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고보조금 확대를 막아야 하는 여섯 가지 이유
민주노총 핵심사업을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것은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행위다!


이번 대의원대회에는 “건물(사무실, 교육연수원, 복지관, 상담소), 토지 등의 부동산 및 그 유지에 따른 비용을 받을 수 있다”(2001년 22차 대대 결정사항)는 기존의 민주노총 방침에 추가하여 “미조직 비정규직 사업에 한해 사용할 수 있다”는 국고보조금 확대 수령에 대한 민주노총 방침 안건이 상정된다.
국고보조금 문제는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노동해방과 평등사회 건설을 위해 투쟁하는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서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국고보조금을 받아야 한다는 측의 입장은 단순 명료하다. ‘재정은 없는데 미조직 비정규직 사업을 해야 하니 국고보조 받자, 국민 세금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 문제될 것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1. 재정자립은 민주노조운동이 자주성을 세우기 위한 기본원칙이다
노동조합의 재정적, 정치적 자주성의 중요성은 오랜 민주노조운동의 투쟁 역사를 통해 확인되어 왔다. 정권과 자본은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강력한 탄압을 펼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조합 간부에 대한 개별적 매수나 노조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매개로 회유책을 펴기도 했다.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굴지의 대공장 노동조합이 무력화된 배경에는 자금력을 이용한 자본의 광범위한 매수가 있었다. 임금 투쟁, 단협 투쟁의 결과로 전체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비용에 비해 일부 간부를 매수하는 비용은 수천, 수억을 준다하더라도 자본에는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005년 이수호 집행부 당시 강승규 수석부위원장 비리사건은, 노조간부가 열악한 택시조합원의 노동조건 향상을 위해 투쟁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면서, 그 대가로 사업자에게 이득을 취한 사건이었다. 이는 민주노총조차 자본의 매수전략으로부터 안전한 곳이 아님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 사건이다. ‘국민 세금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 문제될 것 없다’는 논리가 허용될 경우, 인건비와 일반사업비 등 모든 영역이 허물어지며 사실상 한국노총과 같은 어용화의 전철을 밟게 될 공산이 커질 수밖에 없다.


2. 자본의 착취가 민주노조운동의 투쟁 초점이다
보다 원칙적인 차원에서 볼 때,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잉여가치에 대한 관리 처분권을 자본이 독점하여 그 일부를 국가가 재분배하는 것이다. 민주노조 운동이 사회변혁을 통해 사회적 잉여가치 전체에 대한 관리 처분권을 가지려 하지 않고 쥐꼬리만한 재정에 목을 매는 행태는 운동의 원칙과 전략 차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3. 미조직-비정규 사업을 정부가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
민주노총의 핵심 사업인 미조직 비정규 사업을 국가 재정에 의존한다는 것은 해당 사업을 국가(지자체)에 보고해야 할 의무가 발생한다는 형식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상황에 따라 미조직 비정규 사업 자체가 좌초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실질적 차원에서도 큰 문제가 된다. 정부나 지자체 재정을 지원받아 진행하는 미조직 비정규 사업은 자본가와 정부 및 지자체의 간섭으로 사업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업방향은 민주적이고 전투적인 민주노조 운동은 아닐 것이다. 민주노총에서 그간 미조직-비정규 사업을 가로막았던 핵심 문제는 ‘재정’이 아니라 조직의 의지와 조합원들의 충분한 합의를 조직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재정을 받으면 비정규사업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인식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4. 어용적 관료적 간부를 양산하게 된다
정부나 지자체 재정을 통한 사업은 관료적인 조합간부만을 양산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업성과는 별로 없고, 그 사업방향이 모호한 채 보조금이 주로 관련 간부의 임금으로 지불될 때, 그 간부의 행태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한국노총 노조간부와 비슷하게 될 것이다. 민주노총이 정부나 지자체 보조금을 더 받아내자는 발상을 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노총과의 조직경쟁도 작용한 듯한데, 한국노총과의 조직경쟁이 노조운동의 발전으로 귀결되지 않고 노조관료 숫자 키우기 경쟁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5. 원칙이 한 번 무너지면 계속 후퇴하게 된다
지금은 “공공성과 사회성에 비추어 보더라도 국가재정을 활용하여 진행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는 미조직 비정규 사업비에 한한다고 하나 그 범위가 시간이 지나면서 확대되지 말란 법이 없어 보인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충분한 안전장치를 도입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민주노총의 자주성을 심각히 위배했다고 판단될 시’ 등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중집의 사전승인 절차나 집행심의 절차 역시 형식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2001년 대의원대회 결정의 범위를 지금 허물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이렇게 정부나 지자체 재정 의존도를 높여간다면 앞으로는 더 이상 자주성을 얘기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우려가 크다.

6. 지금은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자주적 재정확보를 확고히 할 때다
현재 민주노총은 2010년 타임오프제 도입과 2011년 복수노조 시행의 효과로 어용노조 설립, 노조 탄압, 중견규모 노조들의 이탈 등으로 의무금 납부비율도 현저히 낮아진 상태다. 그 결과 집행예산이 부족하고, 각종 소송비나 일부 임원 및 사무총국 활동가들에게 임금이 체불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민주노총의 처방은 몹시 우려스럽다. 민주노총은 한축으로는 직선제 투표권 부여와 관련하여 단위 사업장에서 산별노조·연맹에 조합비를 납부만하면 모두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단위 사업장에서 조합비를 납부하면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수용하더라도 산별노조·연맹의 민주노총 의무금 미납사유에 대한 중집의 심의권조차 규정하지 않은 것은 산별노조·연맹의 민주노총 의무금 납부율을 더욱 떨어뜨릴 우려가 존재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미조직 비정규직 사업과 같은 노조의 핵심 사업조차 노조의 자주적 재정확보가 아니라 국가의 재정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간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노조의 활동력을 보존, 확대하기 위한 민주노조운동의 ‘자주성’이라는 상식과 원칙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정권과 자본에 탄압 상황을 전조직적으로 공유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현장에서부터 조합비 인상, 기금확보 등 민주노총의 자주적 재정확보를 결의하도록 계획을 마련하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의 올바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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