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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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통.HWP

선택할 수 있는 길,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길

정은영 | 대전 늘푸른노동자학교
하루......

오전 7시에는 어김없이 일어난다. 어김없이 일어나지 않는 이도 있다. 7시 20분부터 체조와 달리기를 한다. 약 2-30분 뛰는데 이것 역시 이불 속에 숨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나서 본격적인 세면, 아침식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요즘 머물고 있는 고려대는 아침 9시가 되어야 식당이 문을 열기 때문에 걸핏하면 아침을 못 먹고 집회를 나가야 한다. 어김없이, 우리가 움직일라치면 수위 아저씨는 이동하는 시간과 인원을 어딘가에 보고한다. 이제는 거의 낯을 익힌 짭새가 아주 노골적으로 붙기도 한다. 시민들에게 망신을 줘도 대놓고 이야기한다. ‘우리도 다 먹고 살라고 그러는데...너무 그러지 맙시다’ 이들을 떨어뜨리는 데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낮 시간 동안 하는 일은 다양하지만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매주 1회 우리 노조의 집중집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연대집회나 공동집회이다. 지금껏 함께 투쟁해 온 사람들이 아주 많다. 저녁도 밖에서 사 먹는 경우가 많다. 학교식당이 늦게 여는 데다가 너무 일찍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숙소로 그냥 오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매주 목요일에는 어김없이 지지방문을 오는 분들이 있어서 함께 게임도 하고 영화도 보곤 한다. 가끔은(?) 지난 겨울 혹한 속에서 우리를 지켜준(?)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시간도 갖는다. 조합원들끼리 솔직하고 담백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잠자기는 보통 12시를 넘겨야 가능하다.


파업 319일이라는 시간이 말해주듯 어느 정도 노동운동에 눈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통신계약직노조(이하 한통계약직)라는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설프긴 하지만 위의 내용은 한통계약직의 평범한 일상 중 하루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속을 들여다보자. 3월 29일 전 조합원이 목동전화국을 점거하는 엄청난 일을 벌이고도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200일을 훌쩍 넘겼다. 정규직/비정규직이 뭉치지 않으면 한국통신 구조조정 저지 투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하며 114 분사화 저지 투쟁에 함께 하다가 정규직동지들의 어이없는 (독자)합의 때문에 의기소침했던 분위기를 잡으려 애쓴 지 100일이 넘었다. 위에 적은 하루 일과 속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루하루 투쟁해나가는 것을 ‘전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한통계약직 동지들은 죽을 힘을 다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테러와 추석 등으로 투쟁일정에 공백이 생긴 후 다시 집결한 얼마 동안은 더욱 힘이 모자라는 판국이다. 이런 가운데 한통계약직은 다시 새로운 결의를 다지고 있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이들에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투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한통계약직은 최소한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는 한국통신 자본과 정부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저들은 가족과 추천인(입사할 때 추천인을 첨부하게 되어 있어 이후 교묘한 탄압수단이 된다)을 협박하기, 교섭해태하며 시간 끌기, 교섭내용 흘리면서 내부 교란시키기를 주특기로 하더니 최근에는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한꺼번에 집행하여 한통계약직을 압박하고 있기도 하다. 시간과 돈으로 한통계약직을 쪼그라들게 하겠다는 속셈이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물러날 생각이 있는 동지들은 이미 상경한 파업대오에 남아있지 않다.

한통계약직 투쟁의 엄호와 확산, 그것이 문제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한통계약직 투쟁은 전체 비정규직투쟁의 맨 선두에 서 있고, 이 투쟁을 승리하는 것은 법 규정 하나 바꾸는 것 이상의 큰 상징성을 지닌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한통계약직의 파업투쟁을 일반 사업장의 파업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사고하고 있으며, 그 상징성에 걸맞는 공동대응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새로운 결의를 다지고 있는 한통계약직에게 민주노총 차원의 지원을 약속하지도 않는 상황이다. 사실 3월 29일 목동전화국 투쟁에서 가장 뼈아프게 평가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민주노총이나 공공연맹 차원의 항의방문이나 규탄집회조차 조직하지 못할 정도로 한통계약직의 투쟁은 엄호되지 못했고 확산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떠나서 노조 지도부와 연대투쟁 단위들은 당시 점거투쟁 이후 파급력을 높여내는 투쟁을 벌이지 못한 것을 가장 큰 실패와 한계로 보고 있다.
따라서 114투쟁이 마무리된 직후 우리는 한통계약직 투쟁이 한통계약직만의 투쟁으로 끝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전체 노동운동을 한 단위사업장이 주도하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부담감과 어려움에 부딪혀 있다. 물론 그런 가운데에서도 한통계약직은 최선을 다해 새롭게 강도 높은 투쟁을 결의하며 재충전하고 있는 상태이다. 하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동지들의 따뜻한 시선과 힘찬 연대가 필요한 시기이다. 한통계약직 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인 것이다.


‘제대로 승리하는 비정규직노동자 투쟁을 한 번은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작년 한통계약직 투쟁에 처음 결합할 즈음이나 투쟁이 많이 알려지기 시작한 올해 초만 하더라도 ‘한통계약직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제대로 승리하는 비정규직노동자 투쟁을 한 번은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온통 걱정하고 우려하는 소리뿐이다. 승리의 가능성을 묻는 이, 언제까지 갈 것 같냐고 묻는 이... 솔직히 관심 있게 지켜보았든 아니든,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그런 ‘우문(愚問)’이 세상에 또 없다고 본다. 장기투쟁사업장 중에서 장기투쟁을 하고 싶어서 계획하는 이 없듯, 패배한 사업장 중에서 패배로 향해 치닫고자 계획하는 이 없다. 단 1%가 되더라도 우리는 승리의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그 승리의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다. 죽을 힘을 다 하고 있는 한통계약직 지도부와 조합원들에게, 그만큼은 아니지만 온 힘을 다해 연대투쟁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그런 의심에 찬 질문은 삼가고 함께 신화를 창조하는 데 보탬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 아닌가.
한통계약직의 점거투쟁은 절대 모험이 아니었다. 일터를 되찾고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제조업 노조의 파업에서 기계를 멈추고 공장을 파업현장으로 만드는 것처럼 해고자인 한통계약직 동지들이 전화국으로 되돌아가 일터를 파업현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선택이라는 말은 다른 방법으로도 승리의 가능성을 높여낼 수 있을 때 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 말이 어울릴 수가 없다. 구속결의를 하면서까지 만들어내는 한통계약직의 투쟁을 제발 헛되게 만들지 말아야 하겠다. 결국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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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최저임금 임금 정액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