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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9.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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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가 남긴 예술인들

구정화 | 기자, 미술사
비엔날레가 남긴 21세기의 미술인

구 정 화 | 기자, 미술사

1970년 이후 출생자이자 미술사를 공부한 나에게 광주는 '역사적 현장의 도시'라기보다 광주비엔날레라는 세계적인 대규모 미술문화 축제를 여는 '예향의 도시'로 다가온다. 80년대 끄트머리에 발가락이라도 걸치고 있는 바로 위 세대들에게는 이런 사실이 경을 칠 노릇이겠지만, 그만큼 광주비엔날레는 지난 10여 년 간 미술계에 스캔들을(!) 일으키며, 수많은 문화권력자를 탄생시키고 화제를 뿌려왔다는 말이겠다. 특히 1995년 1회 비엔날레가 열리면서 '예향의 도시 광주'라는 수식어가 '혁명광주'를 제치고 식자들의 입에서 회자되더니만, 다시 매스미디어를 통해 굳혀졌는데, 이 점은 좀 더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의 끝쯤에서 나는 그 결론을 내리고 싶다.

문화산업과 광주비엔날레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대거 한반도에 상륙하던 1990년대 초반부터 미술계에는 내외적인 변화가 일었다. 대체로 미술계는 자본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면서 새로운 유행과 스타를 낳았는데 그 중심에 바로 광주비엔날레가 있다. 동아시아의 작은 지방도시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답지 않게 광주 비엔날레는 세계 유수의 작가들을 초청하여 그야말로 전지구적 미술문화의 현장을 날것 그대로 제공하였으며 적어도 1990년대 후반 남한 미술계에만큼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과 패러다임을 제공하였다. 물론 이러한 지각변동 뒤에는 문화시민이라는 자긍심을 부추기며 노력 분투한 광주 공무원들의 전략이 숨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광주비엔날레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리 감동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올해로 벌써 4회를 치르는 광주비엔날레는 전지구적인 미술인의 축제를 꿈꾸며 많은 자본과 인력을 투자해왔다. 그러나 오히려 1세계의 미술담론을 수입해서 팔려는 문화권력자들의 장삿속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는데, 실제로 그동안 본 전시 큐레이팅의 대부분에 1세계 큐레이터들이 위촉되었으며, 이들은 1세계에서 생산된 미술문화를 그야말로 화려한 스펙터클과 볼거리 위주로 제공해주었다. 물론 우리에게 있어 문화와 지식수입의 역사는 개화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문화산업의 시스템을 통해 수입된 것은 광주비엔날레가 본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산업의 영역에 속하는 비엔날레의 메커니즘은 단지 광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문화산업의 부흥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며 비엔날레 역시 문화자본을 배경으로 뛰어드는 1세계 문화지식인의 움직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상파울로 비엔날레나 베니스 비엔날레 같은 해외의 유명한 비엔날레 이 외에 1990년대 이후 3세계에서도 수많은 비엔날레들이 생겨나고 사라졌는데,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먹고사는 1세계 문화지식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비엔날레의 수적인 증가는 세계시민의 마인드를 견지한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국적을 불문하고 전 세계를 누비며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3세계 예술가들이 국적을 불문하고 세계시민의 마인드로 전 세계의 전시장을 누비게 된 데에는 또 하나의 숨길 수 없는 원인이 있다. 1970년대 이후 서구지식인들이 과거 자신들의 제국주의 정책을 통한 식민지배에 대해 반성하면서 3세계에 대한 관심이 증가된 것이다. 이들의 반성과 사유는 오리엔탈리즘을 거쳐 최근에는 후기 식민주의로 귀결되고 있으며 3세계에서는 또 다른 학문의 유행을 낳았다. 한편 이러한 이유에서 마치 종합선물세트의 한 부품처럼 3세계 미술인들은 다양한 활동기회를 제공받게 되었다.
}}

대안공간과 신흥미술인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 미술인들은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는 어느 지식인의 주장을 온몸으로 실현하는 이들로 1990년대에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한국에도 상륙하였다. 그리고 광주비엔날레는 때마침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거나 유학중인 젊은 세대들을 대거 집합시킬 수 있는 기폭제가 되었다.{{ 경제성장이 최고조에 이르던 1980년대에는 중산층 자녀들에게도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다. 미술계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학생들이 1세계로 유학을 떠나기 시작하였고, 우연하게도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부터 이들은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1980년대 투쟁과 헌신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았던 386세대들로 건전한 비판정신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보편적 세계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엘리트들이다. 세계를 무대로 뛸 수 있는 감수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미술계에 새로운 유행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 즉, 각종 비엔날레는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미술계의 인적 구성원의 변화는 1990년대 이후 늘어난 각 기업과 정부의 문화에 대한 전략적인 지원과 함께 미술계에 활발한 자극을 주었다. 특히 정부기금의 유입은 국내 미술계에 많은 지형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1990년대 들어 생기기 시작한 대안공간이 대표적인 예다. 1970-80년대를 전후해 이미 유럽을 비롯한 1세계에서 생겨난 대안공간은 상업화랑과 미술관이라는 기존의 제도 미술공간과 차별화 된 전략으로 현대미술을 선도해왔다. 국내에도 1990년대 들어 민중미술의 대표공간이었던 '21세기 화랑'이 '대안공간 풀'로 변모했는가 하면, 유학파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대안공간 루프'와 중진급 작가들이 후원하고 있는 프로젝트 다방 '사루비아' 와 같은 대안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최근 인사동에 문을 연 '인사미술공간'은 정부기금으로 운영되는 최초의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김대중 정부의 문화정책에 힘입어 정부기금 및 공적 기금을 통해 성장하였으며 실제 운영에서도 많은 부분 공적 기금(국민의 세금)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안공간이 기존의 제도권에 기대지 않고 자신들의 시각언어를 발언할 수 있는 장이 되길 희망하였으며, 실제 1990년대는 대안공간의 시대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젊은 미술인 들이 대안공간을 거쳐 성장하였다. 대안공간은 부르주아들의 아파트 벽을 치장하는 장식품으로서 미술을 거부하고, 미술관으로 대변되는 엄숙주의를 경계하면서 차별화 된 미술문화를 모색해왔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 대안공간을 보는 시각이 그리 곱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우선 대안공간이 실제 미술관이나 화랑과 같은 제도권으로 입성하기 직전의 과정처럼 인식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는 놀랍게도 대안적이다!) 대중과 작가의 소통이라는 계몽적인 지점은 애당초 포기한 자족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이미 대안공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유럽에서도 동일하게 지적되고 있다.

4회 광주 비엔날레의 실패

남한 미술계에서 대안공간의 유의미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건 올 3월에 열린 4회 광주 비엔날레다. 지난 6월 29일 마무리된 4회 광주비엔날레는 <멈춤>이라는 주제를 내세우며 서구 문화담론의 오퍼상이라는 기존의 1회-3회 비엔날레와 분명한 선을 그었다. 1980년대 '현실과 발언'을 통해 일찍이 지식인으로서 미술문화에 대한 깊은 성찰을 실천해 온 성완경 선생이 총감독을 맡았다. 그를 비롯한 외국의 공동큐레이터들은 가속되는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이에 대한 미술인의 역동적 전환에 초점을 두었다. 이들은 미국 중심의 현대미술을 부정하고 3세계의 여러 대안공간을 초대하여 예술의 진정한 사회적 역할을 반문하고 토론하였다.
그 취지만으로도 많은 관심을 모아온 4회 광주비엔날레는 그러나 전시장을 들어서는 순간 말 그대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는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각 지역의 대안공간들을 하나의 정자(亭子)-파빌리온(pavilion)으로 재현하고 전시장에 온 관람객들에게 사색의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기획자의 취지는 볼거리 위주의 미술에 익숙한 관람객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닫힌 공간의 나열로 다가왔다. 좋은(!) 취지와 상관없이 쏟아지는 비난은 너무나 다양하였는데 기존의 비엔날레를 통해 화려한 스펙터클과 볼거리에 익숙했던 관람객들은 이 진지한 비판적 지식인의 사유물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듯 하다. 물론 관람객을 위한 배려가 전혀 없는 무수한 텍스트의 나열과 혼란스러운 디스플레이가 전시공법상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저 부수고 뛰는 것만 일삼는 동원된(!) 어린 관람객들로 상처받은 작품은 며칠이 못 가 망가져, 전시장안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즐비하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예술가들의 머릿속(사유의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 용기는 가상하였지만 '60만에도 못 미치는 관객동원'(무려 60만 명이나!)으로 흥행실패(!)라는 뼈아픈 결과를 낳은 채, 총감독 이하 전시기획자의 자질을 의심하는 광주 공무원의 등쌀에 시달려야만 했다.

광주비엔날레의 비극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뼈아픈 실수는 어쩌면 이 영리한 진보적 지식인의 간단한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광주 비엔날레가 신자유주의를 향해 달려가는 한 지방도시의 문화정책과 1세계 문화자본이 만나는, 그야말로 불꽃이 튀는 치열한 생존의 장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방기한 것이다. 이쯤에서 비엔날레를 근대기 서구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로 이용되었던 박람회에 비교한다면 필자가 지나치게 역사주의에 함몰한 것이 되는가… 익히 알다시피 박람회는 철저하게 근대적인 시스템에서 개발된 것이다. 박람회는 서구의 침략을 문명의 전파로 오해하게 만드는 다양한 문화전략 중의 하나였으며 진귀한 물건들을 전시함으로써 3세계 지식인의 눈과 귀를 홀렸던 제국주의의 전략적 이벤트였다. 100년이 지난 오늘 문명이 문화로 바뀌었을 뿐, 박람회와 비엔날레의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하겠다는 나의 생각이 지나친 것일까.
자괴감에 빠져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광주의 공무원들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광주비엔날레를 치르고 있는 것일까.{{ 1회부터 4회까지의 비엔날레를 치르면서 드러난 문제점 중의 하나는 그 열악한 노동조건이다. 특히 공무원과는 별도로 매번 바뀌게 되는 총감독이하 큐레이터와 코디네이터들은 계약직이다. 3회 비엔날레 때 계약직 코디네이터들이 열악한 노동조건과 임금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비정규직 노동자의 결말이 그렇듯 별다른 해결을 내지 못하고 흐지부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제기를 했던 코디네이터들은 비엔날레가 끝나고 자연인으로 돌아갔을 때도 문제아라는 인식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고 한다. 실제로 4회 비엔날레에서는 행정직 공무원 한사람이 과로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열악한 노동조건은 화려한 비엔날레에 가려져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3회 비엔날레 때 한국작가들이 해외작가에 비해 부당한 지원금을 받는 것에 항의하면서 불참을 선언하는 사태가 있었는데 그나마 작가들이라 어찌어찌 해결이 되었던 걸로 알고 있다. 한국 미술계에서 큐레이터는 작가만큼의 고유성과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에 이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자신의 노동조건에 불만을 제기한다면 직장을 그만 두거나---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광주비엔날레를 무사히 치르고 나서 해결하자는 윗 상사의 회유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물론 광주비엔날레가 무사히 오픈되고 나면 이들의 계약도 끝난다.
}}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은 돈이다.
지방자치시대가 열리면서 각 지역의 공무원들은 부족한 예산을 보충하기 위해 문화산업에 혈안이 되었고 손쉽게 70년 대적인 발상으로 엑스포나 비엔날레를 개최하였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는 지방자치제도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광주는 상대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에 가장 늦게 적응하는 미술을 앞세워 매우 성공적인 첫 테이프를 끊었다. 특히 광주비엔날레는 정치적으로 늘 배제되었던 광주시민의 상실감을 예향의 도시라는 시커먼(!) 이데올로기로 현혹하여 과거의 광주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21세기 문화의 도시 광주를 만들고자 한 공무원들의 전략아래 탄생한 것이기도 하다. 이때 두 가지의 광주이미지는 모두 철저하게 날조된 이미지이다.
1회 광주비엔날레 당시 광주시 공무원들은 택시기사들을 모아놓고 다른 지역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예절교육을 열었다. 덕분에 어느 지역보다 친절한 택시기사들이 즐비하게 되었는데 그만큼 광주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대단했고 이 문화적 자긍심은 혁명광주의 어두운 그림자를 잊기에 충분히 작동하였을 것이다. 각 학교 학생, 유치원생을 비롯한 각 지역사회의 조직 동원은 120만이라는 경이적인 관람객을 기록하더니, 1회 비엔날레를 흑자비엔날레로 이끌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던 일이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 광주비엔날레는 공무원들의 얄팍한 문화마인드(말 그대로 문화산업이라는 돈벌이)와 세계화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문화권력자들이 벌이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하고 있다.{{ 실제로 광주비엔날레의 조직 시스템을 보면 전시행정과 예산의 집행은 광주시의 공무원들이 직접 하고 있으며 컨텐츠의 생산자인 큐레이터와 작가들은 운신의 폭이 좁다. 특히 관람객의 입장료로 운영되는 예산구조는 관람객 수에 따라 차기 비엔날레의 존폐를 운운하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

1회부터 2회까지 망월동 묘지에서 열린 통일미술제는 몇몇 미술인들이 혁명 광주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상기시키고자 만든 '안티 광주비엔날레'였다. 이런 노력들은 3회부터는 본 전시에 흡수되어 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4회 전시에서는 5·18 상무공원에서 총감독의 기획아래 <집행유예>라는 이름의 전시가 열렸는데 많은 호응과 관심을 모았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예향의 도시 광주'에는 늘 '혁명 광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맴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로칼리즘의 승리(전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는)라고 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즉, 혁명광주의 문제가 광주비엔날레에서 다루어질 때 종합선물세트의 한 부스라는 냉정한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1990년대 들어 실시된 정부의 유연한 문화정책으로 수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제도 안으로 흡수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 미술은 점점 더 대중과 멀어지고 자기 안에 갇혀 몸부림치고 있으며 더불어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혁명광주'는 결코 '예향의 도시 광주'와 한배를 탈 수 없다. 만약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는 돈벌이에 들러리를 서는 21세기의 비참한 예술가이거나 신자유주의의 문화전략에 포섭당한 지식인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3세계의 안방풍경까지도 철저하게 상품화되는 자본의 시대에 진정 예술의 몫이 무엇인지 .... 고민스럽기만 하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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