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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7-8.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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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짧은 생각

조성은 | 회원
<font color="##003366">사랑노래 10(김정환)

간신히 우리는 유선상으로 연결됐고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 온 천지에
눈이 펑펑 쏟아졌다. 이제 우산살로는
아무것도 가려지지 않는다 그 위를
눈이 뒤덮는다 내복 속까지 파고든다
그렇다 바람이 분다 제 혼자 앙상한,
그렇다 뒤덮일 수 없을 만치 크기 위해
우리는 더욱 넓게 뒤덮여 있어야 한다</font>


<b>번지점프를 하고 싶던 날</b>

늘 그렇듯이, 마감에 쫓겨 주어진 학과 과제에 매달리다보니, 몸도 마음도 녹초였다. 별 영양가도 없는 일을 대강 해치우고 있으면서, 사막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삶이 팍팍하다는 푸념만 해대고 있었다. 이럴 땐 현실에서 멀리 달음질쳐야 제자리로 돌아올텐데. 간간이 만화방으로 도망가봐도 속시원한 이야기는 눈에 띄지 않는다. 책을 뒤적이며 음악을 틀어도 귀에 거슬리기만 한다. 도대체, 내가 무얼 하며 살고 있는 건지. 예전에 힘받았던 책들을 뒤적여도 이번엔 그다지 힘이 되지 않는 듯 하다.
좋아하던 시구(詩句)도 우울하게만 다가온다. 세상은 눈덮여 아무 대항의 몸짓도 먹히지 않는다. '우산살로도 가려지지 않고' 내복 속까지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 듯이 삶의 무기력함이 몸 속에 배어든다. 앙상한 자신의 모습 - 유일한 삶의 재산이라고 생각해온 주위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지만, '유선상으로 간신히'라도 연결되어야 '목소리와 목소리'가 만날텐데, 귀찮거나 혹은 부끄럽거나. '제 혼자 앙상'한 채 살아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렇다, 뒤덮일 수 없을 만치 크게' 되는 것을 순간 잃어버렸다.

살아가는 것을 중력에 내맡기고 그냥 끝없이 떨어져 보고 싶던 날, 우연히 문화관 한 구석에 앉아 <번지점프를 하다>를 보고있었다.

1983년 여름… 첫눈에 반하는 일 따위는 믿지 않는 국문학과 82학번 서인우는 적극적이고 사랑스런 여자 82학번 인태희를 만난다. 자신의 우산 속에 당돌하게 뛰어들어온 여자 인태희. 비에 젖은 검은머리,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당돌한 말투까지 인우의 마음은 온통 그녀로 가득 차 버린다….
영화는 소박한 화면과 1980년대 초반 대학생의 풋풋함을 살리면서, 평범한 멜로영화처럼 시작된다. 거의 중간에 이를 때까지도 흔한 연애담을 다룬 영화인줄 알고 맘 편히 보고 있었다. 화면의 쏟아지는 장대같은 빗줄기와 20대 초반 첫 연애의 살떨리는 설렘을 구경하며 적절히 웃겨주는 구성이 감사해, '참 위화감도 안 주고 재미도 있는 연애영화로구나' 하고 있었는데…. 아무튼, 영화는 전혀 뜻밖의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인우는 17년이 지난 시간 속에서 태희 없이, 그러나 태희를 잊지 못하고 살게 된다. 그런 인우에게 아무나 겪지 못할 놀라운 현실이 놓여지고, 잘 짜여진 복선과 함께 영화는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영화 초반의 평범한 사랑이야기는 사랑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로 반전되고, 그냥 좋으니까 좋아보였던 젊은 남녀의 사랑은 오직 그것이 당신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운명적인 사랑으로 다가온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영원한 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혹자는 이 영화에 깔린 동성애 코드를 중시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주인공의 사랑을 보다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보여진다. 중간에 나오는 대사처럼,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은 이유가 필요없는, 인연 혹은 운명같은 사랑이다.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매력은 이런 운명같은 사랑을 표현하는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에 있다. 후반에 가면서 전반부에 보여주지 않았던 과거의 회상장면들이 평범해 보이던 둘간의 애정의 깊이를 더해주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름대로 설득력있게 엮어놓는다. 추락해도 다시 튀어오르는 번지점프를 제목으로 잡은 것도, 굵은 운명의 줄로 엮어진 주인공들의 사랑이 그만큼 끈질기다는 것을 상징하는 듯 하다. 비슷한 운명같은 사랑을 그린 <편지>나 <동감>에 비해서는 더 좋은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다섯 여섯 번까지 보는 매니아층을 만들만한 저력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그렇지만, 사랑 영화를 보고나면 늘 드는 생각은 '과연 현실에서 저런 사랑이 어디있어' 또는 '참 영화같은 영화구나' 하는 생각이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겠지만, 서로의 관계를 팍팍하게 만드는 수없는 웅덩이를 건너는 뜀박질 같은 것이 현실이 아닐런지. 누군가에 대해서 영화 속 인우처럼 끈질긴 사랑 하나 품고, 17년이나 한 사람을 꼭꼭 가슴에 간직한 채, 오래전의 손 동작, 사소한 대화 내용 하나까지 의미있게 여미어 둘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정말 위대한 삶을 사는 것일 수 있겠다.

물론 한 때는 누구나 그런 사랑을 꿈꾼다. 나 역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단 한번의 사랑과 단 한번의 결혼을 꿈꿔오지 않았던가! 연애와 사랑은 청춘의 대명사와 같은 것이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상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린 것일까? 당연한 수순을 밟아가는 것?


<b>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b>

<font color="##003366">"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중에서)</font>

사랑이 쓸쓸한 이유는 사랑에 대해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상대에 대해서가 아닌 자기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처음엔 나의 감정이, 나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지속되리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엔 자신 스스로가 흔들리고 변하게 되는 경험. 그런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사랑의 영원성, 목숨을 다하는 사랑 등에 자신이 없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은 다시 한번 사랑에 대해 실망하는 것이고, 변함에 대해 좌절하는 것이 되어서 쓸쓸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닐지.

사랑이란 단어가 더 이상 설레지 않고 비현실적으로 들리기 시작하는 즈음에, 슬슬 결혼이라는 단어가 현실에서 다가오기 시작한다. 아마, 정말 현실적으로 되기 시작하는 순간은 사랑과 결혼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가 아닐까 싶다. 집안의 성화 때문에, 나이가 차서, 혼자 객지 생활하는 게 지겨워서 등 슬슬 사랑이 아닌 이유로 결혼을 고려하게 된다.
아무튼 사랑과는 또 다르게 결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 것 같다. 혼자 사는 일도 버거울 때가 많은데,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 자신과 상응하는 책임을 갖는 것, 그리고 끝까지 함께 가기로 마음먹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 대단한 결심을 하고 결혼을 하는데도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갖가지 어려움에 맞닥뜨려서 종종 회의(懷疑)에 빠지곤 한다.

운명같은 사랑을 믿지 않게 되는데는 결혼 이후의 삶이 사랑을 덮어버리는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동화책 속에서는 절대 결혼 이후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했다고 한 줄로 끝내버릴 뿐.
최근 완간된 야스유키 쿠니토모의 <행복한 시간>은 이런 결혼과 사랑의 미묘함을 잘 묘사한다. 일본의 대형출판사인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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