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
정부는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 일삼는 관점에서 벗어나
여성의 건강권 및 인권 보장을 위한 실태조사를 실시하라
 
2017년 11월 26일, 청와대는 조국 민정수석을 통해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요구하는 청원에 대한 영상 답변을 게시했다. 오랫동안 계속된 '낙태죄' 폐지 요구와 23만 명의 청원이 모여 정부 차원의 검토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국민청원의 핵심인 ‘낙태죄 폐지’와 약물적 유산유도제에 대해 전향적 조치로 응답하는 대신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실태조사"를 시행할 것임을 예고했다.
 
이미 청원의 기대에 못 미치는 조치이니만큼, 예정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는 신뢰할 수 있고 역량 있는 연구진의 성인지적 연구를 통해 여성의 간절한 외침과 경험이 정책으로, 입법으로 실현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실태조사 준비 상황을 보면 정부가 과연 여성의 입장에서 신뢰할만한 조사와 연구를 실시할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입장과 관점을 고려하여 제대로 된 연구를 시행할 것을 요구한다.
 
임신중절을 “예방”하겠다는 정책 프레임을 전환하라
 
현재 공지된 보건복지부의 연구 제안서는 연구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전국 인공임신중절 실태파악을 통한 현실적인 정책수립 및 관련 정책 결정, 프로그램 마련 등에 필요한 근거자료 제시 2) 인공임신중절 사유별 분석 자료를 바탕으로 인공임신중절 예방정책방안마련 및 제도개선이다.
 
연구 제안서는 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임신을 중지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떠한 신체적·정신적 건강상의 위험에 놓여있는지, 여성의 건강권과 인권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담기 보다는 “인공임신중절 원인 분석을 통하여 인공임신중절 예방 정책 및 개선 정책을 제언(p.2)”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인공임신중절 예방 목적의 정부 실태조사는 결국 국가가 여성의 몸을 낙태죄로 통제할 수 있다는 관점, 여성의 기본권을 제약해서라도 임신중절을 ‘근절’하겠다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음을 우려케 한다.
 
우선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은 여성의 건강권과 인권에 대한 침해임에도 해당 연구 제안서는 관련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단지 인구 관리의 차원에서 여성의 몸과 출산을 도구화하려는 시각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보건복지부의 연구 제안은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임기 여성’이 임신을 중절하는 문제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초점을 두고 있어 기존의 논리를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새로운 정책의 초석을 위한 성인지적 조사를 실시하라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재생산권 및 재생산 건강에 관련한 정책적 기반은 미약하다. 저출산 시대의 출산정책 안에서 ‘아이를 낳을 여성’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 더욱 가혹하고 차별적인 상황이 놓인다. 해당 실태조사는 여성의 건강권과 인권에는 아랑곳없이 어떻게 출산을 하게 할 것인지만을 답습해왔던 기존 정책프레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23만명 시민의 정당한 요구에 따른 것이다. 본 연구는 여성의 삶과 건강, 사회적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의 기초가 되어야 하며, 이는 문재인 정부가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시민의 삶과 건강을 어떤 방식으로 정책화해낼 것인지에 초석을 놓는 주요한 시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인공임신중절의 문제는 결코 협소하고 단발적인 시야로 보아서는 안 되는 복잡한 사안이다. 현재 형법상 60년째 존치되고 있는 낙태죄와 모자보건법의 우생학적 사유, 모자보건법 상 허용되지만 합법적인 인공임신 중절을 건강하게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성폭력 피해자, 소파술(D&C)이 가장 많이 시행되고 있는 현실이 여성 건강을 복합적으로 위협하고 있음을 직시하여야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러한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 이 연구의 입찰대상 1순위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우려스럽다. 한국보건사회 연구원은 2017 <제13차 인구포럼: 주요 저출산 대책의 성과와 향후 발전 방향>을 개최, 저출산의 원인은 ‘비혼’이며, 따라서 저출산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혼 시장에서 이탈한 고학력 여성과 저학력 남성의 결혼을 위한 백색 음모가 필요하다는 요지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저출산 문제를 오랜 기간 다뤄온 기관의 정책적 관점이 ‘고학력’ 여성의 스펙(spec)을 제한하고, 결혼 시장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성차별적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성에게 좌절감과 무력감을 주었고 국민적 공분을 샀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15년에 수행된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실태” 보고서에서는 횟수, 시기, 이유 등에 대한 실태를 조사했지만 보고서의 결론에서는 인공임신중절에는 사회경제적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는 단 한 문장을 언급하였다. 또한 인공임신중절과 관련한 2010년 “인공임신중절 실태와 정책과제” 보고서에서는 무엇보다 “인공임신중절은 무엇보다도 발생자체를 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완전히 예방하기란 불가능 하다.” 때문에 “피임방법 의 보급과 함께 인공임신중절의 폐해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확산시키는 일 그리고 인공임신중절의 법적 제재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출산한 경우의 양육지원”을 정책 방안으로 제언하고 있다. ‘결혼을 하도록 하는 백색음모’와 마찬가지로 인공임신중절의 폐해를 알려야 한다는 수준의 관점의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여성의 건강권과 인권을 주요하게 고려한 성인지적 관점의 연구를 수행해갈 역량과 의지가 충분한지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정부는 낙태죄 폐지를 위한 청와대 청원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라
 
문재인 정부는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 간주하지 않는 정책, ‘여성의 삶’에 대한 정책적 개입을 통해 현 사회의 재생산의 위기를 해소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여성을 아이를 낳아야 하는 국가적 의무를 가진 존재로, 인공임신중절은 그저 예방되어야 하는 사안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의 연구는 현 정부의 기조와 양립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으로는 현 실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으며 다양한 사회적 조건에 놓인 여성들이 겪는 무수한 현실들이 배제될 것이 우려된다.
 
청와대가 여성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건강과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있다면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의 내용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청원의 취지와 청와대의 정책 방향의 전환을 담은 실태조사를 촉구한다. 전환적인 관점의 실태조사 없이는 여성의 몸을 범죄화하고, 여성의 인권과 건강권을 방치해온 역사가 되풀이 될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23만명의 청원이 사회에 반영될 수 있도록 실태조사를 비롯한 정부의 행보를 지켜볼 것이다.
 
 
2018년 3월 14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건강과대안, 녹색당, 불꽃페미액션, 사회변혁노동자당, 사회진보연대, 성과재생산포럼, 장애여성공감,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페미당당, 페미몬스터즈,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