민투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반미투쟁과 전방입소거부 투쟁이 진행된다. 또한, 같은 달 서울대 학생들이 전방입소 거부투쟁을 전개하던 중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며 신림동 사거리에서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분신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자민투의 투쟁은 당시 학생대중들의 전방입소문제를 반제투쟁으로 끌어내면서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또한 민민투의 경우 민민학련을 건설하고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며 점거농성, 가두시위 등을 전개한다. 그리고 1986년 중반부터 가시화되었던 노동자 투쟁과 철거반대투쟁에 적극 결합하며 '제헌의회 소집'요구를 확대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시켜 나아간다.


<b>자민투와 민민투의 논쟁과 투쟁</b>

자민투와 민민투의 분열은 치열한 논쟁을 동반하였다. 이는 한국의 세계체제내에서의 위상과 역할, 한국사회의 계급구조 및 국가의 성격, 한국사회의 민족문제의 성격 등 한국사회의 성격을 보다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논의로 진행되었다. 또한, 한국사회의 변혁전략과 관련한 계급배치와 전략전술들이 어느 때보다도 풍부하게 논의되고 토론되기에 이른다.
해방서시를 발간하며 등장한 반제그룹은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론으로 무장하고 이제까지 방어적, 수동적인 반미투쟁에 불과한 삼민투의 민족자주수호투쟁을 비판한다. 이 그룹은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성격과 변역의 대상 그리고 주체 즉, 사회성격, 사회구성체 및 '기본모순과 주요모순'에 대한 규명 그리고 계급배치 문제 등 포괄적인 사회변혁의 상을 제시하며 NDR론과의 절연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또한 변혁의 주 대상이 미제국주의라는 점, 따라서 모든 주장들은 기본적인 계급관계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대중의 잠재적 반제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반제그룹의 문제의식은 자민투에 그대로 계승된다. 자민투는 반미자주화투쟁을 최정점에 놓고 '반파쇼민주화투쟁'과 함께 '조국통일촉진투쟁'을 주요한 투쟁목표로 설정한다. 조국통일촉진투쟁은 통일문제가 남한이라는 협소한 틀에서의 변혁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대한 변혁에 대한 전망을 열어야 한다고 인식에 기반해 있다.

즉, 분단이 한반도 내부의 제 정치세력의 갈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제의 강점에 의한 한국 민중의 민족자립의 요구가 짓밟히면서 이루어진 현상이라고 파악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86년 상반기부터 터져나온 <휴전협정폐기하고 평화협정체결하라>는 구호가 바로 이 노선에 입각해서 나오게 된다. 또한, 이들은 독특한 투쟁노선을 제출하는데, 이른바 반제직투론(반제국주의직접투쟁론)이 그것이다. 이는 제국주의의 지배모순을 폭로하고 이 대립을 격화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주의 세력을 직접 타격해야 한다는 것인데, 미 대사관점거투쟁과 미군기지타격 등이 바로 반제직투론의 방식으로 제출된다. 따라서 자민투에 있어서 반파쇼민주화투쟁은 은폐된 미국의 한반도 지배의 폭로의 계기로서 또는 미제의 하수인인 파쇼정권의 타도투쟁으로 표현된다.

한편, 민민투는 NDR론을 골간으로 계승하면서도 1985년 하반기 파쇼헌법철폐투쟁의 무정부성과 급진성을 스스로 비판하면서 자민투 노선과 대립하게 된다. 민민투의 경우 한국사회의 성격을 신식민지 예속독점자본주의 단계로, 국가권력을 예속군부파쇼로 규정한다. 이에 따라 매판정치군부처단을 투쟁의 기본침로로서 확정한다. 또한 변혁의 주체에 대해서도 자민투가 민중의 범위에 소상인 자산가와 민족자본가 등을 설정하는데 반해, 민민투는 노동자, 농민, 빈민, 진보적 청년학생 등을 동맹계급으로 설정하고 민족자본가와 소자산가들과 제휴하기보다는 대중적인 폭로와 타격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이에 따라 민민투와 이후의 CA(제헌의회소집파)의 입장은 노동계급의 헤게모니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하여 계급동맹의 원칙들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또한, 자민투의 반제투쟁에 대해서 민민투는 이를 1960년대 신식민주의론이나 종속이론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면서 군부파쇼와 보수야당의 허구적 개헌논의를 폭로하고, 동시에 미국의 한국에 대한 지배질서 재편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헌법'을 매개로 한 정치투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반제직투론과 반전반핵평화투쟁에 대해서는, 파쇼독재의 타도와 민주헌법쟁취투쟁에 있어서 학생운동진영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가장 중요한 시기에 투쟁의 발목을 잡은 방향성을 상실한 우경적인 슬로건이었다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민민투는 이후에 건설된 민민학련을 통해 제헌의회 소집요구를 본격적으로 제시하면서 노동계급과 도시빈민들의 투쟁에 적극적인 연대를 형성하게 된다.

한편, 1986년 5.3 인천항쟁을 전후로 하여 자민투와 민민투는 각각 개헌국면에 대한 입장으로 다시 논쟁을 가속화하기에 이른다. 신민당이 주최한 개헌현판식이 부산, 대구, 광주 등을 거치면서 점차 대중투쟁으로 확산되자 학생운동진영은 개헌에 대해 더욱 분명한 입장을 갖기 시작한다. 민민투는 이 때를 즈음하여 CA노선과 결합하여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투쟁으로 집약시켰고, 자민투는 직선제개헌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자민투의 직선제개헌노선은 1985년 개헌정국에서 제기되었던 직선제개헌과는 논의의 맥락이 다르다. 자민투는 그 이전의 개헌투쟁에 대해서 정세적으로 '개헌국면'으로 파악했던 것을 오류라고 지적하고 정세를 '제국주의의 한반도 권력 재편기'로서 개헌투쟁은 '반제투쟁'의 관점에서 미제와 파쇼정권의 권력재편 음모를 폭로하고 민주적 제권리투쟁의 일환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민투는 개헌투쟁의 구체적인 슬로건으로 <직선제개헌쟁취>를 표방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서 민민투는 1985년 하반기 이후 국면을 '헌법국면'으로 규정하면서, 권력재편을 둘러싸고 제 정치세력의 공방이 치열하고 상부구조의 위기의 도래에 따라 정세가 혁명적으로 형성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파쇼체제가 위기상황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변혁의 주체역량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주요계기로서 대중의 혁명적 역동성을 끌어내기 위해 '제헌의회'소집을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비판하기에 이른다.

이런 논란 속에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내각제 및 직선제 개헌론이 심각하게 대두되는 가운데, 1987년 연말의 대통령 선거를 '체육관'선거로 치러 정권을 연장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급기야 1986년 말 경찰은 시국사건 수배자들을 전원 검거하라고 강력 지시한다. 그에 따라 전두환 군사정권은 반정부, 반체제 인사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1987년 1월초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의한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한다. 군사정권의 폭압 통치의 필연적인 결과로, 어쩌면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같은 이미 예견되어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지만 군사정권 스스로는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이 한층 더 예기치 않았던 것은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일으킨 역사적 파장이었다. 2월 7일의 박종철 열사 국민추도회와 3월 3일의 고문추방 대행진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5공은 각각 3만명, 6만명의 전경들을 동원해야 했다. 하지만 박종철열사의 죽음은 6·10 민주항쟁을 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다. 4·13호헌 조치가 발표되자 학생운동진영은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5월부터 치열한 가두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어찌되었건 자민투와 민민투의 두 입장은 약간의 굴곡이 있지만 1987년 들어서도 6·29선언이 있기까지 학생운동의 개헌투쟁을 주도하게 된다.


<b>민민투와 자민투, 그 이후</b>

전체적으로 볼 때, 자민투와 민민투의 대립은 1986년 상반기까지 민민투의 절대적 우위 속에서 서울대, 연대, 고대, 전남대 등 일부의 학교에서 자민투가 건설되고 민민투 노선에 대한 문제제기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1986년 하반기부터, 특히 개헌논쟁과 맞물려 직선제개헌 요구가 학생운동 내부에서 다수의견을 차지하면서 자민투의 노선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1987년 전대협을 건설하면서 학생운동의 주류로 부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민투는 NL(민족해방파)진영을 형성하여 직선제개헌을 요구하고, 민민투는 CA(제헌의회소집파)로 계승되어 제헌의회 소집투쟁을 요구하면서 상호 대립한다.

또한, 1987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NL진영은 비판적 지지파와 후보단일화파로 그리고, CA를 중심으로 독자후보노선이 제기되면서 이 분열의 양상은 실천적으로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과 당시 진행된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우리가 쉽게 무리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제투쟁이냐 반파쇼투쟁이냐 하는 문제는 당시의 상황과 인식에 제한된 상황 속에서의 판단일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도 군사파쇼에 맞서 투쟁했던 당대 학생운동가들의 현실적 고민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쟁에서 우리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하거나, 그 때문에 지금 현재의 입장에서 무엇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자명한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민민투와 CA진영은 노동자 민중의 계급적 동맹에 기초한 권력대안과 이후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대한 각성과 그 필요성을 인식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학생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자민투가 제기한 반제자주화론은 제국주의 지배와 종속의 문제에 대한 일대진전을 낳게 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논쟁자체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제국주의의 문제와 식민지배에 대한 고민이 확대되고 인식의 기반이 넓어졌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자민투의 반제직투론과 조국통일촉진투쟁은 실천적으로 많은 문제를 낳게 된다. 1987년 대선 이후 1988년 여소야대 국면에서 민중투쟁의 호조건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남북공동개최를 제기하면서 이러한 국면을 살려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9년에는 이철규 열사의 의문사 사건의 발생과 전교조의 투쟁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평양축전참가투쟁을 제기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정세적으로 많은 혼란과 노선상의 대립이 가중된다. 이렇게 되자 1989년 이후 NL과 PD(민중민주파)를 통해서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에 대한 논쟁이 재구성된다. 이후의 논쟁은 신식민지에 대한 더욱 과학적이고 엄격한 규정과 제국주의 초과착취에 대한 문제, 그리고 이와 연관된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발전하여 한 단계 더 진전된 변혁전략 논쟁을 이끌게 된다.

개헌국면에 대해서도 자민투와 민민투의 직선제쟁취와 제헌의회 소집이라는 정치적 방침 역시 단순히 속단할 수 없는 역사의 장고한 과정 속에서 평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직선제쟁취와 제헌의회 소집이라는 정치방침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1987년 대통령 선거투쟁은 이후 역사 속에서 그 대립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민중독자후보론과 당선 가능한 야당후보인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대립은 이후 십 년 넘게 반복되고 지속되었던 논쟁의 하나이다. 다만 필자의 좁은 식견으로 볼 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직선제쟁취투쟁이 김대중이냐 김영삼이냐 하는 야당후보에 대한 선택으로 나아갔던 우편향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제헌의회 소집투쟁에 대해서 과거 러시아 상황을 직수입한 이론적, 실천적 좌편향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되었건 민민투와 자민투의 노선대립과 사상투쟁으로, 학생운동 나아가 변혁운동은 이론과 사상의 꽃이 만개하는 '전략의 봄'을 맞이한다. 또한 당시의 논쟁은 수많은 논쟁의 계곡들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정권퇴진투쟁인가 아니면 6·15합의 이행에 기반한 반미투쟁이 우선인가가 오늘날 운동진영의 가장 핵심적 논쟁이 아니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반제자주화투쟁과 반파쇼민주화투쟁이 결코 기계적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이에 대한 변혁전략의 지형들을 새롭게 마련하는 것도 현재의 운동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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