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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3.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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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세계화, 공황, 계급투쟁

Simon Clarke |
번역 : 김공회(진보저널 읽기 모임)



자본축적과 공황, 계급투쟁의 관계는 CSE가 설립된 이래 중심 주제였다. 사실 그것은 1848년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에서 처음으로 제기한 뒤부터 맑스주의의 중심 주제였다. 동아시아의 위기가 훑고 지나간 흔적에서, 그리고 어쩌면 세계 자본주의의 또 다른 위기의 파동 전야인 지금, 세계자본global capital의 최초의 위기를 언급하면서 맑스와 엥겔스가 발전시켰던 개념들로 돌아가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1847년 11월에 {공산당 선언}을 써 줄 것을 의뢰 받았다. 그 {선언}은 이미 1847년 6월과 10월에 엥겔스에 의해 작성된 초안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프랑스 2월혁명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인 1848년 1월에 출판되었다. {선언}은 맑스와 엥겔스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동학dynamics과 계급투쟁의 정치적 발전을 직접 연결해 보려는 첫 번째 시도였다.

맑스는 이미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Introduc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개별적인 계급이익에 반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보편적인 계급이라고 입증한 바 있다. 또한 {경제학·철학 수고1844 Manuscripts}에서 소외된 노동 개념을 사적 소유 및 정치경제학 비판의 기초로 확립하였다.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Theses on Feuerbach}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것이며, 맑스 자신이 아무리 세상을 잘 이해한다 하더라도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몫임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깨달을 것인가 이다. 이는 추상적인 이론적 질문이라기보다 자본주의적 발전의 역사적 경향을 구별해내는 문제다.

애초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경향을 분석한 것은 맑스가 아니라 엥겔스였다. {정치경제학 비판 개요Outlines of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1843)에서 그는 과잉생산에 대한 자본주의적 경향의 원인을 자본가 사이의 끊임없는 경쟁에서 찾았다. 바로 그것이 자본가가 시장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생산을 늘리도록 충동질한다는 것이다. 과잉생산은 소생산자들과 약소한 자본가들을 시장에서 몰아내 자본을 집중centralisation of capital케 하고, 과잉과 결핍, 과로와 실업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며, 호황과 불황을 반복케 한다.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Condition of the English Working Class}(1844-5)에서 이미 엥겔스는 고용의 주기적 순환과 기술 혁신으로 산업 '예비군reserve army'이 일반적으로 증가(CW4, 384, 429)하고 이에 따라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가 촉진된다고 논한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상업 공황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독립적 발전을 위한 강력한 지렛대'(CW4, 580)라 불렀다.

당시 부상하던 노동자의 혁명적 계급운동에 직접 관계를 맺었던 맑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동학이 내재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 것은 1847년에 이르러서다. 1847년 초반에 쓴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에서 맑스는 '과잉생산과 산업의 무정부성이라는 다른 많은 특성들'(CW6, 136)은 경쟁의 결과―엥겔스의 설명과 같이―일뿐만 아니라 더욱 근본적으로 '노동시간에 따라 상품 가치를 평가'한 결과이며, 여기에서 경쟁은 단지 피상적인 표현형태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모든 생산자는 생산력을 증대시켜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단축하려 하는데, 그 결과 생산의 규모는 증가한다. 이는 생산량의 증가와 가격의 하락을 초래하는데, 이렇게 해서 더욱 효율적인 생산자가 덜 효율적인 생산자를 대체한다. 앞선 설비를 지닌 생산자가 벌이는 경쟁은 과거의 방식으로 생산하여 시장에 남아있는 상품들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동시에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깨트려 결국 '생산은 필연적으로 호황과 불황, 공황, 침체, 회복 등의 부침(浮沈)을 끊임없이 겪어야만 한다'(CW6, 137). 따라서 공황을 발생시키는 것은 단순히 자본주의적 경쟁의 무정부성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의 조건이다. 과잉생산이란 생산기술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한 생산자들을 시장에서 몰아내는 수단이므로, 그것은 단지 경쟁 때문에 생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 지니는 특징 형태이다. 과잉생산은 생산력 발전에 따른 대가다. 이는 공황이 시장 경제가 아니라 발전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그것을 추동하는 힘driving force은 생산력의 발전이다―의 특성임을 뜻한다. 이와 같은 분석은 1847년 12월에 맑스가 브뤼셀에서 일련의 강좌를 진행하면서 발전된 것으로, 나중에 개정을 거쳐 {임노동과 자본Wage Labour and Capital}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여기에서 맑스는 위와 같은 과잉생산에 대한 자본주의적 경향을 설명하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에 썼던 {공산당 선언} 명제의 기저에 흐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동학을 설명하는 기반이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동학에 관하여 위 분석이 지니는 독창성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든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시장의 한계에 적응해 나가는 경향을 띤다는 취약한 가정에 기대면서, 그러한 적응의 실패를 개인의 무지나 불확실성, 혹은 개별 자본가의 판단착오에서 기인하는 피상적인 불완전성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이윤을 그저 자본가의 미덕에 대한 부수적인 보답으로 간주하면서 '소비야말로 생산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말한 애덤 스미스Adam Smith로부터 유래하는 기본적인 가정의 표현일 뿐이다. 스미스는 이 경구(警句)를 '너무도 자명해서 이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일'(Smith, 1910, Vol. I, 385)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존재 자체에 의해 부정되는, 명백히 그릇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적은 소비가 아니라 이윤의 추출과 자본의 축적이다. 자본축적의 수단은 소비자의 욕구―그것의 한계는 자본가가 넘어야 할 장애물이다―충족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지배를 받는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바로 그들의 생산물을 자본가들이 착취하는 것이다.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은 단순히 자본가들의 주관적 동기일 뿐만 아니라 경쟁의 압력에 의해 자본가가 부과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쟁의 압력이란 다름 아닌 [자본주의 경제에/역자] 내재하면서 자기 증식하는 과잉생산의 경향인데, 이는 모든 자본가가 시장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생산력을 발전시킴으로써 생산을 늘리도록 강제한다. 과잉생산의 경향은 시장의 한계에 대한 무지 혹은 판단착오의 결과가 아니다. 혁신적인[생산기술을 혁신하는/역자] 자본가는 그의 생산물 증가분 전체를 수지타산에 맞게 처분할 수 있는 반면, 다른 자본가들은 상품의 과잉생산의 결과로서 시장의 한계를 떠안기 때문이다.

과잉생산과 공황의 경향은 자본가가 생산수단 혁신의 원인이자 결과다. 이는 새로운 생산방식이 과거의 것을 대체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생산양식과 생산수단이 어떻게 계속 변화하고 혁신되는지, 또 어떻게 필연적으로 노동의 분업 뒤에 더 고도의 분업이, 기계의 사용 뒤에 더 많은 기계의 사용이, 대규모의 노동 뒤에 더 큰 규모의 노동이 뒤따르는지를 보게 된다'(CW9, 224). 노동자에게 이는, 자본가들이 '더 많은 노동자soldiers of industry를 해고하기 위해 경쟁'(CW9, 226)할 때 발생하는 노동의 탈숙련화, 노동시장에서의 경쟁의 격화, 임금하락, 과잉인구화redundancy를 의미한다. 따라서 과잉생산과 공황은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발전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뒤떨어진 생산력을 가진 생산자를 축출하고, 노동자의 궁핍화 및 탈숙련화하는 문제와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사실 {선언}에서 자본주의의 위기 경향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는 것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도출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는 놀랍게 들릴 수도 있을텐데, 바로 {선언}이 세계 자본주의를 휩쓸었던 대규모의 공황을 배경으로 쓰여졌으며 또한 이는 당시 {선언}을 준비해야만 한다는 긴박함의 이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1847년 6월에 쓴 {공산당 선언}의 초고에는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공황의 중요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두 번째 초고가 나오는 1847년 10월 사이에 공황이 발생했고, 엥겔스는 '공황이 노동자들에게 부과하는 막대한 고통과 사회 전반전인 혁명적 동요, 나아가 기존의 체제 전반을 위협한다'는 주장을 삽입했다. 엥겔스의 초고에서 공황의 경향은 '경쟁 그리고 일반적으로 산업 생산이 개인에게 맡겨지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질서는 따라서, '사회전체가 모든 생산의 부문을 운영'함으로써 경쟁에 내재된 공황의 경향을 제거할 것이다. '사적 소유 또한 철폐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개인에 기반한 산업의 운영 및 경쟁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CW6, 347-8). 그러나 맑스가 쓴 완결 판에서 공황의 경향은 경쟁이 아니라 [생산 방식들에 대한 계속적인 혁신을 방해하는] '부르주아 소유의 조건들'의 협소함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CW6, 490). 비록 그 최종판이 '부르주아지들 사이의 증가하는 경쟁,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상업공황'을 언급할 때 공황의 원인으로 경쟁을 다루고 있지만 말이다(CW6, 492).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동학에 대한 분석은 과잉생산에 대한 이전 설명에 기대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과잉생산은 자본이 끊임없이 생산력을 혁신하고 세계시장을 발전시키도록 압박하는데, 이는 과잉생산이라는 주기적 공황을 대가로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위기 경향은 부르주아지가 '스스로를 죽음에 처하게 할' '무기'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데, '그 무기를 휘두르는' 것은 다름 아닌 프롤레타리아트다(CW6, 490). 그렇다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무기를 휘두르게 되는가?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에 관한 설명을 자본주의적 공황의 경향에 대한 설명 바로 뒤에 제시하나, 둘을 명시적으로 관련시키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노동자를 '기계의 부속물'로 전락시키면서, 임금을 최소수준으로 낮추고, 노동강도를 강화함과 동시에 노동일을 늘리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발전시킨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화는 장인적 소생산을 파괴시킨다. 반면 소규모 자본가들은 거대 자본들의 경쟁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리하여 '중간계급의 낮은 층은 ... 점점 가라앉아 프롤레타리아트가 되'(CW6, 491)며 사회는 점차 두 개의 계급으로 양극화된다.

'산업의 발달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는 수적으로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거대한 대중으로 결집하게 되고, 그 세력도 점증하며 그들 스스로 더욱 커진 자신의 힘을 인지한다'(CW6, 492). '기계가 노동의 차이를 제거하고 거의 모든 곳에서 임금을 똑같이 낮은 수준으로 제한해 나감'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에서 부문별, 문화별 구분이 붕괴되는 한편, 상업 공황은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의 변동성을 더 크게 조장'하며 '멈추지 않는 기계의 혁신은 ... 그들의 생계를 더욱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CW6, 492).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고용주에 대한 투쟁을 조직한다. 그렇다고 바로 노동자의 승리가 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 국면에서는 맑스도 노동자가 노조 투쟁을 통해 임금을 상승시키는 것은 어려울 것이며, 오히려 '그들 전쟁의 진정한 결실'은 '노동자가 조합을 계속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투쟁이 국가적 규모로 확대됨에 따라 그것은 계급투쟁의 성격을 취하면서 필연적으로 정치적 형태를 띄게 된다.

맑스와 엥겔스는 {선언}의 출간 전야인 1847년 위기가 혁명적 투쟁의 물결을 촉진시킬 것이라 기대했으나, 1848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하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는 계속 사기가 치솟는 시기였고, 맑스와 엥겔스는 향후 5년 안에 혁명이 가능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1847년 공황이 자본주의 최초로 세계적 호황인 빅토리아 시대의 서곡이 될 것이라고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점진적인 발전에 대한 그들의 설명이 [어떤 지적 회의주의에 의해서도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을 의지에 대한 낙관에 의해 추동되는] 사회학적 분석에 기대고 있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낙관주의는 자신의 글로도 논박된다. {선언}에서조차 맑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화가 '노동자 자신들 사이의 경쟁 때문에 계속적으로 방해받고 있'으며 이 경쟁은 위기와 불황depression의 특성임을 명기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 엥겔스는 베른슈타인Bernstein에게 보낸 편지(1882년 1월 25일)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러한 위기가 정치적 대변동의 강력한 지렛대 중 하나임은 이미 {공산당 선언}에 언급되었네 … 호황으로 복귀하는 것은 혁명을 중단시키고, 반동 세력들이 승리하는 기반을 닦는 다는 점 역시 설명되었지'(Letters on Capital, 209-10). 경기후퇴recession가 노동자 사이에서 경쟁을 부추겨 서로의 단결을 약화시키고, 되돌아오는 호황은 그들의 혁명적 욕구를 둔화시켜 그들의 혁명을 파괴시킨다는 설명은 이후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에서 여러 번 발견된다. 어쩌면 혁명은, 호황에서 성취한 노동자의 단결을 공황에서 뒤따르는 경쟁의 압력이 파괴하기 전에, 그러니까 바로 그 위기의 순간에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맑스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The Class Struggles in France}(1850)에서 다음과 같이 썼듯이 : '이렇게 전반적으로 호황일 때 … 실질적인 혁명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러한 혁명은 오직 근대적 생산력과 부르주아적 생산 형태라는 두 가지 요소가 서로 충돌할 때에만 가능하다. … 새로운 혁명은 오직 새로운 위기의 결과로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위기만큼이나 필연적이다'(CW10, 135; c.f. CW39, 96).

이는 잘 알려진 주장으로, 나는 이 글에서 더 이상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다만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여전히) 달성하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경향에 대한 맑스의 분석을 무력(無力)하게 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으로 매우 적절히 설명된다는 점만은 지적해 둔다.

마지막으로 내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좀 다른 문제다. 1850년대 맑스의 이론적 작업의 주된 초점으로, 바로 공황의 원인과 형태 사이의 문제이다. 이는 복잡한 이론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1848년과 오늘날 모두 중요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문제는 1847년 공황의 원인이 영국―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노동자의 조직화가 가장 높은 수준의 발전 양상을 보이고 있던 나라―에서 막대한 자본의 과잉축적 탓이었는데도 공황의 충격은 대륙, 특히 프랑스에서 더 크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영국의 상업 및 산업 공황이 프랑스에 미친 영향은 매우 파괴적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산업 부르주아지와 금융귀족들 사이의 갈등을 극도로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발생한/역자] 공황에 의해 촉발된 투쟁이 영국 노동자와 그들의 고용주 사이에서 벌어진 계급투쟁이 아니라, 프랑스의 산업 부르주아지, 금융 및 토지귀족과 공무원들 사이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과잉생산의 공황이 금융공황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공황은 장기간에 걸친 영국 산업자본의 과잉축적으로 뒤이어 출현하였으나, 사실 이는 상업과 금융의 투기를 촉발시킨 흉작으로 폭발하였다. 영란은행The Bank of England [영국의 중앙은행/역자]은 1844년 은행법Bank Act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켜서 이 위기를 타개하고, 한편에서 인상된 이자율 덕에 대륙으로부터 금이 유입되면서 금융제도에 대한 압력이 경감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금의 유출로 대륙에서는 금융공황이 퍼져나갔다. 이는 1848년 혁명의 발생에도 나름의 역할을 하였으며, 금이 안전을 찾아 런던으로 유입되면서 영국에 가하는 압력을 더욱 경감하였다. 이 결과로 발생한 유럽의 경기후퇴로 세계시장은 영국의 생산물에 개방되었고, 영국 자본의 새로운 축적은 이내 유럽으로 퍼져나갈 빅토리아 중기 호황의 시작을 알렸으며, 반혁명에 의해 집권한 반동적 정권들은 안정되었다.

1852년에 맑스와 엥겔스가 예측했던 공황은 발발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더욱 낙관적이 되었다. 왜냐하면 공황의 발생이 지연될수록 그것은 더더욱 극심해질 것이고 더더욱 적절해질 것이며 이전 공황과는 달리 더욱더 영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잉여자본이 금융과 상업적 투기가 아닌 생산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은 공황이 '산업이 아니라 상업이나 화폐 부문에서 발생했던 1847년보다 훨씬 더 위험한 성격을 지닌다'(CW11, 361)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분석이 제기하는 핵심적 질문은 공황이 막상 닥치는 나라와 공황으로 드러나는 모순이 성숙한 나라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해서 혁명이 계속될 수 있는가 이다.

맑스는 공황과 혁명의 상호작용은 영국을 진앙지로 세계적으로 펼쳐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공황이 영국보다 대륙에서 나중에 발생하듯, 호황도 그렇다. 이 과정은 항상 영국에서 먼저 발생한다; 이는 부르주아적 우주의 조물주demiurge다. … 그러므로 공황이 대륙에서 최초의 혁명을 촉발시키지만, 이 혁명의 기반은 항상 영국에 있다. 맹렬한 봉기는 부르주아의 심장부보다 자체 조절능력이 덜한 몸통의 가장 말단에서 일어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른 한편으로, 대륙에서 혁명이 영국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는 이 혁명이 부르주아적 삶의 조건에 대해 얼마만큼 실질적으로 문제제기 하는지, 혹은 그것의 정치적 양태formations에 얼마만큼 충격을 가하는지를 나타내는 척도이다' (CW10, 509-10). 대륙은 정치적 혁명의 장소이지만, 사회혁명은 영국에서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계의 나머지 부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는 20세기 모든 혁명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로, 그 혁명 모두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으로 어느 정도 촉진되었지만, 그 중 어떤 것도 이러한 모순이 충분하게 발전한 자본주의 심장부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동아시아 위기에서 제기된 문제이기도 하다. 동아시아를 강타했던 공황의 뿌리는 서유럽, 일본, 미국을 근거지로 하는 세계 자본의 과잉축적에 있지만, 막상 이 공황이 발생한 것은 제국주의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다. (잘해봐야 자본의 가치를 모두 잃어버려서 인도네시아 혹은 한국 대중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생산수단만을 남겨놓고) 자본은 녹아서 이미 공기 중으로 흩어진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인도네시아 혹은 한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정치적 우위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자본을 차츰 빼앗을'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자본의 세계화에서 정치적 쟁점은 이미 맑스가 1848년 바로 직후에 직면했던 바로 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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