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6.26호

자본주의의 시기구분

기술, 제도, 그리고 생산관계

G. Dumenil, D. Levy |
서론: 시기구분의 경쟁하는 기준

자본주의 내에서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역사적 진화가 순수하게 양적인 측면(예를 들면, 산출량의 성장이나 기술 진보)으로 평가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대신 자본주의 시기구분의 주요한 난점은, 경쟁하는 다양한 기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기술과 이에 상응하는 생산조직은 150년 전의 그것과 양적인 것 이상의 차이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제도, 특히 기업의 형태변화(그 규모와 그것에 관련된 경쟁형태, 그리고 분업형태 등...)를 주장하지만, 법률적 틀이나 국가(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나 국제관계의 유형 등) 등과 같이 광범위한 경제적․사회적 제도들도 쟁점이 된다. 이러한 관점들은 그것이 적용되는 다양한 명칭들 속에 분명하게 반영된다: 제국주의, 국가자본주의, 독점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경영자 자본주의, 케인즈주의, 신자유주의 등. 나아가 일국 경제의 다양한 부문들과 국가들 사이의 폭넓은 이질성으로부터 보다 복잡한 명칭들이 도출된다.
이와 같은 접근의 다양성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분명 복잡한 사회적 체계이며, 그것에 대한 분석은 상호 관련된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모든 기준들이 동일한 지위를 가질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다양한 양상들에 하나의 위계가 부여되어야 하며, 그 양상들이 결합되는 방식은 확실히 내적 위계를 내포한다.
비록 마르크스의 논증 범위를 넘어 최근 100년 동안의 역사적 변화를 다루고 있지만, 점차 분명히 드러날 것처럼, 이 논문의 시기구분은 마르크스의 분석에 근거를 둔다. 중심 개념은 생산양식(그것들의 연속과 상호관계), 생산관계, 계급(그들의 투쟁, 지배계급 내부의 모순, 계급타협), 그리고 국가(그 제도와 정책)로 친숙한 것들이다. 이러한 역사적 분석은 또한 역사적 경향과 위기(특히 이윤율 저하와 구조적 위기)에 대한 관찰을 근거로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기에 채택된 전망은 마르크스주의 이론들 내에서 전통적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들의 다양한 관점들을 표현하는데 어떤 선험적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술과 분배에서 시작할 것이고, 그 후 제도와 정책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제국주의와 국제화, 장기파동, “조절”(조절학파에 의해 정의된) 등의 관점과 대비를 이룰 것이다. 그 후 우리는 생산관계와 계급 유형의 관점에서 우리의 보다 일반적인 해석을 제안할 것이다.
이 논문은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 1장에서는 1980년대까지의 시기를 간단하게 세 시기로 나눈다. 이러한 시기구분은 기술과 분배에 대한 역사적 종단면에, 특히 이윤율의 운동에 근거하고 있다. 이윤율의 운동은 19세기 후반에 점차 하락하다가, 20세기 초반부터 1950, 60년대까지 상승하고, 그 후 다시 하락하는 양상을 보인다. 우리는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시기를 마르크스적 궤적을 따르는 시기로 분별해 낸다. 세 번의 구조적 위기가 구별된다: 1890년대의 위기, 대공황, 그리고 1970년대의 위기. 이윤율이 상승한 20세기 전반부와 비슷한 또 하나의 새로운 국면이 1980년대 중반부터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2. 2장에서는 제도와 정책의 변화를 다룬다. 첫 번째 주요한 일련의 사건은 세기 전환기의 법인 및 관리 혁명의 발생과 현대적 금융의 출현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이러한 제도는 새로운 효율성을 낳았는데, 이는 20세기 초반에 보다 큰 임금 성장률과 결합된 이윤율의 상승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변형과 기술 및 수익성의 추세 사이의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다: 이윤율 저하로 인해 발생한 19세기말의 구조적 위기는, 20세기 전반기 동안 이러한 제도적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고 자본주의의 새로운 경로를 도입했다. 대공황은 두 번째 일련의 사건들, 즉 뉴딜과 제2차 세계전쟁 시기의 케인즈주의적 제도들과 복지국가의 출현이라는 사건을 위한 조건들을 제공했다. 기술의 우호적 추세와 결합하여, 이러한 새로운 제도적 틀 - 여기에서 국가의 역할은 중심적이다 - 은 전후 10년 간 일반화된 틀을 형성했다. 1970년대의 위기는 이러한 제도적 틀을 역전시키고 금융적 이해의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출현의 기초가 되었다. 결국 지금까지 언급한 다양한 요소들 - 기술과 분배, 구조적 위기와 제도 및 정책 - 은 미국 자본주의에 관한 보다 복잡한 시기구분을 제안하고 있다.
3. 3장에서는 우리의 분석이 네 가지 전통적 접근들, (1) 제국주의, (2) 국제화와 세계화, (3) 장기파동 그리고 (4) 조절과 축적체제 등이 비교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분석들의 적합성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이들과 우리 분석 사이의 다양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접근들이 갖는 주요한 한계는 제4장에서 다루게 될 생산관계와 계급 유형의 내재적 진화를 파악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다.
4. 4장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자본주의의 변화를 역사유물론이라는 보다 넓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틀 - 생산관계, 계급 유형 그리고 권력관계(헤게모니와 타협) - 속에서 해석한다
(a) 소유(현대적 금융제도에 집중된)와 경영(거대 법인)의 분리, 그리고 신용기구와 금융의 통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생산관계의 실질적 변형으로 묘사된다. 오늘날 생산수단의 소유는 거대자본(익명의 소규모 유가증권 소유자를 통제하는)의 보호 아래 금융의 대략적 형세를 규정하는 금융 기관들 속에서 집중된다. 사무 및 경영층(사적 기업과 공공 부문 내의)의 등장도 계급 관계를 변화시켰다. 새로운 계급 모순 - 경영층과 여타 봉급생활자 집단(노동자와 사무직) - 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노동자 사이의 모순과 결합되어 오늘날의 계급관계의 유형을 생산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b) 우리는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지배계급의 권력이 작동되는 상이한 사회적 형세들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공황 이후의 금융의 권력에 부과된 제한들, 사적․공적 상층 경영층의 등장, 그리고 임금 노동자 일반에 대한 양보(구매력, 고용, 그리고 사회보장의 측면에서) 등에 준거해서 케인즈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반대로 신자유주의는 금융의 권력의 재승인, 최고 경영층에 관한 신임 그리고 이전 타협의 침식 등에 준거를 둔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현재적 진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기본적 과정에는 두 가지의 사회적 논리가 공존하는데, 이는 각각 전통적인 자본주의적 논리와 새롭게 출현하는 경영적․관리적 질서에 상응한다. 종국적으로 이러한 진화의 동력은 계급투쟁이다(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사회주의적 대안을 건설하기 위한 시도를 포함하여).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투쟁한다. 그렇지만 자본가와 경영 및 사무 층의 공존, 그리고 경영층과 노동자의 공존 또한 쟁점이 된다. 세계적으로 볼 때, 자본가는 여전히 현대 금융의 틀 내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경영 자본주의에 대한 보다 전통적인 접근법을 보다 정교하게 가공하는 것이다. 경영자들이 그들 자신의 ‘부문적’ 이해를 표현하거나 반대로 자본가들의 단순한 대리인으로 행동하는 범위나 수준은 계급적 권력이 실행되는 사회적 형세에 따라 결정된다. 경영자의 자율적인 권력의 승인은 장기적인 퇴행의 국면―혹은 변화하는 유형―이 관찰되는 점진적 과정이다. 그들이 계급적 이해를 초월할 수 있다는 생각(경영 혁명이 출현하는 동안, 그리고 그 다음에는 케인즈주의 시대의 사회적 성과와 관련하여, 혹은 이전 사회주의 국가에서)은 환상에 불과하다.
5. 5장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는 경영자적 특성의 점진적 확산을 단절시킬 수 있는지 검토한다. 경영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경제를 이끌고 있다. 여기에는 금융 기업들 자체, 특히 뮤추얼 펀드와 연기금 등이 포함된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진화를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현재적 진화를 특정한 경로로 이끌기 위한 시도로 묘사된다. 이는 공적 기관(보험, 퇴직연금, 교육과 관련된)과 대립하는 사적 기관들에게 우호적인 동시에, 케인즈주의의 몇몇 기관들(중앙은행, IMF 등)의 활동을 케인즈주의적 타협이나 유럽의 공적 부문에서와 같이 경제 부문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 개입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재설정 된다.

1. 역사적 경향과 구조적 위기

이번 장에서는, 기술, 분배, 그리고 구조적 위기에 근거해서 미국 자본주의의 시기구분에 관한 간단한 1차적 접근을 제공하고자 한다. 1.1절에서는 대략적인 세 국면이 구분된다. 1.2절에서는 19세기후반과 20세기의 구조적 위기를 논하고, 그 원인이 완전히 다른 대공황과 이를 비교한다. 마지막 1.3절에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회복 국면이 출현함을 시사한다.

1.1 이윤율 진화의 세 가지 국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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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경제에서 기술과 분배를 나타내는 주요 변수들을 검토함으로써, 남북전쟁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를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림 1의 추세선이 드러내는 바와 같이, 이윤율의 장기적 경향은 대체로 수평적이지만 세 시기로 뚜렷이 구분된다. 첫 번째 국면은 남북전쟁부터 1900년 혹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이고, 두 번째 국면은 대체로 20세기 전반부까지, 세 번째 국면은 두 번째 시기의 마지막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이다.
이러한 시기구분은 이윤율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비슷한 윤곽이 자본 스톡에 대한 산출량의 비율 혹은 자본의 ‘생산성’에서도 발견된다(그림 2의 (a)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다른 변수, 예를 들면 노동생산성이나 시간당 실질임금은 상승 추세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완만-급격-완만하게 상승하는 추세를 보인다(그림 2의 (b)). 자본의 기술적 구성(자본-노동 비율), 생산의 기계화 지표에서도 비슷한 유형이 관찰되지만, 반대로 급격-완만-급격하게 상승하는 추세를 보인다(그림 (2)의 (c)). 이러한 관찰을 통해 이와 같은 세 국면의 시기구분의 적합성이 증명된다. (노동비용과 노동 생산성이 나란히 움직이기 때문에, 이윤분배율은 대체로 고정적으로 유지된다.)
기술 및 분배와 관련해서, 19세기 후반기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의 일반적 추세는 많은 면에서 유사하고, 자본축적에 불리한 것처럼 보인다. [이들 시기에] 노동생산성 증가율과 실질임금의 상승률은 둔화되었고, 자본의 기술적 구성은 급격히 상승했으며, 고정자본 스톡은 산출량보다 훨씬 더 급격하게 증가했다(자본생산성은 하락했다). 또한 이윤율은 하락했고, 실질임금의 상승률은 장기평균보다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이들 시기의 특성은 『자본론』 3권의 역사적 경향에 관한 마르크스의 분석에 부합하며, 따라서 이들 시기는 ‘마르크스적 궤적을 따르는 시기’라고 명명될 수 있다. 반대로 두 번째 시기는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자본축적에 우호적인 추세를 보인다. 노동생산성의 성장률과 실질임금 상승률은 상대적으로 커지고, 자본 생산성과 이윤율도 증가하였다.

(그림)

1.2. 구조적 위기의 상이한 두 가지 형태

이러한 진화의 유형은 두 번의 구조적 위기와 연결되는데, 하나는 19세기 후반의 것이며 다른 하나는 1970-80년대의 것이다. ‘구조적 위기’라는 용어는 일상적 경기순환상의 침체국면과는 구별되는 보다 장기적인 위기를 의미한다. 구조적 위기는 기술과 분배의 불리한 추세, 축적률의 저하, 큰 폭의 경기변동, 지속되는 실업 등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러한 특징은 금융의 불안정성과 결합되어 나타날 수 있다. 마르크스의 분석에 따라, 우리는 이러한 구조적 위기를 이윤율의 실질적 저하 시기의 전형적 결과들로 파악한다. 낮은 이윤율은 축적에 악영향을 미치며, 경기순환의 파동을 낳는다. 축적률의 저하와 만성적 경기 침체는 고실업률이 지속되는 원인이 된다.
1930년대 대공황은 그 본성상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위기와 구분되는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불황은 몇 가지 관점에서 위에서 언급된 “우호적인”시기에 발생했다. 문제는 기업들 사이의 이질성이 심화되고 거시경제 안정화를 위한 제도적 틀이 미성숙했다는 것이다. 당시 진행된 급속한 변화는 경제의 한 부문, 즉 금융에 의해 뒷받침되는 거대 법인기업들 내에 집중되었던 반면, 더 작고 더 전통적인 다른 기업들의 기술과 조직은 점점 낙후되었다. 1929년의 경기침체로 이러한 낙후된 부문들에 투자된 자본의 평가절하와 파괴가 시작되었다. 오직 극단적인 수요 및 신용 정책만이, 낙후된 부문의 소멸을 상쇄하기 위해 선진 부문의 활동성을 적극적으로 강화하면서 급격한 경기수축을 회피할 수 있었다.
공황은 세기 초에 시작된 기술 및 분배의 변형을 가속화했고 후진적 기업들의 제거를 낳았지만, 이 시기 주요 변수들의 운동을 오직 잠정적으로만 중단시킬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노동생산성의 상승은 침체된 경제활동 수준에 의해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의 [일반적인 상승] 유형은 불황 이후에 회복되었다.

1-3. 하나의 새로운 국면?

그림1을 검토해 볼 때, 1980년대의 특정 지점에서 새로운 국면이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80년대 이후가 하나의 새로운 국면이라면, 이들 변수의 운동에 관한 한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 수 있다. 그림3은 다음과 같은 변수들의 진화의 구체적인 면을 보여준다 ; (1) 이윤율(그림1에서와 같은 정의와 분석단위로) (2) 이윤분배율 (3) 자본의 생산성. 이를 명료화하기 위해, 구조적 위기에 앞선 이윤율의 수준의 시기인 1956-1965년의 10년 동안 세 변수의 평균을 기준으로 하여 1로 표현했다(이윤율=자본생산성×이윤량).
(그림 3)
그림 3은 1970년대에 이윤율이 심각하게 하락한 것을 보여준다. 1982년에는 이윤율이 1956-1965년 10년 평균값의 57%에 그쳤다. 1997년에는 1970년대와 거의 비슷하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의 회복은 유의미하지만 부분적인 수준이다: 1956-1965년의 10년의 65% 수준으로 하락한 이후 점차 회복되어 그 수준 근처에 이르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회복의 대부분은 자본 생산성 상승에 기인한 것인 반면, 이윤분배율은 오직 조금만 상승했을 뿐이다. 1982년부터의 자본생산성의 이러한 상승은 우리에게는 매개적 시기로 이해되는 20세기 전반부 동안의 이들 변수의 상승추세를 상기시키며, 새로운 국면의 정체를 밝히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최근의 경향은 미국 자본주의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점점 더 많이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운동이 확실하다면 남북전쟁 이후 제4의 국면이 나타날 것이다.

2. 제도적 틀과 정책

여기서는 제도 및 정책의 변형이라는 두 번째 관점에 대해 살펴본다. 최초의 주요한 일련의 사건은 20세기 초반에 일어났는데, 법인혁명과 경영혁명이 그것이다(2.1절). 이러한 혁명이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앞장에서 언급한 우호적인 추세들을 낳았다. 두 번째의 사회적 혁신을 위한 조건들은 공황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것은 거시경제에 대한 통제와 복지국가를 지칭하는 “케인즈주의적 타협”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의 등장이다(2.2절). 1970년대의 구조적 위기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새로운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신자유주의의 등장(2.3절). 마지막으로 2.4절은 제1장과 이번 장에서 소개된 시기구분에 관한 간략한 종합을 제공한다.

2.1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의 새로운 상승 : 경영 자본주의

20세기의 기술 및 분배 경향과 근대 자본주의의 제도적 틀의 변화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관계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기업 및 소유형태의 진화다. 19세기말에 채택된 새로운 기술은 더 큰 생산 단위를 요구하였고, 그것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거대 기업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개인이나 가족이 소유한 소규모의 전통적 회사는 철도와 같이 거대한 산업구조의 발전에 적합하지 않았다. 규모에서의 성장은 사실상 새로운 경영 방법을 요구하였고, 거대한 자본이 모집되어야 했다.
이 시기의 주요한 양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세기말 마르크스적 궤적을 따라 경제가 침체되고 있을 때, 산업과 교통의 발달은 전례 없는 경쟁압력을 낳았다. 이윤율에 대한 압력을 피하기 위한 기업들의 시도로서 협약, 풀(pool), 트러스트 등의 [기업] 네트워크가 발달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후 ‘느슨한 통합(loose consolidation)’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독립적 기업들이 각기 독자적인 실체를 보존하면서, 최저가격을 설정하여 시장점유율이나 이윤마진을 확보하기 위해 합병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反)트러스트 법이 이러한 합병을 약화시켰지만 그 추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대신 이러한 법률은 ‘긴밀한 통합(tight consolidation)’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촉진시켰는데, 그것은 독립적 기업들이 공동소유의 거대단위로 실질적으로 합병하는 것이었다. 경제가 1890년대의 불황으로부터 회복되었을 때, 세기의 전환기의 불과 몇 년 동안 ‘법인 혁명’으로 알려진 급속한 합병의 물결이 발생했다. 완전히 새로운 제도적 틀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의 초석은 금융의 지원을 받는 거대한 법인이었다. 또한 경영 혁명이 병행되었는데, 관리혁명은 종종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테일러리즘’이나 ‘포디즘’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되었다. 거대기업들은 생산의 조직화와 경영 일반의 모든 측면들은 이제 법인 기업들 내에서 경영 및 사무진의 피라미드에 의해 실행되었다. 이러한 경영혁명은 새로운 차원의 효율성을 낳았다. 우리의 견해로는, 그것이 20세기 전반의 기술적 성과를 설명하고 새로운 분배 추세를 규정짓는 결정적 요인이다. [물론] 노동과 자본의 생산성 향상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효율성이 노동자들의 투쟁과는 독립적으로 더 큰 실질임금 상승률과 복지국가의 보호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이러한 개선들에 유리한 조건들을 창조했다.
경영과 이윤율 추세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경영의 목적은 넒은 의미에서 이윤율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는 비용의 삭감과 추가 투하 자본량의 최소화를 동시에 요구한다. 기술변화의 기존 형태들에서의 문제점은 노동생산성의 증대가 거대한 양의 고정자본의 증가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이는 이윤율 저하 경향에 관한 분석 속에서 마르크스가 묘사했던 (자본구성의 상승 속에서 드러나는) 형세 속에서 발생하는 메커니즘이다. 반면에 20세기 전반 기계화의 전형적 형태인 조립 라인은 그러한 형태의 메커니즘이 자본-노동 비율의 급속한 상승으로 물질화 되지 않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변수의 성장률은 실제로 19세기 마지막 10년과 비교하였을 때, 20세기 전반부 동안 감소하였다(그림2의 (c)). 이것은 기계 자체의 구조, 그것의 지속적 사용, 그것이 노동에 가하는 압력, 작업장에서 이에 상응하는 조직 등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조립 라인은 다른 것들의 한 예일 뿐이다. 개선된 상업적 관행뿐만 아니라 재고나 유동성 관리도 이윤율에 유사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새로운 기술과 조직의 확장에는 수 십 년이 걸렸다. 전반적으로 볼 때, 경영 혁명은 20세기에 들어 일어난 이윤율 하락에 대한 주요한 반경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2 뉴딜과 케인즈주의적 타협

19세기에 금융 기관들의 안정성은 사적 기관들, 보다 정확하게는 화폐 및 금융 체계의 상층 분파의 손에 놓여 있었다. (남북전쟁부터 연방준비제도의 창설까지 미국에서의 화폐 및 금융 체계는 전국은행체계(National Banking System)로 알려져 있다). 뉴욕 은행과 같이 거대한 은행은 준비은행의 기능을 했고, 주식시장의 변동이나 은행 체계 그 자체 내의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이자율을 조정하고 신용의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금융위기 상황에서는 은행들의 지불정지를 막기 위해 특별한 조치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경기 조건에 영향을 미친다 할지라도, 그것은 거시경제 안정화를 직접적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1913년의 연방준비제도의 창설은 이러한 틀을 수정한 것이지만, 경제활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한 이전의 저항은 1920년대에도 여전히 일반적이었다.
그 시기의 특수한 조건―1.2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기업들 사이의 거대한 기술적․조직적 이질성―으로 인해, 화폐 및 금융 기관들은 위기의 처음 3년 동안 붕괴를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자신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금융부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행정기관은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뉴딜 정책은 종종 케인즈의 수요정책, 특히 재정지출과의 연관 속에서만 묘사되어 왔다. 경기부양을 위한 “초기 자극” 방법의 일환으로 공공근로가 채택되었지만, 1937년 이전에는 재정적자가 정책적 조치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이후에 불가피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 개입은 직접적이고 분명하였다. 전국적인 은행 업무 중지가 선언되고, 국가는 은행 체계 내에서 존속 가능한 부문의 재개를 통제하고 그들의 부실 채권을 관리했다. 경제는 12개 집단으로 조직되었는데, 그 속에서 기업들은 전국산업재건청(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dministration)의 주도아래 시장을 분할하고, 최저 가격과 최저 임금을 고정했다. 2차 세계대전동안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거대한 개입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체계의 가장 극단적 요소들은 대공황 이후에 지속되지 않았다.
전쟁동안에 케인즈의 사상이 미국으로 확산되었고, 이러한 확산은 미국에서 케인즈주의적 혁명이 존재했다는 준거가 되었다. 이러한 ‘혁명’은 사실상 하나의 사회적 타협(4.3절에서 언급할 계급타협)이었다.
1. 애초에 케인즈가 정식화한 것처럼, 케인즈주의의 기본 원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국가는 사적 기업의 활동(다양한 산업에서의 생산과 투자)에 개입하지 않는다. (2)국가 활동의 초점은 거시경제, 즉 경제활동의 일반적 수준의 안정화와 완전고용(화폐 정책을 통해, 그리고 사적 행위자가 신용조건의 완화에 반응하지 않을 때마다 수요정책을 통해)이다. (3) 금융 활동은 규제되어야 한다. 특히 주식시장의 작동(케인즈에 의하면, 이것은 경기변동의 중요한 원인이다)과 국제적 거래 및 자본 이동은 규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사적 주도권과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이 보장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적․화폐적 메커니즘에 관한 통제력이 공적 기관들에게 이전되면서 금융은 그들의 헤게모니를 상실했다.
2.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현실의 실재적 변화는 완전고용과 관련하여 위에서 언급한 경계와 케인즈 자신의 목표를 초과했다. 결정적인 요소는 임금소득자의 구매력 증가와 복지국가의 사회적 보장이었다. 노동조합은 새로운 사회 질서의 관리에서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고, 새로운 입법은 임금 노동자의 권리를 [명확히] 규정했다. 교육과 과학적 연구에 대한 국가개입은 상당할 정도로 늘어났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다른 나라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생산체계의 특정 부문들에 국가가 직접적으로 개입했다.
1960년대 후반, 경제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은 위기의 종말과 새로운 풍요사회를 예언했다: 케인즈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 활동의 일반적 수준을 안정화하고 투자를 자극하는 처방을 마침내 발견했다. 일본과 유럽은 브레튼우즈라는 화폐․금융제도의 우산 아래에서 점차 미국을 따라잡았다. 임금노동자의 조건은 상당히 향상되었다. 이러한 현상의 모든 면이 장미 빛은 아니었지만, 이들 몇 십 년의 기간은 사후적으로 볼 때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자본주의의 이러한 새로운 시대는 19세기 후반의 위기에 뒤따라 시작된 조직혁명으로부터 물려받은 경영․관리적 특성과, 대공황 및 2차 세계대전이 낳은 케인즈주의의 특성을 종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1970년대까지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난 경제의 예외적 특성은 기술의 우호적 추세와 케인즈주의적 틀이라는 두 유형의 발전의 결합을 반영한 것이었다.
다음과 같이 묘사되는 금융의 두 가지 측면을 대조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1)앞장에서 언급된 법인 혁명과 경영 혁명에 대한 금융의 개입 (2)이번 장에서 분석된 거시경제 안정화에 의해 요구된 개혁에 대한 금융의 저항. 이러한 진술이 비록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이지만, 금융의 첫 번째 성과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두 번째 성과는 그 사회적․정치적 비용이 너무 크고 실제로 1930년대 제도의 생존을 실질적으로 위협했던 부정적인 영향으로 평가할 수 있다. 금융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에 관한 인식은 그것의 역사적 충격을 해결한 케인즈주의적 타협의 중심적 측면이다.

2.3. 새로운 마르크스적 궤적, 신자유주의 그리고 가능한 네 번째 국면

일단 새로운 경영조직이 확립되고 기술이 새롭게 고안되자, 혁신과정과 관련된 이전 시기의 조건들이 다시 등장했다: 비용의 압력 하에서 개선의 둔화. 전쟁 이후에 미국경제는 마르크스적 궤적으로 복귀했다. 새로운 조직이 끊임없이 경영 및 사무 층의 감독을 요구하기 때문에 효율적 경영이 여전히 필요했지만, 혁명과 극적 발전의 영웅적 시대는 이미 과거가 되었다. 경제의 낙후된 부문 중 대부분은 대공황과 전쟁 기간에 제거되었고, 1950-60년대의 이윤율은 높게 유지되었지만, 쇠퇴는 진행되고 있었다.
이윤율 저하와 함께 축적은 둔화되었고 임금노동자와 기업, 그리고 금융간의 분배를 둘러싼 긴장은 고조되었다. 이는 계속되는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케인즈주의적 수요관리 정책은 위기를 지연시켰지만 1970년대의 구조적 위기를 치료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은 금융의 소득을 침식해왔다. 게다가 금융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케인즈주의적 타협의 시대 동안에도 그들의 후퇴를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 시기동안 금융은 국내적 규제를 피하기 위해 새로운 국제적 틀을 적극적으로 구축했다. ‘유로은행들’, 부상하는 다국적 기업들 그리고 미국 정부(세계 전반에 걸친 달러의 수지균형과 관련된)의 이해가 수렴하면서 금융이 권력을 회복할 조건들이 창출되었다. 마가렛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과 함께 발생한 급격한 퇴행적 정책은 당시 진행 중이던 사회적 권력 이동의 산물이었다.
새로운 틀은 신자유주의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그 주요 구성요소를 세부적으로 살펴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제로에 가까운 인플레이션, 주식시장의 활성화, 기업지배구조의 개혁, 임금감축, 복지국가의 후퇴와 탈 규제, 연기금과 민간의료보험의 금융화, 자본의 자유로운 국제이동. 신자유주의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회복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제로 상태의 인플레이션은 금리생활자의 구매력을 보호한다. 그것은 대출 유인을 감소시키고, 주식시장에 대한 신뢰를 옹호한다. 노동비용의 통제와 탈규제는 기업의 수익성에 명백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자유주의 내에 존재하는 자유주의적 기원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새로운 국면은 법인기업이나 현대적 금융이 존재하지 않았던 19세기 중반 좋은 시절의 자본주의로의 복귀로 해석될 수 없다. 거대 법인은 어느 때 보다 활동적이며, 경영 및 사무 층의 거대한 피라미드에 의해 엄격하게 경영된다. 사실상 상층의 경영진은 기본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케인즈주의적 타협이라는 사회적 제약과는 독립적으로 주주들의 배타적 이익을 위해 이윤율을 극대화는 기능이다. 또한 중앙은행은 해체되지 않았고, 오히려 인플레이션에 맞서는 싸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이전의 사회적 타협(그 범위가 점점 줄어들긴 하지만)이라는 지향에 여전히 예속된 국가의 영향력으로부터 점차 해방되어 왔다(중앙은행의 독립). 금융이 케인즈적 시기 동안 자신의 새로운 힘을 얻었던 국제적 자본이동의 영역 속에서 이제 극대화된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현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국제적 영역이 아니라 국내적 변화가 중요한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분명해진 자본생산성과 이윤율의 새로운 상승 추세는 20세기 전반부(우리가 매개적 국면이라고 말한)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것은 경영․기술․조직의 새로운 수행방식을 반영한다. 자본생산성의 회복은 아마도 정보혁명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보혁명의 범위는 투자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의 비율을 통해 드러난다. 1970년부터 1996년까지 전체 설비투자 중 정보관련 투자(컴퓨터, 커뮤니케이션...)의 비중은 5%에서 42%로 상승하였다. 정보기술의 사용 증가는 이들 범주의 설비의 상대 가격의 급속한 하락과 평행을 이룬 것이었다.

2.4. 하나의 종합?

분명히 자본주의 시기구분의 난점은 위의 요소들을 하나의 일관된 전체로 조합하는 데 있다. 다양한 범주의 사건들이 반드시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적 궤적에 상응하는 첫 번째 국면을 살펴보자. 그것은 19세기말 구조적 위기를 낳았다. 이러한 상황은 거대한 제도적 변화, 법인 및 관리 혁명,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이끈 경영 자본주의를 낳았다. 이러한 점에서 그 특징은 훨씬 명확하게 보이며, 우리는 남북전쟁부터 세기가 변하는 시기까지의 하나의 국면의 양상에 만족할 수 있다.
그렇지만 1장에서 살펴본 순수한 기술적․분배적 접근은 경영혁명의 확산과 전체경제에 대한 그것의 우호적 효과의 과정에서 발발한 대공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우리는 대공황을 이러한 확산의 ‘비용’, 즉 후진적인 제도적 틀 내에서 이러한 확산 과정에 내재된 기술의 이질성에 의한 위협의 통제불가능성에 따른 것으로 해석한다. 하나의 새로운 요소가 분석에 도입되어야 한다: 거시경제의 ‘경영’의 성숙성의 시간지체. [경영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기술의 습득은 사실상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이루어졌다. 그러한 사건들은 경영의 발전을 위한 조건을 제공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혁명을 전후로 해서 두 개의 커다란 국면을 구분해야 한다.
따라서 남북전쟁부터 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시기를 고려하면서 대공황의 시기를 추상하면, 두 개의 주요한 국면이 남게 된다. (1)전국은행체계의 안정화 메커니즘을 가진 19세기말 마르크스적 궤적을 따르는 시기 (2)20세기 초에서 대공황에 이르는 시기. 이 시기에 기술적 변화와 분배의 새로운 과정이 진행되었지만 거시경제적 혁명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혹은 미발달했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의 시기는 경제의 낡은 부문의 제거와 거시경제의 안정화, 성장 촉진, 생활수준 개선 등을 위한 새로운 잠재력의 창출한 새로운 사회적 타협의 구축으로 표현된 중요한 이행기를 표상한다.
새로운 비우호적 추세의 최초의 효과들은 전쟁 이후(이 시기에 경제는 새로운 마르크스적 궤적을 따랐다)에 분명해졌지만,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경영 혁명의 효과들은 여전히 기술의 우호적 측면을 보장하고 있었고, 새로운 케인즈주의적 틀의 이득은 감지되고 있었다. 그 첫 번째 단계에서 기술의 변화의 비우호적 과정의 결과들은 경기와 인플레이션의 동시적 자극으로 인해 잠정적으로 상쇄되었지만, 이러한 시기는 1970년대의 구조적 위기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신자유주의로의 전환 과정에서, 새로운 정책과 규칙들이 시행되었는데, 그것들은 처음에는 위기를 악화시켰으나, 1980년대 중반부터는 보다 우호적인 새로운 기술의 추세가 관찰되었다(5.3절에서 보겠지만, 이러한 새로운 기술적 경향이 신자유주의에 기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자).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는 세 개의 국면을 나눌 수 있다: (1)1960년대까지, 새로운 마르크스적 궤적의 초기 효과들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이윤율이 유지되던 시기 (2)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케인즈주의적 타협의 맥락 속에서 새로운 마르크스적 궤적이 실현되던 시기 (3)새로운 신자유주의적 과정과 새로운 기술추세의 출현 가능성의 시기. 1970년대의 구조적 위기는 후자의 두 시기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분석을 미국경제라는 지평을 넘어 확장하는 것은 좀더 많은 복잡성을 요구한다. 일본과 유럽은 매개적 국면의 우호적인 경향, 새로운 마르크스적 궤적, 그리고 구조적 위기라는 것과 관련해서, 약간의 시간 격차를 두고 미국의 경로를 따른다. 현재의 국제적 금융 불안정성은 대공황의 경우와 비슷한 위협을 낳지만, 제도적 배경에서는 중요한 차이점을 갖는다.

3. 제국주의, 국제화, 세계화, 장기파동, 조절

자본주의 역사의 몇몇 국면들을 구별하는 것과 역사적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제국주의, 국제화와 세계화, 장기 파동, 프랑스 조절학파에서 등장한 조절과 축적체제이라는 4가지 분석 틀에 대하여 논의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접근에 대한 상세한 검토를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앞장에서의 논의와의 연장선상하에서 이러한 접근에 대한 몇 가지 분석을 제공할 것이다.

3.1 제국주의에 대한 전통 이론과 새로운 이론

자본주의의 변형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자본주의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위한 소재를 제공했다.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에서 이 시기에 관한 분석은 종종 제국주의라는 통념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레닌의 용어법 속에서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새로운 단계를 지칭했으며, 자본주의의 시기구분은 분명한 쟁점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등장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내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논쟁을 부활시켰다. 자본의 국제화와 세계화, 금융의 새로운 지배력, 미국 헤게모니, 재발하는 화폐 및 금융위기 등에 관한 오늘날의 발전된 논의들은 이러한 새로운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논쟁은 ‘공산주의당 선언’에서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노선에 대한 당시의 이해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공유된 종말론적 전망과 관련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는 최후 단계이어야만 했다. 제국주의에 관한 연구에서 레닌의 유명한 종합을 고찰해보자.
1.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의 주요한 특징은 독점의 존재다. 독점의 형성에 대한 레닌의 설명은 정확한 연대기로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경쟁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반영하였다.(p.219)
2. 레닌은 기업 규모의 확대를 생산의 합리화로 이해했으며, “엄청난 사회화의 진전”(p.222)과 새로운 기술적 성과를 인식했다. (레닌의 분석은 종종 독점의 출현이 기술적 변화와 성장에 미친 효과에 대해 모순적인 입장을 가진다.)
3. 자본주의의 이러한 단계에서 소유와 경영은 대체로 분리되었다.(p.258) 소유권은 금융 내로 집중되고, 생산으로부터 멀어졌다. 금융과 비금융 법인들 사이의 관계는 중심적이었다: 금융 자본은 지배적이었다.
4. 또 다른 특성은 자본가 집단과 열강들 사이에서의 세계분할을 낳았던 자본수출이었다.
20세기 초반 자본주의 변형에 대한 레닌의 다소 모호한 분석은 이 시기의 이행기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1. 19세기 후반 경쟁의 위기는 경쟁의 격화로부터의 탈출에 관한 합의들(트러스트의 발전에서 절정에 달한)과 함께 법인 혁명을 낳았고, 새로운 거대 기업들 내에서는 경영혁명을 낳았다. 그러나 새롭고 거대하며 보다 효율적인 법인기업의 출현은 경쟁을 회피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들로 잘못 해석되었다. 레닌의 분석은 이와 같은 이행기 과정에 대한 모호성을 분명하게 반영했다. 그는 거대 법인기업의 발달을 자본주의의 부후성의 징후(대체로 혁신을 가로막는)로 간주하는 동시에 새로운 조직적, 기술적 성취의 징후(사회주의를 예고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화)로 간주했다.
2. 금융의 역할에 관해서도 유사한 점이 관찰된다. 한편으로 생산적인 체계에 연계된 새로운 거대 금융은 기금과 필요한 조정을 제공함으로써 법인 혁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 금융은 금리생활자 계급을 형성했는데, 이들의 보수주의는 화폐 및 금융 시스템의 개혁을 어렵게 만들었다. 오직 대공황의 충격만이 사회적 균형을 붕괴시키고, 거시경제 혁명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은 진화의 이중적인 성격을 인지하기 못한 것에 대해 레닌을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회고적으로 고찰해볼 때, 독점과 이에 상응하는 자본주의 기생성에 대한 강조는 잘못된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는 자본주의의 회복능력을 예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17년 이후 사회주의 건설 중에는 조직적이고 기술적인 성취라는 이차적인 측면을 주요하게 고려했다. 우리는 다른 저작들에서 레닌과 부하린, 트로츠키가 미국에서의 거대 법인기업의 발전을 수입해야 할 것(이러한 수입에 따른 사회적, 정치적 결과를 과소평가하면서)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밝힌바 있다. 분명히 맥락에 따라 이러한 현상들의 특정한 면들이 강조되었다.
중요한 것은 20세기 전반부나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관한 제국주의 분석의 타당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후반 자본주의 많은 특징들이 레닌의 제국주의 분석을 반영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국적 기업의 진출이나 불황기 이후 금융자본의 부흥, 그리고 일본 경제의 약화와 연계된 새로운 미국 헤게모니는 동시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특성을 강화하고 있다.

3.2 국제화와 세계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적 착취를 전 세계적으로 확장시키는 자본주의의 항구적 경향을 언제나 자본주의의 결정적 특성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확장의 형태와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다양했고, 그러한 변이들은 종종 제국주의와 관계 속에서 자본주의의 시기구분 기준으로 사용되어 왔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자동맹부터 오늘날 시장의 세계화에 이르는 과정 전반의 시기를 상세하게 구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생산의 국제화의 세계화의 결과들은 너무 두드러져 흔히 소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대의 주요한 특징으로 간주된다. 자본주의의 이와 같은 국제적 성격이 언제나 그 기본적 특성에서는 동일하게 유지되어 왔다고 주장하는 분석가들과 최근 몇 십 년 동안의 급진적 변형을 강조하는 분석가들 사이에는 실제로 약간의 ‘긴장’이 존재한다. 2장에서 묘사된 진화와 이러한 최근의 추세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1. 다국적 법인 기업의 발달은, 법인 및 경영 혁명에 의해 가능해진, 거대 사적 조직 내에서의 생산의 사회화의 한 가지 양상이다. 이들 새로운 제도들과 연결된 경쟁의 종별적 특성―종종 과점으로 묘사되어온―은 이제 세계적 규모로 분명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들 법인기업과 금융 사이의 관계는 이전에 국내적으로 발전되었던 것과 유사한 성격을 띤다.
2. 그러나 이러한 국제화가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맥락에 의해 많은 혼란들이 야기되고 있다. 쟁점이 되는 것은 케인즈주의적 타협의 파괴와 금융 권력의 부흥이라는 이행의 양상을 지닌 신자유주의의 기치 하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의 국제화와 시장의 세계화이다. 2장 3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제 금융 메커니즘은 자본주의 내에서 금융의 지도력의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와 같은 환경이 신자유주의의 국제적 특성에 덧붙여졌다.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의 ‘반케인즈주의적 타협’이라는 특성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모두 강력하다. 국내적으로 중앙은행이나 화폐정책과 같은 케인즈주의적 수단들은 보존되지만, 금융의 이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된다. 국제적으로는 금융은 2차 대전이후에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제도나 규범을 실행하려 한다. 그것의 효과는 IMF와 같은 브레튼 우즈 기구들을 통해 신자유주의 질서를 전 세계에 확산하는 가운데 나타난 최근의 금융 위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전반적으로 오늘날 자본주의의 국제적 양상에 대한 강조와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타당하지 않다는데 있지 않다. 지금의 국제적 양상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실질적 특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오히려 쟁점은 그러한 양상의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해명하는 것이며, 이는 보다 일반적인 해석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3.3 장기파동
그림1에서 제시된 이윤율 시계열은 장기 파동을 환기시킨다. 특히 1980년 중반 이후의 이윤율 상승은 장기 파동의 해석을 상기시킨다. 이윤율 변화의 관찰에 대한 과도한 일반화는 ‘이윤율은 거의 한 세기를 주기로 한다’는 명제를 낳을 수도 있다.
장기 파동 분석과 우리의 분석의 첫 번째 차이점은, 미국 자본주의의 시기구분에서 우리가 생산의 성장률이나 가격변동보다는 기술과 분배의 측면을 더욱 강조한다는 점이다. 남북전쟁 이래로 미국의 사적 부문에서의 순생산(NP) 증가를 보여주는 그림4를 살펴보자. 순생산 증가의 로그값을 취한 그림에서 실선은 전 기간에 걸친 불변적 성장률에 상응한다. 실제로 이러한 성장률이 상수는 아니었고, 자본주의의 근본적 법칙이 그러한 항상성을 보증한다고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이윤율, 노동비용, 혹은 노동과 자본의 생산성에서 드러났던 것과 같은 분명한 시기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다 면밀히 검토해보면, 성장과 축적 또한 기술 및 분배에서 드러나는 동일한 운동의 일부임이 드러난다. 그림5는 그림4에서 점선으로 표현된 추세선의 성장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변수는 단기파동을 추상한 순생산의 변동을 설명해준다. 이 그림은 또한 고정자본 스톡 추세의 성장률(실선)과 이러한 성장률의 추세선(점선)을 보여준다. 다음과 같은 분석이 가능하다.
1. 1장 1절에서 소개된 세 가지 국면으로의 시기구분은 이 그림 속에서 실질적으로 자명하게 나타난다. 생산 및 자본 양자 모두와 관련하여 성장률은 1차 세계대전까지 쇠퇴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후 상승하기 시작해서 1960년대에 정점에 도달하고, 이후 새로운 하강 추세를 보인다.
2. 이윤율 하락의 첫 번째 국면동안 커다란 파동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1870년대, 1890년대의 위기와 1907년 주변의 동요는 종종 일차적으로 ‘금융적’인 것이었다고 묘사되는데, 이는 그림5가 제안하는 것과 반대로 인식되기 쉽다. 생산과 축적이 이러한 파동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생산 성장률이 클 때, 자본 스톡 성장률은 상승한다. 우리가 19세기 후반의 구조적 위기로 파악한 이들 위기들 중 두 번째 위기는 가장 거대했고, 보다 장기적이었으며, 보다 심대한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합병의 물결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세기의 전환기에 나타난 엄청난 회복력이다.

(표4)

(표5)

전반적으로 4-50년 주기의 콘드라티예프 순환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기술과 분배, 축적, 성장으로부터 우리는 더욱 장기적인 운동을 읽어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축적과 성장은 쿠즈네츠(Kuznets) 순환을 연상시키는 20년 순환을 반영한다.
그렇다. 자본주의의 주기적 경향인 이윤율의 실질적 하락은 두 번의 구조적 위기를 낳았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이윤율 하락의 결과에 관한 마르크스의 설명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위기는 적어도 한번을, 어쩌면 두 번의 이윤율 회복 조건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에 관한 어떤 기계론적 해석에 세심하게 회피되어야 한다. 대공황은 그 자체로 원인을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세 위기들이 콘드라티예프 순환의 A,B 국면인 팽창과 후퇴 국면의 연속을 통해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구별될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위기들의 원인이 다를지라도, 주기적인 구조적 위기는 자본주의의 시기구분에 있어 종별적 특징을 갖는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세 가지 구조적 위기의 공통적 특징은 거대한 제도적 변형과 새로운 계급적 형세(지도력과 타협)의 조건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3.4 조절: 포드주의, 이전과 이후
포드주의이라는 통념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0여 년의 특징을 설명하려는 좌파 진영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 그것은 이 시기에 동시에 발생한 기술변화의 우호적 경로, 실질 임금의 상승, 케인즈적 정책들에 준거를 둔다. 이 시기의 종별적 특징은 유럽이나 일본 경제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라는 맥락 속에서 미국의 기술적 성취를 따라잡는 것은 특히 이들 나라에서 극적이었고, 자본주의의 역사에 관한 조절이론의 분석이 프랑스에서 발전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포드주의는 하나의 조절양식, 즉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체계의 기능적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제도들의 결합으로 분석되었다. 그것은 특정한 축적체제와 연결되었다. 조절양식의 연속적 변화에 관한 이론은 자본주의를 세 단계나 네 단계로 시기 구분하는데, 그러한 구분에서 전쟁과 거대한 위기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1.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자본주의를 경쟁 자본주의로 묘사하는 것은 대체로 전통적인 것이다.
2. 전간기는 이행기로 간주된다. 기술진보는 급속했지만, 실질임금은 노동생산성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상승하지 않았다. 이윤율과 이윤량은 과도한 수준으로 상승했고, 수요의 구조적 부족이 과소소비와 대공황을 낳았다.
3. 전후 제도적 틀, 특히 새로운 ‘임금관계’는 노동생산성과 임금의 연동을 보증했고 생산에 보조를 맞추어 수요가 증가했다. 이것이 포드주의의 시대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축적체제는 1970년대의 특정시점에 흔들렸는데, 이 속에서 이윤율의 쇠퇴와 ‘포드주의의 위기’가 발생했다(1970년대의 구조적 위기).
4. 포스트-포드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기로 규정되는데, 이로부터 새로운 금융적 축적체제가 출현했다(이것이 조절학파가 신자유주의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이 단계에서 주식시장은 과거의 임금관계 대신 적합한 수요 수준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10여 년 즉, 포드주의의 전성기에 대해 조절학파가 제공하는 설명은 많은 면에서 표준적인 것이다: 노동생산성과 실질임금의 급속한 성장, 국가 개입, 복지국가의 제도들... 포드주의는 기본적으로 기술유형과 분배에 준거를 두지만, 그러한 통념은 넓은 의미에서 케인즈주의를 포함하여 제시된다. 따라서 우리가 케인즈주의적 타협이라 부른 것도 이들의 분석 중 일부를 이룬다. 포드주의에 관한 토론은 단순한 용어법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10여 년의 종별적 특성, 1970년대의 구조적 위기,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시대 등에 대해 대체로 유사한 견해를 가진다.
문제는 세부적인 사실들이 아니라 핵심적 분석 속에 존재한다. 주요한 문제는 조절학파에 의해 수요에 부여된 역할(마르크스적 용어로는 ‘실현’이라는 쟁점,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위기의 분석에서 실현의 위기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에 관한 것이다. 그러한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1)과도하게 높은 이윤율과 그에 뒤따른 과소소비 속에서 표현된, 20세기 초 노동생산성의 급속한 성장과 완만한 임금 상승 사이의 통상적인 대비 (2)2차 세계대전 이후 임금과 노동생산성의 연동에서 기인하는 수요와 공급 사이의 포드주의적 조화. 우리는 이러한 분석에 경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며, 전간기의 문제와 전후의 종별성에 관한 분석에서도 이들과 다른 입장을 가진다. 이윤율은 1920년대 동안 상승하기 시작했지만, 그렇게 높지 않았다. 우리는 수요의 구조적 부족이라는 통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번영은 임금 소득자의 증가된 소비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전후의 이윤율은 1920년대보다 훨씬 더 높았다(그러한 상승의 대부분은 조세를 통해 국가로 이전되었다). 따라서 포드주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선택지가 개방된다.
1. 포드주의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 동안 급속한 기술적 진보와 실질임금의 급속한 상승의 동시적 진행에 준거를 두며, 그것은 단순히 묘사적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견해에 따르면, 케인즈주의적 타협뿐만 아니라 법인 및 경영 혁명의 상징으로 헨리 포드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이는 이러한 변형들의 내용과 기원에 관한 약간의 혼란을 낳는다).
2. 대안적으로, 그러한 통념은 특정한 분석적 내용을 가진다: 1920년대의 부족한 임금상승이 대공황을 낳았고 임금의 상승이 미국과 주요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경제의 성장과 안정성에 기여했다는 관념. 비록 포드가 수요 수준을 상승시키기 위해 임금을 증가시킨 것은 아니지만, 포드라는 명칭의 사용은 보다 적절한 것인데, 왜냐하면 기술적 변화와 분배가 쟁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공황의 원인에 관한 분석은 오류에 가깝다.
대체로 조절학파와 관련된 문제는 시기구분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경제이론과 관련된 것이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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