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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0.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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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칼(Sokal)의 날조와 과학기술의 사회적 구성주의

김영식 | 편집위원
1996년, 비판이론 분야의 주요 학술지로 인정받는 저널 [소셜 텍스트 Social Text] 봄/여름호는 '과학전쟁'이라는 특집호로 출판되었다. 이 특집호는 1년전 출판된 폴 그로스와 노먼 레빗의 [고등 미신 : 학계 좌파와 과학과의 불화]에서 비롯되었다. [고등 미신]에서는 사회구성주의자, 포스트모더니즘 과학론자, 페미니스트 과학론자, 극단적 환경론자, AIDS활동가와 다문화주의자를 신좌익의 뒤를 잇는 강단좌익으로 규정하고 과학에 대한 무지를 비난 한 바 있다.

이러한 [고등 미신]을 포함한 과학주의자들에 대해, 비판과학 운동의 권위자인 앤드류 로스는 이 책 서문에서 과학은 이미 종교가 되어버렸고 과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문명에 대한 위험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과학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과학 전사(과학주의자)들이 과학이라는 신전 바깥으로 내던지려는 분노의 대상이 과학을 상업화시킨 자본가들이 아니라 그 신전을 어떻게 지어졌으며 그곳에서의 의식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보여주는 구성주의적 학계 좌파에게 겨누어져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 특집호에서는 [고등미신]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과 함께 과학의 수호자들의 공격에 반격하기 위한 구성주의자 및 페미니스트, 급진과학운동가 등 많은 사람을 불러모았다.

그러나 특집호의 편집작업이 끝날 즈음에 [경계선 넘나들기 : 양자중력의 변혁적 해석학을 위하여]1)라는 제목에 각주가 100여개, 참고문헌 200개가 넘게 달려 있는 인용으로 가득한 논문이 뉴욕대학의 수리물리학 교수인 소칼2)에 의해 기고되었다. 편집자들은 논문과 각주 및 참고 문헌을 줄여달라고 요청한 사실이외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특별호 마지막부분에 이 논문을 첨부하여 출판하였다.

논문이 출판되자 소칼은 바로 미국 학술잡지인 [링구아 프랑카]의 지면에 논문 날조 사실을 폭로했고, [뉴욕타임즈], [인터네셔널 해럴드 트리뷴], [르몽드]지 1면을 장식하게 된다. 소칼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는 물리학자 또는 수학자 (또는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이라면 쉽게 이것이 패러디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논문을 썼다. 소셜 텍스트의 편집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자문을 구하려 하지 않고 양자물리학에 관한 논문을 싣는데 망설이지 않았음이 명백하다.'며 구성주의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소칼은 사회구성주의 과학이론이 과학을 상대적, 주관적으로 만들고 이에 근거해서 "진리란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고 합의하는 것이다"라는 잘못된 사회 이론의 기반이 되는 것을 참기 힘들었음이 자신의 행동의 동기라고 밝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과학주의자와 사회 구성주의자들 간의 '과학 전쟁'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 지게 되었다.

사회적 구성주의란 무엇인가?

사회적 구성주의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과학사회학이 출현하게된 계기는 자연계의 재현으로서의 과학지식이라는 17세기 중엽의 이른바 표준적 과학관 혹은 계몽적 합리주의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에서 주어졌으며 20세기에 와서 구체화된다.

쿤은 패러다임3)론을 통해서 과학자들은 현재 제공된 패러다임 내에서 끼워 맞추기 식4)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논리적으로 이론을 평가하는 입증, 확정 반증 절차의 타당성을 부정하고 과학의 분석에서 사회적 접근법을 도입한다. 아울러 쿤은 두 패러다임에서 '불가공약성', 즉 서로 경쟁하는 둘 이상의 패러다임은 서로 양립할 수 없으며 공통점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불가공약성'에 따르면 두 패러다임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점이 없기 때문에 어떤 패러다임이 보다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인지 평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쿤의 불가공약성은 과학에서의 서로 다른 주장들의 진위가 단지 상대적일 뿐이라는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기초가 된다5).

쿤의 과학 패러다임론과 더불어 두헴과 콰인의 '불충분결정론'은 과학 지식이 실험데이터에 의해 불충분하게 결정되기 때문에 사회적 이해관계가 실험 데이터와 결합해서 결정된다는 '사회적 결정론'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핸슨의 '관찰자 이론의존성'은 과학이 객관적, 보편적이 아니라 주관적, 사회적임을 보이는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철학적 기반 하에 과학지식의 사회적 구성을 강조한 과학사회학이 1970년대에 들어와 영국의 에든버러대학과 바스대학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과학기술지식'이 가치중립적이며 객관적이고 보편적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다른 사회적 지식들과 마찬가지로 시대와 사회적 상황, 우연적 요인들에 의해 구성되는 불확실성과 가변성을 지닌 지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사회구성주의는 과학기술지식이 주장해온 진리에 대한 독점적 권리 주장을 상대화시킨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상대주의적 시각은 맑스주의자이며 과학자인 소칼에게 과학지식이 의식에서의 객관적 사물 및 그 것의 반영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반실재론(anti-realism)으로 인식되었고, 사회 구성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었다6). 이러한 인식하에 소칼은 '패러디 논문'의 성공(?)에 힘입어, 벨기에의 물리학자 장 브리크몽과 [지적사기: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라는 책을 펴내어,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 20세기 상대주의 과학철학자와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자들을 싸잡아 다시 한번 비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이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울러 사회구성주의 내에는 자연실재의 역할을 인정하는 '약한 구성주의'에서부터 반실재론을 주장하는 '강한 구성주의'까지 매우 다양한 입장을 취하고 있으므로 소칼 식으로 사회적 구성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과학의 사회적 구성주의에 대한 올바른 비판으로 보기 어렵다.

강한 구성주의를 논외로 한다면, 구성주의와 상대주의 과학 사회학자들이 '실재'라는 것에 회의적 반응을 보이는 과학은 과학자들이 IQ라고 정의하는 것, 그리고 과학자들이 찾으려는 범죄 유전자 등에 대한 관한 것이었다. 아울러 핵발전소에서 생명과학에 이러기까지 자본의 편에선 과학자들의 주장에 맞서 노동자-민중이 개입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홍성욱 교수는 상대주의 과학철학,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이 결코 '반과학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며, 과학기술이 완전하지 않다는 과학의 무력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동력원일 뿐이다'고 한다. 아울러 '상대주의자들은 반 과학주의자도 아니고 지적 아나키스트도 아니며, 정치 사회적 정의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아니다. 상대주의 철학자나 과학사회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경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의 과장된 힘, 아니 과학을 가장한 힘인 과학 절대주의 또는 과학지상주의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상대주의를 인식론의 기초로 삼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절대적 회의론이나 불가지론이나 궤변이 아니면 주관주의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레닌의 지적은 사회 구성주의자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아울러 사회구성주의는 주체 측면에서 과학기술의 구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집단을 주체로 보고 있으며, 그 구성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억압된 사회집단은 소외시킨다. 그리고 가치평가 관점이나 도덕적 혹은 정치적 원칙을 취급하지 않음으로써 정치적 무관심을 일으키게 한다.

사회적 구성주의 철학을 노동자 민중의 관점으로

이러한 문제점들은 맑스의 변증법 입장에서는 극복 가능해진다. 맑스의 변증법에 따르면, 진리는 하나의 과정으로 객관적 세계는 무한히 발전하는 것으로 그리고 이 객관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반영도 무한한 것으로 인식한다. 무한히 발전하는 인류의 인식의 총체로부터 볼 때 이 객관적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만 인식은 또 언제나 일정한 역사적 시대, 일정한 사람들에 의하여 실현되기 때문에, 그 개인이 얻은 진리는 다 조건적인 것이며 상대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의심할 바 없이 상대주의를 포함하고 있으나 상대주의에 귀착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모든 지식의 상대성을,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식이 이 진리에 접근하여 가는 한계가 역사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 다는 의미에서 인정하는 것이다.'것으로 상대주의에 제한성을 두었다.

맑스는 또한 진리를 파악하는 자는 관념적 몽상가들이나 학자가 아니라 가장 실천적인 계급, 즉 이론적인 수준에 한정되지 않고 실천을 통해서 실천적 수준 수준에서 진실을 증명코자 하는 계급, 즉 대다수 노동자 계급과 그 노동자 전위세력으로 파악하였다. 맑스는 인식에 있어 실천의 중요성, 그리고 가장 실천적인 계급적 관점을 명확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재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변증법에도 불구하고, 과학 비판에 너무나 무기력함을 보였다. 소련에서 제시된 '사회주의 과학'은 영국으로 건너가 '과학기술이 권력집단에 의해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되고 있고 과학기술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통제, 지배한다'고 인식한 급진 과학운동의 동력이 되었으나, 소련에서는 오히려 왜곡 발전되었다. 1940년대와 50년대의 일부 소련 유전학자들이 환경적 조작과 접목에 의해 유전이 변형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이름으로 정적들을 숙청한 뤼셍코 사건에서 그 무기력성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이 사건은 영국의 급진과학운동까지도 영향을 주어 소강상태에 빠지게 하였다.

또한 스탈린 시기의 과학기술 혁명론(STR론)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악용된 과학이 사회주의에서 선용된다는 과학기술 중립론의 입장을 취하였고, 패레스트로이카 이후의 제 2단계 STR론은 기술결정론으로 더욱 조악한 철학으로 변모하였다.

이들 사례는 사회주의자들 역시 과학기술에 대한 무지 혹은 무관심에서 과학기술을 암흑상자로 취급하였고, 과학기술에 대한 절대 권력을 부여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칼식의 비난에 카타르시스를 누리기보다는 사회적 구성주의 철학에서 과학기술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이용에서 어떻게 개입/통제할 수 있는지를 노동자-민중의 관점에서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Ziauddin Sardar, 「토마스쿤과 과학전쟁」<<시민과학>> 29호
홍성욱, 1997,「"누가 과학을 두려워하는가": 최근 "과학 전쟁"(Science Wars)의 배경과 그 논쟁점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국과학사 학회지>>,
-----, 1999,『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 문학과 지성사
-----, 2000, 「상대주의 과학관을 변호함 ― 『지적 사기』의 과학주의를 넘어」<<문학과사회>> 여름호
이영희, 2000, 『과학기술의 사회학』, 한울 아카데미
문국진, 2001, 「「포이에르바하테제」와 실천철학」, <<노동자의 힘, 노동자 교양 자료실 http://www.pwc.or.kr>>


1) 이 논문은 http://www.astro.queensu.ca/~bworth / Reason / Sokal / Papers / transgress_v2_ singlefile.html에서 볼 수 있다.
2) 스스로를 전통적인 맑스주의 좌익 지식인, 국제주의자임을 자청하고 있고, 그가 산디니스타 정권하의 니카라과에서 자청해서 수학을 가르친 바 있다.
3)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의 과학적 가설, 법칙, 이론, 믿음, 실험의 총체를 말한다. 아울러 쿤은 점진적 과학 발전을 비판하고 혁명적인 과학 발전을 주창하면서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의 전이는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종교적 개종과 흡사한, 비합리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4) 예를 들면 현재 제공된 생각의 틀에 관찰된 사실을 끼워 맞추려 하고 기존의 패러다임에 맞지 않는 것은 보지도 않으며, 특히 과학자들의 이론과 실험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공고히 하는데 목표를 두는 행태
5) 그러나 쿤은 1969년에 패러다임 개념을 스스로 철회한다.
6) 이러한 인식을 반드시 틀렸다고 볼 수 없다. 사회 구성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의 유사점을 이영희 교수는 과학에 대한 합리성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과학지식의 우연적 국소적 성격을 부각하며 과학실천에 대한 복잡한 상호작용을 확대 해석하여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점을 들고 있다.
주제어
생태 이론
태그
이명박 G20 정상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